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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이종(宋 理宗) 순우(淳祐). 三년(1243) 계묘(고려 高宗 三○년) 어느 날(生日未詳) 선생은 흥주성(興州城) 남쪽 평리촌(坪里村) 학다리 옆 본가에서 태어나셨다.(家乘) 고택은 고을 남쪽에서 몇 리 되는 죽계(竹溪) 가에 있으며, 이는 호군공(護軍公: 이름은 子美 선생의 증조) 때부터 살아왔다. [향려단기]
웅장한 백두산이 남으로 뻗어 하늘에 우뚝하니 태백산이요, 또 다시 남으로 뻗어 신령한 기운을 감싸고 있으니 소백산이다. 이 한 가닥의 산맥이 둘러쳐진 그윽한 골짜기에 맑은 시냇물이 앞으로 휘감아 흐르니 죽계(竹溪)이다. 여기에 서린 산천의 맑은 기운을 받아 대인 군자가 태어나 세상의 정기를 붙잡고 교화를 일으켜 사도(斯道)를 영원토록 계승시켰으니 선생은 실로 남다른 기운을 받아 이곳에서 태어난 것이다. [成世昌의 白雲洞廟記]
세상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선생의 부친 태사공(太師公: 이름은 孚)이 어렸을 때에 어느 술사(術士)가 그의 영특함을 사랑하여 지장산(智藏山) 한 기슭을 가리키며 말하기를「여기에 장사지내면 반드시 큰사람이 태어나 대대로 귀를 누릴 것이다」고 하기에 드디어 선친 추밀공(樞密公 이름은 永儒)을 장사했다.
이에 선생이 태어나 유도를 밝히고 유풍(儒風)을 크게 천명하여 삼한(三韓)의 고루한 풍습을 일신시켜 도학의 시조가 되었고 자손이 번성하고 오랫동안 높은 벼슬을 누려 쇠퇴하지 않았다고 한다. [壇記, 家乘]
4년(1244) 갑진 (선생의 나이 2세)
5년(1245) 을사 (선생의 나이 3세)
6년(1246) 병오 (선생의 나이 4세)
7년(1247) 정미 (선생의 나이 5세)
8년(1248) 무신 (선생의 나이 6세)
9년(1249) 기유 (선생의 나이 7세)
10년(1250) 경술 (선생의 나이 8세)
11년(1251) 신해 (선생의 나이 9세)
12년(1252) 임자 (선생의 나이 10세)
선생은 어릴 적부터 단정하고 중후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는 적이 없었다. [家乘]
보우(寶祐)
원년(1253) 계축 (선생의 나이 11세)
2년(1254) 갑인 (선생의 나이 12세)
3년(1255) 을묘 (선생의 나이 13세)
4년(1256) 병진 (선생의 나이 14세)
5년(1257) 정사 (선생의 나이 15세)
고택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선생이 어렸을 때에 글씨를 익히면서 벼루를 씻었던 곳으로서 이름을 세연지(洗硯池)라 했다. 성(城) 북쪽에 숙수사(宿水寺)가 있었는데, 선생이 젊은 시절 그곳을 오가면서 독서했었다. [壇記, 院記]
6년(1258) 무오 (선생의 나이 16세)
개경(開慶)
원년(1259) 기미 (선생의 나이 17세)
경정(景定)
원년(1260) 경신(고려 元宗 원년○ 선생의 나이 18세)
九월. 위문경(魏文卿)등과 급제하다. [家乘]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이 문장을 이뤘는데 글 솜씨가 맑고 강하여 볼만하다고 하였다. [列傳]
고관(考官)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장용(李藏用). 동지추밀(同知樞密) 유경(柳璥)이 진사(進土)를 뽑을 적에 을과(乙科)에 위문경(魏文卿)등 3인 병과(丙科)에 7인 그리고 동진사(同進事) 21인 명경(明經)에 2인을 급제시켰다고 한다. [高麗史/選擧誌]
유경(柳璥)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높아 세 차례나 예위(禮圍:尙書省)를 맡았다. 이에 사람을 선발할 적에는 기국과 식견을 먼저 보고 문예를 뒤로 하였다. 이에 선발된 이는 모두 명사들이었으니, 이존비(李尊庇), 안진(安晉戈), 이혼(李混) 등이다. 유경이 선생의 문장을 보고 칭찬하여 말하기를「훗날 반드시 큰 선비가 되리라.」하였다. [高麗史/柳璥傳, ?翁稗說]
교서랑(校書郎)이 되었다가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겨가다.
2년(1261) 신유 (선생의 나이 19세)
3년(1262) 임술 (선생의 나이 20세)
4년(1263) 계해 (선생의 나이 21세)
5년(1264) 갑자 (선생의 나이 22세)
도종(度宗) 함순(咸淳)
원년(1265) 을축 (선생의 나이 23세)
아들 우기(于器) 태어나다.
[자는 허중, 호는 죽옥, 시호는 문순이다.
지문(誌文)을 살펴보면, 선생의 전부인은 한남군 군부인 김씨(漢南郡 君夫人 金氏)이니 우사간 녹연(右司諫 祿延)의 딸이며 1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우기(于器)이다. 딸은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 문욱(文頊),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허유(許綏), 통문서 녹사(通文署錄事) 박제(朴王齊), 직사관(直史館) 한수연(韓守延), 찬성사(贊成事) 정경공(貞景公) 김사원(金士元)에게 출가했다. 후부인 서원군 군부인 염씨(瑞原郡 君夫人 廉氏)는 예빈경(禮賓卿) 수장(守藏)의 딸이다. 전.후부인의 결혼, 별세 연월일은 실전하여 상고할 길이 없다.
2년(1266) 병인 (선생의 나이 24세)
3년(1267) 정묘 (선생의 나이 25세)
4년(1268) 무진 (선생의 나이 26세)
5년(1269) 기사 (선생의 나이 27세)
6년(1270) 경오 (선생의 나이 28세)
6월에 삼별초(三別抄) 난을 만났으나 얼마 후 탈출해 돌아오다.
