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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
이야기교사
해방정국과 남북분열저지운동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행동한 조직은 오직 천도교뿐이었다. 당시 천도교가 감행한 남북분열저지운동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는데도 우리 사회는 말할 것 없고 우리 교단에서조차 이를 기리는데 너무나 인색한 것 같다. 3월을 맞아 3·1 정신을 계승하여 1948년 3월 1일을 기해 궐기했던 이 운동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 김응조_연원회 간사
해방 후 천도교청우당의 부활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진주하여 각기 군정을 시행했다. 뜻하지 않는 남북분단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천도교는 보국안민의 이념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천도교청우당을 부활시켜 이 해 10월 31일 중앙대교당에서 지방대표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당규와 정강정책을 채택하고, 위원장에 김기전, 부위원장에 이응진을 선출했다.
당시 해방정국은 수많은 정치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한 가운데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반탁反託을 주장하는 우익진영과 찬탁贊託을 주장하는 좌익진영으로 갈리어 극심한 혼란상이 야기되었다. 이에 청우당은 ‘신탁통치를 철회하지 않는 한 우리 당은 삼천만 대중의 선두에 서서 자주적 완전독립을 전취戰取하기까지 결사적 항전을 계속하기로 결의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그런 가운데 북은 소련을 배경으로, 남은 미국을 배경으로 단독정부 수립에 혈안이 되자 청우당은 다음해 2월 9일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적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정치적 기본노선을 이탈한 편좌편우偏左偏右의 모든 경향을 양기揚棄하고 절대다수인 민중을 기초로 한 민족적 대동단결을 촉성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청우당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초월한 민주주의적 민족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정치이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기초해서 이 해 3월에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열린 미소美蘇공동위원회에서 우리나라 각 정당 사회단체에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한 답신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다.
당시 청우당이 제출한 ‘천도교정치이념’에서 천도교가 지향했던 정치이념과 노선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적 신민주주의’를 골자로 하고 있는 그 답변서의 요지를 요약해보기로 한다.
“우리는 미국형인 자본가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를 원치 않는다. 그는 자본제도의 내포한 모순과 폐해를 미리부터 잘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련류인 무산자 독재의 프로민주주의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조선에는 일찍이 자본계급의 전횡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조선의 현단계에 적응適應한 ‘조선적 신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조선적 신민주주의란 어떤 것이냐.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경중선후輕重先後의 차별 없이 동일한 목적으로 취급하는 민주주의이다. 조선의 자주독립과 아울러 조선민족사회에 맞는 민주정치, 민주경제, 민주문화, 민주도덕을 동시에 실현하려는 민주주의이다.”
한편 날이 갈수록 남북간의 왕래가 어렵게 되면서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자 천도교는 북한 교회와의 소통을 위해 1946년 1월에 함흥에 천도교 북선연락소北鮮連絡所와 평양에 서선연락소西鮮連絡所를 설치하였다. 또한, 해방 후 북한에서는 소련을 배경으로 한 공산당이,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민주당이 조직에 박차를 가하게 되자 일제치하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했던 천도교를 기억하고 있는 대다수 북한 주민들의 여망에 따라 청우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의 청우당본부는 북한에 독자적으로 천도교청우당을 조직하도록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8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김달현을 선출하였다. 북조선청우당의 조직체계는 중앙당 밑에 도당道黨, 시·군당, 읍·면당이 있고 그 아래 동洞에는 접接을 두었다.
