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박씨(順天朴氏) 묘골(묘리, 妙里, 妙谷) 마을
성서 계명대학교 정문, 다사면 대실역 지나 성주행 국도를 따라 가다가 성주와 왜관 갈림길에서 왜관 쪽으로 4km정도 가면 묘골마을이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흔히 묘골로 불리는 달성군 하빈면 묘동(妙洞)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후손 순천박씨(順天朴氏) 집성촌이다. 풍수적으로 묘골의 형국을 ‘용이 몸을 틀어 꼬리를 바라보는 형’(回龍顧尾形)이라고 한다. 구한말까지는 300여 호의 집이 들어차 있었으며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10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30여 호만 남아 있다. 이 마을 가운데 길로 곧게 올라가면 맨 끝에 외삼문이 나타난다. 높직한 솟을삼문이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된 ‘육신사(六臣祠)’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데,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의 정문이다
순천박씨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인 고려 개국공신 박영규(朴英規)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박영규(朴英規)는 원래 순천(順天)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견훤(甄萱)의 사위였으며 장군이 되었다. 견훤(甄萱)이 아들 신검(神劒)과의 불화로 고려 왕건(王建)에게 도피해 있게 되자 고려에 귀순할 뜻이 있었는데, 후에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공략할 때 내응하여 고려의 공신이 되었다. 고려 태조는 그에게 좌승(佐丞)의 벼슬과 천 경(千頃)의 전토(田土)를 하사하였다. 후에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박영규(朴英規)는 왕건(王建)과 사돈을 맺어 그의 큰딸은 태조의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이 되었고 나머지 두 딸은 정종(定宗)과 사돈을 맺어 그의 정종(定宗)의 문공왕후(文恭王后) 문성왕후(文成王后)가 되었다.
순천박씨 여러 계파 중 충정공파(忠正公派)는 5세 박팽년(朴彭年)의 손자인 박일산(朴一珊)의 대 이래로 지금의 경북 달성군(達成郡) 하빈(河濱), 청도(淸道), 성주(星州), 칠곡(漆谷), 노곡(盧谷) 등지에서 살았고 16세 박성함(朴聖涵)의 후계(後系)가 상주(尙州)에서 살았다.
조선조의 순천박씨 인물 가운데 박팽년(朴彭年)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다. 세종 16년 알성문과(謁聖文科)를 거쳐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집현전부제학,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아버지 판서(判書) 박중림(朴仲林) 및 인년(引年) 이하 기년(耆年), 대년(大年), 영년(永年) 등 아우들과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등 함께 상왕(上王,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헌(憲), 순(珣) 두 아들까지도 함께 처형되었다. 숙종 17년에 복관(復官)되고 다시 충정(忠正)의 시호를 받았다. 정조 15년에 왕명(王命)으로 아버지 및 6신(臣)과 함께 장릉충신단(莊陵忠臣壇)에 배향(配享)되었다.
박팽년(朴彭年)에게는 헌(憲), 순(珣)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함께 처형되었으므로 후 손이 끊어질 뻔하였다. 둘째 며느리였던 성주이씨(星州李氏)가 임신 중이었고 정부에서는 남아(男兒)를 낳으면 죽이라고 명하였다. 이씨(李氏)는 남아(男兒)를 낳자 여종의 딸과 바꾸어 박씨 가문의 혈맥(血脈)을 보존하였다. 이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이 박일산(朴一珊), 곧 박비(朴婢)이었으니 박팽년(朴彭年)가의 후손이 이에서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성종 즉위 후 박비(朴婢)는 상경하여 자신의 신분을 고하였고, 성종은 특사령을 내리고 이름을 일산(一珊)으로 고쳐 주었다.
