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행복수업 합본] 1-1,2
1) 지원 불자님
입보리행론
샨티데바의 행복수업
김영로 옮김
2563.06.25.
제 1장 보리심의 공덕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분들도 부처님의 아들, 딸이 되어 인간과 신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됩니다.
게송 1
부처님들과 보살님들, 그리고 모든
예경의 대상인 분들께 예경 드리오며
경전에 따라 보살님들의 수행법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게송 2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새로운 것이 없고
제게는 글재주도 없으므로 제가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쓴 것은 저의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지원(智源) 사경 합장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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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진 거사님
입보리행론 강의(달라이 라마)
빼마까라 번역 그룹 편역/이종복 옮김
2563. 6. 25
제1장 보리심의 이로움
1.
환희에 이르신 분들께, 그들이 지닌 법신(法身)에
그리고 모든 그들의 법의 상속자에게,
응당히 존경을 받을만한 분들께 경건히 예를 올립니다.
경전에 따라, 저는 이제 보살행의 수행을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2.
여기서 나는 이전에 듣지 않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게송을 지을 재주가 없다.
따라서 이 글이 다른 이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내게는 없다.
이 글은 오직 내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 쓸 뿐이다.
《입보리행론》은 우리가 공양하는 수승한 분들인 붓다들과 보살들에게 귀의하며 게송을 시작한다.
1.
환희에 이르신 분들께, 그들이 지닌 법신(法身)에
그리고 모든 그들의 법의 상속자에게,
응당히 존경을 받을만한 분들께 경건히 예를 올립니다.
경전에 따라, 저는 이제 보살행의 수행을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환희에 이르신 분들이란 말은 붓다와 비슷한 말로, 산스크리트어로는 수가따(sugata, 善逝)이다. 이 말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가따의 수(su)는 ‘환희’를 뜻하고, 가따(gata)는 ‘도달하다. 이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수가따는 ‘한희에 이르신 분’이며,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法稱, 600~660)의 《논리의 정수[正理-滴論, nyāyabindu]》에 따르면, “완벽하게 도달하신, 혹은 이르신 분”이다. 이 환희의 경지를 성취하는 것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깨달음과 제거이다.
마음의 자질이 점점 향상되고 마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사라지면, 궁극적인 본성을 어떠한 장애 없이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현상의 본질을 명철하게 직관할 수 있는 능력도 점진적으로 얻게 된다. 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것은 어떠한 착각도 없이 모든 현상을 아는 지혜이다. 이는 가려질 수도 없으며, 다시 퇴보하지도 않는다.
깨달음의 모습은 모든 현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 깨달음은 다양한 현상에 대한 통찰과 그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완벽한 앎으로 이끈다. 여기서 앎이란 마치 발가벗은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현상을 직관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현상의 완벽한 앎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퇴보하지 않음[不退]’, ‘투철함’ 그리고 ‘완벽함’이라는 세 종류의 ‘앎’은 깨달음을 통한 환희 혹은 안락(安樂)의 증득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특성이다.
이 올바른 이해는 수행을 통해 차근차근 이루어나갈 수 있다. 이 이해가 점점 더 강해지고 명확해지면, 자아와 현상이 실재한다는 미혹된 믿음이 점점 약해진다. 따라서 이 이해가 자아와 현상의 실재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치료하는 해독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해독제의 효력이 정점에 달하게 되면, ‘자성(自性)이 없음’을 보는 무분별지가 일어난다.(주14) 이 지혜는 현상 그대로의 모습만을 보게 하며, 어리석음 이라는 마음의 장애를 밀어내어 번뇌를 제거한다.
이는 다양한 수준의 삼매를 통해 번뇌의 힘을 일시적으로 약하게 하는 것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무분별지를 통해 번뇌들을 제거하면 이 번뇌들은 영원히 사라진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번뇌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를 ‘불퇴전(不退轉)의 번뇌 소멸’이라고 한다. 이 수승한 무분별지가 수행을 통해 완벽해지고, 그 무분별지를 가로막던 모든 장애가 깨달음이란 해독제를 통해 제거되면, 우리는 번뇌의 제거가 완성됐다고 말할 수 있다.
불퇴, 투철 그리고 완벽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번뇌의 제거를 통한 깨달음의 세 가지 특성이다. 수가따는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깨달음과 세 가지 제거를 통해 ‘도달한 자’인 것이다.
법신(法身, dharmakāya)을 지닌 이 수가따, 즉 선서(善逝)는 보살의 열 가지 경지 가운데 첫 번째에 이르러 번뇌를 버림으로써 출발한다.(주15) 그러고 나서 그는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경지[無學]에(주16) 이를 때까지 불성을 성취하는 수행의 길을 나아간다. 그 경지에 올랐을 때, 그는 완벽하게 청정한 절대적인 공간, 절대적인 본성 그리고 절대적인 법신을 깨닫는다. 어리석음의 장애가 멀어짐에 따라 지혜의 모든 자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법신의 스물한 가지 청정한 자질들이 일어난다. 모든 장애를 제거한 뒤에 남아있는 것을 ‘원초적인 지혜’라고 부른다.
