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페와 그 일행들은 아오테이로아의 남. 북섬을 일주하는 동안 많은 모험을 하면서 이 땅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몇 가지 발견하였었다. 그 중 남섬의 Arahura에서의 푸나무 (Pounamu: greenstone)의 발견과 Wairere 근처에서 날지 못하는 거대한 새, 모아 (Moa)를 발견 사냥한 것은 가장 값어치 있는 일로 간주되고있다. 그들은 이 Greenstone과 Moa 고기를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 그들의 고향으로 되돌아 갈 때 함께 가져갔다.
14세기 경 Hawaiki에서는 인구 과다도 인한 식량 부족 등의 이유로 부족간의 분쟁과 심지어는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고향을 영원히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 그들의 위대한 조상 쿠페가 발견한 이 땅 아오테아로아를 기억하고 이 땅을 찾아 남쪽으로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위대한 선단’으로 불려지는 7척의 카누는 남 북섬의 해변으로 각각 도착하게 되었다. 각 각의 카누에 타고있던 일행들은 그들이 도착한 해변에서 정착하게 되었고 부족사회를 형성하여 공동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부족들의 구성원들이 늘어남에 따라 많은 수의 구성원을 가진 가족들이 독립하여 내륙으로 지경을 넓혀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독립한 가족들은 또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고 이 부족에서 또 가족단위로 독립해 나가 새로운 부족이 형성되어 결국에는 각 부족별로 그 차지하는 땅의 경계선을 만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 많은 땅과 더 좋은 땅을 차지하기위한 부족간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끊임이 없었다. 다음의 마오리 격언은 이러한 상황을 지금도 잘 말해준다.
‘He wahine, he whenua, I mate ai te tangata’ (남자들이 죽은 이유는 여자들과 땅이다.)
부족 내에서의 땅 소유권은 조상으로부터 또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얻어져 왔다. 위대한 족장들에게는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이 있었으며 작은 규모의 가족들도 한 시대의 동지로서 합법적인 소유권을 인정 받았었다. 땅에 대한 소유권은 일반적으로 집안 대대로 상속될 수 있었으나 땅을 상속 받는 것에는 많은 규칙이 따랐으며 그 상속자들이 땅에 대한 권리를 계승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부족 내의 모든 땅들은 개인의 소유보다는 부족의 소유로 여겨졌었으며 공동으로 경작하고 일했으며 그 산물을 부족의 전체 재산으로 공유했었다.
2. 뉴질랜드의 새로운 정착민 - 모아 사냥꾼(Moa –Hunters)
일단 뉴질랜드에 도착한 폴리네시안 들은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기위해 그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뉴질랜드는 그들이 살았던 열대 섬의 기후와는 그 기후가 달라 경작물의 종류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가져온 대부분의 열대 식품들은 쿠마라(고구마 종류), 후에(호박종류의 열매), 타로 및 얌 등을 제외하고는 경작이 불가능했다. 특히 쿠마라는 많은 노동력을 요하고 시기를 잘 맞춰 경작해야 하며 저장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이 있었으나 가장 귀한 경작물로 여겨졌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이 모아-사냥꾼들은 석기 시대에 머물렀으며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땅’을 비옥한 땅으로 만들어서 경작했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생활 근거지들의 일부 땅들은 나무를 태우고 난 후의 재가 섞여 있거나 작은 자갈 등을 섞어 땅의 밀도를 조절하기도 했었다.
비록 코코넛이나 후룻브레드 같은 그들이 가져온 경작물들이 이 새로운 땅에 잘 적응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굶는 일은 없었다. 근해는 생선, 조개, 게, 바다가재 등으로 풍요로웠으며 내륙의 강과 호수들도 여러 종류의 민물 생선들과 특히 장어들로 넘쳐 났었다.
뉴질랜드 숲은 이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자신들의 고향에서 먹던 것과 같은 것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먹을 수 있는 나무와 열매들이 점차 발견되기 시작했다. 라라우헤(Bracken Fern: 고사리 같은 큰 양치류 식물)는 먹을 수 있는 식물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더 나아가 카라카(Karaka) 및 타와(Tawa)나무의 열매는 독성이 있었으나 그 독성을 제거하고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이 새로운 이민자들의 식물에 대한 정착은 발전해나갔다.
숲에는 또한 새들로 가득했었으며 특히 날지 못하는 새 –모아와 키위 – 가 있었다. 뉴질랜드에는 육식 동물을 포함 포유 동물들이 살지 않았었기 때문에 일부 새들은 날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모아는 폴리네시아 말로 ‘닭’을 의미한다. 초기 마오리들이 주로 선호했던 모아는 사람 크기 정도의 Euryapteryx gravis 였으며 지역에 따라 키가 3m 정도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Dinornis도 즐겨 먹었었다. 모아는 사냥하기 쉬운 훌륭한 식량 원이었으며 동시에 그 쓰임새도 많았었다. 모아의 허벅지 뼈는 목걸이 등 장신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으며 구멍을 뚫은 모아 새알은 휴대용 물통으로 사용되었었다.
