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의 풍수 실력과 그의 생애
그림설명: 정조.jpg
당쟁의 회오리 속에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친 비운(悲運)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이 배봉산하(拜峰山下) 영우원(永佑園, 현 서울시립대학교내)에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정조가 고모부인 박명원(화평옹주의 남편)과 지관 차학모(車學模)를 대동하여 유택을 둘러본 뒤, 흉지(凶地)임을 확인하고 정조의 손에 의하여 1789년 수원의 융릉으로 천장(遷葬)하는 과정에서 당시 정조의 풍수실력을 가늠해 보는 실록(實錄) 한 대목과, 영조(英祖)와 사도세자(思悼世子), 그리고 정조의 생애 등을 구성해 보았습니다.
《1789년 정조13년 9월 8(신묘)일》
총호사(국상에 관한 모든 의식을 총괄적으로 맡아보는 임시 벼슬) 김익, 금성위 박명원에게 유시하였다.
“형국(形局)과 음양(陰陽, 이기)은 서로 안팎이 되므로 어느 한 쪽을 폐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에서 그 경중(輕重)을 논한다고 하면, 형국(形局)은 체(體)이자 본(本)인 것이고, 음양(陰陽)은 용(用)이자 말(末)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체(體)를 제쳐두고 용(龍)을 구한다거나, 본(本)을 팽개치고 말(末)을 잡을 수가 있겠는가?.
원소(園所, 왕가의 묘)의 체세(體勢, 자세)가, 서린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국<반룡롱주형(盤龍弄珠形)>을 이루었는데, 만약 대주(對珠, 여의주 안산)의 뜻을 잃지 않고 아울러 분금(分金)법에 합치된다면 더없이 좋겠으나, 만약 분금에 구애(拘 )되어 주안(珠案, 여의주 안산)을 그르친다면, 천성(天性)의 형국을 어기고 빈주(賓主, 손님과 주인)의 정의를 잃는 것이니, 아무리 나경(羅經)의 묘용(妙用)을 얻는다 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또한 안산(案山)을 취하는 법으로 해당 안산의 한 가운데에 꼭 구애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고, 좌우를 보아 추이(推移)하여 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매 방위마다 각기 다섯 글자가 있으니 만약 구슬의 중앙이 분금의 길한 방향과 합치되지 않는다면 구슬 좌우 각의 길(吉)한 방향과 만나는 곳을 찾아 쓰고, 만약 구슬이 작아 단지 한 글자와 만나거나, 또는 길한 방향에 합치되지 않는다 해도 차라리 분금을 잃는 한이 있어도 적정한 안산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체로 분금을 취하는 법이 지극히 미묘(微妙)하여, 요새 사람 중에 제대로 알고 있는 자들이 드물다.
더구나 1백 20간지(干支)나 3백 60도수(度數) 역시 어찌 일일이 서로 합치시킬 수가 있겠는가?. 진실로 그렇다 한다면, 어찌 아득하여 알기 어려운 이치를 지나치게 믿으면서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는 구슬(안산)을 잃을 수가 있겠는가?. 이는 불가불 십분 성의를 쏟고 십분 상세히 살펴야 될 것이다.
그리고 혈(穴)의 깊이로 말하자면, 금번에 얻게 된 진토(眞土)는 하늘이 준 것으로, 색깔로 보나, 품질로 보나 비할 데 없는 지극히 좋은 토질이다. 찬탄(贊嘆)을 하고자 하더라도 형용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또한 그 뻗어온 산맥이 그다지 넓지 않은데도 혈처(穴處)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풍성하게 맺혔다가 혈처를 지나면 다시 오므라지므로, 단지 부토(浮土)만 걷어내면 혈의 형체가 저절로 드러날 지경이니, 이는 달걀이 노른자위를 내포하는 상(象)이다.
단지 진토의 테두리 중심으로 혈을 꽂는다면 상하와 좌우를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으나, 무엇보다도 이 천심(淺深)을 정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다. 비록 7척(尺)쯤을 표준으로 삼아 이미 정해진 규약이 있지만, 때에 따라서 적절히 적중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 7척을 미처 파내지 못하였는데 황색이 옅어지려는 기미가 보이면, 곧 파기를 중단해야 한다.