법신에서 깨달음의 측면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가운데 ‘괴로움이 소멸하는 성스러운 진리의 길[道聖諦]’의 정점이며, 제거의 측면은 ‘괴로움이 소멸하는 성스러운 진리[滅 聖諦]’의 정점이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붓다의 가르침, 즉 우리가 귀의하는 세 개의 보배인 삼보(三寶) 가운데 두 번째 보배, 법보(法寶)이다. 따라서 법신은 법보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보신(報身, saṃbhogakāya)과 화신(化身, nirmāṇakāya)은 무학도(無學道)를 성취한 분들의 모임인 승가(僧迦, saṃgha)를 구성한다. 그리고 모든 결점에서 벗어나 모든 좋은 자질들을 갖춘 붓다는 도성제와 멸성제를 갖춘 분이다. 이 세 개의 보배, 붓다, 붓다의 가르침 그리고 무학도를 성취하신 분들의 모임인 승가는 절대적인 귀의처이다.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 대승 보살들, 성문승들 그리고 홀로 깨달은 벽지불(辟支佛 혹은 緣覺)들은 수승한 모임, 또는 승가라고 말한다. 샨띠데바는 이분들과 다른 모든 공경을 받을만한 분들에게 존경의 예를 표한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뒤, 샨띠데바는 이 논서에 보살들과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 즉 붓다의 상속자들이 실천한 내용을 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붓다에게는 세 부류의 상속자들이 있다고 한다. 육신의 아들인 라훌라, 가르침의 상속자인 성문과 벽지불들 그리고 붓다 마음의 상속자들인 보살들이다. 이 세 부류의 상속자들 가운데 제일 마지막 부류를 가장 중요한 상속자라고 하는데, 그들이 모든 중생의 이로움을 위해 불성의 모든 수승한 자질을 갈망하며, 연민과 공성(空性)의 완벽한 방편들을 실천에 옮기기 때문이다. 이들이 샨띠데바가 붓다의 상속자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이며, 그들의 숭고한 수행과 실천의 길이 이 문헌에 포함되어 있다.
보살의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密) 혹은 십바라밀(十波羅蜜)의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다.(주17) 이는 다시 세 가지 수련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선을 실천하며, 중생의 이로움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샨띠데바는 이 보살의 길을 입문, 수행 그리고 성취의 세 단계로 설명한다. 입문은 보살의 원을 세우고,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이라고도 말하는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처음으로 인지하는 단계를 설명한다. 이 논서의 주요 부분은 발보리심(發菩提心), 즉 육바라밀 수행을 따르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이 수행의 목적인 불성의 성취는 제9장의 마지막 부분에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보살(bodhisattva)이라고 할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디(bodhi)는 깨달음을 뜻한다. 이는 모든 결점을 여의고 모든 좋은 자질을 구족한 상태이다. 사뜨바(sattva)는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모든 중생을 위해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모든 중생의 궁극적인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깨달음을 얻겠다고 염원하는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한다. 그들은 지혜로써 그들의 마음을 깨달음에 향하게 하고, 연민으로써 중생을 염려한다. 다른 이들을 위한 완벽한 깨달음의 발원을 ‘보리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것이 보살행의 시작점이다. 수행자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아차림을 통해 이뤄야 할 목표뿐만 아니라 깨달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중생을 돕겠다는 열망으로 ‘그들을 위해 반드시 깨달음을 성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생각이 바로 대승의 입구이다. 그러면 보리심은 두 배의 염원이 된다. 깨달음 그 자체를 이루겠다는 염원과 모든 중생을 위해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염원이다.
물론 깨달음을 얻겠다는 염원이 불분명하거나, 깨달음은 으레 성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무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고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절대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두 번째 법의 바퀴에서 배치되어 있는 공성의 이해는 아주 중요하다. 모든 현상은 본디 공(空)하며, 자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는 반야경부(般若經部)의 경전과 나가르주나(Nagārjuna, 龍樹) 등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주18) 그러나 이 순간 우리의 지각은 어떠한가?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공성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그와 정반대이다. 우리는 현상을 공하게 바라보는 대신에,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본다. 만일 배움과 수행을 통해 현상의 본성은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물방울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지각하는 것과 같다. 이 어리석음[痴]과 무명(無明)은 지금까지 탐욕과 노여움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윤회의 근원이다.
현상이 실재한다는 어리석음은 극도로 강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실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어리석음은 견고하지만 단지 우리가 제대로 인식한다면 그릇된 앎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정반대로 현상에 실재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면, 어떠한 논박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진리를 인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이가 이 이해에 친숙해진다면, 진리를 향해 무한히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해가 발전하고 점점 더 강력해지면 현상이 실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제거하는 해독제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가 이 오해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가르침이 있다.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빛난다.
