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흥대원군묘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 205-13
- 중종의 왕자로 선조의 부친, 덕흥대원군의 무덤
하원군(河原君)의 무덤 위쪽에는 조선 초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苕 : 1530~1559)의 묘소가 있다. 덕흥대원군은 중종(中宗)의 아홉째 아들로, 선조(宣祖)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뒤편에 안장되어 있는 창빈 안씨(昌嬪 安氏)이며, 1538년 9세 때 덕흥군(德興君)으로 되었다. 그의 형들은 12대 인종과 13대 명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왕위를 잇지 못하자 명종 22년(1567)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왕위에 올랐다. 하성군이 조선 14대 왕인 선조로 즉위하자 선조 2년(1569) 11월 1일에 중국의 북송(北宋) 영종의 아버지 복왕(濮王)을 높이는 옛일을 본받아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하고,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높였다.
이때부터 조선시대에 대원군 제도가 시작하여 정원대원군(인조의 생부),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고종의 생부)이라고 불려졌다.
덕흥대원군의 자는 경앙(景仰)으로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천성이 영리하고 재주가 많으며, 학문과 덕이 뛰어났다. 덕흥대원군의 친형제로는 영양군(永陽君) 이거(李岠), 정신옹주(靜愼翁主)가 있다. 덕흥대원군은 1542년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의 손자인 판중추부사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 정씨(河東 鄭氏)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명종 7년(1552)에 덕흥대원군은 당시의 높은 관리 몇 사람 외에 사대부들과 시비가 생긴 일로 사헌부에서 그에게 벌을 내릴 것을 건의 했으나 명종이 듣지 않아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덕흥대원군이 명종 14년(1559) 5월 9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해 9월 17일에 양주군 남면 수락산 언덕에 묘를 만들었다.
덕흥대원군 묘역은 무덤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둘러싼 흙담[사성(莎城)]으로 둘러져서 하동부대부인 정씨와 두 개의 무덤이 동남향을 하고 있고, 무덤은 둘레돌[호석(護石)]로 둘러져 있다. 그리고 무덤 앞에는 ‘덕흥대원군 하동부대부인 정씨지묘(德興大院君河東府大夫人鄭氏之墓)’라고 쓴 비석과 받침돌 없이 평평한 돌로 된 상석(床石), 향을 피우는 향로석은 두 개의 무덤 가운데에 놓았다. 상석 앞쪽에는 장명등(長明燈)을 세우고, 그 뒤쪽으로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을 각각 세워 놓았다.
덕흥대원군 신도비(神道碑)는 그의 무덤 아래 약 20m 지점에 있다. 선조 6년(1573)에 세운 대리석으로 된 이 신도비는 비석의 글은 영의정 홍섬(洪暹)이 지었으며, 글씨는 송인(宋寅 : 중종의 사위)이 썼다.
덕흥대원군의 묘에 세워진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細虎)는 올라가는 것인지 내려가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세호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 묘에서부터 발견되는데 당시에는 위로 올라가는 세호였다가 후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세호이고, 순조 이후에는 왼쪽 세호는 오르는 모양, 오른쪽 세호는 내려오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덕흥대원군묘가 조성되면서 그 아래에 마을이 생겨나자 선조는 특별히 명령을 내려 사당을 세워 덕흥대원군 부부를 영원히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이에 따라 덕흥대원군의 사당, 덕흥사(德興祠)는 현재 무덤 아래쪽 마을에 있다. 이 사당에는 덕흥대원군의 신주와 어머니인 창빈안씨, 그리고 그의 큰아들인 하원군 등의 신주를 모셨다.
한편, 선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 덕흥군을 위해서 무덤이라도 능(陵)으로 높이려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덕흥대원군묘는 일명 '덕릉(德陵)'으로 부르고, 덕흥대원군을 극락으로 천조하는 절인 흥국사를 '덕절'이라고 부른다. 이는 선조의 지극한 효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덕흥대원군묘를 덕릉으로 높여 부르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요즈음도 덕흥대원군묘가 있는 상계동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덕릉고개'라고 불리고, 새로 제정된 <도로명 주소>에서도 도봉구 창동에서 녹천교를 건너 중계역을 거쳐 당고개로 넘어가는 도로를 ‘덕릉길’로 정했다.
