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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출생(1945), 수필가, 서울대 언어학과 졸(1974),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원 수료, 아랍어 및 고대 이집트문화사 전공(1977∼1979), 미국 죠지타운 대학원 졸(이슬람문학 및 중동관계 전공)(1984∼1986), 주 이집트, 주리비아, 주미대사관 및 주호놀룰루 총영사관 근무(20년), 바로영어전문학원 경영(서울:1992∼2012), 《한강문학》(2020) 추대등단, 한강문학 편집위원, 저서:《사하라》(김영사, 1987), 현)향토사연구 및 SNS 블로거, 발표작품:〈조선시대 천재 이야기꾼-어우당 유몽인〉, 〈오리정에 묻힌 슬픈 로맨스-화가 나혜석 이야기〉, 〈한국 미술 큰 별이 지다-화가 천경자 이야기〉 외 |
②마크 트웨인 & 스토우 부인 하우스 탐방기
▲Mark Twain(1835∽1910) | ▲Harriot Stowe(1811∽1896) |
〈에필로그〉
케네티컷 주, 하트포드의 파밍톤(farmington) 애비뉴에는 미국 문학의 2대 거목巨木인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저택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헤리엇 스토우의 집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집이 오누이처럼 서로 이웃을 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기서 부터 이 글 쓰기의 모티브(동기)를 잡는다.
《한강문학》은 원고량을 가늠하여, 마크 트웨인① 그리고 헤리엇 스토우 ②로 분재하기로 했다.
여기는 미국 북동부지역인 뉴잉글랜드에 있는 커네티컷 주이다.
지난 3월 20일부터 이곳 뉴잉톤 타워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작은 딸집에 체류한지 벌써 한 달 반이 넘어가고 있다. 딸 내외가 사는 이 아파트는 작은 사위인 제이닥(애칭)이 UTC로 출퇴근하는 파밍톤 타운과는 자동차로 10여분이 소요되는 거리에 있다. 바로 파밍톤과 인접한 뉴브리튼 타운이다.
이 뉴브리튼 타운의 인구는 약 7만 3천명이다. 주도인 하트포드와는 약 15Km의 거리에 있다. 파밍톤이나 뉴브리튼이나 둘 다 주 도시 하트포드의 광역권 타운들이다.
커네티컷 주의 주 도시인 하트포드는 커네티컷 강(Connecticut River)이 그 도시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흐른다.
이 강은 북쪽에 있는 캐나다의 퀘백 지역에서 발원하여 미국 쪽으로 들어 와 뉴햄프셔 주와 버몬트 주를 지나서 커네티컷 벨리를 지나 곧장 하트포드에 이른다.
그리고 이 강은 메사추세츠로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다시 남부 커네티컷을 거쳐서 건너편에 롱아일랜드 사운드가 마주 보이는 대서양 연안에서 강물을 쏟아내며 그만 흐름을 멈춘다.
그런데 먼 옛날∽ 아! 지금부터 약 380여 년 전에 인근 플리머스 식민지와 메사추세츠 식민지에서 살고 있던 일부 영국 청교도들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635년에 바로 이 커네티컷 강변에 펼쳐진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로 몰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지역에 정착촌을 만들고 속말로 아예 말뚝을 박고 주저앉아 살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이 개척한 정착촌이 하트포드와 스프링필드였다. 그러나 중심지는 역시 하트포드였다. 특히 하트포드에 커네티컷 정착촌을 세운 지도자는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였다.
그 다음에 하트포드에서 커네티컷 강서 쪽에 있는 평야 파밍톤(Farmington)에 문학가, 사진작가, 화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시회개혁운동가 등 상당수의 진보적 성향을 지닌 예술인과 지식인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1800년대 초이다.
파잉톤(Farmington)은 옛날부터 농장(Farm)이 많은 타운(Town)이어서 그이름이 파밍타운(Farming+Town)을 줄여서 파밍톤(Farming+ton)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의 땅을 대부분 소유한 사람은 윌리엄 아이말리(William Imaly)라는 지주였다.
그는 이곳에 대농장인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개척하려다가 그 꿈을 줄여서 자기 이름을 붙인 아이말리 농장(Imaly Farm)을 만들었던 것같다.
그런데 1853년에 죤 후커(John Hooker)와 그의 매형인 프란시스 질레트( Francis Gillette)가 아이말리의 땅을 몽땅 다 샀다. 이 죤 후커는 바로 토마스 후커가 하트포드 인근 지역을 커네티컷 식민지로 개척하는데 앞장 선 지도자의 후손이었다.
죤 후커의 부인인 이사벨라는 부부의 공동재산권을 주창하여 이를 1877년에 주의회를 통과시키는 등 남녀평등권을 주장했던 앞서가는 선각자적인 여성이었다.
이들 부부는 매입한 땅을 쪼개어 문학, 미술, 사진, 노예제도 폐지, 사회개혁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참여하고 있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팔게 된다.
물론 진보적 사상을 지닌 예술인이나 문학인들이 함께 인접해 살면서 서로 울타리 없이 담론하며 살 수 있는 타운을 만들기 위해 각자의 터를 값싸게 마련해 주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일부 땅을 산 사람 중에는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헤리엇 스토우도 끼어 있었다. 더욱이 헤리어 스토우는 바로 이사벨라의 이복 친언니였다.
② 헤리엇 비처 스토우는 누구인가?
