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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무 교수 산문집
추억이 강물 되어
김 병 무
출 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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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글을 쓰면서-배우고 위하고 사랑하면서
Ⅰ. 여울지며 다가오는 그리움
Ⅱ. 사랑이 어우러진 시간들
Ⅲ. 우정의 물결은 이어지고
Ⅳ. 가족의 정을 쌓으면서
Ⅴ. 오늘도 행복을 가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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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여울지며 다가오는 그리움
하얀 꽃 들녘에서
열 림
살며시 나타난 미소
마음의 문이 열리고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다가오는 청초한 눈빛이
반가움에 젖어들어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다.
그 리 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애수 어린 눈망울이 다가왔다.
떠날 듯 다가오는 포근한 정이
한 폭의 그림 되어 다가온다.
조용히 내려앉는 포근한 미소
영롱한 빛이 되어 다가온다.
어둠 깔린 해변에서
옛 친구들 모여 들어
기쁨이 더해졌다.
반가운 얼굴에는 옛정이 살아나고
이어지는 대화는 추억을 불러왔다.
노을 진 해변 걸으면서
마음은 나래를 펼치면서 꿈속으로 향했다.
적막을 뚫고
어둠 뚫고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삶을 노래하는 생명의 소리 들려온다.
밝은 미소 잃지 않는 청아한 모습이
영롱한 빛이 되어 가슴 속에 스며든다.
영원으로
지나간 시간들이
강물 되어 흘러간다.
굽이쳐 돌아가며
영원으로 향한다.
청초한 모습
가슴에 안겨진
청초한 모습이
애수에 젖어있는
안타까운 모습이
영원으로 향하면서
가슴에 묻혀 진다.
산성의 추억
산성의 밤
밤의 적막 헤치고
조용히 다가오는 소리
가슴속 깊숙이
여울지며 스며든다.
한포기 들꽃
들녘에 피어 있는
한포기 들꽃
꾸밈없는 그 모습
그지없이 아름답다.
바람이 불어 오면
옷깃 여미며 다가온다.
그리움
해맑은 창공에
예쁜 모습 떠오를 때
마음은 구름 타고
그 모습 향해 달려간다.
공항의 인연
인연의 재회
교수님! 저 공항에 있어요.
공항에 왔다가 일 다 끝냈어요.
반가움에 넘친 모습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면서 산성으로 향했다.
불그레한 얼굴을 마주보면서
우산을 받쳐 들고 산성 길을 걸었다.
공부 더 하고 싶어요.
그 마음 갸륵해서 가슴이 뭉클했다.
산성의 오후
부슬비 내리는 산성의 오후
시선이 마주칠 때 두 볼이 붉어졌다.
지난날 생각하며
비오는 산성 길에 이야기 꽃 피어났다.
남쪽으로 떠난 사람
시간의 아쉬움을 가슴에 안고
남쪽 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떠났다.
휴대폰을 울리는 예쁜 음성
교수님 지금 가고 있어요,
가서 전화할게요.
그래, 잘 가요
아련한 모습
오지 않는 그 날이
그리움 되어 흘러간다.
아련한 그 모습이
강물 되어 흘러간다.
허공을 맴도는 추억의 시간이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준다.
금강을 바라보며
만 남
여린 자태에
따뜻함이 있었고
반짝이는 눈망울에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애틋한 삶
삶의 열정 가득 안은 채
참으며 기다리는 애틋한 그 마음이
가슴을 울리면서 스며든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적막한 대지위로
지친 몸 이끌며 달려온 그 삶이 장하고 의연하다.
연민의 정
가슴이 저리도록
안타까워진다.
어려운 길 가는 삶이
너무나도 애처롭다.
티 없이 맑은 마음
흐려질까 두렵다.
쿠스코의 연민
Peru Kusco에서 만난 Puno의 소녀
세월은 흘러
꿈속으로 향해도
예쁜 잉카의 소녀는
꿈속에서 영원한 미소를 준다.
세월은 흘러
영겁으로 향해도
다정했던 잉카의 소녀는
세월 속에 살면서 영원한 미소를 준다.
Peru Puno 의 Magaly를 생각하면서
강물처럼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소리 없이 스치고 있다.
잔잔하게 이는 바람처럼
살결을 스치며 지나간다.
흐르고 스쳐가도
끝이 없이 이어진다.
착한 삶
바라만 보고 있던 그 모습이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진다.
오가며 나누던 대화
그리움의 메아리 되어 살아난다.
아름다운 인연
안녕하세요
함께 여행을 하게 되어 무척 기대됩니다.
여행준비 하시느라 힘드시겠어요
혹시 저희들이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아울러 새해인사 드립니다.
2005년 기쁨이 가득 찬 한 해 되시기를 빌께요.
늘 건강하세요
인 연
맑은 물방울 같은 작은 글귀 하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작은 떨림 하나도,
평생을 이끄는 건강한 인연으로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우리 삶에 작은 힘이 되어주고,
의미도 주고, 꿈을 이루게도 합니다.
이번 필리핀 여행에서 만난 모든 분들과 건강한 인
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3박4일 동안 너무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약 속
봄은 어느 날 갑자기 덜렁 오지 않고 올 듯 말 듯,
내줄 듯 말 듯, 멈칫멈칫 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간절하고 매력이 넘칩니다.
그런 봄 변덕을 탓하지 말고 조금 느긋하게 기다리면
어느 날인가는 완연함 봄볕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를 한웅큼 보게 되겠지요.
뵐 수 있는 기회 기다리겠습니다.
편한 시간 알려주세요.
날씨가 추워요
오늘 출근길은 안개가 많이 끼었어요
그리고 날씨가 추워요
건강조심하시고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은 깊어가고
가을이 점점 깊어가고 있어요.
외로움도 따라 깊어지네요.
외로움을 깊게 하는 가을
이제 물러가면 좋겠어요.
새가되어 돌아오고
허전함의 공간이 쉬지 않고 커져서,
혼자서 안고 있는 외로움의 푸념이
창밖의 어둠 향해 날아갑니다.
날아간 외로움이
메아리 되어 돌아 올까봐
창밖의 허공을 바라봅니다.
허공 속에 예쁜 새 한마리
메아리 되어 가슴에 안겨 옵니다.
금강변의 추억
금강 변의 바람이 찼는데
감기 걱정 되네요.
항상 건강 조심해요.
어제는 즐거웠어요.
추워서 걱정을 했는데...
따뜻한 차와 따뜻한 잠으로 ...
오늘도 거뜬하게 일어났습니다.
아침저녁 날씨가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그리고 늘 행복하시길...
학장님의 향기
학장님 홈페이지에 잠깐 머물렀다 나왔습니다
구석구석 보면서 학장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신 길
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열심히 살아오신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학장님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사람의 향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의 향기는 향수처럼 만들어진 냄새가 아니라고
합니다. 살아온 대로, 걸어온 대로 저절로 안에서
풍겨나오는 ...
그 향기는 숨길 수 없고, 또 멀리 가도 오래 남는
다고 합니다.
꽃향기나 향수냄새는 바람결에 따라
떠다닌다고 해요.
그러나 사람의 향기는 마음에
머물러 마음을 움직인다고 해요.
학장님의 향기 또한 느껴집니다.
그 향기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며...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자연과 사랑이 하나 되어
장흥의 숲 내음
녹음이 짙어가는 장흥의 계곡으로 차를 몰았다.
아련하게 여울져 흘러가는 영겁의 세월이 잡힐 듯이 스쳐서 지나갔다.
순간이 아름다워 순간만을 음미하면서 다시 찾아 올 기약 없이 홀연히 떠나왔다.
강촌의 구곡폭포
가을 내음이 묻어나는 9월의 어느 날에 경춘선 열차에 몸을 싣고 강촌의 구곡폭포로 향했다.
입구의 정취에 흠뻑 빠져서 폭포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폭포의 절경에 심취해보고, 고개를 넘어서 문배마을에 가서 문배마을 별미로 시장기를 채웠다.
자연이 아름다워라!
시간이 아름다워라!
오이도 해변
봄의 기운이 대지에 펼쳐지고 있는 4월의 어느 날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오이도’를 찾아갔다.
서해안 바닷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삶을 찬미했다.
사랑의 순간만을 가슴에 담고, 다시 찾을 기약 없이 발길을 돌렸다.
소요산 단풍길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소요산 단풍 길에 올랐다.
학창시절 추억을 회상해 보면서, 많이 변해버린 소요산 입구 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옛날보다도 화려해진 길 양편의 풍경들을 헤아려보면서 단풍이 곱게 물든 소요산에 접어들었다.
지난 날 가슴 설레며 찾아왔던 그 길이
오늘은 마음의 안식을 찾으면서 길을 걸었다.
인생을 찬미하며 시간의 아쉬움을 느끼면서 오래도록 걸었다.
경춘선 굴봉산
지도에서 찾은 굴봉산,
경춘가도에서 멀지 않아 찾아가기 쉬웠다.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춘천행 기차를 탔다.
굴봉산역, 시골역의 정취를 느끼면서 봄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밭 언덕 길을 걸었다.
봄이 되면 나물 캐러 오면 좋겠다고 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오자고 했다.
가냘픈 뒷모습이 영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유리 계곡
여름의 계곡이 푸름을 더해주고 있을 때 수유리 계곡을 찾았다.
녹음 속에 휴식을 즐기는 모습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계곡의 물줄기가 맴돌아가는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잡히지 않고 가물거리는 먼 훗날의 시간들이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남산에 올라
가을의 남산,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중턱에 자리 잡은 전시관에 들려서 작품들을 관람한 후에 정상으로 향했다.
어쩌다가 외국친구들이 오면 안내하던 남산 길,
세월이 더 지나가기 전에 찾아보고 싶었던 이 길이 더없이 정겹게 느껴졌다.
낙산의 언덕길
낙산의 언덕길, 옛날에는 바위산으로 알려졌던 산이다.
이제는 자연의 운치를 살려서 새롭게 꾸민 아름다운 산으로 변했다.
오후의 햇살을 받으면서 낙산의 성곽 길을 걸을 때에
아련한 사랑의 향기가 전신을 감싸 흘렀다.
나비야, 잘 가!
- 나비(고양이)와 애틋한 정을 그린 이야기 -
깊고 깊은 정이 서린 무언의 대화 12년,
눈빛에 어려 있던 애틋함이 지금도 가슴을 저며 온다.
고통을 참으면서 의연함을 잃지 않던 네 모습이 그리움의 물결 되어 밀려오고 있다.
나비야, 보고 싶다.
아빠, 집에 나비가 왔어
집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예쁜 애기 고양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고 했다. 일주일 간 집에서 있을 거라고 하고 하니 빨리 가서 보고 싶었다. 주말이 기다려졌다.
집에 오니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나비가 하얀 바탕에 주황색과 검정색의 무늬가 수놓아진 옷을 입고 있었다. 나비는 가족들의 귀여움을 듬뿍 받으면서 예쁘게 재롱을 부리면서 일주일을 지냈다.
일주일이 지나서 나비를 원래 있던 곳에 데려다 준다는 엄마의 말에 아이들은 너무나도 서운해 하면서 조금만 더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엄마도 아이들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하루하루 미루다가 한 달이 지났다.
나비의 모습
엄마, 나비 어디있어?
엄마가 나비를 원래 살던 학교 뒷동산으로 데려다주었다. “엄 - 마 ---” 아이들의 원망소리가 컸다. 학교 기숙사에 있는 큰 아이도 주말이 되어 집에 왔다. 나비를 데려다 주었다는 말을 듣고 두 아이는 소리 내어 울었다. "엄마, 어떻게 그럴 수가 ........."
나도 주말에 집에 왔다.
“아빠, 나비 데려다주었대.”
".............."
“그래, 언제 돌아가도 가야할 테니까...”
“그런데 어디에다 데려다 주었대?”
“학교 뒷동산이래.”
나도 눈물이 나와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침이 되었다. 일찍 눈이 떠졌다. 모두들 자고 있는 이른 아침에 플라스틱 그릇과 빵을 챙겼다. 서둘러 차를 타고 나비를 데려다 주었다는 학교 뒷동산으로 갔다.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나비야! --- 나비야! ---"
한참 동안 산을 헤맸지만 나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동산을 몇 바퀴 더 돌다가 준비해 간 빵을 그릇에 담아서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도 허전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도 나비가 떠났음을 섭섭해 하고 있었다. 두 아이와 내가 너무나 섭섭해 하는 것을 보고 엄마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 데리러 가자."
아침 식사를 하고 우리 가족 모두 함께 차를 타고 학교 뒷동산으로 갔다. 동산에 도착한 후 모두가 흩어져서 나비를 찾았다. 한참 후에 숲속에서 나비를 발견했다. 그러나 나비는 뒤를 돌아보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에서인지 ....... 나비가 사라진 쪽으로 뒤따라가서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나비가 우리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큰아이가 학교 기숙사에 가야 했다. 점심식사를 하고 큰 아이가 기숙사로 들어가려다가,
“아빠, 기숙사에 가기 전에 한번만 더 찾으러 가요.”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세 번째로 나비를 찾으려 그 동산으로 갔다. 셋이서 구역을 나누어서 찾기 시작했다. 얼마를 찾았을까, 건너편에서 작은 아이가
“아빠, 나비 여기 있어 ---”
하고 알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 그쪽으로 뛰어갔다. 나비는 우리를 보자 다시 통나무 더미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우리는 통나무 더미 앞에서 나비를 불렀다.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나비가 작은 아이를 제일 좋아했기 때문에 작은 아이가 통나무 더미 입구에서 나비의 마음을 돌리기로 했다. 마른 생선을 가지고 나비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나비의 마음이 풀렸는지 통나무 더미 속에서 나비가 나왔다. 밖에서 고생을 했는지 많이 야위었다.
“나비야, 이제 집에 가자.”
나비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지만 걱정이 되었다. 엄마가 주장하는 나비의 귀향을 좀 더 연기해 줄 것을 설득해야하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셋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비를 안고 집에 들어가서 곧 나비를 좋은 데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다. 가까스로 엄마를 설득하여 한동안은 나비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온 나비의 모습
이제는 같이 살자
함께 살 수 있는 기간은 연장했지만 엄마와의 약속 때문에 항상 걱정은 남아있었다. 나비의 건강상태는 회복되었고 나비와의 정은 더욱 깊어졌다. 나비의 앞날을 어떻게 해결할 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늘어나는 나비의 재롱을 보면서 시간은 계속 흘렀다. 나비의 귀향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미룬 것이 해를 넘겼다. 나비의 거처에 대해서는 미결정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나비는 이런 상황에도 예쁘게 컸고 더욱 의연해졌다. 베란다에 집을 마련해주고 혼자 지내라고 했지만 혼자 있기가 싫은지 높은 창틀로 뛰어올라 문을 열어달라고 졸랐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철사 망으로 만들어 놓은 덧문을 발톱으로 잡아당기다가 철사 망을 찢기도 했다. 철사 망이 찢어지면 찢겨진 사이로 들어왔다. 찢겨진 철사망을 몇 번 교체하다가 나중에는 찢겨진 채 그대로 두었다. 이제부터는 집안 전체가 나비의 자유 활동 구역이 되었다. 나비의 생활은 자연스러워졌다. 베란다에 햇볕이 들면 볕이 든 곳에 누어서 잠을 자다가 볕이 지나가면 안으로 들어왔다. 베란다에 집도 마련해주고, 햇볕을 쬘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베란다보다는 거실이 더 좋은지 거실에서 많이 지냈다. 우리와 같이 있고 싶은지 옆에 와서 있기를 좋아했다. 소파에, 이불 위에, 있고 싶은 곳이면 어디에라도 자리를 잡았다. 추운 날 난방을 넣으면 어떻게 아는지 난방 길 위에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어느 때는 사람의 흉내를 내고 싶어서인지 허리를 길게 펴고 따뜻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어있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나비도 이제 가족의 일원으로 동화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혼자서 집에 있다가 저녁에 가족들이 돌아올 때면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 문 앞에 앉아 있다가 들어오면 반가워서 몸을 스치고 바닥에 딩굴고 매트를 발톱으로 긁으면서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귀여운 나비
나비의 몸에 변화가 나타났다. 지난번 동산 외출 때에 짝을 만난 것이었다. 귀향을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베란다에 있는 나비 집을 곧 태어날 애기나비들을 위해 보수를 했다. 얼마 후 예쁜 애기나비들이 태어났다. 베란다에 있는 나비 집에 활력이 넘쳤다.
나비의 새 가족
이제부터는 나비의 육아 과정을 지켜보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나비는 지극정성으로 애기나비들을 보살폈다. 자리가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애기 나비들을 입으로 물어서 옮겼다. 안에 들어와 있다가도 애기나비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달려가서 살피곤 했다. 나비의 정성스런 육아과정과 애기나비들의 재롱에 빠진 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애기나비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애기나비들과도 같이 살고 싶었지만 오직 바람뿐임을 생각하면 서운한 마음은 말할 수가 없었다. 애기나비들은 점점 더 자라서 이제는 제각기 갈 길을 찾아야만 할 때가 되었다. 항상 책상 밑 아늑한 곳에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애기나비들을 보고 있으면, 이 귀여운 애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섭섭함이 점점 더해갔다.
아기 나비의 운명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이들이 인터넷에다 애기나비들의 사진을 올려놓고 예쁘게 키울 사람들을 찾았다. 예쁘게 키우겠다는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애기나비들을 데리고 갈 채비를 하고 사람들이 와서 애기나비들을 데리고 갔다. 이것도 이별인가, 왜 그렇게도 섭섭하던지...
고향이 그리웠는지
해가 바뀌었다. 나비도 이제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비의 귀향은 항상 미결의 숙제로 남아있는 상태다. 우리 가족들은 서로가 표정만 살피면서 이 숙제에 대한 거론을 미룰 뿐이다. 나비의 귀향을 강력히 주장했던 엄마도 이제 나비한테 정이 더 깊어졌는지 나비의 귀향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나비가 또 짝을 찾기 시작했다. 엄마의 신경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비의 생태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나비를 나무랐다. 사람들은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집에 오니 나비가 없었다.
“나비 어디 있어?”
“가버렸어.”
무슨 일이 있었음이 직감되었다. 아이들한테 물어보았다. 나비의 종족번식의 본능적 생태가 엄마의 신경을 계속 거슬렸다고 했다. 큰 아이가 나비를 안고 해질녘에 공원으로 나갔다. 나비는 본능적으로 인간의 지배범위를 벗어나 야생의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았지만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드리워졌다.
나비를 찾다가 혼자서 들어왔다고 한다. 나비를 위로해주려다가 나비를 내보낸 계기를 만든 일 때문에 기숙사에 가서도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한 주가 지나고 주말이 되어 나도 집에 왔다. 나비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빠, 나비가 멀리 가버렸나 봐.”
아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저녁식사를 하고 공원으로 나가봤다.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비의 먹이를 챙겨가지고 공원으로 나갔다. 나무 밑에다 나비먹이를 조심스럽게 놓아두었다. 아파트 경비실을 돌면서 하얀 바탕에 검정, 갈색무늬 옷을 입은 고양이를 보았는지 물어보았다. 모두들 못 보았다는 대답이다. 공원주변 아파트 경비실 아저씨한테 나비먹이를 주면서 하얀색이 많은 고양이가 나타나면 먹이를 주라고 부탁하고 돌아왔다. 아이들도 집에 돌아오면 나비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나비를 찾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고양이들이 먹이를 구하려 나오는 밤 12시경 아이들 둘이서 나비를 찾으려 공원으로 나갔다. 베란다에는 나비의 밥그릇과 변기통이 주인을 잃고 덩그렇게 있었다. 나는 나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밥그릇과 변기통을 자주 닦아주었다.