처음 최우(崔瑀)가 고종(高宗)을 협박. 강화로 도읍을 옳기고 국정을 마음대로 할 때 나라에 도적이 들끓자 이에 별초병(別抄兵)을 설치하여 좌우장군(左右將軍)을 삼고 몽고에서 도망해 온 병사로서 하나의 부대를 조직하여 ‘신의군(神義軍)’이라 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이다. 그러던 차에 원종(元宗)이 강화에서 다시 개성으로 환도(還都)하면서 삼별초를 없애자 이들이 갈 곳을 몰라 할 때에 역적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서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추대하고 많은 신하를 협박하였다. 선생이 있던 곳도 적의 수중에 함락됐으나 적들은 평소 선생의 명망을 흠모하여 기용할 심산으로 회유와 협박을 가하고 군령을 내「안한림(安翰林)을 놓아준 자는 벌을 내린다.」 하였다. 이에 선생이 반역과 충성의 의리로 깨우치고 탈출해 돌아오자, 왕은 의로운 행실이라 하고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렸다.(列傳)
7년(1271) 신미 (선생의 나이 29세)
서도(西道)에 사신의 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다시 내시원(內侍院)에 돌아왔다. 상소를 올려 내시원의 해묵은 폐단을 없애다. [列傳]
선생이 청렴하고 신중한 점을 인정받아 내직인 내시원으로 불려 돌아왔고, 상소를 올려(상소문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음) 내시원의 해묵은 폐단을 다 제거하였다. [列傳]
그 당시 내시원 관료들은 서로 예를 차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을 숭상하였는데, 선생이 엄격하게 예법으로 몸가짐을 하니, 내시원 안이 모두 숙연해졌다. [考蹟]
8년 (1272) 임신 (선생의 나이 30세)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옮기다. [列傳]
○ 열전(列傳 에는 연월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후손 우제(羽濟)의 세승(世乘)에 이 해에 실려 있기에 우선 이에 따른다.
9년 (1273) 계유 (선생의 나이 31세)
10년 (1274) 갑술 (선생의 나이 32세)
공제(恭帝) 덕우(德祐)
원년(1275)년 을해 (선생의 나이 33세)
상주 판관(尙州判官)에 임명되다. [列傳]
당시 여자 무당 3인이 신(神)을 빙자하여 백성을 현혹하면서 합주(陜州)1)로부터 올라오면서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들이 이르는 곳에서는 사람 목소리가 공중에서 나도록 하여 마치 은은히 설교하는 듯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마다 앞 다투어 제사를 올렸으며, 수령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상주에 이르자, 선생은 그들을 매를 친 후 옥에 가둬버렸다. 이에 여자 무당들이 귀신의 말이라 빙자하면서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겁을 주어, 고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으나 선생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여자 무당이 애걸하므로 그때서야 석방하니, 요사스러운 일이 드디어 없어지게 되었다. [列傳]
단종(端宗) 경염(景炎)
원년(1276) 병자 (선생의 나이 34세)
1년(1277) 정축 (선생의 나이 35세)
판도사 좌랑(版圖司佐郞)에 임명되다. [列傳]
九월에 일본을 정벌한 후. 다시 전쟁 준비를 위해서 합포(合浦)에 병마지휘영(兵馬指揮營)을 설치하고 전함을 만들고 군량을 비축하며 장정을 징발하고 세금을 추징하니 고을마다 피폐되었고. 또한 소식(消息) 응방(鷹坊)2) 등의 세금이 잦아 백성은 괴로움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선생이 고을 원으로 재임한 3년 동안 구휼 정책을 시행하여 고을 백성이 다시 생기를 되찾았고, 내신(內臣) 또한 사욕을 채우기 위한 학정을 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렴사(接廉使)가 선생이 행한 정사가 청렴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된 것을 표창하여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다시 이 직책을 맡기게 된 것이다. [列傳]
제 병(帝 昞) 상흥(祥興)
원년(1278) 무인 (선생의 나이 36세)
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에 옮겼다가 국자사업(國予司業)에 오르다. [列傳/世乘]
○ 전후로 감찰시어사에 재직하면서 법과 기강을 많이 바로잡았는데, 세력을 믿고 불법을 자행한 사람들도 선생의 공평,정직함을 두려워하여 방자히 굴지 못하였다. [列傳]
이전에 문안공(文安公) 김양감(金良鑑)이 송(宋) 나라에 들어가 성묘도(聖廟圖)를 그려왔는데, 조정에서 서부(西部) 태평관(太平館)에 국자감(國子監)을 설립하였고, 그로 인해서 국자사업(國子司業) 직책을 설치했었다. 이에 이르러 선생이 이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전쟁을 겪으면서 학교 제도가 무너지고 불교가 성행하여 선비도 학문을 할줄 몰랐으므로 유학의 기풍이 진작되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이 홀로 개탄하면서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世乘] ○ 시는 위에 보인다.
2년(1279) 기묘 (선생의 나이 37세) ○ 이 해에 송나라 망하였다.
충열왕(忠烈王)
6년(1280) 경인 (선생의 나이 38세) ○ 여기서부터 고려의 기년(紀年)에 따른다.
7년(1281) 신사 (선생의 나이 39세)
8년(1282) 임오 (선생의 나이 40세)
아들 우기(于器)가 진사(進士)에 급제하다. [竹屋誌]
선생 부자간에 모두 十八세에 급제하니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다. [世乘]
9년(1283) 계미 (선생의 나이 41세)
10년(1284) 갑신 (선생의 나이 42세)
11년(1285) 을유 (선생의 나이 43세)
12년(1286) 병술 (선생의 나이 44세)
13년(1287) 정해 (선생의 나이 45세)
14년(1288) 무자 (선생의 나이 46세)
정월 기축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서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기다. [通鑑]
선생은 유학(儒學)을 좋아하였고 더욱이 이단의 사설(邪說)을 배척하여 내외직을 역임할 적에 명성이 드높았다. [東史]
4월 무인. 많은 신하가 모인 잔치에 참석하여 시를 지어 올리다. [世家 / 通鑑] ○ 시는 유실되어 전해오지 않는다.
궁궗에 꽃이 성대하게 피어 왕이 많은 신하와 더불어 향각(香閣)에서 잔치를 베푸니, 선생은 규례에 따라 참석하다. [高麗史]
9월 계묘 . 좌승지(左承旨)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윤선좌(尹宣佐)등 33인을 선발하다. [東史] 이때 중찬(中贊) 허공(許珙)이 지공거(知貢擧)이고 선생은 동지공거(同知貢擧)였다. [選擧誌]
15년(1289) 기축 (선생의 나이 47세)
원외랑(員外郎)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좌우사 랑중(左右司郎中)에 가자되었고, 또 다시 유학제거(儒學提擧)에 가자되었다.
당시 왕이 원나라와 연합군을 구성. 왜구를 정벌코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직접 관장하면서 선생을 원외랑으로 삼았다. 얼마 후 좌우사 낭중에 임명하니, 선생의 명망이 멀리 퍼졌다. 원나라에서 또한 고려유학계거사(高麗儒學提擧司)3)를 설치하니, 왕이 선생을 유학제거에 가자하였다. [高麗史]
윤 10월 임자 ==왕을 시종하고 원나라에 가다, [通鑑 / 列傳] 만리장성을 지나는 길에 시를 짓다. [시는 위에 있다.]
16년(1290) 경인 (선생의 나이 48세)
연경에 머물면서 직접 주자서(朱子書)를 베껴 쓰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하다.