이 해 6월경 북한 전역에 조직을 완료한 북조선청우당은 기관지로 「개벽신보開闢新報」를 발행하였다. 처음에 순간旬刊으로 창간된 「개벽신보」는 그 후 주간(週刊)으로 발행하다가 다시 일간日刊으로 발행하였는데, 1948년 4월 1일부터 윤전기를 설치하여 신문대판 4면으로 확대하여 매일 5만부를 인쇄 배포하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북한에 북조선종무원 설치
청우당이 결성되자 북한에 당세가 급격히 신장하면서 북한의 교세도 급신장하게 되었다. 이에 교회와 청우당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이 해 연말에 ‘천도교북조선연원회’를 구성하고 의장에 이돈화, 부의장에 김광호가 선임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47년 1월에 서울에서 총부의 이돈화 장로와 청우당의 김기전 위원장이 평양에 도착하여 분단의 장기화에 대비해서 북한에도 중앙총부와 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이북 6도道 104개 시군市郡의 도정과 종리원장 등이 모여 원주직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서선연락소와 북선연락소를 통합하여 1947년 2월 11일 평양에 ‘천도교북조선종무원’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북한지역에 대한 교회활동이 체계화되면서 이 해 6월 현재로 북한의 교세는 103개의 시ㆍ군에 종리원이 조직되었고, 교호수는 32만 5천여호에 교인수는 169만여명에 달하는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북한정권은 1947년 12월에 화폐개혁을 실시하여 1인당 7백 원씩만 교환해주고 나머지는 모두 동결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다음해, 즉 1948년 1월에는 각 사회단체가 보유한 현금을 회수하여 동결시킨 후 예금자를 5등급으로 나누어 일정액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모두 몰수하였다. 이로 인해 북조선종무원과 각 지방 종리원은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북한, 남북 총선거 반대, 유엔위원단 입북 막아
1946년 3월 20일부터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1947년 5월에 개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자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다. 그 결과 이 해 11월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통일문제를 논의한 끝에 유엔감시하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다음해 3월 31일까지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가결되었다. 이 제안은 찬성 43, 반대 0, 기권 6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의결되었다. 유엔은 이 결의에 따라 남북총선거를 감시할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1948년 1월 8일 감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김일성 일당은 평양에 수만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북한 동포들이 남북총선거를 반대한다는 날조된 여론을 내세워 유엔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통일에의 마지막 희망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가속화되어가던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이 현실로 다가왔다. 북한은 북한대로 이미 화폐개혁과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김일성을 추대하는 연판장운동을 전개하는 등 친소 공산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하였고, 남한은 남한대로 이승만계의 독립촉성중앙위원회와 한민당계가 앞장서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면서 친미 단독정부 수립에 열을 올렸다.
만약 남북이 각기 단정單政을 수립하게 된다면 국토분단은 기정사실화되고, 그동안 이런 사태를 막으려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청우당을 비롯한 일부 중도세력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분단으로 인한 남북갈등과 비극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천도교의 지도자들은 민족의 운명이 걸린 이런 사태를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의 고위 교역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거듭하는 가운데 특히 북한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서울의 총본부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적절한 대책을 제시해주도록 요청해왔다.
남북총선거를 위한 결단
사태가 이에 이르자 천도교총본부의 지도부는 북한의 남북총선거 거부 이후 여러 차례 현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대책을 비밀리에 논의하는 가운데 유엔총회의 결의대로 남북총선거를 실시하는 것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최린, 김광호, 전의찬, 이응진, 최단봉 등 교회와 청우당의 지도자를 비롯해서 김지수, 오근 등이 2월 초에 명륜동 최린의 집에 모였다. 여기서 남북한의 단정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유엔을 통한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를 위해 남북 전역에서 동시에 일대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남북총선거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본방침을 확정했다.
첫째, 김구를 비롯한 중도세력의 단정 반대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은 남한에 국한될 뿐이다. 따라서 남북한 총선거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강력한 여론 조성에는 남북한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천도교 포교망과 청우당 조직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둘째, 북한주민이 총선거를 반대한다는 북한정권의 거짓 선전을 폭로하고 남북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염원하는 북한주민의 참된 의사를 적극 대내외에 널리 알려야 한다. 이를 위해 천도교와 청우당이 앞장서서 북한 전역에서 일대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남한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단정반대시위를 전개한다.
셋째, 시위운동은 기미년의 3·1 정신을 계승하여 무저항 비폭력을 원칙으로 평화적 방법에 의해 전개한다.
