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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魏夢奎 선생님
문기정
魏夢奎 先生님(號 春岡, 長興人, 1927-1998)이 세상을 뜨신 지 벌써 4년이 되었다.
선생님과는 같은 마을에 거주했다는 지연에서보다는 교육계의 선배이자 내 인생의 指標를 구축해 주신 분으로서 인연이 더 깊다.
선생님의 넓으신 도량과 불굴의 개척의지, 2세 교육에 최선을 다 하셨던 생전의 모습이 불현듯 뇌리에 떠올라 선생님과의 생전에 나누었던 情分의 일단을 기록해 보고자 한다.
사범학교 3학년 시절(60년도), 모교인 웅치국민학교에서 지방실습을 받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나의 지도교사이셨다. 당시 교무주임을 맡으신 터라 실습은 주로 나 혼자만의 수업으로 진행되기 일쑤였다. 나에게는 ‘실험적 교수활동'기간이었다. 가끔 수업에 대한 강평과 조언을 해주셨고, 늘 덧붙여 교사의 참된 길(師道)을 강조하셨다. 이 때의 지도말씀을 그로부터 15년 후, 내가 부속국민학교에 재임할 때, 교생들에게 남긴 지도교사의 변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61년도 졸업 후, 약 4 개월 간 미 발령 상태로 있던 때, 선생님의 주선으로 모교에서 봉사수업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항상 함께 해 주셨고 또한 나에게 희망을 심어주셨다.
출근길에서 들려주신 덕담과 교훈은 나로 하여금 정도와 겸손을 배우게 하셨고, 浩然之氣를 연출하실 때면, 새로운 의기와 도전을 갖게 해 주셨다. '演說調'의 카랑카랑한 음성과 호탕하신 웃음소리가 지금도 내 귓전을 스친다.
그 후 1년 반 동안 첫 발령지인 조성북교 생활을 뒤로하고 모교(웅치교)에 부임하였으니, 선생님과의 동고동락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63년부터 6년 동안 선생님의 그림자를 따르며 소중한 교직 경험을 갖게 되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나의 모델이셨으며, 동반자이며, 보호막이 되어 주셨다. 비록 정규 사범교육은 받지 않으셨으나, 사범교육을 받은 분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교육활동에 애정과 열정이 넘치신 분이셨다. 건전한 사고와 투철한 행동으로 일관하신 선생님 중의 선생님이셨다. 직원간에 불화도 없으셨고, 온화하고 깊은 정으로 동료를 싸 안으셨다. 어린이를 존중하고 개개 어린이의 성취를 인정해 주셨다. 또한 지역사회의 주민과 학부형을 사랑과 탁월한 인격으로 계도하셨다.
(1987년 3월 변기수 교장선생님 정년퇴임 시 찍은 사진.위몽규,안병욱,변기수,문영수,이병 선생님괴 필자)
아침이면 나는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출근길에 동행하곤 하였다. 선생님 댁은 언제나 화평 온화한 분위기였다. 인자하신 慈堂님, 내조와 가사에 헌신 봉사하시는 사랑스런 사모님, 할머니와 부모님 본을 받아 건실하게 자라는 자녀들이 항상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 가정도 비교적 평화롭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위 선생님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선생님은 평소의 꿈이었던 농촌계몽의 길에 들어서시기 위하여 교직을 중도에 그만 두셨다. 직업을 바꾸는 일생일대의 대 決斷을 이루신 것이다. 자수성가하여 부농을 이루고 계셨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농촌생활 깊숙히 들어가 흙과 벗하며, 자연과 대화를 나누면서, 낙후된 농촌을 부흥하시려는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소위 '농업신장개업'으로 영농 수범을 보이며 마을을 선도하면서, 전통적인 유교적 사상을 연구하고 강화하여 지역사회를 계도하는 즐거움을 찾으신 것이다.