“아, 그러고 보니 바로 당신이 큰(大) 남북전쟁을 일으키게 한 그 책을 쓴 작은(小) 여인이군요!”
이 말은 1862년 12월 2일,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초대한 만찬에서 스토우 작가를 소개 받았을 때 한 인사말이었다.
그 때는 스토우 작가의 《톰아저씨의 오두막 집》이라는 소설이 발간된 지 10년이 되던 해 였다. 이처럼 스토우 작가는 미국에서의 영향력이 큰 거목이 되어있었다.
물론 링컨 대통령이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근거가 애매하지만 좀 과장해서 칭찬을 해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이라는 소설은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 여론이 있을 때 나온 소설로 북부 미국인들에게는 큰 박수와 찬사를 받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에 반해 남부 미국인들에게는 비난과 격분을 일으켜 스토우 작가에게는 바가지로 욕설과 비난이 끊임없던 때였다.
아무튼 그 후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지고, 연극이 되어 여러 번 무대에도 올려졌다.
마크 트웨인의 집 앞 정원 건너편 1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헤리엇 스토우 안내 센터와 그녀의 집이 있었다. 먼저 방문객 센터에 들려 여러 전시물을 구경했다. 그리고 바로 왼쪽에 헤리엇 스토우가 23년간 살았던 다락방을 포함하면 3층이 되는 하얀 목조건물이 있었다.
그 집 앞에는 포레스트 스트릿이 있었다. 그 곳의 주소도 73 Forest, Hartford로 되어 있다. 집 주면은 온통 화초들이 에워싸여 있었다. 특히 탐스러운 수국 꽃이 유난히 눈에 많았다.
실내는 마크 트웨인의 화려함에 비하여 다소 심플하고 조촐하게 보였다.
당대 베스트셀러 작가의 수입액을 생각해보면 부엌이나 응접실이 차라리 검소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무래도 노예들의 비참한 생활환경을 자주 목격했고 또 두 부부가 노예 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에 스스로 자제하여 언행이 일치되는 건전한 삶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헤리엇 스토우 하우스 응접실 모습 | ▲헤리엇 스토우 하우스 부엌 모습 |
물론 스토우 작가의 친정 가족들이 대부분 청빈과 금욕을 강조한 캘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축제도 거부했었다.
게다가 그간 가족상에 불행한 사건이 많아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기에 마음에 여유도 없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집 둘레도 여러 번 돌아다니며 상념에 잠겨 보았다.
헤리엇 스토우 가문은 대대로 기독교 목사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아버지인 리만 비처(Lyman Beecher)도 당대에 알아주는 캘빈주의 개신교 목사였다.
그녀의 오빠인 헨리 비처(Henry Beecher)는 목사이면서도 일찍이 1850년대부터 노예제도 반대 운동에 앞장을 섰었다.
스토우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쓰게 된 것은 그녀가 커네티컷에서 살았을 때 도망쳐 나온 노예들로부터 직접 듣고 목격했던 경험들이 크게 자극과 동기부여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올케로부터 그런 경험을 소설로 써보라는 권유를 받은 것도 펜을 들도록 거들어 주었다. 드디어 1851년에 연재물로 발표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소설책으로 출간하였다.
나도 이 책을 이곳 북숍에서 매입하여 읽었다.
스토우 작가는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다. 마치 양이나 소처럼 주인 마음대로 팔아넘기곤 하였다. 이 때 흑인들이 겪는 생이별을 폭로하면서 노예제도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통렬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자는 메인 캐랙터인 ‘톰 아저씨’가 강제로 이별을 당하는 가족들을 보고 그저 연민의 정으로 슬퍼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에 열중하는 사도 바울이나 성자의 모습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한편 흑인 여자 노예인 엘리사는 노예 상인들이 자기 이들을 사가려고 하자 아들을 데리고 야간 탈주하는 모습을 묘사하여 노예의 해방을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초봄의 오하이오 강은 얼음이 녹아기기 시작해서 도강하기에는 위험한데도 목숨을 걸고 깨어지는 얼음을 딛고 도망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러다가 깨진 얼음 사이에 빠지기도 하고, 마침내 가브리엘 천사 같은 착한 백인으로부터 구조되기도 하고, 이런 묘사를 통해 노예해방 과정에 험난한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결국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감을 독자들에게 심어 주려고 했다.
그리고 노예제도 때문에 생긴 백인 주인들의 사악함과 잔인성을 동시에 노출시키면서, 스토우 작가는 현재 남부지역에서 유지되고 있는 노예제도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에둘러 묘사하느라 애쓴다.
헤리엇 스토우는 두 살이 아직 덜 된 자식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애통함을 겪었기에 자식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흑인 엄마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송아지나 강아지처럼 팔려가서 또 노예생활을 해야 하는 대를 물리는 비극을 너무나 안타까워하고 분노했다.
이런 감정의 발로를 바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에 담아 내에 세상에 폭로한 것이다.
발표 직후부터 그 소설에 대한 반응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다.
그 소설은 북부 미국에서만도 무려 30만부나 팔렸다. 당시 이 판매부수는 기적에 가까운 수치였다.
마침내 1850년 북부 미국에서는 〈도망자 노예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부 미국에서는 도망친 노예를 숨겨주거나 도와주는 사람은 법으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미국보다 영국에서 더욱 더 큰 히트를 쳤다. 영국에서는 노예제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여론이 치솟았다.
