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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첫 번째 복수(復讐)
소호(巢湖),
소호는 안휘성(安徽省)의 중앙부에 자리한 호수다.
비록 크기에서는 파양호나 동정호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맑은 수색(水色)과 주변의 빼어난 경관은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한 것이다.
교교한 달빛이 은백색으로 부서져 내리자 소호의 잔잔한 수면에 물살이 일어났다.
물 그림자에 잠긴 한 그루의 백양목(白楊木)이 물살 따라 가볍게 움직거렸다.
호수의 가운데에는 몇 척의 범선이 그림처럼 떠 있었다
. 범선에서 흘러나오는 오색찬란한 불빛이 수면에 반영되어 어른거렸다.
소호의 남쪽 호반(湖畔)에는 사람의 키를 넘는 갈대가 무성한 습지가 자리해 있었다.
그 우거진 갈대 숲을 빠져나오면 작고 편편한 바위들이 올망졸망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바위 무리들중 호면과 맞닿은 큼직한 바위에 걸터앉아 낚시를 즐기는 낚시꾼이 한 사람 있었다.
초로(初老)의 나이인 그는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낚시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낚시에 몰입해 있는 노인의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잊은 듯했다.
그는 물살따라 흐느적거리는 찌를 잡아먹을 듯 응시하고 있었다.
잔잔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쑤욱-!
맥없이 흐느적거리던 찌가 물 속으로 가라앉더니 다시 불쑥 솟아나 수면에 누워 버렸다.
드디어 입질이 온 것이다.
순간 낚시꾼의 팔뚝 근육이 움찔 긴장하며 대나무 낚시대가 파르르 떨렸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스슥…!
낚시꾼의 등 뒤 십여 장 뒤에 선 백양나무 그늘 아래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 검은 그림자의 운신술은 실로 기오막측하여 옷자락 흔들리는 소리 하나 나지를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낚시꾼은 팽팽해진 낚시대를 서서히 힘을 주며 뒤로 제꼈다.
촤아앗-!
달빛에 반사된 비늘이 번쩍번쩍 금광을 뿜어내는 가운데
한 마리 살찐 금빛 잉어가 수면을 차고 허공으로 올랐다.
[옳지!]
낚시꾼은 의미없이 지껄이며 다시 팔뚝에 힘을 주었다.
팔뚝 근육이 마구 꿈틀거렸다.
팽팽한 낚시줄과 활처럼 휘어진 낚시대,
물방울을 일으키며 펄떡거리는 금빛 잉어의 힘찬 몸부림이
잔잔한 수면에 수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허허! 이놈아! 노부 손에 걸린 이상 발버둥쳐 봐야 소용없다!]
낚시꾼은 껄껄 웃으며 팔뚝을 가슴으로 힘껏 당겼다.
후두둑~!
그 바람에 여지없이 허공으로 튕겨오른 금빛 잉어는
그러나 허공에서 패배의 펄떡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 바람에 금빛 비늘에 반사된 달빛이 주위를 현란시켰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투둑!
돌연 낚시바늘에 입이 꿰인 금빛 잉어가 공중에서 꿈뜰거리더니
낚시바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쐐애액!
하늘에서 몸을 일직선으로 뉘이며
금빛 잉어가 백양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기에 그 검은 그림자는 일시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금빛 잉어가 검은 그림자의 얼굴로 벼락같이 날아왔다.
그 기세가 어찌나 드센지 만약 금빛 잉어에 얼굴을 맞으면
그 즉시 얼굴이 두부처럼 으깨어질 듯했다.
그 위기일발의 순간,
[흥!]
검은 그림자는 나직이 콧웃음을 흘리며 소맷자락으로 바람을 일으키듯 허공을 털었다.
파라락…
그러자 검은 그림자를 덮쳐가던 금빛 잉어는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낚시꾼의 옆에 있는 대바구니에 털썩 떨어졌다.
이 모든 일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금빛이 번쩍하는 것만 보았을 뿐
상황을 잘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낚시꾼은 모든 일에 무관한 듯이 느릿느릿 미끼를 끼우고 다시 낚싯대를 던졌다.
침묵(沈默)!
괴괴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팔랑…
문득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떨어져 내려 수면을 진동시켰다.
바로 그때 담담한 목소리로 낚시꾼이 물었다.
[젊은이는 무슨 일로 노부를 찾아오셨는가?]
[……]
검은 그림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에 낚시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에게 볼 일이 없다면 물러가 주게.
낚시란 도(道)와 같아서 정신의 합일이 꼭 필요하거든.]
신경이 쓰여서 낚시를 즐기지 못하겠다는 어투였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가 비로소 말을 꺼냈다.
[초혼간(招魂竿) 용불군(龍不君)이란 사람을 찾고 있소.
노인장은 혹시 그를 알고 있소?]
[……!]
일시에 낚시꾼의 모든 동작이 멈춘 것 같았다.
그의 굳어진 어깨 너머로 소호가 차갑게 빛났다.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백양나무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 낚시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비로서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의 모습이 완연히 나타났다.
등에 일곱 자루의 검을 칭칭 동여맨 채 은색 달빛 아래 나타난 검은 그림자!
그는 바로 단사영이란 신비한 흑의청년이었다.
