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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예배의 역사와 미(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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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면서
오래 전 일이다. 나는 깊은 교제를 나눈 친구들은 아니지만 함께 목사된 자로서 비교적 가까이 지내는 동년배 친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교회(교단)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유산(遺産)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친구들은 개혁교회의 유산들을 고전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다시 화제(話題)가 빠르게 열린 예배를 비롯한 교회 성장 쪽으로 옮겨갔다. 너무 비약적일지 몰라도 그 때 내가 그 대화에서 느낀 감정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이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빨리 참 복음에서 떠나 거짓 복음으로 옮겨갔는가라고 한탄과 책망하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신학에 입문하여 우리 교회(교단) 신학교에서 신학과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수련을 쌓으면서 귀에 따갑게 들었던 것이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후예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다. 우리 교회(교단)가 추구하는 신학과 신앙이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의 모토(motto)대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 가야 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이승구는 그의 책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중에서 ‘개혁신학의 독특성’에서 이렇게 말한다:
“종교개혁 이후로 우리는 개혁신앙(Reformed faith),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 등의 말을 하게 되었고, 이런 말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뜻이 함께 전달되었다. 오늘날도 개혁신학을 하는 이들과 개혁신앙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특별히 ‘개혁’ 신학, 또 자신들의 신앙을 ‘개혁’ 신앙이라고 하는 그 명확한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그 ‘개혁’(Reformed)이라는 말이 별 의미 없는 말이라면, 오히려 우리는 그 말을 방기(放棄)해 버려야 할 것이다. 특히 개혁교회의 사역자(minister)가 되려고 하는 이들이 이에 대한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런 개혁교회는 무의미할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살면서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뿌리가 없이 자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뿌리를 부정하면 현재의 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 우리 교회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놓고는 이제 와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고전 취급하고 있으니 우리 교회(교단)에게 과연 밝은 미래가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금은 다행인 것은 젊고 의식 있는 목사들이 여전히 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비로우신 주께서 우리 교회(교단)에게 여전히 자비를 베푸시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며칠 전에 과거에 함께 교회를 이루던 집사 내외와 밤늦게까지 의미 있고 유익한 교제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집사 내외가 출석하는 교회에 새로운 부목사가 부임해 왔는데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서 교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목사들이 더 많이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거기에 생명을 건 싸움을 통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승리가 있었으면 한다. 본래 이 땅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가 아닌가? 참된 신앙인, 중생자(重生者)의 삶은 어떤 고난이 따르더라도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굳은 의지가 반드시 따르는 것이듯이 이 시대에 주류(主流)의 신학인 개혁주의 신학이 우리의 뼈 속에 더욱더 사무쳤으면 한다.
나는 이 글의 제목과 같이 개혁주의 예배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첫째는 예배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둘째는 기독교 예배의 역사와 함께 개혁교회의 예배 의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셋째는 오늘날 개혁교회의 예배의 실제와 대안에 대해서 생각하겠다.
Ⅱ. 예배란 무엇인가
1. 예배는 인간의 산물인가, 하나님의 산물인가
어떤 종교이건 간에 그 신자들은 자기들의 신(神)에게 예배를 드리는 예배 의식(禮拜儀式)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다. 그리고 다른 이방 종교의 예배 의식에도 정열적인 요소가 있고, 아주 깊은 내용도 있으며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열의도 있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도 자기들의 예배 의식에 쏟는 정성이란 대단하다. 대개 하등 종교(下等宗敎)들은 화려하고, 정열적이고, 즉물적(卽物的)인 반면에 고등 종교(高等宗敎)들은 예컨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등은 아주 깊은 내용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열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종교의 예배 의식은 사람들이 자기의 필요에 의하여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져서 행해지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무당 종교를 보자. 무당은 자기의 신(神)을 부르기 위해 제물을 요란하게 차려 놓고 꽹과리, 징, 장구 그리고 무당이 들고 주문을 외우는 방울 등을 동원하고 온갖 몸짓을 하면서 자기의 신을 부르는 의식을 행한다. 그런 의식들은 다 자기들의 신을 섬기고자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지 그들의 신이 그런 의식을 행하라고 하나하나 계시(啓示)해 준 바가 없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의 예배는 어떠한가? 우리 기독교 예배는 일반 종교에서처럼 사람들이 나름대로 만들어 낸 종교 행위와 다르다. 기독교 예배의 출발점은 사람의 종교적 열심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께서 제정(制定)하여 주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예배를 받으실 자와 예배를 드리는 자의 인격적 관계로 이루어진다. 히브리서 1:6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특히 천사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들에게도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며, 예배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신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첫째 목적은 도덕적 존재를 영적으로 또한 지적으로 준비시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있었다. 성경은 이것을 너무나 분명히 가르치고 있고, 성도들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이것을 풍성하게 드러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를 주셨기 때문에 사람은 원래부터 누구나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며 자신의 영혼의 기능을 발휘하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지어진 예배적이고 종교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예배적이고 종교적인 존재라는 성격은 인간이 죄로 인하여 타락한 후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사람들은 그 본성의 빛, 즉 양심에 의하여 예배할 대상을 찾는데 인간이 타락하여 어리석고 생각이 어두움 가운데 빠져서 인간 스스로는 참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 만들어 낸 자기의 신(神)에게 자기 나름대로 예배 행위를 하고 있다.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이신 참된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된 결과이다.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 아덴에 도착하여 아덴 시내를 돌아다닐 때 아덴 사람들의 많은 우상과 심지어는 자신들이 알지 못해 섬기지 못한 신들이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신의 노여움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음을 보았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문화가 개화(開化)된 사회든지 미개(未開)한 사회든지 간에 자기들의 신을 만들고 예배 의식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미개한 사회에서는 그 의식(儀式)이 더 열정적이고 화려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타락한 후에도 여전히 신(神)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들이 남아 있음과 인간의 예배정신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기 위해서는 타락한 인간의 성품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그를 거듭나게 하셔야만, 영혼의 기능을 변화시켜 주시고, 복음을 주시고, 믿게 하셔서 예배의 대상이신 참되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만 참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사실상 로마서 1:18-32 말씀에 따르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지만, 그 마음이 죄로 인하여 어두워져서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홀로 예배와 섬김을 영원토록 받으셔야 할 분이다. 주님께서도 신명기 6:13 말씀을 인용하셔서 마태복음 4:10에서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느헤미야 선지자도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라고 했다.
하나님은 만유(萬有)의 주(主)로 계시며 모든 피조물로부터 예배를 받으실 분으로 계신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예배의 방법까지 계시(啓示)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하시고, 나아가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를 자세히 알려 주셨다. 성경이 예배와 관련하여 분명히 가르쳐 주는 한 가지는 “예배는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알리지 않으셨더라면 진실된 예배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다른 종교들처럼 사람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기인(起因)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면 사람 마음대로 드려도 되지만,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리라고 명하셨고, 그 방법까지도 가르쳐 주셨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내신 원칙과 내용에 의하여 드려져야 하고, 그럴 때에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 아무리 대단한 열정과 정성과 마음을 다 기울여서 예배를 드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신 원칙과 방법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리가 없다. 물론 사람은 사람마다 각자의 수준이 다 있고 믿음의 정도가 각각 다 다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각자 다른 그 수준을 놓고 상대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한 예배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싸서 부족함을 채워서 받으시지만 (그래서 우리가 예배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의지해서 드리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여서 하나님과 예배에 대해서 풍성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예배 태도를 결정한다. 한 사람의 신관(神觀)이 그 사람의 예배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래의 존재됨대로 보며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마음대로 상상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들을 점점 더 많이 이해할수록 이것이 우리의 예배에 강력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2. 예배의 규범적 원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배의 규범적 원리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분 자신이 친히 정해 놓으셨으므로 그 분 자신의 계시(啓示)된 뜻 안에 한정된다. 사람들의 상상(想像)이나 고안(考案) 또는 사단의 지시(指示)를 따라 어떤 가견적(可見的)인 구상(具象)을 사용하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방법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가 없다”(21조 1항) 이 말은 ‘성경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무오(無誤)한 표준으로서 유일(唯一)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공예배의 모든 원리는 성경에서 나와야 하며 다른 어떤 자료에서도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예배 규정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재량권이 없다. 성삼위(聖三位) 하나님만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예배의 규정들을 제정해 놓으셨으며, 그 규정하에서만 경배(예배)를 받으신다. 따라서 예배의 규범적 원리는 예배 행위가 오직 성경의 근거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를 이해하고 예배 의식의 형식을 정하는 데에는 여전히 일정한 지침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침을 제공하는 원칙에는 무엇보다도 예배는 성경적(biblical)이어야 한다. 성경은 예배의 필요성을 말하고 예배의 성격을 비추어 주고 특별한 관례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우리가 성경을 예배 의식의 안내서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기도와 찬송 그리고 헌금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우리에게 성례를 거행할 것을 명령한다. 우리는 성경을 기독교 예배의 출발점과 해석서로 사용해야 한다.
예배 순서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성경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이 금지하거나 성경에서 유래하지 않는 어떤 것을 예배에 도입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잘못되게 되며,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된다. 예배를 평가하는 기준이 실용주의 철학이나 전통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 되며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위에 두어야 한다. 예배에 도입하는 모든 순서는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배란 사람이 만들어서 사람의 열심과 정성에 의하여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신 거룩한 원칙과 내용에 의하여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신 사건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레위기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제사(祭祀), 즉 예배(禮拜)를 드리는 방법을 다 계시해 주셨다. 그런 일이 있는 다음에 대 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 직(職)에 임명받아 최초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 날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서 분향을 하였을 때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켜 버렸다. 결국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 앞에서 죽고 말았다. 나답과 아비후 두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예배 의식에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불외에 다른 불(다른 향)을 드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두 제사장은 하나님이 말씀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거룩하게 서는 중대한 시점에서 예배가 얼마나 엄중한 것이며, 또 사람이 감히 자기 방식대로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천명하셨고,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라 예배를 드리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드려지지 않는 예배, 제멋대로 고안(考案)된 예배 양식을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3. 예배의 성경적 정의
예배의 의미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깨달음이 있어야 예배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정신을 바르게 품어서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자세까지도 다 계시하여 주셨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들의 정신과 태도를 매우 귀중히 보신다. 이제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예배의 정의를 살펴보자.
(1) 구약의 정의
엎드려 절함
구약 성경에 의하면 예배에 대하여 여러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엎드려 절한다’는 표현이다.
“이에 그 사람이 (즉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리브가를 만난 다음에)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창 24:26)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 4:31)
“다윗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매 회중이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고 머리를 숙여 여호와와 왕에게 절(경배)하고”(대상 29:20)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과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대하 29:30)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느 8:6)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욥 1:20)
이상의 말씀들을 의하면 구약에는 예배라는 말을 ‘엎드려 절한다’라는 말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엎드려 절한다’는 자세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인 태도요,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배 드린다’는 말은 ‘엎드려 절한다’는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엎드려 절하는 것이 예배이다.
섬김
구약 성경의 예배에 대한 또 다른 표현에 ‘섬김’이 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5)
출애굽기 20:3-5 말씀에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사 19:21)
이사야 19:21의 “경배할 것이요”의 “경배”는 ‘섬긴다’라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배의 행위는 ‘섬기는 행위로 표현될 수 있는 행동’인 것을 알 수 있다. 엎드려 섬기는 자세와 정신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구약에서는 예배를 ‘엎드려 절하는 것’ 혹은 ‘섬기는 행위로 표현될 수 있는 행동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2) 신약의 정의
경배
신약 성경은 예배에 대하여 여러 말로 표현하고 있다. 마태복음 2:2 말씀을 보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敬拜)하러 왔노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꿇어 엎드리러 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 4:24에서는 ‘예배’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기에 사용된 우리말 “경배”는 ‘공경 경’, ‘절 배’로써 ‘공경하여 절한다’는 의미이다. 또 “예배”라는 말도 ‘예도 예’, ‘절 배’로써 ‘예의를 갖추어서 절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예배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 앞에 엎드려 섬기는 일체(一切)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배는 인간의 영혼의 활동의 한 유형이다. 영혼의 활동의 한 유형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서 자기 의지를 가지고 경외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는 하나님은 영(靈)이시므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절하는 것이며 영혼만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또 육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내 영과 육이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한 사람 전체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 따로 몸 따로 예배해서는 참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라고 할 때는 영혼만 있다든지 육체만 있는 것을 말하지 않고, 영육이 함께 있는 인격체를 말하기 때문에 예배하는 사람은 ‘나라고 하는 한 사람 전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절하러 간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와야 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께 내 영혼과 몸을 가지고, 온전히 엎드려 절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참 예배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는 말씀 가운데 진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데이아”(ajlhvqeia)는 ‘참되다’, ‘진실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진실로 예배해야지 거짓으로 몸만 굽혀서는 예배가 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에 절을 할 때에는 진실로 절을 해야 하고, 몸 따로 마음 따로 하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수가 없고, 그것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행위가 된다. 진실로 예배한다는 말에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높으신 분이시고 그 앞에서 감히 거짓을 품을 수 없는 분이라는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서 진정이 없는 예배가 많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Paul E. Engle이 어느 복음적인 월간지에 기재되었던 기사의 결론을 인용한 것을 재인용해 보겠다. “‘이 같은 문제가 대두된 까닭의 일부는 우리가 교회를 대중 전도와 교육의 중심지로 삼았다는데 있다. 현재 우리 예배의 초점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사람과 사람의 필요에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사탄과 세상은 아주 교묘하게 목사와 교인들을 이용하여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복음이 불신자들에게 거치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 친숙하게 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된다고 했다. 사실 복음은 불신자들에게 즐거운 것이 아니다.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다. 왜냐하면 참 복음은 죄의 문제를 드러내고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는 교회의 본연의 사명 가운데 하나이기에 교회가 전력을 다하여 힘써야 한다. 하지만 전도에 교회의 모든 것이 매몰되어 버리면 교회는 예배당에 사람을 가득 채울 수는 있을지 몰라도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교회가 성공주의에 매몰되어 예배당에 사람을 채우는데 올인해 버린다면 그 다음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노리는 속임수이다. 교회는 항상 한 방향으로만 나가면 위험하다는 것이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다. 교회는 항상 교회의 본질을 균형 있게 잘 견지하면서 나가야 교회가 거룩하고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로버트 웨버(Robort E. Webber)는 ‘예배’(worship)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만남’(meeting between God and His people)이라는 광의(廣義)의 의미로 정의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만남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면 그의 백성들은 찬양과 감사로 이에 응답한다. 이와 같이 예배 자는 예배를 통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접촉을 나누게 되며 이 같은 만남을 통해 예배 자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고 했다.
웨버의 주장대로 예배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만남이라면 열린 예배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불신자들이 교회로 편안하게 들어와서 예배에 대해서 거리낌과 불편함이 없이 예배할 수 있도록 건전한 유행가(?)나 가곡을 함께 부르고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며, 과연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열린 예배의 문제점들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예배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위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경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열린 예배에는 하나님을 부르고 찬송하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없다. 영으로 하는 예배, 진정으로 하는 예배가 설 자리가 없다. 차라리 런던의 랭함 플레이스 올 소올스 교회에서처럼 어느 한 날을 정해서 구도자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함에 있어서 가짜로도 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진짜로 절을 하여야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진짜로 절한다는 것은 결국 어떤 상태냐 하면 영혼이, 지극히 높으시고 귀하시고 엄위로우신 하나님 앞에, 무엇보다도 그 의(義)의 보좌 앞에 엎드려서 절하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먼저 가지고, 또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지금 내가 서 있고, 하나님께서 내 경배를 받으시려고, 내 앞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그 앞에 자기 마음을 다하여 절한다는 그런 상태가 바로 자기 영혼으로 진짜로 절하는 상태이다.