그러나 [그 본성을 가리는 번뇌와 지혜의] 장애들은 우연적이다.(주19)
비록 이 장애들이 아주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마음과 본성이 그와 같지는 않다. 따라서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올바른 직관력을 키우게 되면 이러한 장애들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명료함과 앎을 특징으로 하는 마음의 본성은 흠이 없다. 마음의 본성은 어떠한 장애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정신적이든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어떠한 현상도 마음의 본성을 흔들 수 없다. 어떠한 것도 마음 그 자체의 특징인 본연의 자질을 바꾸어놓을 수 없다. 현상이 실재한다는 믿음은 잘못된 인식에 기반한 것이며, 마음의 본성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들과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온 인식의 방법 때문에 우리는 현상을 잘못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이 실재하지 않음을 간파할 수 있는 마음으로 현상이 실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부숴야 한다. 이 실재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너무나 강력하다. 하지만 마음 본연의 특징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미륵의 《구경일승보승론究竟一乘寶性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염오는 우연한 것이며
[마음 본성의]자질들은 본래적인 것이다.
이 게송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장애는 마음으로부터 떼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행하고 해독제를 거듭해서 적용한다면 분명히 없앨 수 있다. 모든 번뇌는 뿌리째 뽑힐 수 있으며, 이 번뇌들은 마음의 본성에 침투할 수 없으므로, 아무리 흔적을 깊게 남겼더라도 제거할 수 있다.
마음이 이러한 번뇌와 습관적 성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때, 비로소 모든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더 정진하면서 올바른 방편을 씀으로써 이러한 일체지를 얻을 수 있는 잠재된 힘을 깨울 수 있다. 오직 마음과 대상 사이를 가로막는 장막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현상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장막을 걷어낸다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바라봄과 인식함이 마음 자체의 특징이다. 마음이 존재하는 한, 마음의 앎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을 모든 장애가 사라질 때까지 그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깨달음을 향한 열망이 우리 안에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다른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염원에 대해서 논해보자. 이 염원은 우리가 그렇듯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행복을 원하며, 괴로움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른 존재들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면에서 연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감정들이 강하지 않고 대상의 범위도 좁을 수 있지만, 모든 이들은 어느 정도 연민의 감정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본다면, 순간적으로 ‘아 끔찍해!’라고 생각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구해주고 싶어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괴로움을 겪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듯이, 우리는 다른 이들도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지금은 아주 적은 연민과 자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연민과 자애는 우리가 닦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연민과 자애의 마음이 커져가면서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우리의 바람도 함게 커질 것이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열망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깨달음을 성취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그렇지 못했을 때 잃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설령 그 깨달음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도 말이다. 이를 위해서 윤회의 단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리고 정반대인 열반(涅槃, nirvāṇa)의 단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바바비베카(Bhāvaviveka, 淸辨, 490~570)의 《중관심론(中觀心論), madhyamakahṛdayakiārikā tarkajvālā》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그들은 [윤회의] 단점을 보기에
윤회를 피한다.
그들의 심장이 자애이기에,
열반도 그들을 붙잡아두지 못한다.
살아있는 존재의 행복을 바라는 현자는
심지어 윤회에도 머문다.(주20)
보살들은 윤회에 머문다 하더라도 윤회의 감옥에 갇혀있지 않다. 그들은 윤회의 단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다란 연민의 마음 때문에 열반에 머물지도 않는다. 이 양쪽 모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보살들은 이 둘을 초월한 깨달음을 열망한다.
따라서 우선 윤회에 무슨 문제가 잇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윤회로 인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염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윤회함으로써 겪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생명들도 윤회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열망을 일으킬 것이다.
더불어 만일 우리가 다음 생을 갈망하는 마음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현재 삶에서 무엇을 집착하고 있는지 대면해야 한다.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 마음을 길들여 가는 것이 중요하다.
보리심은 지혜가 깃들여진 매우 선한 마음의 상태이다. 여기에 자애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는 정말 대단하다. 이러한 종류의 선함과 친절함이 빠르게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며, 우리가 덜 편협해지고 덜 흥분하게 만들어 준다. 다른 이들을 만날 때, 폐소공포증을 느끼고 거리를 두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려 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 두려워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매우 유용한 마음가짐이다.
《입보리행론》은 샨띠데바 혼자만의 생각을 모은 것이 아니며, 경전을 그대로 되 읊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경전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
여기서 나는 이전에 듣지 않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게송을 지을 재주가 없다.
따라서 이 글이 다른 이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내게는 없다.
이 글은 오직 내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 쓸 뿐이다.
“여기서 나는 이전에 듣지 않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게송을 지을 재주가 없다”는 부분은 단순히 자만심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오직 지식만 쌓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샨띠데바는 새롭게 이야기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논서를 쓴 이유는 그 자신이 수행을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와 같은 지에 있는 이들의 정진을 위해서이다.