단사영은 낚시꾼의 어깨 너머 소호의 물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초혼간 용불군, 절대십천(絶代十天) 중의 한 사람으로
황하의 수로를 장악하고 있는 황하칠십이수로채의 총채주인
녹림(綠林) 거두(巨頭)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소.]
-초혼간 용불군!
단사영의 말대로 그는 녹림의 거두다.
본래 녹림도당은 산적(山賊), 하오잡배(下五雜輩) 등 땅에서 활약하던 오악녹연(五岳綠聯)과
그들과는 반대로 강(江)에서 노략질을 하는 수적(水賊)의 무리
황하칠십이채(黃河七十二寨)로 구분되어 있었다.
초혼간 용불군은 그중 황하칠십이채의 총채주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오악녹연의 맹주인 청엽마군(靑葉魔君)에 비해 모든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
강호인들은 그를 공공연히 녹수대제(綠水大帝)라고 불렀다.
녹수대제(綠水大帝)-
말 그대로 땅과 물의 모든 녹림방의 대종사를 의미한다.
하지만 초혼간 용불군은 자기 자신을 초혼간으로 불러주길 원했다.
비록 땅과 물로 나눠진 녹림이지만 녹수대제란 이름 하나 때문에
녹림이 서로 시기하고 힘자랑하여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오 년 전 어느날 그는 돌연 황하칠십이채를 떠나 은거해 버렸다.
모든 명예를 버리고 초야에 묻혀 버린 것이다.
그의 갑작스런 은거엔 많은 억측이 따랐지만
곧 벌어진 심각한 녹림의 내분 때문에 강호인들은 그를 잊고 말았다.
초혼간 용불군이 돌연히 사라지자
오악녹연의 맹주 청엽마군이 황하칠십이채마저 장악해
진정한 녹림대종사가 되려고 야망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결국 오 년이 지난 이 날까지 황하칠십이채와 오악녹연은
녹림도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초혼간 용불군은 강호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녹림대전(綠臨大戰)을 일으킨 장본인인 것이다.
[용불군을 꼭 찾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젊은이?]
낚시꾼의 음성이 잔잔히 수면을 흔들었다.
[그렇소, 초혼간을 만나 알아내야 할 일이 있소.]
단사영의 말에 낚시꾼은 말없이 찌를 노려보았다.
단사영도 낚시꾼의 찌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인근 사람들에게 물으니 귀하를 용선생(龍先生)이라 하던데 이름은 어찌되오?]
그러자 낚시꾼은 움찔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초야에 파묻혀 낚시로 낙을 삼는 인생, 어디 변변한 성명이라도 있겠는가?]
낚시꾼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단사영은 달을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달빛이 세상을 비추긴 해도 사람의 마음까지 비출 수는 없는 일!
귀하의 안력은 밤에도 낚시를 즐길 정도인 것을 보니 고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할 텐데…!]
단사영의 말 속에는 더 이상 속이지 말아라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낚시꾼이 피식 웃었다.
[젊은이의 안력도 밤낚시를 즐기기엔 충분할 것 같구먼.]
[용선생이 가르쳐 주신다면 즐길 만도 하겠지! 안 그런가 용-불-군!]
또렷한 세 음절의 말이 단사영 입에서 흘러나와 허공에 그대로 박혔다.
그러자 낚시꾼은 뒤를 돌아 단사영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 뿜어나오는 안광은 밤의 정기가 서려 있었다.
그렇다! 이 낚시꾼이야말로
오 년 전 돌연 녹림대종사의 명예를 버리고 은거한 초혼간 용불군이었다.
[지난 오년 동안 노부를 찾아온 사람은 한명도 없지!
그래 노부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가 소형제?]
찰라 초혼간을 바라보는 단사영의 시선이 살을 에이듯 날카로워졌다.
[간단히 말하겠다. 검성(劍城)을 알고 있겠지?]
어느새 용불군을 대하는 단사영의 음성과 행동은 싸늘히 굳어들었다.
[검성!]
순간 초혼간 용불군은 독사에게 물리기라도 한 듯 질겁하며 놀랐다.
-검성(劍城)!
그 이름은 지난 오년동안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거론하는 것조차도 금기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본래 검성은 자타가 공인하던 천하제일인 철혈검제(鐵血劍帝) 단천학(段天鶴)의 거처였다.
하지만 검성은 지금으로부터 오년전 의문의 멸겁을 당했다.
단척학을 비롯한 수천의 식솔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장려하던 장원은 잿더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천하제일인의 거처였던 검성의 멸문지화는 강호무림에 크나큰 파문을 던졌었다.
누가, 과연 무슨 목적으로 검성을 초토화시킨 것일까?
혹자는 검성이 어떤 상고기인(上古奇人)이 남긴 한 가지 보물로 인해 겁멸을 당했다고도 하지만
구체적인 내막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헌데 그 검성의 이름이 지금 이 암울한 분위기의 흑의청년 단사영의 입에서 거론된 것이다.
[젊은이는…누군가?]
용불군은 내심의 격동을 완연히 드러내며 단사영에게 물었다.
[난 당신이 검성을 아느냐고 물었다 용불군!]
