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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간행한 대장경을 고려 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고 한다.
고려대장경에는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의천의 대장경(교장 敎藏) 재조(再雕)대장경(팔만대장경) 등이 있다.
고구려를 기억하려는 의미로 정하여진 국호 고려이다. 고려는 남조(통일 신라)의 전통을 거의 그대로 이은 귀족 문화를
가졌으며 북방의 북조(발해)의 성립과 별도로 후삼국을 군사적 대립과 복속으로 통일하였다.
문반과 무반의 차이를 문화의 특징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에 바탕한 각 호족들과 그 사병 집단들의 느슨한 연합 구조가 유지되던 가운데 몽고에서 시작된 북방의 유목 부족
국가들 간의 통일 전쟁으로 침입을 받게 되면서 부처에 대한 믿음으로 나라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이것이 방대한 대장경의 간행 사업으로 나타났다.
제1차 대장경 간행 제2차 대장경 간행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제1차 대장경 간행 제1차 때 간행한 대장경은 흔히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고 불리운다.
"과거 현종 2년(1011)에 글안병이 대거 침입하여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글안병사들은 송악성에 주둔하여 퇴거치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임금과 신하들이 무상의 대원을 발하여
대장경을 조성할 것을 서원하여 조성하였더니 글안병사들이 스스로 물러갔다. "
고려의 문필가 이규보가 1237년 팔만대장경을 새길 때 지은 글이다.
고려는 11세기 초 현종 때 거란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대장경판을 만들었다.
이를 초조(初雕)대장경이라고 한다.
고려 현종으로서는 기구한 운명으로 살다 간 양친의 천도를 빌고 싶었다.
그에게는 국란극복과 함께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데도 목판대장경의 새김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 금종(金鐘)과 법고(法鼓)의 조성을 모두 마치고 군신들과 함께 예배하려 갔다. 종을 처보고는 모든 사람들이
만족해하고 기뻐하였다. 임금께서는 친히 곡식 2000여 석을 하사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이나 양반들도 각각 시주하였다.
특별히 금종보(金鐘寶)라는 것을 세워 시행하였으며, 또 여러 궁원(宮院)에서도 함께 큰 효심을 존중하여 각각 전답을
보시하여 받쳐 성상(聖上)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또 발심서원하기를 나라가 편안하고 종묘사직이 안녕하도록
축원하기 위하여 매년 춘 4월 8일에 주야 3일 동안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또 양친의 천도를 위하여 매년 가을 7월 15일에 주야 3일 동안 미타불회(彌陀佛會)를 설립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공인들로 하여금 대반야경(大般若經) 600권과 더불어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등의 경전의 판본을 이 절에 조성하도록 하였으며 般若經寶를 설립하여 경전을 오래도록 시방에
보시할 것을 명하였다." 현화사비음기(玄化寺碑陰記)에서 그의 뜻을 읽을 수 있다.
현화사는 현종 9년 6월 헌정왕후(獻貞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과 여러 신하 양반들이 시주하여 세운 절이다.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생애는 한 편의 드라마다.
현종은 아버지(왕욱·王郁)를 기준으로 보자면 5대 경종 6대 성종과 함께 태조 왕건의 손자다.
그러나 어머니 헌정왕후가 경종의 비였기 때문에 어머니 기준으로 보자면 헌정왕후의 친언니이자 마찬가지로
경종의 비였던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자식인 7대 목종과 함께 태조의 증손자군에 속한다.
그의 탄생은 평범하지 않았다.<고려사절요>가 전하는 그의 탄생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992년 7월에 왕욱을 사수현으로 귀양보냈다. 귀양지는 경종의 왕비 황보씨의 사제와 가까웠다.
경종이 죽자 왕비인 헌정왕후가 사제에 나와 거처했는데, 일찍이 곡령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나라 안에 넘쳐흘러 모두 은빛 바다를 이루는 꿈을 꾸고는 점을 쳐보니
“아들을 낳으니, 그가 한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하므로 왕비가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랴” 하였다.
후에 왕욱이 마침내 조카인 왕비와 관계하여 아기를 가졌으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왕비가 왕욱의 집에 머무르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할 때, 성종이 주위에 시켜 그 까닭을 알아보니 왕욱이 윤리를 어지럽히는 죄를 범했다 하므로
그를 귀양보냈다. 왕비인 헌정왕후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겨우 문에 이르렀는데 산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아이를 낳고는 죽었다. 이 아이가 곧 순으로 훗날의 현종이다.
