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자 민중의 투쟁사
1. 역사 발전 과정과 한국 사회 정체성
2. 노동자의 눈으로 역사 보기
3. 노동운동의 태동 : 1920년대
4.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의 시작 : 1930년대
5. 해방과 노동운동의 분출
6. 한국전쟁과 노동운동
7. 4월혁명과 노동운동
8. 경제개발과 노동자의 인간선언 : 1970년대
9. 이념과 노동운동의 결합 : 1980년대 초․중반
10. 노동자, 역사의 주체로 서다 : 1980년대 후반
11. 전노협과 민주노총 건설 : 90년대 초반
12. 총파업, IMF, 비정규직 노동자 : 1990년대 후반 이후
1. 역사 발전 과정과 한국 사회 정체성
-세상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사실도 달리 보게 마련이다.
똑 같은 사실을 노동자는 노동의 관점으로, 경영자는 자본의 관점으로, 정치인은 권력의 관점으로 본다.
역사를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하나인데 설명이 세 가지이니 그 세 가지가 모두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관점이 옳은 것일까?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최소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노동자들의 주장이 옳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 각각 다르게 주장하다가도 몇 년의 세월이 지나 노동자의 주장이 옳다고 밝혀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전교조' 의 합법화, '위험 작업 중지 권'의 신설, '제3자 개입금지'의 폐지, '복수노조'의 인정,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인정 등이 모두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역사발전과정과 사회의 정체성-
역사 발전 과정은 사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봉건 해체 과정에서 시민 계급이 형성되고, 이들이 자본을 축적하여 물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자본주의로 진행하여 시민적 권리 의식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쌓여 왔다.
봉건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해체한 이데올로기의 기초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개념이었다.
사회 구성원들이 봉건사회 신분제도의 모순을 깨닫고 사회를 바꾼 시민혁명은 사회 구성원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한 시민적 권리를 깨닫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라는 기형적 형태로 봉건사회가 해체되면서 갑자기 자본주의사회로 편입되었다.
‘조선’이라는 중세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역사 발전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식민지’ 외에 우리 사회가 겪어야 하는 또 다른 혹독한 조건은 ‘분단’이다.
식민과 분단이라는 이중의 악조건을 경험한 나라는 많지 않다.
남북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은 국익의 차원에서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는 ‘분단’이라는 상황을 실제보다 더욱 과장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에 이용해온 측면을 부인할 수는 없다.
노동자의 권리를 다른 나라보다 더 규제할 수 있는 이유를 합리화하는 데에 ‘분단’이라는 상황이 적절하게 적용되어온 것이다.
-제도권 교육과 언론의 역기능-
시민적 권리의식을 함양하는 선진국 교육과정과 달리 우리나라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노동조합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올바로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은 매스컴의 정보 전달이나 간접적인 사회 경험 등을 통해 오히려 노동조합은 뭔가 대단히 불순하거나 불온한 단체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선진국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노동법, 노동운동, 노동조합 등에 관한 교육을 도외시하여 교육을 통한 시민 권리 의식 함양의 기회마저도 저버렸다.
2. 노동자의 눈으로 역사 보기
-남구만의 시조 다시 읽기-
우리 국민들이 입이 닳도록 외우는 시조가 있다.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지냈던 남구만(南九萬)의 시조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참고서에서는 이 시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농촌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훌륭하게 묘사한 시조입니다"
"농가의 부지런한 생활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라고 강조하는 계몽적인 내용입니다"
지금도 학교에서는 어김없이 그렇게 가르치고 시험에 나오면 그렇게 써야 정답이다.
이 시조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자.
양반이 아랫목에서 느즈막이 잠을 깨었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떠있고 종달새도 우짖고 있다.
"아이쿠, 내가 늦잠을 잤구만. 그런데, 저 나이 어린 머슴 놈도 아직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놈이 오늘 언덕 넘어 넓은 밭을 전부 다 갈아야 하는데, 그놈도 아직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도 덜도 없이 바로 그와 같은 장면이다.
같은 상황을 머슴의 입장에서 한번 보자.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곤죽이 되게 일을 하다가, 황토바닥에 거적때기 한 장 깔려있는 머슴방에 와서 그냥 쓰러져 잤을 것이다.
새벽이 올 때마다 이 나이 어린 머슴의 가장 큰 소원은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머슴의 '관점'으로도 같은 상황을 '농촌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이라고 한가롭게 노래할 수 있었을까?
올바른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이 시조에 대해서 백 번쯤 설명할 때 단 한번이라도 "같은 상황을 머슴의 입장에서 한번 볼까요?"라고 가르쳤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가끔은 머슴의 입장에도 서 볼 수도 있고, 이 세상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중요한 사실을 천 번에 한번, 만 번에 한번도 설명하지 않는다.
국민의 대부분이 머슴이거나 그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회에서 단 한번도 ‘머슴의 관점’으로 우리 사회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한 줌도 안 되는 ‘양반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가르친다.
그게 우리나라 제도권 교육이다.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거북선을 과연 이순신 장군이 혼자 설계하고 만들었을까?
거북선을 설계하고 직접 만든 사람들은 아마 훌륭한 기술자들과 목수들과 뱃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훌륭함을 깎아내리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거북선과 이 순신 장군이라는 우리의 훌륭한 역사에 대해 가르칠 때 백 번에 한 번쯤이라도, 밤을 밝히고 연구하면서 설계를 수 십 번 이상 뜯어고쳤을 기술자들의 노력과 망치로 두드려 그 배를 만들었을 노동자들의 땀과 수고를 같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교육을 통해 역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갖추는 것이 가능하다.
국민의 대부분이 기술자이거나 노동자이거나 그 가족들로 살아가는 사회인데 한번도 그 관점으로 우리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독립운동과 민족자결주의선언과 러시아 10월 혁명-
우리는 1919년에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을 비롯한 우리의 독립운동이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배웠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친다.
그런데 3․1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1년 5개월 전에 인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 우리나라 이 작은 땅이 붙어있는 바로 위의 큰 땅덩어리에서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러시아 10월 혁명이다.
그 혁명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사건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버렸고 자본주의 시장의 45%가 한꺼번에 떨어져나갔다.
그 영향이 옳은 영향이든 그른 영향이든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한꺼번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1년 5개월 후에 그 바로 밑에 붙어있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3․1운동이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3․1운동을 이야기하면서 러시아 10월 혁명을 쏙 빼 버린 채, 바다 건너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선언’만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노동운동의 태동 : 1920년대 이하의 내용은 박 준성 교수의 여러 자료들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노동자 조직의 성장-
1920년대 들어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대중적 노동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곳곳에서 노동친목회, 노동회, 노우회 같은 지역 합동노조나 인쇄직공, 철공, 고무직공 등 좀 더 숙련된 직종의 직업별 노조가 만들어졌다.
