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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林茂)가 말하는 ‘암벽등반’
조장빈·이강승(譯) / 근대등반사팀
Ⅰ. “外 1名” 그리고 임무(林茂)
경기고산악부 회지인 『라테르네』(5호, 1956)에, 김정태가 쓴 일제강점기 적설기등반사를 보면 “1931年 1月 日人 飯山達雄 外 一名 金剛山 스키初登山”라고 최초의 등반을 기록하고 있다. 초등정에도 불구하고 ‘외 1명’이라 기록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이 ‘외 1명’은 임무이고 그는 전년도(1929~30년) 첫 적설기 금강산 비로봉 원정대의 리더였고 1931년 1월 1일 외금강 코스로 이이야마와 함께 비로봉 초등정을 하였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이 땅에 암벽등반은 물론 적설기 등반도 그의 첫걸음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임무의 존재를 알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도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이다. 다음은 필자가 확인한 자료로 추정·정리해 본 그의 약력이다.
임무의 약력
임무(林茂, 하야시 시게루, 1906?~?). 조선인. 근대등반의 개척자.
조선인 부친과 일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 일인 양자로 입양되었고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에 유학하였으며 당시 일본 최초의 암벽등반 단체인 R.C.C. 회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6년 경 귀국하여 동경전기주식회사(東京電氣株式會社)에 근무하며 스키와 암벽등반을 하였는데, 자일 파트너인 이이야마 다츠오(飯山達雄)와 서울근교 암봉의 보현봉 일대 비봉, 도봉산 자운봉, 만장봉 등을 등반하였다. 1929년 10월 아처(C. H. Archer)와 북한산 인수봉 후면(지금의 인수C 코스)를 등반하였으며, 이 등반을 두고 당시 산악계에서는 인수봉 초등정으로 여겼다. 이듬해 봄 이이야마 다츠오와 같은 코스로 제2등을 하고 다음 주에 정면벽 코스(지금의 인수A 코스)를 개척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처는 1931년도 『알파인저널』의 등반기에서 “내가 그를 만나기 전에도 어떤 봉을 개척등반한 바 있는 능력 있고 첨예적인 클라이머이다.”고 그의 등반 능력을 높이 샀다.
1930년 아처와 서울 근교의 북한산 인수봉, 만경대와 도봉산 만장봉, 주봉, 우이암 개성 천마산의 승거봉과 인달봉을 등반하였으며, 1930년 박석윤 일행에 의해 금강산 암벽등반이 있기 전인 1927년(또는 1929년)에 금강산 발봉, 수정봉, 관음봉에서도 암벽등반을 하였다.
그는 1929년 첫 적설기 원정등반 리더로, 당시 경성의 일인 알피니스트 모임인 (舊)조선산악회 회원을 이끌고 금강산 비로봉 등반을 나섰으나 등정에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신만물상, 삼선암 설벽을 초등반하였고 등반기가 일간지에 연재되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등반기에 그는 체격이 비대하여 러셀을 상당히 힘들어 했고 술에 약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정황상 한국말을 할 줄 몰랐을 수도 있어 어려서 일인 양자로 입양된 것이 아닌가 한다.
1932년 1월 단독으로 적설기 금강산 비로봉 횡단 스키등반을 나섰으나 폭설로 실패하였고 이후 이 비로봉 횡단 스키등반가 개발되어 해마다 "은령행"(銀嶺行) 스키투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33년 초 마상산(麻桑山) 스키등반 중 대퇴부 골절로 부상을 당하여 철도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산을 떠났고 이후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산악단체 활동으로는, 1930년 조선스키구락부(朝鮮スキー俱樂部)가 설립된 이듬해 이사를 역임하였고 1931년 10월 조선산악회 창립에 (舊)조선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의 글로는 당시 월간지인 『조선과 만주』(1931. 8)에 발표된 「록클라이밍 경성부근(ロツク·クライミング-京城附近)⌟(1931. 8)과 그의 산악관을 엿볼 수 있는 일간지 신문의 칼럼 등 총 3편의 글이 발굴되었다. 그는 두 편의 글에서 자신의 소속을 R.C.C.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글 세 편은 당시 암벽등반코스 안내와 자신의 산악관 및 암벽등반에 대한 의미‧역사‧등반기술 등을 망라한 글이다. 그가 ‘등산의 의미’에 대해 쓴 글에서 자연과의, 산과의 일치 융합을 말하며 "나에게 있어서 산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등산은 산을 오르는 과정에 힘을 다한다는 것이지 결코 정상을 올라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닌 것을 단언한다."고 등정보다는 등반의 과정을 중시하였다.