어느 날 아침 작은 아이의 방문을 열었을 때 나비가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반가운 마음에서 나비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제 밤 자정쯤 나비를 찾으려 공원에 나갔는데 고양이 한 무리가 나타났다고 했다. 먹이를 찾으려 나타난 모양이었다. 고양이 무리를 향해 “나비야!” “나비야!” 불으니 고양이 하나가 뒤로 처졌다고 했다. 다른 고양이들이 뒤를 돌아보면서 처진 고양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처진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들의 기다림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 왔다고 했다. 우리 나비였다.
나비야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마
나비와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베란다에 있는 나비의 밥그릇과 변기통을 깨끗이 닦았다. 베란다에 나비가 오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베란다 풍경이 되살아났다. 나비야 이제는 돌아가지 말고 함께 살자.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참자.
나비와의 생활은 정상을 되찾았다. 가족들이 돌아오면 현관에서 기다리다 반가워서 바닥에 딩굴고, 매트에 발톱을 글었다. 특히 작은 아이를 좋아했다. 작은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반가워서 졸졸 따라 다니다가 무릅에 앉기도 했다. 나비는 햇볕을 좋아해서 베란다에 햇볕이 들어 올 때면 햇볕을 따라 자리를 옮겨가며 자리를 잡았다. 나비는 우리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뿐인 것 같았다. 나비가 먼저 잘 못한 일은 없었다. 혼자 누어있는데 같이 놀자고 귀찮게 하면 발톱으로 긁을 때도 있다.
놀자는데 왜 그러냐고 나무라면 화가 나서 베란다로 나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화가 풀릴 때쯤 되면 들어왔다. 나비는 우리 가족에게 원망함도 미워함도 없는 듯이 보였다. 언제나 우리 가족이 집에 돌아오면 반가워해주고, 배가 고프면 밥을 달라고 조르고, 쉬고 싶으면 편안한 자리를 찾아서 혼자 쉬었다.
베란다에 마련된 변기에서 나는 냄새와 나비 몸에서 날리는 잔털이 우리를 귀찮게 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나비의 잘못이 아니다. 나비를 돌보는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비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의 외출 결과가 또 나타났다. 새로운 가족을 또 탄생시켰다. 우리는 다시 애기나비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나비와 정이 더 든 만큼 애기나비들도 더 예뻤다. 나비의 양육과 애기나비들의 커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닮기도 했다. 귀여운 애기나비들과의 생활은 시간가는 줄을 모르게 했다. 애기나비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애기나비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곧 제갈 길을 정해 주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허전해왔다. 애기나비를 보살피는 우리 나비의 지극한 정성이 우리를 감동케 했다. 애기나비들을 보내야할 때가 왔다. 또다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아이들은 오직 나비들의 편안한 삶을 바라고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애기나비들을 사랑으로 보살필 사람들을 찾았다. 정성껏 보살피겠다는 사람들에게 애기나비들을 모두 보내주었다. 애기나비들을 보내면서 아이들의 지론이 있었다. 애기나비들을 그냥 보내주면 나비에 대한 사랑이 덜할 수가 있다면서 애기나비를 데리고 가는 사람들에게 애기나비에 대한 사랑을 더 심어주기 위해서 댓가를 조금씩 받도록 했다. 애기나비들도 모두 떠나고 우리 나비의 생활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엄마가 앞으로 또 나비의 ‘번식본능’이 발동하면 이제는 정말 나비를 되돌려 보낼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많은 생각했다. 나비와 함께 살려면 번식본능을 해결해주어야 하는 것이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아이들이 해결방안을 이것저것 연구를 했다.
나비는 언제나 의젓했다. 애기들을 보내고도 마음은 섭섭했겠지만 밖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육아를 끝낸 나비는 다시 정상의 생활을 되찾았다. 같이 놀면서 재롱도 부리고, 같이 공원에도 가고 ..... 아이들은 나비의 귀향 조건을 없애는 방법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다
주말에 집에 오니 나비가 혼자 있었다. 몸에는 메리야스 천으로 만든 옷이 입혀져 있었다. 방에 들어오니 졸졸 따라 들어와서 책상에 앉아있는데 나비가 내 무릅 위로 올라와서 앉았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갑자기 내 발을 물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놀랐고 또 아팠다. 나는 화가 나서 매를 가지고 나비를 때렸다. 나비는 놀라서 베란다에 있는 자기 집으로 달려가서 심하게 울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나비가 걸치고 있는 메리야스 천을 벗겨보니 수술을 하고 보호용으로 입고 있었다. 아이들이 나비를 병원에 데려가서 불임수술을 시킨 것이다. 수술을 받고 아파서 나를 물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비를 때렸다. 너무나도 미안했다.
나비는 수술을 받고 와서 혼자 집에 있다가 내가 와서 반가워서 무릎에 앉았다가 아마도 수술부위가 아팠는지 참지 못하고 내 발을 약간 물었던 것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나비가 이유 없이 나를 물은 것으로 생각하고 아픈 나비를 때렸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미안한 일을 했다. 거실 TV옆을 보니 수술 받은 병원에서 가져온 약봉지가 있었다. 약봉지에 적혀있는 주소를 가지고 나비를 차에 태우고 수술 후의 상태를 체크해보려고 그 병원으로 갔다. 상태는 좋다고 했다. 안도가 되었다. 온 김에 수술실도 뽑자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는 나비는 내 무릅에 올라오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가 컷던 것 같았다.
나비의 귀향조건이 하나는 없어졌다는 생각에서 아이들은 안도하는 모습들이다. 이제 나비는 인간이 정해준 방향에 따라 살아가야만 했다. 나비야 네가 우리와 함께 살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되지 않겠니? 미안하다.
나비의 삶을 인간인 우리가 규정 지워주었다. 나비야, 이제 너는 우리가 정해준 방향으로 살아야 한다. 착한 나비는 무언의 대답으로 정해준 삶을 살면서 예전과 다름없이 의연한 생활을 했다. 나비가 우리 집에 온지도 3년째가 되었다. 그동안 나비한테는 많은 일이 일어난 셈이다.
1년을 그리움 속에서
“나비야, 1년 후에 다시 보자.”
“언니, 그리고 아빠, 우리 나비와 잘 지내.”
“그래, 걱정 말고 공부 잘 하고 돌아와.”
오늘은 작은 아이가 카나다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유학을 떠나는 날이다. 아마 나비도 말을 못해서 표현을 못했을 뿐 무척이나 섭섭했을 것이다. 카나다로 떠난 작은 아이한테서 전화나 메일이 올 때면 나비의 안부도 같이 물었다.
나비의 생활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혼자서 집을 지키다가 가족들이 집에 오면 반겨주고, 베란다에 햇볕이 들면 볕에 가서 자리 잡고 누어있고, 배가 고프면 밥 달라고 조르고, 심심하면 재롱을 부리고, 잠잘 때가 되면 편한 데를 찾아서 잠을 잤다. 가끔 작은 아이 방 앞에서 멈칫거리다가 비어있음을 알았는지 발길을 돌리곤 했다. 아마도 작은 아이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은 아이가 없는 동안에는 큰 아이가 나비를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나비도 그 정성을 알았는지 큰 아이를 잘 따랐다. 1년이 금방 지나갔다. 작은아이가 외국에서 돌아왔다.
1년을 외로움 속에서
나비가 할머니가 되어가네
“나비야, 잘 있었니?”
약간은 어색해 보였다. 1년을 떨어져있었으니 조금은 어색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곧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작은 아이를 따랐다. 이제는 나비도 반평생을 살은 셈이다.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비야, 그래도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언니다."
나비는 이제는 육아의 기회도 없어졌기 때문에, 몸도 많이 불었다. 시간이 있으면 잠을 자는 일이 중요한 일과였다. 잠을 자는 폼도 사람이 자는 모습을 닮아갔다.
베란다에서 안으로 들어 올 때에도, 문을 열어달라고 창틀까지 뛰어 오르던 그 때와는 달라졌다. 이제는 베란다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미닫이문을 여는 기술이 늘어서, 밖에 나갔다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혼자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몸이 커져서 힘도 있겠지만 문틈에 발톱을 끼고 양쪽을 번갈아가면서 조금씩 여는 모습을 보면, 그 인내심과 여는 방법이 보통을 넘어섰다. 포기하지 않고 양쪽을 번갈아가면서 또 쉬어가면서 몇 번이고 틈이 생길 때까지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기도 했다. 틈이 생겨지면 앞쪽의 한발을 넣어서 틈을 키우고, 다음에는 어깨까지 넣어서 사이를 더 넓히고, 부근에 매트가 있으면 그것을 잡아당겨 사이를 더욱 넓혔다. 사이가 어느 정도 넓어지면 머리를 사이에 넣어서 간격을 넓히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충분치 못한 틈도 몸의 힘으로 넓히면서 들어왔다. 그 때 들어오는 모습은 개선장군 모습이었다. 문을 열어주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는 우리를 보란 듯이 쳐다보면서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나비의 귀향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줄어들었다. 엄마도 그전처럼 자주 거론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비는 밥을 자주 달라고 해서 밥을 줄여주는 중인데, 나비의 배가 너무 뚱뚱해져 갔다. 나비의 낙(樂)은 우리와 같이 지내면서 재롱부리고, 밥 먹고, 잠자는 일이기 때문에 운동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비의 몸이 점점 더 뚱뚱해지면서 식욕도 떨어져갔다. 나비의 양쪽 배가 심하게 뽈록해지고 몸 상태가 점점 나빠져 갔다.
나비의 자는 모습
나비야 병원에 가자
나비의 생태가 평소와 다른 것이 감지되었다. 눈에 눈껍이 끼고, 밥도 잘 먹지 않고, 가끔 소화액을 토해냈다. 나비한테 이상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이 나비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갔다 온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나비가 암에 걸린 것 같으니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비가 불쌍했다. 그리고 한없이 미안했다. 자연에서 마음껏 뛰놀면서 살았으면 이런 병은 걸리지 않았을 텐데... 수술을 해도 병을 고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수술은 해주어야지... 아이들의 애틋한 마음에 따라 나비를 입원시키고 수술을 했다.
“병원에서는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하더냐?”
“응, 다행이도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아서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해.”
“일주일은 입원을 해야 된다고 하던데.”
“그래, 잘 했어.”
“아빠도 언제 같이 가봐.”
“알았어, 가보자.”
시간을 내어 나비를 만나려 병원에 갔다. 2층 입원실에 가니 나비가 원기를 많이 회복해 있었다. 분위기가 어색한 모양인지, 우리를 보고도 입원한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나비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비야 빨리 나아라.”
“곧 데리려 올께.”
일주일 후 병원에서 나비를 데리고 왔다. 뽈록하게 나왔던 나비의 배가 예쁘게 들어갔다. 몸도 날렵해졌다. 나비야 나아줘서 고맙다. 이제는 너한테 화내지도, 때리지도 않을께. 다시 정상을 찾은 나비는 예전과 같이 혼자서 집을 지키고, 가족들이 돌아오면 반가워서 뒹굴고, 배고프면 참지 못하고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밥 달라고 졸라댔다. 내가 밥을 잘 주니까 배가 고프면 주로 내한테로 와서 톡특한 울음으로 배고픔을 알리면서 입술로 나의 발등을 간지럽혔다. 나비는 아침잠이 없었다.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서 거실에 나와 앉아있었다. 내가 늦게 일어나면 내 방문을 발로 긁으면서 밥 먹을 시간을 알렸다. 예전에는 나비를 목욕시키려면 가만히 있지 안했다. 그런데 이제는 목욕을 시키면 목욕에 편한 자세를 취했다. 운동을 시키려고 집 앞의 공원에 데리고 나가면 바깥세상에 익숙지 못해 배를 땅에 깔고 집을 향해 달려갈 태세를 취했다. 가까스로 달래가면서 털을 빗겨주며 공원의 벤취에 앉아 나비의 자연 세계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집에 들어올 때는 처음에는 집을 향해 달려와서 집의 층수를 혼동해서 우리가 사는 2층을 지나 3층으로 뛰어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곧바로 2층으로 올라와서 우리 집 문 앞에서 뒤 따라 오는 나를 기다렸다. 문을 열면 먼저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안심이 되는지 여유롭게 자리를 잡았다. 나비야 앞으로 우리 이렇게 함께 오래 살자.
퇴원한 나비 밖에서 운동도 하고
6개월이 시한이라는데, 조심해서 살자
해가 바뀌고, 또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 수술을 한 지도 반년이 넘었다. 나비야 고맙다. 건강을 되찾아 주어서, 너의 건강을 보니 이제 앞으로 오래도록 함께 살 수 있겠구나.
나비가 우리와 함께 생활한지도 이제 8년을 넘어섰다. 나비도 이제는 옛날처럼 재롱은 부리지는 않지만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우리와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벽을 소리 내서 긁으면 나비는 귀를 쫑긋 세우고 발을 바닥에 받히고 출발 태세를 갖춘 후에 쏜살같이 뛰어오곤 했다. 막대기에 리본을 매고 흔들면 리본을 잡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 오르기도 했다.
이제는 나비도 거리낌이 없이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편한 자리를 찾곤 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현관문을 열면 어둠 속에서도 현관문 앞에 바짝 다가서서 마중을 했다. 문을 열었을 때 나비가 보이지 않으면 혹시라도 나비가 아프지 않은지 걱정이 되었다. 나비가 보이지 않아서 “나비야!” “나비야!” 부르면서 이 방 저 방 찾아다니면 어느 때는 옷장 속에서 잠을 자느라고 벨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가 부르는 소리에 “야옹”하고 대답을 했다. 어느 때는 나비가 보이지 않아 나비를 부르면 이불 속에서 자다가 대답을 했다.
나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밥 먹을 시간이 되어도 우리가 일어나지 않으면 문 앞에서 밥 달라고 잠을 깨웠다. 부엌으로 식사준비를 하려가면 따라와서 주인을 보호라도 하는 것처럼 돌아앉아 지키는 폼으로 앉아 있기도 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식탁 옆으로 와서 앉아서 쳐다보다가 주지 않으면 의자의 뒷 쪽에 남은 공간으로 올라와서 더 가까이에서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도 나비의 건강을 생각해서 요리한 짠 음식은 주지 않았다. 내가 몰래 생선을 떼어주면 아이들이 주지 말라고 했다. 나비는 표현은 잘 하지 않아도 우리에 대한 의리는 지키는 것 같았다. 평상시에도 우리가 방으로 들어가면 방으로 따라오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에 따라와서 보초를 서는 것처럼 앉아 있기도 했다. 방에 와서 잘 때에도 아이들 방에서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지만, 엄마 방이나 내 방에서는 이불의 끝자락 코너에서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잠을 잤다. 나비도 예의를 아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비와의 삶은 운명적으로 이어졌다.
나비야 또 아프니? 병원에 가자
병원에서 이야기 한 6개월의 시한부 삶을 이겨내고 수술을 받은 후로 삼년을 넘어섰다. 우리와 함께 산 것도 10년이 지났다. 이제는 오직 아프지만 않으면 함께 오래 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나비가 발목을 핥으면서 힘들어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발목에 무어가 볼록하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가려움을 참지 못해서 계속해서 핥고 있는 것이었다.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건강하게 조용히 지내고 있는 나비한테 또 무슨 일이 생기려고 하는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나비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아이들이 나비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에 갔다 온 아이들의 얼굴이 밝지 못했다.
“아빠!”
“왜?”
“앞으로는 나비한테 더 잘해줘.”
“왜 그래?”
“나비한테 암이 재발했대. 피부암으로”
“의사선생님이 수술도 하지 말래”
큰 수술 후 몇 년을 잘 버티더니 발목 피부에 종양으로 암이 재발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병원에 다녀 온 나비는 소파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비를 보니 너무나도 불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비야! 이것이 네 운명인가보다...
발목의 피부암 덩어리는 점점 커졌다. 나비는 참기가 힘이 드는지 이리 저리 다니면서 상처부위를 핥고 다녔다.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아이들이 나비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피부암덩어리를 수술을 해 주었다. 발목에 붕대를 감고 집에 돌아온 나비는 붕대감은 발을 들고 다니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며칠이 자나니 수술 부위도 깨끗이 아물었다. 그래, 우리 나비 착하다. 모든 어려움을 용케도 이겨내는구나.
2차수술 후 퇴원 조심스럽게
이제 더 조심스럽게 살아보자.
나비야 이제는 더 조심스럽게 살아보자. 우리는 나비한테 밥도 더 정성껏 챙겨주고, 잠자리도 나비가 좋아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련해 주었다. 언제나 의연하게 지내는 나비를 보면 나비에 대한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나비가 이제는 가족들의 현관 키(key) 번호를 구별하는 것 같았다. 작은 아이의 키 번호가 4번인데 중앙 현관문이 열릴 때 들려오는 자동 알림 음성에서 유독 "4번 키로 문이 열렸습니다."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비는 소파에 앉아있다가도 뛰어 내려가서 문 앞에 앉아서 작은 아이를 기다렸다. 아마도 음색으로 음성을 구별하는 듯 했다. 아니면 고도로 발달된 청각으로 발자국 소리를 구별하는 것도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비의 상태는 점점 달라져 갔다. 나비의 움직임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현관에서 문 열림의 음성이 들려 와도 옛날처럼 뛰어가지를 않았다. 아마도 힘이 점점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뛰어가지는 않지만 현관에서 별소리가 나고 또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그쪽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마중을 못 나가서 미안해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비가 평소에 자리 잡기를 좋아하던 거실의 가장 따뜻한 곳에 상자로 집을 만들어서 주었다. 이제는 그 집 속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식욕도 점점 떨어져가는 것 같았다. 베란다에 놓여 있는 밥그릇에 밥이 줄지 않았다. 변기통에 마지막으로 본 변이 한 톨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제부터는 물만 먹기 시작했다.
이제 먹지도 못 하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이제는 아예 밥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좋아하던 생선 굽는 냄새가 나면 부엌 쪽으로 왔다가 다시 가버렸다. 어쩌다 밥을 좀 먹으면 그래도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번가라 가면서 나비를 정성껏 보살폈다. 나비가 조금 먹은 것을 토해내 버리니까 아이들이 멀리까지 가서 약을 사와서 정성을 다해서 먹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비는 밥을 전혀 먹지를 못했다.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설탕물을 타서 주사기 통으로 입에 넣어주었다. 물을 먹는 것도 괴로워했다. 목을 만져보니 암 덩어리가 온 몸으로 퍼져서 목에도 큰 덩어리가 식도를 막고 있었다. 그래도 억지로 목을 만지면서 설탕물을 먹였다. 또 생선 통조림을 으깨서 삶은 것을 주사기 통에 넣어 먹여주었다. 힘들어하지만 참으면서 먹는 것 같았다. 먹이고 난 후 목을 만지면서 음식을 내려 보냈다. 힘이 드는 모습이지만 바라보는 눈빛에 고마움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애들과 나는 서로가 교대해 가면서 특별히 만든 나비의 밥을 먹였다.
어디가 편안하니? 편한 데서 쉬어라.