그 당시 주자서가 세상에 성행하지 않았는데, 선생은 이를 처음 보고서 마음속으로 매우 좋아하고 공문(孔門)의 정맥임을 깨달았다. 이에 주자서를 직접 쓰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모사하였다. 이로부터 주자서를 연구하여 깊이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공부를 이루었다. [世乘]
3월 정미. 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서 돌아오다.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제수되다.
17년(1291) 신묘 (선생의 나이 49세)
18년(1292) 임진 (선생의 나이 50세)
11월 계유 왕이 병환으로 선생의 집에 옳겨왔다가 [世乘] 12일을 머문 후 김방경(金方慶)의 집으로 옮기다. [東史/通鑑]
19년(1293) 계사 (선생의 나이는 51세)
4월 계축 공신 호하연(功臣號賀宴)에 참석하여 시를 지어 올리다. [世乘]
원나라에서 왕에게 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리자 왕이 대전(大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선생이 시를 지어 올리자[시는 전해 오지 않음] 왕이 백미(白米) 50석을 하사하다. [世乘]
20년(1294) 갑오 (선생의 나이 52세)
4월 신묘.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에 임명되어 합포(合浦:지금의 창원)에 출진(出鎭)하였다가, [列傳] 감로사(甘露寺)에서 노닐면서 시를 짓다. [吳澐史選] ○ 시는 위에 있다. 7월 지공거(知貢擧)로 소환되다. [世乘]
선생이 합포에 머물면서 군사와 백성을 구휼 고을이 편안케 되었는데 [列傳] 몇달 후 조정에서 선비를 뽑기 위하여 선생을 주시관(主試官)으로 부르다. [世乘] 7월 정묘일 대장군(大將軍) 유석(劉碩)이 대신 합포진을 다스리다. [世乘] 그 당시 과거 법을 중히 여겨 2명의 지공거를 두었으며, 반드시 문망(文望)이 있는 이를 선발했는데, 이를 두세 차례 맡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世乘] 선생이 도중에 갑자기 폭우를 만나 경산(京山=지금의 성주)에 이르러 지주(知州) 이진(李?)4) 과 진사(進士) 이조년(李兆年)5)을 방문하여 시를 지어 주다. [시는 위에 있다]
10월 갑신. 지공거로서 윤안비(尹安庇)등 33인을 선발했다. [選擧志] 동지공거는 민지(閔漬)였다. [選擧志]
12월 신축.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오르다. [世乘]
21년(1295) 을미 (선생의 나이 53세)
정월 기사 밀직사사(密直司使*)에 오르다.
22년(1296) 병신 (선생의 나이 53세)
二월 갑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다. [世乘]
23년(1297) 정유 (선생의 나이 55세)
12월 임인 첨의참리 세자이보 (僉意參理 世子貳保)1)에 임명되다. [世家]
○ 지문(誌文)을 살펴보면, 판공조사 첨의참리(判工曹事 僉議參理)로 옮겨으나 판사(判事)는 참리의 겸직이 아니으로 판공조사는 기록하지 않음
집 뒷편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주자의 초상화를 봉안하다. [列傳]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회암(晦菴)의 공은 공자와 짝할 만하다. 공자를 배우려면 먼저 회암을 배워야 한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집 뒤편에 한 채의 집을 지은 후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봉안하고 조석으 로 알현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고, 인하여 ‘회헌(晦軒)이라 호를 지었다. [列傳 / 通鑑] ○ 이 기사의 연월이 미상이나, 졸당(拙堂) 민성휘(閔聖徽)의 <송경방고록(松京訪古錄)>2)에 의하면 정사(精舍)를 지어 초상화를 게시한 시기가 무술년 이전의 일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곳에 기록하였다.
24년(1298) 무술 (선생의 나이 56세)
5월 신묘. 왕이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여,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참지기무 행동경유수 집현전태학사 계림부윤(參知機務 行東京留守 集賢殿太學士 鷄林府尹)에 임명되다. [世乘 / 列傳]
7월 무술. 다시 첨의참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僉議參理 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에 임명되다.
8월 전왕이 복위되고 선생은 충선왕을 따라서 원 나라에 가다. [列傳]
충선왕이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 공주를 맞이하여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물렀는데,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붕당(朋黨)을 지어 왕의 부자를 이간시켰다. 정유년[1297]에 세자가 환국하여 왕이 총애하는 여인과 내시를 죽이고 원나라에서 왕에게 명하여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게 함으로써 충선왕이 즉위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공주가 충선왕비 조씨(趙氏)의 총애를 질투하여 원 나라에 참소하니, 원 나라에서는 왕의 전권(專權)을 이유로 충선왕을 원나라에 들어오게 하고 왕비 조씨를 잡아오게 하고 전왕을 복위시켰다. 이에 선생이 충선왕을 따라서 원 나라에 간 것이다. [世家 / 通鑑 / 會綱]
어느 날 원나라 임금이 왕을 급히 소환하자 왕이 두려워했는데 이때 승상이 나와 말하기를「배종한 신하 중 우두머리가 나와서 대답하라」하고, 이어 승상이 원임금의 뜻을 받들어 묻기를「왕은 어찌해서 공주를 가까이 하지 않는가?」라고 하니, 이에 선생이 대답하기를「규방의 일이란 외부의 신하로서 알바 아닌데 오늘날 이러한 일을 물으니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승상이 이를 원 나라 임금에게 아뢰자 원 나라 임금이「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아는 사람이다. 먼 변방에 사는 사람으로 대할 수 없다.」하고 다시는 이 일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列傳 / 通鑑]
그러나 원 나라는 충선왕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자. 간교한 좌우시종이 참소로 이간질하니 [通鑑] 선생은 이를 간절히 간하였다. [考蹟] 얼마 후 환국하였는데, 세자는 이로써 선생에 대하여 원한을 품었다. 그 후 충선왕이 즉위하였을 때에는 선생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선생의 아들 죽옥공(竹屋公)에게 죄를 내리려 했다가 때마침 사면이 있었다.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전함에 이르러 충숙왕이 죽옥공에게 밀직부사 겸 대사헌(密直副使 兼 大司憲)을 임명하였는데, 상왕이 선생에 대한 감정으로 죽옥공을 파면시키고 조후(趙珝)로 대신하였다. 조후는 조비의 아우로서 상왕(上王)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죽옥공이 대신의 물망에 올랐다가 안에서 도운 이가 없어 아무런 죄 없이 파직되니, 아는 이들은 이를 애석히 여겼다. [高麗史]
연경에 머물며 문묘(文廟)를 배알하다.
