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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을 경험하다 - 그 후
indiaman 2011.02.15 댓글 수 12
[도서] 긍정의 뇌
질 볼트 테일러 저/장호연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3점
원제를 보니 자신의 뇌졸중 바로보기, 하지만 이 책의 제목으로 “긍정의 뇌”로 쓴 것은 아마 희망을 주기 위한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는 주변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사람들의 소식과 거리의 지나다니다 보면 한쪽이 마비되어 불편하게 걸어 다니는 노인들을 보게 된다. 이전에는 뇌졸중과 같은 질환은 나이가 들어야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보면 꼭 그러지도 않는 것 같다. 30-40대에서도 안심할 수 없는, 어쩌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환이 되어버렸다. 뇌졸중을 극복하고 치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끊임 없이 운동을 하면서, 재활을 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 재활에 대한 정보와 상식이 부족한 것 같다. 왜 이럴까? 대부분 숨기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지. 병이란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젊은 나이에 뇌졸중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숨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발병과 재활에 관한 괴로움과 외로움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는 생각이 적은 것인지, 아니면 이런 발병에 대한 관찰이나 생각이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선천적인 혈관기형을 가진 뇌과학자의 뇌졸중과 치료와 재활 과정에 대한 8년의 기록이다.
왜 뇌졸중에 걸릴까? 뇌졸중은 산소를 뇌세포에 실어 나르는 혈관에 문제가 생긴 경우로 허혈성뇌졸중과 출혈성 뇌졸중으로 나눈다. 피가 통하지 않아서 죽은 신경세포는 새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그리고 뇌마다 신경 배선이 다르기 때문에 외상을 회복하는 능력이 저마다 다르다.
오빠의 뇌장애로 인한 정신분열증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NAMI(전미정신질환환자협회)와의 만남, 뇌 표본 기증을 위한 노래하는 과학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저자에게 뇌졸중이 찾아왔다. 뇌졸중으로 인한 시간의 공백, 그 속에서 새로운 기분과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뇌졸중으로 인한 4시간의 여행, 그 속에서 기분이 묘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싼 3차원의 물리적 현식과 거의 연결이 끊긴 상태에서 일시적인 황홀한 마비 상태를 경험한다. 이 경험에서 그녀는 과학자로서 ‘네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해! 이 뇌졸중 경험을 기회로 삼아서 인지능력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제대로 살펴보는 거야.’ 정신과 신체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마침내 나는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나가야 해, 나가야 한다니까!’ 자신과 상황을 관찰하여 기억하였다. 이것이 어쩌면 그녀의 지금을 있게 한 것 인지도 모르겠다.
상처는 상처로만 남지 않았다. 우리는 존재 자체를 잃어버려야 비로소 그것에 대한 고마움을 알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게 된 것이다. 나는 자아중추가 손상된 상태였지만, 우뇌와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의식은 살아 있었다. 분명 살아 있는 자신을 느끼고, 주변의 상황을 인지 할 수 있다. 현실의 인식, 하지만 나는 장애인이다. 그러나 마음을 여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은 내 소관이다. 나에게는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다시 엄마의 아기로 태어난 것은 나에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어머니는 희망이며,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시 가르쳐 줄 무한한 인내를 가진 선생님이자, 그녀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는 생명이다.
그녀를 기다리는 뇌수술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재발이라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야 하는 것, 어머니의 조언으로 수술을 시도하려는 의지와 준비를 해나가고 마침내 장시간의 수술은 끝났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들은, 수술 후 고통이었다. ‘뇌가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려서 차가운 얼음으로 열기를 가라앉혀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후, 8년 동안 끊임없는 연습과 재활을 통해 뇌의 학습 및 기능이 꾸준히 향상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치열한 삶의 기록이 펼쳐진다.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 방법, 감정적 치유는 지루하리만치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노력할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혼자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변모한 자신, 좌뇌의 자아중추를 잃어버린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 상관하지 않았다. 자기 중심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뇌는 나를 지배하고 있다. 타인을 중심으로 살던 사람들에게 다가온 새로운 나의 모습은 나를 당혹시킨다. 어떤 일을 하든지 내가 가진 주의력을 총동원해야 했다. 하나의 일이 나 자신의 전부가 되어 버리는 느낌,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에 나의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그녀는 포기 할 것 인가. 아니면 이것을 자기 자신으로 인정하고 계속 전진해야 하는가? 자신을 돌보는 어머니를 보고 그녀가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자기 중심에서 가족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일 것이다. 그녀는 재활을 하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을 하나씩 발견해 나아간다. 그녀의 재활과정 6년 차의 최고 성과는 한 번에 계단 두 개를 오르겠다는 꿈을 이룬 것 이었다. 단지 그것이다. 계단 2칸, 그것도 6년간의 노력으로, 힘들지만 꾸준히 계속하면서, 낙담을 하지 말라는 것. 이것이 그녀의 경험으로 얻은 값진 것이었다. 또, 몸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는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으며, 자신의 행동과 자신을 그리면서 반복적인 연습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 나만의 다양한 개성이 사라졌다. 하지만, 얻은 것들도 있다. 뇌출혈이 안겨준 가장 큰 축복은 순순함과 내적 기쁨을 담당하는 신경회로를 회복하고 강화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발견한 우주와 합일된 느낌을 좌뇌와 서로 조화시킬 수 없을까? 우뇌가 인간적인 사랑을 높이 산다면, 좌뇌는 재정과 경제에 관심이 많다. 뇌출혈 후 서로 다른 두 성격이 두개골에 공존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식은 세포들의 작용이 만들어낸 집단적 의식, 양측 반구가 서로 보완, 세상에 대한 단일하고 매끈한 지각을 만들어 낸다. 분명한 그녀의 경험, 기쁨에 충만한 상태.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우주를 그리고 뇌도. 다른 역할을 하는 좌뇌와 우뇌지만, 이 둘이 나라는 하나의 생명체를 형성하고 있다. 좌뇌이든, 우뇌이든 소중한 나의 일부이리라. 기왕이면 이 두 뇌가 잘 협력하여,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아닌 완성된 나로써 존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뇌와 나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정신 그리고 뇌를 분리하여 생각한다. 과연 뇌가 없으면 나와 정신이 존재할까? 우리는 어쩌면 뇌가 조종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분노를 보라, 분노라는 감정은 자동적으로 유발되도록 설계된 반응이다. 미리 프로그래밍된 반응의 패턴에 익숙해져 자동조정장치에 우리의 삶을 맡기기가 쉽다. 엄청 빠른 반응속도를 보이는 우리,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과 교육 등으로 입력된 것들을 내가 정리하여 만든 공책의 답인 것 같다. 이것은 옳다, 이것은 틀리다. 이런 것은 이렇게 저런 것은 저렇게 아주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이미 우리는 뇌 속에 답을 가진 것 같다.