아마도 예전 자기네 식민지였던 미국이 전쟁을 불사하고 독립을 하더니 미국이 남북간에 노예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자, 속으로는 잘 됐다 하고, 차라리 남북이 이제는 서로 갈라서라는 속셈도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영국정부는 남부 미국과 경제적 관계가 깊었지만 내놓고 남부 미국을 지지하기에는 여론 때문에 곤란한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헤리엇 스토우의 소설인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이 미국 남북전쟁을 촉발시킨 도화선이었는가?
이에 대해서 지금가지 왈가불가 논쟁이 심심치 않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소설 때문에 남북 전쟁이 일어 난 것은 아니라 해도, 남북전쟁이 일어난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하나였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톰 아저씨 오두막집》은 노예제도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 소설로서 미국 남북전쟁을 일으킨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 소설을 쓴 작가 헤리엇 스토우는 커넷티컷여자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으며 노예제도 폐지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톰은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로서 그의 고통스러웠던 노예생활 스토리는 수 백 만 독자들을 감명시켰다.
이 소설은 19세기에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렸던 히트작 베스트셀러였다.
그런데 이 소설은 노예제도에 대해서 반대하면서도 흑인에 대한 일말의 편견이 있는 소설이라고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악평을 받았다.
일반 독자들도 이 소설에서 나오는 일부 사람들을 정당하게 보지 않고 과소평가하는 등 이중적인 인물로 많이 묘사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면도 있다고 주장한다.
《톰 아저씨 오두막 집》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설의 첫 페이지는 쉘비(Shelby) 가족이 그들의 노예인 톰과 해리 소년을 경제적 사정으로 노예상인에게 팔려는 상담 장면부터 시작된다.
결국 두 노예는 팔리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팔려가는 여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은 전 세계에서 대학교재로서 강독되기도 했다.
각 도서관마다 장서 목록에 올라 있고, 이 책의 소재가 여러 단체나 그룹에서 토론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만약 스토우가 그 소설을 그렇게 과장해서 쓰지 않았다면 남북전쟁 때 희생자가 덜 생겼을 거라 말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책 때문에 작가의 아들도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점은 뒤에 좀더 상세히 얘기하려고 한다.
그녀가 쓴 책이 남북 전쟁이 발발시켰다면, 그 전쟁 때 자기 아들 (Frederick)도 참전하여 싸우다가 전투 중 날아 온 포탄의 파편을 오른쪽 귀에 맞는 부상을 크게 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우울증과 알콜 중독자가가 되어버린 아들은 폐인처럼 지내다가 가출을 하였다. 이 충격으로 스토우도 정신적 고통이 심하여 노년에는 길에서 젊은이를 보면 자기 아들로 착각하는 등 소란을 벌렸던 일화도 있다.
아들 프레드릭(Frederick)은 헤리엇 스토우가 죽기 전까지 25년간 실종상태였다.
이런 면에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스토우도 자기가 쓴 소설이 부메랑이 되어 자기 아들이 희생을 당했고, 아들 프레드릭(Frederick) 때문에 결국은 자신도 고통을 당했던 희생자의 한 사람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헤리엇 스토우 남편의 이름은 캘빈 스토우(Calvin Stowe)이다.
둘 다 미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 출신이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1832년에 헤리엇은 부친 리만 비처(Lyman Beecher)를 따라 오하이오주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 있는 레인 학교(Lane Seminary)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때 캘빈은 오하이오에 있는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서 헤리엇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캘빈이 당시 1834년 여름철에 신시내티 일원에서 시작되어 유행 중이던 콜레라에 전염되어 사별하게 되자 얼마 후 헤리엇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1836년에 9월에 헤리엇은 쌍둥이 자녀 해티(Hatty)와 엘리바(Eliza)를 낳았다. 아들 프레드릭은 1840년 5월에 신시내티 근처에 있는 오하이오주, 월낫 힐즈에서 출생하였다. 그런데 네 번째 낳은 아들은 산후가 좋지 않아서 2개월간 외부출입을 제대로 못하고 침실에 틀어박혀 고생을 했다.
앞서 출생한 프레드릭은 신시내티에 처음으로 문을 연 보육원에 맡겼다.
그런데 몸이 허약한 헤리엇은 글도 쓰고 나머지 세 자녀를 돌보느라 지쳐서 프레드릭을 무려 15년간이나 보육원 신세를 지게 했다. 아마도 이 때 그 아들이 정신적 우울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편인 캘빈도 교편생활에 바빴다. 게다가 학교 재정형편이 좋지 못하여 앞장서서 기금을 모금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가족과는 자주 떨어져 생활을 했다.
스토우 부인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쓰기 전에도 가정문제로 끊임없이 많은 풍파와 비극이 일어났다.
1843년 여름에는 헤리엇 스토우의 오빠인 죠지가 갑자기 자살을 했다. 그 다음 3년 동안에 헤리엇은 두 번이나 유산을 겪었다. 게다가 당시 유행병이던 콜레라에 걸려서 된통 고생을 했다. 또 병을 추스른 2년 뒤에는 셋째 아들인 사무엘(Smuel)을 1848년 1월에 출산했는데 그 아이는 두 살이 되기 전에 콜레라에 걸려 죽는 비극을 겪는다.
