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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기입된 해석학적 상상력 - 사랑과 모반의 변증법
1. 史實과 허구의 접점
역사란 언제나 그렇듯이 완전한 기록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관성에 의해 새롭게 해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재현동할 있는 의미의 집적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란 객관화가 불가능한 가능적 질료이자 늘 새롭게 다시 씌어질 수 있는 그 무엇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역으로 역사가 고정된 실체처럼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물론 역사가 이미 일어난 사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수 없다. 헌데 문제는 그 사실 자체가 하나의 객관적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중층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여 史實은 事實확정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는 관점에서 따라서, 혹은 역사를 서술하는 계층에 따라 역사는 늘 새롭게 해석되고 씌어진다. 에밀 앙게른이 『역사철학』이라는 저서에 말한 것처럼, 역사는 주관적 필요에 따라 늘 재구될 뿐만 아니라, 가다머적인 해석학적 지평융합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욕동시키게 된다.
소설가 김다은의 『모반의 연애편지』는 역사성과 허구성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하나의 팩션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소설이 씌어지게 되는 동기를 살펴보면 역사 해석학적인 경향이 짙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롯하듯이, 김다은의 『모반의 연애편지』도 우연히 전달된 한편의 논문이 서사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된다. 정전과 고전에 대한 해석학적 상상력 혹은 기표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 말하자면 김다은의 그것은 사료에 기반한 역사해석학적 지평 위에 욕동하는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거나 소설가 특유의 역사읽기에 다름 아니다. 물론 서사의 흥미진진한 전개를 위해 일부 가공의 허구적인 인물들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은 소설의 서사적 위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허구를 이접시켜 역사해석학적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헌데 이 소설이 재미있는 점은 역사와 허구 사이를 매개시키는 중요한 질료가 『월인석보』라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서 서사의 욕동은 이미 일어난 사건성 위에서 파동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알 수 없는 “摠一 百八張”이라는 문자의 의미적 해석에 집중된다. 마치 라캉이 에드가 앨런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를 통해서 기표와 기의 관계를 정립시켰던 그 방식과 유사하게 소설가 김다은의 그것도 하나의 미지의 기표로 유랑하는 “摠一 百八張”이라는 기표 속으로 모든 서사를 구겨넣는다. 마치 미셸 세르가 『헤르메스』에서 말한 ‘주름’이라는 광대한 공간에 삶-시간-세계의 의미적 구조가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세조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건성은 문자 내부에 응결되어 있다. 하여 문자의 의미 추적은 사건 전모의 추적이자, 의미의 실체이다. 더 나아가 “摠一 百八張”이라는 문자의 내접면이 의미의 현사실성의 존재론적 국면이라면, 그것의 외접면은 역사를 굽이치는 서사적 사건성이다. 하여 서사의 주체는 인물 속에 기입된 사건이 아니라, 의미가 차연 유예된 문자 그 자체이다.
물론 라캉이 포우의 소설을 통해서 의미를 사상시킨 기표의 차연운동으로 의미의 존재방식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따라서 현상하는 삶-시간-세계 그 자체가 기표의 운동처럼 느껴지게 만들기도 했지만, 김다은의 그것은 라캉의 그것을 조금 비틀어 서사를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모반의 연애편지』는 문자의 기표-기의운동을 최대한 차연시켜 가면서 그 모든 서사적 결말을 역사 해석학적 층위로 휘어지게 만든다. 하여 “摠一 百八張”이라는 문자는 사실이면서 허구이다. 문자는 의미 확정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거나 유랑하는 기표다. 하여 문자는 요청된 의미의 욕동이거나 애매모호하게 존재하는 史實을 하나의 명확한 事實로 이끄는 서사의 진정한 실체이다. 말하자면 “摠一 百八張”이라는 미지의 문자는 史實의 명확한 정체, 事實확정을 요구하는 보이지 않는 실체이거나 사실을 견인하는 내적 주체이다. 따라서 『모반의 연애편지』는 진리 해명이 아니라 진실의 해명으로 휘어진 문자의 절대운동이다.
