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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나리아*
- 오늘
소리가 빛을 불러주기 시작했을 때
불러 주는 것마다 그만큼의 의미가 된다
하늘을 바람이 자고 있는 언덕이라 불렀다
나무를 태양이 불어 놓은 입김이라 불렀다
너를 무엇이라 부르면 내게로 와 잠이 들까
입에 물린 붓으로 그린 그림
튀어서 안 보이는 깎은 손톱
막차를 숨긴 정거장
펴지지 않는 우산을 삼킨 소나기
생선을 빼앗긴 고양이의 이빨
햇살을 어둠이라고 부르면 햇살은 어둠이다
어둠을 노래라 부르면 노래는 내리거나 깔린다
다시 한 번 너를 부르기 위해 난,
잠이 드는 거다
너는 의자, 의자는 높은 굽을 가진 구두다
너는 문, 문은 열쇠를 버린 구멍이다
너는 나, 나는
나는
네가 아니다
플라나리아* : 편형동물로서 몸을 절단하면 절단 부위에서 재생이 이루어져 두 개의 개체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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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과 샹송
- 오늘
나도, 반짝이는 소금이 바다인 줄 알았어요
틀니 대신에 파도를 주고 싶었거든요
푸른 색 타일이 일으키는 현기증을 담아 놓고
파도를 만지게 해 줄 게요
이 시간의 불빛들이 잔잔해질수록
난로 밖에는 더 많은 눈이 쌓일 거예요
추워요,
손 내밀면 파닥 튀어오르는 미꾸라지 한 마리
허옇게 번져가는 지난 가을의 잎사귀들
몸부림치기에는 차가운 양동이만한 것이 없어요
무딘 도마를 올려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요
잠든 지팡이를 쓰다듬으며 샹송을 듣는 할머니
할머니의 등을 들으며 잠드는 양동이
할머니가 추어탕 끓이는 것을 멈추었을 때
할머니의 몸에서 비늘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어요
깜빡 졸고 있는 사이
은빛 비늘이 뒤덮인 할머니가 뚝뚝 떨어졌고요
패인 자리마다 재피나무가 자라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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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나야
- 오 늘
-허공에 금을 그은 적도 없는데
어디서 날아와 팔뚝에 앉아 있는 걸까 나비, 나비야
거울을 향해 손 흔들면 거꾸로 출렁거리는 나비 한 마리
하룻밤, 소문 없는 뒷방에서 소리 없이 노랠 부르면
천정에 심어 놓은 피아노까지 부풀어 오르던 더듬이 한 쌍
습관이란 무서운 거라며 우수수 건반들 쏟아져 내릴 때
온 몸으로 얼룩지던 나비의 그늘
아름다운 질식을 소곤거리며 목 언저리를 지나는 것마다
어쩜 그렇게도 푸른빛이었는지
텅 빈 그림자 속으로 날 수 있길 허락한다면
내 몸에 더 많은 나비가 날아들어도 괜찮을 텐데
번진 노래쯤이야 쓰윽 닦아 버릴 수도 있을 텐데
네가 내가 네가 내가 내가 또 네가
그렇게나 많은 네가 내가 뒤섞인 이 방이 좁지 않은 건
네가 내가이고 내가 네가이기 때문이라며
우습지, 코가 시큰거릴 때마다 한 마리 씩 살 속으로 파고드는
나야, 나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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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막여관을 찾고 있어요
- 오 늘
저어기, 깨진 간판을 들고 있는 불빛이 보이시나요 창백한 애인의 입술과 손가락들을
버리며 가다보면 심드렁한 문이 하나 나올 거예요 이 때 컹, 어둠이 짖어대도 놀라진 마세
요 묶여 있는 것들은 사납게 대들어도 딱 그 줄 만큼이거든요 당신의 그런 표정이 여기 동
막에서는 흔해요 그러므로 긴 그림자를 가진 방들은 당신에게 이유를 묻지 않을 테니 다시
한 번 컹, 이빨을 드러내도 조용히 신발만 벗으면 되는 거죠 뒤틀린 창틀 사이로 버리고 온
입술과 손가락들이 스멀거려도
어떠한 말도 해가 뜨면 허물어진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입고 있는 방의 온기만을 사랑하시고
그대는 이 계절의 빌미일 뿐임을 잊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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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지 않는 방
- 오늘
