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의 열매 설교집 1. 사랑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번 주부터 성령의 열매의 9가지 특징, 즉 그 의미에 대하여 한 가지씩 살펴보기로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부터 12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요일 4:7-1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올해 사순절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서 육체의 소욕을 점차 없애주시고 성령의 소욕으로 채워주실 것을 저희가 간절히 소망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사순절 기간 동안에 맞는 첫 주일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주실 것을 믿고 또 소망합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제가 앞으로 성령의 열매 9가지의 특징에 대해 우리가 하나하나 보아 갈 때에 먼저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세속적 의미들, 즉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전적 의미들을 다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경에서 그 단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가 하나하나 보아나갈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첫 번째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참으로 큰 주제입니다. 사랑 할 수 없는 자가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변화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약속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아가페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아가페 성경도 있고 아가페 출판사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아가페와 필리아를 비교하기도 하지요.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4개 있습니다. 에로스, 필리아, 스트로게 그리고 아가페가 있는데 그 중에 아가페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시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둘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욕망하는 바에 의해 맺히는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 특징이 사랑인데, 그렇다면 육체의 욕망하는 바에 의해서 맺히는 육체의 열매 중의 첫 번째는 무엇일까요? 역시 사랑입니다. 19절에 보시면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그렇게 시작되죠? 즉 남녀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등을 꼽고 있는데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이것 또한 육체의 소욕에 의한 사랑의 특징들이고 필리아 사랑과 스트로게 사랑입니다. 필리아는 친구 간의 사랑을, 스트로게는 가족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당 짓기란 당원들끼리 사랑하는 것이지요. 바로 세상 사람들이 이루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공동체에서의 사랑을 대단히 중시합니다. 가족 간의 사랑이란 다른 가족과 구별하고 분리되어 다른 가족과 경쟁하는 것입니다. 친구들 간의 사랑, 민족 사랑, 국가 사랑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 등등이 바로 육체의 소욕에 의한 세상 사람들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가이사의 세계의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표현인 것이지요.
이렇게 성령과 육체 양쪽이 모두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 온 육체적인 사랑, 세상적인 사랑을 포기하고 성령에 의해서 맺혀진 사랑이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고 또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바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열매 사랑은 우리의 육체의 열매 사랑을 밀어내면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내가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이지요. “아버지와 아들이 원수가 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원수가 되고, 가족이 다섯 명이면 그중에 둘과 셋이 서로 원수가 되게 만들고, 모두 다 원수로 만들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냐 하는 겁니다.
당 짓기를 하고 그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화목한 가정을 해체시켜서 성령의 열매로 사랑을 하는 천국 가정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봉독한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씀하는데 하나님께 속한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 가정이 천국가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 가족끼리 똘똘 뭉쳐 서로 사랑하던 화목한 가정이 먼저 해체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제거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사랑이라는 똑같은 단어를 놓고 극단적으로 충돌되는 두 가지 사랑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definition, 즉 정의을 먼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 버리고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제 본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야! 정말 하나님께서 헬라어를 선택하신 것은 참 오묘하다”라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필리아 사랑과 아가페 사랑으로 헬라어는 구분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를 쓰고 인간들끼리 하는 사랑은 필리아를 쓰고 있다”는 말을 다들 아마 들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아가페 출판사, 아가페성경 등의 이름들을 붙이고 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류인 것이지요. 아가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우리가 그것부터 먼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에서도 사랑이란 단어로 아가페를 씁니다. 그리고 요한일서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할 때 아가페를 쓰고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할 때에도 아가페를 씁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마지막장 21장에서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라고 할 때에도 아가페를 쓰지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이야기 할 때는 필레오라는 동사를 씁니다. 이것을 놓고 사람들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아가페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시는데 베드로가 차마 그렇게 대답할 자신이 없어서 필레오라는 단어를 쓰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에는 예수님도 필레오를 사용하여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글과 설교들을 한 번씩은 접해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류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사람들이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할 때 아가페의 동사형인 아가파오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서신도 마찬가지 사례를 보여줍니다. 디모데후서 4장10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할 때 아가파오를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필레오는 인간이 하는 사랑이고 아가파오는 하나님의 하시는 사랑이라는, 즉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그 반대되는 예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20절입니다.