학관(學官)이 묻기를「당신 나라에도 성묘(聖廟)가 있는가?」하여, 선생이 대답하기를「우리나라의 문물과 제사법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어찌 성묘가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성리설을 변론함에 주자설과 부합되니 학관들이 크게 경탄하면서「이분은 동방의 주자(朱子)다.」하고 선생의 얼굴을 그려갔다. [考蹟]
25년(1299) 기해 (선생의 나이 57세)
9월 기해 다시 국사를 수찬하다.(世家)
25년(1300) 경자 (선생의 나이 58세)
8월에 광정대부 찬성사(匡靖大夫 贊成事)에 올랐다가 얼마 후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誌)에 정1품(正一品)으로 나와 있다.) 도첨의 중찬(都僉議中贊=문하시중(門下侍中)이 중찬(中贊)에 해당함) 수문전태학사 제수국사(修文殿太學士 提修國史)에 가자되고 치사(致仕)하다. [列傳]
당시 오기(吳祁) 등이 참소와 아첨으로 총애를 얻어 권력을 행사하고 내신(內臣) 석천보(石天補)와 내외에서 결탁하여, 선생이 정승이 된 것을 시기하여 왕에게 중찬(中贊)을 더하고 고령을 이유로 치사케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다. [列傳]
○ 당시 권신이 백성들의 토지를 탈취하여 백성들이 원망하였는데, 선생이 일찍이 토지 겸병의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을 구제하자고 의논했다가 권신의 저지를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다시 선생의 등용을 바라자 왕이 선생을 등용시켰다. [考蹟]
선생이 승상부(丞相府)에 있으면서 국사를 잘 도모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선생의 뜻에 따랐으며, 오직 경건히 대하고 다투지를 않았다. [列傳]
당시 세자(世子)가 원(.元)나라에 있으면서 경비를 본국에서 공급하였고, 원 나라 또한 갖가지로 요구하여 날로 세금이 과중하여 백성들이 삶을 영위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이 건의하여, 무능한 관리를 감축하고 청렴한 관리를 장려하며 어진 수령을 임용하여 기근을 구제하는 등의 많은 정책을 건의하였고, 이것을 채택하여 시행하였으므로 백성이 다소나마 소생할 수 있었다. [考蹟]
27년(1301) 신축 (선생의 나이 59세)
2월에 저택을 조정에 헌납하고 서부(西部) 양온동(良?洞)으로 이사하다.
원(元)의 학관(學官) 야율희일(耶律希逸)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문묘(文廟) 배알을 청하였다. 그 당시 국자감(國子監)은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으면서 겨우 두어 칸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에 예관(禮官)이 선생의 저택 뒤편의 정사(精舍)를 가리켜 성묘(聖廟)라 하고 사신을 배알케 하였다. [訪古錄] 원(元)의 사신이 규모가 협소하여 반궁(泮宮)의 제도를 잃었음을 지적하여 왕에게 반궁의 실축을 권하니 [世家 / 通鑑] 선생이 자신의 저택을 조정에 헌납하고 양온동(良?洞)으로 옮겨 살았다. [訪古錄]
봉전(俸錢)과 토지와 노비를 국학(國學)에 바치다. [成俔 ?齋叢話]
당시 학교가 황폐하고 교육이 땅에 떨어져 사대부(士大夫)마저도 성인의 학문을 알지 못하고 모두 이단(異端)을 숭상하여 부처에게 기도하고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등 풍속이 오염되었으나, 선생은 홀로 이를 근심하여 시로서 깨우치고 의연히 이단을 배척하고 성인의 도를 밝히고 학교를 부흥시키며 인재양성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금전과 토지. 그리고 노비(奴婢) 100명을 국학(國學)에 바쳐 학도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지금까지의 성균관(成均館) 노비는 모두 그들의 자손이다. [大學成典]
순흥부(順興府)에 선생 소유의 밭 30경이 있었는데, 이를 바쳐 태학(太學)의 양현(養賢) 비용에 이바지하였는데, 순흥부(順興府)가 폐지되면서 잃어버리고 수습하지 못하였다. 숙종 10년(1688) 갑자년에 후손 석휘(錫徽)가 앞장서서 순흥부의 회복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숙종이 특별히 선생의 공덕을 표창하여 윤허함으로써 순흥부가 복구되고. 또한 잃었던 전답을 되찾아 태학(太學)에 돌려주었다. [順興復邑誌에 나온다.]
28년(1302) 임신 (선생의 나이 60세)
29년(1303) 계묘 (선생의 나이 61세)
백관(百官)에게 각기 은과 베를 내도록 하여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이로써 교육 자금을 마련하자고 청하였다. [列傳 / 通鑑]
선생은 태학이 몹시 퇴폐되고 유학이 부진함을 근심하여 양부(兩府)에 건의하기를,「재상의 직분 중에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급선무가 없다. 오늘날 양현재(養賢齋)의 창고가 고갈되어 인재를 기를 수 없으니, 바라건대 6품 이상의 관리는 은 .1근. 7품 이하는 품계에 따라서 차등 있게 베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재 창고에 귀속시켜 원금은 보존하면서 이식(利息)을 취해서 자금을 삼도록 하자.」 하였다. 양부에서 이 의견에 따라 왕에게 아뢰자, 왕 또한 내탕(內帑) 전곡을 내어 보조하였다. 밀직(密直) 고세(高世)가 자신은 무인(武人)이라며 돈을 내려고 하지 않자, 선생이 제생들에게 이르기를『공자가 만세에 법을 전하여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은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아우는 형에게 공경하게 하였다. 이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그런데 만일「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돈을 내어 너희 유생을 길러야 되는가?」라고 한다면 이는 공자를 무시하는 것이니 옳은 일이겠는가』라고 하니, 고세가 몹시 부끄러워하며 곧바로 돈을 내놓았다. [列傳 / 通鑑] ○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면 이는 갑진년(甲辰年)에 있었던 일이다. 세가(世家)와 통감(通鑑)에는 계묘년(癸卯年)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 강남(江南)에 보내 선성(先聖) 및 70제자의 초상을 받들어오게 하고, 아울러 제기(祭器), 악기(樂器), 육경(六經), 제자서(諸子書,) 사서(史書) 및 주자신서(朱子新書) 등을 구입해 오게 하다.