1920년, 일제의 탄압과 경제수탈에 저항하며 노동자․농민을 계몽하려고 조선노동공제회를 만들었다.
최초의 근대적 노동단체인 공제회는 노동자를 비롯하여 실업가, 의사, 변호사 같은 지식인들이 함께 참가하였다.
노동공제회의 이런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긴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1922년 '신사회 건설', '계급적 단결'을 강령으로 내건 “조선 노동 연맹 회”를 만들었다.
경성전차종업원회 등 직업별 노조와 일부 소작단체 등 13개 단체와 2만여 회원을 한데 묶은 “조선 노동 연맹 회”는, 1923년 5월 1일 최초로 전국규모의 메이데이 행사를 여는 한편 경성여자고무직공조합과 경성양말직공조합을 조직하고 이들의 파업투쟁을 지원 지도하였다.
1924년에는 전국 260여 노농단체와 5만 3천여 회원을 거느린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근대적 공장이 들어서면서 각지의 노동조직도 발전했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노동자들이 최초로 대규모 연대파업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파업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921년에서 1925년 사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당시 공업이 치중되었던 경기도, 경상남도, 전라북도에서 주로 일어났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임금인상, 임금인하 반대 등 경제요구를 내건 투쟁이 많았다.
파업투쟁을 벌이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를 감싸고도는 일본 경찰의 폭압과도 싸워야 하였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노동자 조직의 발달과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파업투쟁은 전반기보다 참가 인원도 늘었고 그 동안 거의 파업이 없었던 북부지방의 공장 광산으로 이어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26년 목포제유노동자파업과 1927년 영흥흑연광산노동자 파업은 50-7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이때 노동자들은 규찰대를 만들어 일본경찰과 자본가의 탄압에 맞서기도 하였다.
20년대 후반 투쟁을 통해 조직과 계급의식을 높여간 노동운동은 1929년 원산총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원산 총파업(1929년 1월 - 4월)-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2천여 명의 노동자가 80여 일 동안이나 파업을 계속하여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큰 봉우리를 이룬 원산총파업이 일어났다.
원산총파업은 20년대 노동운동을 결산하면서 30년대 노동운동이 새롭게 시작함을 알리는 투쟁이었다.
일본인 현장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때린 사건에 대해 120여명의 노동자가 회사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이 싸움은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이 지도하여 감독파면과 “최저임금제”, “해고 수당 제”를 실시하라고 요구하는 파업으로 발전했고, 상급단체로서 단체교섭권을 가진 원산노련이 주도하면서 파업은 점차 원산노련대 일제와 자본가의 대립으로 확대되었다.
다음은 원산총파업의 시작과 파업 분위기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1월 23일의 원산은 바람도 몹시 불거니와 일기도 매우 쌀쌀한데 시가의 골목골목에서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노동자 떼와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순사 떼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분위기 속에 빠져 언제어디서 어떠한 일이 돌발할지 모른다." (동아일보 1929.1. 26.).
"25일의 원산 일대는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노동자의 규찰대와 경계하는 경관 사이에 때때로 충돌이 일어났다."(동아일보 1929.1.27.)
"갈매기 떼 날아 설레는 원산항의 바람 쌀쌀한 부두는 산비가 오려고 누각에 바람이 가득한 것과도 같은 긴박한 공기에 휩싸였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자본가 측의 인원들이 화물선이나 창고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람사슬로 피케트라인, 즉 감시선을 늘이고........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는 붉은 기를 지킨다.
우렁차게 '적기가'를 부르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누비듯이 노조일꾼들이 분주히 오가고 또 규찰대들이 감시하는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슬슬 돌아다녔다.
자본가들의 앞잡이들과 파업방해분자들은 담장같이 둘러선 무장경찰의 힘을 배경으로 담력을 북돋우고 들이덤빌 기회를 노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일본화물선의 선원들은 모두 다 갑판 위에 올라와 뱃전난간에 기대서서 서로 무어라고 수군거리며 관전을 하고 있었다."(김 학철 [격정시대])
일제와 자본가들은 3.1운동 10주년을 전후하여 파업이 전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3월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조를 만들어 원산노련을 불법화하고 마침내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4월 1일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은 함남노동회를 습격하는 가두투쟁을 벌였지만, 파업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4개월에 걸친 투쟁을 마감하였다.
*원산총파업은
① 가혹한 착취와 탄압을 일삼는 일제와 자본가의 본모습을 인식하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② 노동자 대중이 밑으로부터 노동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였다는 점
③ 노동운동이 한 공장, 한 지역을 넘어 지원, 연대투쟁을 벌였다는 점
④ 조선인 자본가들 역시 끝내 자본가 편에 설뿐이지 결코 노동자 계급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었다는 점
⑤ 원산총파업을 계기로 '혁명적' 노조가 온 나라에 번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우리나라 최초 고공 농성 노동자 강 주룡-
세계대공황 시기, 일본은 자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군국주의 체제를 강화하고 대륙 침략전쟁을 전개했다.
조선을 견고한 후방지․병참기지화하면서 조선 민중과 민족해방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성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반, 여성노동자는 4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는 폭등하였으며, 임금은 기아 수준으로 폭락했다.
1931년 5월 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에서 회사 쪽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내리겠다고 통고하자 노동자들이 격분하여 파업을 시작했다.
28일 밤, 파업이 시작된 뒤 공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계속하던 노동자들이 아사(餓死)동맹을 결의하자 기업주가 경찰을 불러들여 노동자들을 회사 밖으로 내쫓았다.
일본 경찰과 손을 잡은 자본가들에 의해 노동자들의 파업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죽음으로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밤중에 광목 한 필을 사서 을밀대 근처로 올라갔다.
벚나무 가지에 광목을 걸어놓고 목을 매려다 '이대로 죽는다면 사람들이 저 여자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려야 할텐데...'하며 궁리를 했다.
어둠 저편으로 을밀대가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광목 한 끝에 묵직한 돌을 묶어서 지붕 건너편으로 던져 넘겼다.
한쪽을 기둥에 묶고 밧줄처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면서 강주룡은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의 처지와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면서 9시간 반 동안이나 그곳에서 외치고 외쳤다.
‘우리 49명은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국은 평양의 2천3백 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29일 저녁부터 6월1일 새벽 2시 검속기간이 끝나 풀려날 때까지 한 끼 밥도 먹지 않으면서 완강히 버텼다.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그 즈음 강주룡은 평양에 있는 다른 노조간부,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자 정치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적색노조'라고 불렀던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었다.