단사영은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용불군의 격동을 관찰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의 말 속에 살기가 진득하자 일순 용불군은 쓰러질 듯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주름진 눈을 좁히며 단사영의 아래 위를 쳐어보았다.
그러다가,
[자…자네였군! 철혈검제(鐵血劍帝)의 외아들인 다정공자(多情公子) 단사영!]
용불군은 부르르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그는 비로소 단사영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검성의 성주 철혈검제와 교류가 있었던 용불군인지라
당연히 철혈검제의 그의 외아들인 단사영을 본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 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고,
또 당시에는 부잣집 도련님티를 벗지 못했던 단사영이
암울하고 비감한 분위기로 바뀐 탓에
용불군같은 일세기인도 금방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자네가 노부를 찾아오리라 믿었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 몰랐네.]
용불군은 회한과 죄책감이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단사영은 그 말에 싸늘히 웃었다.
[피한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 년 전 그 일은 오직 피로써 매듭지어야 할 일!
나는 당신을 비롯한 일곱 명의 흉적들 목을 취하고자 악마에게 영혼을 맡겼다.]
순간 용불군은 부르르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설…설마 자네, 저주받은 혈왕(血王)의 문(門)을 열었단 말인가?]
용불군의 말에 단사영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싸늘해졌다.
[그렇다. 애초의 목적과는 그 결과가 달랐지만
분명한 것은 혈왕의 문이 한 번 열렸다가 다시 영원히 닫혔다는 것이다.
나 단사영에 의해서…!]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피를 머금은 듯한 원한과 살기가 배어 있었다.
용불군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일곱 명이 검성을 멸망시킨 것은 사실이네.
그렇지만 그 일에 대해 노부는 크게 후회하고 있다네.
그래서 강호를 등진 것이고…!
용케도 노부를 찾아왔지만 그 때의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할 말이 없네.]
죄책감이 극에 다다른 듯 용불군의 말투는 처연했다.
[헛수작 부리지 마라.]
단사영의 눈에서 살기어린 안광이 번들거리며 피어났다.
[네놈들은 악독하게도 검성의 삼천식솔을 독으로 중독시킨 후
연약한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무참히 죽였다.
후회한다고? 후후후…
개과천선(改過遷善)이란 말은 너희 일곱 흉적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
용불군은 대꾸없이 단사영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희들은 검성에 혈왕(血王)의 유물(遺物)이 흘러들어왔다는 비밀을 어디서 들었느냐?]
단사영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용불군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건 말 할 수가 없다.]
용불군은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단사영은 살기를 폭사하는 안광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상관 없겠지! 그 대답을 해 줄 입이 너 말고도 여섯이 더 남아 있으니…!]
말과 함께 단사영은 우장을 벼락같이 뻗었다.
쏴아아아…
맹렬한 장경(掌勁)이 닥쳐오자 용불군도 즉시 낚시대를 마주 흔들었다.
그러자 그토록 위맹했던 단사영의 장력은 그 기운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 순간 단사영은 바람처럼 검을 뽑으며 날아올랐다.
스르릉…
그 검은 그가 등에 메고다니는 일곱 자루의 검 가운데 하나인
보잘것 없는 철검(鐵劍)이었다.
그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철검인데다가
병기점에서 산 후 손질조차 하지 않아 빨갛게 녹까지 쓸어 있었다.
[혈전열지(血電裂地)!]
시커먼 그림자로 하늘을 가득 메운 단사영은 벼락같이 철검을 내리쳐갔다.
시뻘건 검의 그림자가 수백 수천 개로 갈라지며 용불군의 전신을 난자해갔다.
[간섬살(竿閃煞)!]
용불군도 맹렬히 낚시대를 휘둘러 단사영의 검세에 맞닦뜨려갔다.
파팟!
다음순간 어둡고 환한 그림자가 얼핏 교환되는 모습만이 흐릿하게 보였다.
헌데,
콰당탕!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중에서 한차례 부딪친 직후
하나의 인영이 피를 뿌리며 지면으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그는 바로 초혼간 용불군이었다.
[크으! 혈세마왕검식(血洗魔王劍式)! 정말로 혈왕(血王)의 마공을 익혔구나!]
바닥에 나뒹군 용불군은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이어 사력을 다해 일어나 앉는 용불군의 가슴은 쩍쩍 갈라진 채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단사영의 신랄한 검세를 고스란히 가슴에 맞은 것이다.
헌데 이 순간 단사영의 얼굴은 실로 괴이했다
. 망연자실(茫然自失), 바로 그것이 아닌가?
사실 단사영은 복수를 위해 찾아오긴 했지만 필승의 자신은 없었다.
비록 그가 고금무적을 자랑한다는 혈왕(血王)이란 전대거마의 마공을 얻기는 했지만
아직 내공이 일천하여 그 진실된 위력을 삼푼도 채 발휘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하물며 초혼간 용불군이 누군가?
당금 강호에 적수가 없다는 십대고수의 일인이 아닌가?
헌데 악전고투를 각오한 일전의 결과는 너무도 싱겁게 끝나 버린 것이다.
단사영은 내심 당혹을 금치 못하며
피묻은 철검을 든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용불군에게 다가갔다.