나비의 힘이 점점 쇠약해져 갔다. 조금 높은 상자 통으로 집을 만들어주었는데 그것이 높은지 뛰어 들어가지를 못했다. 그래서 좀 더 낮은 통을 준비해서 옆에다 두었다. 낮은 집에는 겨우 들어가서 누었다. 눈빛이 너무나도 가여웠다. 내가 정성으로 보살펴주니 옛날에 나 한테 매를 맞았던 섭섭함이 좀 풀린 것 같았다. 그전에는 나를 보면 매를 맞은 생각이 나서인지 슬슬 피해 갔는데, 이제는 피하지도 않았다. 잠을 잘 때도 나를 따라 들어와서 나의 발끝에다 잠자리를 잡고 잠을 잤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혼자서 생각에 잠긴 듯 앉아 있기도 했다. 어느 때는 좀 더 가까이에 와서 자고 있었다.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나니 내 머리맡에 앉아서 잠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끝에 마련한 잠자리 새벽에는 머리맡에 와서
내가 공주에 학교에 내려갈 때에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나비가 내 방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내 방의 이불을 개어서 그 위에다 수건을 깔아놓았다. 나비는 내 방의 이불위에서 쉬며 잠자기를 좋아했었다.
나비를 제일 좋아하는 작은 아이가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작은 아이가 집에 없는 동안 큰 아이가 나비를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나비도 큰아이의 정성이 고마운지 내가 집에 오니 큰 아이와 함께 잘 지내고 있었다. 잠도 큰 아이의 방에서 이불 속에 묻혀서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나비가 작은 아이 방 앞에서 작은 아이를 부르는 듯 몇 번씩 울다가 가기도 했다.
큰 아이 방에서
가여운 나비한테 조금이라도 더 편한 시간을 주고 싶었다. "나비야, 네가 가장 좋아하는 편한 자리를 찾아서 쉬어라, 그리고 잠도 자거라." 잔털이 빠진다고 배란다로 내보내던 일, 방에 들어오면 못 들어오게 하던 일 등등을 생각하면, 그때에 우리 착한 나비가 얼마나 섭섭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착한 나비, 그렇게도 우리와 함께 살고 싶어서 모든 것을 참아왔는데... 나비는 그저 참으면서 우리와 함께 살기만을 바라면서 살아왔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아프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살아 왔다. 밥을 먹지 못할 때에도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베란다 물통에 가서 물을 많이 들이켰다. 나비가 힘이 없으니 허리를 많이 구부릴 수가 없기 때문에 물통에는 항상 물을 가득 채워두었다. 목이 마르는지 물을 수시로 마셨다. 그렇게 물을 많이 먹어도, 아픈 몸을 이끌면서도 몸이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비가 우리 집에 와서 12년을 살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거실이나 방에다 소변을 본적이 없었다. 몸이 많이 아파도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소변이 마려우면 어느 때는 변기통 안으로 몸을 끌고 들어가서 소변을 보다가 힘이 없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착한 나비! 가엾은 나비!
많이 아프구나, 병원에 가자
이제는 나비의 상태를 날마다 체크를 해야 했다. 영면할 상자도 마련해두었다. 또 미리 봐 두었던 영면의 터도 점검을 했다. 이 영면의 터는 나비가 암 수술을 받고 시한부 삶을 살 때에 미리 정해둔 곳이다.
주말이 되어 집에 오니 나비가 내방에서 보온 매트 위에서 고개를 떨구고 누어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비야! 많이 아프니?”
말없이 시선만 마주쳤다. 나비는 끝까지 의연했다. 나비야, 마지막이 될지 모르지만 병원에 가자. 늦은 밤에 아이들과 함께 나비를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이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나비 좀 봐주세요.”
퇴근을 하려던 의사 선생님이 퇴근을 미루고 나비를 살폈다. “황달이 왔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피부가 노랗고 피부에 탄력이 없습니다.” “수명이 다 되었습니다. 혹시 안락사를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습니다.”
“나비야 집에 가자.”
집에 돌아온 나비는 내 방안의 매트 위에 눕혔다. 매트 위에 누어있는 나비는 거실에 있는 우리 가족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비야, 내가 일요일까지 집에 있을테니까, 가려면 이틀이라도 같이 있다가 일요일쯤에나 떠나려므나. 오늘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작은 언니(작은 아이) 방에 가서 자거라. 나비를 작은 아이의 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비야, 잘가! 아프지 않는 세상으로
이른 새벽이다. ‘아빠, 나비가 갔어’.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작은 아이 방으로 갔다. 나비는 어제 저녁 눕혀 놓은 그 자세로 그대로 갔다. 일요일까지 같이 있자고 했는데 긴장이 풀렸는지 미리 떠났다. 아픔도 슬픔도 그리움도 모두 잊고 자는 듯이 떠났다.
"나비야 잘가!"
뒤에서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집에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집에 오니 나비는 마음이 놓였는지 자는 듯이 편안하게 떠났다.
"나비야 잘 가거라."
나는 아이들과 함께 나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왔다. 준비해둔 영면상자에 나비를 편안히 눕혔다.
‘나비야! 잘가, 아프지 않는 세상으로,’
나비의 영면상자를 들고 나비가 항상 찾아와서 잠을 자던 내 방을 들렸다가, 다음에 나비가 주로 생활하던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서 나비가 오래토록 잠을 잘 영면의 상자를 덮었다. 나비와 함께 아이들과 밖으로 나갔다. 아직은 어둠이 깔려 있는 새벽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영면의 터를 다시 손질해서 나비가 즐겨 쓰던 노란 타올을 깔고 나비를 편안하게 눕혔다. 영면상자 위에는 평소에 나비가 쓰던 노란 수건을 덮고 흙을 덮었다.
‘나비야 편안히 쉬어라.’
잠에서 깨어나면 언제라도 놀러와. 오늘이 5월 29일 내 생일날이다.
편하게 들도록 만든 집 나비의 영면
그곳에서도 편안하게 잘 살아라
나비야 잘 있니? 나비가 자고 있는 그곳을 오며 가며 바라보았다. 잠자는 나비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잠자는 자리에는 그늘에서도 살 수 있는 옥잠화 꽃포기를 심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하얀 돌을 박아 동그랗게 울타리를 처서 나비동산을 만들어 주었다.
옥잠화가 잘 자랐다. 나비동산 중앙에다 천일국 한포기를 심었다. 천일국이 잘 자라서 꽃이 한 송이 나왔다. 아늑한 곳을 좋아하는 나비의 환생을 보는 것 같았다. 꽃이 또 한 송이 피었다. 나비동산 옥잠화 꽃밭에 천일국 두 송이가 햇빛을 받아 유난히도 반짝이고 있었다. 나비동산의 옥잠화 꽃, 천일국 꽃은 오래도록 반짝일 것이다. 나비야 안녕! 편히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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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삶 (1)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
고통의 시간들을 흐트러짐 없이 참아 왔다.
고통을 참으면서 다가오던 모습들이 애처롭게 떠오른다.
이제는 고통이 없는 곳으로 떠났다.
12년을 넘는 세월 동안,
무언의 대화를 하면서 함께 살아왔다.
98년 봄 어느 날 손바닥에 들어오던 조그마한 생명체가 함께 살기를 바라면서 찾아왔었다.
긴 세월동안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함께 살고 싶은 일념에서 고비 고비를 넘겨왔다.
이제는 뒤뜰에서 편안히 잠자고 있다.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게 가까운 곳에 잠 재웠다.
목요일 저녁 학교에서 집에 왔을 때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누어있던 너의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로웠다.
늦은 시간이지만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희망이 없겠다는 말만 듣고 그냥 돌아왔다.
고통을 참는 것이 힘이 들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내가 집에 머무는 동안 일요일 쯤 떠나라고 했더니, 긴장이 풀렸는지 이틀이나 앞당겨 미리 떠났다.
고통을 참으면서 자는 듯이 떠났다.
내가 집에 오기를 기다렸나 보다.
잘가,
편히 쉬려무나.
2009, 5, 29(금요일) 새벽
나비의 삶 (2)
앉아 있던 자리들이,
누어있던 자리들이 눈에 밟힌다.
밤이 되면 조심스레 들어와서
발끝에 잠자리를 틀던 촉감이 아직도 느껴지듯 한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서 기다리다 반가움에 딩굴던 모습이 눈에 밟힌다.
하루 종일 혼자서 사람이 그리웠던지
바닥에 딩굴며 누어 버리곤 했다.
병색이 짙어질 무렵부터는
새벽녘 일찍 일어나 생각에 잠긴 듯 바라보고 있던 모습이 선하다.
떠날 때를 예감한 듯 좀 더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인지
잠자리를 내 발치에서 차츰 차츰 얼굴 가까이로 옮겨왔다.
어느 때는 머리맡에 앉아있기도 했다.
떠나기 전날 밤 목을 놓고 누어서,
떠날 것을 예감해서인지 눈물을 흘리고 있던 모습이 애처롭게 떠오른다.
이제는 편안하게 쉬라고 일러주고 싶어
자고 있는 뒤뜰에 나가서
잠자는 주변에 꽃을 심으며 단장해주였다.
2009, 5, 31(일)
나비의 삶(3)
오며 가며 둘러보는 안식처,
오늘도 편안히 쉬고 있겠지,
배란다 창밖을 내다보며,
나뭇가지 위 에서에 새들이 지저귈 때,
두 귀를 쫑곳 세우고 밖의 세상 구경하던 모습이 그려지는구나.
새벽에 제일 먼저 일어나
문 앞에서 잠 깨우던 너의 소리가 귀전을 울리는 것 같다.
배가 고프면 발등을 간지럽히며 몸을 비비던 촉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항상 같이 있고 싶어 마루로 방으로 부엌으로 따라다니면서 함께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바람을 쐬려 밖으로 데리고 나왔을 때,
혹시라도 혼자 두고 들어갈까 싶어 배를 땅에 깔고
집을 향해 달려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뒷뜰 안식처에 나가
자고 있는 꽃동산에 꽃 한포기 더 심으면서,
깨어나면 즐겁게 놀라고 예쁘게 단장을 해 주었다.
깨어나면 언제라도 놀려오라 일러주었다.
2009, 6, 14(일)
나비동산 1
나비동산에 꽃이 피었다.
노랑꽃이 한 송이 예쁘게 피었다.
아늑한 곳을 좋아하던 나비의 환생인가보다.
2009, 7, 12(일)
나비동산 2
장마철이라 빗줄기가 거세다
동산에 흙이 씻겨갈까 걱정했다
비가 멎자 동산으로 나갔다
흙으로 동산을 북돋우어 주었다
장마철 중간 중간 햇볕이 내렸다
나비동산에 꽃이 한 송이 더 피었다
예쁘게 예쁘게도 피었다
동산이 더욱 예뻐졌다
2009, 7, 18(토)
나비동산 3
찬바람이 분다.
나비동산에 낙엽이 쌓인다.
낙엽을 쓸어주었다.
나비야, 춥지 않니?
옥잠화도 천일국도
내년을 약속하며 모두 갔다.
나비야 춥더라도 참아야 해.
봄이 되면 다시 따뜻해질테니까.
2009, 11, 15(일)
나비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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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사랑이 어우러진 시간들
제자들과 남해안 추억을 엮으면서
(2005, 10, 7 ~ 8)
교육 외길의 한평생, 눈을 감으면 수많은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항상 가슴을 열어 놓고 교육의 길이 끝나는 날 까지 사랑스러운 제자들의 모습을 한사람이라도 더 담고 싶어서 지나가는 제자들의 이름을 되짚어 물어보기도 하고, 또 등을 쓸어 주기도 했다.
교육의 길이 끝나는 날 가슴에 가득 안은 사랑스런 제자들의 모습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될 것 같아서, 제자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의 순간들을 더 없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제자들의 모습을 두 번 세 번 바라보면서 예쁜 모습들을 가슴에 담았다.
남해안으로 떠나는 졸업여행 버스에 탑승을 했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음을 들뜨게 하기 때문에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평소에 못다 나눈 이야기들이 꽃을 피우는 동안 우리를 실은 버스는 대진고속도로를 달려서 진주에 도착했다. 마침 진주에는 개천예술제가 열리고 있는 중이어서 분위기가 축제 무드에 젖어있었다.
진주 남강변에서
진주의 명승지 촉석루, 논개바위라 불리는 '의암'이 있어서 더욱 유명한 촉석루는 개천예술제의 중심이 되어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슬비가 내리는 촉석루 공원 야외무대에는 유명가수들의 공연 준비에 바빴고, 광장 옆길에는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비옷을 입은 채로 앉아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진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남강위에는 많은 축제의 소품들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지난날들을 회상케 했다. 촉석루에서 '의암'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은 조금은 위험해 보였으며 의기(義妓)논개가 술 취한 왜군 적장을 불러 내리는 환영을 연상해 보았다. 촉석루와 의암의 역사적 의미를 더듬어보면서 '의암' 가까이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남해섬으로 가는 길에 사천에 들려서, 전쟁에 참여했던 여러 가지 항공기들이 전시되어있는 항공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우리의 전쟁 역사를 되새겨보았다. 또 전쟁역사관에는 여러 가지 전쟁관련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북한의 김일성이 타던 호화 승용차가 눈길을 끌었다.
사천 비행장에서
남해도로 가는 길목 삼천포로 가는 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와불(臥佛)이 있는 와룡산 백천사에 들렸다. 누어있는 부처의 특이함 때문인지 다른 절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절에 들린 김에 약수로 목을 적시고 해초젤리도 맞보았다. 늦은 오후에 삼천포항에 도착했다. 바다의 내음이 물씬 풍기면서 저녁시장기를 돋구었다. 항구의 식당에서 해물을 반찬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남해로 향했다.
삼천포와 남해를 이어주는 연육교의 아름다운 야경에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환상의 야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두들 즐거워하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바다로 향하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었다.
삼천포 해변에서
남해섬으로 건너와서 상주해수욕장을 지나 남쪽의 해변 길을 한참이나 달려가니 아늑한 산기슭 바다 가에 자리 잡은 남해유스호텔이 나타났다. 우리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남해바다의 바다 향기를 심호흡했다.
어둠이 깔린 해변의 밤, 맥주잔을 기우리면서 모두들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어쩌면 천진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밤의 적막을 깨고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어둠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울어대는 풀벌레소리는 자연의 화모니가 되어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침의 상쾌한 바다공기를 마시며 보리암으로 향했다. 산을 오를수록 아래에 펼쳐지는 전경은 절경을 이루었다. 보리암은 유명 사찰답게 경치도 아름답고 분위기도 마음을 산뜻하게 했다. 보리암의 경내를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본 후 정상으로 향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분은 하늘을 나를 듯싶었다. 올라오는데 힘이 들었지만 정상에 올라와서 넓은 시야를 보면서 가슴 뿌듯한 정을 느꼈다. 내려오는 중에 흔들바위에서 협동심을 발휘해보기도 했다.
보리암에 올라서
남해를 빠져나와 다시 삼천포로 왔다. 다도해의 선상 tour를 위해 선창가로 갔다. 다도해의 절경은 피곤한 심신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선상에서 나누었던 소주잔의 추억도 다도해의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가슴 속에 간직되었다.
남해바다 투어
이제는 돌아가는 길이다. 너무 늦지 않게 출발을 했다. 1박 2일의 소중한 시간들, 예쁘고 예쁜 모습들, 가슴에 소중히 안으면서 땅거미 짙어가는 북향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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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의 추억의 순간들
추억속의 금강자연휴양림
(2008,8,13-14)
아쉬움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헤어짐이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반복되는 일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가슴이 비어오는 느낌이 전신으로 젖어들었다. 교육인생 후반에서 바라보는 제자들의 모습이 더없이 애틋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대학원 종강모임이 있는 날이다. 아쉬운 마음을 나누기 위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면서 금강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금강의 은은한 물줄기가 반짝이면서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가는 길에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 그러나 내리는 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들 길을 재촉하여 모여들었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학문 연구에 정진하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모여드는 얼굴에는 여유로움과 정다움이 가득히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얼굴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긴 자취가 이어지는 지나온 교육인생을 회상해 보았다.
저녁식사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식사시간이 무르익었고, 정겨운 대화들이 꽃을 피웠다. 오가는 술잔 속에는 우정과 사제의 정이 듬뿍 듬뿍 담겨지고 있었다. 술잔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애틋한 정들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내리던 비는 그쳤다. 땅거미가 짙어질 무렵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정문을 지나 경내를 통과하여 들어가니 휴양림 속의 휴식처인 통나무집에 도착했다. 자리 잡은 위치도 아늑했지만 통나무집의 운치는 이곳을 찾아온 설렘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제자들과 담소
여장을 풀고 자리를 정돈했다. 헤어짐이 정해져 있어서인지 모두들 아쉬움이 역역한 모습들이었다. 숲속의 적막 속에서 학기를 장식하는 마지막 특강시간이 진행되었다. 더없이 진지한 모습들이었다. 특강이 끝난 후 학기별로 팀을 나누어서 윷놀이를 시작했다. 모두들 아련한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밤이 깊어져도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아서 모두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들려오는 정다운 목소리들은 나를 지나온 교육인생의 길로 끌어가곤 했다. 눈을 감고 귓전을 맴도는 정다운 목소리들을 들으면서 교육인생의 기나긴 길을 더듬어갔다. 깊어가는 숲속의 적막과 함께 꿈속의 세계로 끝없는 나래를 펼쳐갔다.
산새들의 지저귐 소리에 눈을 떴다.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듯이 숲속의 아침이 찾아왔다. 상쾌함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문을 열고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늦게까지 담소하던 그 자리에서 모두들 자고 있었다. 잠을 깨울까 조심조심 내려가서 산책길에 나섰다. 강이 가까워서인지 아침 안개가 숲을 자욱하게 덮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산을 올랐다. 기분이 더없이 상쾌해지고 마음이 맑아왔다.
아침햇살을 받으면서 통나무집 안이 다시 바빠졌다.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모두들 모여들었다. 손놀림들이 바빠졌다. 모두들 오늘의 시작을 위해 식탁에 둘러앉았다. 손수 준비한 아침식사가 어느 진수성찬보다도 훌륭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떠날 준비를 하니 아쉬운 마음이 더해졌다.
하나하나 챙기면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추억이 서려있는 통나무집에서의 기념촬영이 시작되었다. 안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또 밖으로 나와 촬영이 이어졌다.
제자들과의 시간
이제는 떠나는 길이다. 휴양림 내부의 서쪽부분은 시간을 고려해서 차를 타고 돌았다. 넓게 자리 잡은 내부구조가 한결 여유로움을 자아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휴양림 동쪽 부분이다. 휴양림 동쪽에 위치한 돔(dome)으로 우뚝 서있는 열대식물원으로 갔다. 정성껏 가꾸어진 식물원의 내부를 관찰하고 또 관리인으로부터 희귀식물에 관해 설명도 들었다.
다음 코스는 산림박물관이다. 식물원 위쪽에 현대식 건물로 준수하게 서 있는 산림박물관으로 향했다. 규모로나 내용으로나 손색없는 훌륭한 박물관이었다. 국내외의 산림에 대한 자료들이 폭넓게 전시되어 있었다. 안내자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
산림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계획된 일정이 끝났다. 헤어짐을 앞두고 인사들을 나누었다. 아쉬움이 그리움으로 변하는 시간이었다. 헤어짐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뒤로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약간 이르기는 했지만 헤어짐의 시간을 점심식사 후로 잡았다.
