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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가는대로 스크랩 가수 나훈아가 부른 “강촌에 살고 싶네”의 실제 강촌(江村)은 어딜까.
익명 추천 0 조회 64 08.08.13 11: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수 나훈아가 부른 “강촌에 살고 싶네”의 실제 강촌(江村)은 어딜까.


◈『강촌에 살고 싶네』의

       작사가 김설강 선생님 인터뷰 내용◈

  강촌문화마당은 2001년 12월 창립총회에서 “강촌에 살고 싶네” 노래비공원 건립사업을 추진하기로 의결했다.

 이에 따라 강촌문화마당은 한국가요작가협회의 도움으로 작사가인 설강 김성휘 님과 전화통화를 통해 2002년 4월24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한국가요작가협회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강촌문화마당측은 회장인 정재억을 비롯, 회원 김경선(강촌1리 이장), 이승동(로일주유소 대표), 박충근(당시춘천지방법원 서기관) 등 4명이 인터뷰 자리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설강님이 ‘강촌에 살고 싶네’의 작사가임을 확인하였으며, 그로부터 작사배경과 노래비건립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새로 얻어냈다.

 김설강 님은 인터뷰 이후 지병인 폐암이 악화돼 같은 해 7월 노래비 건립이 추진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인터뷰내용을 정리 요약한 것이다.

65년경에 만들어 놓고 발표 안하고 있다가 내가 시집을 내려고

했더니 김학송씨가 시집을 뒤지다가 그 곡을 붙였어요. 발표가 됐는데 그 후 직장생활 하다 보니까 가 볼 수 없어, 그러다가 한 20년 지났을까 직장을 그만둘 무렵에 강촌에 갔었어요.(글 쓰시기 전에 강촌에 왔었나요) 아, 물론이죠. 그때 내가 저 춘천에서 사업을 했어. 그러니까 자주 춘천을 드나들었는데, 춘천에서 서울로 오는데 저녁때 강촌을 지나 오려니까 그 강촌역이 어떻게 멋있게 보이는지, 산중턱에 달랑 있는 역사가 정말 낭만적이더라구. 그때는 차가 건너가지 못할 때라 이쪽(강 건너편)에다 세워놓고 어느 주막인가 민간인가 처마 밑에 양해를 구하고 세워 놓고 건너갔어요.(그 당시엔 배루 건너 다녔을 텐데요.)강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해 졌어요. 들어갈 때는 호기심에 들어갔는데 나오기는 어두워졌으니 어떻게 해. 그래서 거기서 조그마한 여인숙 그때야 정말 한촌이지. 거기서 저녁을 먹고 어두우니 갈 곳이 있나 그런데 산에서 뻐꾹새우는 소리가 들리더라구. 그래서 거기서 잤어요. 도로 나오기 어렵더라구, 어두워져 가지구. 그래 가지구서 인제 지금 노래순서로 봐서는 2절이 먼저된 거지. 들어가서 자면서 만들어 가지구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면서 또 지금 1절로  돼 있는 아침풍경이, 쓰기는 2절이 먼저 되고 1절이 나중에 됐는데 발표때는 바꿔가지고 발표를 했죠. 그 후에 갔을 때 그 전에는 버드나무가 있었다구요. 역에서 강촌거리가 있잖아요. 논이 있고 저쪽에 개울이 있는데 그 개울 거기에 버드나무가 쭉 있어서 그 후에가서 버드나무 다 어떻게 했느냐니까 언제 벴는지 하나하나 베가지고 지금은 저렇게 옛날에는 자기들이 일하고 거기서 목욕을 해도 길에서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한 20년 후에 찾아 갔을 때 아, 어떻게 서운한지.(웃음)

 직장 그만둔 다음 몇 번 찾아 갔는데 구곡폭포 가는 길이라고 하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자료들을 수집해 가지고 이검봉산은 뭐하는데 내가 아침에 여쭤 봤는데 그 뭐 강촌천인가, 응. 산은 폭포로 가고 폭포에서 흘러나온 물은 강촌으로 나온단 말이야. 그 강 이름이 있을 것 같은데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더란 말이야. 여러 사람한테 물어봐두…그래서 그냥 미완성상태로 그냥 놔두고  오늘 아침에 전화를 하면서 물어 봤더니 강촌천이라구 헌다구 그래. 노래에 강촌천이라구 발음하긴 힘들테구 강촌이 들어가니까 그냥 쉽게 뭐하면 되겠더라구.