이 모아-사냥꾼들은 유럽인들이 만난 마오리들보다 훨씬 이전의 폴리네시안들로서 유럽인들이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 모아 새들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단지 마오리 조상들의 무덤에서 모아의 뼈와 알 등이 발견되고 또한 화석화 된 모아의 뼈나 이빨 등을 통해 모아의 존재와 그 크기 및 특성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적으로 이 시대의 마오리 조상들을 모아사냥꾼이라고 부른다.
초기 폴리네시안들 이 뉴질랜드 땅으로 이주할 때 이들은 문자, 도자기 및 금속을 가져오지 않았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음식을 익혀먹었었을까?
대부분의 폴리네시아 사람들처럼 이들도 ‘우무(Umu)’라고 불리는 천연 오븐에 음식을 익혀 먹었었다. 지금은 이 ‘우무’를 ‘항이(Hangi)’라고 부른다. 먼저 땅에 구덩을 약 1m 깊이정도로 파낸다. 그 구덩 위에 잘 말린 나무를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자갈들을 올린 뒤 나무에 불을 붙인다. 그 나무가 다 타고나면 자갈의 무게로 인해 타고 남은 나무와 뜨겁게 달구어진 자갈이 구덩이 밑으로 내려 앉는다. 그 자갈 위에 물을 부으면 뜨거운 열이 수증기와 함께 생긴다. 그러면 먼저 고기 종류를 넣고 그 위에 생선, 그리고 야채 종류를 쌓아올린 후 젖은 나뭇잎으로 그 구덩의 입구를 막은 후 그 위에 흙을 덮고 약 2시간 정도 그대로 두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 때 소금 간을 하기위해 바다의 조개들을 고기와 함께 넣기도 하였었다. 화산 활동이 왕성한 지대에서는 지열을 이용한 ‘항이’를 사용했었다. 뜨거운 열이 항시 있었으므로 단지 구덩을 파고 그 안에 음식 재료를 넣어두고 뚜껑을 덮어두면 요리가 다 되었었으며 익힌 음식도 항상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었으니 요즘 시대의 온장고 및 쿠커라고 할 수 있겠다.
폴리네시아 섬들에 비해 훨씬 낮은 뉴질랜드 기온은 이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집은 아주 소중했다. 특히 뉴질랜드 겨울의 밤은 이들이 견디기에 너무나 추웠다. 이들은 집을 짓기 시작했으며 주로 잠을 자거나 기후가 아주 나쁠 경우 쉼터로 사용했다. 때로는 따뜻하게 열이 가해진 돌을 집 내부로 가져와 집안 공기를 따뜻하게 데웠었다. 그러나 음식은 집안 내로 들여놓지 않았었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늘 집 밖에서 이뤄졌으며 비가 오거나 하면 임시로 천막 같은 것을 만들어 그 곳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가로 3~5m, 세로 2~3m의 직사각형 모양의 방에서 모든 가족들이 함께 생활했으며 단열 효과가 있는 바닥에 벽을 세운 경우도 있으나 주로 벽 없이 생활했었다. 이보다는 조금 더 큰 집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주로 부족장의 소유로 부족 회의나 행사가 있을 경우, 또는 외부에서 손님들이 찾아왔을 경우 제공되었었다. 이러한 장소를 미팅하우스(Meeting-House)라고 부르는데 현재 우리가 박물관이나 마오리 전통 마을에서 볼 수 있는 그 큰 규모의 미팅하우스는 유럽인들이 뉴질랜드를 발견한 이후 여러 사회적 정황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그 이전에는 가로가 약 9~10m정도로 일반적인 집들보다 약간 더 컸었을 뿐이다.
음식을 잘 보관하는 것 또한 이들에게는 중요한 일로서 창고(Storage House)는 각 부족에게 있어 보물과 마찬가지였었다. 주로 부족장의 소유로 되어있으며 그 부족장의 힘과 부족민들로부터의 존경심 등에 따라 그 크기와 장식이 달랐다. 새 고기들을 그 고기의 기름에 담가 저장하여 두었었고 부족 조상들의 유물, 손님들을 위한 매트리스, 전쟁에 대비한 무기 및 부족장의 개인 장식 소장품들이 이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부족민 개인의 장식품 및 귀중품들은 인정되지 않았었으나 개인의 연령, 부족에 대한 공헌도 등에 따라 3-4개 까지는 인정해 주었었다.
초기 마오리들의 사회 계급, 출생과 결혼, 죽음, 교육 및 예술, 놀이 문화 등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되는 연재를 통해 하나씩 이야기 하기로 하겠으며 다음 호에는 유럽인들의 접촉으로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