선생은 평소 우리 나라에 경적이 구비되지 못한 것을 걱정하였다. 강남에 아직도 송나라 왕실의 예물이 남아있고 또한 주자신서가 많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박사 등을 강남에 보내어 널리 구입해 오게 했는데, 5개월 만에 돌아왔다. [世家 / 列傳 / 通鑑]
8월 원(元)나라 사신을 전송하다. [通鑑]
오기(吳祁), 왕유소(王維韶), 송린(宋璘) 등이 왕에게 참소하여 충선왕(忠宣王)의 환국을 저지하고자 하여 전개될 화란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선생이 밀직(密直) 김태현(金台鉉)과 마음을 합하여 왕의 부자가 처음처럼 지내도록하려 하였는데, 때마침 원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을 파견하였다. 이에 원충갑(元沖甲), 김원상(金元祥), 박전지(朴全之) 등 여러 재상이 원나라 사신에게 오기(吳祈)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원나라 사신이 모두 들어주지 않았었다. 이는 원나라 사신이 오기의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선생은「오기의 죄에 대하여는 의당 반복하여 왕에게 간청할 것이니, 원나라 사신에게 호소하지 말자」라고 했으나, 여러 재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오기가 왕의 곁을 떠나지 않자 오기를 체포하려고 김원상 등과 수상(首相) 홍자번(洪子藩)이 황궁을 포위한 후. 오기를 체포하려고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군사를 풀어 왕궁을 포위하는 것은 왕을 위협하는 것이니 불가하다.」하였다. [通鑑]
12월 임신. 시랑찬성사 판도판사사 감찰사사(侍郎 贊咸事 版圖判司事 監察司事)에 임명되다. [世家 / 世乘]
30년(1304) 계묘 (선생의 나이 62세)
5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다 [世家 / 通鑑]
이는 백관이 교육자금으로 낸 은포(銀布)이다. 이때에 와서 박사관(博士官)에게 맡겨 출납을 관장하게 하고 ‘섬학전(贍學錢)’이라 일컬었다. [考蹟]
6월 을유 대성전(大成殿)을 낙성하고 선성(先聖)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이산(李 心변에産), 이진(李?) 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도록 청하다. [列傳 / 通鑑]
임인년에 신관(新館)이 낙성되었고 지금에 이르러 성묘 또한 낙성되었다. 왕이 학관에 나아가 성묘(聖廟)를 배알하니, 칠관(七管)의 유생이 관복을 구비하고 길에서 왕을 맞이하면서 가요를 바치니, 왕이 밀직(密直) 이혼(李混)에게 명하여 입학송(入學頌)을 지어 올리게 하여 유생에게 보이다. [列傳 / 通鑑]
선생은 밀직(密直) 으로 치사(致仕)한 이산(李산)과 전법판서(典法判書) 이진(李?)으로 경사교수 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를 삼도록 청하였고, 또한 이성(李晟), 추적(秋適), 최원충(崔元沖) 등을 천거하여 경전마다 2명의 교수를 두어 금내학관(禁內學館) 및 내시오도감(內侍五都監), 2고(二庫), 7관(七管), 12도(十二徒)의 모든 유생이 그곳에서 배우게 하니, 경서를 끼고 와서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列傳 / 稗說] 이로써 학관이 비좁아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모두 경서에 능통하고 옛것을 배우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선생이 늘 조정에서 물러나와 관문에 들어서면 모든 유생이 교관의 뒤를 따라 뜨락에 나누어 서고 예를 행한 후 당(堂) 으로 올라가 수업을 청하여 종일토록 토론하였다. [고적(考蹟)에 이르기를「그 예는 한결같이 좌주(座主), 문생(門生)과 같았다」하였다.]
유생 중에 선배에게 예를 행하지 않는 자가 있어 선생이 벌을 주려 하였는데, 유생이 사죄하니 선생이 경계하기를「나는 그대를 나의 자손처럼 생각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늙은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가?」하고, 그 유생을 선생의 집으로 데리고 가 술자리를 베풀어 대접하였다. 이에 유생들이 시로 말하기를「선생이 선비 대접하기를 이처럼 지성으로 하는데 만일 감화하여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서로 경계하여 감히 어기지 않았다. 이로부터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어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가 운집하니, 비로소 모두 도학(道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列傳 / 家乘]
글을 지어 유생들을 깨우치다. [이 글은 위에 보인다.]
[살펴보면, 선생이 태어나고부터 주자가 세상을 떠난 해까지가 겨우 43년이다. 당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중국에 주자학이 있는지를 몰랐었다. 선생이 원 나라에서 비로소 주자서를 보고 공자의 정전(正傳)임을 확신하여 손수 기록하여 돌아옴으로부터 드디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주자학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의 문인 국재(菊齋) 권부(權溥)가 또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였고, 또 30년 후 포은선생(圃隱先生)이 서로 그 책을 강명함으로써 이조(李朝) 문명의 운을 열어 주었으며, 학자들이 한결같이 주자로써 표준을 삼았다. 신재(愼齋)가 이르기를「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포은 등은 선생의 여파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성리학을 좋아하여 의리를 연구하였고, 몸을 엄히 다스려 표리가 일치되었으며, 장중하고 자상하고 진실하고 경건함을 힘써 예법에 따라 행동하니, 모든 사람들이 경외하였다. [회강(會綱)에 이르기를「젊어서 학문을 좋아하니 모두 경외하였고 더욱이 학문의 진흥과 인재의 양육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이단을 극력 배척했다.」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앞세우고 정밀히 사색하고 실천에 힘쓰도록 하여 공명정대한 경지로 인도하니, 학문의 단계가 어지럽지 않고 본말을 구비하였다. 가르치고 인도함에 관대하면서도 법도가 있어, 과오가 있는 사람은 차근차근 타일러 끝내 고치도록 하였으니, 이 때문에 선비들이 더욱 선생을 따랐다. [行狀]
판밀직사사 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 都僉議中贊)를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다. [世家 / 世乘]
당시. 송빈(宋?), 왕유소(王維韶) 등이 폐위를 모의하자, 선생은 홍자번(洪子藩)과 보살피고 비호하면서 왕에게 전왕(前王)의 환국(還國)을 원나라에 청하자고 하였는데, 왕은 이 건의를 따랐지만 오히려 왕유소와 송빈 등을 신임하였다. 이때 원나라는 사신을 보내어 힐책하기를,「간신이 권력을 행사하여 왕의 부자를 이간시킨다.」하니, 선생은 끝내 어쩔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얼마 후 홍자번(洪子藩)은 참소를 당하여 재상에서 파면되었고, 이듬해 왕이 원나라에 가자 전왕(前王)의 핍박으로 경수사(景壽寺)에 옳겼으며 서흥후(端興侯) 전(琠)과 송빈(宋?) 등을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장형(杖刑), 유형(流洲)에 처하였다. 이에 국정은 모두 전왕에게 돌아갔으며 왕은 도장만을 찍을 뿐이었다. [通鑑 / 考蹟]
○ 선생은 비록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살면서도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있어서는 잠시도 잊지 않고 정성을 다 쏟아 장려하고 보살피니, 성취가 이가 매우 많았다. [列傳 / 家乘]
선생은 손님 접대와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김이(金怡), 백원항(白元恒) 등이 벼슬하지 않았을 때에 보고서「후일에 반드시 귀하게 되리라.」하였고, 이제현(李齊賢)과 이이(李異)가 동년생으로 모두 명망이 있었는데, 선생이 그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관찰하여 평하기를 “이제현은 반드시 벼슬과 장수를 누릴 것이고, 이이는 장수하지 못하리라.” 하였는데, 과연 선생의 말이 적중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옛날 거문고 한 벌을 간직하고 가르칠 만한 선비를 만나면 이 거문고를 타게 하였다. [列傳]
31년(1305) 을사 (선생의 나이 63세)
6월 죽옥공(竹屋公)이 국자 전주(國子典酒)로서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니, 부자 양대에 걸쳐 一년만에 서로 이어 밀직을 관장하니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였다. 죽옥공이 이해에 또 다시 시고(試考)를 관장하여 정밀한 심사로 명사를 많이 선발하니, 당시 사람들이「부친이 하던 일을 잘 계승하였다.」 하였다. [選擧誌 / 竹屋誌]
32년(1306) 병오 (선생의 나이 64세)
9월 12일 갑신. 선생이 별세하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니,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문(文)」이라 하고, 백성을 평안케 하고 정사를 바로 세운 것을「성(成)」이라 한다. [列傳 / 通鑑]
왕이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하였다. [世乘]
장단부(長湍府) 송림현(松林縣) 대덕산(大德山) 구정리(口井里)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다. [墓誌] 장사지내는 날에 7관 12도(七管十二徒)의 유생이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를 지내다. [列傳 / 通鑑] 전 부인 김씨는 묘 왼편에 부장(?葬)하니, 묘역은 같고 봉분이 다르다. [世乘]
왕명으로 묘 주위의 산을 봉하여 묘전(墓田)을 삼았다. [世譜]
충숙왕(忠肅王) 5년(1318)
2월에 왕명으로 선생의 영정을 그려 문묘에 봉안하고 그 고향에. 제사를 올리다.