《입보리행론》의 열 장 가운데 첫 번째 장은 보리심의 특징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보리심을 닦을 예비 단계로, 수행자는 공덕을 쌓고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서 일곱 가지의 수행법, 즉 칠지공양(七止供養)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제2장 공양과 정화’의 주제이다. 세 번째 장에서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육바라밀의 수행을 통해 보리심을 증득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이 육바라밀의 첫 번째인 보시(布施)는 이 논서 전체에 걸쳐 논의 하고 있는 것이라서 특별히 어떤 장애서만 논하지 않는다. 청정한 계율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는 불방이(不放逸)과 정지(正知)의 두 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 장들은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네 가지 바라밀을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샨띠데바는 공덕을 모든 생명들의 이로움을 위해 회향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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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4) 대승불교에서 ‘자성의 부재(티베트어: bdag med, 산스크리트어: nairātmya)’는 개개인의 에고뿐만이 아니라 모든 현상에도 해당된다. 이 맥락에서 자성이란 실존하는 혹은 본질적인 실재를 뜻한다. 보살은 자기 개인과 모든 다른 현상 속에 자성이 부재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15) 첫 번째 경지: 용어 해설의 십지(十地, 보살의 열 가지 경지) 참조.
(주16) 역자주: 삼도(三道)인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중 세 번째 경지를 일컫는다.
(주17) 십바라밀은 육바라밀(용어 해설 참조)과 방편, 힘, 원력, 그리고 지혜를 함께 하는 것이다.
(주18) 나가르주나(1-2세기경)는 인도의 불교의 스승으로 반야경부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의 공성에 대한 가르침은 중관(中觀, madhyamaka) 혹은 중도사상(中道思想)의 근간을 이루었다.
(주19) 역자주: 이 게송에서 말하는 우연하다는 것은 부단한 수행을 통해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주20) 역자주: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처럼 윤회와 열반의 양 극단에 머물지 않는 무주처열반을 말하고 있다.
宗眞 寫經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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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연성 불자님
입보리행론
청전 스님 옮김
2563. 6. 25.
제1장
보리심 공덕 찬탄품
1.
선서의 법신을 지니신 보살과
예경 받으실 모든 분께 정례하오며
보살의 율의에 들어감에 [대하여] 경에서와 같이 간략하게 말하겠습니다.
2.
이전에 없었던 것을 여기에 말한 것은 없습니다.
뛰어난 글 솜씨 역시 나에게 있지 않으니
그래서 다른 이를 '위한다'는 생각 또한 저에게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바른 습을 들이기 위해 이를 짓습니다.
수연성 사경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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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심인덕 불자님
입보살 행론
석혜능 편역
2563. 6. 25
제1장 보리심의 공덕
1.예경을 드리고 종자를
말한다.
1-1
법신인 부처님과 다르마
그리고 법신의 불자로서
예경받아 마땅하신 모든 분들께 예경 드리나이다.
모든 불자의 율의(보살행)에 들어가는 수행법에 대해, 전승된 경전에 근거하여 간명하게 말하고자 하나이다.
2.겸손하게 목적을 밝힌다.
1-2
이전에 부처님이 설하시지 않은 것을 여기에 말한 것은 없으며 저에게는 능숙한 문장력도 없으니 따라서 저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는 생각보다 단지 제 마음에 익숙하게 하기 위해 이것을 짓나이다.
심인덕 사경 합장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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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법전 거사님
입보리행론(지복(至福)에 이르는 보살의 길)
샨티데바
최로덴 역주
2563.6.25.
제1장 보리심 공덕품
1-1
선서의 법신을 이어받은 아들[보살]과 더불어
예경 받아 마땅하신 모든 분들께 공경 정례 올리나이다.
선서의 아들 [보살이] 율의에 들어가는 법을
전승 경전에 근거하여 간추려 해설하고자 합니다.
1-2
이전에 없던 어떤 것도 여기에 설한 바가 없으며
능숙한 문장력도 또한 저에게는 없으니
따라서 남을 위한 생각 역시 저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제 마음에 익히고자 이 [경론]을 짓습니다.
사경자 법전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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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묵인 불자님
입보살행론광석 (上)
적천보살 게송 / 수다지 켄뽀 강해 / 지엄 편역
2563. 06. 25
제1품
보리심의 이익
1. 번역 예경과 논 짓는 인연
1) 번역 예경
1:1
頂禮本師釋迦牟尼佛
頂禮文殊智慧勇士
頂禮大恩傳承上師
爲度化無邊衆生
請大家發無上菩提心
정례본사 석가모니불
정례문수지혜용사
정례대은전승상사
끝없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모두가 위없는 보리심을 내기를 청하옵니다!
1:2
此論未宣昔所無
詩韻吾亦不善巧
是故未敢言利他
爲修自心撰此論
이 논은 어떤 특수한 창조적 견해를 설함도 아니고
시구와 운율에도 나는 정통하지 못하며
그래서 감히 남을 이롭게 한다고 말할 수 없고
자신의 마음을 수련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지었다.
※ 이것은 번역의 예경문이다.
이 논은 나흠인흠상파 번역사가 티베트어로 번역할 때 의례적으로 덧붙인 경어를 따랐다. 한문 장경 중에 구마라집 법사나 당(唐) 현장 삼장 등이 번역한 한문 번역 저술에서는 번역 예경문을 거의 본적이 없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서는 절대다수의 경 · 논 앞면에 모두 번역 예경문이 있다.
