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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교사 샤프부인의 추천으로 서울 이화학당(현 이화여고)에 가서 신학문을 배우며 애국심을 키워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를 부르겠다고 학장에게 강하게 요청하였다. 총독부 휴교령으로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에 내려와 1919년 4월 1일 김구응, 조인원 등과 함께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로 열사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순국하고 3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유관순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같이 재판을 받았던 사람들이 항소한데 반해(당시법원은 삼심제) 열사는 항소를 포기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중에도 옥중에서 끊임없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로 인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열사는 체포당시 상처와 고문으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는 비폭력 투쟁·삼일정신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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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고려 충신 김방경장군의 12대손이며 조선을사명현 김충갑선생의 셋째 아들로 1554년 8월 27일(음력)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25세 때인 1578년(선조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를 제수 받았고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격해오는 왜군을 크게 격파한 공로로 7월말 진주목사로 발탁되었다.
1592년 10월 5일 왜군 3만 여명은 제1차 진주성 전투를 감행하여 김시민장군과 대접전을 벌였다. 이때 아군은 3,800여명의 적은 군사로 고군분투 하였지만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왜군 2만 여명을 사살하는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역사에 찬연히 기록되기 되었으며 이로써 진주대첩은 호남호서 지역으로 진격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 성안을 순회 검시하던중 왜적 한명이 쌓인 시체속에 숨어있다가 쏜 총에 맞고 치료 중 1592년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1604년(선조37년) 6월 25일에 선무공신 2등에 올랐고, 10월 29일에는 장군의 영정을 그려 후세에 전하게 하였으며 관작과 품계를 2등급 올렸다. 1702년(숙종35년) 6월 16일에는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공의 시호를 하사받았다. |
<"우리고장 자랑거리 모음집"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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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 이동녕은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1869년 2월 17일에 태어났다. 석오는 총명하고 출중하다는 칭찬을 한몸에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22세 되던 1892년에 응제진사에 합격하고 2년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1897년에는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있은 후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서울에 올라가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상동청년회원들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문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을사조약을 즉시 철회할 것을 요구하다가 감옥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실효가 없음을 깨닫고 망명의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또한 투쟁에 의한 독립쟁취도 필요하지만 먼저 나라를 바로 잡고 이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기르면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하여 북간도를 활동 무대로 정하고 용정에 서전의숙을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북간도 최초의 한국인 학교였다. 1907년 안창호, 신채호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초대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동안 의정원 의장 3회, 주석 4회를 역임하였다. 1940. 3. 13 중국 사천성에서 급성폐렴으로 서거하여 국장을 거행하고 1948. 9. 22 김구선생 주도로 봉환하여 효창원에 안장하였다. 1962. 3. 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추서 |
<"우리고장 자랑거리 모음집"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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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 홍대용은 1731년(영조 7년)에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서 태어났으며 10여세 때부터 김원행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오랜 세월동안 사사관계였다. 담헌은 북학파 학자들인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유학보다는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는 1765년(영조 41년) 청나라에 가는 서장관 홍억의 군관으로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던 일이다. 그는 북경에서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사귀면서 청조의 문물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배청의리론을 극복하고 주체적 세계의식으로 전환하여 의산문답을 저술하였다. 그가 44세가 되던 영조 50년(1755년)에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특별히 임명되는 음관으로 종 9품의 선공감의 말직인 감역이 되었다. 이어 세손을 보필하는 세손익위사의 사직으로 지내다 정조가 즉위한 뒤 사헌부의 감찰, 태인현감, 영주군수 등을 지내다가 정조 7년(1783년) 2월 풍으로 세상을 떠나 천안땅에 묻혔다. 그는 실심과 실사의 실학정신을 제시하였으며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기능에 따라 직무가 부여되는 사회제도를 추구하였다. 그는 지구 자전설을 주장하였고 오행설과 음양설을 극복하여 서양과학의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서양 과학이 수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주해수용을 저술하였다. 그의 중국 친구인 반정균은 담헌기에서 평하기를 "담헌은 박문강기하여 보지않은 책이 없을 정도이다. 율력, 전진의 법과 송학의 종지를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시문으로부터 산수에 이르기까지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
<"우리고장 자랑거리 모음집"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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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 조병옥은 1894년 갑오년 3월에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한 농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공주영명학교, 숭실중학교, 연희전문학교 등 기독교 선교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신흥우, 김규식 등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정신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14년 미국유학길에 올라 와이오밍고등학교를 거쳐 콜롬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25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서재필, 이승만 등과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특히 안창호의 인격과 애국연설에 감복하여 흥사단에 가입, 활동했었다.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본부 재정총무겸 경성지회 책임자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광주학생사건에 관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고 39세에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조만식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잠시동안 전무 겸 영업국장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광산사업에 4년간 손을 대기도 하였다. 미군정 당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경무부장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으며 1948년 건국이후 대통령특사로서 UN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고 6.25 전쟁 발발후 전시내무장관의 중책을 맡았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유세기간중 신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으며 저서로 <민주주의와 나>, <나의 회고록>등이 있다. |
<"우리고장 자랑거리 모음집"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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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성씨는 1920. 7. 5 천안에서 출생하여 천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공립고등학교, 일본경도여자고등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9년 대전 대동공립고등여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조선조 최후 주방상궁 한희순으로부터 궁중음식을 전수 받았다. 1946년부터 1990년까지 숙명여대, 서울대, 명지대, 한양대, 성균관대 등에서 교수를 역임했으며, 1971년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하여 1973년 1월 5일 조선왕조궁중음식기능보유자로 중요무형문화재 38호로 지정되었다. 궁중음식발표회를 여러차례 가졌으며 1986년 국민훈장 목련장, 1990년 10월 대통령표창 보관장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는 궁중음식, 한국민속종합조사, 한국음식 등 수십권이 있으며 현재 궁중 음식연구원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
<"우리고장 자랑거리 모음집"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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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면 광덕리와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와 경계이다. 신라시대의 광덕사가 있으며 계곡의 맑은 물이 흘러 풍서천과 곡교천의 상류를 이룬다. |
<"우리고장 자랑거리 모음집"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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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읍 교촌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저수량 1,796천 톤, 수면넓이 41.6㏊로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저수지는 유료 낚시터로 주말이면 강태공들이 많이 모여든다. |
<"우리고장 자랑거리 모음집"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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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200여 년전 여름 큰물난리에 어디선가 떠 내려와 자생한 것이라 전해지며 자식이 없는 아낙네가 이 나무에 접지만 하면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우리고장 자랑거리 모음집"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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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담당]천안 시청문화관광담당관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
첫댓글 천안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