(요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여기서 필레오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정 반대죠? 그리고 고린도 전서 16장 22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봉독합니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여기서도 필레오 동사를 씁니다. 아가페 사랑과 필리오 사랑, 사랑하다의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성경에서 완전히 교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다"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는 성경 사전 중에 이런 언급이 있었어요.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번역자들이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옮길 때 사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명사 아하바와 그 동사인 아하브를 모두 아가페와 아가파오로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아가페로 일관되게 번역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연 그럴까? 하고 봤더니 아니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아하브와 아하바가 아가페로도 번역이 되고 필레오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함께 찾지 않고 그냥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 이삭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아가파오 동사를 씁니다. 아가페 사랑이지요. 그런데 같은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이 자기 아들 중에 요셉을 유독 사랑했다고 할 때에 그때에는 필레오를 씁니다. 잠언 8장 17절을 보시죠.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여기서 히브리어 성경은 모두 아하바를 씁니다. 그런데 70인역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에서는 필레오로 번역하고 "나의 사랑을 입으며"에서는 아가파오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잠언이나 시편, 그리고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아가페로 번역하긴 했습니다만 그 신학사전에서 주장하듯 70인역에서 아하바 사랑을 모두 아가페 사랑으로 번역을 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70인역을 번역한 사람들도 아가페와 필레오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번역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교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빈도수로 따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로 번역한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빈도수를 가지고 따질 일이 아니지요. 그 단어의 definition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확률로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경각심을 주시려고 이것을 보게 해 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아가페와 필레오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구분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한글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혼란과 영어성경에서 love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혼란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헬라어의 아가페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혼란까지도 극히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확인할 때 심지어 헬라어도 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 사랑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전체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랑이 과연 어떤 사랑인지는 성경 66권 전체에서 확인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이 도대체 어떤 사랑인지를 이제부터 성경에서 찾아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맺는 사랑과 성령의 소욕이 맺는 사랑은 어떻게 다르며, 육체의 소욕이 맺는 사랑이 제거되는 방법은 무엇이며, 성령의 소욕이 맺는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는 과정이 어떤 것이며, 그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임했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적용될 때에 우리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 등등이 모두 명확하게 정리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오류를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최대의 오류는 육체의 소욕의 열매인 사랑을 성령의 소욕의 열매인 사랑으로 착각하고서 거룩하고 고결하게 산다고 하면서 육체의 소욕에 맺힌 사랑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 중 최근의 인물을 꼽는다면 김수환 추기경과 테레사 수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으로 인해 맺힌 사랑을 성령의 소욕으로 인해 맺힌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산 사람들이지요. 우리도 그 함정에 수시로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시는 육체의 소욕에 휘둘리지 않고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24절부터 26절까지 말씀을 봉독합니다.
(갈 5:24-2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완전히 제거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와 정과 욕심이 바로 우리의 지정의, 즉 인성입니다. 인간의 인성 전체를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육체의 소욕의 열매인 사랑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그 치열한 싸움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가 아차 하는 순간 다시 육체의 소욕의 열매인 사랑 안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서 계속 싸웁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안에 두 법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두 법이란 바로 육체의 소욕에 의한 사랑과 성령의 소욕에 의한 사랑입니다. 육체의 소욕에 의한 사랑과 성령의 소욕에 의한 사랑 사이에서의 혼란이 가장 교묘하게 우리를 오류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된 짓만 하던 인간이 회개해서 착한 사람이 되고, 조폭이 목사가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 선악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 윤리학적인, 국민윤리 교과서 수준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에 의한 사랑이 제거되고 성령의 소욕에 의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자리잡는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이 신비한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깊은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그 깊은 회개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 깊은 회개로 우리가 들어갈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맺히게 될 것입니다. 두 가지 사랑 사이의 교묘한 혼돈의 수렁에서 우리가 완전히 빠져나오게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지금 우리에게 회개를 명령하시고, 또 동시에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약속하십니다. 그 놀라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습니다.