그 동안 접어두었던 漢學을 재개하시면서 동양철학을 익히고, 선비로서의 道學에도 전념하셨다. 휴가철에 가끔씩 선생님을 방문하면, 반갑게 맞아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君子上達, 小人下達(군자는 날마다 위로 향하여 나아가며, 소인은 날마다 아래를 향하여 나아간다.)을 좌우명으로 삼고 늘 나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선생님은 또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도 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을 외고 계셨다. 이런 사상과 덕목으로 평생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셨던 것이며, 그러한 공자의 가르침을 손수 실천하시고 가족과 친지들에게 이를 권장하셨다.
4년 전 4월 어느 날, 선생님이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는 비보를 받고 茫然自失한 마음으로 弔問하였다. 순규 형(작고, 위 선생님 제씨)과 자녀들의 손을 붙잡고 우리는 선생님의 遺訓을 되새기며 한동안 애통한 마음을 나누었다.
魏夢奎 선생님!
영원히 잊지 못할 교직의 스승이며 일생동안 삶의 등대가 되어주신 선생님.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을 통하여 바른 교육, 참 스승 상을 정립하신 유능한 교육자.
농촌을 계도하고 지역주민을 계몽하신 常綠樹로서의 선생님.
흩어진 윤리도덕을 재건하고 순박한 인심을 일구어내신, 君子로서의 선생님.
선생님 想念에 젖어,
오늘, 더욱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2002. 5.15文淇政 記)
斷想의 글들을 블로그에 담으세요.
文淇政
요사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 다음, 더플 등 대형 사이트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열린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는데, 마이홈이나, 카페, 블로그. UCC 등 다양한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여 가족홈페이지, 강의 홈페이지, 가족신문형 블로그를 만들어 가족들 또는 학생들과의 교감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간 이 곳에 올린 내용 중 제암교우님들께 공개해도 무방한 글들을 몇 편 선보이려 합니다. 斷想의 글들을 블로그에 담아보시기를 기대하면서…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
2004/05/13 07:38
지난 5월 8월은 어버이날, 오는 15일은 스승의 날이니 자식들이나 제자들의 처신이 좀 어려울까!
우린 부모님을 여의었고, 왕래하는 스승님도 몇 분 안 된다. 우리 아이들 넷도 모두 어버이날, 최선을 다하여 축하해 주었다.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딸들은 시댁에, 아들은 처가댁에 자식 된 도리를 다하였다. 아름다운 일이요 대견한 모습들이다.
우리 부부는 아침 일찍 부모님 산소를 찾아 카네이션 화분을 심어드리고 묘전에 잡초를 뽑으며, 생전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잠시 묵상하였다. 방안에 모신 부모님 사진틀, 다행한 일이다. 형상이라도 자주 뵙고 있으니…
스승의 날을 맞으며, 생존해 계신 스승님들에게 축하 카드를 전송하려 했더니 우정사업부(가장 정보화가 잘 되어 있어야 할 정보통신부) 홈페이지가 그 부분만 작동이 안 된다. 하는 수 없이 스승님들의 사진을 찾고, 조그만 글귀를 만들고, 내 작은 사진도 찾아서 축하와 안부와 기원을 담은 메시지를 완성하였다. 오히려 정성이 든 느낌이다. 세 겹으로 접어서 밖에는 ‘스승의 은혜! 감사합니다.’ 라고 적고 펼치면 스승님 내외분 사진, 축하의 글, 나의 근황 사진 등 3단으로 엮어, 유아교육과 특수제작 봉투에 담으니 꽤 잘 꾸며졌다. 마음뿐인 한통의 편지이지만, 스승님들에게 감사의 뜻과 조그만 위안이 전달되었으면 한다.
선생님과 케익을
2004/12/01 16:38
3년 동안 지도했던 반 학생들이 케익에 촛불을 켰다.
이 시간이 졸업을 앞 둔 마지막 수업이라고.
케익까지 준비할 이유가 없다는 선생의 사양도 아랑곳 하지도 않고
이젠 스승의 은혜를 제창한다.
선생은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지난 일들을 머리에 그리고 있다.
‘얘들아, 나가서 놀자. 봄 하늘이 부른다.
얘들아, 산에 오르자. 무등산이 부른다.
얘들아, 모두 모여라. 빨간 철쭉이 부른다. 사진 속에 담아보자.