임무는 조선인으로 일본 유학 중에, 1924년 설립된 일본 최초의 암벽등반 모임인 R.C.C. 회원으로 근대등반을 경험하고 1926년 경 귀국 후 아처일행과 1929년 10월 북한산 인수봉 등반과 서울근교 암봉에 암벽등반 코스를 개척하여 ‘바윗길’을 열었으며 그 해 12월 말 (舊)조선산악회 금강산 비로봉 적설기 첫등반으로 적설기 등반의 첫걸음을 내딛은 우리나라 근대등반의 개척자다.
등반기록
구분 | 대상지 | 등반연도 | 세부내용 |
암벽 등반 | 북한산 인수봉 - 후면(현 인수C 코스) - 정면벽(현 인수 A코스) | 1929. 10. 1930. 봄 | 첫 등반은 아처와 인수봉 후면로 등반하였고 제2등은 이이야마와 등반하였으며 이 때 인수봉 정면벽도 개척 |
북한산 만경대, 도봉산 만장봉, 개성 천마산 | 1930. | 아처와 개척등반 | |
북한산 보현봉, 비봉. 도봉산 자운봉, 선인봉, 오봉 | 1926~1931. 8월 이전 | 시기는 정확치 않으며 일부 단독, 대개 이야마와 등반 | |
도봉산 우이암 | 1931년 봄 | 이이야마와 초등 | |
금강산 오봉산 외 | 1927(또는 1929) | 오봉산, 발봉, 수정봉, 관음봉 초등 | |
적설기 등반 | 금강산 비로봉 | 1929. 12.~1930. 1. | 최초의 적설기 등반, (舊)조선산악회 원정대로 임무가 리더 |
1930. 12.~1931. 1. | 1931년 1월 1일 이이야마와 외금강 코스로 초등(스키등반) | ||
1932. 1. | 비로봉 스키횡단 등반(단독등반), 폭설로 실패 | ||
기타 | 1929. | 이이야마와 백두산 천지내부 첫 등산 |
*등반 기록의 1차 사료인 이이야마나 아처의 기록에 등반 연도와 자일파트너 등의 세부 기록이 검증되지 않은 추정 기록임을 감안하기 바라며, 이에 대해 개별 등반 기록의 검토가 있을 예정이다.
이이야마는 그가 서울의 일인들이 아니라 아처에게서 암벽등반을 배운 정통파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아처는 임무는 자신을 만나기 전에 이미 서울근교 암봉을 초등한 바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의 R.C.C 활동이 바탕이 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고, 이는 우리나라 암벽등반이, 임무에 의해서 일본 R.C.C.의 경험이 아처와 등반으로 길이 열린 것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암벽등반의 시작이 일본과 큰 시차가 없이 이루어진 것인데, 일본과는 달리 서울 가까이에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 등의 훌륭한 등반대상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무는 지금까지 한‧일 혼혈인 전기기구상으로 사회적 신분이 낮고 이이야마의 등반 파트너로 그의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그려졌으며 이이야마의 간단한 전언 외에 이이야마를 포함한 한‧일 양국의 당시 산악인으로부터 그에 대한 진지한 언급이 없었거나 부정되어지고 내쳐져 주변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알피니즘’에 대해 충분한 지식과 등반 능력을 갖춘 ‘알피니스트’였고 이 땅의 ‘알피니즘’이 그에게서 비롯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임무의 등반 사진
만경대의 선바위(임무는 이 바위도 우이암이라 기록)와 선인봉 정면벽 하강
Ⅱ. 임무(林茂)가 말하는 “암벽등반”
암벽등반에 대한 임무의 글은 당시 ‘京城日報’에 게재된 글이며 이 글에서도 자신의 소속을 ‘R.C.C.’라고 적고 있다.
등산자가 가진 두 가지 상반된 기분
등산이라고 하면, 대체로 우리들이 산을 마주하고 등산을 생각할 때에 두 개의 상반된 마음이 솟아날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감상적인 산행, 즉 자연의 품에 안겨보고 싶은 그런 마음, 자연과 일치가 되어 융화하고 싶다는 생각일 것이다. 이러한 경건한 기분은 산을 오르는 사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분이다. 혹은 그 반대로 처음 우러러 본 장엄한 산봉우리의 산정에 서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이것은 누구나 알겠지만 그 산 위에서 서보고 싶은 마음에 바로 산을 정복한다던가 하는 일종의 우월감에 솟구치는 기분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책에서 본 듯한데, 마키 유우코(槇有恒) 씨가 아이거를 처음 올랐을 때 “일본의 산에서는 도저히 그런 기분이 들지 않지만 저 유럽 알프스의 산을 보면 왠지 산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온전히 그 기분이다. 무엇을 정복한다는 것이 아니라 왠지 정말로 산에 안겨보고 싶고 그것을 품에 안아보고 싶은 것 같은 기분은 결코 값싼 우월감과는 다른 경건한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된다. 이 본성이 인간의 발전적인 의지와 정신에 의해 그런 마음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이와 같은 기분에 의해 이루어지는 등산은 산에 대한 새로운 도전, 소위 미등정의 산정을 오르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전에 올랐던 사람과 같은 루트로 올라가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올라본 적이 없는 다른 루트로 산의 정상에 오르거나, 혹은 무서운 폭풍우나 눈보라를 만나 그 위험과 곤란에 위협받으면서 자일을 ‘생명의 줄’로서 사용하는 어려운 등반에서 얻을 수 있다. 이는 값싼 정복욕이나 우월감으로 평가해야 할 것은 아닌듯하며 그 속에는 산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내재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 두 가지 기분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신적으로 서로 혼재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사람이 올라간 적이 없는 루트로 오르는 이른바 피크헌팅은, 유럽의 등산에서 보듯이 이미 대부분의 산봉우리가 등정된 오늘날 초등정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시대는 끝이 났다.