[왜…왜 마지막 순간에 공력을 거두었느냐?]
단사영의 말투는 놀람과 의혹에 차 있었다.
그렇다. 용불군은 두 사람의 공세가 격돌하는 순간
갑자기 공력을 거두어 단사영의 검세를 고스란히 맞은 것이다.
단사영의 그 일검에는 추호의 사정도 없었다.
그 때문에 일검을 맞은 용불군의 상세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것이었다.
늑골이 쩍 갈라지고 심장까지 일부 갈라져서
이미 사신이 그의 곁에 다가와 있는 상태였다.
[흐흐! 네 말대로 난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그외에 아무런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용불군은 말을 하며 핏물을 왈칵 쏟아내었다.
단사영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피붙이들을 몰살시킨 원수가 이토록 순순히 목숨을 내놓는 것은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헌…헌데 이해할 수가 없구나!
당시 우린 복면을 쓰고 있어 아무도 우릴 알아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알아내었느냐?]
용불군은 필사적으로 자세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허허! 그런가?]
단사영의 싸늘한 말에 용불군은 처연한 웃음을 흘리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알아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겠네!
하지만…이것만은 알아주게나.
노부는 그날 이후로 단 한시도 죄책감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네!
오늘 자네의… 검에 죽는 것으로
자네의 선친 철혈검제(鐵血劍帝)에 대한… 노부의 사죄가… 되길…]
[……!]
단사영의 차디찬 눈에 가벼운 파랑이 일어났다.
용불군은 마지막 초식에서 손을 거두어
단사영의 철검을 맞음으로써 스스로 자살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용불군은 꺼져가는 생명의 불을 마지막으로 지피려는 듯 안간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노부는 자네 부친 철혈검제가 혈왕정(血王鼎)을 얻어
저주받은 혈왕의 문(門)을 열려고 한다는 소문에… 욕심이 생겼고…
마침 그 소식을 들은 다른 동지들과 우리들은…]
[………]
[하지만 검성을 무너뜨린 후에야 그 모두가 검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였음을 알았네
.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뒤였네!
자네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달리…할 말이…크으윽!]
용불군은 말을 하다가 간신히 바로 앉혔던 몸을 바닥에 뉘었다.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충고해줄 말이 있네!]
자신의 가슴에서 뿜어져나온 핏물 속에 잠긴 채
용불군은 단사영을 올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비록 자네가 혈왕의 마공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내공이 일천하여 그 위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네!
그러니 섣불리 다른 여섯사람을 찾아가지 말게.
헛되이 죽는다면 자네 선친 철혈검제에게 불효를 하는 결과니…!]
툭!
초혼간 용불군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떨구며 숨을 거두었다.
[…!]
단사영은 잠시 망연자실하여 용불군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초혼간 용불군의 말은 사실이었다.
단사영이 비록 천고기연을 얻어 절정고수가 되었다지만
아직 절대십천과 맞설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만일 용불군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은
용불군이 아니라 단사영 자신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의 침묵이 조용히 흐르고
어느새 소호 저편 수평선 너머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여명(黎明)의 해돋이였다.
이윽고 영원히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단사영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은 죽어서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 용불군!]
단사영은 이를 부득 갈았다.
피맺힌 원수인 용불군에게 양보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아직 절대십천의 적수가 아님을…!
하지만 부모의 원수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이라 하지 않았는가?
무공을 이루었으니 단 하루도 원수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녹슨 철검을 움켜쥔 단사영의 손이 뼈가 하얗게 들어날 정도로 굳게 쥐켜졌다.
[당신 말대로 원흉(元兇)은 따로 있고
당신들 일곱 명은 그저 그 자의 수작에 놀아난 꼭두각시임도 안다!
하지만 그것이 음모였건 아니건,
너희들이 검성을 피로 씻은 원한은 오직 너희들의 피로써 갚아져야 한다.]
단사영은 말과 함께 수중의 철검으로 용불군의 목을 내리쳤다.
퍼억!
용불군의 목을 벤 녹슨 철검의 날이 땅에 박히며 용불군의 수급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단사영은 손을 뻗어 튀어오른 용불군의 수급을 잡아채었다
. 그리고 녹슨 철검은 용불군의 시신 옆 땅에 깊숙이 박아둔 채 몸을 돌렸다.
[이제 시작이다! 당신뿐 아니라 일곱 악적의 목은 모두 아버님의 영전에 바쳐질 것이다!]
단사영은 용불군의 수급을 든 채 몸을 돌렸다.
그가 떠난 자리엔 주인 잃은 빈 바구니에서 금빛 잉어가 펄떡거리고
그 위로 은백색의 달빛만이 흩뿌려질 뿐이었다.
헌데 대체 혈왕(血王)의 문(門)이란 무엇이며,
혈왕정(血王鼎)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본래 강호에는 천여 년 전부터
네 명의 절대고수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혈왕(血王)!
-용왕(龍王)!
-천왕(天王)!
-염왕(閻王)!
이른바 사대신왕(四大神王)이라고 불리는 천외천(天外天)의 초인들!