이에 앞서 문인 백이정(白?正)이 원나라에서 정주성리서(程朱性理書)를 많이 구해가지고 돌아왔고, 이제현(李齊質), 박충좌(朴忠左)가 맨 먼저 수업했으며, 성균관에서 또 다시 강남으로 사람을 보내어 경적 1만여 권을 구입하여 돌아왔으며, 충숙왕 원년(1324) 갑인년 6월 선생의 아들 죽옥공, 문인 찬성사(贊成事) 권부(權溥), 회의도감사(會議都監事) 이진(李?) 등에게 명하여 성균관에 모여 새로운 경적을 열람함과 아울러 경학을 시험케 하였다. 또한 권부는 주자의 사서집주 간행을 주청했다. 이 해에 이르러 왕이 교지를 내려「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안향(安珦)은 학교를 높이 세운 공이 있으니 부자묘정(夫子廟庭)에 영정을 모시게 하고 고향에서 제사를 올리라.」고 명하니, 흥주수(興州守) 최림(崔琳)이 선생의 초상 한 본을 모사(摹寫)하여 향교에 봉안하였었다. [본조(本朝) 세조(世祖) 정축년(丁丑年1457)에 순흥부가 폐지되자 진상(眞像)을 종손(宗孫) 지귀(知歸)의 집으로 옮겼으며, 중종 임인년(壬寅年1542)에 서원(書院)으로 다시 봉안하였고, 원나라 사람이 그린 진상(眞像)은 세 차례 전해지면서 많은 모본(摹本)이 만들어져, 소수서원(紹修書院), 봉잠서원(鳳岑書院) 두 서원과 곡성(谷城)의, 도동사(道東祠), 용인(龍仁), 직동(直洞), 순흥(順興), 대룡산(大龍山), 춘천(春川), 가산(佳山), 재령(載寧) 송우동(松隅洞), 연기(燕岐) 합강서원(合江書院), 개성(開城) 한천서원(寒泉書院) 등지에 봉안되었다.]
6년 (1319) 기미
6월.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다.
위로 조정의 관원과 아래로 선비까지 선생이 도학을 일으키고 학교를 부흥하고 인재를 양성한 공이 있다하여 성묘(聖廟)에 종사할 것을 이구동성으로 청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선생이 비록 섬학전의 설치를 건의하여 인재를 양성한 공이 있으나, 어찌 이 일로써 문묘에 종사할 수 있겠는가?」 하니, 문인 신천(辛?)이 답하기를「선생께서 정도(正道)를 밟혀 이단을 배척하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기른 일은 국가에 처음 있는 공이니 의당 종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자, 충숙왕이 이를 따라 동무(東?) 제 2위에 선생의 신위(神位)를 모시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의하면「개성부(開城府) 및 모든 도의 계수관(界首官) 외에 州郡學官은 東西兩?자諸位에 제사 지내고 學은 上十位에 제사 지내고 오직 周子, 程子, 朱子 및 弘儒 , 崔文昌(致遠) 安文成(珦) 鄭文忠( 周)와 本朝十二賢은 州府郡 의 고을마다 모두 제사지낸다.」하였다.]??????????
공민왕(恭愍王) 16년(1267) 정미
정몽주(鄭夢周),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이 모두 다른 벼슬을 하면서 태학을 겸임하면서 다시 강학의 법규를 정하였다. 이 때에 좨주(祭酒) 우탁(禹倬), 찬성(贊成) 전조년(田祖生)은 모두 도학과. 문행(文行)이 있으니 시호를 하사하라고 청했으며, 아울러 안향(安珦)의 문집 발간을 청하였다. [麗史節略]
황명(皇命) 건문(建文)
4년(1402) 임오 (태종대왕 2년)
8월에 왕이 친히 성묘(聖廟)를 찾아가 석전례(釋奠禮)를 행하고 명하기를, “후손은 영원히 천역(賤役)를 면제하고 적손을 대대로 등용하라.“ 하였다.
교지(敎旨)에「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은 학교를 일으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많은 왕의 모범이 되었다.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이 의당 후손에 미쳐야 할 것이다. 그의 자손은 비록 서자(庶子)일지라도 영원히 천역에 소속시키지 말고 적손(嫡孫)은 대대로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고 동서반(東西班)에 등용하라.」 하였다.
그 당시 각 관사의 여종을 가려 궁중에 바칠 때에 관비(館婢)1) 2인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데, 왕이 명하여 다시 내보내도록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옛사람은 노비를 바치기도 했는데 나는 그러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빼앗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명하기를,「선현은 선성(先聖)을 위해서 바쳤는데 궁중으로 뽑아 올리는 것은 선현의 뜻에 크게 어긋나니, 원적(元籍)으로 돌려보내고 이후로는 영원히 관비를 뽑아 들이지 말라.」 하였다.
효종(孝宗) 홍치(弘治)
5년(1492) 임자 (성종대왕 23년)
묘소를 수축하고, 나무를 하고 꼴을 베는 일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경연관(經筵官) 홍귀달(洪貴達)2) 등이 선생이 도학을 일으키고 학교를 세운 공을 아뢰자, 왕이 하교(下敎) 하기를,「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묘지를 특별히 개수하고 또한 초목을 금지시키라.」하였다. 이에 묘 주위의 산록을 묘전(墓田)으로 봉하고, 또 수총군(守塚軍) 30명을 배치하고 영원히 정역(丁役)을 면제하였다.