원래 등산의 시작은 가장 안전한 코스로 산 정상에 서는 방법을 택하는데, 그 루트는 등반 초기 시대에는 많은 경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쉽게 능선으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많은 경험을 하였다. 그 후에 ‘록클라이밍’이라는 기술을 응용하여, 지금까지 계곡으로부터 올랐던 방법에서 지금은 능선을 통해 암벽등반으로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마키씨의 아이거 또는 카나디안 록키의 등산 그리고 또는 마츠카타(松方三郎) 씨가 남진 값진 등반기록은 모두 이 암벽등반 기술로 성공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계곡 등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비교적 안전하고 쉽지만 능선을 올라 정상에 오르는 것은 어려움과 위험이 항상 겹친다. 하지만 그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산 정상에 섰을 때의 기분은 평범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산 정상에 섰을 때의 기분과는 아마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어려움을 겪고 곤란해질수록 우리가 산 위에 섰을 때의 그 감명은 더한층 깊고 더욱 귀한 것이 아닐까.
록 클라이밍의 역사
전반적으로 암벽등산이라는 기술 등에 대해서 외국 서적 등을 통해 충분히 연구되어 있지만, 자일(로프) 핸드링이라고 하는 이론의 체계를 생각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물론 옛날부터 암벽등산은 실제로 있어왔고 거기에 과학적인 이론이나 체계를 세워서 한층 더 연구한 것이다. 이러한 암벽 등산이 산에 응용되게 된 것은 앞에 말한 대로 알프스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 정상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고, 산정의 능선을 타고 산에 오르는 방법으로 실행됐다. 즉 이러한 방법으로 많은 등반 성과를 남긴 영국의 등산가들에 의해서 암벽등산이라고 하는 하나의 등반기술이 만들어졌다.
암벽 등산 중에는 자일 핸드링이라고 해서 로프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고 이는 제일 큰 특징 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등산할 때 로프를 사용하여 셋 혹은 다섯 사람이 서로의 신체를 묶어 조를 짜서 오르는 방법. 즉 공동동작(하나의 조가 공동 동작으로 상호협력)으로 서로 도우며 곤란을 타계하고 위험을 제거해서 오르는 것이 로프를 사용하는 기술의 정신이다.
전반적으로 산에서 로프를 사용한 것은 암벽 등산이 시작되고 나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를 조사해 보면 매우 오래 전의 일로 1600년대에는 이미 이 로프를 암벽 등산에 사용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당시 로프의 사용은 빙하를 횡단하는 경우에 가장 효용을 발휘하였다. 빙하에는 크레바스라고 하는 곳곳에 끝을 알 수 없는 빙하의 갈라진 틈이 무수하게 많고 그 갈라진 틈으로 빠지면 목숨을 구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빙하의 갈라진 틈이 보일 때 지나가는 것이라면 위험한 곳을 피하든가 다른 방법을 취하지만 높은 고산(高山)이라면 한 여름이라도 눈이 있고 갈라진 틈 위에 눈이 쌓여 밑에 빙하의 틈을 숨기고 있는 이른바 히든 크레바스(Hidden Crevasse)가 있다.
물론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가이드를 선두로 해서 지형에 능숙한 경험으로 눈 위의 변화가 있는 부분이이나 움푹 들어간 곳이나 혹은 빙하의 습성을 잘 알고 있어, 어느 곳이 매년 빙하의 변화를 초래하는 장소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가이드와 동행하면 비교적 이런 종류의 위험도 적고 안전하게 지나 갈 수가 있다. 그래도 때에 따라서는 눈으로 숨겨진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 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로프를 사용한 것이 등산에 로프를 사용한 최초이다.