고금무적(古今無敵)을 논한다면 결코 그들의 이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사대신왕의 진전을 한가닥이라도 얻으면 독보강호할 수 있다는 요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왔었다
. 단사영의 가문인 검성의 멸망은
바로 그 사대신왕들 중 혈왕(血王)이 남긴 한 가지 보물로 인해 야기된 것이었으니…!
한 노인의 죽음과 한 자루의 철검은 장차 강호무림을 휩쓸어버린
거대한 핏빛 혈풍(血風)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前奏曲)이었다.
하남(河南) 망량산(望凉山) 어느 산기슭에
한 채의 황폐한 장원(莊院)이 자리하고 있다.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만여 평에 달하는 대저택이었으나
오래 전부터 사는 이가 없는지 풍상(風霜)에 깍인 고루거각들은
흑야(黑夜)에 묻힌 채 더욱 음침하게 보인다.
휘이이잉-!
스산한 가을 밤바람은 퇴락한 장원의 분위기를 한층 더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헌데 장원 속 어둠을 밝히며 한 줄기 빛이 어른어른 피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황폐한 장원에도 누군가 살고 있단 말인가?
한때는 화려하고 웅장했던 대청 앞에 한 명 중년(中年)의 부인이
밤바람에 옷깃을 날리며 고즈녁히 서 있었다.
불빛은 바로 그녀가 등지고 있는 대전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이는 사십대후반정도,
그러나 어른거리는 불빛에 음영을 드리우며 서 있는 중년부인의 미모는
실로 빼어난 것이었다.
중년미부(中年美婦)의 얼굴은
한폭의 선녀화(仙女畵)에 그려져 있을 법한 미인의 얼굴이었다.
그린듯 아름다운 아미(蛾眉),
보석의 정화(精華)를 다 끌어모은 듯한 봉목(鳳目),
마늘쪽을 가져다 놓은 듯 우뚝 솟은 콧날은 조물주가 빚은 듯 환상의 예술품 같았다.
붉은 입술과 사슴의 목처럼 갸날픈 목덜미의 선이 유난히 길어 사내의 시선을 끈다.
비록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처녀보다 더 싱그럽고 윤기 흐르는 희디흰 살색과
걸친 백의를 통해 드러나 있는 몸매는 결코 중년여인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세월의 잔흔으로 적당히 살이 올라 온몸의 곳곳에 서려 있는 풍요로움은
처녀들이 갖지 못하는 아름다움이니…
중년미부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그녀에게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리움의 감정이 물결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정인(情人)을 기다리는가?
아니면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되는 모정인가?
문득 중년미부의 봉목에 근심이 스쳤다.
[사영이가 대체 왜 이렇게 늦는 것이지?
혹시 혈기(血氣)를 참지 못하고 일곱 원수들을 찾아간 것이나 아닐까?
그 아인 아직 내공이 일천하여 절대십천의 적수는 못 되는데…!]
사영…!
바로 검성(劍城)의 유일한 생존자인 단사영을 말함인가?
검성의 식솔들 중에서는 단사영을 제외하고 누구도 살아나지 못했지 않는가?
과연 이 중년의 미부는 누구기에 단사영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혈왕(血王)의 무공을 다 수습한 기념으로
검성에 참배하고 오겠다는 청을 들어준 게 실수나 아닌지…!]
근심과 초조로 중년미부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휴우! 역시 내가 함께 소흥까지 갔어야했을까?]
중년미부인은 탄식하며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살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
중년부인의 안색이 갑자기 싸늘하게 굳어졌다.
(누군가 접근하고 있다.)
미부는 예리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비록 어둠 속이라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영민한 청각은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중년미부가 긴장하는 순간 갑자기 다가들던 인기척이 뚝 멈추었다.
그러자 미부인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떠올랐다.
[흥! 어느 방면의 손님들이신지 몰라도 모습을 보여 본녀의 안목을 높여주는 것이 어떠신가요?]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몸놀림을 들어보니 댁들이 누군지 알 것 같군요
, 정인군자답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어때요?]
중년미부의 안색과 어조는 어느새 싸늘하게 굳어지고
전신에서 은은한 살기가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하지만 사위는 여전히 조용할 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이에 중년미부의 붉은 입술이 살짝 말려올라갔다.
[당신들의 경공은 무당(武當)의 암향표(暗香飄), 곤륜(崑崙)의 운룡비상(雲龍飛翔),
화산(華山)의 난화표흘비(亂花飄忽飛), 점창(點蒼)의 표리신법(彪狸身法),
설산(雪山)의 어기어풍잠(馭氣御風潛)이더군요!
현 무림에서 이와 같은 경공을 절정까지 익힌 고수들은 흔치 않아요.
아니, 오직 당신들 뿐이죠 백화오절(白華五絶)!
본녀를 보러왔다면 모습을 드러내시지 그래요?]
중년미부의 말이 떨어지자 어둠 속에서 음침한 웃음이 즉각 흘러나왔다.
[후후후! 오 년이란 세월이 지났건만 예리함은 여전히 살아있군
화사마녀(花蛇魔女) 설연청(薛姸淸)!]
휘휙-
바람소리와 함께 중년미부의 앞에 다섯 명의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맨 우측은 일신에 마의(麻衣)를 걸친 뚱뚱하고 얼굴에 붉은 화색이 도는
마음씨 좋게 생긴 칠순 노인으로 오른손에 금빛 주판을 들고 있다.