지금도 인상 깊은 게 강촌에서 구곡폭포로 들어가는 길이 참 좋더라구요. 그다음엔 차 끌고 나오면서 보니깐 재미나는 게 그 구곡폭포 가는 길 우측에 민박집이 있는데 상호가 ‘강촌에 살고 싶네’라고 돼 있어 하두 반가워 그 집에 들어 갔었다구. 아버님도 뵙고 아드님도 만나구 어느 직장에 다니는데 일요일이니까…그 명함을 내가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강촌에 살고 싶네’가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어 가지구 평생 나하구는 ......구곡폭포가는 길은 젊은이들이 좀 경쾌한 멜로디를 붙여서 부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오늘도 꺼내서 이렇게 보니까 손 볼 데도 있고 자료도 수집해야 되고 …아이구 이젠 늙어서 옛날 같지 않아.(발표를 빨리 하시죠 라고 묻자)   아 글쎄 이런 게 제기되기 전에는 우연하게 만들어 가지구 처박아 두구 말았지.

(‘강촌에 살고 싶네’의 강촌이 일반사람들은 춘천 옆에 있는 강촌이 아니라 그냥 강가 아무데나 있는 강마을이다…)그게 내가 방송들의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어느 강촌이냐, 강촌이 춘천 들어가는데 있는 강촌이지 그랬더니 강촌이 몇 개가 있다구 그러더라구. 경상도에도 있고 어디도 있고 뭐 강촌이 그렇게 많은지 적은지 누가 조사해 봤냐 말야. “내가 아는 강촌은 그 강촌 밖에 없어” 하구 웃었는데 난 어느 강촌이 됐든…(아, 방송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군요. 그런데 저희는 그걸 못봤거든요.)그담에는 딴 음악하는 친구들이 애기할 때 그 친구들은 나하구 입장이 다르니까... 강이 흐르는 마을이면 다 강촌이 아니냐(보통명사로 생각하면 그렇죠) 내입장에서 볼 때는 어느 강촌이 됐든 나는 테마로 한 강촌이 따로 있지만 (노래를)부르고 들어주는 사람들이 그걸 따지구 들어주질 않거든. 그러면 ‘강촌에 거저 살고 싶다’고 하면 되지 뭐 따질 필요가 있으냐 (작사를 하시는 걸요, 저녁 어둑어둑할 때 도착하셨다구 했는데 뻐꾹새가 들어가는 2절은 그날 당일 날 썼습니까)당일 날 그날 저녁에 엎드려서 만든 것이지. 내 그래서 오늘(이 때 점퍼 오른쪽 안쪽 주머니에서 에이4 용지를 두 번 접은 종이를 꺼내 책상에 펼치며)그날 가사는 이 작사한 사람의 시하고 틀린 게 있어요. 이게 【날 으 는】으로 지금 나훈아가 부르고 있다구. 그러면 【날고】가 【날 으 는】으로 변했느냐, 2절의 첫 절에 【우는 밤】이거든, 그러니까 작곡하는 사람이 글자 수를 1절, 2절을 맞추기 위해서  본래 【나알고】라든가 얼마든지 글자를 하나 더 집어 넣어가지고 망치는 거보다는 그냥 처리가 않되거든요. 2절에 가서는 【흙내음】이라고 돼 있거든.【흙내음】은 사투리야. 정확하게 표준말은 흙냄새가....인제 그러나 노래에서 흙냄새는 흙내음보다 재미가 없거든. 흙라구 나는 내 원 가사에는 흙내가 돼 있거든. 흙내가 표준말이거든. (중략) 특히 내가 신경을 쓰는 것은 【시름없이 날 으 는】은 우리 어법에 맞지 않는 틀리는 표기야요.