이를 위해 이 운동의 선언문과 북한의 천도교와 청우당에 보내는 지령문을 작성하고 이 지령문을 전달할 밀사로 북한의 정보망을 피하기 위해 유은덕劉恩德(吳槿 부인)과 박현화朴炫嬅(金智洙 부인) 두 여성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남한에서도 이 운동을 지원하기로 하고 각계각층을 규합하는 책임자를 이응진으로 정했다.
북한에 보내는 비밀지령문의 골자는 ① 미·소 양군 철수와 남북한 단정수립 반대 ② 유엔감시위원단의 입북 및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 주장 ③ 이를 위해 3월 1일 북한 전역에서 천도교와 청우당이 일체가 되어 일대 군중시위운동을 전개한다는 3개 조항이다. 이와 아울러 천도교중앙총본부 및 천도교청우당본부 명의로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여기에 선언문의 내용 일부를 보기로 한다.
“한국에 통일독립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유엔총회의 결의로 유엔 감시하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코자 유엔한국위원단이 내한來韓하게 되었다. 거족적으로 환영하여야 할 이 성사盛事에 소련 및 북한에서는 동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대소對蘇 아부세력이 주축이 되어 재빨리 공산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조작된 민의로써 김일성 정권의 수립을 촉진하는 지지서명連判 운동을 전개하는 등 국토의 분단과 민족의 분열을 일삼고 있으며, 또 남南은 남대로 일부 지도층의 조급한 속단에 의하여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단정 수립에 응할 태세를 갖춤에 이르렀다. ……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의에 의거치 않는 어떤 형태의 정치체제도, 어떤 형태의 경제체제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또 아무리 영향력이 강하더라도 대의에 어긋난 외세에는 일보나마 이에 추종할 수 없다.”
이와 아울러 선언문에는 ① 우리의 자유의사에 의거치 않는 어떤 정치체제, 어떤 경제구조도 단호히 배격한다. ②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토통일과 민족단결을 저해하는 모든 세력의 준동을 봉쇄한다. ③ 유엔의 결의를 성실히 준수하여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환영한다. ④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되는 최후일각까지 이 운동을 계속한다. ⑤ 이 운동을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일관한다는 5개조항의 공약을 표방했다.
이 지령문과 선언문을 밀사를 통해 북한의 천도교 지도자인 이돈화와 김덕린에게 전하고 부본副本은 북조선청우당 김달현 위원장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날 두 밀사와 교회 지도부는 최린의 집에 모여 청수를 모시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심고했다. 그리고 두 밀사는 만약의 경우를 상정해서 길을 달리하여 북한으로 밀파되었다.
한겨울의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유은덕은 2월 7일 연백·해주 방면으로, 박현화는 2월 8일 개성·금천을 거쳐 평양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떠났다. 그런데 유은덕은 38선을 넘던 중 산 속에서 길을 헤매다가 발에 동상이 걸려 간신히 해주海州에 이르러 청우당 황해도당 위원장 김영환金泳煥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사이 박현화는 38선을 넘어 내무서에 닷새동안 구류되기는 하였으나 다행히 풀려나와 2월 13일 저녁 무사히 평양에 도착하여 김일대(청우당 평남도당 위원장 역임)에게 지령문을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이 지령문은 다음날 일찍 김덕린 연원회 상무를 통해서 북조선종무원 이근섭 종무원장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이돈화 연원회 의장의 생일인 2월 17일 강동江東에 있는 봉명각鳳鳴閣수도원에서 이돈화, 김기전, 김덕린, 이근섭, 김명희, 김달현 등이 모여 비밀리에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시위운동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하였으나 김달현 위원장은 “아무리 명분이나 당위성이 있다고 해도 시위운동을 강행하게 되면 교인들의 엄청난 희생만 따를 뿐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극력 반대했다. 한편 김덕린과 김명희는 “우리들이 조국통일을 위해 죽을 각오만 되어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교회와 청우당의 의견 불일치로 일단 이 운동은 표면상 중단하기로 하였다.