헌데 이 소설에 재미를 배가시키는 결정적인 또 하나의 특징은 『조선왕조실록』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사료들을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촘촘하게 연결시켜 서사 전체를 완결시켜 간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모반의 연애편지』는 그냥 역사 속에 묻혀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주변적 인물, 즉 “소용 박씨”나 “귀성군”이라는 실제 인물을 서사의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역사 해석학적 관점과 허구적 상상력을 이접시키고 있다. 새로운 역사의 욕동 혹은 역사해석학의 개현. 사실과 허구의 접점 사이에 문자가 있고, 새로운 역사 해석이 있다. 소설가 특유의 역사적 비전과 한편의 논문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김다은은 문자의 문자성이 열린 체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예증하고 있다.
2. 소설 형식 - 권력의 존재방식 혹은 해석학적 상상력
『모반의 연애편지』는 서사의 구성형식이 특이하다. 애드가 알랜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처럼, 소용 박씨가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백팔 글자”, 즉 “내 마지막 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다. 사형수이지만, 나는 이제부터 사형집행인이나 다름없다.”는 말의 진위탐구로 휘어져 있다. 물론 작가가 「머리말」에서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우연히 전달된 한편의 논문에서 비롯한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사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사이에 기입된 총 84통의 편지 속에 내파되어 있다. 말하자면 서간체 형식으로 씌어진 소설은 권력에 매개된 산종적 의식이거나 “백팔 글자”의 추리과정이다. 하여 서사는 이중으로 휘어진 역동적인 운동인데, 하나는 소설의 바깥, 즉 훈민정음 창제의 또 다른 목적에 대한 반론의 형식을 취하고, 다른 하나는 소설 내부, 즉 문자의 역동성이 가진 해석학적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헌데 이 소설이 특이한 또 다른 측면은 본론에 해당하는 총 4부의 서사적 전개, 즉 “摠一 百八張”라는 문자의 의미추적이 직접성으로 현동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드러나거나 차연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에 나타난 편지의 존재론적 양태처럼, “摠一 百八張”도 불연속적으로 연결된 편지와 편지 사이를 매개시키는 중심적 고리이거나 서사의 실체 파악을 무한히 유예시키는 기표적 실체이다. 따라서 『모반의 연애편지』는 문자에 기입된 권력의 의미와 사랑의 존재론적 양태를 해석학적 상상력의 층위로 끌어올려 역사의 의미를 기표 밑에 가라앉히고 있다. 마치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가 『Wahrheit und Methode』에서 문자와 역사의 운명을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악무한적 사유로 결론지었던 것처럼, 소설가 김다은도 역사란 문자의 문자성을 탐구하는 해석학이라는 측면을 십분 고려하면서, 역사 해석이란 문자의 열린 체계 위에서 형상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권력에의 의지 혹은 생존에의 열망. 서사는 이 두 층위를 치밀하게 산종시키거나 이접시키면서 서사적 진실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편지와 편지 사이에서 유랑하는 문자의 문자성에 대한 탐구과정이거나 문자 속에 가라앉은 권력의 본질이다. 역으로 권력과 생존의 위치는 문자가 존재하는 위치이거나 문자의 존재론적 정체에 달려있다. 하여 “摠一 百八張”이라는 문자 그 자체가 권력이고 생존이다. 엄밀히 말해서 『모반의 연애편지』는 저 “모반”이라는 권력에의 도전과 “연애”라는 사랑 사이를 유랑하는 편지다. 물론 그 모든 서사적 사건들이 착각과 오해에서 비롯하기는 하지만, 역으로 그 오해와 착각 속에 권력이 있고, 사랑이 있다. 하여 『모반의 연애편지』는 패러독스이다. 마치 인간학적 운명이 저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에 의해 좌우되듯이, 한통의 잘못 전달된 편지는 그 자체로 “모반”이고 “사랑”이다.
헌데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모반의 연애편지”가 애드가 알랜 포우의 『도둑 맞은 편지』처럼, 미지의 장소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총일 백팔장”, 즉 수양대군과 백팔장이 작성한 밀약서를 찾는 것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 찾는 행위의 서사적 본질은 왕권에 대한 도전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하여 『모반의 연애편지』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총 84통의 편지들은 권력의 하수인이거나 모반과 사랑의 확인 과정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서사적 사건성 바깥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세조 수양대군이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편지의 이동은 권력과 사랑의 위치에로의 이동이거나 무소불이의 권력을 휘두르는 하나의 정점으로의 수렴운동이다.
