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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장군 |
고희는 1560년 부안읍 성남리(현재 쟁가리 이대)에서 태어나 25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지낸다. 선전관을 지낼 당시 임진왜란이 발발, 선조를 모시고 몽진을 떠난다. 선조 26년(1593) 10월 왕을 모시고 무사히 서울로 환도하니 이로써 왕에 대한 호위의 대임을 완수하게 된 것이다. 이때 장군의 나이 34세였다. 장군은 이후 도총부 경력, 위원, 덕춘군수, 훈련원 판관, 부령부사, 박천, 홍원, 용천군수 등 관직을 두루 거쳤고, 선조 35년(1602)에는 당상관인 정삼품 통정대부로 승진, 풍천 도호부사를, 38년(1605)에는 오위장을, 40년(1607)에는 정이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선조 37년(1604) 10월 임진왜란 때의 논공을 책훈할 때 장군에게 호성공신 3등을 책록하고 영성군에 봉했으며, 화상을 그려 영구히 봉안케 하고, 특히 유교서와 공신회맹록, 단서철권, 반당 4명, 노비 7명, 구사 2명, 전 60결, 은 5냥, 표리 1단, 내구마 1필 등을 하사했다.
선조 41년(1608) 2월, 왕이 승하하자 장군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7년 동안 고향에서 지내다가 광해군 7년(1615) 12월1일, 향년 56세로 별세하니 나라에서 정이품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추증하였고, 이듬해인 광해군 8년(1616)에 예관을 보내어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에 있는 조부 공조참판 세호의 묘소 아래에 예장했다. 또한 산 주위 사방 10리 일대의 땅과 바다 등을 사패지로 정했으며, 특히 부조묘 특설의 은전과 충훈부 완문을 하사했다. 그 뒤 10년이 지난 인조 3년(1625) 3월에는 나라에서 장군의 묘 옆에 부조묘 사당 효충사를 세워 장군의 위패를 모시게 하고, 매년 지방 유림들이 제사를 올리며, 또 그 옆에 영정각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게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