얘들아, 네 앞길을 밝혀보아라. 너의 힘으로 밝혀가야지. ‘
했던 일들 말이다.
노래 소리가 멈추고 박수가 퍼진다.
선생은 그제야 말문을 연다.
이제,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쌓인 정분은 영원히 간직할 것이라고.
좋은 제자들을 만나 선생은 이날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40년 전 교정에 서서
2005/05/02 11:05
지난 4월 27일, 옛 제자들의 모임인 삼오회 회장단이 광주 시내 한 음식점에서 나와 최국인 선배(당시 동학년)를 초청하여 5월 1일 스승과의 만남을 갖자는 뜻을 알려왔다.
웅치초등학교 35회 졸업생들의 모임이다.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두 번째로 근무하게 된 학교(모교)의 제자들이며 모교 부임과 동시에 2년 간 6학년을 담임한 후 1965년도에 5학년 담임에 이어 줄곧 6학년까지 2년 동안 맡았던 내 교직생활 중 가장 열성적으로 지도했던 학생들이기도 하다. 무려 40년 전에 만난 제자들인 것이다.
지난 2002년 추석명절을 맞을 무렵, 이 중 웅치면 청년회 지도자격인 박순선군(지금은 삼오회 광주 전남 회장)이 중심이 되어 KBS 6시 내 고장 '고향배달'의 주인공으로, 담임이었던 나를 지목하여 마을의 풍년을 구가하며 곱게 가공한 올벼쌀과 고향 막걸리, 송편을 담아 우리 집까지 배달했던 그 제자들 모임이다.
그들의 계획은 이러했다. 현재 진행 중인 삼오회는 서울, 광주 전남, 부산이며 이번 참석 범위는 서울, 광주, 보성, 부산의 남녀 회원들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4월 30일(토)에 서울 친구들이 광주에 와서 일박한 후 5월 1일 9시 광주 친구들과 합류하여 부산, 보성 웅치 친구들과 10시 30분에 웅치 교정에서 만나고 11시에 선생님 두 분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며칠 동안 깊은 감회와 기쁨 속에서 옛 제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순진무구했던 어린 제자들의 모습에 스스로 안온함과 그리움을 함께 하였다.
강산리에 살었던 김영래 정옥식을 비롯한 8명, 대산리의 김진수 김춘모 박순선 백옥태를 비롯한 11명, 부왕리에 백형술을 비롯한 4명, 서동리 손정기 이세원을 비롯한 9명, 용반리 김준량 마철현 박승재 백학순 안병석 안찬균 임재석 임홍기 최효진을 비롯한 15명, 유산리 김선회 선병화 문종인을 비롯한 7명, 중산리 백형승 변연수 변재수 안세련 이윤섭을 비롯한 11명, 봉산리 위정길을 비롯한 3명, 약산리 문건수를 비롯한 4명. 옥암리 박우금군 등 무려 73명의 제자들.
아내와 함께,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기 위하여 9시 30분에 광주를 출발하였다.
5월 초 하루.
신록 속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는 노랗고 빨간 봄꽃들이 시골 길 산야를 뒤덮어 고향을 찾는 이방인에게 새로운 정취를 풍기며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으며 가는 곳 쉬는 곳마다 재잘대는 산새 소리도 어찌 그리 정겨울꼬.
10시 50분에 웅치초등학교 정문에 도착하고 보니 제자들은 이미 도착하여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제자들을 졸업 후 처음 만나게 되니 낯이 설지만, 40년 전의 옛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손을 잡고 흔들면서 힘주어 이름을 불렀다. 얼마만의 호명인가. 아직도 그 옛날 작은 교실에서 근엄한 교사의 얼굴을 바라보던 어린 학생시절의 자태를 잃지 않았으면서도 머리에 흰털이 희끗희끗한 장년이 되어 나타난 늠름하고 당찬 모습에 한결 어깨가 가벼움을 느꼈다.
‘김영래 정옥식 김진수 김춘모 박순선 백옥태 백형술 손정기 이세원 김준량 마철현 박승재 백학순안병석 안찬균 임재석 임홍기 최효진 김선회 선병화 문종인 백형승 변연수 변재수 안세련 이윤섭 위정길. ’
그리고 당시 2반 여학생들 17명. 총 42명이 모였다.