그 옆으로 청의(靑衣)에 깡마른 노인이 서 있었다
. 청의노인의 왼손은 철수(鐵手)였다.
세번째는 백의(白衣)를 걸친 중년문사로 얼굴이 매우 준수했으며
수중에는 하얀 깃털로 만든 백우선(白羽扇)을 들고 있다.
중년문사 바로 곁에 선 인물은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소부였다.
그녀는 일신의 불타는 듯한 홍의(紅衣)를 입었으며 요요로운 표정과 육감적인 몸을 지니고 있었다.
홍의여인은 중년문사의 부인인 듯 다정한 모습으로 나란히 섰다.
끝으로 흑의(黑衣)를 입은 장년인으로
그의 얼굴은 긴 머리칼이 콧등을 중심으로 오른 쪽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중년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백화오절(白華五絶)! 백화맹(白華盟)의 원로들인 백화오절이로구나!)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중년미부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백화맹(白華盟)!
이름 그대로 백도(白道)의 영화(榮華)를 목적으로 결성된 정파백도인들의 결맹체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삼백여 개의 문파와 수많은 기인이사들로 이루어진 백화맹은
당금 강호를 통틀어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닌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백화맹은 철저하게 정파백도의 이익만을 위해 뭉친 관계로
배타적이고 편협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강호정의를 내세우며 흑도나 방문좌도 등을 탄압하여
그 원성이 칭송보다 오히려 더한 편이다.
백화맹의 당대맹주는 절대십천(絶代十天)의 일 인이고
철혈검제 단천학의 사망 이후 천하제일인으로 여겨지는
천우대존(天宇大尊) 사마장청(司馬長靑)이란 인물이었다.
-백화오절(白華五絶)!
그들은 바로 백화맹 원로원(元老院) 소속 고수들로서 모두가 구대문파 출신이었다.
곤륜(崑崙) 금판산(金判算) 능풍(陵馮).
점창(點蒼) 철수무정(鐵手無情) 검무위(劍武韋).
무당(武當) 옥기린(玉麒麟) 천태랑(天太郞).
설산(雪山) 난향옥부(蘭香玉婦) 몽부용(夢芙蓉).
화산(華山) 자전비각(磁電飛脚) 모백(毛栢).
이들 다섯 사람은 많게는 이미 오십여 년 전부터 활동해온 전대고수들이다.
상대를 알아본 중년미부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백화오절! 당신들이 이런 야밤에 본녀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지요?]
그러자 설산파 출신인 난향옥부 몽부용이 옥용에 화사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호호호! 설동생, 오 년(五年) 만이군요.]
몽부용은 겉보기에는 삼십대로 보이나 사실은 이미 육순이 넘은 노파였다.
다만 뛰어난 주안술을 지녀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설동생이 이곳에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찾아왔을 텐데 이제야 소식을 들었지 뭐에요,
어쩜 이런 멋진 곳에 계시면서 연락도 없었어요? 세외선경이 따로 없군요, 그렇죠, 상공?]
몽부용은 옆에 선 수려한 자태의 옥기린 천태랑에게 물었다.
옥기린 천태랑은 바로 그녀 몽부용의 남편이었다.
아내의 말에 옥기린 천태랑도 고개를 끄덖이며 응수했다.
[설여협! 우린 한가지 일을 알아보기 위해 왔소.]
[여협(女俠)?]
천태랑의 매끄러운 말에 중년미부의 안색에 조소가 떠올랐다.
[호호호! 언제부터 백화맹이 나 화사마녀(花蛇魔女) 설연청(薛姸淸)을 여협이라 불렀죠?
한때는 여살성(女殺星)이니 나찰(羅刹)이니 하면서 공적(公敵)으로 몰아 죽이려 하더니
이젠 여협이라고요? 호호호! 우습군요… 정말 우스워!]
중년미부, 즉 화사마녀 설연청은 하늘을 우러르며 교소를 터트렸다.
그렇다! 중년미부 설연청은 백도무림의 지주인 백화맹이
오래 전에 추살명령을 내린 강호의 공적(公敵)들 중 한 사람이었다.
-화사마녀(花蛇魔女) 설연청(薛姸淸)!
이것이 중년미부의 이름이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으나 마음이 뱀(蛇)같이 사악한 여살성(女殺星)!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곳곳에서 피바람을 몰고 다닌 그녀는
지옥에서 뛰쳐나온 나찰같이 손속이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원수처럼 여기는 그녀는
자신의 타고난 미모를 이용, 접근하는 사내들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독화(毒花)였다.
결국 백화맹은 그녀의 잔혹한 손속을 보다 못해
무림공적(武林公敵)으로 선포하여 추살명령을 내렸었다.
하지만 오 년 전부터 그녀는 강호에서 돌연 종적을 감추었다.
하나 아무도 몰랐다.
오년 전 검성(劍城)이 무너지던 바로 그 날, 그곳에 화사마녀 설연청이 있었음을…
[설여협! 우린 지난날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오,
지난 날 설여협께서 숱한 강호 영걸들을 죽인 데에는 그만한 곡절이 있으리라 믿소.]