(3) 신학자들의 정의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참된 예배”(True worship)라는 그의 책에서 “예배는 최상의 존재에게 표하는 경의(敬意)”라고 했다. 즉 최상의 존재에게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예배라는 말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신약 용어는 ‘프로스쿠테오’인데 그것은 ‘∼에게 키스하다, 손에 키스하다, 절하다, 엎드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배라는 개념은 사람이 존경, 경외감을 갖고 최상의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하나님께 적용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절하며 또 그에게 그의 최상의 성품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며,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펠리(W. L. Sperry)는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숭경(崇敬)이며, 즉 공경하여 높이는 것이며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며 그의 존재하심 앞에 존경(尊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절하며 또 하나님의 최상의 성품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며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 그 앞에 엎드려 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프랭크린 지글러(Franklin Segler)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라고 했다. 지글러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해 주셔서 사람은 그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심정이 생기고 실제로 경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폴 앵글(Paul E. Engle)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합당한 백성들의 반응은 경배, 즉 예배뿐이다”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할 때에 무조건 예배하라고 하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언급하고서 예배하라고 말한다. 시편 100편을 보자. 시편 100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함으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자는 초청의 시(詩)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5절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성실하심의 속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예배)하도록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참되신 하나님의 성품을 접하게 되면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심정이 생기게 되고, 그는 자기 의지로 전 인격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에 대한 인식 가운데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성도들이 예배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처음에 고요히 묵도하거나 시편 또는 다른 성경을 낭송하는 말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축도하고, 광고하면 일단 예배 의식은 끝나는데 이것을 놓고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러한 순서에 맞추어서 예배 의식에 참여하고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순서를 합하여 놓은 것을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배는 찬송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며, 예배는 예배로서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찬송이 찬송으로서 독특한 성격이 있고, 기도가 기도로서 독특한 성격이 있듯이 예배 역시 예배로서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 5:7-14 말씀을 보자. 먼저 7-8절을 보자.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 이 말씀에는 기도가 있다. 그 다음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새 노래로 노래하는 찬송이 있다. 이 찬송은 처음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하더니 그 다음에는 그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들 곧 그 수가 만 만이요 천 천이라는 많은 천사가 큰 음성으로 조금 전에 이십사 장로의 찬송에 이어서 화답을 하면서 큰 찬송을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그 다음 13, 14절을 보자. 여기에는 천상과 지상과 지하와 해상과 또 그 가운데 모든 것, 즉 만물이 또 찬송을 올린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까 네 생물이 “아멘”으로 화답한다. 여기까지가 찬송에 해당된다. 그 다음 14절 하반절을 보자.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이것은 예배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찬송과 기도와 예배를 다 따로 따로 어떤 행동으로 표시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한 폭의 그림 안에 찬송, 기도, 예배가 다 들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찬송과 기도를 합해서 예배가 되지도 않고 또 어떤 예식을 길게 집행했다고 해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라는 것은 분명히 따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기도하는 형식이 따로 있고, 찬송하는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이다. 찬송은 입을 벌려 곡조를 붙여서 거룩한 말로 자기의 신앙으로써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고 높이는 것이고,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공효(功效)를 입은 자가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하기 위해서 무엇을 아뢰고 고(告)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본대로 예의를 갖추어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예의를 갖추어 엎드려 절을 하여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의 정신에 따라 기도해야 하고, 찬송을 부를 때는 찬송의 정신에 따라 찬송을 해야 하고, 헌상을 할 때에도 헌상의 정신을 따라 헌상할 때에만 바른 예배가 되는 것이다.
Ⅲ. 기독교 예배의 역사
기독교 교회의 최고 형성기(formative period)는 처음 6세기 동안이다. 따라서 처음 6세기 동안의 상황에 비추어서 연구를 해야 신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들의 증언과 처음 6세기 동안의 정경과 신조들과 예배의 형성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자료들이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초대교회가 사도적 전승(apostolic traditions)에 매달려서 사도들과의 연속성 속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기독교를 유지해 나가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신약 교회의 예배를 살피려고 하기 때문에 구약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겠다. 사실 구약에 예배에 관한 묘사가 더 풍성하지만 구약의 예배의 형식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해서만 살펴볼 것이다.
1. 회당 예배
초대교회의 예배를 살피면서 먼저 회당 예배를 살피는 것은 초대교회의 예배는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에서 회당 예배의 전통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 예배는 신구약 중간기 바벨론 유수 기간 동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그 근원이다. 미쉬나(Mishnah) 율법은 어느 곳에서나 유대 남자 열 명이 모이면 하나의 회당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10명만 모이면 회당을 지을 것을 의논하여 회당을 짓고 거기에서 예배를 하였다. 이것이 경건하고 단정하면서도 열렬한 유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에도 간단한 회당 건물을 짓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회당의 가장 중요한 형성 요인은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하려는데 있었다. 결국 회당은 유대인 촌락 생활의 종교, 교육, 사회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회당을 통해 고대 유대 종교의 전승은 그대로 보존되고 대를 물려 후대로 계승되었다.
헬라어로 “회당”(Synagogue)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말과 ‘가져오다’(모이다)란 말의 합성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건물에 함께 모였으며, 이것이 유대주의의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회당 부대 기구와 시설물은 아주 간단하였다. 탁 트인 방에 두루마리 성경을 담은 궤 하나와 독서대가 있는 강단, 등잔, 커다란 촛대, 나팔 그리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앉는 긴 의자가 전부였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예배와 교육을 위해 지방 집회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주님이 계시던 기간 동안 유대인 교육기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회당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부분에는 율법서를 담은 법궤가 있고, 그 밑 부분은 예배 자들을 위한 곳으로 되어 있었다. 회당의 중앙에는 단이 있고, 성경을 읽는 이는 서서 읽고, 가르칠 때는 앉아서 했다. 좌석은 단을 중심으로 사방에 있되 남여좌석이 구별되어 있었다.
회당의 직원들은 첫째는 회당장(ruler of the Synagogue)이 있는데 회당장은 당회의 사회를 주관하고, 예배를 주관하였으며 회원의 제명권을 갖고 있었다. 둘째는 쉘리아크(The Sheliach)인데 쉘리아크는 예배시 공적 인도자가 되고, 율법과 기도문을 읽는 책임을 맡았다. 셋째는 챠찬(The Chazzan)인데 챠찬은 회당의 관리책임을 맡은 자로 성경의 거룩한 두루마리를 돌보는 일을 하였다. 넷째는 메들지만(The Methurgeman)인데 메들지만은 성경이 히브리어로 읽혀지므로 통역하는 직(아람어로)이었다. 다섯째는 바트라님(Batlanim)인데 바트라님은 예배에 참여자중 대표자 10명을 택하여 구제물을 거두는 직분을 맡은 자였다.
그리고 회당의 예배순서는 먼저 기도와 찬송(신 6:4-9 참조)으로 시작하고, 이어서 챠챤이 법괴로부터 율법책을 가져온다. 그리고 쉘리아크가 일어나 이미 지정해 놓은 성경의 부분을 읽으면 메툴지만이 아람어로 통역하고, 장로 중 한사람이 앉아서 권면의 말씀을 하고, 율법책은 다시 돌아가고 기도로 예배를 마친다. 때로는 챠챤이 율법 책을 들고 올 때 성경을 읽기를 자원하는 사람이 일어서면 성경을 주어서 읽게 하는데, 특히 안식일에 진실한 교인으로서 방문한 사람이 있거나 랍비가 새로 예배를 드리러 나와서 성경을 읽기를 원하면 누구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 성경을 주어 읽게 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는 기록이 있다(눅 4:16). 그리고 회당 예배에는 세 가지 기본 요소가 있었다. 찬양, 기도(신앙고백), 성경봉독 및 봉독한 말씀에 대한 해석이 그것이다.
(1) 찬양
유대인의 예배는 대중 찬양으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언제나 찬양으로 시작한 후 기도할지니라”고 기록된 탈무드(Talmud)의 원칙에 의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예배에도 이 요소가 나타나 있다. 고린도전서 14:26을 보면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순서에도 가장 먼저 ‘찬송시’를 부를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회자는 느헤미야 9:5(“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과 같이 큰 소리로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신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라고 하면, 회중들은 “영원히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라는 찬양으로 응답한다. 예배드리는 사람은 우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의 위대하심과 축복하심을 생각하도록 초청받는다.
(2) 기도
유대인의 예배에서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 첫 번째는 두 가지 아름다운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뜻을 지닌 ‘요트져’(Yotzer)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키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사랑해야 하는 그들 자신의 의무수행을 말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뜻을 지닌 ‘아하바’(Ahabah)이다. 이것은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당신, 오 하나님 찬양받으소서!”라는 말로 끝맺는다.
이 기도에 이어서 곧바로 신앙고백과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 기도인 쉐마(Shema; 들으라, 신 6:4)가 뒤 따른다. 회중이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의미의 ‘하나’라고 외침과 동시에 ‘쉐마’라고 한다. 이 때 인도자는 “그 나라의 영광의 이름이 영원무궁토록 찬양받으옵소서!”라는 찬양을 덧붙인다.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하나’는 언제나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의 중심이었다.
공동 기도의 두 번째 부분은 ‘참되고 견고하다’라는 말로 알려져 있는 그 기도의 후렴과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여 그 백성들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말로 이어진다. 이 때 사회자는 모임 가운데서 한 사람을 불러내어 기도, 즉 18가지의 감사 기도를 인도하도록 한다. 이렇게 지명 받은 사람은 언약궤 앞에 나와서 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아멘’으로 응답하는 무리들의 중보기도를 인도한다.
(3) 가르침
이런 기도들이 드려진 다음에 성경봉독과 봉독된 말씀의 가르침이 있다. 유대인들은 회당을 가리켜서 ‘가르침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유대인의 예배에서 성경봉독과 강해보다 더 강조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첫째,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회중에 의해 율법과 선지서들이 낭독되었다.(대개는 21절, 적어도 3-5절, 혹은 7절 정도를 읽게 되어 있었다) 모든 참석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고대 히브리어를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자가 성경에 기록된 교훈을 일상어(日常語), 특히 아람어로 번역하였다. 낭독한 구절들을 중심으로 설교나 강론을 하였다.
회당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시 말씀이었다. 예배시에 구약의 성경 본문 일곱 군데를 뽑아서 봉독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특별 본문이 구약의 예언서에서 취하여 봉독되었다. 봉독한 말씀에 대한 해석, 즉 설교는 회중의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내용이었다. 설교의 목적은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교훈을 제공하는데 있었다. 설교자들은 회중들이 그것에 의지하여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갈 원리와 율법을 가르침으로써 회중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이와 같이 회당 예배시 신앙고백을 하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기도드리고,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회당 예배의 전체의 흐름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예배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면 기독교 쪽으로 쉽게 전이(轉移)되었다. 예배는 축복과 회중의 아멘으로 끝맺게 된다.
2. 초기 기독교 예배
(1) 초대교회의 예배
초기 기독교는 신앙의 외적인 관습(慣習)에 관해서 유대교를 떠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 같다. 초대교회는 여전히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서 기도하였고(행 3:1), 성전에서 찬양하였고, 성전 예배(행 2:42-47)가 계속되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만 그렇게 여긴 것이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도 그렇게 여겼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 불과했다. 사도행전 20:5과 28:22에서는 ‘당파’로, 24:14에서는 ‘이단’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유대교 내의 한 당파를 지칭하는 일상용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볼 때 나사렛 사람들로 이루어진 같은 마음을 가진 유대인들의 모임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다른 유대 ‘당파들’과 구별 짓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메시아가 이미 왔으며, 그 이름은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기독교가 예루살렘 밖으로 확장되어 나갔을 때에 회당에 의하여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이 이루어지게 된 사람들은 기독교 교제 안으로 들어왔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회당에서도 행해졌기 때문에 회당에서 행해지던 예배의식과 유대 신앙적 전통에 익숙해져 있는 남녀들뿐만 아니라 도성(都城)에서 성전 예배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하여 새로운 예배 형태를 고안해 낼 필요는 없었다. 마치 회심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한 분이신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순전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그의 백성을 부르시는 그의 부르심에 대한 신앙으로 그들을 이끌었던 유대교의 기본적인 교리 위에 기독교가 형성된 것 같이, 기독교는 성전 의식과 회당 예배에 의하여 형성되어진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예배 형태를 유산으로 받아들였다. 초기 기독교 예배의 배경은 이러한 성전과 회당이라는 두 가지 유대적 제도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유대인의 회당은 초대교회 예배 형태에 영향을 미친 것 이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초대교회 예배는 고유의 독특한 것으로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 회당과 다락방에서 얻어진 기독교의 경험이 융합되어 생겨난 것이다. 교회의 전형적인 예배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회당 예배와 다락방에서의 성례전적인 경험의 결합에서 발견되어진다. 그런데 이 결합은 신약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2) 2세기 교회 문헌에서 예배에 일정한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주후 1세기경에 쓰여 진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Didache)의 두 번째 부분은 세례를 어떻게 집례 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배에 대한 수칙을 가르치고 있다. 디다케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초기 애찬 때 사용되는 전체 본문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애찬은 교회의 최초의 예배 경험에서 기인한 기독교의 공동 식사였다(행 2:46). 원래는 주의 만찬도 애찬의 상황 가운데서 기념되었다. 그러나 후에 주의 만찬과 애찬은 점차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애찬은 유대인의 식탁 교제(the Jewish table fellowship)에서 유래된 산물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식사 때에 잔과 떡 위에 감사 기도를 되풀이 하는 것이 보통 있는 흔한 풍습이었다. 따라서 유대인이기도 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이 감사 기도를 약간 변형하여 기독교 공동체 식사에서 사용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2세기의 역사가 플리니(Pliny)의 기록을 보면 애찬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비투니아(Bithynia)의 지사로 있던 플리니는 2세기 교회의 예배가 베일 속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자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조사하여 로마의 황제 트라얀(Trajan)에게 서신으로 보고하였다. 플리니는 서신에서:
“그들(그리스도인들)의 죄 혹은 잘못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은 특정한 날을 정해 놓고 해뜨기 전에 모여 그리스도를 마치 신처럼 생각하고 그들끼리 찬양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죄도 짓지 않겠으며, 도적질과 강도와 간음죄를 멀리 하겠으며, 약속을 어기거나 마땅히 내야 할 돈을 내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들은 이같이 행한 후에 떠났다가 다시 모여 식사를 나눕니다. 그런데 이 식사는 평상적이며 아무런 해도 끼칠 우려가 없는 식사 모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가 페하의 명을 받들어 모든 집회를 금하는 명령을 선포한 후 이 같은 일을 중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플리니가 이 식사를 “평상적”(common)이며 “아무런 해도 끼칠 우려가 없는”(harmless)이라고 묘사한 것은 그가 이 식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식사가 주의 만찬이 아닐 가능성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이 식사가 “찬양”(hymn)과는 분리되어 행해졌다는 점이며 둘째, 플리니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이 식사를 중단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식사는 주의 만찬과는 구별되는 애찬(the agape feast), 즉 교회의 회원이 모두 참여하는 공동 식사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주후 150년경에 순교자 저스틴(Justin)이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에게 보낸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변증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태양의 축제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모여 드리는 예배 순서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아마도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된 예배 순서로는 최초의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의 저스틴의 기록을 보자.
“주일(Sunday)이라고 불리우는 날에는 도시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이든 시골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이든 간에 한 장소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사도들의 회고록(memoir)과 선지자들의 글을 읽습니다. 봉독자가 읽기를 끝내면 사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이 같은 고귀한 것들을 본받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초청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모두 일어나 기도를 올립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기도가 끝나면 떡과 포도주와 물을 내옵니다. 사회자는 정성을 다하여 기도와 감사를 올리면 회중들은 ‘아멘’으로 동의를 표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 거룩한 것(떡과 포도주)을 분배하면 각자가 이것을 받아먹습니다. 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집사들을 통해 (이 떡과 포도주를) 보냅니다.”