세종(世宗) 가정(嘉靖)
20년(1542) 임인 (중종대왕 37년)
폐지된 순흥부(順興府) 백운동(白雲洞)에 서원을 건립하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평소 선생을 사모하던 중,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하여 먼저 선생의 고택(古宅)을 방문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다. 이에 죽계(竹溪) 위 숙수사(宿水寺) 옛터에 사원(祠院)을 창건하니, 곧 선생이 어릴 때에 독서하던 곳이다.
22년(1543) 계묘 (중종대왕 38년)
8月 서원에 진상(眞像)을 봉안하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원이 이곳에 세워졌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당시 관찰사로서 음식 비용을 보조하였다.
23년(1544) 갑진 (인종대왕 원년)
선생의 족손(族孫)인 문정공 축(文貞公 軸)과 문경공 보(文敬公 輔)를 배향하다.
28년(1549) 기유 (명종대왕 4년)
가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편액(扁額)과 경서(經書)을 하사하다.
이해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뒤를 이어 풍기군수가 되어 관찰차(觀察使) 심통원(沈通源)에게 글을 올려,「송나라 백록동의 고사를 의거하여, 이를 조정에 건의하여 편액과 서적을 내리도록 하여, 나라에서 선생의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며 가르침을 천명하고 선비를 양성하는 교화를 밝히도록 하소서.」하니, 심통원이 퇴계의 글을 조정에 올렸다. 왕이 대신에게 이를 의논하도록 명하니, 대신들이 모두 시행할 것을 주청하여 왕이 이를 윤허하였다. ○ 예조판서(禮曺判書) 윤개(尹漑)의 청으로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에게 편액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니, 신광한이 ‘소수(紹修)’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에 왕은 친필로 ‘紹修書院’ 네 글자를 써서 내리고, 아울러 신광한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고 이를 예문관(藝文館) 으로 간행 반포케 했다. 또한 경적(經籍)을 하사하여 역마(驛馬)로 전하고 아울러 토지와 노비도 하사하였다. [태학지(太學誌)를 살펴보면, 명종 9년(1554) 갑인년에 포은 정선생(鄭先生)의 서원을 건립토록 명하고 특별히 敎旨를 내려「정몽주의 도덕성 절의는 安裕보다 못할 것이 없다.」 하고, 포은선생이 태어난 곳에 서원을 창건하고 편액, 서책, 노비, 전결 등을 모두 소수서원의 예에 따라서 내렸다고 한다.]
의종(毅宗) 숭정(崇禎)
6년(1633) 계유 (인종대왕 11년)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을 추배하다.
9년(1636) 병자 (인조대왕 14년)
겨울. 묘지(墓誌)가 이루어지다.
후손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이 짓다. [글은 4권에 보인다.]
12년(1639) 기묘 (인조대왕 17년)
겨울 신도비(神道碑)가 이루어지다.
대사성(大司成) 지제교(知製敎)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짓다. [글은 4권에 보인다.]
예전에 묘표(墓表)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로 마멸되었다. 이에 후손 응창(應昌)이 비석을 다시 세우고 옛 비석은 무덤의 남쪽에 묻었다. 당시 경기관찰사 이행원(李行遠)이 도내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소로 돌을 운반하게 하고 군졸을 보내어 일을 감독하고 또한 제수(祭需)를 도왔다. 감사(監司) 민성후(閔聖徽), 유수(留守) 김남중(金南重)과 고을 수령인 김휼(金?), 황??(黃??), 이응시(李應蓍) 등 수십 명도 이 소식을 듣고 일을 도왔으며, 관학유생(館學儒生) 심황(沈榥), 조시형(趙時馨), 김우명(金佑明) 또한 인근 향교에 통문을 보내어 일을 돕게 하였다. [이에 앞서 묘 아래 밭 10결(結)을 두었는데 관아에서 이의 부세를 면제하였고, 또한 재사(齋舍)를 건립하여 승려에게 지키게 하니 곧 ‘보위사(寶位寺)’이다. 임진왜란 후 모두 황폐해졌는데, 이해에 이르러 재사를 중건하니, 관아에서 옛법에 따라 묘지기 군사를 배치하고 제물을 보냈다. 후손 응창이 매년 10월 1일에 제사를 올리고 양전록(量田錄)을 개정하여 비치하였다.]
16년(1643) 계미 (인종대왕 21년)
장단(長湍) 임진강(臨津江) 가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건립하다. [숙종 갑술년(1694)에 임강서원(臨江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리다.]
이에 앞서 경기도 유생 백유항(白惟恒) 등이 성균관 유생 김제남(金悌男), 최기남(崔起南) 등과 의논하기를「선생께서 맨 처음 끊어진 학문을 일으켜 성인의 도를 지키고 이단을 배척하였으며, 문인 권국재(權菊齋)와 백이재(白彛齋)는 정주서(程朱書)를 수학하고 주자집주를 간행했으니 의당 함께 송경(松京)에 제사지내야 한다.」하고 경기도 선비들를 거느리고 서원을 경영하고자 했으나 왜구의 침략으로 중지되었다. 이해에 이르러 장단의 선비 이유신(李裕身)과 전 현감 허주(許?) 등이 봉잠산 아래에 서원을 건립하니, 관학유생(館學儒生) 이항(李抗), 이정기(李廷夔), 이만웅(李萬雄), 조상변(趙相?), 이경억(李慶億) 등이 고을의 향교와 서원에 통문을 보내어 북저(北渚) 김류(金?), 남파(南坡) 심열(沈悅), 잠곡(潛谷) 김육(金堉),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택당(澤堂) 이식(李植), 달성군(達城君) 서경주(徐景雨밑에周),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백석(白石) 홍무적(洪茂績), 기평(杞平) 유백증(兪伯曾), 송교(松郊) 이목(李 ?), 무하(無何) 홍주원(洪柱元), 창주(滄洲) 김익희(金益熙) 등이 모두 협력하여 도왔다. 근재(謹齋) 안축(安軸), 목은(牧隱) 이색(李穡), 유항(柳巷) 한수(韓脩), 모재국(慕齋) 김안국(金安國), 자암(自菴) 김구(金絿)를 배향하였다.
겨울에 행장이 이루어지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짓다. [행장은 아래에 보인다.]
효종(孝宗) 2년(1651) 신묘 (숭정의 연호는 갑신년(1644)에 끝나 우리의 연기로 쓴다.)
송경(松京)에 유기비(遺基碑)를 세우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와 미수(眉?) 허목(許穆)이 짓다.
6년(1665) 을미
봄에 순흥 향려비(鄕閭碑)을 세우다.
대사성(大司成) 황감(黃 戶木)과 승지(承旨) 정두경(鄭斗卿)이 짓다. [비문은 4권에 보인다.]
숙종(肅宗) 3년(1677) 정사
겨울 곡성(谷城) 도동묘(道東廟)가 낙성되다.