왼쪽 뇌를 잃었던 경험 덕분에 다양한 유형의 뇌질환을 겪은 사람들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더 강화된 자신, 세상사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선택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감정회로와 생리적 회로, 회로를 관찰하는 것과 회로에 관여하는 것을 적절하게 조화시켜야 치유효과가 좋다. 나의 경험, 특히 나의 모자람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더 나은 내가 될 것이다.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더 쉽게, 더 잘 보이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자람 혹은 장애 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사회의 희생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휘둘릴 필요가 없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의 감정은 뇌 속에서 이루어지고, 우리의 반응도 뇌의 지시를 받는다. 이 둘을 잘 조화롭게 하면 더 빠른 치료가 된다. 과연 의료의 목적은 무엇일까? 손상 받은 상처에 대한 회복인가, 아니면 상처를 극복하고, 일상적인 삶에 복귀하는 것일까? 의료의 목적은 공통된 현실을 공유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뇌 균형 잡기. 사실상 양측 반구는 우리가 취하는 모든 인지행동에 관여, 다만 이를 수행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서로 보완적인 반쪽들이다. 언어로 생각하는 속도가 느려서 이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도 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각자의 뇌세포가 다르고 각자의 뇌가 본질적으로 배선된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뇌 조차(좌반구, 우반구) 협력해야 나로써 존재하게 해준다. 인간의 유전자 0.01% 차이가 인간을 다양하고, 다르게 만든다. 우리는 배움과 환경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기에 인간이 동일한 자극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인간은 협력을 통해 더 나은 길로 가고자 하는 존재이다.
서구사회는 우뇌의 ‘존재하는’ 능력보다 좌뇌의 ‘행하는’ 능력을 휠씬 높이 평가하고 보답한다. 계몽은 배움의 과정이 아니라 배운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더불어 감각을 공유하는 것, 공감은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공감의 감정을 느낀다. 개방적인 의식과 기꺼이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 여기로 몰입하는 일이다. 지금 당신은 결정해야 한다. ‘옳고 싶은가. 아니면 행복해지고 싶은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음의 깊은 평화가 생각이나 감정의 조절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구 사회는 동양과는 달리 행함에 주안점을 두고 발전해 왔다. 1+1 = 2이다. 하지만, 1+1 = 1 혹은 3 혹은 0 도 될 수가 있다. 당신의 마음을 변화시켜라, 굳이 고정된 답의 노예가 되느니, 자유의 방랑자가 되어라.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혀왔다. 이제부터 하나씩, 하나씩 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원한다고 하지만, 자신을 버리기가 어렵고 힘들다. 왜일까? 그것은 나와 타인을 다르다고 인식하고 내 존재의 이유를 나로 한정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을 변화시켜라. 우리의 사회는 나와 또 다른 여러 나의 집합이기에. 사회 속의 내가, 나 자신이 바라는 사람이 되려면 현재의 내 모습을 기꺼이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건강은 구성원이 얼마나 건강한가에 달려있다. 이런 나들이 모이면,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가 환자를 볼 때, 환자가 아니라 자신을 보는 것과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우리도 다 잠재적 환자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현재의 건강한 모습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다가 갑자기 닥쳐오는 병과 상처는 그 사람을 더 깊은 좌절의 구덩이에 빠지게 한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특히 한번 아프게 되면 후유증이 많이 남게 되는 뇌졸중과 같은 병은 더욱 그렇다.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운동하고, 금연과 금주, 그리고 지나친 육식을 피하고, 무엇보다 행복하게 생각하고 살아야겠다. 이 글이 무엇보다도 뇌졸중을 경험한 이들 혹은 이들을 지켜보고 간병해야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을 주는 것 같아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병마와의 싸움은 누구보다 자신과 벌이는 치열하고 기나긴 전투이다. 물론 조력자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긴 기간 동안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극복하여 할 사람도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또 지속적인 건강 관리의 필요성도 간접적으로 역설하는 것 같다. 젊은 나이에도 이런 병들이 우리를 덮칠 수 있음을..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람의 회복은 무엇보다 희망과 그 희망을 이루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