낡은 색소폰 속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이 빈 방을 찾는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는 빈방이 없다 가지고 온 기억은 어둠에 치명적이었으므로 녹아 버리기 전에 불빛을 찾아야만 했다 젖은 머리의 소녀가 15층에서 거꾸로 버려졌을 때에도 사람들은 빈 방이 생겼다며 자신이 서 있는 줄에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만 간격을 좁히고 있었을 뿐
ㅡ샤워를 하고 난 후 콜리타* 하나 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곳이 15층 이라는 것을 잊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거든요
방이 없는 당신은 나를 경멸할 자격이 없죠
줄을 버렸듯 나도 버리면 되는 거에요
지루한 노래를 듣지 않고도 긴 머릴 자를 수 있는
거울 없는 이런 방이 좋아요
하나 씩 옷을 벗는 동안 울컥 당신이 쏟아질 뻔 했지만
괜찮아요 당신 대신 내게는 방이 있으니까요
콜리타* : 대마초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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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발루*
- 오늘
ㅡ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동안 나는, 겨드랑이에 숨겨둔 새가 날아갈 것만 같아 불안했다
방주 안에 갇힌 불빛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퍼덕이는 밤 그림자를 벗어 던진 사람들이 절벽 아래로 하나 둘 뛰어들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없는 어둠 저 편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림자들을 보았다거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그런 말은 너무도 눅눅해서 아무도 덮으려 하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날들은 거칠게 뜯긴 흔적으로만 남아 해변에 버려지곤 했다 함께 도반을 모의하던 노아는 가끔 전화를 걸어 별이 지는 소리를 들었다며 흐느끼곤 했다 어디쯤에 별무더기를 태우며 헛디딘 발을 움켜 쥔 그가 있을까 그가 버린 방주가 단단한 산호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에는 너무도 늦은 연락이었다 푸른 것들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열망일수록 단내가 강한 법이라고 사람들에게 일러주었다면 거꾸로 서서 그리 쉽게 절벽 아래로 누설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의 별 모양 화상이 내 가슴으로 옮겨진 후 나를 업을 때마다 그는 등이 아프다고 했다 차오르는 바람을 재울 수 없는 것이 견딜 수 없다고도 했다
깊고 푸른 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말을 쓰고 지우는 동안에도 뭇 별들은 방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산호가 되어가고 있는 수많은 방주들이 그의 바다에 즐비하다
*투발루(Tuvalu): 온난화의 영향으로 해수면이 상승되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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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줄 알았어
- 오늘
ㅡ 내 몸의 핏줄이 아버지가 그어놓은 금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날 선 복부의 통증 하나쯤은 견딜 수 있었다
깨진 보도블록 사이에 숨어 내 뒤 굽을 잡은
아버지를 닮았거나 전혀 닮지 않은 남자
(휘청거리는 아버지를 처음 보았어요)
발목을 가진 금 안의 남자와 손목을 가진 금 밖의 아버지
(이상하죠. 알고 있어도 아버지가 금을 그으면 길을 잃어요)
지워진 금도 밟지 못 하는 내게 쏟아지는 크고 선명한 금
울렁증에 고개 돌리면 물컹하니 밟히는 아버지의 말
그럴 줄 알았어
남자는 금 안에서 내가 입은 아버지를 벗겨 내고
금 밖으로 데려가서 알몸인 나를 입으려 했다
신호등을 건너서 다시 시퍼런 불이 켜지기 전에 자야 한다고
자고 일어나면 새빨간 아버지의 금이 지워질 것이라고
(금을 밟아보는 상상이야 했죠)
이만큼이야 이만큼
징그러운 금을 힘겹게 넘을 때마다
남자는 아버지보다 멀리 더 멀리 금을 그어 댔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금이 주저하는 나를 물었고