6월9일, 노동자 출신 강주룡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었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의 옥중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을 얻었다.
1932년 6월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병은 다시 점점 깊어갔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하여 안정되게 치료를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동료들의 처지도 어렵고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달 동안 앓아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13일 오후 3시 반, 평양 서성 리 빈민굴 68-28호에서 한 많은 세상,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던 31년 삶을 마감했다.
8월15일 남녀 동지 1백 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평양 서성대 묘지에 강주룡을 묻었다.
4. 사회 변혁적 노동운동의 시작 : 1930년대
-1930년대 초반-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는 조선의 공업화를 진행하면서 1937년 뒤부터는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병참기지로 이용했다.
이러한 식민지 공업화는 일본 독점자본이 식민지 경제를 완전히 지배하며 식민지 노동계급을 더욱 착취하는 것을 뜻했다.
온 나라에서 벌였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일제의 대륙병참기지가 되어 가던 흥남, 함흥, 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했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하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는 1,759명이나 되었다.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반’이나 ‘공장그룹’ ‘독서반’ 등의 조직을 바탕으로 분회를 두고 그 위에 공장위원회, 혁명적 공장위원회, 파업위원회를 건설하여 비타협적 투쟁을 벌이며 전국적 산별노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1930년 중반에 이르러 일제의 극악한 탄압 때문에 거의 무너졌다.
일제시대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비합법적인 조직일 수밖에 없다고 보고 전투적이며 혁명적 노동자들로 특별한 노동조합을 구성하려 했다.
따라서 대중조직을 지향하면서도 선진 노동자 조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5. 해방과 노동운동의 분출
-자연발생적인 노동운동의 시작-
해방은 일제자본의 철수와 공업생산의 감소, 기술의 부족을 가져왔고, 이는 조선경제 전반, 나아가 노동계급의 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공업생산의 감소는 노동자 수의 감소와 대량실업, 임금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계급은 생활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노동자들은 이를 위해 퇴직금과 상여금 요구 투쟁, 해고반대 투쟁 등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투쟁과정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였으며, 공장 회사 단위에서 자치위원회․관리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를 흔히 해방정국이라고 하는데, 이때는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요구가 높아 정치적인 활동이 활발했다.
이때 이미 노동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요구만이 아니라, 전 민족의 요구를 내걸고 전체 민중운동을 주도하고 투쟁의 선봉에 서는 역할을 담당했다.
-공장관리운동(자주관리운동)의 전개-
노동자들은 해방이라는 상황에서 아래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공장․회사를 관리하였다.
노동자들은 공장이나 회사에서 공장관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운영하면서 자본가 없이도 공장․회사를 경영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 공업화 과정에서 생산성이 가장 빠르게 높아진 시기였다.
-전평의 결성-
해방 후 노동계급의 활동은 1945년 11월 노동조합 전국조직으로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조선공산당 계열의 주요활동가들이 지방에 파견되어 산업별 노조의 결성을 지원하는 방식을 토대로 전평 중앙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방식 때문에 전평은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급속히 조직될 수 있었다.
전평은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결성되었다.
전평은 16개 산별노조(철도․금속․화학․교통운수․광산․섬유․토건․식료․해원항만․전기․어업․일반봉급자․목재․출판․통신․조선)와 합동노조의 1,194개 분회, 217,073명의 조합원을 대표한 515명의 대의원 참석 아래 결성되었다.
산업별 조직원칙을 기본으로 하면서, 산업발전의 불균형에 따른 운동조건을 보완하기 위하여, 남한의 11개 주요지역에 지방평의회를 구성하였다.
-미군정의 전평 탄압-
미군정은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을 완전히 불법화시켰고,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경제투쟁에 대해서도 경찰력을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특히 1946년 들어 미군정은 우익 노동운동이나 정치세력을 지지 지원하면서 좌익세력과 그와 연결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미군정에 협조한 댓가로 돌아오는 것은 해고와 실업, 쌀값 폭등에 따른 생활의 위협이었다.
이에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도 민족국가 건설을 희망하며 인내해 온 노동계급은 1929년 원산총파업 이후 한국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조직화되고 규모가 큰 9월 총파업을 벌이면서 투쟁했지만, 미군정은 장택상 수도청장을 시켜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3천여 명의 경찰과 대한민청, 서북청년회, 대동청년회를 비롯한 극우 깡패들을 동원해서 용산 철도공장에 농성 중인 철도노동자 총파업단 본부를 공격했다.
그 결과 파업단 간부 16명과 1200명 이상이 검거되었고 2명 이상이 사살되었다.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 대한민청 감찰부장 김두환의 '영웅담'
나는 일본도를 빼어들고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 여러 곳에 숨어있던 전평원을 색출, 창고에 몰아 넣고 점검해보니 2천여 명이나 되었다. .....
"너희들 중에 이번 파업 간부를 뽑아 내어라. 안 그러면 할 수 없다.
가솔린을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
그리고 가솔린을 그들이 수용되어 있는 창고 주변에 부었다.
"자, 5분간의 시간을 준다. 내가 가솔린에 실탄만 쏘면 그만이다.
튀어나오는 놈은 모조리 쏴 죽인다."
나는 기관총 2대를 그들 앞에 정조준 시켰다.
시계를 내어 놓고 시간을 쟀다.
4분이 경과하니 그들 중에서 "나가겠습니다."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전평 간부 8명이 내 앞으로 뛰어나왔다. ...... 그리고서 화부와 기관사를 뽑아내고, 기관차를 수리시켰다.
모든 철도 종업원들에게 즉각 취업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직장에 복귀 안 하면 그들의 가족까지도 몰살해 버리겠다고 말한 후 서약시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대한노총의 성립-
전평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은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 곧 대한민국이 수립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전평을 중심으로 한 좌익계열의 노동운동 지도자나 일반 노동자들은 대량으로 구속되거나 피살되어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전평계열의 노동조합이나 그 조합원에 대한 우익세력의 테러나 탄압은 대낮에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고, 경찰이나 사법당국은 수수방관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노동단체는 우익세력의 정치도구로서 결성된 대한노총밖에 없었다.
정부는 우익노동조합 만이 노동조합으로 인정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새로운 조합의 설립도 경찰의 사전조사를 거친 후에야 인정하였으며, 노조의 파업행위는 공산주의로 간주하여 금지시켰다.
