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님 보다 먼저 와서 복음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사람됨을 먼저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 본 바와 같이 그는 먼저,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자발적인 가난이라는 뜻은 세례요한이 엄격한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채로 지냈다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가난한 것처럼 생활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이면 누구나가 다 추구하는 경제적인 안락함을 포기하고 가난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세례요한과 같이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세례요한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세례요한의 겸손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 1:7-8) 그는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과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요, 자신은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나, 종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은 예수님이 벗어 놓으신 신을 들고 따라가는 것조차도 감당 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례요한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과 겸손을 함께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자신이 남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겸손이 아니라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등감은 부러움과 시기심으로 표출됩니다. 자랑하는 것도 열등감 때문에 드러나게 되는 심리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가난했지만 열등감이나 거기에서 나온 부러움과 시기심이 아니라, 또 상대방을 깎아 내리고 자신을 높여서 자랑하려는 모습이 아니라 겸손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참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거지 부자가 동냥을 다니다가 근처에 사는 부잣집에 큰 불이 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불을 끈다고 허둥지둥 쫓아다니고 부잣집 내외와 자녀들은 자기 집이 불에 타는 것을 보면서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거지의 아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염려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저 집 이제 큰일이 났네요. 저 많은 재산이 불에 다 타면 어떻게 하지요?” 그러자 거지 아빠는 뿌듯하다는 듯이 어깨를 젖히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놈아, 너는 아버지 잘 만나서 좋은 줄 알아라. 우리는 집이 없어서 불이 날 걱정을 안 해도 좋으니 얼마나 좋으냐...?”
사실 아버지 거지가 가진 본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차라리 불에 타도 좋으니 내게도 저런 좋은 집이 한 채 있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이 아니었겠습니까? 아니면 그는 부잣집이 망해 가는 것을 속으로 즐거워하는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거지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한 채도 없다는 열등감을 감추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히려 그는 “집이 없는 것이 다행인줄 알아라.”며 아들에게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바울은 고전 13:4에서 말씀합니다. 시기심을 가지는 것도 열등감에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노력과 수고로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을 바로 보지 않고 “저기에는 분명히 부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열등감에서 나오는 시기심입니다. 또한 열등감이 있으면 자랑할 것도 아닌 것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내게는 남들보다 더 우월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자꾸 드러냄으로써 자기의 열등감을 만회하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등감에서 교만해지기도 합니다. 턱없이 자기를 높이거나, 자기 소유, 자기 능력, 자기의 가족들, 자녀들,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남들보다 우월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솝이야기 중에 사슴의 뿔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뿔을 가진 사슴이 있었는데 어느 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감탄했습니다. ‘난 어쩜 이렇게 뿔이 크고 아름다울까?’ 그러다가 이 사슴이 자신의 다리를 봤는데 다리는 왜 그렇게 볼품없어 보이던지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자기를 잡으려는 사냥꾼의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슴은 순식간에 날렵하고 힘찬 다리로 먼 거리까지 도망갔습니다. 그 때서야 사슴은 다리의 고마움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전하겠지’ 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사슴은 나뭇가지에 뿔이 걸려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고, 쫓아오던 사냥개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사슴은 죽어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뿔만 없었어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열등감이나, 시기심, 자랑, 교만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 할 수 있고, 자신의 장점을 더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공정하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도 공정하게 대접할 수 있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상적인 자기와 현실적인 자기가 있습니다. 이상적인 자기란 “되고 싶은 나”를 말하는 것이요 현실적인 자기란 “지금 이대로의 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되고 싶은 나에게 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사람은 지금 이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늘 자기 때문에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상은 하늘 끝까지도 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늘 이상만 추구하다가는 언제나 자신이 불만족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열등감이 생기고, 자신이 초라하게만 여겨지는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서 시기심, 자랑, 교만 등으로 자기 방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현실의 자기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만약 세례요한이 현실의 자기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왜 예수님 같이 위대한 사람이 못되었는가?”하고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아주 적대적이거나 반대로 예수님을 지나치게 이상화시키는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비굴하지 않게 겸손하고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예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겸손하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게 이상적인 인간, 되고 싶은 모습의 굴레를 씌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꿈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와 이상과의 조화를 잘 이루는 것이 겸손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을 잘 대접하게 되며, 또 이웃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평화로우며 자신과도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이 겸손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후밀리타스”입니다. 이 말은 후무스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후무스는 “흙”이라는 뜻입니다. 곧 겸손은 자신이 흙에서 나온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흙은 보잘 것 없습니다. 흙은 바면 파이고, 덜어내면 들리며,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눈이 오면 얼어붙는 것입니다. 모든 오물들로 뒤 덮으면 덮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들입니다. 병들면 아프고, 가난하면 불편하고, 나이 들어 늙으면 볼품없게 되어가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함인 것입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창시자 성 베네딕도는 겸손에 열 두 단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단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생각과 감정이 하나님을 향할 때만 우리가 온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소원이나 욕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맞아떨어지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자기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넷째 단계는 나쁜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참아 주고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다섯째 단계는 생각과 감정을 숨김없이 고백하는 것이며, 나쁜 감정과 죄악까지 숨기지 말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단계는 완벽한 삶에 대한 나의 환상을 깨어지게 하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곱째 단계는 내가 억압하는 모든 것, 나의 추하고 부끄러운 것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단계는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삶의 규칙에 따르는 것입니다.
아홉째 단계는 침묵으로 나의 진실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말이 많으면 나 자신을 만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열째 단계는 웃을 때에도 드러나는 겸손입니다. 비웃음이 아니라 주위의 다른 이들까지 자유롭게 하는 기쁨의 웃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열한째 단계는 말할 때 몸으로 드러나는 겸손으로 간결하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열두째 단계는 몸가짐에서 드러나는 겸손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죽으실 때 고개를 숙이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이 겸손의 단계들은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었지만 우리들이 이 모든 단계를 오르면 곧 “두려움을 몰아내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들이 겸손을 추구하면 할수록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겸손으로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인간적인 것을 모두 받아들이셨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까지 있는 그대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셨지만 하나님이 높여 주셨고 다시 하나님이 계신 보좌 우편에 앉으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겸손한 삶은 이렇게 예수님을 본받으며,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길로 우리들을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겸손한 사람의 길을 훈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겸손한 세례요한처럼 광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연단을 받으며 겸손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신 방법도 그들로 하여금 광야학교에서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 잇는 동안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배웠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광야는 자신들의 삶이 있는 현장이며,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나 교회 안에서 겸손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교회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존중하고 잘 대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의 말이나 행동에 나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 시기심, 자랑, 교만은 없었는지 날마다 살펴봄으로서 우리는 점점 더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본분과 사명에 충실한 사람들이 되어서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 안에서의 충만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 가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