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2. 울산두레교회 주일낮예배
요즘 기황후라는 사극이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 역사 왜곡문제가 사회적인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가운데 아무리 드라마이지만 역사왜곡을 너무 심하게 하고 있다는 비판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원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황제의 후궁의 자리에 올랐던 기황후는 개인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애국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원정책을 꾀하는 고려를 정벌하고 공민왕을 폐위시킨 후에 원나라에 우호적인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하지만 똑 같은 시대에 원나라 황제가 주는 더 높은 벼슬을 마다하고 고려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돌아오는 길에 목화 씨앗 몇 개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겨울에 변변한 옷가지 하나 없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 가던 고국의 동포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 씨앗을 경남 산청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최초로 심어 온 나라에 목화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최근까지도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나라에 최초로 목화를 들여온 그는 바로 문익점 선생이었습니다. 남은 어떻든지 자기만 성공하면 영웅으로 미화되기도 하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알았던 그는 이 세상에 희망의 씨앗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는 씨앗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씨앗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씨앗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땅에 심겨져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이언트 세쿼이아”라는 나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초대형 점보여객기 여섯 대를 합친 만큼이나 엄청나게 큰 생명체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거대한 나무도 무게가 겨우 6,000분의 1g에 불과한 작은 씨앗에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씨앗 속에 우주가 숨어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씨앗이 된다는 것은 결코 무의미하거나 가치가 없는 일이 아닙니다. 씨앗이 가진 가능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세기의 기독교 스승가운데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분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려는 사람은 너무도 많은데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참으로 적다.” 이 말씀과 같이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영광이라고 하는 열매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씨앗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23절에서 그분이 받으실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28절에서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제자들이 모두가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열매에서 얻는 영광이 아니라 씨앗이 되어서 얻는 영광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씨앗이 되어서 얻는 영광은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서 얻는 영광이요, 씨앗이 되어서 얻는 영광은 내가 죽어야 얻는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매에서 얻은 영광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씨앗이 됨으로서 얻는 영광은 영원토록 보전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드러났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예수님 안에 숨겨진 영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씨앗의 영광이 아니라 열매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열매의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희생과 수고의 열매로 덕을 보겠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씨앗의 영광은 나의 희생과 수고로 다른 사람들이 덕을 보게 하겠다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추구하신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을 때 그것은 결코 그냥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알 그대로, 씨앗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열매로만 남아 있고자 하는 그것이 진짜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남이 수고한 것으로 얻는 열매가 아니라 자신이 한 알의 씨앗으로 땅에 심겨짐으로 남기게 될 열매가 자신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되고, 모든 사람을 살리는 참 생명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은 씨앗이 되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믿음의 씨앗, 사랑의 씨앗, 소망의 씨앗으로 심겨지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하여 맺어지는 열매로 내가 살고, 남을 살리는 참 생명을 누리는 한 해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씨앗이 얻을 영광은 낮아지고, 심겨지고, 자기를 잃어버림으로써 영원토록 자기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 말씀에서 씨앗을 보전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한 알 그대로 간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땅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방법, 즉 한 알 그대로 간직하려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땅에 심겨지는 두 번째 방법에 대해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어상의 의미를 보면 “박해를 받는다. 고난을 당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처럼 두 가지 모습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생명, 자기의 소유, 자기의 모든 것을 사랑하여 복음을 위하여 박해 받고 고난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부류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생명, 자기의 소유, 자기의 모든 것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여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박해받고 고난 받는 것까지도 감당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두 부류의 삶이 선택한 것의 결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만약 우리가 농부의 입장으로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피부에 더 가깝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심을 씨앗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자루 속에 넣어서 창고에 보전해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라버리거나, 썩어버리거나, 쥐가 갉아먹거나 십중팔구는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농부가 씨앗을 참으로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을 들고 나가 밭에다 심어야 합니다. 밭에 심은 씨앗들을 새들이 먹고 짐승들이 파헤치기도 하겠지만 농부는 추수 때에 그보다 더 많은 씨앗들을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씨앗은 자기 생명이요, 자기의 은사, 소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끼는 것이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 9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아끼는 것은 오히려 잃어버리게 되지만 씨앗처럼 낮아지고, 심겨지고, 자기를 잃어버리기까지 한다면 비록 자기를 내어주는 고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하늘의 창고에 쌓아 두는 것이 되어서 영원한 삶을 위하여 예비 되고, 영생토록 보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각 사람들이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심기는 씨앗들이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맡은 자리, 세워진 자리에서 씨앗처럼 낮아지고, 심겨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들이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내어놓기까지 하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싹이 움돋아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 진정으로 자기 생명을 보전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 생명으로 살아가는 씨앗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예수님을 섬기는 삶은 예수님처럼 한 알의 씨앗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6절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서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예수님처럼 전도하고, 가르치고, 병을 고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도 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예수님처럼 한 알의 씨앗이 되는 것”으로 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요 예수님처럼 되는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주된 내용은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될 때 예수님의 고난도 받게 되겠지만 예수님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씨앗이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과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씨앗이 없는 곳에는 열매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어떤 열매를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처럼 씨앗이 될 수 있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씨앗이 되는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시기를, 예수님처럼 씨앗이 되어서 부활과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의 비결은 씨앗이 되어 심어지는 것입니다. 농부는 씨앗의 크기만큼 고랑을 판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큰 씨앗일수록 큰 고랑을 파고 거기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생긴 고랑이 크고 깊을수록 우리가 큰 씨앗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크고 깊은 고랑 속에 갇히지 않습니다. 고난이 우리를 완전히 덮을 수 없습니다. 시험과 시련이 우리를 질식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씨앗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남겨두신 씨앗들이며,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생명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한 농부이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을 땅 속 깊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의 힘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나서 그 고랑의 흙을 뚫고 나와 열매를 맺도록 하실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요즘 안녕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샬롬!”을 물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안녕하십니까? 이것은 “잘 살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씨앗이 되는 사람에게는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입니다.” 또한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씨앗이 되어 가정에 심어지고, 일터에 심어지고, 교회에 심어져서 열매가 되어 예수님의 생명을 퍼트리고 구원의 삶을 보전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