이제 성령의 소욕에 의해 맺히는 성령의 열매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하나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다 잘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어머니를 버리면 모친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부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단수인 메테라를 버리면 복수인 메테라스를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네 어머니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포기하면 어머니들, 즉 하나님이 나라 공동체 안에 있는 어머니 연배의 분들을 모두 자기 어머니처럼 사랑할 수 있고 또한 우리 공동체 밖에 있는 분들을 향해서도 내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똑같은 사랑으로 그 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 정성을 바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검을 주러 왔다”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어서 마태복음 7장 11절과 12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마 7:11-12)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소위 말하는 황금률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성경구절이지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를 황금률이라고들 부르지요. 절묘하게 성경의 사랑을 규정한 말씀이라고 보기 때문인데 과연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11절과 12절의 말씀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에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러므로"라고 하셨는가 하는 점이지요. "좋은 것"은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성령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달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 사람 안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나는 세상의 밥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고 싶다는 말이지요. 밥이 되고 싶다는 말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밥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육체의 소욕에 의해서 맺혀진 사랑은 내 육체가 판단한 상대방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사랑입니다. 그게 큰 특징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가장 대표적인 예지요.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은 밥을 주려고 애를 썼고, 테레사 수녀는 병든 빈민들을 고쳐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성령을 구하면 주신다. 그러므로 남도 그렇게 대접하라"는 말씀과는 동떨어진 행위들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위 황금율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증언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평생의 소원이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의 밥이 되는 것이었을까요? 빈민들을 치료해주는 것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나의 면류관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어린 자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그의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듯이 사도 바울의 소원은 어린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자기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황금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성령을 구하라. 네가 성령을 간절히 구해서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성령을 구해서 받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11절과 12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여 진정으로 사랑를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5절을 봉독합니다.
(고후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이 사랑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 말씀이나, 메테라를 버리면 메테라스를 얻는다는 말씀이나, 또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 등등의 모든 말씀들이 이루어 진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의 소욕으로서의 사랑과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결코 양립될 수 없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장례식에 왜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까지 그렇게 많이들 몰려와서 애도를 했겠어요? 자기들 입맛에 딱 맞는 말을 하고 실천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추모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맺은 육체의 열매로서의 사랑에 충실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흠모하는 것이지요. 테레사 수녀가 왜 타임지에까지 기사가 나왔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던 일을 하니 테레사 수녀가 그렇게 사랑을 받았던 것이지요.
이건 아주 교묘한 것이어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수시로 이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우리가 in Christ 상태에서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을 하다가 Out of Christ 로 빠지는 순간 즉시 다시 육체의 소욕의 사랑, 즉 휴머니즘, 박애정신, 가족 사랑, 나라 사랑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것이 항상 잘 분별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부터 성령의 열매인 이 사랑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행해지는가에 대해 성경에서 알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37절까지의 말씀을 봉독합니다.
(눅 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이라고 대답한 것까지는 옳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사가 - 저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만 - 쓸데없이 오버를 합니다. 거기서 끝냈으면 칭찬을 듣고 끝냈을 텐데 “누가 제 이웃입니까?”하고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누구까지인지를 예수님께 묻는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강도 만난 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비유에서 등장시키시는 인물이 사마리아인입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세리나 창기를 등장시키지 않고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태인들에게는 사랑할 이유가 없는 대표적인 대상입니다.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앗수르의 침공 이후 이방인과 혼혈이 된 자들이었기 때문에 세리와 창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이방인들보다도 더욱 멸시받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셨을까요? 네가 사랑해야 할 이웃에는 심지어 사마리아인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처럼 선한 휴머니스트가 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지요. 성경의 약속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이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이 모범으로 제시하신 것이라면 성경 전체와 맞지 않지요. 사마리아인이 한 사랑은 육체의 소욕에 따른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마리아인은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사랑의 대상은 사마리아인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마리아인까지란 결국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에게는 최악의 그룹이기 때문이지요. 