티베트 경론 앞에 번역 경례문이 부가되어 있는 것은 투메상붜자 번역사에서 비롯된다.
나중에 삼장(三藏)과의 구별을 쉽게 하기 위하여 티베트 고대역사의 3대 법왕 중에 가장 수승한 사람인 금강수(金剛手) 화신 츠야빠딩이 규정하였다. 모든 율장에 포함되어 있는 전적들 앞면에 반드시 ‘정례일체변지불(頂禮一切遍知佛)’을 덧붙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계율의 미세한 인과는 보살과 성문 · 연각 · 나한들이 선택할 방법이 없고, 오직 부처님의 지혜가 있어야만이 통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장에 속하는 전적들 앞면에 ‘정례일체불보살(頂禮一切佛菩薩)’을 덧붙인다.
왜냐하면 대다수 경전이 불타와 보살 사이의 문답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문수청문경 » · «미륵청문경» 등이다.
법(논장) 측면에 속하는 것은 앞면에 ‘정례문수사리보살(頂禮文殊師利菩薩)’을 덧붙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법은 연기(緣起)와 온처계(蘊處界) 측면에 관련된 이론과 개념이기 때문에 문수 보살의 가피에 의지하여 지혜를 열어야만 그 깊은 의미를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규정이 실시된 후 삼장을 열람하는 사람은 전적이 속한 것에 대하여 바로 일목요연해지게 되었다.
츠야빠딩은 아주 대단한 인물로 불교발전과 민족단결에 대하여 거대한 공로가 있다. 그는 토번(吐藩) 왕조의 39대 국왕으로 있으면서 많은 번역사 대덕들을 집합시켜 티베트 대장경을 거듭 새롭게 교정하였고, 불교 발전을 촉진시키는 많은 법령을 제정하고 반포했다.
그때 토번과 당 왕조 간에는 사절 교류가 빈번하였고, 또 결맹을 맺었었다. ‘츠야빠딩’은 ‘머리가 매우 긴 사람’으로 번역된다.
당시 그는 긴 머리를 하고, 또 오색 비단으로 장식하였는데 출가자를 만날 때는 바로 오체를 땅에 대고 머리카락을 풀어 땅에 깔고서 출가자가 위에서부터 밟고 지나가게 했다. 때문에 이 이름을 얻었다. 옛일을 생각하면 마땅히 오늘날의 본보기가 되므로 감동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면, 경론을 번역할 때 번역사들은 예경문을 덧붙여 제불보살의 가피를 얻어 장애되는 인연(違緣)을 없애고 원만하게 번역을 완성할 수 있었다. 비록 중국에서는 이전에 번역 앞부분에 역례(譯禮)를 덧붙이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이후 번역하는 논 앞에 마땅히 번역 예경문을 덧붙여 전승상사13)에 대한 존경 · 기원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다.
法身善逝佛子伴
及諸應敬我悉禮
원만한 불타 · 법보와 모든 승보 및 예경 받으실 모든 분께 나는 지금 공경스럽게 정례한다.
이것은 작자가 논 첫머리에 둔 예경문이다. 삼보 및 일체를 공경스럽게 예를(敬禮) 올려야만 하는 분께 정례하는 것이다. ‘법신선서불자반(法身善逝佛子伴)’의 원문 순서는 ‘善逝法身佛子伴’ 이며, 순서에 따라 불법승 삼보를 가리킨다.
‘선서(善逝)’는 부처님의 10가지 존칭 중의 하나이다.
«석량론»의 해석에 근거하면 원만단증(圓滿斷證) 즉, 공덕을 갖춘 부처님과 선서이다. 번뇌를 끊는 덕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선서는 번뇌의 장애와 아는 것(所知)의 장애를 원만하게 끊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점은 세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단엄이서(端嚴而逝) 즉, 부처님은 이미 모든 아집의 번뇌 장애를 끊었다. 예를 들어 용모가 장엄한 장부(士夫)에게 흠이 있건 없건, 이 끊어버린 덕이 원만하고 장엄한 것은 다른 외도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퇴이서(不退而逝) 즉, 부처님은 이미 20여 가지 수면에 따르는 번뇌를 끊어버렸다. 예를 들어,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는 환자가 병이 나은 후 영원히 이 병에 다시 걸리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물러서지 않는 번뇌를 끊어버린 덕의 경계는 이미 예류(預流) · 일래(一來) 등의 과(果)를 얻은 소승 수행인 경계를 초월하였다.
무여이서(無餘而逝) 즉, 부처님은 모든 소지장(所知障)의 습기 종자를 끊어버려 조금의 업장도 남기지 않으셨다. 마치 넘쳐흐르는 감로병 안에 조금의 공간도 없는 것처럼. 이러한 경계는 이미 성문, 연각의 나한을 뛰어 넘었다.