방향을 시내로 잡고 강변을 따라 줄지어 들어왔다.
학기를 장식하는 마지막 모임이 끝났다. 다음 학기에 건강하게 다시 만나요.
연구실에 돌아온 후 허전함을 달래려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강의실에서 과제물을 진지하게 발표하는 모습들이 떠올랐다. 학기운영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던 대표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휴양림으로 향하면서 차속에서 대화를 나누던 예쁜 모습들, 밤의 공기를 마시면서 운동장을 함께 돌던 김린의 모습이 떠오른다. 통나무집에서 정겨운 시간을 같이했던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공주대학교 숲길
(2010,7, 13)
정년과 동시에 시작한 공주대 입학사정관, 매일 점심 후에 학교에 있는 숲길을 산책했다. 오늘은 옆 자리에 앉아있는 혜정이, 서영이와 함께 걸었다. 산책길을 걸으면서 숲속의 향기를 심호흡했다. 마음 착한 딸들과 함께 걸었다.
인생의 정열을 불태웠던 공주대학교를 위해 마지막 봉사를 결심한지도 1년이 되었다. 공주대학교 입학사정관실을 1류사정관실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우렸다. 공주대학교를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 후배들을 위해서 공주대학교에서의 나의 마지막 봉사에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훌훌 털고 떠나려고 한다. 이제는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정년과 함께 설계했던 나의 새로운 인생계획을, 공주대학교를 위한 마지막 봉사를 위해 1년간을 미루어두었던 그 설계를 실천해 갈려고 한다.
나의 일생의 좌우명인 '배우고 위하고 사랑하면서'를 실천하면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끝없는 길을 갈려고 한다.
시간을 함께 한 혜정이와 서영이가 고마웠다.
혜정이, 서영이와 함께
Michael(마이클)과 함께 한 반년
(2008,8,1 - 2009,1 28)
여름 햇살이 따가운 8월, 호주에서 Michael이 찾아왔다. 1년 전 일주일 동안 공주대학교에서 열린 한.호 학생 workshop에 참석하면서 공주대학교에 정이 들어 호주정부의 장학금(Endeavour Award Scholarship)을 받아서 내가 superviser가 되어 보증을 서고 사범대학에서 초청장을 보내주어 6개월간의 연구기간으로 다시 공주대학교에 왔다.
연구실에서 종강모임
마이클에게 학과사무실에 연구공간을 정해주고 원룸에 숙소를 마련해줬다. 방학 중이라 교육대학원 계절제 학기가 시작되는 때였다. 바로 교육대학원 강의에 참석해서 대학원생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색다른 분위기에서 여름학기를 보내고 여름학기 마지막 날에는 금강자연휴양림 통나무집에서 1박2일의 종강모임을 가졌다. Michael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고 추억의 시간이 되었다.
8월이 지나고 9월이 되어 2학기가 시작되었다. Michael은 내가 하는 강의에는 모두 출석을 했다. 지각도 하지 않고 열심히 참석했다. 아침 9시 녹차를 두잔 들고 연구실로 찾아오는 것이 마이클의 일과 시작이 되었다. 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학생들과 친해져서 캠퍼스의 어디를 가도 Michael! 하면서 학생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학교행사에는 가능한 한 Michael과 함께 참석했다. 교수등반 행사, 국제심포지엄, 교수들과 개별모임, 학과의 현장학습 등등 함께 참석해서 교수들과 학생들과 교류의 기회를 갖도록 해주었다. 계룡산 교직원등반 행사에 참석했을 때에는 힘든 길이었지만 나의 배낭까지 메고 산을 올랐다.
마곡사에서 1박을 할 기회가 있어서 마이클과 동행했는데 마이클이 무척이나 좋아했다. 숙소 뜰에서 바비큐에 소주잔을 기우리다가 뜰에 누어서 밤하늘의 별을 헤아릴 때에는 동심에 젖어서 숙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싫어했다. 기회가 있으면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몰라서 아쉬웠다.
학과행사로 서울의 증권예탁결제원과 KBS 녹화현장을 방문했을 때에도 함께 갔다. 한국의 경험과 학생들과의 더 많은 교류의 시간을 갖게 해 주고 싶었다.
가을의 찬 기운을 받으면서 Michael의 논문자료 수집을 위해 함께 서울로 향했다. 방문 약속을 미리 했기 때문에 약속시간에 늦지 않도록 서둘렀다. 동국대학교 북한학과에 가서 북한전문가들과 인터뷰를 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고, 자료도 구해 왔다.
Michael이 판문점 방문하는 날이었다. 판문점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오후 5시 수서역에서 Michael을 pick up해서 집으로 왔다. 저녁식사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남한산성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초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드라이브를 끝내고 집에 와서 가족들과 한국의 전통음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또 그 다음날에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성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국의 결혼문화를 경험하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점심을 먹은 후 서울대학교로 향했다.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슬비를 맞으면서 서울대학교로 가서 캠퍼스를 둘러보고 모교의 학과를 방문해서 후배들과 환담도 나누었다.
11월의 하순에 접어들었다. 11월 20일, Michael과 함께 다시 서울로 왔다. 고려대학교 아시아문제 연구소에 인터뷰 약속을 해두었다.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모두들 진지하게 설명해주고 자료도 많이 챙겨주었다. 땅거미가 찾아올 무렵 연구소를 나와서 학교 앞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내일은 경남대학교 극동문제 연구소를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그런데 다음날인 21일은 좀 바빴다. 내가 병원에 예약을 한 날이다. 아침 일찍 병원예약시간에 맞추어 진료를 마치고 안국동으로 향했다. 극동문제 연구소를 찾아 자세한 설명을 듣고 자료도 넉넉하게 구해가지고 삼청동으로 내려왔다. 삼청동 입구 어느 한식식당에서 먹은 쌈밥정식이 너무나도 맛있다고 했다. 점심 후 이화여대로 가서 북한학연구소를 방문하고, 큰딸 윤정이의 안내로 캠퍼스 투어를 했다. 다음은 연세대로 걸어서 넘어갔다. 제법 쌀쌀했다.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를 방문했다. 캠퍼스 안내를 약속한 윤희는 바빠서 만나지 못했다. 연세대 방문을 마치고 집사람과 저녁약속을 한 장소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으로 갔다. 식당가에서 저녁을 같이 하고 헤어졌다. 집사람에게 줄 선물을 놓고 왔다고 아쉬워했다. 선물로 꽃을 사고 싶다고 해서 다음에 선물을 하면 된다고 했다. 오늘은 Michael이 지난번 우리집을 방문했을 때 저녁초대의 고마움으로 Michael이 저녁을 샀다.
마이클이 묵었던 서울 숙소
호주 Perth에서 딸 Mars가 Michael을 만나려고 우리나라에 온다고 했다. 목요일 강의를 끝내고 Michael과함께 서울로 왔다. 금요일에는 숙소에서 여독을 푼다고 했다. 토요일에 Mars를 보기 위해 Seoul Guest House로 갔다. Mars에게 자개로 된 손거울과 조그마한 하회탈을 선물로 주니 무척 좋아했다. Michael과 Mars를 데리고 북촌마을 전통 한옥에 가서 한옥의 정취에 접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였다. 인사동으로 걸어갔다. 일 년 전 호주 학생들과 공주대학교에서 워크샵을 한 후 서울에 와서 우리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던 식당에 가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전통찻집에서 오미자차를 마셨다.
한옥마을에서 인사동 식당 정원
Mars가 Michael이 연구하고 있는 공주대학교와 공주를 구경하고 싶어서 공주에 왔다. 연구실에서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도자기 컵을 Mars와 Michael에게 하나씩 선물로 주었다. 오후에는 Mars도 Michael이 진행하는 영어회화모임에 참석해서 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에는 무령왕릉과 공주국립박물관으로 가서 백제의 유적과 유물들을 관람했다. 저녁에는 회화클래스에서 갖는 저녁식사 모임이 있었다.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백제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내가 마련한 'Talking with Michael' 이라는 영어회화 class는 나의 마음을 뿌듯하게 해주었다. 비록 4개월간의 시간이지만 학생들의 회화실력의 향상을 볼 때 보람이 느껴졌다. 12월 2일 오후 4시반에 영어회화반 종강모임에 참석해달라는 전달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종강이 가까워지자 모두들 마이클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Talking with Michel’ 종강모임 연구실에서
학과에서 연락이 왔다. Michael이 많이 아프다고 했다. 급히 학과사무실로 내려가 보니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로 쇼파에 누어있었다. 병원으로 데려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타왔다. 걱정이 되었다. 또 오늘은 Michael이 대학원 박사과정 종강모임에 참석해서 작별인사를 하기로 한 날인데 아파서 참석을 못해 몹시 안타까워했다.
아침에 Michael과 Mars가 연구실로 왔다. 어제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이 보였다. 따끈한 차와 쪼코렛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쉬게 했다. 피곤한지 졸고 있었다. 4시가 가까워지자 회화킅래스에 가야한다고 내려갔다. 순수한 마음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저녁에는 대전에 가서 KTX를 타고 Mars와 함께 서울에 간다고 했다. Mars에게 한국에서 가장 빠른 기차를 태워주고 싶다고 했다. Mars가 토요일 오전에 출국한다고 했다.
월요일에 공주에 와서 Michael을 보니 많이 좋아졌다.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아파서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이제 마음이 좀 놓였다.
Michael 설치해주었던 Microsoft life Cam이 고장이 났는데 다시 설치해 주었다. 고마웠다. 앞으로는 음식에 각별히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밤 9시 30분, 저녁운동을 끝내고 Michael이 있는 연구실에 갔다. 늦은 밤까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논문이 많이 진척되었다. Michael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겸손해 했다. 잠시 동안 환담을 하고 숙소로 왔다.
12월 11일이 Michael의 생일이라고 승숙이가 귀뜸을 해주었다. 생일선물로 조그마한 것을 준비해서 사무실에 가서 전해주니 고마워했다. 이제는 아픈 것이 거의 다 회복된 것 같았다.
12월 16에 'Talking with Michael' 영어회화 class를 종강했다. 학생들은 하루라도 더 하기를 원했지만 17일에 있는 1박2일의 사범대 교수연찬회에 같이 가기 위해서였다. 17일 오후 1시 교수들과 함께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선운사로 향했다. 고창은 동학혁명의 발상지이고, 건강식인 복분자와 풍천장어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Michael은 이제 교수들과도 곧잘 어울렸다. 저녁의 휴식시간에도 밤늦게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고창의 명승지들을 탐방했다. 고인돌 박물관, 고인돌 유적지, 전봉준 생가, 고창읍성 등을 둘러보았다. 고인돌유적지는 UNESCO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곳이라고 했다.
고창 유적지에서
요즈음은 Michael이 내 연구실에 와서 시간이 빨리 간다고 자주 이야기 했다. 이제 귀국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연말이 될 무렵 어느 날 내가 서울에 오려고 하는데 우리 가족 선물이라면서 쇼핑백을 하나 건네주었다. 집에 와서 풀어보니 우리 가족 모두에게 예쁜 지갑을 하나씩 선물로 마련했었다. 순수한 정이 고마웠다.
한해가 가는 마지막 날 우리 집에서 Michael과 함께 할 이벤트를 마련했다. 올해의 마지막 날 밤 청계천 Luminary를 구경하고 집에 와서 우리 가족과 함께 밤 11시 30분에 떠나는 동해안 '정동진'으로 신년 맞이 무박2일의 여행을 가기로 했다. 공주에서 서울에 올 때 새해맞이 계획을 일러주고 서울로 왔다.
12월 31일, 내가 일러 준대로 오후 2시에 서울행 버스를 탔다고 연락이 왔다. 서울에 오면 서울서 가장 맛있는 삼계탕을 사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 식당이 가까운 경복궁지하철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식사시간이 조금 일러서 경복궁 민속박물관에 가서 우리의 민속에 관한 많은 유품과 풍습 등을 관람했다. 매우 흥미로워 했다. 관람을 마치고 식당으로 가서 서울의 명물 토속삼계탕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매우 만족한 것 같았다.
어둠이 드리워졌다. 광화문을 걸으면서 서울의 야경을 감상했다. 청계천으로 행했다. 그런데 올해는 청계천에 Luminary가 없었다. 아마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불경기 때문에 검소한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시청 앞 광장에 도 예년에 했던 Luminary 축제는 없었다. 광장에 마련된 야외스케이트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겨울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대형 호텔들에는 화려한 장식 불빛들이 찬란했다. 을지로입구까지 걸어와서 지하철을 탔다. 집에 와서 몸을 녹인 후, 가족 모두가 각자의 배낭에 짐을 챙겨 넣고 신년맞이 행사장으로 떠났다. Michael도 배낭을 하나 챙겼다.
11시 30분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아쉬움이 서려있는 2008년의 마지막 밤공기를 뚫으면서 동해안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라디오를 통해서 제야의 종소리가 중계되었다.
Good bye 2008!
Happy New Year 2009!를 마음속으로 새겼다.
새해의 새벽 4시를 지나서 목적지에 가까운 해변에 도착했다. 차들이 밀려서 모두들 내려서 걸었다. 행사장을 지나서 해변으로 이동했다.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신년의 첫 태양을 보기 위해서였다. 해변은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다바람이 매서웠다. 파도는 새해의 행운을 실어오는 듯 세차게 넘실거리면서 하얀 거품과 함께 해안으로 밀려들었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동해의 해안선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폭죽이 오르고 대형 연이 솟아올랐다. 모두들 매서운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죽이며 동쪽의 해안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동진의 일출시간 7시 36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이 수평선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구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서 솟아오르고 있을 해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자리를 지켰다. 해안에 집결한 새해맞이 인파가 십만명이라는 추산이 나왔다.
일출이 구름에 가려서 서서이 이동이 시작되는데 갑자기 환성이 해변을 울렸다. 구름 위로 해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한줄기 빛을 발하면서 솟아올랐다. 모두들 한해의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새벽 정동진에 도착 해변의 어름꽃 정동진의 일출
꽁꽁 얼어 버린 몸을 비비면서 해변에 접해 있는 정동진역으로 갔다. 이역이 세계에서 해변에 가장 가까운 역이라고 기네스북에 올라있다고 한다. 역사 옆 휴게실에서 따뜻한 국물로 몸을 녹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많아 들어갈 틈이 없어 집밖에서 파는 오뎅국물로 목만 추겼다. Michael은 시장기가 있었는지 컵라면을 하나 사서 들고 왔다.
다음 목적지는 태백산 도립공원이다. 그곳에는 태백산의 운치 속에 눈길 산행로가 있고 또 석탄광산의 모든 것을 보고 체험도 해 볼 수 있는 석탄박물관이 있다고 했다.
6시 26분발 열차를 타고 정동진역을 출발해서 다음 목적지인 태백으로 향했다. 열차에 오르니 이제 여유가 좀 생기기 시작했다. 몸을 좀 녹인 후 집에서 준비해온 아침식사를 꺼냈다. 함께 이동하는 일행들도 제각기 준비해온 식사로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열차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Michael이 준비해온 포도주로 Happy New Year! 신년맞이 건배를 했다.
열차는 태백의 절경을 선사해 주면서 숨 가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차창에 비치는 모습들은 옛날의 탄광이 번성했던 시절의 여운을 간직한 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서 우리나라 철도역 중 가장 높다는 주천역을 지나 내리막길을 달려서 태백역에 도착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태백산 도립공원으로 향했다.
석탄박물관에 무엇들이 있을까 궁굼했다. 크게 지은 박물관에는 7개의 전시실과 탄광 체험시설이 있었다. 석탄의 생성역사, 탄광의 발전사, 광부들의 애환 등 생생한 체험 현장과 역사의 장이었다. 박물관 관람을 끝내고 식당으로 갔다. 점심과 함께 집에서 준비해 간 민들레뿌리 술로 신년 축배를 했다.
단군성전이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경건한 마음으로 경내를 둘러본 후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뽀드득 뽀드득 눈길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올랐던 태백산의 눈길 산행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새해를 시작하는 길목에서 새로움을 안겨준 의미 있는 산행이었다.
태백산의 얼음 꽃
산을 내려 와서 정암사로 향했다. 깊은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절은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서 부처의 사리가 보관된 탑이 있는 곳이다. 계곡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 사리탑이 있는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탑이라서 그런지 탑에서 내려다 본 아래의 사찰 정경들이 더욱 숙연하게 느껴졌다.
정암사
서울로 향하는 길이다. 태백의 준령을 넘으면서 서울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모두들 어제 밤의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 7시 쯤 되었다. 저녁식사는 집에 와서 했다. Michael은 우리 집에서 우리 가족들과 함께 2009년 신년맞이 행사를 마치고 다음날 공주로 내려갔다.
1월 5일, 교육대학원 겨울학기가 시작되었다. Michael에게는 두 번째 학기가 되었다. 강좌는 '비교문화 연구'였다. 발표에도 참여하면서 매우 진지하고 흥미롭게 강의에 참여했다. 강의 마지막 시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22일 종강모임을 끝으로 공주대학교에서의 공식적인 생활을 끝냈다.
23일에는 천안에 가서 김성겸, 김남훈교수와 함께 석별의 정을 나누는 점심식사 모임을 가졌다. 고마움과 아쉬움이 교차되는 시간이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Michael은 공주로 가고 나는 서울로 왔다.
28일 저녁에는 서울의 인사동 식당에서 Michael의 석사논문에 지도교수 인증 사인과 날인을 함으로서 논문지도의 대미를 장식했다. 앞으로 더욱 연구하여 호주에서 한국의 전문가가 되어 달라고 당부를 했다.
Good bye! Michael!
치악산의 밤공기를 마시면서,
(2010,6.10)
피안의 세계 속으로 끝없이 달렸다. 오후의 햇살을 받으면서 짙어지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치악산의 품으로 하얀 차가 빨려들듯 달려갔다. 예쁘고 예쁜 모습 가슴에 담으면서 끝없이 걸었다.
어둠이 내리기 전의 치악산 정경은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가까이 다가오는 산의 모습이 기풍 당당해 보이면서 안온함이 느껴졌다. 산자락 아래 ‘길까페’ 거리에 다다르니 산정이 바로 눈앞에 올려다 보였다. 가슴을 열고 내려다보고 있는 산의 품으로 우리는 말없이 빨려들고 말았다. 그래, 저 안온한 품속에 잠시라도 안기어 보고 싶어서 서둘러 산정을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둠을 머금기 시작하는 숲길은 한적하기만 했다. 인적이 끊어진 숲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숲으로 향하는 길은 외로움에 젖은 듯 길게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우리는 숲에 빨려들어 말없이 숲으로 향했다. 한참을 오르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어느 길로 갈까?”
“정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보려면 위로 가야되겠지?”
“........”
위쪽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향기로운 숲의 기운을 마음껏 드려 마시면서 정글 같은 숲길을 걸었다.
“힘들어?”
“아니에요.”
“저기 산딸기가 있네요.”
덤불을 헤치면서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땄다.
“딸기가 달지 않네요.”
“그래? 이것은 잘 익은 것 같은데 먹어봐.”
산정은 잡힐 듯 눈앞에 보이지만 길은 멀었다. 숲속을 감싸오는 어둠의 기운은 정상으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산색이 점점 어둠을 머금은 듯 짙어져 가고 있었다.