최국인 선배님 내외, 우리 내외 그리고 제자들이 교문에 새겨진 교가를 제창하고, 지금은 헐어버린 옛 교실 터를 지나 대운동장을 향했다. 재학 시절, 후편에 대 운동장을 만들고 앞면 운동장을 정원화 하면서 많은 노력동원을 했던 기억, 글씨를 잘 못 써서 숙제를 소홀히 했던 제자들이 벌 받았던 기쁜 추억, 때론 공부하기 싫어 사보타주했던 여학생들의 우스갯소리…. 시끌벅적 학창시절을 더듬으며 교정을 걷자니 불현듯 그 옛날 그 모습에 빠져 모두들 숙연해지기도 했다.
제암산 휴양림 안에 자리 잡은 제암산 회관(박순선 경영) 연회장으로 이동하였다.
임홍기 남자 총무가 사회봉을 들고 전·현임 회장단 총무단을 소개하고 그 간의 모임 경과보고를 마친 후 은사들에게 주는 꽃다발, 정이 담긴 선물, 약주 증정 순으로 진행되었다.
다음은 은사님 말씀을 듣기로 한단다.
"고맙습니다. 40년 전 제자들이 나와 내자를 이렇게 초청하여 융숭한 대접과 경의를 표해 주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게 되었습니다. 당시 웅치교에 부임하여 나의 꿈을 펼치며 교직에 보람을 느꼈던 포근한 보금자리인 이곳에 다시 와서 보니 강산의 변화에 새삼 놀랐습니다. 여러분과 작별한 이후 나는 보성관내에서 오래 근무를 하다가 시군 장학사, 도장학사를 거쳐 목포관내 두 곳의 초등학교장을 맡은 후 최근에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웅치의 관광자원이 이렇게 개발되고 또한 여러분이 이렇게 장성하였으니 웅치의 비약적인 발전이 또한 기대됩니다."
이상은 최국인 선배님의 말씀 요지.
나도 한마디.
"40년 전의 제자가 당시 담임을 초청하고 이렇게 환대해 주어 우리 내외는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당시 나는 23세 젊은 교사로서 모교에서 온 정열을 다 하는 것만이 교직의 정도라고 믿고 여러분과 2년 동안 최선을 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교를 떠난 후 광주교육대학부속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젊은 시절 무모하게 교육에 임했던 미숙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현재 대학 유아교육과에서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는 직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이제 40년이 지난 오늘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함과 대견함을 아울러 느끼고 있습니다. 부디 모든 제자들의 가정에 행운이 같이 하기를 빕니다."
연회장에 모인 제자들.
"선생님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
"저도 한잔…."
정에 취하고 다향에 취하고 약주에 취하여 두 손들을 부여잡고 혹은 어깨를 끼고 세상살이며, 학창시절의 이야기에 젖어들 무렵 우리 두 담임들은 자리를 비워주기로 했다.
그러나 요놈들은 마지막까지 기념사진을 찍으며 떠나는 아쉬움을 남겼다.
아내와 나는 광주로 돌아오면서 새삼 교직의 행복함을 이야기했다.
내 마을 뒷산 형제봉을 오르며
2005/05/08 10:49
5월 7일 토요일.
지난 주말, 형님과 함께 선조 묘소를 둘러보며 부분적으로 사토를 하거나 표석을 세우자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오늘 또다시 백부님 산소가 모셔진 내 고향 마을 왕초를 찾아 오랜만에 추억에 서린 형제봉에 오르기로 하였다.
우리 내외는 산소에 들러 재배한 후, 새로 개설된 임도를 따라 형제봉에 오른다.
형제봉은 불과 364m 밖에 되지 않은 낮은 산이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 형제봉 아래에서 소를 뜯기고 개구쟁이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장난하던 옹골 위에 우뚝 선 두 개의 봉우리이다.