불어닥친 검거선풍과 주모자 80여 명 처형
한편 교회는 김달현 위원장의 반대로 청우당과는 무관하게 연원 중심으로 이 운동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김덕린, 김명희 양인은 김일대를 만나 거사의 구체적 방법을 논의한 후 북한 각 지역에 밀사를 급파하여 지령을 전달하고 3월 1일 시위에 참가하도록 비밀리에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시위운동도 하기 전에 이 계획이 북한정권에 탐지되어 일차로 김일대가 2월 19일 최고정보처에 체포되었다. 김달현 위원장은 황해도당 위원장 김영환의 보고를 받았다면서 종무원에 찾아와 유은덕 밀사를 빨리 돌려보내라고 하자 조기주 성도부장이 이근섭 원장의 지시로 해주로 내려가 밀서를 받고 여비를 주며 조속히 떠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은덕은 미처 피신하기도 전에 2월 24일 김영환의 집에서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다음날인 25일부터 북한 전역에 걸쳐 관련교인들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이 불어닥쳐 김덕린, 주명득, 박용완, 김명희, 배의찬 등 교회 고위 지도자를 비롯해서 무려 1만 7천여 명의 교인이 체포되었다. 이와 아울러 북한정권의 압력으로 중앙민전中央民戰과 청우당 중앙당부는 해마다 거행하던 3·1절 기념 행사를 일절 중지하고 당원을 동원하지 말라는 지시를 청우당의 각 지방당부에 하달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북한의 영변寧邊·구장球場·희천熙川·개천价川 등 일부 지역에서는 수만 군중이 모여 남북한 총선거와 통일정부 수립을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그 후 월남한 교인들과 이 운동에 연관된 사람들은 당시 김달현 청우당 위원장의 밀고로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김달현 위원장은 이 운동이 실패한 다음달인 4월에 개최한 북조선청우당 전당대회에서 총괄보고를 하였다. 이 보고에서 김달현 위원장은 남북 총선거를 위해 1월에 한국에 들어온 유엔감시위원단에 대한 반대선전사업을 계속 실시하였다고 하면서, 3월의 남북분열저지운동에 대한 정체를 조사폭로하여 그 음모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보고내용은 그가 사전에 기밀을 밀고하였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당시 김달현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밀고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 후 김달현은 1948년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및 부의장, 1949년 6월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1957년에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및 무임소상無任所相 등을 역임하면서 승승장구하였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김달현은 1958년 12월 간첩죄로 숙청당하고 말았다. 북한정권은 1만 7천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체포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는데도 이를 발표하지 않고 은폐하는데 급급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공론화되면 북한주민들이 남북총선거를 반대한다는 왜곡선전과 날조된 음모가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정권은 대부분의 교인들을 석방하고 주모자급 교인들 87명을 3월 2일 평양으로 압송하여 분산 수감하였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탈출하여 살아남은 박연수朴延壽(당시 이름은 朴慶均)의 수기에 의하면, 이곳에서 김덕린과 유은덕 밀사 등 여러 교역자들을 만났는데 이들 모두가 혹독한 고문으로 참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10월 15일과 29일 양일간 평양형무소 지하실에 임시로 개설된 재판소에서 변호사나 검사도 없이 비공개로 인민판사 3인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런데 남북통일을 위한 이 운동을 엉뚱하게도 김일성 암살을 계획했다는 날조된 죄목을 뒤집어 씌워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김일대, 김덕린, 주명득, 유은덕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고, 그밖에는 4년 내지 15년의 징역과 함께 전원에게 재산몰수 판결이 내려졌다. 그 2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 유엔군과 국군이 북상할 때 북한정권은 납북한 남한 인사와 함께 8백여 명을 도보로 평양을 출발, 양덕·맹산을 거쳐 덕천군 양성면 수하리에 이르러 잡범들은 석방하고 나머지 7백여 명을 산속에서 총살하였다. 87명 중 다만 박연수 한사람만이 고향인 맹산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후일 생생한 내막을 전할 수 있었다.