“저 맑게 흐르는 물에 손 좀 담구고 가요.”
“그래.”
“물이 그렇게 시원치 않네요.”
“아마도 우리의 더워진 몸을 시켜주지 못하나봐.”
오르막길이 숲속으로 계속 이어졌다. 숲이 짙어지면서 어둠의 기운은 더욱 빨리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숲의 유혹은 어둠의 걱정을 자꾸만 흐리게 했다. 숲의 향기에 심취되어 한참을 더 오르니 조용함이 더해서 한적한 곳에 동화책 속에서나 나올 법한 예쁜 나무다리가 나타났다. 예쁜 다리는 계곡의 개울을 가로지르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쁜 다리와 숲이 너무 너무 잘 어울리지?”
“예쁘게 사진 한 장 찍어줄까?”
카메라의 삿터 소리가 가늘게 울려 퍼졌다.
“나도 한 장 찍어줘, 그리고 메일로 보내 줘.”
다시 들리는 샷터소리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다리 위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으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동화속의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다리 위에 우뚝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예쁜 다리를 뒤로하고 다시 정상 쪽을 향해 쉬지 않고 올랐다. 어둠이 내리는 속도로 보아 정상에는 오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정상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우리는 더 빨리 걸었다.
“더 어둡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야지?.”
“어두워지는데...”
말없이 계속 걸어 올라갔다.
“조금만 더 오르다가 적당한 장소가 나오면 거기서 돌아와요.”
“그래요.”
정상의 유혹은 계속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고 싶어서 속도를 더했다. 숲의 정글을 지나서 한동안 부지런히 올라가니 나지막한 언덕 위에 동그란 터가 나왔다. 길은 계속되었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돌아서기로 했다. 우리는 숨을 가다듬은 후 추억의 장이 될 치악산 저녁 등정을 기념하기 위해서 두 손을 마주 들어 손뼉을 부딪쳤다. 소리 없는 메아리가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내려가.”
“따라오기가 힘들면 이야기 해.”
“내가 원래 걸음이 좀 빠르거든. 옛날 데이트할 때도 같이 걸으면 같이 걷던 사람이 다리가 아프다고 했어.”
“괜찮아요.”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정글 같은 숲길을 벗어나야하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하산을 시작했다. 숲속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말없이 한참을 내려왔다.
“우리 저 개울물에 가서 맑은 물에 손을 좀 담갔다 갈까?
“그래요.”
어둠은 계속 더해지고 있지만 개의치 않고 개울로 내려갔다. 개울 속에 있는 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제가 위에 있네요.”
“괜찮아.”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시원한 물을 얼굴에도 끼얹었다.
“올라 갈 때보다 더 시원하네요.”
“땀이 나서 그런가 봐요”
“그런 것 같아.”
얼굴은 물에 젖어있었고, 머리는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굴을 닦아야지,”
“내 손수건이 ......”
“괜찮아요. 그냥 두면 말라요.”
다시 하산을 계속했다. 어둠이 내리는 숲속에서 밤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더 내려오니 올라가면서 보았던 ‘굿당’이라는 간판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포장된 길이다.
“이제는 어두워져도 괜찮겠네. 길이 좋으니까.”
“우리 저 건너편에 보이는 절에 들려볼까?”
“예, 그렇게 해요.”
방향을 틀어 ‘관음사’라는 안내판을 따라 건너편에 있는 절을 향해 위로 올라갔다. 저녁시간의 절은 적막했다. 목이 좀 말랐다. 심산계곡의 물로 목을 적시기 위해 약수터로 갔다. 대웅전 옆에 약수터가 있었다.
“물맛이 좋지?”
“예”
물을 마신 후 절의 맨 위쪽에 있는 ‘산신각’ 으로 올라갔다.
“산신각은 도교의 신선을 모신 곳이지.”
“우리나라 불교에 도교의 요소가 곁들어 있는 부분이지.”
산신각 옆에는 신선의 상이 서 있었다.
“여기에 와서 소원을 빌어봐.”
"부끄러워요."
“여기까지 왔으니까 소원을 꼭 빌어야 돼.”
“..................”
우리는 다시 절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경내를 돌아보았다. 어둠에 싸여지는 절을 뒤로하고 불빛이 반짝이는 카페거리로 향했다. 어둠이 제법 짙어졌지만 내려오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한참을 내려오니 ‘길까페’ 거리에 다다랐다. 까페거리에는 가로등 불빛이 밤을 머금으면서 거리를 비쳐주고 있었다.
Oso(오소)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페에 들어가서 야외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편안하고 예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예쁜 모습 사진 한 장 찍을까?"
"내일 더 예쁘게 차렸을 때 찍어요."
"그래도 오늘의 예쁜 모습을 담아야지."
치악산의 밤공기가 더없이 싱그러웠다.
추억을 남기고 가다
(2007,11,12~15)
까떼리나가 타고 온 KE 982 from VVO가 6시 35분 도착이 약간 지연되어 44분 도착 사인이 나
왔다. 입국장에는 비행기에서 내린 다양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눈을 떼지 않고 까떼리나의 모습
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까따’는 보이지 않았다. 나오는 모습을 놓쳤을지 몰라서 두리번거리면서 찾기 시작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가는 길을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익숙하지 못한 서울 길을 혼자 떠나기 전에 빨리 찾아야 했다.
도착 사인이 나온 지 50분이 지났다. 시간이 더 지나가기 전에 빨리 찾아야지... 지정 출구부근의 의자들을 둘러보고, 옆에 있는 출구 쪽으로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면서 출구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의자 위를 바라보는 순간, 동그란 눈망울을 굴면서 '까따'가 앉아있었다.
Katya!!! You are here!
Mr.Kim, I'm waiting for you. I asked broadcasting
to look for you.
이슬 맺힌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잠간의 차이에 서로를 놓친 것이다.
‘It's OK now.’
반가운 순간이다. 반가운 시간이 한참동안 교차되었다.
‘Let's go.’
Limusine이 기다리고 있는 Bus stop으로 갔다.
리무진에 앉아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한강변을 달려서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활용해주고 싶어서 여장을 풀고 도심을 거쳐서 청계천물길로 갔다. 시청 앞 광장의 네온의 불빛이 현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luminary 가 휘황찬란한 청계천 물길의 발원지에서는 젊음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발원지에서 솟아오르는 물은 오색 조명을 받으면서 쏟아져서 영원으로 향하는 물길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청계천 야경
아침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일찍 기다리고 있는모양이다. 지금 가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까따를 데리고 시내관광 셔틀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차창으로 비치는 이국의 분위기를 응시하면서 통역이 되는 ear phone을 귀에 꼽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어제 선물로 건네주었던 목도리를 예쁘게 두르고 앉아 있었다. 전쟁기념과, 국립박물관을 거쳐서 이태원을 지나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우리의 전통을 보여주기 위해 한옥마을 앞에 내렸다. 한옥마을에 들렸을 때에는 동그란 눈이 더 커졌다. 우리의 전통이 새로웠는지 사진포즈를 많이 취했다. 이국적인 느낌이 많이 드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멋을 맛보면서
다음 서틀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한국음식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밥하고 김치만 먹고 있었다. 김치는 분명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서틀버스가 왔다. 남산타워로 향했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본 시내전경에 호기심이 가는 모양이다. 한강을 굽어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옆에 있는 관광객이 자기나라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다가가서 말을 건네는 걸 보니 고향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정상에서 연주하는 잉카음악에 관심이 가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남산에 올라서
남산을 내려오는 버스에서 피곤한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우리나라를 배워보려는 가상한 마음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간간이 우리말 단어를 외우면서 물어보기도 했다.
창경원 앞에서 내렸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지만 북쪽의 체질이라서 그런지 잘 참아주었다. 고궁 안
으로 들어갔다. 고궁 안은 겨울이어서 그런지 한산했다. 옛날의 궁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그 시절의 생활이 흥미로운가 보다. 옷이 좀 엷어서인지 추워 보이긴 했지만 간간이 포즈를 잡으면서 카메라에 순간을 담고 싶어 했다. 고궁을 돌면서 이것저것 눈여겨보는 걸 보니 우리의 옛날의 삶의 모습이 신기했나보다. 이색적인 생활풍습에는 관심이 가는 것 같았다. 코끝이 빨개지면서도 손을 놓지 않고 졸졸졸 잘 따라왔다. 종묘로 건너오는 육교위에 섰다. 바람이 차서 얼굴이 빨갛게달아올랐다.
‘Are you cold?’
‘No, it's not.’
예쁜 대답은 한결 같았다. 추워도 견디라고 손을 더욱 꼭 쥐어주었다. 창경원을 거쳐서 종묘를 지나
종로로 나왔다.
창경궁에서 식당에서
고궁을 나와서 몸을 덥힐만한 곳을 찾았다. 따뜻한 국물이 좋을 것 같아서 우리의 전통 식당에 와
서 온면을 시켜주었다. delicious! 하면서도 어쩐지 온면이 줄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면발을 몇 개씩
찍어먹고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delicious! 다. 예쁘다.
시장거리로 갔다. 사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혹시라도 좋아하는 것
이 있는지 손을 끌고 쇼핑거리를 이리저리 다녀보았다. 돌아오면서는 우리나라 지하철을 경험시켜주었다.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마음이 예뻐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저녁이 부족했던지 커피와 간식을 시켰다. 어둠이 짙어왔다. Good night !
다음날이다. 오늘은 오전에는 혼자서 주변을 돌아보며 쇼핑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보라고 했다. 시
청광장에 개설된 아이스링크에서 skating이 재미있었다고 했다. 2년 전에 헤어진 아빠가 스케이트를 가르쳐주셨다고 했다.
오후의 행선지는 ‘Seoul Forest’, ‘0ld Palace’, or ‘Forest’? ‘Up to you.’ 언제나 예쁜 대답이다.
시내를 가로질러 대형 서점으로 갔다. 관심이 있는지 서점의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
와 찬 기운을 헤치며 자연으로 향했다. 삼청동 전통거리를 지나삼청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여름이
면 온통 초록으로덮여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고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음악을 많이 좋아한다고 했
다. 휴대폰에 저장해둔 ‘티파니에서 아침을, 재생해서 나의 귀에다 대주었다. 음악을 듣는 중 러시아
집에서 전화가 왔다.
손을 잡고 끌어주면서 공원의 산기슭을 계속 올라갔다. 찬 기운이 더욱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벤치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천진스러웠다. 붉으스레한 얼굴이 뽀얗게 변해갔다.
삼청공원에서
땅거미가 질 무렵 우리는 고전미가 풍기는 까페거리로 내려왔다.
‘Are you cold?’
‘It's OK, but a little bit cold.’
길가에 있는 까페로 들어갔다. 따뜻한 커피로 손과 얼굴을 녹였다. 커피는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마음이 예뻐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카페에서
까페거리로 나왔다. 자기는 색 중에서 빨간 색을좋아한다고 했다. 까페거리에 예쁜 구두들이 진열
되어 있었다. 진열장에 들어가서 빨간 구두를 눈여겨보다가 too expensive 하면서 물러섰다.
‘Do you want to buy it?’
‘If you want I will buy it for you.’
‘No, I don't. I have many shoes at my home.’
언제나 예쁜 대답이다.
저녁노을을 등지고 삼청동길을 내려왔다. 경복궁을 거쳐서 세종로를 걸었다. 먼 거리를 걸었는데도지치지도 않고 잘 걸어와 주었다.
오늘은 입맛에 맞는 저녁을 사주고 싶어서 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한곳을 찾아냈다. 저녁이
입맛에 맞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삼청동 카페거리 식당에서
‘When we will see again?’
‘ ...................... ’
식사를 마치고 네온이 반짝이는 불빛 아래로 걸었다.
네온의 불빛은 더욱 찬란했다.
I have to say good by! here.
Bye bye!!! Katya!
Bye bye!!! Mr. Kim!
I will miss you, Mr. Kim.
Me too. Katya!
이제 손을 놓았다.
아름다운 시간들이
추억의 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청 앞에서
'까떼리나(Ekaterina)'는 갔다.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그 모습
이 가슴을저며 왔다. 떠나간 지금도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면서 이끄는 손에 끌려 졸졸졸 따라오고 있는 것 같다.
‘Don't let down my hand, if you let it down, you lost me.’
부디 열심히 생활해서 성공하라고 일러주었는데...
팔공산 대구교육연구원
009, ,1, 20)
대구교육원에서 강의청탁이 왔다. 강의청탁 전화를 받는 순간 지난해에 한번 찾았던 곳이라 아련한 향수의 정이 느껴졌다. 팔공산 자락을 거슬러 올라가던 호젓한 산길이 떠올랐다. 강의를 약속하고 달력에 강의 날자를 표시를 했다.
1월 20일, 강의 시작이 11시부터이기 때문에 조금 여유 있게 8시40분 대전발, 9시 36분 동대구 도착 KTX를 예매해 두었다. 학교 숙소에서 새벽 운동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에 도착해서 교육연구원으로 전화를 해서 동대구역에 9시 55분에 도착한다고 연락을 했다. 동대구역에 내리니 교육원에서 보내온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팔공산을 향해 달렸다. 팔공산 기슭을 따라 교육원으로 가는 길이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지난 해에 갔던 길이라서 낯설지가 않았다.
교육원에 도착해서 전화로만 통화를 했던 친절하고 예쁜 목소리의 주인공 나 혜랑 선생님을 먼저 찾았다. 출장 중이라 만나 뵐 수가 없었다. 출장가면서 부탁을 하셨다고 하면서 다른 분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후배 교육동지들의 진지한 열기와 시선을 감지하면서 강의를 진행했다. 보람의 시간이 이어졌다. 강의의 내용은 ‘사회.문화 교육’이다. 내가 평생의 과업으로 연구한 분야다. 이 분야를 강의 할 때면 교육의 보람이 삶의 보람이 되어 배가된다. 강의를 하는 중에 중간 중간 세계의 지역과 문화의 생생한 체험을 곁들였다. 천상의 정원 팔라우, 아직도 고유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마이크로네시아 얖섬, 북극에 가까이 있는 캄차카반도,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의 생활, 과테말라의 마야문명, 페루의 잉카문명 등등...
오전 강의를 끝내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마치고 학생야영장을 거쳐 교육원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숲의 향기에 끌려서 조금 더 조금 더 들어가다 보니 팔공산 중턱에까지 왔다. 혼자 걷는 길이었지만 울창한 숲의 분위기가 나를 벗 해주면서 더없이 편안하게 해 주었다. 점심시간의 휴식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정상의 유혹을 아쉬움을 머금고 접으면서 발길을 돌렸다. 오후 강의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하산을 했다.
오후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한 시간을 끝내고 잠시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오늘 강의의 마지막 시간을 진행했다. 교육동지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에서 강의 속도를 더해 가면서 강의를 진행했다. 주어진 시간이 부족해서 아쉬움이 더해졌다. 세상 모든 일이 아쉬움 속에서 끝나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에 아쉬움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강의를 끝맺었다.
오후 3시가 넘어섰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정감어린 산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내려왔다. 다시 KTX에 몸을 실었다. 공주에 돌아오니 오후 7시가 가까워왔다.
하루의 강의였지만 연구원의 포근한 분위기와 선생님들의 친절한 안내 그리고 연구원까지 오가면서 태워주신 기사분의 친절이 대구교육연구원을 가슴 속에 오래토록 간직하게 해주었다.
팔공산 대구교육원
금강산에서의 추억 (2006, 6, 20-22)
출경(出境), 익숙하지 않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글의 뜻은 경계선을 넘어 간다는 뜻이니 어려
울 것은 없지만 기분은 좀 이상했다. 같은 나라로가는데도 외국에 가는 것보다 더 까다로웠다.
경계선을 넘으니 북쪽에서 나온 차가 우리가 탄차를 에스코트(escort)했다. 창가로 비쳐지는 확연
히 달라지는 모습은 산에 나무가 없는 민둥산의 모습이 계속되고있는 것이었다. 또 동그란 군모를 쓴 북쪽 군인들이 간간이 눈에 띠였고, 마을의 집들이 모두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금강산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남측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한 후, 북쪽 가무단의 노
래와 춤공연을 관람했다. 고음의 가냘프고 간드러진 목소리들이 지금도 귓가를 맴도는 것 같다. “반
갑습니다.”로 시작된 노래와 춤은 우리들의 피로를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생활모습이 약간 딱딱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우리 와 접하는 북쪽 사람들의 친절한 마음은 서로
정을 느낄 수 있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호텔의 노천 배란다에 마련된 포장마차 주점에서는 손님들
의 요청에 따라 북쪽 종업원들이 북쪽의 노래를 스스럼없이 불러주기도 했다.
이곳에서 접해본 특이한 문화는 환송의 문화였다. 떠나가는 손님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밖에 나와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한손이 부족해 두 손을 들고 크게 흔들며 환송을 하고 있었다.
금강산 식당에서 구룡폭포로 가는 길
금강산에서 2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구룡폭포와 상팔담을 향해서 방향을 잡았다. 서틀버스로 목란다리 앞 주차장까지 올라갔다. 이제부터는 금강산 절경을 감상하는 산행이 시작되었다. 목란관을 지나 양지다리를 건너고 또 금수다리를 건느니 북쪽의 지도자가 마셨다는 삼록수가 바위틈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놓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모두들 삼록수에 목을 추기고 만경다리를 건너 동굴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문을 지나서 금강산의 절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은 맑음에 지쳐서 옥색 빛을 발하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두들 산행에서
오는 목마름을 골짜기를 흐르는 옥수로 적셨다. 계곡을 연결해주는 흔들다리는 주위의 절경에 취해서인지 혼이 빠진 듯 좌우로 춤을 추며 우리를 맞이했다. 흔들다리를 지나 조금 오르니 옥류담 맑은
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옥류담 옆에 있는 무대처럼 생겨서 이름 부쳐진 무대바위에서는 모두
들 금강산의 절경을 노칠세라 폼을 잡고 사진들을 찍었다.
구룡폭포 앞에서 만물상 가는 길
옥구슬 굴르듯이 흘러와 모인 옥류담 맑은 물은 이곳을 지나 산행하는 사람들의 식수 공급원이 되
고 있었다. 우리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준비해간 플라스틱 병에 물을 가득 가득 채웠다.
옥류담을 지나서 연주담으로 향하는 길의 건너편에는 때가 아니라서 수량(水量)을 다 채우지 못한
비봉폭포가 때를 기다리는 듯 가는 물줄기를 흘려내리고 있었다. 연주담을 지나 관폭정에 오르니 구
룡폭포의 빼어난 경관이 눈앞에 다가왔다. 모두들구룡폭포의 비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한참을 지난 후에 모두들 정신을 가다듬고 구룡폭포를 뒤로하고 내려와서, 옆으로 꺾어 상팔담을
향해 다시 산을 올랐다. '상팔담'은 아름다운 8개의담소가 구룡연 위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고 했다. 또 이곳에는 금강산의 8선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정상으로 향하는 철사다리들로 연결된 길을 따라 상팔담 정상에 오르니,8선녀의 전설에 걸맞게 금강산의 수려한 장관이눈앞에 펼쳐졌다. 이곳 역시 북쪽 지도자의 다녀간흔적이 장식되어 있었다.
구룡폭포와 상팔담의 절경을 가슴에 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오는 길이었다. 뒤에서 들
려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발길이 끌려갔다. 우리는조심스럽게 대화에 합류했다.