덕흥대원군의 무덤 아래쪽에는 그의 큰 아들 하원군(河原君)의 무덤이 있고, 그 남쪽에는 ‘현록대부 하원군신도비(顯祿大夫 河原君 神道碑)’라고 쓴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선조 임금은 그의 형인 하원군(河原君) 정(鋥)에게는 정1품 벼슬을 내리고, 4대에 걸쳐 벼슬을 내리게 하여, 덕흥대원군 사당을 받들게 하였다. 덕흥대원군이 살던 집이자 선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도정궁(都正宮)은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 되었으며, 후손들의 주택이자 종가집이었다. 이 집은 제사를 모신 후손들에게 정3품 도정(都正) 벼슬을 대대로 내렸기 때문에 도정궁으로 불렸다.
도정궁은 340여 년간 사직단 옆, 현재 사직동에 자리하다가 1979년 건국대학교으로 이전하여 ‘사직동 정재문가’로 불렸다가 ‘도정궁 경원당(都正宮 慶原堂)’으로 이름이 바뀌어 서울민속자료 제9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도정궁 본궁 후원에는 대대로 제사를 모시는 신주 6위를 모신 덕흥궁(德興宮)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정궁은 조선 초 중종 33년(1538)에 덕흥군의 집 50칸으로 지은 것을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이 선조로 왕위에 오르자, 선조 2년(1569) 이 집 후원에 사당인 덕흥궁을 크게 짓게 하였다. 그리고 4대까지 왕자인 대군(大君)의 벼슬을 주고, 그 이후 제사를 받드는 후손들에게는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 벼슬을 대대로 잇게 하였다. 다시 순조 때에 와서 국왕의 명령으로 제사를 받드는 후손에게 종친부 정1품 군(君) 벼슬을 대대로 잇게 하였다.
선조 21년(1588)에 도정궁이 화재로 타버리자 선조의 명으로 5개월 만에 옛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고종 2년(1865)에 신정왕후 조씨가 “도정궁의 후손이 몰락하여 무너지는 대로 보수를 하지 못해서 장차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옛날을 돌이켜 생각할 때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이 집의 소중함이 다른 곳과는 아주 다르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 5,000 냥을 특별히 내려 호조(戶曹)에서 속히 수리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제 때인 1913년 12월에 다시 도정궁에 불이 나서 150칸이나 되었던 집이 20~30칸만 남았다. 1920년 당시만 해도 도정궁의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행랑(行廊)]은 길어서 서울의 5대 명물 중의 하나였다고 전한다.
< 덕흥대원군묘에 얽힌 이야기 >
◇ 선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소만이라도 능처럼 만들고 싶어서 신하들을 설득하였지만 이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에 의하면 선조는 왕위에 오른 후 신하들의 반대로 덕흥대원군의 묘소를 덕릉(德陵)으로 추존하지 못하자, 나무장사 한 명을 불러서 동대문 밖에서 땔감을 팔러오는 사람에게 물어서 덕릉을 지나왔다고 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며 땔감을 높은 값으로 사들이게 하였다. 이 소문이 빠르게 전해져 나무장사들이 너무 많이 밀려오는 바람에 중단했으나 이후부터 덕흥대원군의 묘는 덕릉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흥국사도 자연스럽게 덕절[德寺]로 불렸다. ◇ 국왕이 될 수 있었던 선조의 큰 형 하원군이 동생이 국왕임을 믿고, 색리(色吏)에게 화를 내어 붙잡아다가 마구 구타하여 자기의 분풀이를 하는 등 행실이 좋지 않았으므로 선조 5년(1572) 9월 14일, 사헌부가 선조에게 아뢰었다. ◇ 1992년 11월 11일, 덕흥대원군묘를 도굴하려고 한 흔적이 있으므로 경찰에 신고하였다. 무덤의 절반 정도를 1m 정도로 파헤치고, 쇠꼬챙이로 여러 곳을 찔러 구멍이 난 것이 드러나 경찰에서 수사를 하게 되었다. <*자료 : 경향신문 1992년 11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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