승천하시기 전에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흐름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육체의 열매인 사랑과는 달리 사랑의 대상에 있어서 구별이 없습니다. 내 편 네 편의 편가르기와 당 짓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네 후손이 복을 얻으리라”가 아니라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였습니다. 이것이 원래의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그런데 그 중간에 어떤 역할을 담당시키려고 이스라엘이 1800년 동안 잠깐 끼어 있었던 것뿐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겨우 1800년 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하나님의 약속하셨던 성령의 열매가 맺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강도 만난 자의 비유는 우주적인 차원의 엄청난 선언을 하시는 내용인데 그것을 엉뚱하게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주자, 치료해주자, 고아원을 짓자, 양로원을 짓자”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등의 말씀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개와 돼지의 비유입니다. “개와 돼지에게 귀한 것을 주지 말라”고 하시고 또 “그 집에서 나와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이 합쳐졌을 때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정의를 정확히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외인을 향하여는 세월을 아끼고 지혜롭게 행하라”는 말씀도 같은 흐름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면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이 모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그 푯대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푯대를 공유하고 있다면 아직 육에 속한 어린 자라 할지라도 같은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류를 향해 열린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푯대의 공유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닫힌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이 행해지기 때문에 그들이 합류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바울도 자기 자신과 재물을 모두 허비했다고 증언하듯이 같은 푯대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는 목숨까지 던지면서 서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외인을 향하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그 처절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저들도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고 우리를 보십시오. 당신도 나처럼 우리들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천당 불신 지옥 차원의 복음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를 보라는 겁니다. “우리처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이 되어서 새로운 성령의 법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자녀로,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자로써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당신들도 제발 서로 물고 먹으면서 살아가는 그 처절한 인생에서 해방이 되어서 우리처럼 사십시오!” 하고 계속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사신이고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빛의 역할을 하면서 살 때에 과연 누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인지, 지금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인지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닥치는 대로 붙들고 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김용호 같은 사람도, 4중창 후배들이 찬송가를 부르면 꿀밤을 쥐어박으면서 "세상에 좋은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찬송가를 부르냐?"라면서 후배들 꿀밤을 먹이던 저 같은 사람도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셨는데 우리가 어떤 사람을 향하여 “이거 마귀새끼구만! 이거 지옥에 갈 놈이로구만!”이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에게 때가 됐다 안 됐다 정도는 우리가 찔러보면 압니다. 그 때가 아직 안 됐다고 보이는 사람의 경우에는 우리가 돌아서는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 때가 된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서지요. 우리는 닥치는 대로 낚시를 던지고 미끼를 던지는 것이죠.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들을 핍박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에게서 사망의 냄새를 맡기 때문이지요. 예루살렘 교회도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칭송은 하되 상종은 안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들 미친 거 아니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상종을 안 하려는 사람들에게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도해 보고 만약 아니다 싶으면 다른 곳에 낚시를 던지는 것입니다. 뱀처럼 지혜롭게 말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외인들을 향하여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셨던 사랑입니다.
아무리 낚시를 던져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사람에게 계속 낚시를 던지는 것은 오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 오기도 물론 중요할 때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자기 의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바람 같은 자이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바람 같은 사람이지요.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사랑과 외부를 향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의 도구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과 15절을 봉독합니다.
(마 25:14-15)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예수님께서 재능과 달란트를 말씀하십니다. 재능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supernatural한 것이 아닌 natural한 능력입니다. IQ가 높다든가, 돈 버는 데는 귀신이라든가, 다른 사람과의 친화력이 대단하다든가, 몸이 아주 건강하다든가 예술적인 감각이 아주 뛰어나다든가 하는 인간의 다양한 재능입니다. 그 인간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 달란트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비유입니다. supernatural한 능력이지요.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장8절에서 말씀하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할 때에 그 권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재능을 최적화시키시고, 가장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부어 주십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는 것이지요.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장이라고 불리지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이 은사에 대한 장입니다. 12장 8절에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하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쭉 말씀한 뒤에 31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라고 한 다음에 이어서 사랑에 대해 13장에서 쭉 말씀합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에 대한 말씀이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14장 1절을 보시면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십니다. NIV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전 14:1) Follow the way of love and eagerly desire spiritual gifts, especially the gift of prophecy.