1787년 드 소쉬르(de Saussure)는 사람이 몽블랑을 첫 등반했을 때 이 자일을 사용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소쉬르는 서쪽 끝 제네바 근처 레만호반의 작은 마을 콘체스(Conches)의 명가에서 태어나 현 제네바 대학의 전신(Academy of Geneva, 현 쥬네브 대학의 전신)의 교수로서 철학, 수학, 박물학의 조예가 깊었고, 말년에는 쥬네브 시민들로부터 추천받아 정계로 들어가 스위스 정부를 프랑스 혁명의 와중으로부터 구한 비범한 수완을 가진 정치가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침저녁으로 호반에 비추는 알프스의 웅장한 배경을 바라보며 오랜 세월 동안 점차로 열렬한 자연 예찬자가 되어 산악에 대한 애호심은 진지한 학문과 어우러져 당시, 아직까지 세상 사람이 산악에 대해서 하등의 감상을 가지지 않았던 시대에 재빨리 제네바의 가까운 산들의 여행을 시도하였다. 1760년에 처음으로 샤모니를 방문하여 몽블랑의 위용을 접하고 깊은 애착을 느꼈다. 그러나 거기에는 등산에 대해 이해를 가진 자가 없었으므로 그는 한 가지 안을 생각해 냈다. 몽블랑 등산을 성공하고 또한 등산로를 발견 한 사람에게는 많은 현상금을 주는 취지를 샤모니 계곡에 있는 마을에 게시했다.
2년 후, 샤모니의 사냥꾼인 피에르 시몬(Pierre Simon)이라는 사람이 제앙(Géant)빙하와 보송(Bosson)빙하 두 곳에서 처음으로 등산을 시도해 보았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단념했다. 그리고 소쉬르 자신도 1761년 재차 샤모니를 방문 빙하탐구를 겸한 등산로 정찰을 하였고 1767년 및 74년 79년, 85년, 87년 5회에 걸쳐 샤모니로 와서 등산을 시도 했을 때 자일을 사용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자일 사용은 현재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른바 공동동작이나 상호부조라고 하는 모토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는 20명에 가까운 조직으로, 먼저 로프 파티가 먼저 오르고 그 뒤를 일행이 연달아 올랐다. 이는 선두의 사람은 로프로 서로 묶은 후에 먼저 5척이나 3척정도 진행하여 괜찮다고 판단되면 뒤 사람이 진행해 가고 혹시나 선두에 선 사람이 눈으로 덮혀 숨겨진 갈라진 틈으로 떨어지거나 하면, 2번째의 사람이 추락을 저지한다고 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지참했던 바가 있었는데 그것은 조를 이룬 대원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홀드바라는 것이 따로 있어 이른바 인간사다리를 만들어 인간 사다리의 사람이 서로 앞의 상황을 살펴본 후 테스트를 거쳐 위로 올라가는 방법이었다.
어느 유명한 영국의 산악도서 배드민턴 라이브러리(The Badminton Libray) 중에서 덴트(Dent)라고 하는 사람이 등산 테크닉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몽블랑으로 올랐을 때는 지금의 현실과는 동 떨어진 그림이 있다. 7척에서 8척정도의 막대가 있어 앞에 한 사람, 뒤에 한 사람 그리고 그 안에 소쉬르가 있고, 3인이 막대기로 서로 연결하여 올라간 곳이 있다. 이것은 요컨대 로프라고 하지만, 선두가 만약 떨어져도 막대기로 지탱할 수 있다고 하는, 즉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스틱을 대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는 로프까지도 가이드가 대신했다고 하는 매우 독특한 고전적인 발견도 보였다.
이 로프를 서로 묶어 오르는 정신, 이른바 상호부조와 공동동작의 정신으로써 로프의 사용은 예컨대, 로프로 세 사람이나 다섯 사람을 하나로 서로 묶어 리더가 선두에 서서 오른다. 가령 선두(리더)에 선 ‘갑’이 위로 서서히 올라가고 그 아래의 2번째(을)는 올라가는 갑을 도와 만일 갑이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을 경우에는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을 주로 실행한다.
이렇게 해서 선두이 갑이 1척 오르면 1척만큼 로프를 늘이고 다시 2척을 오르면 2척만큼 느슨하게 하면서 오른다. 즉 이 로프의 길이와 선두로 가는 갑과의 거리는 항상 같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두의 ‘갑’이 2척 올랐을 때, 실수로 발을 헛디뎠을 때, 로프는 아래의 ‘을’이 가지고 있으므로 “을”을 중심으로 상하 3척씩 6척만 아래로 떨어지므로, 결코 그 이상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후에 두 사람 중 실제로 한사람만이 먼저 앞으로 나아가 이윽고 선두의 갑이 비로소 안정된 발판에 도달하면 다음에 비로소 을이 올라간다. 갑은 을이 올라오는 것에 맞추어 밧줄을 걷어 올린다. 이 경우에 로프를 급하게 끌어 올리거나 급히 느슨하게 하거나 하지 않고 로프를 쥐고 아래의 사람이 1척 오르면 1척, 2척 오르면 2척만큼, 반응이 올 정도로 로프를 위에서 걷어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을이 미끄러져도, 손반응이 있는 정도까지 걷어 올라 있으므로 곧바로 저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안전한 발판에 도달했다면, 다음은 마지막 병이 오르기를 시작한다. 이것도 역시 전과 같이 위에 있는 사람은 결코 끌어당겨 올리지 않는다. 즉 이럴 때 갑자기 끌어 올린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미끄러지게 하거나 혹은 손잡을 곳을 놓치거나 하는 우려가 있으므로 누구나 어느 때라도 저지할 수 있는 각오로써 이 방법을 강구하면서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대체로 곤란한 장소에서 사용하는 자일 사용법이지만, 산의 전문 용어로서는 이것을 ‘안자일렌’이라고 한다.