증득한 덕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선서는 원만하게 모든 지혜를 증득한 것을 의미한다. 역시 세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단엄이증(端嚴而證) · 불퇴이증(不退而證) · 무여이증(無餘而證)이 그것이다.
단엄이증이란 여래가 두 가지 무아를 증득한 것을 가리킨다.
이 증득이 원만하여 단정하고 엄격한 것이 비할 데가 없어 모든 외도를 초월한다.
불퇴이증이란 여래가 원만하게 모든 법의 실상을 증득하였는데, 이 실상의 지혜는 물러나고 전환되는 것이 없어 모든 예류 · 일래 등의 과를 얻은 소승 수행인 경계를 초월한다.
무여이증이란 여래는 이미 삼승의문(三乘義門)14)을 남김없이 증득하여 세 종성(種姓)15)의 중생을 섭수할 수 있어 모든 성문, 연각, 나한을 초월하였다.
예를 들어, 간략히 해석하면 인도 제현(帝賢) 대사는 일찍이 “선서라는 것은 모든 고통을 끊고 모든 큰 즐거움의 지혜를 증득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화지 린포체 역시 “선(善)은 안락의 보리도를 따르는 것이고, 서(逝)는 대락(大樂)의 위없는 불과를 증득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부처님 전에 공경스럽게 정례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그 공덕을 비유할 수가 없다.
«찬불공덕경 贊佛功德經» 에서, “만약 사람들이 선서에 대하여, 비록 적은 공양을 올리더라도 잠시 동안 인천(人天)의 복락을 얻고, 궁극적으로 대각을 증득한다.”라고 말하였다.
비록 석가세존이 번뇌의 때가 두텁게 쌓인 우리 중생들 앞에서 이미 열반을 보였을지라도 우리가 만약 마음속에서 성실하고 간절하게 부처님을 기억하고,
법당의 불상 앞에서 정례 공양할 수 있다면 매일 깨끗한 물 한 잔이나 꽃 한 송이를 공양한다고 해도 반드시 잠시 복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며 궁극의 원만한 불과 증득을 얻을 수 있다. «백업경»과 «대비백련화경»에 실린 공안이 아주 좋은 실증이다.
‘법신’은 여기에서 법보를 가르킨다. 법보는 법신이라고 일컬으며, 두 개의 계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궁극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승기신론»에서 말하길, “법성은 진여(眞如)의 바다와 같아 무량한 공덕의 창고이다.”라고 하였다.
«화엄수소연의초»에서도 ‘동체삼보(同體三寶)’라는 관점이 있는데, 모든 희론(戱論)을 멀리하고 궁극 적멸의 법신에는 무량한 공덕이 보관되어 있으므로 법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현종 · 밀종이 공통으로 인정한 관점이다.
둘째, «보성론 寶性論»에 ‘응지이법신(應知二法身)’ 이라는 게송이 있다. 두 법신은 증법신(證法身)과 교법신(敎法身)을 가리킨다. 그중에 교법신은 또 ‘종종법신(種種法身)’과 ‘심심법신(甚深法身)’ 으로 나뉜다.
종종법신은 즉, 큰 바다같이 넓은 교리의 불법이다.
이 교증(敎證)에 의거하여, 잠시의 법보는 일체 불의 교법을 가리키며, 바로 우리가 입으로 염하는 관음심주(觀音心呪16)가 이안에 포함된다.
적천 보살은 여기에서 모든 법보에게 공경하여 정례한다.
법보 앞에서 공경스럽게 정례하며 공양하는 것에는 무량한 공덕이 있다. 이것은 «수념삼보경»에 매우 자세한 설명이 있다.
‘불자반(佛子伴)’은 승보를 가리킨다. ‘반(伴)’ 자에는 함께하고 같은 무리가 된다는 뜻이 있다. 불자는 세 종류로 나누는데 신불자(身佛子) · 어불자(語佛子) · 의불자(意佛子)이다.
석가불로써 말한다면, 신불자는 바로 친아들 라후라 존자이다. 어불자는 여러 성문, 연각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부처님이 교법을 전달한 언어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리불 존자의 전기를 보면 존자는 그가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지혜로 화생하였다고 말한다.
의불자는 부처님의 뜻을 전한 깊은 법을 통달하여 초지 이상을 증득한 대승보살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입중론»에서 말하길, “이것으로부터 저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 ‥ 여래 가족에서 태어난다.”
승의(勝義)보리심을 증득한 수행인은 의불자이며, 진정한 대승승보이다. 여기에서 불자는 의불자로 문수 등 8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무량한 10지 이상의 대승성중을 가리킨다. 적천보살 역시 대승삼보 이외에 공경스럽게 모든 공양해야만 하는 복전에 정례한다.
예를 들면, 모든 성문 · 연각 · 불법을 열어 보인 선지식 · 불탑 등 게송 중의 ‘나(我)’는 정례하는 사람 ㅡ 적천보살을 가리킨다. 그는 몸 · 입 · 뜻으로써 정례한다.