이어 이승만 정권은 대한노총을 중심을 중심으로 노동계급을 재편하고, 궁극적으로 노동운동의 지형을 다시 짜기 위한 작업을 서둘렀다.
-보도연맹 결성-
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 좌익에 대한 가장 강력한 통제조치로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에는 과거에 좌익단체에 참여한 사람은 물론 사회에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입시켰다.
가입을 거부하는 노동자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국민으로 취급받지 못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많은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했다.
6. 한국전쟁과 노동운동
-노동계급의 집단 경험과 기억-
한국전쟁 과정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좌파 노동계급은 대부분 드러났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남한에서 활동하기란 불가능하였다.
특히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좌파 노동자만이 아니라 그에 동조하거나 관계가 있는 노동자들까지도 빨갱이로 몰려 집중적으로 검거되거나 처형되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국가권력이나 반공을 이념으로 하는 우익 대한노총에 도전하거나 경쟁할 노동운동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아무런 도전자도 없는 반공 노동운동 집단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한노총의 반공주의는 이승만의 가벼운 지시에 따라 1959년 ‘잔인무도한 공산도당과 같은 날에 기념할 수(즐길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메이데이를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로 변경하였다.
-노동법 제정-
전쟁기간인 1951년 12월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롯하여 부두․광산․철도 등의 부문의 노동자들의 파업은 계속되었다.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이었지만, 살인적인 기아임금, 해고, 구타 등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어졌다.
1953년 1월에 제정된 노동법은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투쟁의 결과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 노동자의 권리(인권옹호)를 주장하는 한 국회의원(정치인)의 제안으로 이루어 졌고 그것도 북한과의 체제 경쟁 수단의 하나라는 성격이 강했다.
7. 4월 혁명과 노동운동
-노동운동의 고양-
4월 혁명은 학생을 주축으로 한 광범한 실업대중, 도시빈민이 참가한 시민봉기였다.
이승만의 하야와 자유당정권의 붕괴를 가져왔고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구 지주층 중심의 민주당정권의 등장으로 민주화는 부진했고, 혁신운동은 거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 혁신세력의 진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민족 자주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동시에 민중적 요구도 폭발적으로 표출되었다.
임금인상, 해고 반대, 노조결성 등을 주요 요구조건으로 하는 노동쟁의가 폭발적으로 발생했고 많은 신규 노조가 결성되었다.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는 60년 3월 558개 노조, 28만 명에서 60년 12월 914개 노조 32만 명으로 증가했다.
사무 전문직 노조가 등장하였다.
조흥은행 등 시중은행과 증권사에 노조가 결성되었고 은행노조연합회가 결성되었다.
대구일보, 연합신문, 평화일보 등 신문사에 노조가 결성되었고, 교원노조도 결성되어 합법화를 요구하였으나 정권은 끝내 거부하였다.
8. 경제개발과 노동자의 인간선언 : 1970년대 이하의 내용은 박준오의 교안 ‘노동자운동의 역사 살펴보기’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군사정권의 수립과 경제개발-
박정희 중심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고, 미국의 자본수출형태 변화(원조->차관->직접투자)를 반영한 후진국근대화론이 범람했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고 선 성장 후 분배정책의 기조 속에서 미일자본 의존, 저임금, 저 농산물 가격정책을 기초로 한 수입대체 공업화로 불균형 성장이 지속되었다.
농촌의 몰락을 가져와 이농이 급증했고(1960-70, 445만 명) 도시로 집중된 이농민은 임금노동자의 증가를 가져왔다.
부익부빈익빈이 심화 확대되었고, 부실기업 속출, 국제수지의 악화 현상이 발생했다.
-노동조합 통제정책의 강화와 한국노총의 출범-
박정희의 쿠데타와 동시에 교원노조 간부가 대량 검거되었고, 노동조합 해산령이 발효되었다.
위로부터의 노조 재편성 전력으로 산별노조가 결성되고 한국노총체제가 출범했다.
정치활동 금지, 복수노조 금지, 쟁의절차의 복잡화, 정부개입의 확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동법 개악이 자행되었고, 외국인 투자 기업에서의 노조운동을 봉쇄하기 위해 “외국인투자기업에서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제정되었고, 1970년 경총 설립으로 자본 측의 노동대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전태일 열사-
현재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는 70년 11월 청계천 인간시장에서 산화한 ‘전태일 열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한국은 노동운동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70년대는 박정희가 유일한 진리처럼 외친 ‘경제성장’을 위해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시기였다.
당시의 주력 수출상품은 섬유와 신발이었으며 극도의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을 유일한 경쟁력으로 삼았다.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는 것은 수출을 가로막는 매국행위처럼 취급되었다.
전태일 열사가 몸을 불태우며 외친 구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것이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열다섯 시간을 예사로 일하면서 풀빵마저 제대로 먹지 못하던 노동자는 법에 호소할 길도 없던 상태였다.
반공지상주의가 외쳐지던 시절이고 박정희가 장기독재를 위해 유신헌법을 발표하던 시절이었다.
막걸리 먹고 “북한이 한국보다 가난하지만 평등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몇 년씩이나 감옥에 갇혀야 했던 시절에 전태일 열사는 죽음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외친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외침은 그때까지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머물던 운동세력이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받은 지성인으로서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이 고통 받는 노동자 민중의 삶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한국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이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소선 여사를 만났을 때, 나는 평소부터 궁금한 것을 결국 뻔뻔하게 묻고야 말았다.
전태일 열사 임종 순간을 좀 설명해주세요.
이소선 여사는 손사래를 친다.
그 얘기를 하려면, 내 속에 구정물이 가라앉아 있는 걸 다 헤집어서 퍼내야 하니까 머리가 다 돌아. 그러면 나는 또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ꡓ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말을 꺼내셨다.
태일이가 ꡐ나는 절대로 살아날 수는 없어요.
5분 있다 죽을지 3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 엄마, 내 말 잘 들으 세요ꡑ 하더니
노동자들은 캄캄한 암흑세계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는 보다가 더 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죽어서 그 캄캄한 암흑세계에 작은 창구멍을 하나 낼 테니까, 내가 죽으면 노동자와 학생들이 모두 힘을 합해 그 창구멍을 조금씩 넓히는 데 힘을 보태주세요.
그러면 빛이 보일 거예요.
어떻게든 하나가 돼서 싸워야 돼요.
둘이 돼도 안 돼요.
어머니가 이걸 실천하지 않으면, 나를 지금까지 키운 것이 위선이 되는 거예요.
위선자가 되지 말고 꼭… 그렇게 꼭…꼭… 할 때마다 피가 목에 고여서 말을 못하는 거야.