경성에서 우리들이 이런 로프를 가지고 산에 갈 때에는 “어라, 저런 밧줄을 가지고 가서 어떻게 사용하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높은 나무에 밧줄을 걸어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려 하는 것이 아닐까?”, “맞아 틀림없이 위험한 곳이든지 어느 곳에 밧줄을 묶어 두고 내려 올 때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말을 전차나 기차 안에서 자주 듣곤 했다. 틀림없이 이렇게 상상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리도 아니지만, 한번 로프라고 하는 것을 연구하게 되면, 거기에는 자연에 합당한 기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외에 위험한 암벽만이 아니라 평이한 산등성이 암릉 같은 곳에서도 역시 로프를 서로 묶고 간다. 그 경우에는 갑이 선두로 오르고 적당한 장소로 가고 나서 을이 오르거나 하는 방법이 아니라 서로 로프로 신체를 서로 묵어 3~5인이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이 방법은 혹시나 양측이 깊은 골자기나 좁은 암릉 같은 곳에서 만일 미끄러졌을 경우에는, 예를 들면, 갑이 좁은 암릉산 옆으로 떨어졌을 경우에는, 뒤에 있는 2번째 3번째의 사람이 절제 절명의 상황이 되므로 자신들의 몸을 그 반대측의 오른편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넘어져서, 좌우가 마치 시계추처럼 되어서 미끄러진 사람을 돕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로프를 서로 묶어서 함께 걷는 방법은 주로 오르기 어렵지 않은 곳에서 사용한다.
크랙 클라이밍, 플라이 클라이밍, 침니 클라이밍
초심자에게 암벽등반은 어떠한 방법으로 오르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 가장 특색이 있는 기술 중 1~2가지를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소개해 본다. 먼저 크랙 클라이밍(프리 클라이밍)과 침니 클라이밍이 있다. 크랙 클라이밍이라고 하는 것은 갈라진 바위틈을 이용해서 오르는 것으로써 예를 들어 병풍과 같은 절벽이 있다고 가정하고 이것을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손발이 걸릴 좋은 곳이 적다고 생각 하겠지만, 잘 살펴보면 때로는 바위층의 위 아래 또는 비스듬히 갈라진 여러 층에 손과 발을 끼워 넣어 갈 수 있고 게다가 그 곳에는 5촌(寸)이든가 1척이든가 갈라진 틈이 있이 있는 바위가 곳곳에 있어, 그 갈라진 틈 위까지 나아가면 몇 개의 발판이 좋은 곳도 있다. 이 바위의 갈라진 틈과 발판을 이용해서 오르는 것이다. 그 때에는 반드시 서로 로프를 묵어 공동동작과 상호부조의 방법으로써 오른다. 경성 부근에서는 우선 북한산의 인수봉을 제일로 해서 만경대, 보현봉과 같은 이러한 곳이 클라이밍 하기에 최적한 장소이다.
침니 클라이밍이라고 하는 것은 갈라진 바위의 크기가 5척 정도나 긴 것은 60척이나 되고 폭은 1척에서 2척 혹은 3척 정도 있는 암벽 틈을 침니라고 칭하며 이곳은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오르는 것을 할 수가 없다. 즉, 그 빈 공간에 신체를 지탱하면서 등반 해 가는 것이고 그 갭이 점차로 커짐에 따라 먼저 등과 무릅(Back & Nee)을, 다음에는 등과 다리를(Back & Foot)를 더욱 위로 진행하고 나서는 다리와 다리, 손과 손을 응용하는 사이드 바이 사이드라고 하는 방법을 나누어 사용하면서 올라가는 것이 이른바 침니 클라이밍이다.