즉, 한량없는 수로 변화한 몸을 모든 예배대상 앞에 두루 나타내어 공경스런 자세로 예배한다. 입은 무량한 소리를 내는 바다가 되어 모든 수승하고 미묘한 말로써 삼보의 공덕을 찬양한다. 마음의 뜻으로 삼보의 온갖 공덕을 생각하며 예를 올린다.
용수 보살이 “작자가 본사(本師)에 대하여 예찬하는 것은 과(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본사와 논전은 공경과 믿음이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논의 첫머리에 정례문(頂禮文)을 덧붙이는 것은 후학들에게 논을 지은 사람의 본사와 교법의 원류(源流)를 이해하여 공경심이 일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자가 불보살을 예찬하는 것은 또한 자신이 복덕을 늘릴 수 있으며, 논을 짓는데 장애되는 악연 등을 제거하는 것에도 많은 필요가 있다.
2) 논 짓는 이유
今當依敎衉宣說
佛子律儀趨行方
현재 나는 경의 가르침을 따라 간략하게 보살 율의를 믿고 받들어(信受) 행하는 방법을 널리 말하려고 한다.
이것은 이 논의 종지(宗旨)를 세우는 구절이다. 종지라는 것은 바로 논을 짓는 주제를 세우는 것이다. 작자는 말한다.
현재 나는 불타의 교법에 의거하여 간략하게 보살 율의를 믿고 받들어(信受) 행하는 방법을 널리 말하려 한다. 여기에서는 간명하게 그가 논을 지은 목적을 진술했다.
보살 율의로 들어가는 방법을 널리 펴서 말한다는 것은 그가 이 논을 널리 강설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 말은 작자가 불타 교법에 의지하여 말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스스로 발휘하여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 은밀한 뜻이 뒷사람들에게 논을 짓고 법을 강설할 적에는 반드시 의거가 있어야만 하고, 분별에 따라 억측해서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敎言)이다.
우리의 저작 · 강술(講述) · 변론은 반드시 경의 가르침에 의거해야만 하고, 여래와 그 화현인 고승 대덕이 말한 경론에 의거해야만 한다.
오직 불타와 선지식의 가르침만이 의거가 될 수 있다.
«입행론»은 «학집론»의 내용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학집론»은 105부 불경에서 뽑아내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작자는 이 논에서 자신이 불경의 가르침에 따라 간략하게 펴서 말한다고 하였다.
논을 만든 사람은 당시에 이미 공성(空性)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그러나 여전히 가르침의 전적(敎典)에 의거하여 논을 저술하였다.
마찬가지로 월칭(月稱) 보살은 «입중론» 뒷부분에서, “중론(中論)의 뜻을 널리 모았다. 용수 조사의 가르침과 같도록 이 논에서 그 뜻을 널리 펴서 말한다.”라고 말하였다.
선현 대덕들이 논을 짓고 법을 설명하는 엄격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몸소 후인들에게 시범을 보인 것으로, 수행인들이 마땅히 잘 생각하여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불자율의추행방(佛子律儀趨行方)’에서 ‘불자율의(佛子律儀)’는 바로 보살계로, 세 가지를 포괄한다.
첫째, 섭율의계(攝律儀戒)는 일곱 대중을 함께 아우르는 별해탈계로, 성죄(性罪) · 차죄(遮罪)를 끊어 없애는 율의이다.
둘째, 섭선법계(攝善法戒)는 신구의(身語意)로 많은 선을 쌓는 가르침의 율의이다.
셋째,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는 많은 선법을 끌어들이고(引攝), 지키고(護攝), 늘어나게 하는(增長) 계이다.
이 세 조항은 대승보살의 모든 수행(修學) 순서와 법문이다.
‘방(方)’은 ‘방법’으로, 보살 율의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입중론»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널리 들어가는 것(廣大入)’과 ‘매우 깊이 들어가는 것(甚深入)’ 등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널리 들어가는 것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입보살행론»은 바로 넓은 문사(聞思)의 교리이고, 매우 깊이 들어가는 것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육바라밀을 깊고 절실하게 습관 들여 닦는 것이다.
«입행론»의 게송 의의는 매우 심오하다. 나는 단지 매우 천박하게 한 번 해석하여 수행인들의 고견을 끌어내어 사고의 방향을 열 뿐이다.
수행인들이 자신의 지혜로써 반복 사유하여 만약 현생에서 이 논을 매우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임종할 때 반드시 내생에 대한 확신이 있을 것이다.
논을 지은 방법과 목적을 다 말하였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하여 이 논을 짓는 것인가?
이 논을 설하기에 앞서 나란타사의 대중스님들은, ‘이전에 설해진 적이 없는 법’을 설하기를 요구한다. 때문에 이 논은 문자 측면에 있어서 이전에 말한 적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말하자면, ‘이 논은 옛날에 없었던 것을 설하지 않았다.’
본론은 조금도 이전에 불보살이 강의한 적이 없는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용에 있어서의 겸손이다.