칼로 목 아래를 따니까 피가 풍풍 나와.
태일이가 내가 부탁하는 말 꼭…꼭… 할 때마다 피가 뿜어져 나왔어.
어머니는 그 아들의 부탁을 정말 훌륭하게 들어주셨다.
10년쯤 전에 내가 본 통계만으로도 우리가 모두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소선 여사가 경찰서에 잡혀간 횟수는 250회를 넘었다.
이 땅에서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이나 눈물겹다.
집에 돌아와 다시 들어본 녹음테이프에는, 인터뷰 도중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이소선 여사가 전태일 기념 사업회에서 일하는 이형숙 사무국장과 김수정 간사에게 속삭이듯 하는 말이 녹음돼 있었다.
너희들 도대체 어떻게 하고 사느냐. 나는 겁나서 못 가본다.
걱정스럽고 힘들게 일하는데 내가 가서 뭔 할 말이 있나 싶어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조금이라도 진보적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태일 기념관에 한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태일 열사의 기념관을 그 모양으로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진보운동의 수준이다.
그런 마당에 내가 낸 세금으로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가슴이 막힌다.
전태일 기념관을 번듯하게 지을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와야 한다.
-종교기관 노동운동과 노동자 인간선언-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이라 민주화 세력의 노동자 지원도 주로 종교기관의 활동으로 진행되었다.
기독교 계통의 도시산업선교회가 대표적인 예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종교적 심성과 사회정의를 위한 지식인의 의무감은 닮은꼴이었을 수 있다.
그들은 공단 주변의 교회에서 야학이나 노동 상담 등의 방식으로 노동자를 만나고 소모임 형식으로 노동자를 교육하여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키우고 노조설립을 지원했다.
70년대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투쟁에 나선 노동자의 요구는 ‘인간 선언’ 그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70년대 투쟁이 일어난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직 반장의 해임’등의 요구를 제시하고 있다.
원풍모방, 동일방적, YH 등 섬유산업 여성 노동자가 투쟁의 주력을 형성하고 있다.
노동력 착취를 기본적인 경쟁력으로 하는 산업이라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남성 노동자에 비해 여성노동자가 더 열악한 처지에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 나체 시위와 똥물 사건-
78년에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는 회사에 항의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은 본관 앞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요즘처럼 스치로폴을 깔고 천막을 치고 하는 농성이 아니라, 그냥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담요 한 장도 없이 쌩으로 누워 버티는, 그야말로 '자살 텍'이었다.
따가운 삼복더위의 햇살 아래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지칠 대로 지쳤을 때, 무술경관 부대가 들이닥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벌한 백골단이 없던 시대였다.) 여자들은 구석으로 몰렸다.
구석에 아비규환처럼 엉켜있던 여성 노동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우리 모두 옷을 벗읍시다.
그렇게 하면 저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우리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할 거에요."
아, 여성 노동자들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벌거숭이가 된 400여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벗어버린 하늘색 작업복들을 흔들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일방직 나체시위 사건... 세계 노동운동사에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노동조합 지부장을 선출하기 위한 대의원 선거가 다시 시작되었다.
야간 근무조의 일이 끝나는 새벽 6시부터 투표가 시작되었는데, 야간 근무를 마친 여성 노동자들은 작업복도 미처 갈아입지 않은 채 투표소가 설치된 노동조합 사무실로 새벽길을 내달렸다.
투표를 하기 위해 달리기를 하는 노동자들... '우리가 몇 초라도 늦으면 일이 잘못될지도 몰라...' 상황이 그만큼 긴박했다.
줄지어 투표가 시작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투표소가 설치된 노동조합 사무실에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자들이 난입했다.
"여자가 노동조합의 대표로 선출되는 꼴은 못 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기숙사 화장실에서 똥을 가득 퍼 담은 양동이와 프라스틱 바가지들이 들려 있었다.
바가지로 똥을 퍼 사무실에 뿌려대면서 들이닥친 남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옷 속에 똥을 들이붓고 입안에 쑤셔 넣기도 했다.
그때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만들었던 유인물의 제목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노동문제'라는 단어를 선명하게 접한 첫 번째 기억이다.
우리가 사는 바로 옆에서 내 나이 또래의 여성 노동자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데, 생각이 제대로 박힌 대학생이라면 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천인공노할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원인은 무엇이고 잘못한 놈들은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 돌아와 부모님이 보내주신 대학이라고 그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들락거리는 친구들에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고 알리는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축제기간에 '동일방직 노동자 돕기 찻집'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야 사람 사는 꼴이지... 노동문제가 내 생활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노동가요라고는 단 한 곡도 없었던 그 시대에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하늘색 작업복을 벗어 흔들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그런 노래였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유행가에 가사를 바꿔 붙인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를 목이 터져라 불렀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조설립투쟁, 유령노조 민주화 투쟁이 70년대 노동자운동의 중심 형태였다.
노동자의 권리선언을 체제 위협으로 간주한 정권과 저임금 경쟁력에 의존하며 노동자를 노예쯤으로 취급하던 자본은 노동자의 노조설립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그 뿌리 깊은 행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노동부와 경찰, 회사의 노무관리부서와 때로는 한국노총까지 합작해서 민주노조 설립을 방해하거나 설립된 노조를 깨뜨리기 위해 온갖 술책을 부렸다.
동일방적 똥물테러사건, 김경숙 열사의 죽음을 부른 YH사건 등이 인간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동자의 격렬한 투쟁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투쟁 - YH 무역 노조의 투쟁-
79년 3월 YH무역 회장이 미국으로 자산을 빼돌려 놓고 회사를 폐업조치하자, 노조 측에서는 “공장폐쇄는 근로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비인도적인 처사이고 몇 사람만을 위한 사기극”이라면서 농성투쟁을 벌였다.
정상화와 폐업을 반복하다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79년 8월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정권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커녕 경찰을 난입시켜 강제 연행했고, 이 과정에서 김경숙씨가 사망했다.
정부는 연이어 노조지부장 등 간부와 종교인, 재야인사 등을 구속했고, 각 언론들은 ‘잔인한 경찰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였으며 신민당 의원 6명이 사퇴하는 등 정국에 일대 파란이 일었다.
부산, 마산 지역 시민과 민중들은 대대적인 항쟁에 돌입했다.
민중의 피와 땀 위에 군림한 유신정권은 민중의 힘에 몰리기 시작했으며 결국은 지배세력 내부의 분열을 야기 시켜 유신정권은 몰락하였다.
YH 노동자 투쟁은 6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누적되어 온 사회적 모순이 첨예한 형태로 폭발한 투쟁이었고, 유신체제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다.