개역 성경에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 개역개정에는 “사랑을 추구하며”인데 NIV는 개역성경과 비슷해서 Follow the way of love, 즉 사랑의 길을 따라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12장 31절과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네게 보이리라.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를 NIV에서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즉 'The most excellent way'를 너희에게 보여주겠다고 하고 이어서 13장에 그 'The most excellent way'를 보여주고 나서 14장 1절에 ‘The way of love를 Follow 하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사랑장 13장은 은사가 행해지는 way, 은사가 행해지는 통로로서의 사랑에 대한 말씀인 것이지요. 12장과 14장 사이에 13장이 끼어있는 것이지요.
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면서 사랑의 은사라고들 하는데 사랑은 은사가 아닙니다. 애초에 이 사랑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데다가 이 사랑은 성령의 은사가 행해지는 통로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이 우리에게 맺혀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기 시작할 때 그 사랑의 행위를 잘 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natural한 재능을 극대화 시키면서 은사를 합해 시너지효과를 최대로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렁이’같은 우리가 '산을 부수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로 변화되어 사명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이사야서 41장에 예언된 약속의 성취지요. 산을 부순다는 것이 무엇에 대한 비유일까요? 일의 이웃의 육체에 속한 공공한 삶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능력있는 삶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이 사는 삶이지 생활인인 평신도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갑갑하지요”라고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직장 다니고 사업하는 사람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대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었었거든요.
이제 현실적인 삶의 현장에서 사랑을 행하는 모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이 뒤바뀐 사람, 그러니까 육체의 소욕이 맺은 사랑에서 성령의 소욕이 맺은 사랑으로 교체된 사람이 실제의 일상생활에서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일만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목사나 신부가 살아가는 삶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은 학생은 공부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고 직장 다니는 사람은 직장일을 하고 공무원은 나라에 충성하면 됩니다. 왜일까요? 낚시질을 더 잘 하기 위해서입니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낚시질을 더욱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지요. 사업하는 사람은 열심히 사업을 해야 합니다. 낚싯대를 100개, 1,000개, 10,000개 사기 위해서지요. 결혼은 왜 합니까? 아내를 낚시질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은 왜 낳습니까? 낚시질 잘 하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학생은 세상 학생들 못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이 세상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사업을 하게 되는데 그 동기만 바뀌는 것이지요. 게다가 성령의 은사까지 더해지니 세상에서 공부하고 사업하는 사람들보다 새로운 피조물이 훨씬 더 성적이 좋게 나오고 사업은 더 번창하게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임했으니 잠까지 줄이면서 공부를 하고 사업을 하게 됩니다. 지금 게으르게 보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속에서 애타는 마음, 애절한 사랑이 불타고 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가 맺힌 사람들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착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더 탐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애타는 사랑, 치열한 사명감 때문입니다. 우리가 낚시질을 하면서 낚싯대를 하나 가지고 있던 사람은 더욱 열심히 일해서 낚싯대를 두개, 세 개, 네 개로 늘려야 하고, 낚싯밥도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고, 계속해서 낚시장비를 고급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책임에 속한 일입니다.
낚싯밥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낚싯밥은 물고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선택해야 하지요. 낚시꾼이 좋아하는 삼겹살을 바늘에 끼우면 물고기가 물지 않지요. 그러니 가장 대표적인 낚싯밥으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고아원, 양로원. 김수환 추기경이 말한 세상에 밥을 나누어 주는 것, 테레사 수녀가 평생 행했던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해 주는 것 등이 대표적인 훌륭한 낚싯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심각한 오류가 많이 일어납니다. 낚싯밥이 물고기에게 가장 적합한 먹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입니다. 낚시밥은 미끼에 불과한 것입니다. 낚인 사람들에게 앞으로 공급해야 하는 것은 미끼가 아니라 가장 훌륭한 먹이인 것이지요. 즉 성령의 충만이 그들에게 임하도록 옆에서 우리가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아원과 양로원은 모두 그 일을 위해 우리ㅐ가 던지는 미끼인 것입니다.