남편 캘빈(Calvin)은 메인 주 브룬스윅(Brunswick)에 있는 보우도인(Boudoin) 대학에 교수로 취직이 되어, 1850년 4월에 헤리엇 스토우는 세 자녀와 함께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
스토우는 메인에서 살림이 점차 안착되자 비로소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수선한 그 때 쓴 그 소설이 그녀에게 명성을 안겨준 《톰아저씨의 오두막집》이었다.
이 소설은 앞서 언급했듯이 1851년 6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내셔날 이라(National Era)〉라는 잡지에 연재물로 게재되었다. 아무튼 이 소설로 스토우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헤리엇은 유명인사가 된 후에 여러 곳에서 특별 강사로 초대되었다.
1853년 봄에 반 노예제도를 전파하기 위해서 배편으로 영국에도 갔었다.
《톰 아저씨 오두막집》이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되면서 해외에서도 그녀에 대한 인기가 폭발하고 있었다.
한편 남편은 보우도인 대학에서 한 학기만에 그만 두고 여기 저기 보따리 강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토우 부인은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활용해서 더욱 더 소설 쓰기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글쓰기에 전념을 하다보니까 자녀 양육 문제에 제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늘 고심했었다.
사무엘은 두 살 때 콜레라에 걸려 죽고, 헨리는 19살에 익사하였다.
메이(May)는 1843년생인데 마약 중독으로 40대에 죽었다. 그리고 아들 프레디릭은 알콜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아들 프레디릭은 16살 때부터 술을 너무 심하게 마셨다. 스토우 부부가 1856년에 2년 동안 유럽 여행을 할 때 프레드릭의 술버릇을 고쳐달라고 외삼촌인 토마스 비처(Thomas Beecher)에게 맡겨두고 여행을 떠난적도 있었다.
외삼춘은 뉴욕에서 목사로 있었는데 알콜 중독자들이나 매춘부들, 부랑자들을 교화시키며 선교활동을 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이번에는 특별 물(水) 치료로 우울증, 알콜 중독 등을 치료한다는 수용소가 근처에 있다기에 그곳에도 맡겨보았다.
물 치료요법이란 환자들에게 자주 목욕을 시키고, 생수를 많이 마시게 했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은 담요로 온 몸을 둘둘 말고 기도를 하여, 몸에서 나쁜 기운이 빠져나가 정신을 정화시킨다는 것이다.
좌우간에 아들 프레드릭은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데 막내아들인 헨리 엘리스는 어느 날 커네티컷 강에서 대학 동급생들과 수영을 하다가 익사하고 만다. 집에 와서 회복 중에 있던 프레드릭은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때인데 집안이 어수선해서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1859년 8월에 가족이 유럽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프레드릭도 이제는 자기로 제대로 처신을 해보겠노라고 하면서 여행에 합류하였다. 그는 등산이 알콜 중독 치료에 좋다는 말을 듣고 잠시 가족을 떠나 홀로 난코스의 등반을 하기도 했다.
스토우 집안은 이처럼 가족들의 비극이 겹치며 고통을 많이 겪는다.
아들 프레드릭은 1860년 3월 31일에 로마에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자기가 오래 동안 가족에게 골칫거리였던 것을 후회하면서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는 여행과 등산을 하면서 건강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프레드릭은 미국에 돌아 와서 1860년 가을학기에 하바드 대학에 입학했다.
삼촌들은 대부분 목사여서 역시 목사가 되기를 바랐겠지만, 스스로는 유명한 의사가 되어 가문에 영광을 드리겠다고 했다.
하바드 대학 1년생으로 다음 해 봄학기를 맞을 때 발발한 남북전쟁은 의사가 되고자 한 그의 꿈을 산산이 부셔버렸다.
링컨 대통령이 남부 반도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75,000명의 자원병을 모집했다. 프레드릭도 1861년 5월에 입대하였다. 3주간 군사훈련을 받고 보스톤 컴몬 광장에서 훈련 결과를 보여 주는 출정식에도 나갔다. 그 출정식에는 애국심에 끓는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용감히 싸워서 참전용사로 칭해졌다. 그러나 한 전투에서 포격을 받고 대포의 파편이 오른 쪽 귀 부위에 박혔다. 결국 대위로 진급하여 조기 제대하였다. 그는 군에서 퇴역한 후에 부모가 살고 있는 커네티컷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군에서 받은 정신적 상처가 심했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게 된 술이 다시 알콜 중독 상태까지 만들었다. 술 중독을 벗어나려고 스스로 교회에 다니는 둥 노력하였지만 별무신통이었다. 그는 한 번 나가면 며칠 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술 중독과 우울증 치료에는 따뜻한 남쪽 지역이 좋다하여 플로리다에 있는 목화 농장을 임대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레몬 농장을 매입해서 그곳에서 요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장 관리인과 어울려 술을 더 마셨다.
1867년에 스토우 부부는 아들을 뉴욕에 있는 알콜 중독자 치료 센터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술 중독을 떨칠 수는 없었다.