9. 이념과 노동운동의 결합 : 1980년대 초․중반
-노동운동의 도약-
79년 12․12 쿠데타로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들은 80년 5월 광주학살에서 보여주듯 군사정권다운 철저한 강압통치를 자신의 기본 통치전략으로 삼았다.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탄압의 태도로 일관했으며 노동자 운동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시절에도 투쟁을 통해 끈끈히 유지해오던 민주노조의 전통을 차단하기 위해 청계피복노조를 불법화하고 81년 원풍모방 노조를 강제로 해산하는 것으로 이 땅에 민주노조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거꾸로 전체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보면 80년대 초반은 민주노조 운동의 도약기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80년대 초반은 노동자 운동에서 양적․질적 비약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80년 초반 노동운동의 절정을 이룬 것은 4월 20일 사북탄광노동자들의 사북 읍 점거농성투쟁이었다.
비록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투쟁은 아니었지만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들은 전 가족의 참여 하에 어용노조 위원장의 사퇴와 임금인상을 내걸고서 총으로 무장한 경찰력을 물리치고 사북 읍을 4일간이나 점거하는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5․17 쿠데타로 인해 이들의 투쟁은 허사로 돌아갔지만 이후 인천제철, 일신제강, 동국제강, 원진레이온, 동양정밀 등의 투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동국제강 노동자들은 가두까지 밀고 나와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으며,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5․17이 일어난 이후에도 공장을 3일간이나 점거했다.
80년대 초반의 노동자운동도 투쟁의 내용에 있어서는 7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하는 산업구조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데 대한 정권과 회사의 방해공작은 여전했다.
84년 민중의 투쟁에 직면한 정권이 내린 유화조치가 학원자율화와 정치인에 대한 복권 등 각 부문에 걸쳐 시행되었지만 노동자운동에 대해서는 탄압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민주노조를 만들려고 해도 노조설립 신고서를 여러 가지 핑계로 반려하며 공권력과 구사대가 노동자를 납치 감금하고 노조를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여전히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설립부터 자본과 정권에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80년대 초반 노동자운동의 투쟁중의 대표적인 사례가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투쟁’이라는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사회주의 이념과 결합-
민주화운동세력의 일부는 사회정의를 위해 노동자 민중을 도와야 한다는 발상에서 벗어나 노동자 민중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부터 조심스럽게 한국전쟁 이후 금기시 되던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광주민중항쟁으로 권력의 실체를 본 민주화운동세력은,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것만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권력의 총칼에 맞선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외국의 혁명사례를 연구하면서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의 기초 위에서 진행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초반에 벌어진 수많은 논쟁들은 대부분 사회주의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노동자운동과 학생운동의 지위와 관계, 각각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분명한 것은 누구도 혁명의 주체가 노동자 계급임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을 위해 많은 활동가들이 현장으로 들어갔고 그 숫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수많은 현장의 노동자가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정권으로서도 잠깐이나마 노조 설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기도 하면서 하나둘씩 민주노조가 확대되어 갔다.
정권이 노조 설립을 허용하게 된 계기는 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이다.
84년 대구의 택시노동자들이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수일에 걸쳐 총파업투쟁을 전개하다가 공권력의 탄압 등으로 투쟁을 끝낸 사실이 있는데, 그 투쟁에서 정권 측은 노동자에 대해 회유공작을 펴려 해도 노조도 없고 주동자도 불분명한 파업투쟁이었던 까닭에 조기수습이 힘들었던 것을 경험하고 일시적으로 노조설립을 허용하기도 했다.
-대우자동차투쟁과 구로동맹파업-
80년대 초반의 대표적인 투쟁은 84년 ‘대우자동차 투쟁’과 85년 ‘구로 동맹파업’이다.
대우자동차 투쟁의 경우 임금인상과 처우개선투쟁이라는 면에서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는 투쟁이지만 나름대로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위장 취업한 학생출신 활동가의 처신에 관한 것이다.
대우자동차 투쟁 이전까지는 위장취업자가 현장에서 활동하다가 적발되면 현장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의 활동가들은 위장취업이 적발되어 사직을 종용받는 처지에서 현장을 떠나지 않고 노동자 대중의 요구를 모아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반면 구로동맹파업은 활동가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준비된 연대투쟁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구로동맹파업은 파업의 규모나 위력에서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나 96-97년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에 비해 크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구로에서 비롯되어 수도권 인근에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 공권력에 의해 침탈된 투쟁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단위사업장의 문제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의미의 진정한 동맹파업이었다.
전자와 섬유업종에 걸친 6개 사업장의 공동의 요구는 ‘대우 어패럴 노조’에 대한 탄압철회, 노동운동 탄압 저지였다.
아직까지 사례를 견줄 수 없을 만큼 대중적으로 조직된 노동자 연대투쟁의 사례가 바로 구로동맹파업이었다.
전체적으로 80년대 초반은 70년대에 비해 노동자운동의 역량이 크게 늘어난 시기였다.
많은 활동가가 단순한 정의감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는 노동자’라는 의식으로 현장 활동에 투신했다.
노동자는 단순한 평등의 개념이 아니라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 할 세력으로 ‘노동해방’이라는 과제를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투쟁의 대열에 섰다.
10. 노동자, 역사의 주체로 서다 : 1980년대 후반
-87년 노동자대투쟁-
87년 6월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간접선거, 체육관 선거를 고집하던 군사정권이 민중에게 항복을 선언하며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다.
비록 그것으로 한국사회가 민주주의로 바뀐 것은 아니지만 정권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의 예봉이 크게 꺾여버린 큰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초반부터 힘을 쌓아오던 노동자 운동은 탄압의 예봉이 꺾인 그 틈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울산에서부터 시작된 노동자 투쟁의 불길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것이 87년 7․8․9 노동자대투쟁이다.
그동안 억눌렀던 노동자의 권리가 한꺼번에 분출했고 민주노조가 세워졌다.
87년 대투쟁 이후 더 이상 노동자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역사의 주체로서의 노동자의 대오가 형성된 것이다.
결정적인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나는 작고 어두운 내 방에 들어가 하루 종일 뒤척이며 나오지 않았다.
20대 박사ꡑ로 상징되던 온 가족의 꿈이 아까워 고민했다.
어머니가 이따금 내 방문을 열어보시고는 아무 말 없이 닫으셨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사춘기의 한가운데쯤에 들어서 있던 여동생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네 오빠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의 내용을 이 에미는 잘 모른다.
너도 역시 그 내용을 모를 테지만, 오빠가 지금 올바르게 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두어라.