그런데 미끼 던지는 것이 설영의 열매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왜일까요? 자신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육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에 의해 맺힌 사랑 외에는 모르는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미끼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려니 항상 자신이 양보하고 희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밥을 좋아하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어야 하니 희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것을 ‘거룩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극서은 거룩한 삶이 아니라 소경의 삶이지요.
고아원 양로원이라는 낚싯밥을 던져 물고기가 낚싯대를 무는 순간 확 잡아채서 그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라는 말씀이 성경에서 그토록 강조되는 이유는 눈먼 자, 갇힌 자, 고아와 과부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은 다 같이 ‘어둠에 속한 자’입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육교 위에서 아기를 업고 추운 겨울에 벌벌 떨면서 동냥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나 그 밑을 벤츠를 타고 지나가는 재벌회사 회장이나 똑같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모두가 처절한 인생입니다. 그 눈은 언제 열립니까? 나에게 성령의 열매가 열리면서 내가 먼저 그 비참한 삶에서 해방될 때 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시면, “너희는 재판할 때에 절대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부자라고 편을 들어서도 안 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편을 들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인간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부자가 부자입니까? 라오디아 교회 교인들이 부자였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너희가 말하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어서 “너희는 너희의 헐벗은 것을 보라”고 말씀하시지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자기들이 판단하기에는 부자였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헐벗고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고아들만 불쌍한 아이들입니까? 그렇다면 좋은 부모님 아래서 행복하게 사는 집 아이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겠네요? 고아가 불쌍합니까, 부잣집 아들이 불쌍합니까? 똑같이 불쌍한 것입니다. 효도하는 자식들이 여럿 있는 노인들은 행복하고 자식 하나 없이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노인들만 불쌍합니까? 똑같이 불쌍한 겁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이 우리에게 맺히게 되면 우리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잠언 30장 7절에서 9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잠 30:7-9)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부자가 유리한 것이 있습니까? 가난한 자가 유리한 것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부자가 더 불리합니까? 가난한 자가 더 불리한가요? 다 똑같습니다. 다 똑같이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낚시를 던질 때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구분해 가면서 낚시를 던진다면 그것은 큰 오류입니다. 물론 우리 안에서 역할 분담은 잘 해야겠지요. 부자에게 잘 듣는 낚싯밥을 가진 사람은 부자에게로 보내고 가난한 사람에게 잘 먹히는 낚싯밥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로 보냅니다. 우리가 그렇게 역할을 분담할 수는 있지만 진리의 차원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아직도 육에 속한 소경이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떠한 오류까지 범한 줄 아십니까? 병원으로 가난한 환자들이 계속 밀려드니까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어디 가서 뭘 했냐 하면, 세상의 독재정권을 좇아다니면서 사진 찍는 일을 했습니다. 악명 높은 독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어서 그들이 “테레사 수녀가 우리 정권을 인정해 줬다”라는 홍보를 하게 하고 독재자들로부터 돈을 받아와서 자기가 일하는 병원의 경비를 조달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병자를 치료하는 것이 지고한 선이라고 착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테레사 수녀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굉장히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왜 테레사 수녀가 그런 함정에서 못 벗어났을까요? 얼마전 타임지에 난 기사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에게서 고해성사를 30년 이상 받았던 신부가 책을 하나 낼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 책에는 테레사 수녀의 고해성사가 담길 예정이고 그 내용에는 테레사 수녀가 평생 하나님을 체험한 적이 없어서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를 몰라 고통을 겪고 있다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육에 속한 자에서 한발치도 벗어날 수 없었고 그러니 그런 행동들을 한 것이지요.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라고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답이 안 나옵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육체의 소욕이 맺은 인간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제거되고 성령께서 임하심으로써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이 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회개를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극도의 신비한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내 일상의 삶에서도 실제적으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변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사건은 극히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교회 잘 섬기고, 목사님 잘 섬기고, 헌금 잘하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업체에서, 가정에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적인 변화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령의 열매의 약속입니다. 종교적인 열광 상태에 대한 약속이 아니고 극한의 신비와 극한의 현실이 일치되고 결합하는 약속인 것이지요. 회개의 사순절이 끝나며 맞이하게 되는 올 해 부활절에는 우리에게도 놀라운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우리의 내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진행될 것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