저스틴의 변증서에서 2세기 교회의 예배가 말씀과 주의 만찬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예배의 규범적인 구조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Ⅰ부 말씀의 예배
성경봉독(선지서의 말씀과 사도들의 회고록<복음서와 서신서에서>)
사회자의 설교
공동기도(온 회중이 서서 기도에 참여한다)
Ⅱ부 주의 만찬의 예배
입맞춤으로 하는 평화의 인사
사회자에게 떡과 포도주와 물 한 잔을 드림
성찬 기도(사회자가 즉석에서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
응답(회중이 “아멘”이라고 화답함)
성찬을 받음(떡과 포도주가 분배되고 불참한 자에게 집사가 전해 줌)
헌금(헌금을 모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줌)
저스틴의 글에 의하면 찬송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2세기 기독교 예배에서 시와 찬미나 신령한 노래를 불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고전 14:26참조)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회당 예배에서 곡을 붙여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것이 유대교에서 행하는 관습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들이 이러한 관습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으로 본다. 성경을 읽고 강해하는 일과 기도에 역점을 둔 일도 회당 예배의 관습이었다. 그리고 회당 예배에서 모세오경과 선지서에서 말씀을 읽고 이어서 강해하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2세기 기독교 예배에서도 성경봉독에도 선지서와 복음서를 봉독했을 것이다.
(3) 회당 예배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기독교 예배로의 발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갔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처음에는 회당 안에 남아 있다가 점차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갔다. 기독교는 주후 60년 중반에 바울이 죽을 때까지만 해도 유대교의 한 종파였으나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분명히 독자적인 종교의 모습의 띠게 되었다. 두 종파의 결별의 원인은 율법의 문자적 준수에 대한 의견의 차이와 예수를 메시아로 보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독론 때문이었다.
독자적인 기독교 예배로의 발전에서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주의 만찬과 애찬이 완전히 분리되게 된다. 그 대신 떡과 포도주의 성찬 예식이 예배의 후반부의 핵심으로 계속 남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 식사가 주의 만찬으로부터 분리되었는지를 분명히 알려주는 어떤 문헌도 2세기의 문헌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단지 고린도전서 11:20-22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식사를 오용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디다케에서와 플리니의 서신에서도 실마리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어쩌면 실제적인 이유로 성도의 수가 많아짐으로 해서 모든 교인들이 공동식사를 하는데 있어 부담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애찬은 주의 만찬으로 대치되어, 애찬과 주의 만찬의 개념은 단일한 예식 행위로 용해되었던 것이다. 주후 150년에 저스틴이 기술한 글에서 이런 예를 볼 수 있다.
초대교회에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규범적인 예배 패턴은 다음과 같이 예배의 본질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내용 : 예수 그리스도, 즉 그의 구약의 성취, 그의 탄생, 삶,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이다.
기독교 예배의 구조 : 크게 말씀과 성찬으로 나누어지며, 여기에 기도, 찬송, 송영, 축복기도, 응답 등이 부수적으로 딸린다.
기독교 예배가 생긴 상황 : 하나님에 의해 예배에로의 부름을 받은 기독교 교회 안이다. 예배 가운데서 각 회중은 각자 맡은 바 역할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예배 자들은 이에 응답한다. 예배는 주의 만찬에 의해 인쳐지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만찬을 통해 떡과 포도주라는 상징으로 자신을 제시하신다.
3. 3세기의 예배
3세기에는 예배에 관한 문서들이 많지 않다. 주후 220년경에 로마의 힙폴리투스(Hippolytus)의 ‘사도적 전승’(the Apostolic Tradition), 3세기 초반 북부 시리아에서 나온 ‘사도들의 보편적 가르침’(the Didascalia Apostolorum) 그리고 주후 22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와 주후 251년경 오리겐(Origen)의 글에서 볼 수 있다. 다음은 3세기 말의 한 예배 순서이다.
Ⅰ부 말씀의 예배
성경봉독(Lections) : 모세오경, 선지서, 서신서, 사도행전, 복음서, 감독들의 서신을 봉독한다.
시편 찬양(Psalmsung) : 성경봉독 사이마다 독창자들(cantors)이 부른다.
찬양(Alleluias).
설교(Sermon or sermon).
집사(교직자)의 기도(Deacon's litany) : 학습교인과 고해자를 위한 기도한다.
믿음이 있는 자(성찬에 참여할 사람) 이외에는 다 돌려보낸다.
Ⅱ부 성찬식
집사의 기도(Deacon's litany) :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이름이 적힌 두 쪽으로 된 명단을 들고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한다.
입맞춤으로 하는 평화(Kiss of peace)의 인사를 한다.
헌상(Offertory) : 구제를 위한 헌물
떡과 포도주의 헌물
성찬용 떡과 포도주와 물을 혼합한 것을 준비한다.
수르숨 꼬르다(Sursum corda, 너희 마음을 들라<Lift up your hearts>).
봉헌기도(Consecration Prayer) :
서언(Preface) : 창조의 사실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등을 찬송하는 감사와 찬양
상투스(Sanctus,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구속에 대한 감사(Thanksgiving for redemption, <기도>)
성찬 제정의 말씀(Words of Institution)
아나므네시스(Anamnesis, 기념의 말씀<remembrance>)
에피클레시스(Epiclesis, 주여 당신의 성령을 보내 주소서<invocation of the Holy Spirit>)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대 중보기도(Great Intercession for living and dead)
주기도(Lord's Prayer).
떡의 분할(Fraction, 떡을 뗌<breaking of the bread>)
들어올리기(Elevation, “거룩한 것은 거룩한 분께”<Holy things to the holy>)와 분배(Delivery)
모든 신자가 ‘아멘’으로 대답하면서 떡과 잔을 받아먹는다(Communion of all in both kinds). 받아먹는 동안 노래하는 사람들(성가대)은 시편 43편과 34편을 부른다.
성찬 후에 감사의 기도(Post-communion Thanksgiving).
집사의 기도와 집전자의 간략한 중보기도(Deacon's litany and celebrant's brief Intercession)
떡을 남겨둠(Reservation of bread only), 병든 자와 불참자를 위하여
폐회(Dismissal).
여기에서 1세기 전 저스틴의 예배식 순서와 3세기의 예배식 순서를 비교해 보면 구조적으로 2부 구조(two-part structure)를 가지고 있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의 중심성이 그대로 강조되었고, 예배의 공연적 성격(in the sense of enactment)이 변화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변화가 있다면 몇 몇 의식이 첨가된 것을 알 수 있다. 첨가된 내용은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와 회중들 간에 인사이다.
목사 : “주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계실지어다”
혹은 “여러분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기원하면,
회중 : “목사님의 영에게도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화답한다.
이 같은 인사법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문안에서 기원되었다.(룻 2:4 참조) 이 문안은 교회의 기도에 앞서서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인간사로 바뀌었다. 아마도 2세기 말에 교회에 도입된 것으로 보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리십시오”(Sursum corda)는 성찬식을 시작할 때 하는 말인데 키프리안 이후 모든 예전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키프리안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거룩’(sanctus)의 화답은 일찍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클레멘트의 편지(주후 96년)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도할 때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한 바와 같이 일어서서 양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하거나 양손을 접어 가슴에 얹고 기도하였다. 성경을 읽는 이가 신약 성경에서 말씀을 봉독하면 회중은 그것을 가장 값진 말씀으로 알고 일어서서 들었다. 그러다가 점차 복음서에서 말씀을 봉독할 때나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내올 때에 사람들은 경외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중요한 공 예배 인도는 큰 교회에서는 감독이 주로 하거나 목사 가운데도 지도적인 목사가 인도하였다. 집사들도 예배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을 안내하며, 성경봉독하며, 기도를 인도하거나, 교회 문을 지키며, 질서를 지키도록 돌보며, 성찬 시에 떡과 포도주를 가져다 내고 나누는 일을 도왔다. 일반 평신도들도 성경을 봉독하거나 기도하는 일을 돕고 화답하며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예배의 어떤 부분들은 고정되었지만 3세기의 예배는 상당히 자유로웠다. 그렇지만 성찬 기도의 내용은 점차 엄격한 주의를 요구했다.
4. 4, 5세기의 예배
4세기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로의 개종으로 인하여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이라는 호조건 속에서 급성장을 하였다. 또 이 시기는 다양한 신조들을 통해 교회의 신학을 형성하는 시기였다. 교회의 급성장으로 인해 많은 목회자가 필요했지만 잘 훈련된 목회자를 양성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필요하게 된 것이 기록된 예전이었다. 이 시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기독교 예배 의식들이 풍성하게 발전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참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이 시기의 예배를 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이 시기의 예배의 특징은 말씀과 성찬이라는 2부 구조가 유지되면서 각 지역의 특색이 예배의 형식과 형태에 반영되었으며, 예배와 목회에서 맡은 임무를 따라 주교, 장로, 집사, 서리집사, 성경봉독, 성가대원 등으로 교직자들의 교계제도가 서서히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전을 쫓아 하는 예배 행위가 신약보다는 구약적인 전통에 의존하게 되었고, 로마의 국가적인 제의(祭儀)의 요소와도 접합이 되었다. 결국 이 시기의 예배는 초기의 예배 정신이 왜곡하게 되었다. 특히 성찬식을 행할 때 집례자는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으로 알고 죄를 사하시며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면서 죄의 용서를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되었다. 성찬 예식이 이렇게 되자 예배 자들은 떡 자체를 예배하고 그로 인하여 성찬식을 신비하고 두려운 일로 여겼고, 예배를 관람하는 관람객으로 전락하고 겨우 일 년에 한번만 떡을 받아먹기 위하여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4세기의 예배는 교회가 속한 문화를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동방교회의 예배는 헬라적 사고의 영향을 받아서 매우 심미적(審美的) 영향을 받아서 의식적이고 상징이 널리 사용되었다. 비잔틴 예배(Byzantine worship)는 고도로 의식적이었으며, 현란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매우 신비적이었다.
동방 교회의 예배가 의식적이고 현란하고 신비함을 추구했던 것은 요한계시록의 천상의 교회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배(계 4, 5장)를 재현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천상의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신비함을 위해서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듯이 예배당을 철책 휘장으로 두 부분의 장소를 구분하기도 하였고, 벽에는 프레스코화의 화려한 색깔과 성상(聖像)들의 수수한 아름다움과 성직자들의 호화스러운 의복을 창출하기도 했다. 동방 예배의 관심은 천상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지상을 천상으로 끌어올리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이 시대의 서방 교회의 예배는 거의 알려진 바 없고, 그 연대도 후대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서방 교회에는 주후 500년 이후에 고올식 의식(the Gallican rite)과 로마식 의식(the Roman rite)이 있었다. 고올식 의식이 유럽 전역에 두루 사용되면서 지역마다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던 반면에 로마식 의식은 주로 로마에서만 사용되었다. 고을식 의식은 초대교회의 원시적 예배 형태에 기인되었고, 로마식보다 더 화려하고 감각적이며, 더 상징적이고 극적(dramatic)이고, 더 길고, 더 유동적인 특색이 있는 반면에 로마식은 그 기원이 불분명하고, 헬라어로 기록되었던 최초의 예배 의식서가 4세기에 점차적으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9세기에 피핀(Pepin)과 샤를마뉴(Charlemagne)에 의해 고올식 의식이 박해를 받아 사장되고, 로마식 의식이 서방 교회의 표준 예배 의식이 되었다. 10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로마식 예배 의식은 1570년에 그 형태가 완전히 고정화되기 전까지 그 의식과 강조점에서 수많은 작은 변화를 겪었다.
로마식 예배의 특징은 서방 교회와 같이 지역 문화를 반영하였고, 로마식 예배에는 로마인들의 실용주의적 정신이 그대로 묻어 있어 화려하지도 고도로 의식적이지 않고 단순하며 차분하였다. 로마식 예배는 많은 의식의 진행 없이 한 순서에서 다른 순서로 단순하게 진행되었다. 로마식 예배는 3세기의 단순한 예배 진행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성찬 때 떡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는 것, 종을 울리는 것, 불을 사용하는 것, 향을 피우는 것, 무릎을 꿇는 것 등은 5세기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식 예배 의식의 단순한 장엄함 속에는 매우 큰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임재 의식과 경외감이 넘쳐흘렀다.
5. 중세 로마교회의 예배(미사)
중세 시대의 예배에 있어서 큰 변화를 맞이하는 변역기(變易記)였다. 서방에서는 로마가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예배 의식이 보편화 되었다. 중세 초기에 드러난 두 개의 별개의 운동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 두 운동을 통해서 중세 예배의 변화의 시초를 추적해 낼 수 있다. 중세의 예배의 변화를 가져온 두 운동이란 첫째는 기성 교회가 예배를 하나의 신비로 강조한 것과 둘째는 수도원 운동이 예배의 기도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중세 시대에 일어난 예배의 변화는 예배의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형식에 대한 이해와 형식의 의미와 형식에의 체험의 분야에서 일어난 변화였는데, 그 원인으로는 첫째, 콘스탄틴 대제의 치하 때 교회가 많은 이교의 축제들과 풍습들을 개조하여 거기에다 기독교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신비적 의식으로서의 예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예배 의식 자체를 목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개념이 예배 행위를 신비 의식으로 만들면서 교회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둘째, 언어가 다른 곳에서도 미사에 사용되는 언어는 일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사 때 성직자들이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미사와 성직자들 주위에는 신비의 광채가 빛나는 것과 같이 생각했다. 더욱이 교회가 점차 자신을 한 몸으로 보기보다는 위계질서를 갖춘 제도로 보기 시작함에 따라 교회와 일반 교인들의 거리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고, 교회는 구원을 베푸는 자로 자칭하였으며 예배 특히 성찬은 구원을 받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셋째, 미사가 하나님의 현현(an epiphnay of God)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사를 신비적으로 생각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반 회중들은 미사를 바라만 보았고, 성직자들은 일반 회중 앞에 한편의 드라마를 펼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넷째, 미사를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a sacrifice)로 보았기 때문에 미사를 신비적으로 생각했다. 미사를 희생제사로 생각한 결과 미사를 참석 한 후 식사를 하면 더 맛있고, 갑작스런 죽음도 당하지 않고, 심지어는 미사를 올리는 동안에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까지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미사의 횟수를 늘렸고, 성직자는 돈을 받고 산 자나 병든 자나 죽은 자를 위해 미사를 드려줬고, 미사는 성직자만의 전유물로 되어 버렸다.
중세 시대의 예배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원인은 수도원 운동이다. 수도원 운동은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으며 기도를 통하여 개인 영성을 쌓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수도원의 예배는 처음에는 교회의 예배와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이 장차 올 왕국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지속적인 종말론에 관심을 가졌고, 이것은 그들의 예배에도 반영되어 나타났다. 따라서 그들의 예배는 점차 경건적 혹은 헌신적 성경을 띠게 되었다. 예를 들면, 성찬은 경건의 수단이 되었으며 성찬에 참석하는 것은 곧 좀 더 거룩해지는 수단, 즉 성화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의 수단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성찬을 교회의 실현과 미래의 왕국 잔치에의 참여로 본 초대교회의 시각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관점이라는 것은 성찬을 영적인 유익을 얻는 행위로 본 것뿐이었다.
수도사들은 삶의 모든 것을 기도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기도는 수도사들의 주된 일이었다. 어떤 수도사들은 오직 기도하는 데만 일생을 보내기도 했다. 수도사들의 개인기도는 시간과 삶의 의미의 선포였으며 경건적 성격이 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경건의 향상이 그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있어서 수도사들이 기도를 개인적 경건의 관점에서 본 것은 교회의 기도 또한 개인적 경건의 관점에서 보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기도는 경건을 증진하기 위한 수단이 된 것이다.