세상을 바르게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만이라도 알아두어라.
그리고 드러나는 것보다는 항상 근본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온 에미로서, 네 오빠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아무 말 않겠다.
아, 그것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적산가옥의 커다란 창 옆 흐린 전등불 밑에 앉아 구멍 난 양말 속에 알전구를 넣어 짜깁기를 하시면서 “사람은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어릴 적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고, 그날 각인된 어머니의 양말 깁던 모습은 흐릿한 조명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며칠 뒤 나는 몇몇 선배들과 함께 여관에서 밤을 꼬박 새며 등사기로 밀어낸(등사기를 민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학생들이 몇이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때는 참으로 ꡐ원시시대‘ 였다) 유인물 뭉치를 라면박스에 싸들고 새벽에 학교 담을 넘었다.
손바닥에 잔뜩 묻은 등사 잉크도 지우지 못한 채였다.
그날 저녁, 경찰서에 연행된 학생들 중에 유일한 1학년이었던 나는 1학년밖에 안 된 놈이 뭘 안다고 까부냐?ꡓ는 이유로 간첩 잡는 형사들에게 숱한 꿀밤을 얻어맞으며, 대공 계 사무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새로운 인생의 분기점에 섰다는 감격으로 눈물지었다.
그날 이후 우리 사회의 소수 몰지각한 무리에서 크게 벗어나 본 적은 없다.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나를 보면 농담처럼 말씀하신다.
저 녀석이 74년도 11월에 처음으로 잡혀가서 두들겨 맞기 시작한 이래 오늘까지 단 하루도 제 정신 차려본 날이 없었다니까….
그 말은 내가 제 정신 차리기 시작한 지 26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1987년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같은 역사는 다시 또 우리 앞에 없을 것이다.
해방 이후 40년 세월 동안 만들었던 노동조합과 거의 같은 수의 노동조합이 6개월 동안 만들어졌고, 2천여 개의 사업장에서 동시에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아마 6․25전쟁이나 임진왜란의 분위기도 1987년 7, 8월에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머리띠를 묶어 맨 수만 명 노동자들의 모습과 휘날리는 수백수천의 깃발과 현수막의 물결이 이 두 달 동안 내내 TV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어느 날, TV 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씀하셨다.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조합원이었다.
40년이 넘도록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활동을 했다.
그때 우리와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깨어보면, 한강변에 시체로 떠오르기도 하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지.
6․25사변 때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모두 다 죽고 나는 정말 운 좋게 살아남았는데, 모두 너보다 더 똑똑하고, 더 말 잘하고, 더 잘생긴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남편에게도 여지껏 말을 못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조합원이었다.“
아, 칠순이 다 된 어머니가 40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그날 아들에게 고백하셨던 것이다.
14년 전 아침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여동생에게 네 오빠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아무 말 않겠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비밀을 나는 그날에서야 풀 수 있었다.
더 오래 전 옛날, 적산가옥의 흐릿한 전등불 밑에서 구멍 난 양말 속에 알전구를 넣어 짜깁기를 하시면서 기껏해야 대여섯 살배기였던 나에게 ꡒ사람은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아야 하는 거야라고 단단히 각인시킬 수 있었던 어머니의 비밀을 나는 그날에야 풀었다.
감히 말하건대, 어머니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87년 이후의 노동자 운동은 80년대 초반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노동자운동에 참여하는 주력 대오가 노동력 집약산업의 여성 노동자에서 중공업, 금속 분야의 남성 노동자로 바뀌었다.
이는 한국의 산업구조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80년대 들어 섬유 및 고무산업 등 노동력 의존 산업은 더 이상의 경쟁력을 상실하고 사양산업이 되었다.
그 자리를 자동차와 조선 등 기계 및 중공업부문이 대체한 것이다.
또한 노동자 출신 활동가가 중심에 선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노동자 운동 자체의 투쟁과 교육 속에서 수많은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
이전처럼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그것을 지키는 투쟁을 넘어서 현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여전히 자본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파괴하려 하였고 ‘현대중공업 식칼테러 사건’처럼 격렬한 투쟁은 지속되었지만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임금협상과 단체협상이 주요한 투쟁의 내용이 되었다.
민주노조 운동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동시에 이전까지 구로동맹파업 등에서 모색되던 지역별 연대체의 구성 등의 수준을 넘어 전국적인 노동자 단결의 문제, 즉 산별노조 등 한국노총과 다른 새로운 노동조합 연합체의 건설의 문제가 노동자운동의 현안으로 부상했다.
-노동자, 운동의 주체로 서다-
전체 사회운동부문 안에서 노동운동의 중요성이 급격히 높아져 투쟁 현안과 동력 등에서 노동자운동이 투쟁의 정세를 주도하는 위치에 섰다.
이전까지 정치적 사안을 중심으로 가두를 중심으로 전개된 투쟁에서 학생운동이 대오의 주력을 이루었다면 87년 이후에는 노동자 투쟁에서 불거진 문제를 중심으로 노동자 대오가 중심에 서고 학생운동이 이에 연대하는 양상으로 투쟁대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는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역사의 주체로서 투쟁을 선도하는 위치에 섰다.
노동해방이라는 기치가 전면에 등장하고 노동자 계급이 투쟁의 주력대오를 형성하였다.
11. 전노협과 민주노총 건설 : 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 붕괴-
90년에 독일이 통일됐다.
그리고 곧이어 소련과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도 무너졌다.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소련 사람들의 모습과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이 방송 화면에 자주 등장했다.
사람들은 재빨리 사회주의 이념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누구나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자고 주장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다.
80년대에는 말도 꺼내지 못하던 사민주의가 발언권을 얻고 경실련 등의 시민운동이 새롭게 시작되기도 했다.
허울뿐인 김영삼 문민정부가 수립되자 군사독재정권이라는 확실한 적이 사라졌고 운동권은 이제 무기를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한국 노동운동은 노동해방이라는 기치를 뒷받침하던 이데올로기와 많은 활동가를 잃어버렸다.
-전노협 건설-
외형적으로 노동운동은 성장하고 있었다.
노동자운동의 총 단결에 대한 모색과 투쟁의 결과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이라는 노동자 단결의 중심대오가 형성되었다.
물론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의 단결을 막기 위해 탄압을 자행했다.
단위 사업장마다 전노협 가입을 막기 위해 공작을 일삼았고 전노협 가입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전노협은 노동자 운동의 투쟁적 경향을 대표하며 당당하게 90년대 상반기 투쟁을 주도했고 노동해방의 지향과 노동자 총 단결의 상징 조직이 되었다.