따라서 편지는 “모반”과 “사랑” 사이에 위치하는 역동적인 운동이다. 그것은 어디로든 휘어질 수 있는 유동하는 기표이거나 의미 확정이 불가능한 역사성이다. 편지의 편지는 부재하나 공개된 권력의 구조이다. 편지의 편지는 『월인석보』 속에 삽입된 의미를 모를 문자, 즉 “총일 백팔장”, 즉 두 조각난 밀약서이다. 헌데 이 두 조각난 밀약서 사이에서 사랑이 욕동하기도 하고, 모반의 촉발되기도 한다.
허나 잘못 전달된 한통의 편지. 물론 이 편지는 임영대군과 귀성군을 얽어매기 위한 세조의 술책인 동시에 정희왕후의 계락임에 틀림없지만, 주소지가 불명확한 편지는 사랑의 죽음을 불러일으킨다. 하여 잘못 전달된 한통의 편지는 죽음이다. 비록 그것이 의도되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했지만, 사랑은 조각난 편지 속에 기입된 “백팔장”이라는 이름의 기호이다. 소용 박씨에게 “사랑의 백팔장”은 귀성군이고 연인이다.
잘못 전달된 한통의 편지가 삶-시간-세계라는 거대한 서사를 형성하게 된다. 하여 주체는 수양도 아니고, 소용 박씨도 아니고, 그렇다고 귀성군은 더더욱 아니다. 주체는 두 개의 “덕중” 사이에서 빚어진 착각이거나 잘못 전달된 편지, 즉 귀성군의 착각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편지. 서사는 문자의 의미를 찾아가는 편지 속에 외삽되어 있거나 편지의 차연운동이다. 물론 서사가 전개되는 궁극적 주체가 권력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하여 그 모든 일들이 세조의 왕권강화를 위한 교묘한 술책임이 판명되었지만, 서사의 사건성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하게 된다. 잘못 전달된 한통의 편지가 사랑을 부르고, 귀성군을 연모하여 연서를 쓰게 만들지만, 내용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연서는 공포의 권력, 즉 죽음의 욕동이다.
하여 귀성군에게 보낸 연서는 세조가 위치한 권력의 현주소이거나 한명회, 신숙주, 정창손 등이 처한 공포의 지대이다. 왜냐하면 세조는 연서사건을 통해서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몽유도원도를 찾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전에 공모한 <백팔장 모임>의 충성도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영 박씨의 연서사건으로 인해 파생된 “백팔 글자”나 “총일 백일장”은 권력의 은밀한 기호이거나 작가가 새롭게 해석한 역사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모반의 연애편지』는 『월인석보』에 제 1권에 언표된 “총일 백팔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적 지평이거나 훈민정음 창제의 순수한 목적을 되돌려주는 작가의 순정한 의식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소설을 촉발시키는 한권의 논문은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의 불교적 신앙심을 기반으로 하여 훈민정음 108자를 불교의 신성수인 108과 관련하여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외적인 역사 해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모반의 연애편지』는 우연히 전달된 한권의 논문과의 팽팽한 대결이거나 보는 관점에 따라 역사가 달리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물론 사실과 허구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소설가 김다은은 다양한 증빙자료를 문면에 안치시키면서 새로운 해석학적 지평을 현시하고 있다. 하여 다양한 증빙자료와 서사는 상호보완관계를 이룩하면서 추리소설 형식으로 씌어진 서사구조를 치밀하게 완성해간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수많은 의미의 항들이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혹은 역사란 그 자체로 수많은 해석적 상황으로 열려져 있는 체계로 인식될 수 있는 것처럼, 작가 김다은의 역사에 대한 시선은 “모반”과 사랑 사이를 다양하게 굽이치면서, 인간에게 허여된 삶-시간-세계를 내면화된 심리적 사태로 이접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모반의 연애편지』는 역사적 사건의 사랑으로의 치환이거나 역으로 지극히 개별적 사랑학을 역사로 고양시키는 이중의 운동에 다름 아니다.