또한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위면을 횡단하려고 할 때, 폭이 좁은 틈이 깊이 5, 6도 단면사이, 7,8도 혹은 5,6도정도 누워있는 곳을 이용해서 옆으로 건너기(핸드 트레바스)라고 해서 옆으로 건너서 간다고 하는 방법도 있다. 그 경우 결코 손으로써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팔과 무릅, 다리를 계속해서 옆으로 천천히 건너 가는 방법, 혹은 켄(ケン ト) 트래바스(Traverse)라고 해서 이마 부분을 대고 혹은 스토믹 트래바스(Stomach Traverse)라고 해서 포복으로 기어가는 방법, 혹은 소위 플라잉(獨: freiwillig) 클라이밍이라고 하는 방법도 있고, 또한 손끝이나 손톱으로 교묘히 이용해서 올라가는 것 등도 기술상으로는 가능 하다고 한다. 또한 이밖에 여러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런 아크로바틱한 것은, 절대절명의 경우가 아니면 그것을 용이하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단지 그러한 기술도 있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상기 클라이밍 중에서 침니 클라이밍(굴뚝 오르기), 플라이 클라이밍(獨: Frei, 포복 오르기) 등은 경성 부근에서 충분히 연습할 수 있는 장소가 많다.
우선 도봉산의 만장봉, 선인봉, 자운봉, 보현봉 등 하루 종일 즐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그리고 암벽등반에는 여러가지 어려운 기술이 다수 있지만, 이러한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가서는 안된다. 특히 바위 혹은 산에 익숙하지 않는 초심자가 이런 것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별도의 보조 로프를 몸에 묶어 자칫 실수로 풀어지더라도 별도의 로프가 묶인 상태로 해서 차곡차곡 연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암벽등반의 여러가지 방법, 기술이 있으며 그런 것도 물론 필요는 하지만 유럽 혹은 캐나디안 록키 등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작은 산장에서 신체를 로프를 서로 묶은 채로 5시간이나 10시간 동안 로프를 풀지 않고 격하게 연습하는 것도 있는 듯해서, 반드시 산을 올라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경성 부근 혹은 금강산에서 좀 더 크게 연습을 시도해 보는 방법도 좋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로프를 이용한 하강법
암벽등산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한없는 기쁨을 느끼는 것은, 굳이 글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보는 것 자체가 전율 할 것 같은 암벽을 확실한 기술을 가지고 한보 한보씩 아무런 불안도 느낄 것 없이 하산하는 것이다. 지금 가령 절벽을 하강 하려고 할 경우, 자기 자신을 확보(보호)하기 위해서 하나의 자일을 높은 암각(巖角)과 같은 곳에 각각 준비 해 둔 슬링을 걸어 일렬로 하고 2개의 로프를 하나로 해서 하강하는 방법인데 너무 어려운 이론은 빼도록 하고 간단히 언급해 본다.
로프을 사용하는 하강법은? 1. 다리를 제동하는 하강법 2. 무릎(대퇴부)을 제동하는 하강법 3. 목을 제동하는 하강법 4. 어깨를 제동하는 하강법의 4가지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도 다수가 있지만 먼저 기술한 이 4가지를 중심으로 2번, 3번, 4번을 상세하게 기술하자면, 무릎하강법(Schenkelsitz)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한쪽 무릎제동 하강법과 양쪽 무릎제동 하강법이라는 것이고, 양쪽제동 하강법보다는 한쪽제동 하강법이 익히기 쉽고 또한 연습하기 쉬운 점으로 보아 여기서는 한쪽 무릎 제동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암벽, 혹은 낭떠러지에 뾰족한 바위 모서리에 걸어 내린 2개의 로프를 하나로 하고 하강하는 방향을 앞으로 한다. 먼저 로프를 양쪽 무릎 사이로부터 대퇴부 안쪽으로 통하게 한 후, 왼쪽 대퇴부를 한번 깊숙하게 친친 둘러 감아 그 로프의 말단을 왼손으로 쥐고 반대측의 상방(上方)으로 부터 내려와 있는 로프를 오른손으로 머리주변의 높은 곳에서 잡고 양손으로 끌어당기며 양손 사이의 로프를 팽팽하게, 느슨하게 하면서 하강 속도를 자유자재로 가감하는 것이다. 가장 이 방법은 제일 확실하며 다른 방법에 비해 익히기 쉽다.
목 제동 하강법
높게 우뚝 솟아 쏟아지듯 한 암벽을 로프로 하강할 경우, 그 거리가 길어서 도중에 다소라도 발 디딜 만한 바위 모서리가 없고 신체를 친친 둘러 감아 하강할 때, 로프가 격하게 사지를 조여 버려 육체를 파고들어 오는 듯 사용하는 방법이다. 위로부터 내려져 있는 2개의 로프를 양손으로 매달리고 그 로프를 가랑이 전방(前方)으로부터 엉덩이를 회전시켜 몸 앞을 대각선으로 통하고 이마로 회전시켜 상의 옷깃을 세워 양 어깨로 로프를 제동하면서 하강하는 것이다.
어깨 제동 하강법
어깨 제동 하강 법을 거행할 때에는 다리, 발바닥을 문질러 발로 버티어 신체 중심이 벼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로 두는 것이 필요하다. 이 방법을 둘로 나누어 갑과 을로 설명한다.