중세 시대는 콘스탄틴 대제의 시대와 함께 기독교가 융성하였지만 기독교 예배는 두 가지 요인의 영향으로 차츰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첫째, 의식(ceremony)이 점차로 증가하였다. 둘째, 이에 따라 기독교 이전에 로마 제국을 풍미했던 이교들의 신비 종교의 미묘한 영향을 받아 서서히 기독교 예배가 변질되어 갔다.
예배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첫째, 교회가 교인들의 자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예배를 드림으로 예배의 방관자가 되게 하여 예배를 신비주의로 몰고 갔다. 둘째, 교육의 실패로 교인들로 하여금 신령한 예배를 할 수 없게 하였다. 셋째, 미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구약의 제사로 여겼다. 중세 시대에는 이 같은 것이 도를 넘어서서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6. 종교개혁 시대의 예배
이제 우리는 종교개혁 시대의 예배를 살펴보게 되었다. 중세에 있어서 예배는 예전적으로 흘렀기 때문에 초기 교회의 예배에서 강조되었던 강설 부분이 거의 사라지고, 성경봉독마저도 사라져 하나님의 말씀을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미사에서는 예배 자들의 모국어가 아닌 라틴어로 행하였고, 성찬은 구약의 제사가 되었으며, 사제들의 전유물이 되어 청중들은 두려운 마음과 미신에 찬 눈으로만 지켜보았고, 겨우 일 년에 한번 정도만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었다. 찬송의 뜻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회중들은 찬송을 부르는 동안 시종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결국 역사의 주인이시며,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신실한 종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과 언약의 백성들을 위하여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들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 월리암 맥스웰(William D. Maxwell)은 “기독교 예배의 개론”(An Outline of Christian Worship)에서 종교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
“일반 회중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성찬에 참여하면 그뿐이었다. 대부분의 교구 사제들이 문맹(文盲)이었기 때문에 설교를 할 줄 몰랐다. 따라서 설교는 심각할 정도로 퇴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또한 성경봉독마저 경시되었고, 성인들의 전기나 전설에서 따온 구절을 낭독하는 일로 대치되기가 일쑤였다. … 따라서 종교 개혁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교 개혁은 신학의 개혁이었지만 구속받은 언약 백성들이 언약의 하나님을 섬기고, 언약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야 하는 예배를 개혁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고 실제적인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예배가 비성경적임을 알고, 예배의 개혁을 시도함에 있어서 신앙고백서를 작정하고, 예배 지침서를 편찬하여서 언약의 하나님께 예배함에 있어서 소홀함이 없게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그 목적은 일치했지만 어떤 하나의 예배 의식은 없었다. 예배의 개혁에 있어서는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 개혁자들의 예배 개혁에 있어서 어떤 점이 불일치하고, 어떤 점이 일치하는가를 살피게 될 것이고, 개혁주의 교회의 형성자인 칼빈의 예배에 대한 이해와 개혁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1) 루터의 예배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의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단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학적 신념에 의하여 하나님께 예배함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의 예배를 개혁할 수밖에 없었다.
미사에 대해 루터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반복으로 보았고, “교회의 바빌론 유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라는 저서에서 미사를 “폐습”으로 여기고 배척했다. 왜냐하면 이 견해는 믿음만을 통한 칭의(稱義)의 교리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루터가 미사 가운데서 가장 신랄하게 비난한 부분은 ‘봉헌기도’(the Roman prayers of the eucharistic canon)이다. 루터는 미사가 감사의 예배로서의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한 속죄 제사로 변하였다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또 루터는 사제가 구약의 제사장이 아니며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고 강조했다.
루터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부인했다. 화체설은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사인 미사 속에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즉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여 구원을 위한 희생 제사로 성부께 드려진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 화체설을 배척하고 대신에 후에 공재설(Consubstantiation)이라고 불려지는 내용을 가르쳤다. 공재설은 성찬예식을 베풀 때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 속에, 그 아래, 그 곁에 함께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루터는 그의 소요리문답에서 “제단의 성례는 빵과 포도주 그 아래 있는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살과 피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또 과감하게 라틴어 예배 의식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루터는 1523년에 ‘미사와 성찬의 규례’(Formula missae et communionis)를 내 놓았는데, 이 규례는 중세 교회에서 행하던 많은 예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찬송과 성경 본문은 독일어였지만 기타 부분은 그냥 라틴어로 하도록 했다. 성찬 의식에서 떡과 잔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부분을 위시하여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그 자리에 설교가 중심이 되게 하였다. 1526년의 ‘독일 미사’(Deutscher Messe)에서는 중세적인 요소를 더 철저히 제거하고 라틴어의 찬송도 독일 민요 가락의 찬송으로 대치했고, 도시의 대성당이나 큰 교회에서는 주로 ‘미사와 성찬의 규례’에 따라 예배하도록 했고, 작은 도시나 농촌 교회에서는 ‘독일 미사’를 사용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언어로써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 독일 시인들에게 적합한 찬송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고, 자신이 직접 쓴 찬송을 예배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중에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유명한 찬송도 있다. 루터는 오르간을 계속 사용하였고, 성가대로 하여금 라틴어로 합창을 하도록 했고, 반주 없이 노래를 부를 때는 성가대가 회중의 찬송을 이끌어 가게 했다. 성가대가 없는 교회에서는 ‘칸토’(cantor, 노래하는 자)가 찬송을 인도하도록 하였다. 루터의 교회음악의 장려로 요한 발타(Johann Walther)는 1524년 교회 성가집을 출판하였다. 교회 성가대는 17세기와 18세기에 와서 더욱 두드러지는 역할을 하였고, 바하(J. S. Bach)와 같은 거장의 ‘칸토’가 나와서 교회 음악을 꽃피우게 되었다. 루터의 1525년의 ‘독일 미사’에 실린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찬송 또는 시편(독일어로)
키리에(Kyrieleison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곡을 붙여 부르는 기도송)
기도(Kollecten Gebet, Collect, 예배 시작을 위한 짧은 기도)
찬송
복음서(곡조를 부쳐 낭송)
신앙고백의 찬송(독일어로)
설교
주기도(풀어서 하는 기도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
성찬 제정의 말씀
배잔(성찬을 받는 동안에 ‘거룩’-Sanctus나 찬송을 부름
성찬 후의 기도
아론의 축복
루터는 성경이 특별하게 금지하지 않는 한 어떤 의식이나 장식, 형상은 예배의 요소로 수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세의 예배 형식을 그냥 놔두었다. 루터의 예배 제도에 중세적인 요소가 약간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이처럼 예배 규정 원리를 철저하게 준수하지 않은데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예배 개혁은 긍정적인 공헌이 있다.
(2) 개혁주의 예배의 기원
개혁주의 전통의 기원은 몇몇 중심지들과 지도자들의 활동에서 찾는데, 대체적으로 스위스의 쮜리히(Zurich)와 제네바(Geneva)를 통해 개혁주의 전통이 세계 곳곳으로 전달되었지만 쮜리히,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 바젤(Basel), 베르네(Berne), 제네바와 같은 중심지들이 각각 기여했다. 마틴 루터의 활동이 스위스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고 그 발전에 기여하였지만 루터의 활동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그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적 인문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 바젤(Basel)에 정착한 에라스무스(Erasmus) 주위에는 토마스 비텐바하(Thomas Wyttenbach)를 비롯하여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종교적인 새로운 움직임들은 어느 한 사람의 활동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해를 걸쳐 발전해 온 기독교 인문주의와 연관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쮜리히에서는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지속된 예배의 개혁으로부터 시작한다. 쮜리히와 제네바 이 두 자치 도시에서 개혁주의 예배가 발원하였다. 종교개혁 운동은 언제나 각 지역에 자유와 다양성을 허용하였으므로 쮜리히와 제네바를 유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분명 쮜리히와 제네바는 종교개혁 운동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였다.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의 특징은 종교개혁을 표방한 그 어느 교회보다도 철저하게 로마 가톨릭의 예배 요소를 배제하고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개혁자들의 주장은 성례에만 치중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달고 있는 중세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옛적(초대교회)의 고유의 예배로 회복시키자는 것이었다.
(3) 쯔빙글리의 예배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개혁주의자로서 예배를 개혁하는데 있어서 선봉에 섰다. 쯔빙글리는 음악가였으며, 헬라어에도 능통했고, 당시 문학에도 전통했다. 쯔빙글리는 중세의 무거운 예배 분위기를 과감히 깨뜨려 버렸으며 특히 말씀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예배는 단순하게 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의 예배의 개혁을 말씀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쯔빙글리는 그가 유년시절을 지냈던 알프스에 있는 집 근처 글라루스(Glarus)에서 성직자로 지냈고, 이어서 아인지델른(Einsiedeln)에서 잠시 지낸 후 쮜리히의 대성당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가 쮜리히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은 1519년 1월 1일이었다. 그 때 그는 앞으로는 강단에서 마태복음을 앞에서부터 한 페이지씩 강해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12년 동안 이 방법을 고수하여 신구약 성서의 많은 부분을 강해했다. 쯔빙글리를 비롯한 스위스 개혁자들은 모든 기독교적 관행은 명확한 성서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쯔빙글리가 “결국 나는 말씀과 성령의 인도에 의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부터 직접 배워야 할 …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쮜리히의 교회는 성서연구와 설교로써 정화되고 개혁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개혁을 철저하게 강조한 것이 “개혁주의”(Reformed)라고 명명된 근본적인 이유이다.
1525년 그의 동역자인 사제 레오 주드(Leo Jud. 1482-1542)는 매일 예언의 예배를 드렸다. 예언의 예배란 매일 구약성경을 읽고 주석하고 사람들에게 응답할 것을 요청하는 말씀의 예배였다. 쮜리히 시민들은 끊임없는 성경과의 만남을 공급받고 있었다. 쯔빙글리의 동료들은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15번씩 설교를 하였다. 이렇게 쯔빙글리의 개혁은 말씀으로 표현된 설교에 의해 시행되었다. 쯔빙글리는 지정된 복음서를 설교하는 관행을 거부하고 연속 설교를 하였고, 대부분 주석적인 설교였다.
그는 말씀이 손상되는 예배 의식은 과감히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예배 의식에 있어서 말씀이 드러나지 않는 의식은 간소화했다. 그래서 쯔빙글리의 개혁을 가슴으로부터라기보다는 루터처럼 머리에서 나오는 개혁처럼 보였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예배에 대한 견해는 칼빈주의 안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같은 영향력은 영국 청교도들을 통해서 침례교, 장로교, 회중 교회와 독립교회(Independents)로 퍼져 나갔으며, 이들을 통해 대부분의 미국 개신교로까지 확산되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1523년에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해설’에서 로마 가톨릭 미사의 완전 폐지를 요구하였으며, 말씀이 손상될 우려가 있는 요소를 제거했고, 교회 안에서 성상(聖像), 성가대, 오르간을 제거했고, 벽에 있는 종교 벽화는 회칠로 지워버렸다. 쯔빙글리의 동역자인 레오 주드는 교회 내의 성상들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고 쮜리히 대 성당 안에 있는 성상을 제거하려 했지만 시의회에 부딪쳐 몇 차례의 논쟁 끝에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교회 내에서는 제거하기로 하고 의회의 명령으로 1524년 6월 20일부터 7월 2일까지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제거했다. 쮜리히의 예배는 쯔빙글리에 의해 단순히 설교를 하는 예배로 개혁되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쯔빙글리는 음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525년의 ‘독일어 예배 의식’(Deutsche Liturgie)에서 음악까지 폐지했다. 음악이 말씀으로 예배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하여 1527년 의회는 파이프 오르간을 파괴하라는 명령까지 내려 파이프 오르간이 제거되어 1523년에 찬송이 멈추어 1598년까지 쮜리히에서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쯔빙글리는 예술에 대해 민감했고 예술의 힘을 인정했다. 그러나 만일 그 힘이 예배 자에게 유익한 힘이 아니라면 예술은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쯔빙글리의 생각이었고, 그리고 그 결과는 철저한 단순성이었다. 꾸밈이 없는 본래의 목소리로 드리는 예배에 성실함이 있었다. 후에 칼빈도 시편 찬송을 선호하게 된 것은 찬송의 곡과 가사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꾸밈이 많다는 것 때문이었다.
쯔빙글리는 성찬에 있어서도 개혁을 실시했다. 중세에는 사제들만의 전유물이었고, 신자들은 사제들의 전유물이 된 성찬을 마치 드라마를 보듯이 관람하여 성찬에 방관자이었는데 떡과 포도주를 신자석(信者席)으로 가져가서 각 사람이 떡을 뗀 다음 포도주 잔을 마시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중세에는 매 주일 행하던 성찬을 일 년에 네 번으로 줄였다. 일 년에 네 번 행하는 성찬은 후에 제네바 시에도 영향을 주어 칼빈은 매 주일 행해지기를 바랐지만, 시의회의 반대에 부딪쳐 쯔빙글리의 주장대로 네 번 행했다. 이것이 장로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쯔빙글리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대신 기념설을 주장했다. 쯔빙글리에 있어서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며 신자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기회였으며 그리스도의 임재는 영적인 것이지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쯔빙글리의 개혁은 1531년 10월 가톨릭 진영과의 전투 중에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멈췄지만, 쯔빙글리는 그의 개인적인 성경 지식과 목회자의 지혜와 세심한 예배 계획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쯔빙글리는 과거와 완전한 단절을 꾀하였고, 예배를 단순화시켰다는 점에서 복음주의 교회의 예배 전통을 쯔빙글리에게서 발견한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쯔빙글리의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지배적이었으며, 교인들은 거의 수동적이었다. 학자들은 이것을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중심이 되고, 다른 순서들은 보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설교 중심적인 현대 예배의 효시라고도 말한다.
1525년의 ‘독일어 예배의식’에 있는 성찬 예배 순서는 아래와 같다. 일반 주일 예배는 이보다 훨씬 더 단순하였다.
Ⅰ부 말씀의 예배
성찬 준비
예배하자(Invocation, Votu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Collect)
성경봉독 : 서신서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 Gloria in excelsis(교독)
성경봉독 : 복음서에서
사도신경
Ⅱ부 성찬식
권면(Exhortation)
성찬상으로 다가서기(Fencing of the Table)
주기도
겸손히 나아감을 위한 기도
성찬 제정의 말씀 : 떡을 떼고 목사들이 먼저 성찬을 받는다.
떡과 잔을 회중에게 나눈다.
성찬 후 시편 교독(Post-communion psalm)
기도(Post-communion collect)
폐회(Dismissal)
(4) 파렐과 부쩌의 예배
존 칼빈(John Calvin)의 예배 개혁을 논하기 전에 칼빈의 예배 개혁에 있어서 두 스승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월리암 파렐(William Farel, 1489-1565)과 마르틴 부쩌(Martin Bucel)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칼빈의 예배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이 두 사람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정열적인 프랑스인 월리암 파렐의 지도 아래 시작되었다. 1536년 월리암 파렐은 칼빈이 제네바에 머물도록 설득했다. 파렐은 제네바에 오기 전 몽벨랴(Montbeliard)에서 개혁을 시작하면서 1529년 이후부터 베르네에서 이미 사용된 예배 의식에 주로 의존한 예배 의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해 자신의 예배 의식서인 ‘예식과 양식’(Manner and Fashion)을 출판했고, 1538년에는 새로운 편집본인 ‘의식과 예식’(Order and Manner)을 출판했다. 칼빈도 제네바에서 이 예식을 사용하였다.