사림과 본손 호(琥)의 주선으로 사당을 건립하였다. 응창(應昌)의 집에 봉안된 영정을 옮겨왔으며, 문경공(文敬公) 송환기(宋煥箕)가 도동묘의 편액(扁額)을 썼다. 그 후 임인년에 침랑(寢郞) 기우만(奇宇萬)이 도내 유림과 함께 정사(精舍)의 고사를 본떠 주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선생을 배향했다.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거행하고 규약을 읽고 강학을 하다.
12년(1686) 병인
소수서원의 영정(影幀)을 거두어 보관하고 위판(位板)을 봉안하였다.
20년(1694) 갑술
임강서원 편액을 하사하다.
당시 재상들의 청에 따라서이다.
영종(英宗) 16년(1740) 갑술
가을 왕이 송경에 거둥하여 선생의 사당에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제사드리다. [제문은 4권에 보인다.]
39년(1763) 계미
도동본(道東本) 실기(實紀)가 완성되다.
후손 생원(生員) 극권(克權)이 선생의 유시(遺詩), 사실(事實), 세계(世系), 비지(碑誌)와 제현의 기술(記述), 고려시대의 사료(史料)를 수집 편찬하여 간행하고, 판본은 사당에 보관하다. [선생의 실기가 처음으로 간행되다.]
41년(1765) 을유
사손(嗣孫)을 세우고 사판(祠版)을 만들어 제사를 받들도록 명하다. [도동(桃洞)에 사당을 세움.]
11대 종손 판관(判官) 광국(光國)의 형제가 모두 후사가 없는 데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미처 사손을 세우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왕은 광국(光國)의 고조 좌찬성(左贊成) 지귀(知歸)의 넷째 아들 군수(郡守) 종(琮)의 9세손 창록(昌祿)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정종(正宗) 5년(1781) 신축
송도(松都) 한천동(寒泉洞)에 서원을 세우다.
송경 용산 아래 한천이라는 샘이 있으며 그 곁에 독서동(讀書洞)이 있으니, 곧 선생의 문인 권국재(權菊齋)와 그의 손자사위 한유항(韓柳巷)이 강학하던 곳이다. 선생의 옛집과 매우 가까운 곳이며 목은(牧隱)의 유지(遺址) 또한 한 동네에 있어 오랫동안 고을 사람들이 가리키면서 감회에 젖던 곳이었다.. 이에 이르러 경향 선비의 의논으로 선생이 옛날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주자의 영정을 봉안한 고사를 따라서 한천동에 사당을 세우고. 주자의 위판(位板)을 봉안하고 선생 및 국재(菊齋), 목은(牧隱), 유항(柳巷)을 배향하였다. [사당을 세울 때 보낸 개성 선비의 통문(通文)과 춘추향사의 축문(祝文)은 5권에 보인다.]
왕이 화성(華城)에 거둥하여 성묘를 배알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특별히 안문성공(安文成公)에게 고하다.
순조(純祖) 16년(1837) 병자
연보(年譜)가 이루어지다
후손 정랑(正郞) 재묵(在?)이 연보를 수집하고 실기를 중간하다.
헌종(憲宗) 3년(1837) 병자
봄에 송경의 유기비각(遺基碑閣)이 이루어지다.
유수(留守) 이언순(李彦淳)이 기문(記文)을 짓다. [기문은 4권에 보인다.]
고종(高宗)) 9년(1832) 임신
가을에 왕이 송경에 거둥하여 선생의 묘에 예관을 보내어 제사 드리다. [제문은 4권에 보인다.]
20년(1883)계미
관학본(館學本) 실기가 완성되다.
가을에 성균관 유생 박긍수(朴兢壽), 강영전(姜永典), 신석구(申錫九), 유치성(兪致晟) 등이 각 고을에통문을 보내 실기를 중간하고, 이를 각 향교와 서원에 반포하였다. 후손 감역(監役) 명렬(明烈)이 간행을 주관하였다.
순종(純宗) 3년(1909) 기유
윤2월 27일 지방관을 보내 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은 4권에 보인다.]
정월 28 왕이 서도(西道)로 거둥할 적에 특별히 하교(下校) 하기를,「성학을 숭상하고 유풍을 진작하여 지금까지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누구의. 공이겠는가. 가는 길에 멀리 바라보니 묘소가 보인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묘소에 지방관을 보내 제사를 올리라」 하였다.
연산본(硯山本) 실기가 이루어지다.
봄에 사림과 본손이 합의하여 중간하고 판본은 진주 연산에 간직하였다.
임자(1912)
9월에 묘에 비석을 새로 세우다.
옛날 비석은 오랜 세월로 마멸되어 증거할 수 없기에 후손 병용(秉鎔)이 경향(京鄕)의 모든 일가와 상의하여 무덤을 개축하고 병석(屛石), 상석(床石), 갈석(碣石)을 다시 세웠다. 침랑 송병화(宋炳華)가 묘갈명을 짓다. [묘갈명은 4권에 보인다.]
계축(1913)
4월 송경의 유기비각(遺基碑閣)을 중건하다.
오랜 세월로 비각이 무너졌고 또한 철도 부근이 되었는데, 선생을 높이는 일본 경관들이 비각을 피해서 철로를 부설하고 비각을 개수하였다. 이에 사손(嗣孫) 종영(鍾永)이 많은 일가와 함께 힘을 합하여 중건하였다.
갑인(一九一四)
9월에 도통사(道統祠)가 낙성되다.
국내 유림들이 당시 옛날 선생의 정사(精舍)의 고사를 본받아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주자와 선생을 배향하고 3월,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고 강론을 행하였다. 궐리(闕里) 공영이(孔令貽)가 도통사의 편액을 친히 쓰다.
을묘(1915)
가을에 도통사(道統祠) 별본(別本) 연보가 이루어지다.
사림이 협의하여, 공자편년(孔子編年) 주자연보(朱子年譜)와 선생의 연보 3종을 합간하기로 하고, 연성공(衍聖公)에게 서문을 청하고 인쇄하여 국내와 궐리에 반포하고 판본은 광명각(光明閣)에 보관하였다. 선생의 연보 원본에 빠진 글자가 있으므로 원본과 실기에 참조하여 별본을 만들었다. [실기의 판본도 함께 보관하였다.]
정사(1917)
7월 신도비(神道碑)를 중건하다.
묘 앞에 비석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마멸되었다. 국내 사림과 본손이 합의하여 묘지기가 있는 동리에 다시 큰 비석을 세웠으며 연성공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신도비의 글은 4권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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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1920)
봄 도통사본(道統祠本) 실기를 중간하다.
실기가 네 번째 간행되는 동안 여전히 교정이 정밀하지 못하고 또한 사실에 가감의 차이가 있으므로 사림이 이를 협의하여 다시 간행하였다. 전 성균교수(前 成均敎授) 이상영(李商永)이 발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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