갑은 2개의 로프를 먼저 오른손으로 매달리고 그 로프를 가랑이로부터 등으로 몰며, 왼쪽어깨로부터 내려와 있는 로프를 왼손으로 가슴 앞에서 잡고 아래 방향으로 늘어뜨린다. 이 때 양손 사이로 쥔 로프와 어깨로 제동하며 체중을 지탱하면서 하강하는 것이다. 을은 2개로 된 로프를 먼저 양손으로 쥐고, 가랑이로부터 배후로 회전시키고, 어깨 앞쪽으로 걸어 아래로 늘어뜨린다. 이것은 가랑이, 등, 어깨로 로프를 제동하면서 하강하는 것이지만, 특히, 발바닥이 끊임없이 절벽으로 접하게 되고, 또한 암벽도 다소의 경사도 있는 곳에서 사용하지만 발은 될 수 있는 대로 벼랑에 직각이 되도록 해서 실행한다.
아직 더 많은 다른 방법이 있으며 이렇게 쉬운 일인 듯이 이야기는 했지만 용이하게 사용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단지 이러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뿐이다.
암벽등산의 심리학적 고찰
원래 록클라이밍의 이론이라고 해도 요컨데 그것을 후에 이론이나 이유를 붙인 것이고 알프스를 보더라도 그 주변의 가이드들은 거의 선천적으로 어느선까지는 암벽등산의 이치를 자연히 알고 있다, 그것은 영국 사람이 여러가지 연구를 해서 이론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론 보다는 먼저 제일 먼저 기술 및 암벽에 익숙해지는 것, 바위를 보는 안목을 충분하게 기른다고 하는 것, 즉,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록클라이밍 요령이라고 하는 것은 기술도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바위를 보는 안목을 길러 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암벽을 보더라도 어느 곳에 발 디딜 곳이 있는지, 이 바위는 무른가 혹은 견고한가라고 하는 것은 많은 경험을 쌓는 것으로써 한 눈으로 감별할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실마리, 단서를 찾고 동시에 그것을 이용하여 위로 올라간다. 즉, 가장 좋은 경험이라고 하는 토대를 바탕으로 해서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또한 자연스러운 방법일 것이다.
더구나 이 바위에 익숙해지는 것도 어렵게 이야기한다면, 심리학상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최근 영국에서 발간된 서적(The Rucksack Club, 조오네아르)에는 사이코로지이 오브 클라이밍(Psychology of Climbing, 암벽등산의 심리학적 고찰)이라고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몹시 귀중한 연구일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절벽이 있다고 하자. 거기에 사람이 서 있다. 높이가 10~20미터라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만약 높이가 50~100미터의 절벽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거의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특히 천에서 천오백 척에 서는 것이라면, 같은 조건하에 있더라도 아래가 대단히 깊다는 것을 느끼고 자연히 다리가 후덜덜 거리게 되는 듯한 것은, 확실히 심리학상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위에 익숙한 암벽등산이라면, 그런 절벽에 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등반을 할 수 있다고 하므로, 우선 이런 경험을 쌓는 것이 가장 필요 할 것이다.
이러한 암벽등산의 심리학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흔히 아이들이 지붕 끝 등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걷거나 놀거나 하는 것을 흔히 본다. 우리들은 대단히 불안감을 느끼고 조마조마 하지만, 실제 아이들은 아래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안심하고 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도움을 주러 가는 우리들이 몹시 불안정하고 다리가 떨리는 것은 아닐까. 즉, 심리학상의 자기암시라고나 할까?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도 위험을 느끼고 왠지 무섭다고 하는 기분이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 한다.
록 클라이밍의 참된 정신
이렇게 생각해 가면, 이 암벽 등산이라고는 하지만, 기분은 어떠한 것이 되는 것일까? 즉, 자기 자신의 정신 및 신체를 긴장시키면서, 곤란과 위험을 부딪히며, 어느 하나의 정점으로 달한다고 하는 기분, 이것은 단지 암벽등산 뿐만 아니라, 인생 항로라고 하는 것은, 그런 곳에 귀중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 선배인 오오시마(大島亮吉, 1899-1928)씨가 이전에 “암벽등산의 미래에 부여한다”라고 하는 작문에서, 너무나도 암벽등산이라는 것에 빠져 버리면, 한층 더 곤란한, 동시에 위험한 절벽을 오르기 위한 흥미를 느껴, 그것에 빨려 들어 간다고 하는 폐해가 동반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 등산의 의의(意義)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암벽등산을 시작하면, 자칫 잘못하여 바위에 홀려 버려 위험한 절벽을 올라 보려고 하는 기분이 되는 것도 피 할 수 없는 것이고, 이 점은 특히 생각 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최근, 루프 클라이밍(Roof Climbing)이라고 해서 수수게끼 같은 것이 작년쯤 일본의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듯이 보였다. 신문에서 학교 건물로부터 로프로 내려오는 사진을 봤지만, 가장 가까이에 바위산도 없고 연습할 장소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이 혹시나 신체를 단련한다던가, 비육지탄(髀肉之嘆, 공을 세울 기회가 없음을 한탄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해 보려고 했던 것이라면 꽤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향락으로 혹은 밧줄사용을 향락으로 하는 기분으로 인식한다면 거기에 폐해가 생긴 것은 아닐까?