형제봉은 우리 마을 왕초와 산 뒤의 삼수 마을을 굽어보며 높고 그윽한 정기를 내뿜는 기세 좋은 산이다. 형제처럼 나란히 옆에 자리를 하고 제암산을 건너다보며 우리 마을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어렸을 때였지만 우리는 자주 형제봉에 올랐다. 멀리 제암산을 향하여 임금님의 사랑과 정기를 맛보며 형제봉의 포근함에 안겨 마냥 큰 소리 내어 '야호'를 합창하곤 하였던 호연지기 산이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른 정상. 이젠 온갖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망하기 어렵기는 해도 제암산, 일림산, 율포 앞 바다를 굽어보며 그 때 그 시절의 친구들과 동네 어르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보았다.
정상에 선 아내와 나는 우리 집안의 형제 태생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웃기도 하였다. 우리 집안 남자들의 가계를 보면, 할아버님께서 백부님과 아버님 두 분을 두셨고, 아버님은 우리 형제를 낳으셨고, 형님은 또는 형제를 두셨고 나 또한 형제를 두었으니 왕초에서 나서 자란 우리 가계도 형제봉의 뜻이 아닌가고.
내 고향 옛 마을을 찾은 방랑객. 아무래도 나이 좀 먹었나보다.
강천산과 진도 신비의 바닷길
2005/07/25 11:29
1주일 전에는 전라북도 순창군립공원 강천사, 그제는 남쪽 신비의 바닷길을 체험하게 되었다.
요새는 시군구마다 축제일색이어서 그동안 평범하게만 여겨졌던 고장의 특색을 살려 전국적인 행사를 갖고 있으니, 찾는 사람도 즐겁고 주최 측도 손님 맞을 채비에 바쁘고도 기쁘다.
순창의 강천사는 본디 깨끗하고 시원한 계곡으로 이름이 있고, 우리 광주와는 불과 40km 밖에 있으니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7월 17일 제헌절에는 예상치 못한 불볕더위가 닥쳐 도시민을 괴롭힌 날이었다. 그러나 우리 내외는 간단히 행장을 꾸려 강천산에 왔으니 더위를 모르고 하루를 보낸 셈이다.
병풍폭포에서 강천사에 이르기까지 도로에 새로이 모래를 얹어 신발을 벗고 다니도록 배려해 주어 고맙기까지 하였다. 구름다리를 거쳐 전망대에 이르는 동안 온몸이 땀에 젖기는 하였어도 좌우를 둘러 녹원이요 아래를 굽에 비경이니 이만한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또 찾으랴.
신선계곡에서 발을 씻고 다시 병풍폭포수 앞 정원에 앉았다. 폭포수에서 날리는 이슬의 시원함에 모이는 사람마다 탄성이요 만나는 사람마다 덕담이다.
우리 집 손자들과 여름에 한번 다녀가야지. 정욱, 정균, 찬혁, 효림이 물장구치고 헤엄치고 깔깔대는 모습을 그려보니 저절로 시원하고 유쾌하다.
진도냐, 고흥이냐. 토요일(7.23) 아침 준비된 1박2일 코스를 보면서 우리 내외는 진도를 택했다. 왜냐하면 진도는 자주 가는 곳이기는 해도 찬찬히 드려다 보지 못한 곳도 몇 군데 있고, 해안도로도 시원할 뿐 아니라, 시화와 풍류의 고장 정취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용하게도 이 날이 신비의 바닷길 축제 한 가운데 날이었다. 첫 날은 행사개막이기는 헤도 금요일이라 손님이 적었지만 이 날은 각종 축제가 가는 곳마다 풍성하고, 특히 저녁에 이루어지는 축하무대 프로로 꾸며져 있어 진도를 답사지로 택한 걸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광주(오전8시)-목포-해남문래 우수영을 지나 진도대교, 녹진권을 지나 곧바로 신비의 바닷길 안내 표지에 따라 가계해수욕장 주차장애 닿았다.(오전 10시30분)
해양 생태관, 수석전시관, 모래조각전, 돌아온 백구(진돗개) 축하 게임장, 진돗개 묘기, 유기농법 체험장, 홍주 시음, 떡방아 체험, 각종 향토음식 축제, 뽕 할머니 기원 등 갖가지 행사를 둘러보고 오후 2시부터 이루어지는 회동 축하무대-관현악의 어울림, 남도 판소리, 진도아리랑, 바라승무, 강강술래- 등 오후 6시까지 이어지는 바닷길 축제 관람. 6시부터 1사간 반 동안 신비의 바닷길 체험(회동-모도까지 편도 2.8km). 저녁 8시 가계특설무대에서 어우러진 축제 한마당-청소년 댄스페스티벌, 진도노래와 춤, 성인가요, 락 음악, 레이져 쇼, 폭죽쇼 등등 밤 11시가 넘도록 이어지는 흥겨움에 우리 내외는 취해 있었다.