마틴 부쩌가 1530년 교구장(superintendent)이 되기 이전까지는 스트라스부르크는 루터 교회의 영향 하에 있었다. 마티 부쩌는 쯔빙글리를 존경했기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쯔빙글리와 루터의 완충 역할을 하였다. 1524년 슈바르츠(Diebold Schwarz)가 처음으로 스트라스부르크의 미사를 수정하여 독일어로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그 후 부쩌는 시편과 찬송을 독일어로 부르게 하였고, 라틴어의 예배 순서 명칭들을 서서히 독일어로 바꿨다. 그리고 ‘미사’를 ‘주의 만찬(성찬)’으로 ‘사제’(priest)를 목사로, ‘제단’(altar)을 ‘성찬상’(holy table)으로 개칭하였다. 1537년 부쩌는 루터교회와 쯔빙글리파 교회의 예배를 절충하는 예배 의식서를 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부 말씀의 예배
죄의 고백
사죄의 말씀(Scriptural words of pardon, 디모데전서 1장)
사죄의 선언(Absolution)
시편, 찬송 또는 키리에스(Kyries)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말씀에 대한 조명을 기원하는 기도(Collect for Illumination)
시편낭송(Metrical Psalm)
성경봉독 : 설교 본문(Lection) - 복음서
설교
Ⅱ부 성찬 예배
구제헌금(Collection of alms)
떡과 잔의 준비(그 기간에 사도신경을 노래한다)
중재의 기도와 봉헌의 기도(Intercessions and Consecration Prayer)
주기도
권면(Exhortation)
성찬 제정의 말씀(Words of Institution)
떡을 떼기(Fraction)
나누기(Delivery)
성찬을 받는 동안 시편이나 찬송을 부른다.
성찬 후 기도
아론의 축도
폐회(Dismissal)
이상의 예배 예식에서 볼 수 있듯이 부쩌의 예배에서는 예배가 희생제사라는 식의 흔적은 하나도 없고 될 수 있는 대로 예배를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간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목사에게 본문을 택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규정된 성경봉독도 없어졌고, 설교는 한 시간 정도로 그 소요 시간이 길어졌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역사적인 예배의 내용의 빈약한 점이 비록 미학적이지는 못하나 훨씬 은혜스러운 예배 형식으로 대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더 이성적인 예배에의 접근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5) 칼빈의 예배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쯔빙글리의 개혁의 폭풍우가 몰아쳐 간 이후에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칼빈이 프랑스 인문주의자로 시작하여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는 데에는 성서의 권위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계시 속에서 그 근원을 찾음으로써 교회를 정화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를 교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를 가장 잘 평가하는 것일 것이다.
칼빈이 월리암 파렐의 설득으로 제네바에 머물었을 때 제네바에는 쯔빙글리와 파렐의 예배 의식서가 사용되고 있었고, 칼빈도 제네바에서 이 예배 의식서를 사용하였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빈은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전에 도미니크 수도회의 사제였던 마르틴 부쩌의 동료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3년 동안 활동했다. 칼빈은 그곳에서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해 목회를 하였다. 칼빈이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해 목회할 때 처음에는 스트라스부르크의 시 당국이 프랑스 피난민들에게 성찬을 허락하지 않아서 성찬식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 그 후 이것이 스트라스부르크의 관행이 되었다. 칼빈은 프랑스에서 온 피난민들의 교회를 섬길 때 그곳에서 스트라스부르크에서는 부쩌의 예배 의식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예배 의식서를 사용했다. 칼빈은 이 예배 의식서를 1539년에 받아들여 1540년(망실되어 남아 있지 않음)에 ‘프랑스 교회에서의 기도형태’(The Form of Prayers at the French Church)를 출판하였다. 제네바로 다시 돌아온 칼빈은 1542년에 이 책의 새로운 판을 출판했다. 1542년의 재판서는 다행히도 제네바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542년에 재판된 예배서는 스트라스부르크와 파렐의 예배 의식서에서 많이 차용했지만 칼빈은 좀 더 간소화 했다.
Ⅰ부 말씀의 예배
성구 : 시편 124편 8절
죄의 고백
시편(곡을 붙여 노래함)
설교본문(Lection)
설교
Ⅱ부 성찬식
구제헌금
주기도(길게 풀어서)
배찬 준비(사도신경을 노래함)
성찬 제정의 말씀
권면의 말씀
봉헌의 기도
떡을 뗌
배찬(시편의 노래 또는 성경봉독)
성찬 후 기도
아론의 축도
그리고 1545년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또 하나의 개정 형태를 내놓았다. 이 개정 형태의 예배 의식서에는 사죄의 확신과 십계명을 포함시키고, 중보기도와 공동기도를 분리하며, 또 성찬을 더럽히는 일에 대한 강한 경고 등이 있다는 것이 제네바 예배 의식과는 달랐다.
1537년 제네바 교회의 질서에 관한 조항들에서 교회 예배는 발전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처럼 칼빈의 예식서도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그런데 1545년의 예배의식 개정은 제네바에서는 허용하지 않았던 일부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배의식에 관한 칼빈의 의도를 가장 완전하게 진술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어 소개한다.
<고대교회의 관습에 따른 교회의 기도 및 찬송의 형태와 성례전 시행 및 결혼식 거행의 방법>
“우리의 도움은 주의 이름에 있나니 …”
죄의 고백
성경봉독
죄사함
십계명(첫째 돌판)
기도
십계명(둘째 돌판)
(제네바적 형태의 시편)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봉독 및 설교
대기도(중보기도)와 주기도문 부연설명
사도신경
떡과 포도주 준비
성만찬 준비기도, 주기도문으로 마침
성만찬에 대한 권면과 경고
분배의 말씀과 떡과 포도주 분배
시편
감사기도
시므온의 노래
아론의 축복
칼빈의 예배서는 중세의 미사를 따르는 것을 배척하고, 초대교회의 2부 예배를 따르려고 하였다. 즉 말씀과 성례가 잘 균형된 예배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칼빈이 모델로 삼은 초대교회는 단지 신약성경의 교회만이 아니라 교부들과 순교자들의 교회까지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칼빈은 이와 같은 자신의 생각이 스트라스부르크식 예배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했고 더욱더 간소화 했다. 칼빈은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주의 만찬이 실시되지 않는 교회의 예배는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주님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지도하고 가르치신다. 둘째, 그는 성례전으로 그것을 확증하신다. 끝으로 그는 그의 성령의 빛으로 우리의 정신을 조명하고 말씀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고 성례전에 참여하게 하신다.”
칼빈은 성만찬의 시행 없이는 성만찬의 불완전한 예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례라는 성례전과 아울러 성만찬과 말씀 선포를 포함한 예배를 원한 것이다. 칼빈은 성례전이 빠진 말씀 예배에는 동의했지만 말씀 선포와 가르침 형태의 말씀이 없는 성례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성례전은 언제나 말씀 선포와 가르침의 맥락 속에서 시행되며 그 궁극적인 타당성은 성령의 활동에 의존한다. 경건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주 중에 설교도 하였다.
칼빈은 매 주일 성찬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네바 시 당국은 쯔빙글리가 행했던 것과 같이 일 년에 네 번만 성찬을 행하도록 했고, 칼빈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철저히 반대했고, 쯔빙글리의 기념설도 따르지 않고, 성찬을 행할 때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영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임재설을 주장했다.
제네바 교회에는 평범한 성찬대가 도입되었고, 성찬을 받는 사람들은 그 주의에 앉거나 무릎을 꿇거나 했다. 성찬대 주위에 앉는 것이 개혁교회의 성찬을 받는 독특한 자세가 되어 화란에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관행으로 분명한 죄인이 성찬대 앞에 앉는 것을 막는 것이 용이해졌다. 칼빈은 강단에서 예배의 대부분을 인도하는 것을 좋아했고, 세례용 석대(石臺)를 회중 앞에 두어 유아 세례가 완전하게 회중의 행사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세례반이 강단과 가까운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고 결국 강단에 붙은 금속 테에 수반(水盤)을 걸쳐놓고 사용하게 되었다.
칼빈은 성례전과 말씀에 있어서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칼빈은 성경 강해를 모든 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강조했고, 교회력에 따라서 미리 정해 놓은 성구를 낭독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구집을 쓰지 않고 대신 성경 각 권을 차례로 다루어 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이 방법은 순서에 따라 성경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충실하게 강해 설교하는 방법이었다. 성경 강해는 성경 본문을 상세하게 설명한 다음 현재의 삶에 특별히 교리와 도덕의 관점으로 적용하는 방법이었다. 칼빈의 신학은 주로 주석적 신학이었고, 말년에는 많은 시간을 성경의 대부분의 책들의 주석을 쓰는데 보냈다.
심지어는 칼빈은 말씀을 증거 할 때의 목사의 말이 결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목사가 하나님의 입이라고 말했다. 물론 칼빈의 이 말은 목회자를 과대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씀이 사라진 중세의 예배를 생각하면 칼빈이 예배에 있어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겼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강해를 절실히 요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닉홀스(Nichols)는 “종교개혁은 위대한 말씀 선포의 부흥이었으며, 아마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부흥이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칼빈이 1545년의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 의식에 십계명을 포함시켰는데 그것은 기독교인을 의(義)로 인도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칼빈의 예배 의식에 있어서 십계명은 죄의고백과 사죄의 확신 다음에 위치하는데 이것은 죄 사함을 받은 예배 자들이 계속 율법과 관련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부분적으로라도 그것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예배 의식에 율법을 포함시킨 것은 칼빈의 예배 의식의 특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 때문이었다. 칼빈과 동일한 신학체계에서 이루어진 파렐의 예배의식에서는 고백할 죄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죄의 고백을 설교와 율법 다음에 놓았다.
칼빈은 지엽적인 문제와 주기도문, 신앙고백, 십계명 낭독과 시편 찬양에 관해서는 간소화했다. 이와 같은 칼빈의 예배관이 개혁교회의 중요한 예배관이 되었다.
존 레이스(John H, Leith)는 “개혁주의란 무엇인가”(Introduction to the Reformed Tradition)에서 칼빈의 예배 의식문 서문과 기독교 강요를 통해 칼빈의 예배관을 설명했다. 존 레이스에 의하면:
첫째, 예배가 성서적, 신학적으로 충실할 것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예배 의식의 모든 행위들은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명령받지 아니한 것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예배 시간, 장소와 같은 것들은 신학적 의미에서 제외시켰고, 성만찬의 포도주의 색깔이나 그가 좋아했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문제들은 덕성의 문제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교회의 예배와 기도생활에서 미술품은 제 2계명에 명백히 위반되는 것이었기에 제거했다. 예배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경외의 대상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부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예배는 신학적 이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예배는 전인격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성서적, 신학적으로 충실한 예배라 하더라도 예배하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드리면 바른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이 예배 자들이 예배를 이해하고 드려야 한다고 크게 강조한 이것은 칼빈주의적 예배의 한 가지 특성이다.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첫 단계는, 예배는 반드시 회중의 언어(자국어)로 이루어져야 하고, 말씀을 전달하는 언어는 단지 사상의 전달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전달자의 학식을 가지고 청중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칼빈의 확고한 생각이다. 성례를 행할 때에는 언제나 교육과 말씀 선포와 더불어 시행해서 그 행위 혹은 상징이 회중들로 하여금 분명하게 이해되도록 해야 하며, 음악에 있어서 멜로디는 의미를 모호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서 행하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결국 예배의 이해 가능성은 잘 훈련된 회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칼빈은 교회의 교육을 강조했다.
셋째, 예배가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배 자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었다. 칼빈은 덕성 함양에 이바지 할 수 없는 것은 교회 내에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넷째, 예배는 단순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예배는 순진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모든 과장된 허식을 세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성만찬 시행에 있어서 사람들의 지각을 기만하고 마비시키는 “화려한 것들”과 “생명력이 없고 연극 같은 잡동사니들”을 반대했다. 교회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겉치장과 하찮은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에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칼빈의 예배는 간소하기보다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모든 불필요한 동작, 행위, 언어들은 모두 제거했고, 예배 때의 언어, 행위, 도구들은 그것들이 전달 혹은 표현하려는 내용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물론 칼빈은 하나의 표준 예배 예식서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이 자신의 예배 예식서를 개정한 일이라든지, 칼빈은 매 주일 성찬을 행하고자 하였지만 시 의회의 반대에 부딪쳐 쯔빙글리가 주장한 것처럼 일 년에 네 번 행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칼빈은 잉글랜드 서머셋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배 형태는 교인들의 제반 여건과 기호를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또 이 편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분명한 것은 만약 신앙의 본질에 관한 문제라면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앙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까지 그 자유가 확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 편지에서 비 본질의 문제로 교회의 연합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모든 의식에서 서로 양보하고 신앙고백에 어떤 편견이 포함되지 않기 우선 확실히 해야 한다고 했다.
(6) 개혁주의 예배의 평가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루터파와 앵글리칸(영국 국교)은 로마 가톨릭의 예배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쯔빙글리와 재세례파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꾀하였고, 칼빈은 그 양자의 중간 입장을 취하였다.
폴 E. 앵글은 “당신의 예배 생활 전통적인가 성경적인가”에서 예배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공헌에 대해서 “예배가 다시 자국어(自國語)로 진행되며 교인들의 이해를 돕는 단순화된 형태로 진행되게 되었다. 예배에 있어서 회중들의 참여가 회복되었고, 특히 신자들 개인이 시편과 찬송가를 부름으로 자신들의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위치가 재고되었고, 말씀과 성례의 균형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주(主)의 만찬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분명히 정의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예배를 규정하는 원리가 보충되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공 예배에서 발전되었던 잡다한 첨가물들을 제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7. 영국 청교도들의 예배
영국의 청교도들은 반 예전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배 시에 예배 의식서에 있는 기도서를 따라 기도하는 것보다 자유롭게 기도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기도서의 사용을 정죄하지는 않았다. 16세기의 청교도들 가운데 극단주의나 분리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기도서를 가지는 것을 원했다. 에드워드 6세의 두 번째 예배 의식서를 사용하려는 교회도 있었고, 존 낙스의 예배 의식서를 사용하려는 교회도 있었다. 반면에 주로 장로교회를 이룬 중도적 청교도들은 좀 더 성경에 부합되는 예배 의식서를 갖기를 희망하였다.
청교도들이 최초로 내 놓은 기도서는 1556년의 존 낙스의 ‘제네바 예배 의식서’였고, 영국 장로교의 시조로 알려진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는 1582년에 존 낙스의 예배 의식서에 근거한 예배 의식서에 대한 국회의 동의를 얻고자 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저지당하고, 1584년에 왈데그레이브서(Waldegrave Book)으로 칭해지는 새로운 예배 의식서가 비밀리에 인쇄되어 ‘공동 기도의 양식에 관한 책’(A Book of the Form of Commn Prayers)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2년 후 이 책은 미들버거(Middleburg)에서 네덜란드인에 의해 출판되기도 하였다.
1644년에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한 지침서’(A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를 내놓았는데 이것은 공식적인 기도를 수록하여 따르도록 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거기에는 모범 기도문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예배를 위한 하나의 참고 수칙서였다. 1661년에는 영국 장로교 목사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가 ‘사보이 예전서’(Savoy Liturgy)로 칭해진 진정한 개혁주의 예배 의식서를 작성했다.
결국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제네바로 피신하여 거기에서 칼빈의 개혁 정신에 따라서 존 낙스가 작성한 ‘제네바 예배서’를 따라 예배하면서 의식서를 따라 하는 기도를 선호하였지만 그 후 200여 년간 청교도의 후예들은 자유롭게 기도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8. 미국 교회의 예배
17세기 초반부터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전통을 따라 교회를 설립했다. 즉 앵글리칸들, 루터교, 개혁파 교도들과 청교도들, 침례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같은 교파 교인들은 각기 다른 모국의 언어 및 문화적 배경을 따라 여러 그룹의 분립된 교회로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이 이루는 교회 조직과 교회를 이루는 정신과 예배 의식들이 각각 달랐다. 침례교들과 퀘이커들 혹은 신령파(Spiritualists)들은 본래 예전을 따라 드리는 예배 의식을 배격했고, 영국 국교회의 예배 의식을 반대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영국에서보다 더 극단적으로 예배 개혁을 하였다. 루터파 교회는 통일된 예배 의식서가 없어서 각 교회마다 다른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다가 1885년에 ‘교회서’(Church Book)를 발간하여 모든 교회가 사용할 것을 채택하였고, 복음주의 운동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서 예배하는 일에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화란과 독일에서 온 개혁파 교회들은 16세기의 것과 비슷한 예전과 기도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성례전을 제외한 기타 예배의 의식은 강제성이 없었기 때문에 곧 폐지되고 말았다. 미국의 장로교회는 1788년 개최된 첫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약간 수정해서 채택하여 예배의 안내서로 사용하였지만 19세기 들어와서는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예배 의식이나 형식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 경향이다. 회중교회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목사의 성직 임무를 반대하면서 간단하고 비예전적이며 자의적인 예배 순서를 택하였다.