 이 것을 왜 이렇게 했느냐면 【날고】가 2절의 【우는 밤】 석자니까 석자 꼭 맞추고 싶으니까 이렇게 했고 또 가수가 노래 부르면서 작곡한 친구한테 ‘선생님, 저 부르기가 뭐하니까 요렇게 고치면 안 될까요.’  곡 붙이는 사람은 문법적으로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내가 오늘 만약에 어디다가 적는다고 하면 정확하게 적어야 되죠. 돈 들여서 만들면서 비난받을 뭘 할 필요가 없는 거구.(저희가 여기 온 것은 강촌에 노래비를 제작하기 위해서 왔거든요. 만약 노래비를 제작하게 되면 이걸로 제작을 해야 하나요? ) 그렇죠. (이때 한국가요작사협회의 김병환 사무총장님이 “선생님, 이미 출판됐으면 그 가사가 올라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가사를 그리 알고 있는데...”) 아니야, 문법적으로도 어긋나는 표기를...(“해설을 달아 주면 될 겁니다”라고 박충근 회원이 말하자 모두 수긍을 함.)


(선생님 본명은 김 성자 휘자 신가요.) 예. (요즘은 어쩌게 지내십니까.) 먹구 사느라구 써 놓은 글 정리하구...

(원산에서 교편생활을 하셨다구요.) 원산 제2중학교, 그담 6.25직전 여기 나오기 직전에는 평강여중(원래 전공은 음악을 하셨나요.) 아니예요. 저 국어선생입니다.(아주 재미 있으시네, 진짜.)

(직장은 건설쪽 인가…… 공직에도 계신 걸로 아는데요.) 여기 나와서는 주로 출판계통에 있었어요. 그리고 요 얼마전 까지두 출판사를 제가 직접했고…(이때 김사무총장이  그전에부터 강촌을 통과할 때 건설…이라고 묻자) 그때는 좀 외도를 좀 했을 때야. 그 때 소양강댐이 생기면서 그 저쪽 화천으로 넘어가는 이설도로를 만들 때지요. 옛날 도로가 수몰되니까  새로 화천으로 넘어가는 …그 때 내 친구 하나가 현대건설에 있을 땐데 야, 너 늙어 죽을 때까지 원고지나 메운다고 해서 생활이 낳아지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다 집어 치우고 자금없으면 내가 대줄 테니까…그 때 한 공구를 내게 강제로 떠 맡겼어.  하청업을 한 거죠. 하구 보니까 괜찮더라구. 그래 가지구, 그때 강촌하구 뭐 한 게(강촌과 인연을 맺은 게) 그때 춘천 왔다 갔다 하면서…(선생님의 노래비를 제작하게 되면 선생님의 양력이랄까 기록을 하게 될 지 모르겠는데) 어렵지 않은데 한자 한자가 다 돈인데 그거는 내가 아주 간추려 가지구 정리를 해 드릴께. 몸이 나으면 팩스로 넣어 드릴께.

(연세는 어떻게 되십니까.) 27년생이요. 그러니까. 일흔다섯이지.

(강촌에 살고 싶네 말고도 다른 것을 발표한 게 있는지요.) 사실 제가 만든 것은 어려서부터 시를 썼기 때문에, 시를 썼지 가사를 쓰려구 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하나 하나 발표하고 보니까 한 50여 편 넘는 것 같아요. 강촌에 살고 싶네 발표 이후 한편도 발표를 안했어요. …(중략)…그러나 저러나 여러분들이 하시려고 하시는 게 공원을 만들려고 하시는지…(이 때 김설강 선생은 오른쪽 가슴이 아프신지 계속 왼손을 점퍼 안쪽으로 넣어 오른쪽 가슴 부위를 만지시며 고통스러워 하셨음.)…(이어)기왕 만드시려면 좋은 부지 마련하셔서…제가 실향민이 돼서 그런지 강촌과 인연이 이뤄진 후에 특히  잊혀 지지 않는 게 있다. 그땐 기차를 타고갔어요. 기차를 내리니까 배낭 멘 친구들이 ‘강촌에 살고 싶네’ 를 크게 부르더라구, 홈에서. 어떻게 기분이 좋은지. 아직도 가요무대인가 뭔가 마지막에 ‘강촌에 살고 싶네’ 를 합창을 한다든가 몇 차례 봤는데… 어떻게 됐든 (내가 작사한 노래가)사랑을 받게 된 것은 강촌에 살고 있는 여러분들이 ‘강촌에 살고 싶네’ 를 사랑하기 때문에 된 거지 내가 바란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니 잖아요.