왕욱은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이며 경종의 왕비였던 헌정왕후의 삼촌이다.
당시 고려 왕실에서는 친족끼리 결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삼촌과 조카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종의 왕비였던 헌정왕후와 외삼촌 왕욱의 밀애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순은 두 살이 되어서야 난륜(亂倫)을 범한 죄로 쫓겨가 있던 친아버지 왕욱의 품에 처음으로 안기게 된다.
992년 어머니인 헌정왕후는 자신을 낳고 바로 죽었으며, 다섯 살이 되던 996년 아버지 왕욱마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고아가 된 순은 이듬해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해에 성종이 승하하고 목종이 즉위하면서
순은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다.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는 천추궁에 거처하면서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하며 섭정을 하였다. 자식을 낳지 못한 목종은 1003년에 순을 대량원군에 봉해 왕위를 물려줄
뜻이 있었지만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는 목종에게 아들이 없음을 기화로 자신과 연인이던 김치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인 대량원군 순이 있음을 두려워하여
순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출가를 시켜 버렸다. 이 뿐만 아니라 자객을 보내 순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김치양의 음모를 알게 된 목종은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순을 은밀히 궁궐로 데려오게 했으며 서경의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명해서 순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강조는 천추태후가 왕명이라 꾸미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착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강조는 목종이 생존하는 한 생모인 천추태후와의 관계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한 뒤 1009년 2월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순을 임금으로 옹립했다. 이렇게 하여 1009년 2월 순이 왕위에 오른다.
그의 나이 18살이었다.그 현종은 기구하게 살다 간 양친의 극락왕생을 목판대장경을 통해 빌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이라는 의미에서 초조고려대장경 혹은 국본(國本)이라 한다.
당시 고려에는 최고의 목판인쇄본인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 등을 포함하여 많은 경전들을 분황사와 황룡사 등에
보유하고 있었다. 성종 10년(991) 한언공(韓彦恭)이 북송판 대장경을 들여온 이후 불안한 시기에 즉위한 현종이 군신과 백성의 결속과 왕권 국가 체제 강화를 위해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12년에 걸친 조성으로 완성된 초조대장경은 계속적인 보완작업으로 선종 4년(1087)년에 마무리가 되었다. 고려의 초조대장경은 570상자, 5,924권으로 구성되었다.
목판의 새김이 정교하여,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판화들도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초조대장경은 본래 개경의 흥왕사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팔공산의 부인사(符仁寺)로 이운되었고,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경판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그러나 학계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일본 난젠지에 경판을 종이에 인출한 초조대장경들이 다수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국내·외에서도 초조대장경 인출본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그 결과 이 대장경에는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에 속한 경전 뿐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대장경과 국내에서만
전해지던 경전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6000여권에 이르는 초조대장경은 대구 동화사의 말사인 부인사에 보관 되었으나 고종 19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고 초조대장경 인쇄본은 일본 교토 난젠사에 1,715권이 남아 있으며 국내에는 7권이 남아
국보(265∼269)로 지정되어 있다.
초조대장경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한자 번역 대장경이며 당시 한역 대장경으로는 동양 최대의 방대한
분량이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가 크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비육신지필 급선인지필
(非肉身之筆 及仙人之筆 : 사람의 글씨가 아니라 선인의 글씨이다)’이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냈던 재조대장경
(팔만대장경)보다 서체나 판각술에 있어서도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우리의 뛰어난 기록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초조대장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목판이 인쇄된 종이가 잘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종이는 천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년을 간다(紙千年絹五百)’는 옛말처럼 전통한지의 우수성은 그동안 잘 알려져 왔다.
특히 고려의 종이는 중국에서도 종이 가운데 최고의 종이로 평가받아 “고려의 닥종이는 빛깔이 희고 사랑스러워
백추지(百錘紙)라고 부른다”,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종이 빛깔은 능라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소중히 여겨진다. 이는 중국에도 없는 귀한 물건이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수백 년을 못 견디는 서양 종이와 달리 고려의 종이는 내구성이 뛰어나 천년을 견딜 수 있는 종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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