“시구와 운율에도 나는 정통하지 못하다.”는 문구에 있어서의 겸허이다. 작자는 그가 시문 수사와 운율 부문에서 뛰어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체 논을 열람(縱覽) 하면 게송은 정미하고 미묘한 비유로 충만해 있다. 평범하면서도 적절한 언어는 독자가 심오한 대승 교리로 들어가기 쉽게 한다. 만약 이 훌륭한 저서의 작자가 시운에 뛰어나지 않다고 말한다면, 앵무새처럼 말만 배우는 세간 시인들이 뛰어나다고 말하겠는가!
인도에서는 문자가 매우 아름다운 논전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마명(馬鳴) 보살이 지은 «삼십사본생전 三十四本生傳»은 석가불의 전기이다. 운율묘사에 있어 모범이 되는 작품으로 인도에서 매우 유명하다.
티베트 화지 린포체의 시 작품도 티베트어 시가의 모범으로 예를 들어, «연원가무 蓮苑歌舞» 등이 있다. 중국 불교의 대덕, 한산(寒山) · 습득(拾得) · 연지(蓮池) · 감산(憨山) 등에게는 모두 세상에 전해진 걸작들이 있다.
더욱이 감산 대사는 문필이 뛰어나 27세 때 지은 비명이 유명하다. “장풍에 날리는 소매를 끌고, 백운 같은 옷깃을 세우니, 그 소매를 듦에 기러기의 날개 같고, 그 옷깃을 내림에 물에 잠긴 용의 비늘 같다. 이같이 우주를 소요하고 산림으로 들어가 머무네.
이 어찌 뛰어난 장부의 영달한 아름다움이겠는가? 오직 서리와 눈에 침범되지 않는 것을 숭상할 뿐이로다.” 이는 절세의 가작이라고 부를 만하다!
위 시구에는 또 한 층의 함의가 있다. 자신이 시운에 뛰어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논을 지어야만 한다.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논을 짓는 목적은 주로 해탈을 위한 것으로 수사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논의 시구가 갖는 내용 함의가 뛰어나다면 비록 운율이 졸렬함에도 게송의 은밀함은 이 비결을 펼쳐 말하였다.
작자가 이 논에서 말한 내용은 모두 이전에 제불(諸佛)이 강술한 것으로 어떤 독창적 견해도 없다. 작자는 사문의 운율 측면에서도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감히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고 말한다.
‘미감언이타(未敢言利他)’는 원서에 ‘역무이타심(亦無利他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번역한 사람이 감히 이렇게 직역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것은 논을 짓는 자격 · 발심에 있어서의 겸허함을 서술한 것이다.
인도와 티베트에서 논을 짓는 사람에게는 세 등급이 있다.
상등은 견도위(見道位) 이상을 증득한 사람으로 직접 법성을 본 불자이다.
중등은 본존(本尊)을 보아 직접 본존의 섭수 가피를 얻은 사람이다.
가장 아래라고 해도 오명(五明)17)에 정통해야 한다.
작자는 자신이 보통 사람이어서 어떤 독창적인 견지가 없으며, 문사에도 뛰어나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감히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생각이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생에게 이익이 없다면 이 논을 지은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작자는 자신의 보리심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일어난 것은 더 늘리도록 수련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지었다고 말한다.
이 겸허한 말을 우리는 글자 그대로 직접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간접적인 설명이 있다.
논을 짓는 것은 반드시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수행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만 하고, 오염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전체 게송으로부터 우리는 간절하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 걸작이 완전히 작가 보리심의 발로임을 알 것이다.
불보살과 고승 대덕들은 매우 겸허한데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 매우 오만하다.
«부자상회경 夫子相會經» 에서는 수행인의 가장 큰 악연은 오만과 나약(脆弱) 함이라고 말한다. 한 수행인이 만약 오만과 나약 · 나태의 이 두 번뇌를 극복할 수 없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인도와 티베트의 고승 대덕들은 모두 이 게송을 해석할 때 이것이 작자가 공덕을 숨기기 위한 것으로 말하는 방편이 겸손한 것이지 누구도 그에게 중생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 가지로 겸허하기만 해도 옳지 않다. 논주(論主)는 또한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 때문에 학습하기를 원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또 아주 고구정녕하게 마음을 써서 이 논의 공덕을 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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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법을 전수해 주고 깨닫게 해주는 근본이 되는 스승.
14)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15) 성문종성, 연각종성, 보살종성.
16) 옴마니 반메훔.
17) 聲明, 醫方明, 因明,
工巧明, 內明.
묵인 사경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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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혜광명 불자님
입보리행론
김영로의 행복수업
김영로 편저
2563.6.25
001
21세기의 문맹
21세기의 문맹은 읽고 쓸 수 없는 이들이 아니라.
배우고.잘못 배운 것을 의도적 으로 잊어버리며.
다시 배울수 없는 이들입니다.
002
통찰과 해탈
매순간의 통찰(깨달음).매순간의 성장(발전).
하나하나 과거로부터 돌아서 버림이
일종의 해방이라네.
사경자 혜광명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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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편집 법전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