박팽년의 아우 박인년(朴引年)은 문종 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동생 기년(耆年)과 함께 급제하였고 집현전 교리를 지냈다. 정조15년에 장릉조사단(莊陵朝士壇)에 배향(配享)되었다. 그의 아들 박진(朴璡)도 함께 처형되었다. 박기년(朴耆年)은 과거에 급제한 후 호당(湖當)에 들어갔고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지냈다. 박대년(朴大年)은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를 지냈으며 박영년(朴永年)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를 지냈다
그래서 묘골의 순천박씨는 박비(朴婢) 곧 박일산(朴一刪) 후손들의 세거향이 되었는데, 그곳에 위치한 육신사(六臣祠)는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 숨진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사육신’(死六臣)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당을 지을 때에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를 지냈으나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朴繼昌)이 선생의 제삿날 사육신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뒤부터는 나머지 분들의 제사도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 뒤 하빈사(河濱祠)를 지어 이들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숙종 20년(1694년) ‘낙빈(洛濱)’이란 현액(懸額)을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고종 3년(1866년)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리게 되자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유림들에 의해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워 다시 사육신을 봉안해 왔다. 1973년부터 1975년 사이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에 의해 지금의 육신사를 건립했으며, 2003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忠節門)을 세우고 전통가옥을 복원하였다.
그곳에는 ‘사육기념관’이 있다.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지만 박물관에는 사육신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관람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모형으로 잘 만들어져 있어 제사 지내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자동으로 인식하고 설명을 해주는 자동인식기기도 있다.
그곳에서 좀 더 걸어가면 묘골 마을의 한옥들이 나온다. 묘리(妙里)는 ‘묘하게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밖에서는 마을을 볼 수 없고 안에서도 마을 밖을 볼 수 없어서다. 주민들은 ‘묫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찰의 일주문처럼 생긴 ‘충절문’을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길 양쪽에 50여 채의 한옥이 늘어서 있다. 북쪽 끝에는 사당인 육신사가 있다. 사육신 사당은 육신사를 비롯해 의절사(서울 노량진동)`창절사(강원 영월군) 등 전국에 모두 세 곳이다. 사육신의 묘소가 있는 곳에 의절사가, 단종의 능이 있는 곳에 창절사가 있다.
육신사 곁에는 보물 제554호인 태고정(太古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박팽년의 유일한 유복자손인 일산이 지은 것으로 본래 99칸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종택이 소실되면서 함께 훼손됐으나 1614년에 중건되었다. 보통 정자에는 하나의 현판이 걸려 있는 데 반해 태고정에는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 태고정의 건축학적 묘미는 지붕에 있다. 오른쪽은 팔작지붕, 왼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으로 마감한 보기 드문 형태를 띠고 있다. 문화적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는 곳이라 일컫는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治察使)로 온 윤두수(尹斗壽)의 한시를 새긴 현관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있다. 태고정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쪽 풍경은 장관이다.
이 묘골에 살던, 박팽년의 11대손으로 이조참판을 지낸 삼가헌(三可軒) 박성수(朴聖洙, 1735~1810)가 1769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인 ‘삼가헌’을 당호로 삼았다. 그후 박성수의 아들 박광석(朴光錫)이 1809년 초가를 헐고 안채를 지었고, 1826년 사랑채를 지었다. 지금도 삼가헌의 사랑채 건물 마루 위에 편안하면서도 기품 있는 글씨의 편액이 걸려있다.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글씨인 이 편액이 건물의 품격을 훨씬 더 높여주고 있다.
‘삼가헌’이란 당호는 ‘중용(中庸)’의 다음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천하의 국가도 고루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여기서 유래한 ‘삼가(三可)’는 선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知, 仁, 勇)을 뜻한다.
사랑채인 삼가헌(고택 전체를 삼가헌이라고도 함) 옆에 1874년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박규현)이 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누마루를 부설하고 그 앞에 연못을 만들어 ‘하엽정(荷葉亭)’이라 명명한 별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문화재 건물로 또 도곡재(陶谷齋)가 있으니 이는 1778년(정조2) 대사성인 서정(西亭) 박문현(朴文鉉, 1789-1875)이 제택으로 건립한 건물이나 1800년대에 와서는 처사(處士) 도곡 박종우(朴宗祐, 1587-1654)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 도곡재라 이름하였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사람으로 문장, 절의, 덕행을 모두 겸비하여 동한의 일인자라 칭송받았으며 달성 십현의 한 사람이다.
[사족蛇足]-현재 이 마을에 외우(畏友) 벗 박몽룡(朴夢龍)씨가 동강초당(東江草堂)을 짓고 우거(寓居)하면서 멋진 노후(老後)를 보내고 있어서 필자(筆者) 카페지기에게는 더욱 정감(情感)이 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