헤리엇은 날마다 자식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했다. 그녀는 아들이 꼭 회복될 것임을 믿었다.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자식을 구해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에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그러던 중 1871년 여름에 프레드릭은 플로리다에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는 알콜 중독을 고치기 위해서 선원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그의 부모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사람을 고용하여 그를 찾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아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는 자살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소식이 두절되기 전에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이 통증과 우울증을 끝장내기 위해 자살을 할런지도 몰라요. 내 자살은 가족들에게 불명예가 되겠지만요”
그가 사라지자 어머니 헤리엇은 정신상태가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기 전 25년 동안을 허약한 정신 상태에서도 자식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를 하며 보냈다. 혹시 자식한테서 편지라도 오려나 하여, 집에서 멀리 떨어진 우체국에 헛걸음하는 줄 알면서도 수시로 다니곤 하였다.
한번은 이런 극적인 일도 있었다.
하트포드 거리에서 아들 프레드릭 같이 생긴 젊은이를 보고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나의 아들! 프레드야! 이 어미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아느냐!”
그러나 그 청년은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어머니의 모정이 너무나 눈물겹기 때문이다.
자기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써서 남들이 생각하기를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그 책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전쟁에서 죽었는데, 그리고 유가족에게 많은 고통도 주었는데, 이제는 그 책 때문에 아들이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어 술중독과 우울증에 걸려 결국엔 실종이 되고 자기는 그 실종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고통 속에서 죽어 갔다는 슬픈 모정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톰 소여의 모험》 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요약본
〈내용 요약〉
《톰 소여의 모험》
미시시피 강변의 가상의 마을 세인트 피터즈버그에 살고
있는 개구쟁이 소년 톰 소여는 마을의 대표적인 악동이
다.
폴리 이모의 집에 같이 살고 있으며 친구로는 옆집 소
녀 베키와 죽마고우인 떠돌이 소년 허클베리 핀이 있다.
장난꾸러기 톰은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알아주는 마을 제일의 말썽꾸러기로, 항상 폴리 이모의 야단을 맞고 산다.
하루는 폴리 이모로부터 담벼락에 페인트칠을 하라는 벌을 받고 페인트칠을 하는데, 친구들에게 페인트칠이 재미있으니 한번 경험해보라며 그 대가로 먹을 것을 상납 받는 꾀돌이였다.
어느 날 밤, 허클베리 핀과 함께 공동묘지에 갔다가 우연히 살인 현장을 목격한다.
살인범 인디언 조는 머프 포터 영감에게 누명을 씌우나, 톰과 허클베리는 인디언 조의 보복이 두려워 그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기로 맹세한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톰은 머프 포터 영감의 재판에서 인디언 조의 범행을 밝히지만, 도망친 인디언 조의 보복을 두려워한다.
그 후 허클베리와 함께 보물찾기에 나선 톰은 복수를 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온 인디언 조와 그의 보물에 대해 알게 되고, 그러던 중 톰은 베키와 함께 맥두걸 동굴로 소풍을 갔다가 길을 잃고 마는데, 동굴 안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던 톰은 동굴 속 깊숙한 곳에서 돌아다니는 조를 발견하고 몸을 숨긴다.
조를 피해 몰래 베키와 동굴을 빠져나온 톰은 조가 동굴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톰은 베키를 동굴에서 구해왔다는 칭찬을 듣고, 동굴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폐쇄된다.
나중에 조는 폐쇄된 동굴 속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발견 당시 동굴의 철문에 얼굴을 바싹 대고 아사한 상태였으며, 주변에는 두 동강 난 칼과 박쥐의 발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박쥐를 잡아먹다 마지막에는 양초까지 먹어치우고 끝내 굶어 죽은 것이다.
시체는 동굴 입구 가까운 곳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톰은 허크와 같이 동굴의 봉쇄되지 않은 다른 출입구로 들어 가서 보물을 찾아내고, 마을로 돌아와서 보물을 찾아냄과, 허크와 반씩 나눈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흑인 탈출노예와 함께 마을을 떠나게 된 허클베리 핀에게 모아둔 돈을 전달하며 눈물겨운 작별을 하는 장면이 마지막을 장식하고, 내용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이어진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어느 화가가 그린 톰 아저씨의 모습 | ▲토마스 핸도슨(톰 아저씨의 모델이었던 노예출신) |
켄터키주(州)의 지주 셸비 부부는 노예들에게는 마음씨 좋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셸비는 사업에 실패하고 막대한 빚을 져 농장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충실하였던 노예 톰과, 혼혈 노예 엘리저의 다섯 살 난 아들 해리를 노예상인에게 판다.
아들 해리와 헤어질 것을 알게 된 엘리저는 해리와 함께 도망치고, 해리의 아버지인 조지 해리스를 만나 평화주의 교회인 퀘이커 공동체의 도움으로 무사히 캐나다에 당도한다.
한편 톰은 팔려가는 도중, 배가 강을 따라 내려갈 때, 같은 배의 승객인 에바의 생명을 구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의 아버지 오거스틴생클레어에게 팔려가고, 그곳에서 한동안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에바와 오거스틴이 사망하고 냉혹한 시몬 레글리에게 다시 팔려가서 레글리의 목화밭에서 심한 학대를 받는다.
톰은 레글리의 다른 노예인 캐시와 에믈린의 탈출을 도와주고 그로 인해 레글리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톰이 죽기 직전 톰의 원래 주인인 셸비 부부의 아들 조지는 톰을 다시 사들이려고 찾아오지만, 톰은 결국 사망한다.
조지는 켄터키 본가로 돌아가 노예들에게 톰의 희생에 대해 알리고, 모든 노예를 풀어준다.