 지금 ‘강촌에 살고 싶네’ 가 나오고 30년이 넘었네. 앞으로도 ‘구곡폭포 가는 길’은 빨리 완성을 해서 작곡가 한테 위촉을 할테고 어느 가수가 부를 런지 모르겠지만…(건강하실 때 한번 강촌에 찾아 오시죠 라고 묻자)오늘도 호흡을 못하겠어요. 가슴이 결려가지고…밤에도 누워 잠을 못자고 앉아서 잠을 자거든요. 치료를 받는데 엑스레이를 찍어도 나타나질 않고…(김학송 작곡가는 어디 계신가요.) 미국에 가 있을 거예요.

(가사를 김학송 선생에게 맡겨서 작곡을 하셨나요.) 그 사람이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전속으로 있을 때 오아시스레코드사 사장하구 저하구 가까워요. 지금도 오아시스사장 경영하고 있는데 그 사장이 그 시를 뺐다시피 해서 자기 전속 작곡가인 김학송에게 준거죠. 그 때 나훈아도 유명해지기 전 초기……(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함.)(노래비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시지요.)좋게 생각한다기 보다는 고맙게 생각하죠. 그런데 내 걱정이 차라리 내가 활동할 시기에 일찍 문제가 제기됐다고 하면 나두 뭔가 협조하는 방법도 강구가 됐을 텐데, 폐물이 된 이후에 이런 소식을 들으니 미안할 뿐이지…(노래비가 진작 제작되고 강촌에 대한 홍보가 됐더라면 선생님도 진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세를 탔을 텐데요.) 여기 이 회장 (가요작가협회) 박성훈 씨가 (강촌분들로부터)전화가 오기 전 2주전 만나서 식사를 했던가, 차를 마셨던가…내가 춘천가면 춘천시장 만나서 노래비 얘기 제기하겠다구 그래서 웃구 말았는데 얼마 안있다가 정선생님(강촌문화마당 정재억 회장을 지칭) 한테서 (인터뷰를 요청하는)전화가 왔잖아.

(평소에 생각하셨던 노래비의 모양은 있으세요.) 반야월 선생하구 가까운데 우리나라에서는 노래비를 가장 많이 가지고 계신 분이야요. 그 자연석 그대루 깎아 가지구 그런 게 아주… 그런 자연석을 발견하기가 어렵겠지. 모양만 자연스럽게 되면 글씨 들어가는데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어서 조각을 하더라구…. 노래비에는 너저분한 설명이 될 수 있으면 들어가지 말아야 돼요. 대신에 내용 자체는 띄어쓰기라든가 정확하게 신경 써서  누가 보더라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그게 만든 사람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돼요.누가 그 사람 인적 사항을 보고 노래를 좋아 하는 게 아니니까 노래가 좋으니까 따라 부르고 좋아하는 거지.


김설강 선생님은 강촌 추억다방이라고 하는 곳에서 강촌이장을 만났다는 얘기를 하신 뒤 박충근 회원이 작성한 ‘노래비가사 사용 승낙서’에 직접 이름과 서명을 하여 박충근 회원에게 전하여 주셨다.(정리: 강촌문화마당)


그 후 3년 뒤인 2005년 7월16일 강촌에는 춘천시의 예산보조로 강촌역에서 200미터 떨어진 북한강변로 입구에 가로 세로 4미터 크기의 “강촌에 살고 싶네” 노래비가 세워졌다.

 제막식에는 고 김설강 선생의 미망인과 두 남매가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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