미국 교회들의 예배는 대체로 비예전적이고 청교도적이며 복음주의적이었다. 성례전 시기와 주말과 월요일에는 말씀 선포, 가르침, 회중집회만 있었고, 시골의 교회 생활에서 성례전은 커다란 행사가 되었다. 천막집회, 부흥회 및 장기간의 집회 등은 모두 미국의 명목상의 기독교인 혹은 비기독교 인을 양육하고 특히 복음화 시키는 방편으로서 발전되었다. 교회사에서 이때만큼 정규 예배가 비기독교 인들을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인도하고 교회생활에 참여하도록 매개체의 역할을 한 경우는 없었다. 결국 명목상 신자들을 양산했고, 예배는 이런 목적을 지향하게 되었고, 성만찬은 “회심시키는 의식”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성만찬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고국에서 엄격하게 지키던 생활과 예배에 관한 규칙서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 고유의 토착적인 교회생활과 예배 형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미국 장로 교인들의 자유가 증진되었다. 1729년의 회의(the Synod of 1729)에서 웨스트민스터 예배 규칙서가 추천되었지만 하나의 지침서에 불과했다. 1789년의 제1차 총회를 앞서 미국 교회를 위한 새로운 ‘예배 규칙서’(Directory of Worship)가 준비되었다(1786-1788). 이 미국적 문서는 웨스트민스터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는 있으나 토착적인 것이 되기에 충분한 변화들을 담고 있었다. 교회 회의는 이 예배 규칙서를 보다 개방적이고 비형식적이며 복음주의적인 미국 스타일의 방향으로 개정하였다. 새로운 양상을 지니며 부흥회를 지지하는 장로 교인들은 그 다음 세기까지 계속해서 이러한 경향으로 예배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 장로교회는 역사의식을 잃어버렸고, 미국식 부흥회 형태를 애호함으로 개혁파 예배의 특징을 이루는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장로교 예배가 통일성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이 정확히 제시되었고, 19세기 하반기에는 예배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예배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하게 되어 개혁파 예배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찰스 베어드(Charles W. Baird, 1828-1887)이다. 베어드는 1855년 고전적 개혁주의 예배 의식을 집대성하여 ‘장로교 예배 의식’(The Presbyterian Liturgies)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베어드는 기존의 ‘규칙서’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선택적인 형태의 예배서를 간절히 바랬다.
펜실베니아의 독일 개혁파 중에서 개혁파 예배서의 가능성에 대한 방어가 존 네빈(Jhon W. Nevin)과 필립 스카프(Philip Schaff)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네빈은 당시 유행하던 부흥회를 비난하고 칼빈의 성찬 신학의 회복을 요구했다. 1857년에는 ‘공 기도서’(A Book of Public Prayer)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칼빈과 낙스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준비하고, 장로교 예배의 공인된 예배 의식서에서 수집한 공중기도를 수집한 책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교회에서 예전에 대한 복고운동(復古運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전의 복고운동으로 인하여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 안의 강도상과 성찬상을 재배치하였고, 성찬상을 제단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미술을 장려하고 상징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교회 예술을 복원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성찬 예배에도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없어진 순서가 재등장하게 되었으며, 예배 의식도 중세적인 순서가 많이 복원되어 길어졌다. 아마도 예전을 복고한다면서도 너무 지나쳐 중세 교회의 예배로 돌아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보수적이며 복음주의 성향이 강한 교회들은 예전의 복고운동에 별로 참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이 두 세력들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개혁파 예배는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다른 전통들로부터 차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7년에는 찬송가 학자 루이스 밴슨(Louis Benson)과 헨리 반 다이크(Henry van Dyke)의 지도 아래 ‘교회예배협회’(Church Service Society)가 조직되었다. 1906년에는 다이크의 주재 하에 만들어진 ‘공동 예배서’(The Book of Common Worship)의 임의적 사용을 미국 장로교 총회가 받아들여졌으며 1929년에는 장로교에서 사용 승인을 얻었다. 19세기에 장로교에서 있었던 예배에 관한 논쟁의 중심은 초기 미국 상황의 단순성과 예배를 일치시키는 문제였다. 미국 교회 예배의 간소함과 단순함에 관한 사회적 · 문화적 혼란성 때문에 개혁주의가 요구하는 예배의 진정성, 이해가능성 및 신학적 성실성 등이 때때로 잊혀 지기도 했다.
예배의 미국화 작업은 대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신의 민족적 · 교회적 유산을 많이 유지하고 있었던 개혁주의 교회들 속에서는 비교적 덜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미국 예배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은 원시 교회 시대부터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헌금이 있었고, 이 헌금은 성만찬 예배의 한 부분으로 있었던 것이 말씀의 예배의 기본적인 한 부분으로 자리 잡도록 발전시킨 것이다.
Ⅳ.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예배 의식의 의미
개혁교회의 예배는 무엇보다도 칼빈의 ‘교회 예배 모범’의 전통을 따라서 예배하게 된다. 칼빈이 말한바와 같이 예배 의식은 성경적이고, 신학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의 예배는 성경적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언약의 백성들이 언약의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의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높이고, 찬송하는 일체의 행위이며, 이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의 예배에 응답하여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복을 베푸신다. 제임스 드 종(James A. De Jong)은 개혁주의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찬양받으시고, 그의 교회는 축복을 받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규정된 연합집회”라고 정의했다. 이 때 목사는 중재자의 역할을 한다. 목사가 중재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축복을 할 때는 하나님의 입을 대신하고, 기도를 드릴 때에는 교회 회중의 입이 된다. 하늘의 예루살렘이 이 땅 위에 영원히 내려올 때까지 지상교회는 이 중재 직분을 필요로 한다.
1. 예배의 첫 번째 부분 - 예배의 시작
(1) 예배에의 부름(Votum)
예배는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의 교제이다. 그러나 이 예배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예배 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의 교제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예배는 내가 예배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셨고, 축복의 교제에 초청하여 주셨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예배의 시작을 언제로 보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로마교회에서는 정교한 성의를 입고 지팡이와 향로를 든 성직자를 성가대가 성가를 부르며 뛰 따르는 화려한 진행을 예배의 시작으로 본다. 이런 전통을 따르는 교회는 오늘날에도 있다. 어떤 개신교회들은 오르간 연주자들이나 예배 예식 주관자들은 전주곡(서곡)을 예배의 시작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시편의 정서에서 오르간 음악이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찬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예배 자들의 마음을 모으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 때 예배 자들은 묵상기도를 하는 교회들도 있다. 종교 개혁자들에 따르면 루터는 예배를 찬송으로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기도 또는 기원으로 예배를 시작했다.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은 예배는 반드시 시작 성구낭독(Votum)과 인사(Salutation)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Votum이란 말은 “소원”(Longging, desire)으로서 라틴어로 “헌신”을 의미하는 voveo에서 유래했다. votum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적인 의존을 표현한다. 목사가 강단에 서자마자 회중을 대신해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라고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호소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예배에로의 부름으로써 예배를 시작한다는 것이 예배 시작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이다. 예배에로의 부름을 회중이 같이해도 무방하다. 단지 목사가 하는 것은 회중과 함께 할 때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2) 인사(Salutation), 평화/ 축복의 인사
인사(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예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고백적 초청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 편의 응답이며 축복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하기 위해 모인 회중에게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한 방편으로 손을 들고 여호와 편에서 그의 입이 되어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전 1:13) 혹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5)고 축복을 선언한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축복이다. 언약의 백성이 언약의 하나님을 만나러 왔기에 목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 예배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은혜와 평강을 확신하게 된다.
회중은 예배에로의 부름이나 여호와의 응답적 축복 시에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누가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의 장면을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눅 24:50-51)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손을 들어 축복하시는 것을 보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한다.
칼빈은 예배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했다:
목사 : 우리의 도움은 주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회중 : 그분은 천지를 만드신 분입니다.
목사 : (손을 들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교제하심을 통해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성도 : 아멘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사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평강을 전한다. 회중들의 인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인사는 개혁주의 예배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이다.
(3) 첫 찬송
이제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나가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의 인사를 받은 회중들의 응답으로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이 예배 시작 찬송은 삼위 하나님의 모든 뛰어난 영광을 고백하는 찬양이어야 한다. 즉 삼위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찬송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우리 교회(진성)에서는 첫 찬송으로 영광송을 부른다.
첫 찬송은 구체적으로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을 노래해야 한다. 찬송은 하나님을 있는 그 모습대로 가치를 돌리기 때문에 ‘순전한(pure) 예배’라고 불릴 수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칭송하는 것은 그의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함과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 속에 나타난 그의 인격과 그 사역의 탁월함을 찬송 드려야 한다. 창조와 섭리, 선택과 구속의 부르심, 그의 사랑과 은혜 등등 우리의 찬양은 오직 주님만을 찬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을 칭송하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 때 찬송은 노래 가운데 울려 퍼지면서 하늘로 올라가 스랍들의 노래와 하나가 될 것이다.
2. 예배의 두 번째 부분 - (공적인) 죄의 고백
죄의 고백 부분을 다루기 전에 오늘날 교회 예배식 부분 가운데 하나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대부분의 장로교회 예배 순서의 두 번째 부분을 보면,
시편 교독
신앙고백
찬송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 시편을 교독하는 것일까? 원래 시편 교독은 시편 찬송을 부르는 순서였다. 그런데 장로교회 혹은 개혁교회가 침례교회 등의 영향을 받아서 예배 자 중심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시편 찬송은 점차 일반 찬송(복음성가)으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개혁교회를 제외하고는 시편 찬송을 부르는 교회가 거의 없다. 그런데 예배 학자들은 이 아름다운 시편 찬송이 교회 예배에서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고 어쨌든 그 형태라도 보존하고자 최후로 마련한 장치가 바로 시편 교독이다.
하나님의 예배에로의 부름에 응답한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confess)해야 한다. 언약 백성들의 인식되거나 고백되지 않는 죄는 언약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시킨다. 우리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 의로운 자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는 언제나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과 같이 온전하지 못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가장 깊은 존경심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야 한다(히 4:16). 결국 하나님의 예배에 부름을 받아 나온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예배에서 죄의 고백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천년 동안에는 죄의 고백이 예배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예배에 앞서서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1세기에 성직자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죄에 대한 고백문(Confiteor)이 예배에 추가 되었다. 그러나 예배드리는 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죄에 대한 고백을 개인적으로 했지 교회에서는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자는 매일 매일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야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있고 교회 공동체가 바르게 세워진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공적 예배에 신자들의 죄에 대한 고백과 죄 사함을 예배에 포함시킴으로 예배의 거룩성과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4) 십계명 선언(출 20:2-17; 신 5:6-21, 언약의 말씀을 확인함)
첫 찬송을 부른 후에 목사는 신약시대의 성도의 삶의 준칙(準則)인 십계명을 낭독함으로 선포한다. 언약 백성들은 모든 율법의 요약이며, 모체가 되는 십계명을 통해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우리의 신세가 얼마나 비참한가”(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주 3문)를 깨닫게 된다. 예배 시에 십계명을 낭독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에서이다. 첫째는 죄의 비참함만을 알게 하고 회개를 촉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둘째는 사죄의 확신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확인하고,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만을 섬기고 감사의 삶을 살 것을 신앙으로 고백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제임스 드 종(James A. De Jong)은 오늘날 개신교회에서 십계명이 낭독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독단적인 처사라고 안타까움과 함께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일부 개혁교회를 제외하고는 예배시에 십계명을 읽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가 매우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신조와 주기도문 그리고 십계명은 개신교 특별히 개혁교회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세 가지 요소였다. 그것들은 교회의 핵심이었다. 이 세 가지는 앞으로도 계속 예배에 포함시켜야 한다. 만일 두 가지는 사용하면서 십계명을 예배에 불필요한 것과 형식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제외한다면 그것은 독단적인 처사이다.”
십계명을 낭독하고 선언하는 것은 옛날의 문서를 읽은 것이 아니고 현재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언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계명을 들읍시다.” 하고,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라는 서론 없이 바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계명을 선언한 후에 주께서 마태복음 22:37-40에서 이 계명을 요약해 주신 말씀(민 6:5; 레 19:18)을 첨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약의 십계명과 요약한 것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반복일 따름이다. 또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있는 언약의 계명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다. 두 곳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출애굽기에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고, 신명기에는 그 목적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시에 십계명을 사용함에 있어서 성도들은 율법을 자기들의 헌신에 대한 진술로 함께 읽거나 암송하는 방법도 사용할 수 있고, 목회자가 읽고 성도들이 이에 응답하는 형식을 통해서라도 확증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십계명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김영재는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이요 명령이다. 그러므로 본래적인 의미와 형식을 따른다면 예배 인도자가 낭송을 하고 회중은 이스라엘 백성이 호렙산 아래에 정열하고 서서 귀를 기울이듯이 그냥 잠잠코 아멘 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회중이 말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교독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5) 죄의 공적인 고백
십계명을 낭독 후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는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이는 우리가 언약의 백성으로써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을 겸허히 회개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예식서에는 죄에 대한 참회의 기도문이 있었고, 다른 교회에도 이런 기도문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개혁교회의 한 부류인 장로교회들은 장로가 대표로 기도할 때 참회의 기도를 하지만 회중들이 참회의 기도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허순길은 ‘개혁교회의 언약적 예배’라는 기고문에서 한국 교회 가운데 2-3분 동안 참회의 기도를 하는 것은 좋게 생각한다면서 소리 내어 통성기도하게 하는 것은 혼란스럽고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권고(勸告)하고 있다.
(6) 사죄의 선포
하나님의 언약의 법, 즉 십계명에 비추어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할 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이제 목사는 교회에게 주신 권위로서, 사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한 자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것은 집례자의 책임이며 권위이다(마 16:19). 이렇게 함으로써 회중은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이제 회중은 죄의 고백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예배가 회해의 기초위에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는 이 순서를 가졌지만 1542년 제네바에 다시 돌아와서는 생략하였다.