현대자동차 등 대공장 노동조합들은 전노협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노협의 주력은 중소사업장 규모의 노동조합들이었다.
그것은 전노협이 80년대 초반 이후 현장에서 열성적으로 일하던 활동가들의 성과가 집약된 결과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공장 노조의 불참과 중소규모 사업장 노조 중심의 구성은 비록 전노협이 각종의 노동현안에 대해 투쟁적 경향으로 노동자 운동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해도 온전한 투쟁의 주체로서 독자적인 활동을 해나가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자 운동의 총 단결은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양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했다.
서울지하철공사에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지하철 파업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제조업 노동자와 다른 파업의 위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는 여타의 공공부문으로 확산되어 공공부문 노동자 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증권, 보험, 언론, 병원 등 이전까지 화이트칼라로 불리던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민주노조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87년에 넥타이 부대라 불리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대오를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양적 확대는 기존의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노동자운동의 성장으로 기존의 저임금 노동력 위주의 산업에서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으로 재편되면서 제조업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의 임금격차가 줄고 반면에 사무전문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80년대에 비해 크게 개선되지 못하면서 사무전문직 노동자의 지위가 이전에 비해 취약해진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새롭게 노동운동에 진출한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전노협과 별도로 전국업종노동조합협의회(업종회의)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90년대 중반에 들어 ‘전노협’, ‘업종회의’, 대공장 사업장들의 협의체 예를 들면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현총련) 등이 노동자운동의 세 축을 형성했다.
-민주노총 건설-
전노협과 업종회의 등은 ILO기본조약비준과노동법개정을위한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를 만들어 노동법 개정투쟁을 전개했고, 그 투쟁의 결과로 민주노총이 건설되었다.
업종회의 의장이던 서울 신문 기자출신의 권영길씨가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95년 민주노총의 출범으로 민주노조 진영은 총 단결을 이루었다.
노동조합운동은 근본적으로 조직된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운동이다.
강한 사회적 힘을 가진 대공장 노동자는 현상적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주장할 수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중소사업장 노동자의 경우 독자적인 투쟁으로는 사회적 파급력과 힘을 갖지 못한다.
그들의 권리 확장은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 전체의 권리의 향상으로 이루어진다.
보편적인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를 위한 투쟁, 그것만이 전체 노동자 운동의 성장과 노동자의 권리의 향상을 보장한다.
조직된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투쟁과 노동자의 보편적 이익을 위한 투쟁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통일되지 않으면 조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운동은 전체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를 위한 투쟁의 의미를 희석시킨다.
96-97 총파업과 97년 노사정위에서의 노동법 개악 협상은 그러한 노동자 운동의 어려움을 반영한다.
노동자 단결의 대오가 확장되는 것과 동시에 노동자 연대투쟁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12. 총파업, IMF, 비정규직 노동자 : 1990년대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의 물결-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더 이상 적이 없어진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맺었던 기존의 모든 타협책을 무위로 돌리려 했다.
세계적으로 오직 자본 간의 경쟁만이 절대 진리가 되었고 노동자 민중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던 각종의 조치들은 철회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그동안 불가피하게 썼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이빨을 들이댔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세계적인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은 조금이라도 더 노동자를 쥐어짜야 했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자본에 맞서는 노동자보다 더 싼값으로 더 편하게 부릴 노동자가 필요했다.
변형근로제와 근로자파견법, 정리해고에 관한 법 등은 그런 이유로 국회에 상정되었다.
-96․97년 총파업투쟁-
노동법의 개악은 노동조건의 전면적인 후퇴를, 노동자의 만성적인 고용불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는 투쟁으로 그것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96-97 총파업은 노동자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투쟁은 수개월간 지속되었으나 결국 변형근로제와 근로자 파견, 정리해고 등을 합법화한 노동법 개악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될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96-97년 총파업투쟁은 노동자가 전선의 중심에서 지도력을 행사하였다는 점, 소수의 운동권이 결사항전의 자세로 유지해간 싸움이 아니라 노동자, 시민 대중이 전선에 결집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투쟁과는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IMF와 노동법 개악-
노동법 개악에 이어 곧바로 터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는 노동법 개악이 노동자에게 얼마나 치명적이었던가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대규모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양산은 모든 노동자가 그 노동법 개악의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상에서 제외된 노동자는 살아남기 위해 위축되었고 노동자운동은 정리해고 대상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투쟁의 축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노동자, 그리고 개악 노동법의 대상이 된 자, 즉 정리해고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결사적인 투쟁, 그것이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의 분화와 새로운 노동운동-
IMF 이후 노동운동은 새로운 상황에 부딪혀 있다.
먼저 노동자는 다양한 노동조건과 노동형태로 세분화되었다.
이전처럼 대공장 노동자, 중소사업장 노동자의 이분법 따위로 규정될 수 없이 계약직 노동자, 파견노동자, 2차 하청 노동자 등이 대공장과 중소사업장을 막론하고 혼재되어 있다.
사업장 단위로 규정할 수 없는 노동자가 양산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과 업종과 사업장을 포괄한 일반노동조합이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흐름으로 부상하였다.
대규모 사업장에서 투쟁보다 협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장기화되면서 민주파와 어용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노사협조주의를 내세운 노동조합들이 많아졌다.
또 사회 민주화와 정권교체 등을 반영하여 어용노조운동을 대표하던 한국노총이 정권에 대한 독자성을 강조하여 민주노총 내에서 부상하는 노사협조주의와 그리 구별되지 않는 상황이 빚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갈림길에 놓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역일반노조 등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 한국의 산업구조의 변화와 IMF 이후의 노동형태의 변화를 반영하는 운동조직으로 등장했다.
지역일반노조는 노동자의 다양한 조건과 형태를 넘어 전체 노동자를 포괄하는 조직형태이고 전체 노동자의 보편적 이익과 권리를 자신의 임무로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노동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 민주노동당 건설-
87년 대투쟁을 통하여 등장한 한국의 노동자 세력은 민주노총의 건설과 총파업투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간의 민주노조 운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높은 수준을 단결력을 보여왔으나 정치적으로는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선거시기가 되면 지역 특성에 따른 투표로 일반국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 왔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과제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중차대한 과제라는 인식이 96, 97 노동법 개정 총파업투쟁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
이제 우리 노동자들을 임금인상, 근로조건 향상 등의 경제적인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단결을 위해서라도 정치세력화를 이뤄야 한다는 각성이 민주노동당을 탄생시켰고, 2004년 4․15총선을 통한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요구를 사회적․정치적으로 쟁점 화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한국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서막을 열었다는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