"저는 여기서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남쪽 분들 만나면서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북쪽에서도 데이트를 합니까?"
"네, 북쪽에서도 데이트 합니다.“
스스럼없는 대화가 이어지면서 어색함도 사라졌다. 하산의 길이 끝남이 아쉬웠다. 주차장에 도착
해서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서틀버스의 출발을 알려왔다. 주차장 판매대에서 급하게 준비한 조그마
한 마음의 선물을 건네면서, "이거 가져요."
"아닙니다."
" 가져요." " 고마움의 표시인데"
뒤에서 나즈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럼 또 오십시오."
분단의 현실을 의식하면서, 서로를 위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함께 했던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값진 시간이었다. 아쉬움을 안고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을 탓하
면서 숙소로 돌아와서 오후 일정인 삼일포로 향했다.
삼일포라는 이름은 옛날에 어느 임금이 관동팔경을 구경하기 위해 한곳에 하루씩의 일정을 잡고 순례를 하던 중, 이곳에 와서 경치가 너무 좋아 하루가 아쉬워 삼일을 묵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지금은 호수로 변했다고 했다.
호수의 한 가운데는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름 붙여진 와우도(蝸牛島)가 있고, 그 옆
에는 한량들이 풍류를 즐겼을 법한 사선정이 호수위에 떠 있으면서 정취를 뿜으면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호수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단풍각을 들려서 삼일포의 분위기를 가까이에서 접해본 후, 호
수에 접해 있는 길을 따라 봉래대, 연화대를 거쳐장군대에 이르니 삼일포의 진가가 확연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왕래가 자유로워지면 삼일포에 와서 삼일이 아니라 3주포, 석달포, 삼년포가 되도록 해달
라는 안내원의 애교 섞인 설명을 들으면서 삼일포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는 평양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명성 그대로 시작부
터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실감케 해주는 순간들이었다.
삼일포에서
금강산에서 3일째 되는 날이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면서 서틀버스를 타고 만물상으로 향했
다. 꼬불꼬불 산길을 30여분 올라가서 만상정 주차장에 내렸다. 눈앞에 펼쳐지는 산세는 어제의 구룡연 코스와는 사뭇 차이가 났다. 안내원이 말하기를만물상이 어디냐고 묻지 말라고 했다. 이 산 전체가 만물상이라고 했다.
굽이굽이 연결되는 절경의 길을 따라 삼선암과 귀면암을 거쳐 칠층암 구비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부터는 절벽을 오르는 가파른 길이었다. 봉우리로연결되는 철사다리를 붙잡고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는 철사다리 등반이 시작된 것이다.
만물상 봉우리의 하나인 천선대를 향하는 철사다리길을 오르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감탄을금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기암(奇巖) 절벽들, 아!이것이 자연이 빚어놓은 최대의 걸작이련가!. 기암의 봉우리들에 놓여 있는 가파른 철사다리들을 쉴 새 없이 오르내리면서 우리 모두는 만물상의 품 속으로 흠뻑 빨려 들어갔다.
만물상의 비경
천선대를 지나 만물상 봉우리 사이를 굴로서 연결되어 있는 하늘문을 지나니, 건너편 봉우리에 있
는 망양대로 향하는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물상 봉우리들을 지나면서 맛보는 금강산의 절경과 맑은 공기는 가슴에 쌓여있는 속세의 잡념들을 말끔히 씻어주는 듯 했다. 숲속을 지나다가 마주치는 바위틈의 가는 물줄기에 나뭇잎을 받쳐서 물을받아 목을 추길 때에는, 내 자신이 자연에 동화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망양대는 1,2,3봉으로 되어있었다. 각 봉우리를 차례로 들려보면서 금강산의 절경과 멀리에 펼쳐
있는 동해의 푸른 물결을 아우르며 모두를 가슴에 담았다.
만물상에서
재회, 마지막 서틀버스
망양봉을 끝으로 만물상의 절경과 아쉬움을 가슴에 담고 하산의 길에 접어들었다. 가파른 산행이었지만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내려오면서도 혹시라도 올라갈 때 놓쳤던 경치가 있는지 찾아보면서서틀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차장 쉼터를 둘러보는 순간, 눈에 익은 얼굴이 반가움을 머금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오늘 이쪽 코스에 왔어?”
얼굴에 미소를 띠우면서
“선생님 만나려고 왔습니다.”
“선생님 올라가실 때 뒷모습 봤습니다.”
“제가 해설하면서 봤습니다.”
“그래 다시 만나니 반가워요.”
손을 조심스레 끌면서,
“선생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끄는 손길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너무나도 반가운 재회였다. 어제의 헤어짐이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의 시간인 줄 알았었다.
말없이 한동안을 앉아 있었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순수하고 천진스러운 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이름이 뭐지? 김류경입니다. 나 이름은 ... 명함을 건네주었다. 제가 많이 배워야 되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언제 또 만나지?"
"가을에 단풍이 들면 가족들과 함께 구경 오십시오."
"그렇게 해볼께."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조용히 안아주었다. 눈망울에 이슬이 맺혔다.
나, 저 마지막 하산 버스를 타야 되, 그럼 갈께, 류경, 건강히 잘 있어, 단풍이 들 때 또 올 수 있으
려는지 몰라.
오늘은 정말 헤어져야 하는 날이라 생각하니 아쉬운 생각이 북받쳐 올랐다. 하산하는 버스가 차례
로 떠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는 마지막 떠나는 버스만 남았다. 마지막 하산하는
서틀버스를 탓을 때는 영원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은 듯 가슴이 저며 왔다.
안녕! (2006, 6, 22)
만물상 안내자 김남숙 금강산 온정각 뜰에서
경기 오봉산의 추억 (2005, 6, 6)
6월, 아직은 그렇게 덥지 않은 날씨였다. 전출 명령을 받고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해 만난 정명복 대령과 새로 부임하는 임지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지 몇 달이 지난 후 오늘에서야 그 약속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녹음에 빨려들듯 송추계곡으로 접어드니 눈앞에 펼쳐지는 싱그러운 전경이 우리를 맞이했고, 작품 같은 오봉산 정상이 우리를 기다리듯 다가왔다.
반가운 해후를 하고 우리 일행은 오봉산을 향해서 등반을 시작했다. 오르다가 숨이 차면 바위위에 올라 쉬고, 비탈길 지나 완만한 길이 나오면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녹음 속의 길을 걸었다. 전망 좋은 바위를 만나면 바위 위에서 경치를 감상하면서 쉬어가며 올라가니 제1의 기착지인 여성봉에 이르렀다.
오봉산에서
오후의 등반이라 서산으로 숨어드는 해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절경인 오봉산의 정상을 눈앞에 두고 돌아설 수 없어서, 일행의 의견을 모아 여성봉에서 오봉산의 정상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봉산에서 여성바위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진 오봉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착한 것은 해가 서산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오봉의 정상에서 바라본 오봉산은 명산의 자태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들 산정에서 심호흡을 고르면서 오봉산의 절경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산의 정상의 한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부처님 바위,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공기돌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듯한 아슬아슬한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산은 가히 신의 예술품이었다.
어둠이 오기 전에 서둘러 내려와야 되기 때문에 내려올 때에는 걸음의 속도를 높여도 보았다. 그러나 내려오는 도중에도 아쉬움을 참지 못해 발길이 중간 중간에서 머물러 섰다. 아름다운 경치를 조금이라도 더 가슴에 담아보고 싶어서였다.
오봉산의 절경
아래로 내려와서 이 지역에서 이름이 있는 연두부 식당으로 갔다. 토속음식의 저녁식사와 옥수수 동동주는 깊은 정담의 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값진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해 주었다.
오봉산의 추억 여성봉에서
송추계곡의 두 번째 방문(2005, 11, 19)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11월이 중간을 넘어설 무렵 오후의 햇살을 받으면서 송추계곡을 향해 달렸다. 북악의 능선은 오후의 햇빛에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어둠이 찾아드는 송추계곡
어둠이 찾아드는 정감어린 송추의 계곡, 정대령이 이동하면 쉽게 올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순박한 시골 정취를 안은 토속음식점에서 우리는 형제의 연을 더욱 굳게 다짐하면서 옥수수막걸리로 축배를 들었다. 보람과 행복이 가슴 속 깊숙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티 없이 맑은 삶의 아름다운 한 부분이 추억의 장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인정의 흐름이 가슴이 시리도록 스며들었다. 건승을 빌면서 어둠 속의 송추계곡을 뒤로 하고 돌아왔다.
엄사리 '국사봉' 식당에서 (2009, 4, 2)
아우 정대령이 집사람 정년을 축하해 주기 위해 날을 잡았다. 정대령이 있는 계룡시로 갔다. 정대령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사봉' 한식집에 연회자리가 준비 되어 있었다. 언제 만나도 반가웠다. 우리는 축하 케익에 촛불을 켜고 평생을 교직에 헌신한 집사람의 공을 기리고 노고를 위로하면서 축하박수와 함께 촛불을 껐다.
저녁 10시를 넘어섰다. 아쉬움으로 모임을 끝내고 서울에 돌아오니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섰다. 고마움이 가슴을 가득 메운 채 하루를 보냈다.
정년기념 케익 추억의 시간
추억의 필리핀 여행 (2005,8)
모두들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인천공항에 모였다. 반가운 얼굴들, 모두들 홀가분한 기분으로 필리핀 문화탐방 단원이 되었다. 우리를 실은 비행기는 밤의 공기를 가르면서 남국의 하늘로 향했다.
열대의 밤공기를 안으면서 내려앉은 마닐라 공항, 처음이 아니어서 낯설지 않았다. 눈에 익은 마닐라의 거리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마닐라 리잘 공원
첫날의 행선지는 필리핀의 유명한 휴양지 따가이따이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중요한 문화유산이 있는 교회를 방문했다. 이 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나무 올갠(Bamboo Organ)이 있는 곳이다. 고색창연한 교회의 건물과 감동적인 대나무 올갠의 음률은 마닐라 방문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교회의 감동적인 선율에 취한 채로 다음은 필리핀의 대중교통수단인 '지프니(Geepney)' 생산공장으로 갔다. 우리의 눈에는 수작업을 하는 가내공장정도로 보였지만 이 나라에서는 중요한 공장인 것 같았다. 공장을 돌아보면서 필리핀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이 느껴졌다.
교회 뜰에서 대중교통수단 지프니
지프니공장을 나와 오늘의 목적지인 따가이따이로 향했다. 신나게 달리는 차 속에서 시골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한국산 중고 수입 버스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고장을 일으킨 버스가 한국산 중고버스라고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따가이따이'산 정상에 있는 조세핀 식당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본 따가이따이의 딸(Taal) 호수의 전경은 환상적이었다. 조세핀식당에서의 식사시간도 모두들 즐거워했다. 아쉬움이 있었다면 호수의 경관을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안개구름이 호수를 덮어 버렸기 때문에 그 모습을 오래 볼 수가 없었다.
호수로 내려올 때에는 길가의 과일 판매대에서 열대과일을 시식하면서 남국의 정취를 느껴보았다. 모터보트를 타고 화산호수를 질주하면서 우정을 엮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필리핀의 특징적인 체험을 위해서 이푸가오족 전통마을 모형이 세워져 있는 지역으로 갔다. 전통마을을 둘러본 후 이곳의 발마사지가 유명하다고 해서 원하는 사람들은 발마사지를 신청했다. 발마사지를 받으면서 만족스러워하던 모습들은 보는 사람들까지도 즐겁게 했다.
호수 항해 이푸가오족 주거지 모형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극장식 레스토랑 '잠보앙가' 로 갔다. 필리핀의 전통음악, 전통무용이 분위기를 잡으면서 계속 이어졌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우리의 일행도 같이 참여하면서 필리핀의 추억을 엮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전통문화 공연
둘째날은 세계적인 절경 '팍상한'폭포가 있는 라구나지역으로 갔다. 가는 길에 길가의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열대과일을 시식할 때의 시원한 맞도 일품이었고, 그곳의 특미인 '부코파이'의 맞도 인상적이었다.
폭포입구에 도착해서 보트를 타고 급류를 거슬러 오를 때의 스릴은 오래토록 기억에 남이 있다. 계곡의 절경은 세계적임을 실감케 했다. 폭포아래에 다다른 후 뗏목을 타고 굉음을 쏟아내면서 내리치는 폭포 속으로 들어갔다. 내리치는 물줄기가 머리를 칠 때에는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모두들 마냥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팍상한폭포
저녁식사는 필리핀의 전통음식으로 해결하고, 우리는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 휴식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저녁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나와 있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즉석 유흥을 개발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도 줄거움을 나누어 주었다. 즐거운 저녁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마닐라의 마지막 밤을 좀 더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서 노래연습장을 찾아갔다. 모두들 숨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셋째날은 떠나는 날이다. 모두들 아쉬워했다. 마지막날에는 마닐라 시내의 리잘공원에 가서 필리핀 독립영웅 '호세 리잘'의 흔적을 느껴보았다. 그곳은 필리핀의 독립영웅 리잘(Rizal)이 처형을 당항 장소를 기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원이다. 일상적인 공원과 다를 바 없지만 리잘의 동상 앞에 서니 경건함이 느껴졌다.
리잘공원을 떠나 다음에는 스페인시대에 요쇄였던 포트 산티아고(Fort Santiago)로 갔다. 지금은 관광객이 찾는 광관지가 되었지만 그 옛날 스페인 식민시대에는 서슬이 시퍼런 식민지지배자들의 눈빛이 번뜩거리던 곳이었다는 것을생각하니 건물, 정원 할것없이 예사로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독립영웅 리잘이 갖혀 있던 감옥 건물과 리잘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길에 발자국을 동판을 박아 그대로 재연해 놓은 것을 볼 때에는 가슴이 뭉쿨해 졌다. 더욱 섬찟해졌던 곳은 감옥 옆에 해수면 아래로 굴을 파서 바닷물로 감옥에 같힌 사람들을 사형시켰던 지하 굴이었다.
산티아고 요쇄를 나와서 우리는 스페인 통치시절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쌓은 '이트라무로스'성으로 갔다. 내부에 있는 빗물을 받아서 식수로 정화하는 시설은 오늘날에는 하나의 관광자원이 되어 필리핀에 기여하고 있었다.
맥아더장군과 필리핀의 케손이 회담하는 동상 옆에서 기념촬영도 했다. 약간 이른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이제는 필리핀이 너무나도 가까이 느껴진다.
맥아더 동상 국립묘지공원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의 순간들, 모두가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되었다. 추억을 엮으면서 보낸 그 시간들이 이제는 그리움의 시간들이 되어 영원으로 향하고 있다.
마닐라의 추억
Ⅲ. 우정의 물결은 이어지고
대학동창들과 인왕산 산행(2018,10,2)
오늘은 대학동창 모임인 師友會 산행 날이다. 오전 10시에 홍제동 전철역에 모여서 조선시대 궁궐의 右 白虎산인 인왕산으로 향했다. 대학 졸업 후 50년이 지났지만 만남의 기분은 항상 학창시절과 같다.
홍제역을 나와서 개미마을을 거쳐 열차바위를 지나서 인왕산 정상에 올랐다. 하산 길에 호랑이동상을 거쳐서 누하동, 옥인동, 필운동을 거쳐서 경복궁역 부근의 나주곰탕집에서 정겨운 점심식사 자리를 가졌다.
인생의 후반 길에서 학창시절 때 못다 나눈 정겨운 시간들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면서 남아있는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보내기로 다짐하면서 다음의 만남을 약속하면서 헤어졌다.
정상을 향해서 정상에 올라서 성곽 길을 따라 하산
공주 캄차카여행팀 모임(2018, 11,7)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세상을 배우면서 인연을 맺어서 마음의 고향을 만들어 준다. 북태평양 베링해에 뻗어 나온 캄차카반도를 여행하면서 맺어진 인연은 해가 갈수록 끈끈해지고 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오후 4시 10분 공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5시 35분 버스가 도착하니 모임을 주선해주고 있는 정명복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웠다. 공주에 갔으니 나의 정열의 혼이 깃들어 있는 공주대학교에 들러서 반가운 분들을 만나고 저녁모임이 준비되어 있는 ‘소담정’으로 갔다.
소담정에 가서 여행팀들과 반가운 재회를 하고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울로 돌아갈 버스의 예매시간이 다가와서 아쉬운 마음을 안고 다음을 약속하면서 자리를 떴다. 버스에서 눈을 감으니 지나간 시간들이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되어 머리를 스쳐갔다. 서울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어섰다. 아름다운 시간들이 그리움의 세계로 흘러갔다.
추억의 사진(캄차카여행 때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울대공원에서 옛 동료들과 정겨운 시간을
혈기에 찬 젊은 시절의 25년 동안을 함께 해 오면서 같은 숙소에서 생활한 옛 동료들이 모였다. 서울대공원에서 둘레 길을 걷기로 했다. 반가움과 함께 그리움까지 밀려들었다.
전에도 가끔 찾아온 대공원이지만 월요일이라 관람객이 많지 않아서 더욱 정겨운 분위기가 주변을 감싸 안았다. 모두들 80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건강관리를 잘 해서 건강을 지키고 있었다.
공원 내 서틀버스를 타고 공원의 위쪽에 위치한 호랑이 우리까지 가서 버스에서 내렸다. 호랑이 4형제의 모습을 본 후에 잠시 쉬면서 공원의 가을 단풍을 감상했다. 돌아오는 길은 걸어서 내려오면서 각종 동물들을 구경하며 공원 입구로 내려왔다. 공원의 입구에 와서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 홍학의 우리 앞에서 홍학 무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대공원 관람을 끝내고 입구로 나오면서 아쉬움이 쉽게 가시지 않아 감이 빨갛게 익은 감나무 아래에 걸터앉아서 기념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홍학우리 앞에서 홍학을 배경으로 감나무 아래에서
대학 학과 동문회 성락원 탐방
오랜만에 대학 선배 후배가 문화탐방의 자리에 모였다. 성북동에 있는 일반에 개방되지 않다가 최근에 개방된 개인 소유 정원 ‘성락원’을 탐방하는 날이다.
모교 학과 동창회 행사로 서울의 도심 속의 자연 정원 성락원을 탐방했다. 선후배간에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지금은 전시관이 되어 있는 옛 서울시장 공관을 찾아보고 이어서 서울 성북동에 있는 도심속의 자연 정원 성락원으로 향했다. 성락원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잠로2길 47에 있으며 서울 도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민가의 정원이다. 성락원은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그 후에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5간 별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성락원은 지금 복원 중이어서 개별 관람이 되지 않는다. 우리 팀의 관람 예약 시간인 오후 4시에 성락원 입구에 모였다. 안내인의 안내에 따라 성락원안으로 들어갔다. 성락원은 앞뜰, 안뜰, 바깥뜰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고, 앞뜰에는 쌍류동천과 용두가산이 있다. 그리고 안뜰에는 영벽지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에는 송석과 연못이 있다. 서쪽 암벽에는 추사 김정희가 새긴 ‘장빙가(檣氷家)’라는 글씨가 있다.