3. 사랑이냐 모반이냐
『모반의 연애편지』는 권력과 사랑의 이중주로 탄주되는 슬픈 운명의 패러독스이다. 유유히 굽이치는 권력이라는 도도한 흐름 앞에서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사랑의 희생양이거나 슬픔의 사도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역사를 떠받치는 의미의 사태들은 그 자체로 사랑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하여 소설을 지탱하는 중심축은 사랑이다. 설령 그것이 잘못 욕동된 사랑일지라도, 혹은 소용 박씨와 귀성군 사이의 비껴간 욕망의 지대에서 사랑의 싹이 움트기는 했지만, 사랑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걸면서 까지도 지켜내고 싶은 인간학의 숭고한 지대이다. 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빗나간 사랑의 지대가 모반으로 비추어질 수 있지만,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랑은 즉물성을 띤 현실적 실체이다.
사랑의 바깥에 정희왕후의 교활한 술책이 자리하기는 했지만, 혹은 그 사랑의 족쇄로 인해 생명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만, 사랑은 그 자체로 존재의 이유이다. 물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그 모든 지대가 음모와 의심과 시기로 짜여져 있지만, 하여 편지에서 편지로 연결된 그 모든 서사가 권력적 모반을 중심으로 실타래가 연결이 된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모반의 연애편지』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소용 박씨의 죽음에 관한 재해석이다. 사랑의 저편 혹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죽음. 모반과 권력적 욕망 사이에 사랑이 있고, 죽음 또한 있다.
궐에 들어와 후궁이 된 후, 나는 군이 보내준 두 쪽짜리 연서를 하나로 이어 벽에 붙이고, 종이를 덧발라 숨겨두었다. 눈치 빠른 왕이 혹여 눈치를 챌까봐, 낮의 새와 밤의 쥐가 이를 속삭일까봐, 한 여인의 비밀처럼 그 연서를 혼자 간직한 채 살았다. 그 내용이 무엇이건, 아니 그 연서는 세종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듯, 군이 나를 사랑하는 뜻을 담은 듯했다. 「에필로그」중
문제는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아니 위의 인용 구절은 소설가 김다은이 『모반의 연애편지』를 쓴 이유이자, 『월인석보』의 “총일 백일장”에 대한 결론을 함의하고 있다. 삶-시간-세계가 비록 욕망의 형식으로 귀결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하여 수많은 갈등과 시기와 오해가 이 세계 속을 혼탁하게 만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랑은 그 자체로 이 세계의 심급이다. 물론 소용 박씨가 펼쳐낸 사랑이라는 이름의 형식이 조르주 바따이유가 『에로티즘』에서 말한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의 형식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사랑은 죽음을 넘어선 그 무엇이다. 아니 역으로 소용 박씨의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거나 사랑이 도달하는 궁극의 지점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완전한 사랑을 육체의 형식으로 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사랑은 죽음이다.
설령 그것이 고통이고 비극적 최후가 준비되어 있을지라도, 사랑은 사랑한 순간만큼, 그만큼의 대가를 죽음으로 지불하게 된다. 역으로 사랑의 행복했던 순간은 지불이 유예된 고통이거나 죽음이다. 하여 잘못 전달된 한통의 편지는 “운명”이다. 서사의 시작이 죽음의 장면에서 비롯하듯, 서사의 종결은 운명적으로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귀성군에게 전하는 한통의 편지글로 풀어낸다. 죽음도 사랑으로 풀리고 절망도 사랑으로 풀리고, 마침내 미움의 감정 또한 사랑으로 풀린다. 비록 『모반의 연애편지』를 이끌어가는 서사의 내부가 권력이라는 외연적 범주들로 촘촘하게 채워져 있기는 하지만, 사랑은 권력의 타자로 고양되어 삶-시간-세계를 포월하게 된다.
마치 한편의 논문과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훈민정음을 사랑의 언어로 다시 기술하고 있듯이, 사랑은 모든 오해와 착각을 넘어서 사랑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설령 그것이 죽음의 치환작용일 때조차, 사랑은 사랑의 기술 속에 사랑 자체를 완성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금번 상재한 『모반의 연애편지』 속엔 모반은 없고 사랑만이 사랑을 떠받치고 있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즘적인 사랑의 실체(아지)를 승인하면서 사랑을 죽음으로 완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모반의 연애편지』가 풀어낸 서사적 실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