옥기린 천태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호호! 백화맹이 언제부터 이렇게 관대해 졌을까?
나를 잡으러 왔다면 긴 소리 말고 어서 손을 쓰는 것이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의 의중을 눈치챈 설연청은 전신에서 싸늘한 살기를 흘려내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비치는 매몰찬 살기에도
옥기린 천태랑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설여협! 살기를 거두시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설여협을 잡아 맹으로 압송하기 위함이 아니오,
사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을 맹내에 아는 사람은 없소.]
[그럴 테지! 오 년 전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사마장청(司馬長靑)은 오늘 당신네들을 보내 본녀와 사영이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허어! 우린 설여협을 죽이려고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오! 우린 그저 한가지 사실만 확인하면 되오.]
[헛소리 집어 쳐랏! 날 안심시킨 후 잡으려는 너희들 속셈을 내 모를 줄 아느냐?]
설연청이 발끈해 소리치자 몽부용이 한 발 나섰다.
[설아우! 우린 아우를 잡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아우에게 정말 혈왕(血王)의 비급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뿐이에요.]
[혈왕의 비급!]
몽부용의 말을 듣는 순간 설연청의 안색이 싹 변했다.
(역시 맹주님의 말씀이 옳았군.)
(단사영! 그 놈은 혈왕의 무공을 익혀 그토록 가공할 고수로 탈바꿈한 것이다.)
(초혼간 용불군이 그 애송이에게 죽음을 당한 것도 무리가 아니로군!)
화사마녀 설연청의 놀라는 얼굴을 보며 백화오절은 고개를 끄덖였다.
그들이 맹주라 함은
물론 절대십천의 일인이며 현 백화맹주인 천우대존(天宇大尊) 사마장청(司馬長靑)을 말함이다.
[호호 그렇게 놀라는 것을 보니
단사영과 설아우가 혈왕(血王)의 유물(遺物)을 얻었다는 소문이 사실이군요!]
난향옥부 몽부용은 생긋 웃으며 설연청에게 다가왔다.
[설아우! 혈왕의 무공을 혼자 독차지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연구하는 것이 어때요?
동생이 조금만 양보한다면 우리도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게요
그렇죠, 상공?]
몽부용의 말에 천태랑은 맞장구를 쳤다.
[그렇소! 혈왕의 무공이 수록된 비급을 볼 수 있는 기회와
설여협께서 그동안 수많은 영초(靈草), 영물(靈物)을 이용해 만들고 있는
자소신단(紫消神丹)만 내놓는다면 설여협은 물론 단사영도 해치지 않을 것이오.]
(혈왕의 혈경(血經)은 그렇다 쳐도 이것들이 어떻게 자소신단의 존재를 알았을까?)
옥기린 천태랑의 말을 듣는 순간 설연청은 가슴이 철렁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얼굴색을 차갑게 바꾸며 싸늘한 어조로 되물었다.
[대체 무슨 말이냐? 혈왕의 비급은 또 뭐고? 자소신단은 또 뭐냐?]
그녀의 말에 금판산 능풍이 수중의 금주판을 요란하게 흔들었다.
짜르륵…
그 순간 주판에서 눈부신 금빛 광채가 쏟아졌다.
[허허허! 더 이상 변명하지 마라,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왔다.]
[……]
[오 년 전, 너는 검성에서 단사영을 구출하지 않았느냐?
당시 단사영은 혈왕정(血王鼎)을 지니고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것으로 너희 둘은 혈왕(血王)의 문(門)을 열지 않았느냐?]
그랬던가? 검성의 멸망시 단사영을 구한 것이 희대의 악녀로 알려진
화사마녀 설연청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혈왕정? 그건 또 뭐냐?]
설연청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허허허!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단사영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혈왕의 저주받은 무공을 익혔지 않느냐?]
금판산은 음침한 눈길로 설연청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 뿐인가? 넌 단사영의 내공이 혈왕의 무공을 발휘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함을 알고
지난 오 년 동안 수많은 영초(靈草), 영물(靈物)들을 수집하여
자소신단(紫消神丹)이라는 영단을 만들어왔다! 안그렇느냐?]
금판산의 말에 설연청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때 철수무정 검무위는 자신의 독문무기인 철수(鐵手)를 허리춤에 탁탁 치며 음산하게 말했다.
[설연청, 이제는 승복하겠지?
길게 시간 끌어봐야 피차 피곤한 일이니 좋게 말할 때 혈왕의 비급과 자소신단을 내놔라.]
설연청의 눈에서 싸늘한 한광이 번져나왔다.
그녀는 눈 앞의 사태가 자신에게 극히 불리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미 상대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특히 단사영조차도 모르는 자소신단의 존재를 그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더욱 놀랐다.
-자소신단(紫消神丹)!
인형설삼(人形雪蔘), 천년하수오(千年荷首烏), 자죽련실(紫粥蓮實), 영천석액(靈泉石液) 등
수백 종의 영초, 영물들의 영기를 모아 천일(千日)동안 다려 만드는
천고에 다시 없을 영단(靈丹)이다.
내공을 익힌 자가 자소신단을 복용하면 전신의 모든 경락이 뚫리고
근골이 무쇠와도 같이 강인해져서 지치지 않는 체력과 무한한 내공을 발휘할 수 있다.