정원의 내부 성락원 내부 고택들
* 성락원은 명승 제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면적은 1만 4407㎡이다. 성락원은 뒤에 산등성이를 등지고 좌우에 청룡·백호의 산줄기가 벌려선 형국에 자리 잡고 있다. 성락원 입구에 들어서면 두 줄기 계류가 하나로 모이는 산문(山門) 같은 계곡이 있으며, 여기에 ‘雙流洞天(쌍류동천)’이라는 글자가 계류 암벽에 새겨져 있다. 쌍류동천 안으로는 용두가산(龍頭假山)을 만들어 성락원이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 용두가산은 성낙원 내원(內園)을 아늑하게 감싸서 깊이를 주기 위해 만든 인공조산(人工造山)으로 200∼300년 된 느티나무·음나무·참나무 숲이 울창하다.
내원에는 계류의 암벽 밑에 소(沼)를 조성하였다. 이 소는 장축이 16m, 단축이 약 12m이며, 물 깊이는 약 1.5m이다. 소의 주위는 자연암벽과 암반으로 이루어졌는데 물이 흘러내리는 북쪽 암벽에는 인공으로 수로를 파고 3단의 폭포를 조성하였다. 폭포로 떨어지는 3단의 물줄기는 생동감 있는 수경(水景)을 연출하고 고요한 계곡에 요란한 물소리를 낸다. 이 폭포 옆 바위에 ‘靑山壹條(청산일조)’라는 전서체 각자가 있으며, 소의 서쪽 암벽에는 행서체의 ‘檣氷家 阮堂(장빙가 완당)’이 새겨져 있는데, 장빙가란 겨울에 고드름이 매달린 집이란 뜻으로 김정희(金正喜)가 썼다. 영벽지란 세 글자는 초서체로 썼으며, 해생이란 호를 가진 사람이 오언시를 해서체로 쓴 것이다. 계묘는 1843년(헌종 9)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성락원의 소의 명칭이 ‘영벽지’임을 알 수 있다. 성락원에는 산의 계류를 이용하여 상·중·하에 세 개의 연못을 만들었다.
Ⅳ. 가족의 정을 쌓으면서
민족의 영산 백두산으로
(2018,8,12~15)
백두산을 가기 위해 중국의 선양 행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의 항공정보 판에서 항로를 체크해보니 인천을 출발하여 북한 땅을 피해 서해로 들어가서 선양을 향해 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직선거리의 거의 두 배를 비행하고 있었다. 민족의 비운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비행기는 만주의 제일 도시 선양공항에 내려앉았다. 선양에는 만주족으로서 중국의 한민족을 지배한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의 아들 태종의 무덤인 '북릉'이 있다. 우리는 북릉을 향해 차를 몰았다. 광대한 능의 묘역을 둘러 보면서 만주족으로서 중국대륙의 한족을 지배했던 기개를 느껴보았다.
북릉 입구 북릉의 이름 북릉내부
북릉 탐방을 마치고 백두산 등정을 위한 중간 지점의 도시 통화로 이동했다. 통화는 백두산이 유명 관광지가 된 후에 급속히 발전한 도시라고 했다.
통화로 가는 길의 휴게소 통화의 저녁 거리 풍경
아침 일찍 도시락을 지참하고 백두산 북쪽지역 북파 등정길에 올랐다. 버스로 또 작은 차로 약 4시간 30여분이 소요되는 등정 길이었다. 산 바로 밑에서 지프차로 백두산 정상인 천문봉에 오르니 가끔씩 가랑비가 내리면서 안개를 몰고 와서 눈앞에 전개되는 천지를 신비 속으로 끌어가곤 했다. 모두들 인내심을 가지고 천지를 지켜보고 있으면 가끔씩 천지가 얼굴을 내밀면서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그럴 때에는 모두들 환성으로 화답했다.
백두산 천문봉 정상 안개에 싸인 신비스러운 천지
천지를 감상한 후에 백두산 천지 물이 발원이 되어 일 년 내내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는 장백폭포로 향했다. 폭포 아래에 도착하니 높이 68미터의 거대한 폭포가 주변을 압도했다. 폭포를 향해 올라가는 주변에는 노천 온천군이 형성되어 폭포의 경관과 어울리면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장백폭포
장백폭포를 뒤로하고 백두산의 배후 도시 이도백화로 이동했다. 온천 도시로서 백두산 등정의 피로를 풀어주는 도시였다.
셋째날은 백두산 서쪽 지역인 서파로 이동해서 정상 가까이에서 도보 등정을 하여 천지를 조망하는 날이다. 새벽 일찍 서둘러 출발하여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니 날씨관계로 백두산 정상에 태풍예보가 내려져서 백두산 전 지역 등정이 통제되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잠시 머물다 차를 돌려서 통화로 향했다. 통화에 와서 점심식사를 하고 내일 출발할 공항이 있는 선양으로 향했다. 약 7시간의 여정으로 우리 민족의 혼이 깃든 만주대륙의 정취를 느끼면서 차를 달려서 오후 7시경에 선양에 도착했다.
네째날은 여유를 가지고 귀국준비를 한 후에 공항으로 향했다.
정선의 '파크로쉬'에서 가족이 함께
(2018, 9, 24 ~26)
민족의 대 명절 추석이 5일 연휴로 잡혀졌다. 추석 연휴를 가족이 함께 강원도 정선에 있는 '파크로쉬'에서 보내기로 했다. 연휴의 길이라 길이 붐벼서 평소 걸리는 시간의 두 배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떠나는 길이라 지루함은 반감되었다. 강원도 산간지역에 접어드니 산수의 수려함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먼 길의 피로를 씻어주었다.
서울에서 오전 11시 쯤에 출발했는데 리조트에 도착하니 세시가 넘었다. 그러나 산중의 분위기가 심신의 컨디션을 돋구어주었다. 이 호텔은 평창 동계올림픽 때에 알파인 경기장 옆에 세워져서 올림픽경기에 기여를 한 곳이다. 경기장을 만들 때에 지역 주민들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올림픽 후에 경기장의 원상복귀를 약속했지만 지금은 시설의 재건 활용에 대해서 심도있는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도 국가의 좋은 자산으로 가꾸어졌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파크로쉬 전경
첫째 날에는 호텔에 도착한 후 주변의 산중 풍치를 감상하고 호텔의 편의시설을 둘러 본 후에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한가위의 축복을 나누었다.
둘째 날에는 아침 식사를 하고 호텔에서 주관하는 요가에 참가한 후에 가족이 함께 명승지 탐방에 나섰다. 산길을 한참이나 달려가서 산 중턱의 전망대에서 정선의 '동강'의 물굽이가 만들어 낸 한반도 모형의 지형을 관람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늑한 산중 카페에 들려서 차를 마시면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차를 마시면서 카페에 마련된 방문 사인북에 사인을 했다. 손주 지호도 사인북에 나름대로 방문 흔적을 남기면서 사인을 했다.
아침식사는 든든하게 식사를 끝내고 식사 후에 잠간
한반도 형상이 보이는 전망대에서 산중 카페에서 방문기념 싸인을 하는 지호
카페를 나와서 카페의 풍경
오후에는 호텔로 돌아와서 내부의 시설을 둘러본 후에 지호와 지원이를 데리고 호텔의 야외 수영장으로 갔다. 손주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꽃밭에서 꽃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낸 후 호텔에서 주관하는 운동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심신의 피로가 풀리면서 컨디션이 상쾌해졌다. 밤에는 호텔 옥상에 올라가서 한가위 보름달을 감상하면서 별들을 헤아려 보았다.
호텔 수영장에서 옥상정원에서 별을 헤아리며
저녁에는 호텔정원에 마련된 모닥불 휴식 터에 가서 가족이 둘러앉았다. 산중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담소하며 가족의 정을 새겼다. 밤의 시간은 더 빨리 가는 것 같았다. 지호와 지원이는 밤이 깊어져도 모닥불 주위를 맴돌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방으로 올라 왔다.
모닥불 정원
세째 날에는 아침 일찍 산책을 하고 들어와서 가족들과 함께 정겨운 아침 식사 자리에 둘러앉았다. 식사가 끝나고 호텔 옥상정원으로 올라가서 수려한 산 경치를 감상하면서 가족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로비에서 옥상 정원1 옥상 정원2
새해맞이 사이판 가족여행
(2018,12,21~2019,1,3)
한해가 끝자락에 다가 설 무렵 가족이 함께 태평양에 있는 섬 사이판으로 새해 맞이 가족여행을 떠났다. 겨울철에 상하의 지역으로 떠나는 여행이어서 옷에 신경을 썼다. 사이판공항에 내리니 여름기운이 전신을 감싸 안았다. 시간은 현지시간 오후 4시 반 쯤 되었다. Susupe 지역에 있는 Kanoa Resort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사이판으로 사이판 거리
여장을 풀고 해변을 걸으니 태평양 바다바람이 여로의 피곤을 풀어주었다. 거리에는 여름의 정경이 펼쳐졌다. 해변으로 가니 서쪽 바다 위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얼마를 지나니 하늘이 붉은 색으로 변하면서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옥색 바다위 무지개 저녁노을 바다
사이판에서의 둘째 날이다. 오늘은 가족이 함께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가족애를 엮기로 했다. 해변의 시설들은 지난번 태풍으로 많이 부서져서 아직도 완전 복구가 되지 않아 곳곳에 태풍이 할키고 간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태풍 피해로 공항이 한달 간 폐쇄되었다고 했다.
사이판 해변 숙소 Kanoa Hotel 앞에서
세째 날에는 렌터카를 빌려서 사이판 섬 일주 투어에 들어갔다. 사이판 일주 투어는 섬 북쪽으로 가서 태평양전쟁 때 일본인들이 패전에 한을 품고 자살을 했다는 자살절벽(Sucide Cliff)에서 시작해서 일본군 최후 사령부와 한국인 위령탑을 둘러보고 해변으로 갔다.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패전 당시 만세를 외치면서 바다로 뛰어내렸다는 만세절벽(Banzai Cliff)이 있었다. 절벽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전쟁의 비애가 실감나게 다가왔다. 일본군 최후 사령부가 있던 바위굴에는 포탄으로 파여진 흔적들이 그 때의 처절했던 상황을 무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자살절벽 위에서 새섬 전망대
만세절벽을 나와서 사이판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새섬 전망대로 갔다. 옥색의 바다색이 아름다웠다. 옥색 바다 위에 자리잡고 있는 새섬은 이곳 절경의 포인트가 되었다. 바위로 된 섬에는 새들의 둥지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새섬 전망대를 나와서 사이판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는 '산타 루데스'성당으로 갔다. 야외에 성모마리아상을 모셔 놓은 성당이였다. 마리아상 앞에는 성수라고 하는 펌프 우물이 있었는데 이 성수를 마시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방문객들이 줄을 서서 마시고 있었다. 나도 우리 가족의 건강과 각자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빌면서 성수를 마셨다.
산타루데스 성당 오비안 비치
오후에는 섬의 남쪽에 있는 오비안(Obyan)비치로 갔다. 지난번 태풍이 섬의 남부를 강타해서 남부에 위치한 이곳은 해변의 시설들이 부서진 채로 있었다. 쓰러져 있는 안내판에는 이곳이 녹색 거북이들이 산란을 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곳이라고 적혀있었다. 해변은 태풍이 휩쓸고 간 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끈어져서 한적하기만 했다.
Obyan 비치
사이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진풍경이 하나 있다고 했다. 사이판의 청정 밤하늘의 별무리를 보는 것이다. 저녁식사 후 렌터한 차를 몰고 가족이 사이판 섬 북쪽 끝에 있는 만세절벽을 향해 갔다. 만세절벽에 다다르니 주변 조명들이 모두 소등되고 칠흑같은 밤하늘에 별무리들이 밤하늘을 하얗게 장식하고 있었다. 장관의 밤하늘을 감상한 후 숙소로 돌아와서 하루의 일정을 정리했다.
오늘은 큰 딸 윤정이가 손주 지호를 데리고 사이판의 명소인 '마나가하' 섬 투어를 떠났다. 이섬은 일본인이 섬 전체를 구입해서 관광지로 개발했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은 지난번 사이판 여행 때 그곳 투어를 했기 때문에 섬 투어를 떠난 가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나가하'로 마나가하 섬 도착 마나가하 마나가하 해변
마음껏 해변을 뛰면서 바다공부
나머지 가족은 해변에서, (작은 손주 지원이는 어려서 마나가하 섬에 못가고)
* 해변에서 7살 손주와 나눈 인생 대화 *
한없이 걸어도 끝없이 걸어도 그래도 걷고 싶은 길이었다. 7살 손주 지호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지호가 갑자기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서 나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내가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는 죽을 거지?' 갑작스러운 인생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래 할아버지는 지호가 어른이 된 후에도 한참 있으면서 지호가 훌륭한 사람이 된 후에 하늘나라에 가서 있을 거야.' '왜 그걸 물어보니?' '할아버지와 함께 걸으니 물어보고 싶어서,' 가슴이 시려옴을 느끼면서 지호 손을 더욱 꼭 쥐어주었다.
해변을 거닐면서 손주들의 노는 모습
숙소를 가라판(Garapan)지역의 FIESTA Resort 로 옮겼다. 이곳은 각종 편의시설이 숙소 가까이에 있어서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호텔의 해변정원을 산책하는데 눈길을 끄는 표시석이 하나 있었다. 사이판이 일본 통치를 받던 시대에 건립되었던 일본 '사이판고등여학교' 자리 표시석이였다. 최근에 그 학교 동창들이 세웠다고 적혀있었다. 사라진 모교를 그리워하면서 세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호텔의 건너편에는 미군 추모공원이 있어서 역사의 한 장면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사이판고등여학교 자리 미군 메모리얼 공원
가족여행은 가족 모두에게 영원한 추억의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손주들의 여행체험은 성장하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작은 손주 지원이는 형 지호가 하는 것은 모두 따라서 하고 싶어했다.
지호 지원이 당구놀이 당구는 이렇게 하는 건가, 해변에서 형제가
하늘이 높다 아쉬운 저녁식사 시간 사이판의 정취
태평양의 상하의 섬 사이판에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에도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또 바라는 일이 성취되기를 기원했다.
사이판은 수수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되면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난번 태풍의 피해가 빨리 복구되기를 바라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2019년 어린이, 어버이날 모임
어린이날, 어버이날 모임을 매봉역 ‘백마 김씨네’식당에서 가졌다. 지호와 지원이가 건강하고 예쁘게 커 가고 있음에 감사하고, 자리를 마련해 준 자녀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슴을 채워왔다.
모임을 끝내고 잠실 롯데타워에서 하는 불꽃축제를 보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축제시간에 맞춰서 롯데타워가 잘 보이는 곳으로 가족이 함께 갔다. 8시 30분에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 장관을 연출했다.
윤정 윤희 준상 지호 지원의 사랑의 선물
지호 지원이 선물 선물 받은 스카프 어린이날 축하 불꽃
한국 기독교 역사 발자취를 찾아서
아내와 함께 교회에서 주관하는 한국기독교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순례길을 떠났다.
2019년 5월 18일 토요일 오전 9시 교회를 출발해서 인천 제물포에 있는 기독교가 최초로 한국에 상륙한 개항지로 향했다.
제물포에 있는 기독교 최초 한국 상륙지점에 도착하니 상륙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아펜셀라,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항을 통해 한국에 첫발을 디딘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 세워진 기념탑은 1986년 3월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고 했다.
기독교 상륙지 기념탑 상륙지점에 세운 개척교회
개항지 도착지점에 세운 개척교회에서 사진을 통해 그 당시의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당시 선교사들이 묵었던 대불호텔은 지금은 인천 개항 박물관이 되어 개관되어 있었다.
대불호텔 등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거리
다음은 아펜셀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한국 기독교 선교 시작점인 한국 최초 감리교회 내리교회를 방문했다. 내리교회에 있는 기독교 역사관을 관람하면서 한국 기독교 역사를 회상해 보았다. 다음은 우리나라 최초 석조 예배당이 있는 대한 성공회 소속 내동교회를 방문했다.
내리교회 최초 석조 교회 내리교회 예배실
'내리교회'를 나와서 인천의 명소 자유공원으로 갔다. 공원의 중안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다. 고마움이 느껴졌다.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울릉도, 독도 기행(2019,6,4~6)
새벽 4시에 울릉도와 독도 탐방의 기대를 안고 강릉행 투어버스에 올랐다. 밤길을 달려 7시 반쯤에 강릉에 도착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여객터미널로 가서 8시 20분 울릉도행 페리에 승선했다. 동해의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울릉도로 향했다. 세 시간 쯤 달려서 울릉도 저동항에 도착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울릉도는 화산섬이기 때문에 섬 자체가 가파르고 주변의 섬들도 기암으로 우뚝우뚝 서 있었다.
울릉도의 기암들
오후에는 섬의 순환도로 이어지는 섬 일주 투어를 시작했다. 섬 일주 순환도로가 개통되어 섬의 곳곳을 돌아볼 수가 있었다. 울릉도는 풍부한 관광자원을 소유하고 있는 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섬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나리분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경작지도 조성되어 있었다.
울창한 산림의 풍광 해변의 풍광
전망대에서 본 저동항 울릉도 봉래폭포
다음날에는 오전에는 울릉도 전망대와 봉래폭포에 들리고 오후에는 독도탐방에 들어갔다. 그날은 날씨가 좋아서 독도 접안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파도가 일면 접안을 할 수가 없는데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라고 했다.
전망대와 봉래폭포에 들린 후에 점심식사를 하고 독도탐방에 들어갔다. 우리를 실은 500명정도의 인원이 승선할 수 있는 페리는 저동항을 출발해서 파도를 헤치면서 1시간 30분정도 항해를 하여 독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독도에 내리니 가슴이 약간 셀레는 느낌이 들었다. 독도에서 30분의 시간이 허락되어 독도의 풍광을 마음에 가득 담았다. 독도의 기암절벽은 자연이 빚어낸 예술작품이었다.
독도행 페리 독도 선착장
독도의 자연 예술품 독도에서의 자부심
* 울릉도 개관
울릉도의 명칭 유래는 512년(지증왕 13)에 우산국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 등장한다. 930년(태조 13) 우릉도(芋陵島), 덕종 때 우릉성(羽陵城), 인종 때 울릉도(蔚陵島) 등의 지명이 등장했다. 고려 때는 울릉도(鬱陵島)·우릉도(于陵島)·무릉도(武陵島) 등이 나온다.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竹島: 다케시마)라 하고 독도를 송도(松島: 마쓰시마)라고 하였으나 메이지 정권 전후에 울릉도를 마쓰시마,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했다.
울릉도는 죽변에서 동쪽으로 140㎞, 포항에서 217㎞, 동해 묵호에서 161㎞ , 강릉에서 180km지점에 있으며, 독도와는 92㎞ 떨어져 있다. 동경 131°52′, 북위 37°30′에 위치하며, 면적 72.9㎢, 인구는 1만 153명(2015년 현재)이다. 현재 울릉도는 1읍 2면 25리 체제이다.
울릉도는 넓은 구화구에 신화구가 분출한 이중화산인데 성인봉(聖人峯, 984m)은 외륜산에 해당하고, 신화구인 알봉분지에는 중앙 화구인 알봉[卵峯, 538m]이 있다. 울릉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폭풍 일수가 많다. 강수량은 연중 고르게 나타나며, 특히 겨울철에는 강설량이 많아 우데기라는 특수한 구조의 가옥이 있다.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절경으로 촉대암·공암·삼선암·만물상 등 기암괴석이 많고 천연식물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관광지로 손꼽히고 있다.