(7) 감사의 찬양
회중이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찬송이 따르게 된다. 이 때 사용해야 할 찬송은 당연히 죄 사함 받은 감사와 순종의 생활을 원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3. 예배의 세 번째 부분 - 말씀의 봉사
공예배의 세 번째 부분은 말씀의 봉사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말씀으로의 회복이다. 당연히 개혁신학자들은 말씀봉독과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8) 성경봉독
초대교회는 예배 때마다 성경 그 자체를 읽었다(딤전 4:13). 초대교회의 이 전통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회당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에 놓이게 만든 것은 에스라(Ezra)때부터였다. 에스라가 제2차 포로 귀환 때 지도자로 예루살렘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의 영적 상태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옷을 찢고, 금식하며, 영적 갱신을 위해 기도하고,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하고 모세 율법을 읽었다. 그리고 또 레위 인들로 하여금 율법 책을 낭독하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뜻을 깨닫게 하였다(느 8:5-8). 그러므로 성경봉독 전통은 성전 예배에서부터 회당 예배로 직접 옮겨갔으며, 이것이 기독교 예배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성경봉독에 대한 교회 역사를 보면 전통적으로 설교의 본문과 상관이 없이 전통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일부분을 읽었다. 순교자 저스틴(A. D. 150) 이전에는 기독교 예배에서의 성경봉독 방법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2:42, 13:5; 골 4:16; 딤후 3:16)에서와 초기 교부들의 문헌(클레멘트 13:1, 14:2; 바나바의 서신 21:1, 6)을 볼 때 순교자 저스틴이 언급한 예배의 모습이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확립된 예배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세기에 이르면 말씀의 예배 가운데 율법서, 선지서, 서신서, 사도행전, 복음서의 성경봉독이 있었고, 성경봉독 사이마다 독창자들(cantors)이 부르는 시편송을 통해 회중들은 성경봉독에 대해 응답을 하였다. 성경봉독은 회중의 적극적인 참여 가운데서 행해졌다는 것이 특이할 만한 일이었다. 4세기 교회에서는 성경봉독에 대한 서언(preface)과 응답(response)으로 화답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였다. 이것은 성경봉독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회중들이 적극적으로 성경봉독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물론 이 같은 서언과 응답의 화답 형식에는 절대적으로 고정된 형식은 없었다. 여기에 한 예가 있다:
봉독자 : 선지자 이사야서에서 성경을 봉독하겠습니다.
성경봉독이 뒤따름.
봉독자 :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회 중 :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성경낭독에 있어 복음서는 맨 나중에 봉독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구속의 완성을 이루기 때문에 성경봉독들 중 맨 나중에 봉독되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복음서는 예수의 전기를 담고 있는 특별한 책이었기 때문에 복음서 봉독을 시작하기 전에 특별한 의식을 행하는 관례가 발전하였다. 복음서에 입을 맞추고, 복음서가 읽혀지는 장소까지 긴 행렬이 복음서 성경봉독자의 뒤를 따르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그 행렬에는 일반적으로 촛불을 든 복사(服事)와 향로를 든 향로 드는 자(thurifer)가 끼어 있었다. 성경봉독 자는 복음서를 봉독하기 직전에 그리스도께 대한 특별한 경의를 표하였다. 여기에 한 예가 있다:
봉독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회 중 : 오, 주여 당신께 영광이 있사옵나이다.
복음서 봉독
봉독자 : (복음서를 머리 위로 추켜들고) 우리 주님의 복음입니다.
회 중 : 오, 그리스도시여, 당신께 찬양을 돌리나이다.
이것은 분명 고대 교회와 개혁교회의 훌륭한 전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봉독 주위에 있는 의식을 버렸다. 그것은 말씀만을 강조하기 위해서 몸짓들과 움직임들을 없앴다. 설교는 그 속에서 성경봉독한 본문이 설명되고 적용되는 하나의 은총의 수단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칼빈은 교회력에 따라서 미리 정해 놓은 성구를 낭독하는 로마교회의 성구집을 쓰지 않고 연속낭독 방법(lectio continua)을 택했다. 오늘날 개혁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설교와 관련 있는 본문을 읽고 있다.
(9) 말씀의 축복을 위한 기원 찬송
성경을 봉독 한 후에 곧바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기 전에 말씀을 흠모하는 찬송을 하는 부분이 있다. 봉독된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고백에 대한 “아멘”이요,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기를 기도하는 찬양이다. 또 이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임을 고백한다. 그래서 봉독된 그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 되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렇게 행하신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이 때 찬양은 찬양대가 아닌 회중의 찬양이어야 한다. 이 찬송은 공적인 말씀 봉독을 들은 모든 회중이 하는 것이 원칙이다.
(10) 말씀의 봉사(설교)
개혁교회에 있어 설교는 예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칼빈은 말씀이 없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고 했다. 개혁교회 예배에서는 성경을 두 번 봉독하는데 설교에는 첫 번째 봉독된 본문이 설교의 본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두 번째 봉독된 본문 중에 설교의 핵심 본문을 포함시킨다. 이 설교의 본문은 전체 성경을 집결하는 한 중심적 단위가 된다. 청중은 이 본문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설교 전에 그 본문을 한 번 더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여기에서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정의 그리고 설교를 듣는 자의 태도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단 한 가지만 생각한다면 목사는 말씀의 봉사자요, 설교는 말씀의 봉사라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 보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령을 의지하고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어야 한다. 그래야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언약 백성에게 신앙을 일으키고 새 생명을 창조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설교자는 설교를 마친 후에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서 “아멘”해야 한다.
(11) 화답송(아멘송)
말씀을 들은 후에는 들은 말씀에 화답하는 찬양을 드린다. 즉 아멘으로 화답하는 찬송이다. 방금 들은 말씀(설교)에 대해 설교자가 “아멘”으로 설교의 끝을 맺으면 회중들은 준비된 화답송을 해야 한다. 회중들이 화답송을 한다는 것은 증거 된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고백하며 따르겠노라는 찬양이며, 주께서 요구하시는 언약의 계명에 순종하겠노라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을 표현한 찬양이다.
4. 성례의 집행 -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5. 교회와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12) 중보기도
개혁교회에서는 이 기도를 “기독교의 모든 필요를 위한 기도”(A Prayer for all the needs of Christendom)라고 부른다. 어떤 교회는 이를 목회적 기도라고 부르기도 하나 합당하지는 않다. 디모데전서 2:1-3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기도하라고 한 것은 세계를 포괄하는 광범한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만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이 공적인 포괄적 기도는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 기도할 항목을 잘 준비해야 한다. 기도를 세심하게 준비하고 기록하여 하는 것도 좋다. 이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회중의 입이 되어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는 책임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감사와 입술의 제물이다.
(13) 주의 기도
대표기도 후에 주의 기도를 하는 것은 주의 기도는 주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준 모든 기도의 모범이며, 간단명료한 주기도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기도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구한 기도가 주의 기도를 통하여 온전해지고 또 다 간구하지 못한 것들이 주의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기 때문이다.
6. 자비의 봉사
예배의 한 표현으로서 돈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상의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주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이 같은 헌금의 행위는 예배의 적절한 한 행위로서 기쁜 마음과 진지한 태도로 행해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헌금은 성찬식의 헌상 시간에 드려지기 시작했으며, 교인들이 가져 온 성찬용 떡과 포도주와 함께 성찬상을 바쳐졌다.
개혁교회에서는 예배시 헌금을 자비의 봉사라고 한다. 성경에 보면, 교회 안에 곤경에 처한 가난한 자의 필요를 채워주고, 또 교회가 다른 교회를 불쌍히 여기고 돌아보기 위해 헌금을 하였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과 곤경에 처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풀기에 “자비의 봉사”(the ministry of mercy)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일을 위하여 연보로 섬기는 것을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할 봉사의 직무라고 하였다(고후 9:12).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8주일 103문에 “제4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례에 참여하며, 주님을 공적으로 부르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독교적 자비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라고 한다. 이 사역은 교회의 집사들이 한다. 그래서 이 재정도 철저하게 집사들이 관리 집행한다. 구제헌금은 그 때 그 때 필요를 따라서 한다.
헌금을 수집하는 방법은 연보 주머니를 사용하기도 하고, 쟁반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배 전에 헌금함에 넣는 방법도 있다. 어떤 방법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하나의 원칙은 헌금은 예배의 한 순서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배 중에 헌금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교회의 헌금 생활의 예>
교회운영위원회가 목회자생계비, 건물 관리비, 각종 운영비 등 1년 예산을 세운다. 그 다음 교회 각 가정에 일정률 배당을 한다. 이 배당은 그 가정이 교회를 위해 1년 동안 드릴 기본적인 헌금이다. 배당은 먼저 각 가정은 1년 동안의 수입 총액을 교회운영위원회에 보고한다. 교회운영위원회는 교회 1년 예산 총액을 각 가정의 수입총액 대비 100분 율로 나눈다. 어떤 가정은 조금 높은 비율이 될 것이고 수입이 적은 가정은 배당률이 조금 낮게 될 것이다.
(14) 헌금을 위한 기도
개혁교회 안에서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헌금은 우리를 구속(救贖)해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 드리는 것이지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에서는 축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한다. 즉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적절한 인간편의 응답이다(고후 8:9). 그러므로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많은 헌신이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7. 마침(예배의 절정, 세상을 향해 나아감)
이 부분은 예배의 마지막 부분으로 예배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예배를 마치는 것만이 아니다. 주일에 교회가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언약 백성들이 언약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언약의 말씀을 받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새 힘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언약의 갱신이 일어난다. 바로 이 언약을 갱신하는 예배를 드린 언약 백성들은 곧바로 삶의 예배를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선포된 언약의 말씀이 활성화되고 강조되어 절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5) 마침 찬송(위탁의 찬송)
이 마지막 찬송은 우리 자신을 삼위 하나님께 위탁하는 찬송이다. 이제 성도들은 한 주간을 하나님의 통치아래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살아가게 된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명령들이 있어서 그것을 감당해며 나가야 한다. 그 때 성도들은 사탄과 세상과 죄의 세력에 의하여 어떤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마침 찬송은 그리스도의 원수를 정복하고 나아가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위탁하는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수를 멸망시키고 넉넉히 승리를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찬송을 부르며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찬송이다. 이 마침 찬송은 회중이 일어서서 하고 일어 선 그대로 축도를 받는다.
(16) 축도
예배 전체는 축복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축도(The Benediction)로 마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축도가 축복기도냐, 아니면 축복선언이냐 하는 것이다. 축도를 축복기도로 보는 사람들은 축도 끝을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축도는 축복의 선언 혹은 선포이다. 또 축도를 축복 선언으로 보는 사람들은 “있을지어다”라고 하면서 축도 전에 “기도 합시다” 하는데 그것은 의미상 맞지 않다. 그리고 교인들도 축도 시간에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데, 개혁주의 전통의 예배 첫 부분에서 말했듯이 눈을 뜨고 언약의 하나님을 대신해서 언약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목사의 축복 선언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은 복을 부어 주시면서 우리를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보내시면서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축복의 선언이기에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이 축도의 말 한마디에 열려 있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손을 들어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혁교회가 로마교회의 시각적인 우상숭배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몇 안 되는 시각적인 효과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회중은 하나님이 지금 내려주시는 축복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예배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축도의 뿌리는 언약 법, 즉 구약의 축복에 두고 있다.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족장들을 축복하시거나 모세가 족장들을 통해 백성들을 축복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들을 지킬 것을 약속하셨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아론의 축복은 아론의 소원이나 기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은혜와 자비와 평강을 주시겠다는 확고부동한 약속인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교회는 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고 결국은 그의 백성 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유대 회당 예배 의식에서 축도를 받아들였다. 초대교회는 때로는 아론의 축복(민 6:24-26)을 사용했고, 어떤 때는 신약 서신서 있는 아론의 축복과 유사한 축도를 사용하기도 했다(고후 13:13; 엡 6:23-24; 히 13:20-21; 계 1:4b-5). 개혁교회도 초대교회의 전통을 받아서 민수기의 아론의 축복과 서신서의 축복들 모두를 사용하였다.
구약의 축도와 신약의 축도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약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도를 한다는 것이고, 구약이나 신약에서나 축복은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종들의 매개를 통해서 축복이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축도는 항상 기독교 예배의 일부분이었다.
축도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보면 축도, 즉 축복의 선언은 성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포된 축복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거나 마술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약속의 말씀이다. 예배드리는 자들이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보내 주실 것이다. 또 하나는 축복은 예배에 있어서 사죄의 확신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는 진술한 것을 성취하는 창조적인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된 삶을 묘사하는 구속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죄책감 없이 살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산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소망과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목사는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도 아니고, 목사가 축복을 줄 수 있는 자격도 위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축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해야 한다. 불경건한 인간의 소원을 첨부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17) 광고 문제
광고를 언제 하느냐 하는 문제는 교회들마다 다양하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인 예배에서는 광고를 예배 중에 하고, 어떤 교회는 예배를 마친 후에 한다. 예배 중에 광고를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몸인 교회의 행진과 관련된 일이며, 성도의 교통을 위해 행하는 일이기에, 즉 교회의 일이기에 예배가 교회의 행진 가운데 최우선적으로 행하는 행위이기에 예배 중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광고를 예배의 요소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배는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 백성들 사이의 교제로 짜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고는 예배 전에 하거나 예배 후에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Ⅴ. 개혁교회 예배의 실제와 대안 / 우리 교회의 예배식 순서와 그 의미
나는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는 ‘개혁주의 예배의 전통은 있는가?’라고 묻고 싶다. 이미 앞에서 보아왔듯이 개혁주의자들은 초대교회의 2부 예배, 즉 말씀의 예배와 주의 만찬의 예배를 회복함에 있어서 혼신의 노력을 하여 나왔다. 중세의 영적인 암흑기 속에서, 예배 의식서라고는 그리 많지 않은 때에 성경과 씨름하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배를 따라서 예배 의식서를 만들고, 교회로 하여금 지키도록 한 그 예배식을 우리의 예배 속에는 가지고 있는가?
종교개혁자들의 예배식에는 비록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하나의 순서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성경적, 신학적 의미가 다 있었다. 칼빈과 1535년 스트라스부르크 예배식에서 밝힌대로 예배식은 그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은 변함이 있을 수 있어도 본질만큼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로 모여서 매 주일 드리는 교회의 예배식에 그런 성서적,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 매 주일 드리는 예배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순서 하나하나를 행하여서 언약의 하나님, 즉 야웨 하나님의 크고 엄위로우시며 영광스러운 성품을 반향(反響)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또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영적 전쟁으로 지치고 힘들고 위로와 능력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 교회를 향하여 얼굴을 돌려서 자비로우심을 보이고 계시며, 은혜를 베푸심을 경험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나는 우리 주변의 교회들은 어떤 틀 속에서 예배식을 조직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지난 봄 정기 노회 때 반송 우표와 함께 설문지를 나누어 주고 기다렸지만 두 교회를 제외하고는 반송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부분은 생략하기로 하고, 우리 교회(진성)의 예배식을 중심으로 말해보려고 한다.
먼저 우리 교회 주일 오전 예배식 순서는 이렇다:
1. 진성 교회의 예배식 순서
(목사가 입장하여 단위에 서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시 211:2)라고 한다.
(회중의 응답)
그러면 회중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라고 화답한다.
(하나님의 인사)
목사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한다.
그러면 회중은
“아멘”이라고 화답한다.
그리고 다음 예배식으로 진행한다.
영광송
언약의 열 가지 말씀 - 십계명
성삼위송
목양기도(대표기도)
성경낭독
경배송
설교본문낭독
말씀강론
헌상송
헌상기도
헌상송
송영
축도 - 아론의 축복
후주
교회소식
2. 진성 교회의 예배식 순서 조직에 대한 의미
이제 우리 교회가 매 주일 드리는 예배식 순서를 위의 내용과 같이 조직하게 된 의미에 대해서 말하겠다. 물론 우리 교회의 예배식 순서는 독립개신교회(I. R. C)의 영향이 크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예배 순서 하나하나에도 교회의 신학(神學)이 다 들어 있어야 하고, 신학이 없는 예배 순서는 의미가 없다. 우리 교회의 예배 식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주악에서 경배송까지로서 구원받은 언약의 백성들이 언약의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그렇게 살기를 고백하는 순서이고, 후반부는 성경낭독에서 축도까지로서 언약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말씀을 베풀어주시고,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에 대한 주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헌상을 드림으로서 응답하는 순서이다. 이제 몇 가지만 간략하게 생각해 보겠다.