〈에필로그〉
필자가 《톰 소여의 모험》을 읽은 것은 1955년 고흥동초교 5학년 때였다. 그 때는 4학년이 1, 2반 두 학급이 있었다. 나는 2반에 속했는데, 1반에 속한 얘들의 가정 형편이 좀 더 나은 편이었다.
대부분 그들의 부모는 읍내에서 공무원이나 상업을 하여 만화책이나 어린이용 명작 책들을 더 많이 사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제법 잘사는 애의 아버지가 어린이용 명작 소설 30권을 무료로 기증해서 1반 애들은 서로 돌려가며 읽었다.
나는 2반 반장을 했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몇 권을 빌려서 보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보물섬》, 《걸리버 여행기》, 《거지왕자》, 《소공자》, 《소공녀》였다. 그러나 《톰 소여의 모험》은 서로 보려고 했기 때문에 차례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해 겨울 방학에 동네에서 또래들 중에서 힘이 가장 세고 겁이 없는 열다섯 살인 정현이 형이 있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초등학교도 2학년 때 중퇴하고 자기 집 땔감용 푸나무나 등걸 뿌리를 캐러 다니며 집안 일을 돌보며 지내는 형이었다.
그는 내 작은 형과도 같은 또래여서 늘 우리 집에 놀러 다녔다. 겨울에는 우리 집 사랑방에서 우리 집 머슴과 정현이 형과 또래인 담살이 영춘이가 자는 건너 방에서 자주 자고 가기도 했다. 나도 겨울 밤이면 들려서 먹보 김센과 담살이가 멍석을 짜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쇠죽을 끓이느라고 부엌에 잉글거리는 불이 있어 고구마를 구워먹으려고 가끔 들렸었다.
그럴 때면 의례히 정현이 형도 와서 멍석 짜는 것을 배우겠다고 볏집을 조금씩 추스려서 먹보 김센에게 주면서, 먹보 김센은 이를 잽싸게 받아서 날줄인 새끼줄 사이를 오가며 씨줄로 삼아 엮어나가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럴 때 정현이 형은 나에게 그간 읽었던 소설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내가 읽었던 어린이용 소설 책 이야기를 대충대충 내 마음대로 꾸며서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날도 정현이 형이 읽은 소설 이야기가 있으면 더 해보라고 하는 데 더 읽은 게 없었다.
“정현이 형, 내가 읽은 책은 옆 반 책들인데 게네들이 잘 안 빌려줘.
이젠 말할 게 없당께!”
“그럼 나가 소설 책 구해오면 더 이야그 해 줄래?”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형이 구해 와 보랑께!”
이렇게 말한 후 며칠 뒤였다. 정현이 형이 소설 책을 30권이나 구해왔다. 바로 옆 반에 있는 책들이었다. 옆 반에서는 그 다음날 난리가 났다. 학교에 밤중에 책 도둑이 들어서 옆 반 소설 책을 모조리 도난당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직원조회를 통해서 도난 당한 책 찾기 운동을 전교생에게 내렸다.
찾는 요령은 소설 책 마다 표지와 페이지를 넘기는 옆구리에 빨간 인주로 네모난 도장이 찍혀있다는 것이다. 그런 도장 찍힌 책을 누가 읽고 있으면 곧장 신고하라는 지시였다.
그 말을 듣고 집에 오자마자 나는 정현이 형을 만나 어찌된 일이냐고 따졌다.
“어허! 염려 말랑께! 나는 핵교를 중퇴해서 글을 잘 못 읽응께∽ 그라고 울 아부지기 말했당께롱. 자고로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했어. 니, 넘 걱장 말그라. 그 도장은 나가 낫을 잘 갈아서 싹 지어났응께 너무걱정 마랑께!”
나는 도둑을 알고도 학교에 신고를 못 했다. 그 당시는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먹고 살기가 힘들어 웬만한 것은 훔쳐가도 도둑질로 생각하지를 않았다.
더구나 정현이 형이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라고 한 말을 듣고 보니 그럴싸해서 약간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정현이 형이 야밤에 훔쳐 온 그 책들 속에 《톰 소야의 모험》이라는 책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정현이 형에게 스토리 내용을 전해 주었다.
정현이 형은 스토리가 너무 재미잇다고 박수를 치면 책 도둑질 한 것을 〈정현이의 책 도둑 모험〉이라고 치부하고 좋아했다.
지금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정현이 형은 20세를 넘기지 못 하고 가난 때문에 치료를 하지 못 해 일찍 병사했다.
나는 지금 까지 《톰 소야의 모험》 이야기기 나오면 죄를 지은 것처럼 양심의 가책같은 것을 지금도 희미한 상처가 되어 느낀다.
지금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2000여권이 넘는다. 나는 언젠가 이 책들을 모교에 기증하여 그 때의 신고 안한 죄 값을 치르려고 한다. 이것은 60년간 혼자 품고 온 나의 비밀스러운 고백이다.
그런데 당시는 ‘톰 소여’가 아니고 번역한 사람은 ‘톰 소야’라고 했다.
필자가 성장해서 알고 보니 당시 일본에서 톰 소여(Tom Soyer)를 ‘도무소야(トム・ソーヤ)’라고 번역했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일본 번역판을 그대로 번역하였기에 책 제목도 ‘톰 소여의 모험’이 아니고 ‘톰 소야의 모험’이라고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마크 트웨인의 집과 헤리엇 스토우 작가의 집이 오늘날까지 보존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알아보며 마침표를 찍겠다.