[호호호! 모든 것을 알고 온 것을 보니
인면수심의 흉적, 사마괴수(司馬傀首)가 보낸 것이 확실하구나!]
설연청은 은밀히 진기를 돋구며 깔깔 교소를 터트렸다.
[설연청, 함부로 그 분을 괴수라 말하다니! 죽고 싶으냐!]
[호호호! 정인군자인 체하지만 그 작자야말로 위선자다.
그런 자 밑에서 꼬리를 치는 주구 주제에 누굴 죽인다는 말이야!]
[정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계집이군!]
[호호호, 누구의 관을 보게 될 지 하늘만이 안다!]
금판산 능풍의 눈에서 살망이 일어났다.
[흐흐흐! 설연청, 말 잘했다. 그렇다면 너에게 진정한 하늘의 무서움을 가르쳐 주겠다.]
다음 순간 그가 수중의 금빛 주판을 자르르 흔들자 백화오절은 삽시간에 설연청을 포위했다.
설연청의 얼굴도 살얼음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는 진기를 극한대로 끌어올리며 백화오절을 차레로 일별했다.
그 순간 백화오절은 저마다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다르다! 오 년 전 화사마녀가 아니다!)
(무서운 눈빛! 게다가 고요히 가라앉은 저 천주부동(天柱不動)의 자세는
아무나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저 게집을 잡으려면 힘깨나 써야 겠는데…!)
하지만 그들은 숫적 우위와 자신들의 무공을 자신했다.
스스슥!
옷자락 소리와 함께 그들은 진세(陣勢)에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어느덧 서서히 회전하던 그들의 신형이 속도를 더해 가더니 곧 풍차처럼 회전했다.
휙휙! 휴류류륭…
풍차처럼 회전하는 인영들 속에서 금판산 능풍의 대갈이 터졌다.
[천지개벽(天地開闢)!]
휘위잉!
철수무정 검무위의 철수가 무서운 파공성과 함께 검은 광망을 뻗쳤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옥기린 천태랑의 백우선이 좌르르 펴지며 다섯 줄기 강기를 날렸다.
그 두 가지 공격은 전후에서 정확한 배합을 이루며 설연청을 가격했다.
그러나 설연청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두 가닥 공격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양손을 꼿꼿이 펴더니 벼락처럼 전후로 휘둘렀다.
꽈꽈꽈꽈--꽈아아아-!
날카로운 금속음과 불꽃이 사방으로 튕겼다.
[윽!]
[음!]
그와 함께 두 마디 신음과 함께 풍차 속의 인영이 흐트러졌다.
철수무정 검무위와 옥기린 천태랑은 두 걸음씩 격퇴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오 년 세월이 짧은 것은 아니지만 설연청의 무공이 이토록 증강하다니…
단 일 초에 우리 두 사람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백화오절의 가슴에 의구심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화사마녀 설연청이 일류 고수란 점은 인정하지만 이처럼 강하지는 않았다.
헌데 지금 그녀의 실력이라면 능히 절대십천과 견주어도 크게 뒤질 바가 아니다.
짧은 순간 백화오절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설연청을 너무 과소평가 했는지도 모른다.)
(설마 저년도 단사영과 함께 혈왕(血王)의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그들의 눈을 서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초일류고수라 하더라도 상대에게 방심하게 되면 그만큼 낭패를 보게 됨을
오랜 강호 경험을 통해 몸소 겪은 그들인지라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금반산 능풍은 다시 대갈이 터뜨렸다.
[일공진천궁(一攻震天穹)!]
고함과 함께 금판산 능풍의 쌍장이 물결처럼 차오르며 광포한 장력을 날렸다.
동시에 자전비각 모백의 좌장에서 검은 빛이 쏟아졌다.
ㅆ아아앙--
그것은 흑유탄강(黑柔彈 )이라는 그의 독문절학이었다.
그와 동시에 붉은 홍선(紅線)이 어지럽게 설연청의 전신을 갈라왔다.
그것은 난향옥부 몽부용이 무기로 쓰는 홍색요대(腰帶:허리띠)였다.
휘리리링…
요대는 길이가 근 삼 장(三丈)에 이르러 한껏 구부리고 펼수 있어 방어와 공격이 매우 용이했다.
[앗!]
찌익! 팍!
설연청은 등과 위쪽 어깨가 화끈함을 느꼈다. 백의가 길게 찢겨나가고 피가 튀었다.
허나 백화오절의 공격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녀로 하여금 호흡 한번 늦출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위잉! 꽈르릉! 파파팟!
철수와 백우선이 또다시 설연청의 요혈을 공략했다.
펑! 퍼펑!
설연청의 웅후한 장력에 폭음이 울리며 쌍방은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금빛이 일어나며 주판소리가 귀청을 두드김과 동시 흑유탄강의 검은 장력이 뒤를 따랐다.
펑펑펑- 윙- 꽈르르릉-!
인영이 난비하고 뒤얽히는 가운데 장내는 경기가 어지럽게 흙먼지가 날렸다.
바야흐로 일대오(一代五)의 격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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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갑니다
좋습니다‥감사해요
잘봅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독.하고 있읍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
즐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