이튿날에는 이순신장군 명량대첩비, 용장산성, 운림산방(새로 단장한 소치기념관, 진도역사관이 색달랐음), 남도석성을 둘러보고 다시 진도대교를 향했다.
보배 진, 섬 도. 즉 보배로운 섬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돈이 되는 축제에는 신경을 많이 쓰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정기를 아우르는 역사의 현장에는 크게 손이 미치지 못한 점이었다. 차차 의로운 진도의 자랑을 돋보이게 할 날이 오리라.
42년 전 제자의 초대
2006/05/12 15:06
교직 3년을 경과하고 1964년에 맞이했던 제자들이 어언 50대 중반이다. 사회에서 중견인사로 성장하고들 있으니 제자들의 소식을 들으면 반갑고 대견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시키려는 열망 속에서, 열정과 기대만으로 최선을 다한 나머지 그들에게 온정적인 지도나 생각을 함께 하는 감정이입이 부족했을 때였다. 다행하게도 그 제자들이 요소요소에서 유능한 인재로 성장하고 있다.
선생님을 하늘 같이 생각하며 지금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초청해 준 제자(전라남도 교육청 중등교육과 장학관 박문재군)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아내의 행갑(幸甲)
2007/02/13 14:58
3년 전, 내가 세상에 나온 지 60돌을 맞으면서 '내 삶은 비록 작지만 몇몇 행복한 일들이 있었기에 감히 행갑(幸甲)'이라고 해 둔 기억이 난다.
아내가 태어난 지 어언 60돌을 맞게 되어, '축 환갑', '축 회갑', '축 화갑' 중 어떤 축하메시지를 보낼까 궁리해 보았지만 죄다 마땅하지 않아서, 아내에게 '축 행갑'이라고 하려 한다.
요새 환갑을 쇠는 분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아내에게 이 날은 특별한 날이다. 자식들 넷이서 성가를 하고, 손자녀들이 각 가정에 웃음을 주고 있고, 더욱이 남편인 내가 아직도 현직에 있으면서 건강하게 옆자리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평범한 가정의 내자로서,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대로 작은 보람들을 모으면서 행복을 쌓아 온 터라 이 날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아내가 말했다.
'작은 소망이 하나 있긴 하다. 우리 자식들과 큰댁 조카들이 한 자리를 하여 음식이라도 나누며 그 동안 소원했던 형제애를 되살려 볼 수 있다면 그 만남이야말로 진정한 '축 행갑'이 아니겠느냐.'
아름다운 생각나무에 싹이 터서 잎사귀와 열매를 맺었던 지난 1월 27일의 '서촌일가 형제들의 만남'.
그 날 우리 서촌일가가 다 모였다. 지난 시절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며 어릴 적 사촌들의 추억을 노래하고, 정겨운 이야기와 흥겨운 술자리로 모두 하나가 되었다.
아내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졌다. 그날의 모습을 되돌려 보면 한결같이 웃음이요 하나같이 즐거움 그것이었다.
다만 이미 타계하신 형수씨만 (영상으로는 만나 뵈었지만 현신으로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형님은 눈물을 보였다. 그러시면서도 행복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시려고 애를 쓰고 계셨다.
'섣달 스무 이렛날'(양력, 내일 2월 14일)
생일을 맞으면서 아내는 더욱 새로워 보인다. 설날 들이닥칠 자식 손자들을 맞이하느라 쉴 틈이 없다. 집안 정리, 설날 준비, 손자들 화제 모으기에 바쁘다.