이는 대체로 누런 곳(혈심)을 뚫고 지나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적중하지 못할 경우는, 차라리 얕게 파야지 깊게 파서는 안 된다. 그러니 한 삽, 한 삽, 파 들어갈 때마다 항상 마음을 경계하고 한 치, 한 치, 파 들어가야 되는 것이니, 절대로 아무렇게나 방심해서 파지 말라. 또 혹시 흙 색깔과 품질이 갈수록 짙어지거나 딱딱하고 누렇다면, 비록 7척을 넘게 파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벌써 강구해 두었을 것으로 생각하나, 지금 금정(金井, 묘를 쓰기 위하여 파는 구덩이)을 여는 날이 눈앞에 다가와 염려스런 생각에서 자다 일어나 거듭 유시하는 것이다.”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생애
천한 무수리(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받치던 종)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난 연잉군이 조선의 제21대 왕위에 오르니 바로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다. 영조는 정실 왕비 두 명과 후궁 넷을 두었는데, 첫째 왕비는 정성왕후 달성 서씨이고, 서씨가 죽은 다음, 두 번째 간택된 왕후가 정순왕후인 경주 김씨다.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는 1692년 12월 7일 아버지 서종제와 어머니 우봉 이씨와의 사이에 종로구 가회동의 사저에서 태어나, 열 세 살이던 1704년 연잉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는데, 그때 영조의 나이는 열 한 살 되던 해다.
그의 아버지 서석제는 조선 초기 유명한 학자인 서거정의 자손으로 사위인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정선왕후의 혼인생활은 왕위를 염원하던 영조와 동고동락했던 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정성왕후 서씨의 조카인 서덕수가 노론인 연잉군(영조)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사형을 당할 정도로, 정성왕후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고자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영조는 소론의 반발과 반대에도 경종 4년에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정성왕후는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 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 7녀를 두게 되는데
제1후궁인 정빈이씨가 효장세자와 화순옹주를 낳고,
제2후궁인 영빈이씨는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를 낳았으며,
제3후궁인 귀인조씨는 화유공주를 낳았고,
마지막 후궁인 숙의문씨는 화령옹주와 화길옹주를 낳는다.
일곱 명의 딸 중 영빈이씨가 낳은 맏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김한신, 김정희 증조부)가 죽자 그 뒤를 따라 단식 끝에 굶어 죽었고, 셋째 딸 화협옹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첫아들인 효장세자는 영조가 즉위하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 살 되던 해에 그만 요절하였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두 번째 후궁인 영빈이씨에게 태어난 사도세자이다.
정성왕후는 후궁들에게서 난 소생들을 자기가 난 자식처럼 애지중지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기에 만약 정성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손에 비참한 죽음만은 면했을 거라는 것이 사가들의 중론이다. 정성왕후는 175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과 하직하였는데, 그의 능은 고양읍 신도읍 용두리에 있는 서오릉의 홍릉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두 번째 왕후인 정순왕후 김씨는 1745년 11월 10일 여주에서 태어나 열 다섯 살이던 1759년 6월에 왕비로 책봉되어 영조와 가례를 올린다. 이때의 영조 나이는 예순 여섯, 당시의 관습상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를 아내로 맞아 들였기 때문에, 꽃다운 나이에 한물 간 노인에게 시집을 온 것이다.
정순왕후가 시집올 때는 소론에게 호의적이던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을 때다. 이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노론 측은 이제 막 시집온 정순왕후를 등에 업고 풍산홍씨 가문과 합동작전을 펴,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넣어 아사(餓死)시키는데 일조한다.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외조부인 홍봉한이 영조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맡는데, 정순왕후의 경주김씨 집안은 초긴장상태로 돌변한다. 즉,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집안이 합심하여 사도세자를 제거할 때는 같은 노론의 편에 서서 일사분란하게 일이 추진되었으나, 막상 일이 성사되자 권력다툼이 일어나면서 어제의 동지가 정적(政敵)으로 돌변한 것이다.
또한 정순왕후와 그의 동생인 김귀주는 만약 정조가 즉위하면 본인들이 일순간에 몰락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책봉 방해공작과 함께 홍봉한을 정계에서 실각시키려고 한유를 사주해 "홍봉한이 세손 정조를 제거하고 대신 은언군을 추대하려 한다" 는 상소를 올려 홍봉한을 청주로 귀양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자 세손(정조)이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을 회유, 영조에게 이를 모함이라고 아뢰면서 귀양에서 풀려나도록 한다
숨을 죽이면서 기회만을 엿보던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후겸과 홍인한, 숙의 문씨와 문씨의 동생 문성국 등 사건의 관련자들을 모조리 귀양 보내고, 홍봉한을 제외한 관련자 모두를 사사(賜死)한다.
정순왕후 동생인 김귀주도 예외 없이 귀양이란 죗값을 받게 되는데, 정순왕후가 비록 대비(大妃)의 위치에 있었지만 정조가 이미 성인이 되어 대리청정을 할 수 없어,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혔을 때, 혜경궁 홍씨가 했던 것처럼 단식 등의 방법 외에는 어떤 대안도 통하지를 않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끝까지 지켜준 홍국영을 도승지 겸 금위대장으로 임명하여 개혁 정치를 단행하여 당색에 물들지 않은 인재를 등용시키고 문신(文臣)을 양성하는 규장각과 무신(武臣)을 양성하는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정권에서 소외당한 영남의 남인(南人)들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끌어안게 된다.
-2006년 4월 26일 初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