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 모를 정도로 분주히 흘러가는 시간 속이라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저 멍하기만 합니다. 20일 저녁... 낯익은 이름들 때문에 조금은 의무감으로 나간 대학로 시간 맞춤도 제대로 못해서 역시 멍하니 40분 정도 이랑씨어터 앞에서 기다리면서 마음은 연극을 본다는 사실엔 아랑곳않고 그저 일 뒤끝을 따라 맴돌고 있었지요.
회원들과 만나서 들어간 극장은 오랫만에 맞는 소극장 특유의 냄새로 반기는 듯하지만 전 아직도 멍한 정신을 쉬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연극을 본다는 예전의 설레임이나 기대들이 미처 마음 속에 자리하지도 못했는데 웃음으로 다가서는 제삿날의 시작...그리곤 이내 정신이 확 듭니다.
요즘 연극에선 발상의 전환을 보이지 못하면 진부해 보이기 쉽상이지요. '난 그런 것 몰라요..' 윤시내던가요. 그 노래를 깔고 보여지는 향수 어린 연애장면. 흔히 신성일, 엄앵란으로 대변되던 5~60년대의 일련의 애정행각이 이렇게 웃음으로 다가올 줄은... 거기에 원색적인 의상에 씽씽카를 타고 나오는 세 조상귀신들의 귀엽고도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은근한 맛배기 역할을 충실히 해 냅니다. 아직 얼얼하던 정신은 아들 '삼석'의 제대 장면에 가서야 정신이 버쩍 납니다. 남자들이야 '군대'하면 졸다가도 한마디 거드는 묘한 마력이 있잖습니까?
삼석이가 고무신을 돌려신지 않은 연상의 애인 경숙이(배우들 본명을 함부로 불러서 괜찮을까?)를 만나면서 중심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하지요. 부자 간의 반목과 혼전 임신이라는 갈등의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우리 삶의 '관계'가 주는 묘한 긴장감이 무대 위를 채워나갑니다. 삼석이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잘 풀어 나갈까? 그리고 그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고집스러운 부자의 틈 속에서 가슴 조이는 어머니와 경숙이는...등등... 쉽게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한(?) 제게 이런 궁금증과 관심을 끌어내게 해준 것은 뭐니 해도 출연하는 연기자들의 연기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소 산만해질 위험성이 있는 조상님들의 정신없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참...잘들 합니다. 자신의 배역에 맞는 색깔로 관객들의 눈을 장악하는 듯합니다. 시연회라 템포도 안맞고 본인들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고들 나중에 아쉬움을 보입니다만 바로 코 앞에서 앉아 극을 보고 있는 제 눈에는 그들의 작은 눈빛 하나에도 혼이 실린 것이 보입니다. 결국 정점에서 찡한 감동을 받아 제 눈가가 얼얼해져 버렸다면 더 바랄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가만있자..잘 못 한 것이 그 정도라면...?
끝난 듯 하면서도 맛배기 하나 더 잊지 않습니다. 제삿날 며느리들의 고충을 랩과 춤으로 만들어 내는데...묵혔던 체증을 확 뚫어 버립니다. 언젠가 '밥퍼랩퍼'를 보면서 느꼈던 상쾌함 이상이랄까요...
비록 조상님들의 도움으로 갈등은 해결되어 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사랑의 힘이 이루어내는 결과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모처럼 가슴 훈훈하고 코끝 찡한 연극 한 편을 접하고 나니 온몸에 번져 있던 환절기 무기력증이 한껏 덜어진 듯 합니다. 게다가 공연 뒤에 배우들과 함께 음복을 나누면서 이러저러 이야기도 하고 나니 은연히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군요.
그래요... 가족이라는 바탕에 부자간의 사랑이란 기둥을 두고 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서까래를 얹은 연극에 형형색색의 볼거리를 마련했으니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보아 당연하겠지요. 2002-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