한편 남한에서 동시에 결행하기로 했던 시위운동 역시 북한에서 기밀이누설되어 검거선풍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비록 이 운동이 공산정권의 압력으로 실패했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는 비극적 상황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행동에 나선 조직은 오직 천도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김구 계열 등 일부 중도세력이 국토분단을 막기 위해 단정을 거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분단을 막기 위해 천도교만이 기미년의 3·1 정신을 되살려 희생을 각오하고 분열저지운동을 감행하였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올바로 평가되지 못한 채 도외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 공산정권은 남북분열저지운동을 빌미로 그 후 지금까지도 3·1절 기념식마저 거부하는 반민족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천도교는 이 운동이 평화적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기조로 했던 기미년의 3·1 운동정신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바로 기미독립운동과 같이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통일운동’이라든가 ‘3·1재현운동’이라 불려 왔으나 이후 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회에서 이 운동명칭을 ‘남북분열저지운동’ 으로 확정했다.
북조선청우당의 정치적 변절
남북분열저지운동이 좌절된 후 북조선청우당은 4월 3, 4일 양일간 제2차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김달현 위원장은 1월에 서울에 들어온 유엔감시위원단에 대한 반대선전사업을 계속 실시하고 3월의 남북분열저지운동에 대한 정체를 조사 폭로하여 그 음모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보고하였다. 이날의 2차 전당대회에서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전개, 유엔총회의 결의에 의한 남북총선거 실시 분쇄 등 사업을 총결산하는 16개항을 결의했다.
이러한 결의는 북로당의 정책노선과 일치하는 것으로 당시 북조선청우당의 노선이 보국안민을 기조로 한 3·1 정신과 천도교의 이념을 벗어나 급속히 좌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스탈린 대원수大元帥에게 드리는 편지’와 ‘김일성 장군에게 드리는 편지’가 2차 전당대회 명의로 채택되었고,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위원장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는 전당대회의 분위기에서 북조선청우당의 변절된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한편 1950년 1월 20일에 개최된 청우당 제3차 전당대회에는 김일성을 초청해서 장장 두시간에 걸쳐 연설을 시킨 후 결정서決定書에 ‘조선노동당을 선두로 하여’라는 내용을 넣었다. 즉 천도교청우당은 천도교의 기본정신에 의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노동당의 지도 아래 노동당의 ‘우당友黨’으로서 활동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마무리
남북분열저지운동은 북한의 고위 교여자들이 대거 희생되는 비극 속에서 좌절되었다. 3월 16일에는 소춘 김기전 선생이 돌연 행방불명이 된데 이어 야뢰 이돈화 선생 역시 10월에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북조선종무원은 두 지도자가 공산당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단정했다. 그 후 북조선종무원은 1948년 4월 6일에 전국대회를 개최하여 교약을 개정하고 도사제道師制로 직제를 개편하였다. 개정된 교약에 따라 상임도사 13명을 선임하고 그 중에서 도사장 1인, 부도사장 2인을 선임하였다. 여기서 김기전을 구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를 북한 천도교의 최고수장인 도사장으로 선출하였으나 결구 두 지도자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교단은 그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남북분열저지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행사마저 제대로 거행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이 운동이 3·1절과 겹치기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무책임한 이야기다. 오래 전 대교당에서 3·1절 기념식이 끝난 후 북한에 밀사로 파견되어 희생된 유은덕 여사의 부군인 오근 선생이 연단에 올라와 교단의 무성의한 행태를 성토하다가 너무 격앙된 나머지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어린 삼남매를 남겨둔 채 북한으로 밀파되어 불귀의 객이 된 유은덕 여사에 대해 어찌 한이 맺히지 않겠는가.
북한은 해방 후 1946년과 1947년에는 3·1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1948년 3월의 남북분열저지운동 후 3·1절을 무시한 채 기념식조차도 거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3·1 운동을 폄훼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우리의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 3·1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명시하고 이를 국민적 가치로 승화시킨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화합과 상생의 3·1 정신으로 남북이 평화적으로 교류하면서 동고동락하는 그날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