이것은 작년 오오사카 어느 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예로, 역시나 학교건물에서 매달려 내려왔다. 그런데 벽에 부딪혀 그 아래 유리창을 차버려 깨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런 루프 클라이밍 등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그런 예가 종종 있었다. 그 유명한 영국의 옥스포드 부근에서도 꽤나 하고 있는 듯하지만, 단지 그것이 산을 잊지 못해서, 손에 익히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좋을 것이지만, 암벽등산 그 자체를 향락하는 듯한 것은 절대로 삼가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흥미가 달아오르고 준비가 갖춘 암벽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조를 짜서 암벽등산을 한다. 그리하여 공동동작과 상호부조의 정신으로써, 로프로 연결하여 오른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정당하고 과학적인 클라이밍인 것처럼 우리들은 믿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에 커다란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유명한 헬포드(Halford)와 샘슨(Sampson)이라는 암벽등반가이고,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공동동작과 상호부조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이 사람들은 다년간 영국의 산을 오르고 있었고, 특히 스카펠 파나클(Scafell Pike, 978m) 등의 여러 가지 등반 코스를 개발했던 사람이고, 그 사람이 여러가지 경험을 쌓은 최후의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최후의 한마디 (The Best Number is One – 최고는 혼자서 등산하는 것) 라고 말했다. “암벽등산이 아니더라도, 즉, 등산에 가장 적당한 베스트 수는 얼마인가 하면, 그것은 한 사람이다. 조를 짠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한 사람이 오르는 것이 등산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앞에 말했듯이 로프 사용법과 공동동작과 상호부조와의 정신으로써 조를 짠 경우에는 실로 공동동작과 상호부조의 정신이 적절하게 거행되지만, 자일로 서로 연결하여 오른다고 하는 정신에는 그 외의 것이 충분히 포함되어 있다. 즉, 자일로 서로 연결하여 오른다고 하는 것은 경험있는 선등자가 초심자를 리드해서 가는 것이 현재의 참된 로프 사용법은 아닐까. 그러한 의미로 로프로 연결한다는 것은 참된 정신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숙련자만이 서로 연결해서 오른다고 하는 것이 참된 상호부조와 공동조작이 아니라고 해서 혼자서 오른다고 하는 것은 왠지 주눅이 든다. 둘이서 혹은 셋이 서로 연결해서 등반하면 무엇인가 거기에 마음이 동반되어 온다. 즉, 전에 이야기한 심리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걱정이 덜되고 또한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하는 안도 하에 오를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암시이고, 그런 것은 참된 오르는 방법이 아니고 참된 오르기란, 단지 혼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일로써 서로 연결하여 오르는 공동동작, 상호부조라고 하는 것은 향후의 테크닉처럼 생각되는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정말로 혼자서 오르는 것이 진짜 오르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실제로 약 30년 전에 뮌헨의 빈클러(Georg Winkler)라는 20세도 안된 소년이 위험하고 험하다고 회자되는 치날로트호른(Zinalrothorn: 4,221)을 단독으로 훌륭하게 올랐다는 예가 있다.
이렇듯이 여러 가지 자일의 역사라는 것도 있지만, 결국은 역시 자일로 서로 연결하여 공동동작과 상호부조라고 하는 정신으로 등반한다고 하는 것이 향후의 등산, 특히 곤란한 암벽등산에 있어서는 영원히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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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무레사네의 클라이머 최봉칙’에 대해 이어가고자 한다. 1927년 이정섭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회인 “무레사네”는 주로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이 국토애를 통한 민족의식의로 역사·문화 하이킹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35년 최봉칙에 의해 서울근교 인수봉 등 대부분의 기존코스 암벽등반 활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임무 이후 암벽등반의 저변이 확대되는 1935년 경, 기록되지 않은 조선인 클라이머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등반기록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무레사네가 우리나라 ‘알피니스트’의 모암(母岩)인 인왕산에서 시작되었고 이는 ‘백령회’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RCC의 회지인 'RCC報告3(1927년, 366쪽)'에는 회원 명단이 별도 수록된 것이 없고 임무가 기록된 글은 없음을 참조바란다. 그 외의 보고서(총 5회 발간)는 2022년 9월 현재 미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