정욱 정균이의 으젓한 모습과 웃음을 자아내는 코믹한 언사, 찬혁 효림의 4살 박이 개구장이 장난, 토마스와 주몽을 사랑하는 녀석들, 한림군의 걸음마와 근엄한 자기주장, 선아의 낯가림과 날로 늘어가는 옹아리…
그 동안, 결혼기념일도 아내의 생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나에게 적잖은 불만이었으리라. 그러나 행갑을 맞는 아내에게 이번만은 꽃을 든 남자가 되어 축배를 올리며, 온 가족과 함께 행갑 축하노래를 제창하리라. (2007.2.13)
캄보디아/베트남
2007/03/14 18:28
지난 방학 중, 옛 친구들(광주교육대학교 부속초등학교 근무 동창생 4인)과 동부인하여 캄보디아/베트남을 들러 보았다.
누구나 가보고 싶다는 앙코르와트와 하롱베이가 주된 여행지.
캄보디아 프놈펜의 왕궁과 씨엠립의 앙코르 유적을 둘러보고,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로 직행하여 그 나라 지도자인 호치민의 유적과 민족 대학살의 현장 킬링필드의 아픔을 살펴 본 뒤. 삼천 여 개의 섬들로 구성된 하롱베이를 관광하였다. 다녀온 뒤 많은 느낌을 갖게 하는 여행이었다.
캄보디아는 입헌군주제 민주국가이며,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한때 캄보디아는 동남아 의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고 노예를 부리던 강대한 왕국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역작 앙코르톰이나 소야바르만 2세에 의해 30년간 지어진 앙코르와트의 규모만 보더라도 수많은 인부와 석공을 부리던 대 왕국의 위용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앙코르 유적의 장대함에 대하여는 현장을 체험하지 않은 분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앙코르톰을 구경하러, 오전 6시 40분에 현장 입구에 도착하였고, 구경하고 빠져 나온 시각이 정오였다. 도중에 버스를 타고 이동한 시간이 있어서 그래도 빨리 둘러 본 셈이다. 오후 내내 앙코르와트를 둘러보며 벽화에 그려진 역사와 건축물의 위용에 빠져들어 우리 일행은 감탄할 뿐이었다.
광활한 영토와 속국을 가졌던 캄보디아, 그러나 그들에게는 역사를 기록할 문자가 없었다. 영토를 보존할 군대의 힘이 부족하였다.
캄보디아 지배를 당했던 민족들이 독립하여 오히려 캄보디아로부터 조공을 받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나라가 베트남이다.
베트남 국민들은 오전 7시까지 일터에 나간다. 교통수단은 대부분 오토바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1인 1 오토바이 나라이다. 자연히 기동력이 좋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승용차보다도 요긴하게 활용한다. 오후 4시가 되면 퇴근. 저녁 여가를 진하게 즐기는 사람들이다.
오래 전 대우 김우중 회장이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묵을 만한 호텔이 없음을 보고 초대형 호화 빌딩을 건립하여 이 나라에 기증했다 한다. '대우'야 말로 베트남 국민들의 우상이었다. 심지어 모든 영업용 택시는 대우차(소형)로 지정하였고, 시내를 오가는 한국 차는 대우차 밖에는 본 기억이 없다. 그런 형편이어서 그런지 월남 전쟁의 상처와 아픔도 잊은 채 한국 국민을 지나칠 정도로 존경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베트남 처녀들이 한국에 시집오기를 희망한단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거대한 도약을 향하여 꿈틀거리는 모습들. 비록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이젠 사유재산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생활의 자유도 많이 주어지는 나라 베트남.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를 지녔건만 세계 10대 빈국에 빠져든 캄보디아와 전쟁의 아픔을 딛고 도약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도전하는 베트남은 많은 대조를 이룬다.
때마침 베트남 수상이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방문행렬을 영접하는 군인들과 길게 줄지어 동원된 학생들을 보면서, 같은 지역에서 분쟁을 애써 봉쇄하고 친선을 유지하려는 안간힘을 보이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되도록 해외여행을 자제해야겠지만, 이번 여행 중 느낀 강력한 역사적 메시지를 우리 조국애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