우선 이 두 집이 보존하게 된 것은 바로 캐서린 데이(Catharine Day)의 노력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그녀는 누구인가?
캐서린은 1870년 커네티컷 하트포드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하트포드 출생이다. 그녀의 친가나 외가는 하트포드 지역 내에서는 당당한 명문가문이었다. 부친인 존 캘빈 데이(John Calvin Day)는 지역에서 저명한 변호사였다.
그녀의 외할머니가 바로 이사벨라 비처 후커였고 이사벨라의 이복 언니가 작가인 헤리엇 스토우였고 헤리엇 스토우는 바로 그녀의 이모 외할머니였다. 그러니까 외손녀인 캐서린이 이모 외할머니의 집을 보존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말이 된다.
캐서린은 젊었을 때 유럽에서 생활을 했고, 그 곳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래서 평소 예술품과 조각품,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1927년에 뉴욕에서 고향인 하트포드로 돌아 와 살게 되었다. 그 해에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 옛 건물들을 허물고 그곳에 공장이나 아파트 등 다주택을 짓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도로에 아스팔트를 만든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녀는 이모 외할머니 집과 이웃집인 마크 트웨인의 집이 문화사적 보존 가치뿐만이 아니라 건축물 스타일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두 사람도 미국 문화계에서 거목임으로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이들 집 보존 캠페인에 앞장섰다.
헤리엇 스토우 집은 이모 외할머니 집이니까 당연히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고, 또한 마크 트웨인의 집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마크 트웨인의 세 딸과도 친하게 지냈고, 특히 그 집을 부러워하며 그 집에 찾아가 자주 놀던 곳이었다.
그래서 캐서린은 시가 운영하는 시 발전 기획위원회에도 참여하고 하트포드 두 하우스를 보존하기 위한 하트포드 우호회에도 참여했다. 이런 단체들을 통하여 매입 기금운동을 펼쳤고, 다행스럽게 두 집이 살아남게 되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났던 1861년 전에 이 지역에는 농장들이 많이 있었고 간혹 서너 채의 농장 관리인 주택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다. 남북 전쟁 전에는 남부에서 도망쳐 나온 노예들이 캐나다로 가기 위해서 이 곳을 거쳐 가는 노예들이 많았는데 커네티컷은 그들의 중간 거점 경유지였고 누크 팜(Nook Farm)도 바로 그러한 거점 중의 하나였다.
이 곳 농장 관리자나 농장주인들은 그들에게 캐나다로 가기 전에 은신처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도망치는 노예들에게는 안전지대이며 또한 안전가옥이 있는 곳이었다. 또한 안전을 제공한 이곳 사람들도 이곳을 누크 팜(Nook Farm)이라고 불렀다.
이 누크(nook)라는 말에는 은연 중 피난처(asylum)나 안전가옥(safetyhouse)라는 그런 의미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어, 마크 트웨인과 스토우 작가가 살고 있을 때도 이 지역에서 자기네 끼리의 모임을 〈누크 농장 써클(Nook Farm Circle)〉이라고 불렀다.
인근 매사추세츠의 콘코드에서 왈든 호수(Walden Lake)를 중심을 한 지역에서 미국의 일부 문인들과 자유 신학자들이 모여서 산 적이 있었다. 헨리 쏘로우(Henry Thoreau, 1817∽1862), 랄프 에머슨(RalphEmerson, 1803∽1882) 등이 그들이다.
이 때 콘코드에서 서로 자주 만나 모임을 가졌던 이들을 〈왈든 클럽〉이라하였다. 이들은 종교의 세속화와 타락과 도시의 산업화로 인한 도시생활의 오염을 피하여 자연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고독과 명상을 통해서 자연이 주는 희열을 느끼고자 했다.
특히 기독교의 신을 벗어난 대령(Great Soul)의 존재를 믿고 서로 담론하며 살았었다. 특히 남북전쟁 후, 흐트러진 사회 기강과 산업화로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 일부 문학인들과 자유 신학과 초월주의에 심취하여 자연 외경사상과 동양의 불교적, 도교적 사상도 탐구하면서 명상을 자주 하며 일면 도가적인 생활을 추구하려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콘코드의 〈왈든 클럽(Walden Club)〉과 하트포드의 〈누크 팜 써클 (Nook Farm Circle)〉은 일맥상통하였다.
이어서, 1872년에 이곳을 매입하여 문학인들이나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사회 개혁운동가들이 서로 이웃을 하며 사는 드림 타운 건설을 꿈꾸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존 후커와 윌리엄 질레트였다. 이 두 사람은 역시 열렬한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창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둘은 바로 토마스 밑에서 일을 배우고 법률공부를 했다. 그러니까 존 후커는 땅 주인의 멘토였다.
이사벨라와 메리의 언니인 헤리엇 비쳐 스토우 작가는 1864년에 누크팜으로 이사를 왔다.
헤리엇 스토우는 집이 딸린 땅을 사서 그 집에 이사를 해 왔다. 그 집은 오크홈(Oakholm)이라는 별칭이 있는 집인데 리모델링하였다. 그러나 계속 수리비와 관리비가 많이 소요되자 현재의 집을 새로 지어 살았다.