(1) 예배에의 부름(Votum)
예배는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의 교제이다. 그러나 이 예배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예배 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의 교제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예배는 내가 예배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셨고, 축복의 교제에 초청하여 주셨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배의 시작에 대해서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은 예배는 반드시 시작 성구낭독(Votum)과 인사(Salutation)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Votum이란 말은 “소원”(Longging, desire)으로서 라틴어로 “헌신”을 의미하는 voveo에서 유래했다. votum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적인 의존을 표현한다. 목사가 강단에 서자마자 회중을 대신해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라고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호소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예배에로의 부름으로써 예배를 시작한다는 것이 예배 시작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이다.
(2) 인사(Salutation), 평화/ 축복의 인사
인사(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예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고백적 초청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 편의 응답이며 축복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하기 위해 모인 회중에게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한 방편으로 손을 들고 여호와 편에서 그의 입이 되어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전 1:13) 혹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5)고 축복을 선언한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축복이다. 언약의 백성이 언약의 하나님을 만나러 왔기에 목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 예배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은혜와 평강을 확신하게 된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사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평강을 전한다. 회중들의 인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인사는 개혁주의 예배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이다.
(3) 주악
주악은 회중들이 그 주악을 듣고 마음이 다른 데로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모으기를 바라는 시간이다. 반주자의 피아노 반주와 함께 주악이 흐르게 되는데 이 시간은 왕이신 우리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다. 산만했던 우리 마음을 다 모아서 하나님께만 향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음악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정서를 그런 식으로 자꾸 모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 때 사용되는 곡은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져서 하나님께 예배를 올려야겠다는 마음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 전주에 사용하는 음악은 길은데 그것은 예배를 위해서 집중하는 전주로서 쓰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 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4) 영광송
예배는 무엇보다도 언약의 백성이 언약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직접 절하고,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찬송하여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을 일으키는 영광송을 부른다.
(5) 언약의 열 가지 말씀(출 20:2-17; 신 5:6-21)
영광송을 부른 후에 목사는 신약시대의 성도의 삶의 준칙(準則)인 십계명을 낭독함으로 선포한다. 언약 백성들은 모든 율법의 요약이며, 모체가 되는 십계명을 통해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우리의 신세가 얼마나 비참한가”(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주 3문)를 깨닫게 된다. 예배 시에 십계명을 낭독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에서이다. 첫째는 죄의 비참함만을 알게 하고 회개를 촉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둘째는 사죄의 확신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확인하고,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만을 섬기고 감사의 삶을 살 것을 신앙으로 고백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6) 성 삼위송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한 다음에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들과 존재하심을 놓고 찬송을 올리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가장 종합적이고 중요한 속성은 바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이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삼위(三位)로 계신다고 하는 올바른 신관(神觀)을 표시하고 선언하면서 삼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세를 가지게 하는 성 삼위송을 부른다.
(7) 목양기도(대표기도)
그런 의식을 갖은 후 한 사람이 그 가족의 대표로써 하나님께 이 예배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한다. 이 때 죄의 고백과 여러 가지의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8) 경배송
경배송을 하는 이유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각각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슬하에 있는 자식이기 때문에 한 형제임을 선언하고 공동으로 하나님을 경배 드린다는 생각에서 경배송을 부른다.
(9) 성경낭독
목사가 하나님의 입이 되어서 성경을 낭독함으로써 회중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초대교회는 예배 때마다 성경 그 자체를 읽었다(딤전 4:13). 회당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에 놓이게 만든 것은 에스라(Ezra)때부터였다(느 8:5-8). 그러므로 성경봉독 전통은 성전 예배에서부터 회당 예배로 직접 옮겨갔으며, 이것이 기독교 예배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성경봉독에 대한 교회 역사를 보면 전통적으로 설교의 본문과 상관이 없이 전통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일부분을 읽었다. 3세기는 말씀의 예배 가운데 율법서, 선지서, 서신서, 사도행전, 복음서의 성경봉독이 있었고, 성경봉독 사이마다 독창자들(cantors)이 부르는 시편송을 통해 회중들은 성경봉독에 대해 응답을 하였다.
(10) 설교본문낭독
오늘 말씀 강론에 대한 본문을 목사가 하나님의 입이 되어서 성경을 낭독함으로써 회중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11) 말씀강론
목사가 낭독된 하나님의 말씀을 강설하고 회중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말씀을 듣는다.
(12) 헌상
헌상은 예배의 한 표현으로서 방금 들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에 대한 주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표로서 행하며,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이 같은 헌금의 행위는 예배의 적절한 한 행위로서 기쁜 마음과 진지한 태도로 행해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복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겠다는 신앙의 고백으로 드려져야 한다. 특별이 주일에 이 사실을 교회적으로 행함으로써 삶의 용기를 얻고, 주의 복음의 증진에 대해서 생각하고, 연약한 지체들을 돌보는 정신을 갖게 된다. 결국 헌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드림을 표시한다.
(13) 송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하나님과 거룩한 교통을 하며 하나님의 어전(御前)에서 물러감을 고(告)하는 송영을 부른다. 송영은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내가 물러갑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왔다가 이제 그 왕이신 하나님 어전에서 물러갑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어떤 일을 만날는지 모르지만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하게 할 것을 믿고, 또 주님께 의탁하는 의미’로 찬송을 하는 것이다.
(14) 축도
목사의 축도(The Benediction)가 있다. 특히 축도는 축복기도가 아니라 축복의 선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온 회중에게 항상 있을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서 언약의 하나님을 대신해서 언약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목사의 축복 선언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삼위 하나님은 복을 부어 주시면서 우리를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보내시면서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축복의 선언이기에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이 축도의 말 한마디에 열려 있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손을 들어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혁교회가 로마교회의 시각적인 우상숭배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몇 안 되는 시각적인 효과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회중은 하나님이 지금 내려주시는 축복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축도의 뿌리는 언약 법, 즉 구약의 축복에 두고 있다.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족장들을 축복하시거나 모세가 족장들을 통해 백성들을 축복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들을 지킬 것을 약속하셨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아론의 축복은 아론의 소원이나 기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은혜와 자비와 평강을 주시겠다는 확고부동한 약속인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교회는 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고 결국은 그의 백성 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유대 회당 예배 의식에서 축도를 받아들였다. 초대교회는 때로는 아론의 축복(민 6:24-26)을 사용했고, 어떤 때는 신약 서신서 있는 아론의 축복과 유사한 축도를 사용하기도 했다(고후 13:13; 엡 6:23, 24; 히 13:20, 21; 계 1:4b-5). 개혁교회도 초대교회의 전통을 받아서 민수기의 아론의 축복과 서신서의 축복들 모두를 사용하였다.
(15) 교회 소식
교회의 예배 의식이 다 마치게 되면 교회의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교회 소식은 예배 식 안에 들어 갈 수도 있고 밖에 나올 수도 있다.
3. 예배식 순서 전체에 대한 진성 교회의 소고(小考)
우리가 주일 아침에 모여서 예배식에 따라 예배를 드릴 때 예배식에 있어서 중요함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언약의 하나님이신 엄위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식 하나하나 모든 순서가 다 중요하다.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주일에 교회당에 오는 이유가 설교를 들으러 온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날 설교자의 설교가 마음에 와 닿으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생각하고, 반면에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예배를 잘못 드린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자가
주일에 교회당에 나오는 것은 예배드리는 일에 앞서 성도의 교통(교제)을 위함이다.
성도의 교통(交通)은 교회의 본질(本質)이기 때문에 예배보다 앞선다. 지체들이 다 같이 모여서 교통을 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우선순위로 생각하고 행하여야 하느냐 할 때 구속주(救贖主)요 언약(言約)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예배는 성도의 본질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예배가 성도의 본질적인 행위라면 예배는 내 기분에 상관없이 드려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종교 개혁자들에게 이르기까지 보아 알 수 있듯이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치는 매우 크다. 예배 의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교독하고, 낭독하고, 설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예배의 위치에 있어서 말씀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 의식에서 말씀과 직접적으로 관련 된 것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배 의식을 거행할 때 처음에 사회자가 성경을 낭송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게 하기 위하여서 목사는 특별히 시편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부분을 택해서 낭송을 하는 것이다. 또 예배 의식 가운데 성시를 서로 교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설교에 앞서 성경을 낭독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통하여 직접 말씀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예배가 예배의 시작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를 요청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드려진다는 의식을 가지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전하는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의 필요에 따라 그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설교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이 설교는 아무개가 꼭 들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아무개에게 하는 얘기다’ 하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 전체의 생명의 양식으로, 일용할 양식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워서 그 목사를 매개체(수단)로 해서 교회에게 일용할 양식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목사도 그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에게 주신 그 말씀을 다시 받아서 자기의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 영(靈)이 자라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구분을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보통 성경을 가르치는 것하고 예배 시에 하는 설교 하고는 차이가 있다. 보통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혹은 내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식답게 분별력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위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지만 예배에서의 설교는 선포적인 성격이다. 이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은 들으라!”(쉐마)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선포하고, 회중들은 그 말씀을 지금 교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 “아멘”하고 응답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예배 시 설교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목사를 말씀의 도구로 쓰셔서 지금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위에 필요한 말씀을 대신 전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늘 그런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잘 살펴서 교회의 양 무리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순서 있게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설교 시간에는 사사로운 이야기나 목사 개인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예배 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회중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이 말씀이 필요해서 지금 우리 교회에게 주신다는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야 한다. 말씀을 먼저 개인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그런 신자들이 많은 교회가 신령한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듣는 일은, 교회가 신실하게 되고 그리스도적인 사람으로 장성하여 가는 일과 그리스도적인 성품을 발휘하며 교회의 대적을 향하여 신령한 전투를 하여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신자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자라간다.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깨달아 가면 갈수록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령하게 자라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들어가면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그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그의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드러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말씀은 교회가 신실하고 거룩하게 자라가는 생명의 양식이요 영적 전쟁, 즉 신령한 전투를 하는데 있어서 무기가 되기 때문에 교회는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잘 받고, 또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잘 받아서 신령한 분별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서 교회의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만일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소홀하게 다루어지면 개인이나 교회는 그만큼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고, 교회가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엘리가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있을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각 고을에 보내셔서 살게 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민족적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레위 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말씀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셨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가 되어 이스라엘은 점점 깊은 영적 어둠으로 빠져 들어갔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소홀하게 다루어지면 개인이나 교회는 그만큼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교회가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에 교회가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두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하나의 종교적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예배 시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우리 개개인들이 자라가지만 예배 시에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은 단순하게 어느 개인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다. 교회의 성숙을 위해서 내려주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의 성숙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배 시에 말씀을 선포하시는 이유는, 교회가 진리의 터 위에 서 가기를 원하고 또 세상을 향하여서는 그러한 진리를 뚜렷하게 보이고 서 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 15-16에서 교회를 말할 때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였다. 로마 제국은 정복하는 곳마다 자신들의 정복의 사실을 큰 기둥 같은 것에다 기록함으로 그 전적의 사실들이 기록 보존되어서 후대에 전달되고 기념되기를 바랐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한 것은 전적의 역사적 사실이 기록 보존되어 후대에 전달되듯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수호(守護)되고 계승(繼承)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교회는 ‘진리가 이것이다!’ 하고 선언하고 드러내고 모두 다 보게 하는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존재 자체로써, 교회를 이루는 자기 모습으로 진리를 드러내어야 한다. 교회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하며 그러한 모습을 삶의 열매로 내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방법과 기관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교회를 세상 위에 높이 세우셔서 그 일을 하게 하셨다. 이런 일을 위해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듣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듣지 않고서는 그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예배 시에 말씀 선포는 그 교회의 존립과 거룩하고 신령한 전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말씀을 전달하는 책임을 전담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자기 주관대로 선포하여 부실한 결과를 가져오거나 그 교회의 회중들이 말씀을 깨닫는 일에 부진하게 되면 그 교회는 그만큼 부실한 교회가 될 것이며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그 교회는 그만큼 영적으로 빈곤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머지않아서 하나의 종교적 집단으로 남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두신 의의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서 교회가 스스로 교회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진리에서 떠나면 사단의 회(會)가 될 수 있다”고 경고 하였다(25장 5항). 만일 교회가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선양(宣揚)하는 일에 주력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가 여러모로 규모가 커질지라도 교회의 본질의 사명에서 떠난 것이 된다. “이 보편적 교회는 때로는 더 많이 유형 교회로 나타나는가 하면 때로는 더 적게 나타난다. 그 보편적 교회에 속하는 개(個) 교회들은 그들 안에서 복음의 교리가 순수하게 가르쳐지고 신봉되며 성례들이 순수하게 집행되고 공예배가 순수하게 행해질 때에는 더욱 순수한 유형 교회들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덜 순수하게 된다. 지상에선 아무리 순수한 교회들일지라도 혼잡과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극도로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모임들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에게 예배하는 교회가 언제나 있을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 4항-5항)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 자체 안에 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을 배우고, 말씀 안에서 성도의 교제나 생활을 경험함으로 그 진리가 구체적인 자기 경험 가운데 증험(證驗)이 되고 실증(實證)되어서 그 교회의 생생한 사실로 존재하여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자기 속에서 그 말씀이 증험되어질 때 거기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어떤 관념(觀念)으로 이해하게 되면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성격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예배 시에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회중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그만큼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4. 찬송에 대한 우리(진성) 교회의 입장
사실 나는 매 주일 우리 교회의 예배를 위하여 찬송을 선택할 때마다 고민이 많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21C 찬송가에는 지난번 통일 찬송가보다는 예배 찬송의 형식은 갖춰져 있지만, 그 수에 있어서 풍성하지 못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신학적으로 문제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전에는 주일 오후 예배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시편 찬송을 사용하였고, 지금은 칼빈의 제네바 시편 찬송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성약출판사의 찬송도 공부를 하여서 찬송을 부르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될 때 겸하여 사용할 것이다.
문제는 세 가지 찬송가를 사용함에 있어서 번거로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21C 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 것은 본 교단(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과 한국교회에 대한 지체 의식 때문이다. 본 교단과 노회의 연합 활동을 해야 할 때가 있을 때 타 교인들이 느끼는 시선과 본 교회 교인들이 느끼는 소외감(?) 때문이다.
세계 교회(교단)들이 각자의 찬송을 사용하고 있고, 또 찬송은 각 교단의 신학과 신앙 곧 교리에 맞아야 사용할 수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여건이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찬송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더 훌륭한 찬송이 지어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자비로우신 주께서 우리 교회(교단)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 교단의 신학과 신앙에 맞는 찬송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 교회가 하나(통일)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통일찬송가와 그의 후속작인 21C 찬송가가 나왔지만, 찬송가 하나 통일시킨다고 해서 한국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참으로 유치할 수밖에 없다. 사상(정신)이 변하지 않는데, 과연 찬송가 하나 통일을 이루었다고 한국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박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유치한 일이다. 역사(歷史)와 신학(神學)을 내려놓는 몰염치한 일이다. 세계 교회를 보고, 한국 교회사를 보면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찬송을 통일하여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 교단을 비롯해서 각 교단은 각 교단에 맞는 찬송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찬송에 대한 우리 교회의 입장은 우리 교회(교단)적으로 시편 찬송이 특히 제네바 시편 찬송이 출판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던 차에 제네바 시편 찬송이 우리 합동 교단과 한국개혁교회(Reformed Churchse in Korea, RCK)에서 출판되었다. 이 둘은 같은 제네바 시편 찬송이라고 하지만 차이가 있다. 우리 교단에서 펴낸 시편 찬송(2009.7)은 4성부(四聲部) 화성으로 되어 있으며, RCK의 한국제네바 시편 찬송(2005, 2009.4 개정)은 단성부(單聲部)으로 되어 있고 시편 번역에 있어서도 언약신학에 더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제네바 시편 찬송이지만 RCK에서 번역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 바라기는 부디 주의 자비로우심을 따라서 더욱더 훌륭한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훌륭한 찬송이 더 많이 만들어서 교회 앞에 내 놓아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언제든지 그런 찬송을 받아서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Ⅵ. 결 론 / 개혁교회가 나아갈 예배의 방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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