* 독도 개관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며 대한민국 정부 소유(관리청: 국토교통부)의 국유지로서 천연기념물 336호(1982년 11월 문화재청)로 지정되어 있다. 동도와 서도 외에 89개의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천연기념물인 독도는 문화재보호법 제33조에 근거하여 일반인의 자유로운 입도를 제한해 왔으나, 2005년 3월 24일 정부방침이 변경되어 제한지역(동도, 서도) 중 동도에 한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독도는 지질학적, 생태학적, 사회학적인 가치는 물론, 군사전략적 가치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해랑(sun together)열차 가족여행
태양과 함께 가는 기차, 해랑열차를 타고 2박 3일의 가족여행을 떠났다. 아침 8시 40분 서울역을 출발해서 장항선을 타고 첫 방문지인 충남 서천으로 향했다. 벼 이삭이 피어오르는 들녘을 가로 지르면서 남쪽으로 내려 갔다. 장항역에 도착해서 생우럭탕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서천 송림에 있는 '스카이워크'와 해양생물자원관을 관람했다. 송림에서 해변으로 연결된 스카이워크를 걸으면서 서해의 바다를 조망해보았다. 이어서 방문한 해양생물자원관 은 열대우림관을 중심으로 사막관, 온대관, 극지관으로 구성되어 있어 지구의 곳곳의 특징을 모두 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었다.
군산으로 이동하여 군산의 근대화문화를 체험하고 꽃게장 정식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에 열차에 승차해서 열차 까페에서 휴식을 취한 후 객실숙소로 가서 취침에 들어갔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 열차는 군산역을 출발해서 밤을 새우면서 경상북도 경주로 향해 달렸다.
해랑열차 서울역 출발 해랑열차 복도 서천 해양생물자원관
군산역에서 군산 앞 바다
아침에 눈을 뜨니 기차는 경주역에 도착해 있었다. 조식 장소로 이동해서 뷔페 식사를 하고 사우나까지 하니까 몸이 무척 상쾌했다. 오전에는 천년고도 경주 시티투어에 들어 갔다. 신라시대 왕릉들이 모여 있는 지역으로 가서 천마총 안에 진열되있는 부장품 유물들을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하고 이어서 박물관으로 가서 발굴된 유물들의 실물을 관람했다.
오후에는 첨성대를 둘러보면서 주변에 조성된 꽃밭에서 휴식을 취한 후 불국사로 향했다. 불국사에서 우리는 천년의 향기에 잠겨본 후 저녁식사를 위해 경주한정식 식당으로 갔다. 저녁 식사후에는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화려한 공연 '에밀레'를 관람한 후 기차로 돌아왔다. 기차는 경주역을 출발해서 강원도 정동진으로 향했다.
경주역 신라왕릉 첨성대 주변 꽃밭 불국사 청운교
불국사 극락전 금복돼지 에밀레 공연 배우들과
아침에 일어나니 기차는 밤을 지새우며 달려서 해변에 접해 있는 정동진역에 도착해 있었다. 아침 6시 42분 기차역 프래트홈에 내려서니 정동진 바다에서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모두들 소원들을 빌고 있었다. 나도 우리 가족 모두의 소원들이 성취되기를 빌었다.
오늘의 조식은 이곳의 특미인 황태해장국이었다. 조식 후 신선들의 무릉도원이라고 하는 두타산 무릉계곡 산책에 들어갔다. 계곡의 운치가 너무나도 싱그러웠다. 손주들은 물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한 동안 자연 속에서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동해역으로 내려와서 열차에 올라 태백으로 이동했다. 태백은 지난날에는 탄광도시로 이름이 있던 곳이였다. 태백역에 도착해서 태백한우구이로 이번여행의 마지막 식사로 점심식사를 했다. 이제는 서울로 향하는 길이다. 기차의 휴게실에서 퀴즈이벤트와 그동안의 사진들을 영상으로 보면서 서울로 향했다. 기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역인 조천역에 잠시 멈춰 섰다.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승차해서 서울로 계속 달렸다.
해랑열차 승무원들의 정성이 깃든 서비스가 고마웠다. 그리고 2박3일 함께 여행한 분들의 친절도 가슴에 와 닿았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의 인생여정 후반에 행복한 여정을 더해준 가족들이 고마웠다.
정동진의 일출 지호야 ! 정동진역에서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동해시 무릉계곡 산책로 무릉계곡에서
* 이번 여행은 손주의 유치원 발표회에서 영상으로 소원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때 영상에 손주 얼굴과 함께 '할아버지 해랑열차 타러 가요.'가 스크린에 비쳐졌다. 그 때 손주와 약속을 하고 2년이 지나서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유치원 발표회 영상 소원
어머니 아버지의 '영면의 안식처' 를 옮겨드리다
아버지는 66년 간, 어머니는 12년 간 자리를 지키신 영면의 터, 백운산 정기가 흘러내리고 섬진강 풍요함이 시야를 가득 채운 그곳에서 자녀들의 삶을 지켜보시면서 우리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주셨다.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끝이 없는 사랑으로 저희들을 인도해 주신 덕분에 우리 모두는 세상을 올바르게 그리고 잘 살아왔습니다. 저희들은 앞으로도 아버지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부터는 조상님 가까이에 새롭게 마련해 드린 안식처에서 편안하게 계시면서 저희들을 계속 지켜봐 주십시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영원히 사랑합니다.
백운산 정기를 안은 아름다운 풍경 오랫동안 계셨던 안식처
조상님들 곁으로 모시겠습니다. 정들었던 영면의 터를 떠나오면서
대전 현충원 장인 장모님을 찾아뵙다
10월 30일, 올해도 후반에 접어들었다. 오늘은 대전현충원에 계신 장인 장모님께 인사드리려 길을 떠났다. 고속도로를 달려 현충원에 도착하니 오후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산소에서 점심을 함께 하면서 한참 동안 무언의 대화를 했다.
돌아오면서 오랜만에 갑사에 들렸다. 갑사에 오니 가족들과, 친구들과, 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지나간 날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떠올랐다.
지난날들을 생각하면서 갑사 경내와 산책길을 걸었다.
갑사 경내 진입로 대웅전 잎에서
Ⅴ. 오늘도 행복을 가꾸면서
새벽산행을 시작으로 하루를 연다
아침 이른 시간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모산 산행 길에 오른다. 여름에는 해가 일찍 뜨지만 겨울에는 어둠 속의 산길을 불을 밝히고 올라간다.
가벼운 발걸음의 아침 산행은 행복한 마음을 가슴 가득히 채워준다. 걸음걸음 행복을 엮어가며 쉼 없이 오르다보면 어느덧 약수터가 있는 산 중턱에 이른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으면서 찾으면 다가온다고 했다.
아침의 산행은 오늘의 건강 상태를 체크해주고 사색의 시간을 안겨준다.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아온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오늘도 행복을 찾으면서 열심히 살아야지, 은혜에 보답을 잊어서는 안 되지,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산행이 이어진다.
하루의 건강을 체크해주고, 사색의 시간을 안겨주면서 행복을 선물해 주는 대모산의 아침 산행이 기다려진다.
대모산 입구 대모산 중턱의 약수터
대모산 사랑
대모산은 나에게 이름 그대로 어머니의 산이다. 건강을 지켜주고, 사색의 기회를 주면서 마음의 양식을 안겨준다. 대모산은 나의 두 번째 삶의 고향이 되어가고 있다. 영원한 고향으로 남기고 싶다.
하루의 시작인 새벽이 열려오면 서둘러 준비운동을 마치고 대모산으로 향한다. 대모산으로 향하는 아침 산행 길은 계절에 상관없이 그지없이 상쾌하다.
대모산의 정취
건강을 지켜주는 아침 산행
새벽 4시 반 알람 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어느 때는 잠이 모자라서 눈을 다시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40분 동안의 온몸 스트레칭과 아령운동을 끝내고 거실로 나와서 10분간의 맨손체조를 마치고 아침 산행 길에 오른다. 겨울철이 가까워지면서 같은 시간대의 산행 길은 점점 어두워진다.
어둠 속의 입구 모산 등산로
건강증진을 위해 탄천 산책길로
토요일 늦은 오후 아내와 함께 탄천으로 나갔다. 나름대로 각자의 생활이 짜여있기 때문에 함께 산책할 시간을 잡기가 쉽지는 않았다.
탄천의 산책길에는 벌써 땅거미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탄천 변에는 갈대꽃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가을을 찬미하고 있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어서 반환점을 돌아설 때에는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모처럼의 부부 산책길이다. 지나간 시간들이 떠올랐다. 집에 오니 약 두 시간을 걸은 것 같았다.
탄천의 갈대 숲(2018,9)
언제나 오늘이 선물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 몸이 가벼우면 오늘도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을 한다. 한없는 고마움이 느껴진다. 집에서 하는 아침운동을 마치고 대모산 등산길에 오른다. 1시간 정도 걸으면 대모산 약수터에 도달하는데 겨울에는 약수터에 와도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약수터 부근에 살고 있는 고양이를 부르면 잠을 자다가 대답을 하며 찾아온다. 잠시나마 자연과 어울리는 시간을 갖는다.
잠을 깨고 마중 나와 차거운 땅에 딩굴고 대모산 새벽 산행길
아침산책을 끝내고 집에 와서는 건강식품 청혈주스를 만들어서 마신다.
한파 속에서 탄천으로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동장군이 엄습했다. 대모산 산행 대신에 집에서 멀지않은 탄천의 숲길로 방향을 잡았다. 어둠이 깔려 있는 것은 같았다. 이곳은 가로등과 산책길이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걷기가 편했다. 그러나 걷기는 편하지만 운동량은 대모산 산행 길 만 못한 것 같았다.
탄천의 산책길을 걷고 있지만 나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되어버린 정이 든 대모산 산행길이 눈에 아른거렸다.
새벽 4시 30분의 알람 소리, 오늘도 어김없이 휴대폰 알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새벽 4시 30분에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몸의 컨디션을 체크한 후에 누운 채로 스트레칭에 들어갔다.
밖의 기온이 영하로 많이 내려갔다. 스트레칭과 맨손체조를 마치고 배낭을 메고 대모산으로 향했다.
어둠속의 서쪽 하늘에 보름달이 선명하게 걸려있었다. 대모산 약수터에 도착하면 자연과의 만남이 있다. 수년 전부터 간단한 먹이를 가지고 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가 있다. 나는 고양이를 ‘나비’라고 부른다. 약수터에 도착해서 ‘나비야’ 하고 부르면 잠을 깨고 일어나서 나에게로 다가온다.
새벽 산행 길의 서쪽하늘 보름달
제자 사랑의 보람
모교 경동고등학교에서 후배들에 대한 mentor를 해 줄 수 있느냐는 제의가 왔다. 평생을 교육의 길에서 정열을 쏟아 왔기 때문에 반가운 제의로 받아드렸다. mentor 분야는 정치사회학 분야라고 했다.
한 달에 한번 토요일에 후배 제자들을 신설동 연구실에서 만나서 정치, 사회사상 등에 관해서 진지한 강의와 토론을 했다. 학기말이 되에 논문 지도를 마치고 mentor 강의를 끝맺었다.
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해가 바뀌었다. 1월 15일 mentor를 한 후배 제가들이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연구실로 찾아왔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안고 왔다. 정태현 후배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행정학과, 성창경 후배는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에 합격한 선물을 안고 왔다. 선배로서 mentor로서 교육자로서 보람이 가슴에 한 아름 안겨왔다.
힘들게 목표를 세우면 목표를 향해 노력할 때 활력이 솟아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후배 제자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해주었다. 고마움의 마음을 담은 케이크를 받았을 때 내리사랑의 행복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70대에 들어와서 하늘의 문이 다가왔다.
50대에 신앙의 문을 두드린 후에 주변을 맴돌면서 20여년이 흘렀다. 항상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계속 이어져 왔지만 하늘의 문을 찾지 못했다. 7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형상을 벽에 모시고 하나님의 가르침이 소중히 가슴에 간직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6장 1절)
남을 구제할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 6-3)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하라. (마태 6-6)
남의 과실을 용서하면 천부께서 너의 과실을 용서할 것이다. (마태 6-14)
대접 받고 싶으면 먼저 대접하라.(마태 7-12)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태 7-14)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마태 15-11)
사이판 새해맞이 가족여행 때 7살 손주 지호와 사이판 해변을 걸으면서 나눈 인생 대화에서 나도 모르게 하늘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호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걸어가고 있는데 지호가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서 나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내가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는 죽을 거지?’ 7살 손주의 인생 질문에 잠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래 지호가 어른이 된 후에도 한참은 같이 살다가 지호가 훌륭한 사람이 된 후에 하늘나라에 가 있을 거야’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봐?’ ‘이렇게 같이 걸으니까 물어보고 싶어서’
숙소로 돌아와서 해변에서 나눈 지호와의 대화를 생각해보니 나도 이제 하늘의 문을 어렵게 찾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와 사이판 해변에서
자연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어둠속의 새벽산행 길, 그러나 자연과의 만남이 나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약수터에 도착해서 ‘나비야’(고양이) 부르면 어둠 속에서 하얀 고양이가 다가온다. 나비는 산에 사는 고양이다. 몇 년 전에 약수터에서 우연히 만난 어린 고양이었다. 그 후로 기회가 되면 먹이를 가져가서 부르면 ‘야옹’ 하면서 뛰어와서 나의 다리에 몸을 비비면서 반가운 인사를 한다. 나비와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만남의 횟수는 늘어나고 만남의 반가움은 배가되었다.
계절이 바뀌고 예쁜 어린 고양이가 자라서 새끼를 낳았다. 어미 고양이가 되어서 어릴 때의 귀여운 모습은 없어지고 새끼를 기르는 어미의 모습으로 변했다. 계절이 또 바뀌어 겨울이 되었다.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겨울의 새벽, 나는 어김없이 새벽 산행 길에 오른다. 약수터 가까이에 가서 휴대폰 전등을 켜고 있는데 나의 다리를 스치는 느낌이 있어 어둠 속을 내려다보니 나비가 마중을 나왔는지 나의 다리를 비비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반가워서 어둠 속 차가운 길바닥에 누어버린다.
혹한의 새벽 어둠속에 나비가 며칠간 계속해서 약수터로 나왔다. 준비해간 먹이를 주어도 그전처럼 잘 먹지도 않고 옆에 앉아 있곤 했다. 하루는 약수터에 도착했는데 나비가 보이지 않았다. ‘나비야’ 부르니 한참 후에 어둠 속에서 나비가 비틀거리면서 나타났다. 그날은 먹이를 주어도 먹지 않고 목이 마른지 물만 먹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다음 날에도 먹이를 준비해서 새벽산행을 떠났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약수터에 도착해서 나비를 불렀다. 나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비를 몇 번 더 불러보았다. 나비가 이제 떠났나보다. 생각해보니 나비가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서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며칠간을 어두운 새벽에 약수터 아래까지 내려와서 나를 마중하면서 작별의 인사를 한 것 같다.
나비는 나의 건강 수호천사의 역할을 해 주었다. 나를 새벽산행이라는 아침운동을 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오늘도 새벽 스트레칭과 맨손체조를 마치고 창밖의 새벽어둠 속을 내다봤다. 밖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비의 환상이 떠오르면서 비가 오지만 아침 산행은 빼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서 아침산행을 떠났다. 약수터에 도착했지만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나비야 아침운동 빼지 않게 해주어서 고맙다.’ 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그 후로는 아침에 잠을 깨면 나비의 모습이 나타나서 ‘할아버지 제가 없어도 아침운동은 빼지 마세요.’ 하는 것 같아서 스트레칭과 맨손체조를 마치고 대모산 새벽산행 길에 나선다. 나비야 고맙다.
약수터 산행길 자연 속의 나비 어둠 속의 약수터 산행길
어둠속의 나비 새벽에 마중 나와 땅에 딩구는 나비
오늘도 건강한 하루가 선물
오늘도 건강의 선물을 안고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 萬步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 새벽 운동을 나선다. 앞으로의 삶은 건강을 유하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되고 있다. ‘배우고 위하고 사랑하면서’의 삶의 신조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언제나 배움을 가까이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주고 주변을 사랑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항상 건강이 나를 받쳐주어야 한다. 그래서 아침의 운동, 산행, 사무실에서의 운동을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빠뜨리지 않고 있다.
원래가 튼튼하지 못한 건강 기반이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건강백세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에 대한 욕심은 언제나 나를 유혹하고 있다. 건강이 있어야 모든 것이 따라오기 때문인가 보다.
이제 나에게는 큰 힘은 없다. 다만 남아있는 작은 힘이지만 앞으로도 배우고 위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강은 필수 조건이다. 그래서 건강 증진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건강증진은 생활의 중요 과제가 되어
건강 증진을 위해 아내와 함께 탄천 산책길로 나갔다. 풀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아내가 산책로 길가의 꽃을 배경 삼아 기념촬영도 해 주었다. 새삼스럽게도 포근한 정이 가슴을 감싸왔다. 지난 가을 갈대꽃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우리를 맞이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탄천 산책로에서(2019,5,6) 탄천의 지난해 가을
두 번째 삶의 터전 신설동 연구실
대학의 제자들과 정년고별사를 나누고 떠나온 후 바로 서울의 신설동 청계천 변에 청계천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연구실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사회, 문화, 교육에 관해서 작은 연구를 계속했다. 강의를 준비하고 지역사회 특강을 준비하고, 세계여행의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요일을 정해서 친구들을 만나는 계획을 세웠다. 첫째 목요일은 고등학교 동창, 둘째 목요일은 대학동창, 셋째 목요일은 중학동창, 넷째목요일은 일반 친구들을 만나는 날로 정해 놓고 실천하고 있다.
연구실은 나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해주고 있다. 연구실에 들어오면 부모님, 가족, 형제자매, 친구들, 제자들을 사진을 통해서 만나볼 수가 있다. 그래서 날마다 연구실에 출근을 한다. 연구실에 들어오면 모두를 만나볼 수 있어서 마음이 그득하게 차오른다.
책상 옆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 소파 뒷면의 친구들의 사진
마음의 양식, 전통문화 탐방
경북 영양의 석계 이시명 종택, 장계영 전통문화교육원과 안동의 석주 이상룡 고택, 법흥사 7층전탑의 답사에 참여했다. 서울에서 7시30분에 출발하서 4시간여를 달려서 12시가 지나서 영양의 장계영 전통문화교육에 도착했다. 장계영 飮食디미방 체험강의를 듣고 그곳에서 만든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식사 후 음식 전시실을 둘러보고 이어서 이시명 종택 탐방에 들어갔다.
이시명은 광해군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국정의 혼탁상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했다. 안동 장씨와 결혼하여 자녀들이 훌륭히 자라서 이조판서를 지낸 아들이 있었다. 안동 장씨 장계영은 한글로 146가지의 조리법을 쓴 '음식디미방'이란 책을 펴냈다. 이책이 지금 '디미방 체험관'의 근원이 되었다.
안동의 석주 이상룡 고택 '임청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99칸이었으나 1940년 중앙선 철도가 집 앞마당을 지나면서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었다. 임청각에서 3명의 정승이 탄생했고,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안동의 법흥사 7층전탑은 전탑은 황토로 벽돌을 구어서 벽돌로 쌓은 탑이다. 높이 17m의 전탑은 규모가 장대하면서도 상승감이있고, 안정감이 있어 우리나라 전탑을 대표하고 있다.
이시명 종택
교육원 전경
요리 강의
교육원 입구 법흥사 7층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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