제일 먼저 그곳에 땅을 산 사람은 바로 헤리엇 비처 스토우 작가였다. 스토우는 바로 땅주인의 한 사람인 존 후커의 부인 이사벨라는 바로 헤리엇 스토우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그러니까 세 자매들인 이사벨라, 메리, 헤리엇이 서로 이웃이 되어 누크 팜에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마침 헤리엇의 남편인 캘빈 스토우도 앤드오버 대학 교수직에서 은퇴를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1873년부터 1891년 임종 시까지 그 집에서 계속 23년간을 살았다.
마크 트웨인은 1870년에 결혼하여 1871년에 하트포드 누크 팜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결정하기 몇 개월 전에 마크 트웨인은 소설 《Innocent Abroad》의 출판 교섭을 위해서 하트포드에 왔을 때 너무나 이 지역이 마음에 들어 이사를 결정한 계기가 되었다.
《Innocent Abroad》는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좀 애매하다.
그저 〈순진한 사람들 해외여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철부지의 세계여행〉이라 해야 할지∽ 아무튼 출판 교섭 중에 마크 트웨인과 부인 올리비아는 이 지역의 땅 주인인 존 후크의 집에서 무료로 기거하였다. 자기 부인 올리비아와 땅주인의 부인인 이사벨라는 막역한 친구사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하트포드는 미국 내에서 유력한 출판사가 많아서 출판과 인쇄업의 중심지였다.
사실상 마크 트웨인이 이 지역에 땅을 사고 집을 짓게 된 것도 부인인 올리비아가 땅주인 부인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수월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부인 올리비아는 존 후커의 부인인 이사벨라와 친구였기에 그래서 그녀는 헤리엇 스토우와도 가깝게 지냈다.
처음에는 월세 집에서 살았다. 한동안 전세살이를 한 후 마크 트웨인 부부는 1873년에 존 후크로부터 집을 지을 땅을 매입하였다.
그 해 여름부터 집 건축을 시작했다.
집을 건축하는 동안 마크 트웨인 부부는 유럽을 여행하며 지냈다.
드디어 1974년 9월 19일, 집의 건축이 완공되자 새 집으로 입주를 하게 되었다.
당초 땅 매입비와 건축 비용은 부인 올리비아가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지불했다.
그러나 가구류와 부엌 용품, 실내 인테리어 장식, 조각품과 명화, 서적등을 구비하느라 추가 비용이 꽤 많이 소요 되었다.
그러나 다행이 입주한지 2년만인 1876년에 “팡!” 하고 톰 소여의 소설이 히트를 쳐서 그 판매 수입으로 추가 경비를 모두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집은 마크 트웨인 가정에 복(행운)을 가져다 준 복집(Happy House)이었다.
다시 반복되는 말 같지만 마크 트웨인은 이 집에서 1874년부터 1891년까지 17년간을 살았었다.
이 집에서 입주했던 1874년에 둘째 딸 클라라(Clara)를, 1880년에는 막내 딸 진(Jean)이 태어났다. 마지막까지 이 집에서 살았던 1891년에 큰딸 수지는 19세, 둘째 딸 클라라는 17세, 막내 딸 진은 11세였다.
이 해 마크 트웨인 집 보존 운동을 펼쳤던 캐서린은 21세였다.
마크 트웨인의 집은 방이 19개 있었고, 딸들에게는 각자의 방도 주어졌고, 또 가정교사를 불러서 가르칠 수 있는 교실 방도 있었다.
아마도 캐서린이 이 집에 자주 와서 놀았을 뿐만이 아니라 교실 방에서 공부도 같이 하고 때로는 자고 가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캐서린이 왜 마크 트웨인의 집을 보존하려고 애쓰고 노력했는지를, 그리하여 기금 모금의 캠페인에 앞장섰던 이유를 단박에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내 고향 전남 고흥 출신의 몇 명의 유명 인사들의 생가를 떠 올려 보았다.
화가 천경자의 생가는 고흥읍 서문리 10번지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데 폐가 상태에 있다.
프로 레슬러 박치기 왕 김일 선수의 집은 금산면 대흥리에 있는데 좀 더 관리가 필요한 상태이다.
그리고 나로도에 있는 고 지연태 대사의 별장인 수정옥은 생전에 지연태 대사께서 해외에서 수집한 명화와 조각품, 기념품 등이 잘 보관 관리되어 있다.
작년 여름에 〈고흥타임즈〉 신금식 회장과 함께 고흥지역 탐문 활동을 하다가 그 집을 관리하고 있는 추동린씨의 안내를 받아 아름다운 정원과 실내의 소장품을 대할 수 있었다.
미국 같으면 이런 정도 하우스는 지역사회에서 보존 위원회가 생겨서 사설 하우스 박물관으로 외지 관광객에게 구경거리로 제공되었을 것이다.
당국에서 서둘러 적절히 보조하여 관광 명소로 삼았으면 한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그 지역을 빛낸 유명인의 생가나 주택은 그 지역 주민들이 보존위원회를 만들어서 기금을 모아 집을 수리하가나 복원하여 하우스 박물관으로 만들어 유료 또는 무료입장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우리 지역 사회에서도 마크 트웨인의 집과 소토우 작가의 집을 보존하게 위해서 캠페인에 앞장섰던 캐서린 같은 지역사회 애호가는 없을까?
나는 누군가가 앞장을 서서 하루 바삐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하고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