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형양공(滎陽公) 휘 습명(襲明) 유사(遺事)
경북 유형문화재 제302호로 지정된 남성재
대종회관
* 호는 동하(東河)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형양(滎陽)선생이라 불리어진다.
1.출생(出生) : 출생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그 행적을 들어다 보면 대략 고려 숙종(肅宗)조(1096) 경으로 여겨진다.
2.관직(官職) : 성품이 강직하고 뛰어난 재주와 탁월한 도량으로 특히 유학에 조예가 깊은 대유학자 로 고려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3代의 중신으로, 성품이 강직(剛直), 쾌활(快活)하 고 지(智), 인(仁), 용(勇)을 겸비하였으며 문명(文名)과 기개(氣槪)가 높았던 직신(直臣)으로 우둔 (愚鈍)했던 왕을 직간(直諫)으로 보필한 공덕으로 높은 명신이었다.
1)예종11년(1116)에 젊은 나이로 서경도사(西京都事)를 지내고 예종 말년에는 내직으로 소명
되어 내시(內侍)가 되었다.
조정에 들어와 국자감 사업(國子監 司業), 기거주(起居注)와 지제고(知制誥) 등을 역임했다.
2)인조24년(1146)에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승진(昇進)하여 태자 의종(毅宗)의 사부(師父)가
되어 태자를 가르쳤다.
3)인종25년(1147)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겸임되었다.
4)의종3년(1149) 4월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겸임되었다.
5)이때의 의종은 모든 정사(政事)를 선생에게 의논하여 행하였기 때문에 고려문화의 절정기
를 이루었으며 태평성세를 누리게 되었다.
3.업적(業績) : 1)태안반도 굴포에 운하건설 - 인종 12年(1134) 甲寅)에 안흥정(安興亭), 부안-扶
安) 부근의 조운(漕運)을 쉽게 하기 위하여 서해도(西海島) 태안(泰安)의 동측(東側) 지협(地
峽) 인 굴포(堀浦)에 방읍민(旁邑民) 수천명을 동원하여 운하를 팠으나 10여리는 굴착하고 7
리를 남겨두고 실패하였다.
태안반도의 굴포운하공사 위치도
2)인종13년(1135)에 중 묘청의 난을 평정하다.
3)인종18년(1140)에 집현전 태학사 김부식(金富植)과 임원애(任元敱), 이충(李仲), 최주(崔奏),
최자(崔梓) 등을 설득하여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당시에 국정에 폐단이 되는 열가지제도)
를 상소하였으나 왕이 거절하자 선생이 단독으로 사표까지 내놓고 극렬히 간청하여 황폐직
전의 국정을 바로 잡았다.
4)인종23년(1145)에 지제고(知制誥)의 벼슬에 계실 때 김부식, 김충효 등과 더불어 전질(全帙)
50권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
4.간신(奸臣)들의 모함
*그러나 간신(奸臣) 김존중(金存中)과 정함(鄭諴)등이 선생을 시기하여 의종에게 모함하여 미
움을 사서 그 직을 물러나고 영일로 귀향하여 지내다가 약을 우러러 받고 일생을 마쳤다.
*예종5년 신미(1151) 춘3월(임진)에 추밀원지주사 형양공이 세상을 떠났다.
5.오천서원(烏川書院)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봉안
포항시 대송면 오천서원
*1588년에 영일에 오천서원을 창건하고 형양, 포은 양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1612
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탄 서원을 다시 중건하였다.
*진주 옥산서원에도 선생을 제향하고 있다.
6.남성재(南城齋)에 단(壇)을 새우다.
남성재에 새운 묘단
남성재에 선 묘단비
*숙종기축(1709)년에 묘소는 실묘 하였으므로 우리 가문의 횡계(橫溪)의 훈수(塤叟), 지수(篪叟)선생 형제분께서 단(壇)을 설치할 것을 발의하여, 당시의 문장이신 오회공(五懷公)을 대표로 해서 순상 홍만조(洪萬朝), 유척기(兪拓基)에 정문(呈文)하여 당시 영일군청을 철거하고 단을 만들어 단향(壇享)(단제사-壇祭祀)를 받들고 있다.
*단향(壇享)은 매년 10월 10일 새벽7시에 시사(時祀)를 지냈다.
*해마다 음력 10월 10일 낮부터 전국에서 자손들이 모여들어서 저녁에는 개좌(회의)를 하고 그 많은 제관들은 모두 재실(남성재)에서 자고 식사 제공을 받았다.
*옛날에는 재장과 유사가 단소(壇所)와 재실(齋室) 등 모든 재산을 관리하였으나 일이 너무 벅차 근년에 와서는 남성재 대종회(大宗會)가 조직되어 그 일을 맡아보고 있다.
*오늘날에는 매년 4월 첫째주 일요일에 시사를 지내고 있다.
* 石 竹 花
世 愛 牡 丹 紅 栽 培 滿 院 中 세상에선 모란꽃이 제일 곱다고
세 애 모 란 홍 재 배 만 원 중 화원에 심어놓고 좋아하건만
誰 知 荒 草 野 亦 有 好 花 叢 푸른 나무 우거진 산과 들에도
수 지 황 초 야 역 유 호 화 총 더 좋은 패랭이꽃이 피어있는걸
色 透 村 塘 月 香 傳 隴 樹 風 밤에는 고운 자태 못 속에 안겨
색 투 촌 당 월 향 전 농 수 풍 향기로움 바람 따라 풍겨주누나
地 偏 公 子 少 嬌 態 屬 田 翁 산골이라 호화로운 손님이 적어
지 편 공 자 소 교 태 속 전 옹 순진한 농부들께 아양 보내오
o익재선생이 명시로 뽑은,,,,, 정습명(鄭襲明)의 詩
百花叢裏淡봉容[백화총리담봉용],,, 꽃과 같은 고운 용모 아릅다웠네!
忽被狂風減却紅[홀피광풍감각홍],,, 광풍이 몰아가고 시들어 버렸으니
獺髓未熊醫玉頰[달수미웅의옥협],,, 달수라는 약으로도 그 얼굴 고칠 수 없네
五陵公子恨無窮[오릉공자한무궁],,, 아!~오릉공자늬 한이 무궁하구나!,,,
o익재선생이 왈(曰),,, 이 시가 오래동안 음미 할수록 여미(餘味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맛)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고 평가했다,
형양선생의 대표적인 詩로는 석죽화(石竹花)로 파랭이 꽃을 말함, 우리나라 최고의 명시로 손꼽히기로 유명하다, 형양 정습명의 석죽화 詩는 대학입시 시험 문제로도 가끔식 등장하는 명시 이다,
<참고문헌>
o영일정씨선무랑공파보(迎日鄭氏宣務郞公派譜) 1999년.
o남성재지(南城齋誌) 2009년.
o시조 형양공 휘 습명 묘단비음기(始祖 滎陽公 諱 襲明 墓壇碑陰記)
영의정 유척기(領議政 兪拓基)
o추밀원지주사선생신도비문(樞密院知奏事先生神道碑文)
28세손(世孫) 화식 경찬(崋植 敬撰)
<자료정리>
o29세손 병극(29世孫 炳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