수많은 아버지들이 가슴팍에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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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 오늘
- 엄마. 지느러미로 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꼬리 하나쯤은 떼버릴 수 있었어요
훔친 생선을 숨겨 둘 곳이 필요해요
당신의 배꼽에 숨겨도 좋을까요
비늘이 안 다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거든요
대신 생선 꼬리를 드릴 게요
팔랑거리는 지느러미를 바라볼 땐
안대를 껴야 한다는 것 잊지 말았으면 해요
참, 외눈으로 보는 세상이 얼마나 황홀한지 얘기 했던 가요
세상이 한 쪽으로만 킥킥거려요
아픈 어항을 뒤집어쓰고 앉아
먹먹함을 퍼먹으며 벽을 붉게 칠하는 동안
잘린 꼬리가 부르는 노랠 들어야했어요
전화벨이 울리던 네 번째 골목에서
당신이 떨어뜨리고 간 비늘이 살짝 반짝였지요
비스듬 계단을 오르고
비스듬 악수를 한 뒤
비스듬 앉아 커피를 마시고나면
다시 한 번 똑바로 서고 싶어질까요
꼬리 잘린 생선은 지겹도록 말이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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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 오늘
약속 할 때
새끼손가락을 거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불안한 물음표로 사슬을 만드는 거에요
가파른 의심에 걸고 잡아당기면 평평한 믿음이 되기도 하죠
15도 기울어진 머리가 비탈길로 굴러요
발이 달려가도 구르는 머리를 잡을 수 없어요
저 위에서 흔드는 손이 보이네요
잘 가라는 건지 어서 오라는 건지
물음표들이 엉켜 있는
양쪽 주머니만 불룩해요
유통기간이 지난 물음표들은
부패를 즐거워하며 변신 하죠
잘린 도마뱀의 꼬리가 되거나
뽑힌 황소의 뿔이 되거나
약속이 상했다는 것을 눈치 챈 길이
미간 사이에서 숨어버렸어요
무거운 주머니를 끌고 가던 그림자가
입 속으로 들어가기 전
어서, 도마뱀의 꼬리를 꺼내 놓아야 해요
길을 잃었다는 것을 교묘한 꼬리가 알지 못하도록
흔들거리며 따라가야 하죠
숨겨 놓은 뿔을 깊게 박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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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만큼 왔니
- 오늘
-아니, 응급실 말고 영안실로 놀러와 거기 19호실. 삼일 간 빌렸어 특실 은 아니지만 친구들 몽땅 데려와도 될 만큼 넓어
실눈을 뜨고 고개 돌렸을 때 봤니 달아나고 있는 붉은 것들의 뒤꿈치 밑줄 친 눈물은 흐릿한 함정이라는 경고를 기억한다면 다물어야 했어 비명
(바람이 되고 싶어)
진저리나는 흰 색이라고 발등을 깨물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국화꽃들의 구토 숫자를 다 세기도 전 액자 밖으로 몸을 숨기는 것은 반칙이야 안됐지만 네 서른아홉 개의 비밀은 이제 내 것 너는 그곳에서 나를 건널 수 없고 나는 이곳에서 너를 심장 왼 편에 쳐 박아 두기로 하지 몸 밖으로 치렁거리는 사루비아 때문이었다고 해도 경고를 무시한 불덩이는 네 몫이므로 지독한 칠월은 내 몫
(바람이 되게 해 줘)
축 늘어진 머리카락으로는 날 수 없어 미안하지만 너를 뿌리지 않는 배신을 끄덕여주길 어디만큼 갔니 물어 보면 아직도 눈썹에서 출렁거리는 너의 웃음 하나가 모자란 아홉은 정말 무서워 눈 꼭 감고 허공을 움켜쥐면 뚝뚝 떨어지는 젖은 인사 안녕 수미
흘려진 너를 밟을 때마다 터져버리는 사루비아 붉다는 것 보다 치명적인 실수는 젊다는 것 그래 벗겨 줄 게 네 머리 위 검은 리본의 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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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작품입니다.
대표님 설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늦었지만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오늘 시인의 작품들 참 좋습니다^^
추시인은 우리 1년에 한번 보기로 했지?
훌륭하신 작품입니다. 저의들에게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계속 걸작품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