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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스크랩 풍월주인의 시. 소식(蘇軾. 蘇東坡)/ 심경호 . 중국 고전명시 감상①
그냥바바 추천 0 조회 44 15.07.21 16: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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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주인의 시 / 심경호

 

중국 고전명시 감상①

 

 

1.

 

간혹 한시의 작가는 자기 시를 음풍농월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시가 큰 도리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겸손해하는 것이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을 것은 못 된다. 하지만 한시 일반을 음풍농월이라고 폄하하는 생각도 분명히 존재한다. 한시가 현실의 큰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낮춰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시는 정말로 음풍농월에 불과한가? 한시를 음풍농월이라 말하는 관점을 반드시 부정적인 평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실상 한시는 자연과 현실과 역사의 모든 것을 소재로 삼고, 서정뿐만 아니라 기록과 논변의 기능도 지니므로, 한시를 음풍농월로 규정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음풍농월이란 말은 한시의 매우 중요한 속성을 아주 적절하게 지적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바람을 읊고 달을 하놀인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시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적 유희의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해 온 이유이자, 현재도 사랑받을 수 있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사실, 바람을 읊고 달을 하놀인다는 일은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바람과 달을 우리 가까이 되돌리는 것, 이것이 한시를 읽는 첫 번째 이유여야 하리라.

 

옛사람들에게 자연은 관념이 아니었다. 자연은 신이 깃들어 있고 실체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바람 풍(風)은 새 모양의 신이 방신(方神)의 사자로서 바람을 타고 왕래하는 날갯짓을 형상화한 글자다. 고대의 사람들은 사방에 각각 그 방위의 구역을 관할하는 방신이 있고, 방신은 자기 구역을 다스리기 위해서 바람 따라 나는 새 모양의 신을 거느리고 있다고 믿었다.

 

한편 월(月)은 이지러진 달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달은 이지러졌다가는 원만의 상태를 향해 변화해 간다. 그 변화는 생명 있는 것들이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시는 주기를 상징했다.

 

 

 

 

2.

 

雨洗東坡月色淸   비가 동쪽 언덕 씻은 후 달빛 맑은 때

市人行盡野人行   사람들 왕래 끊기고 야인만 걸어간다

莫嫌??坡頭路  언덕길이 울퉁불퉁하다 싫어하지 말자

自愛?然曳杖聲   쟁글쟁글 지팡이 끄는 소릴 사랑하기에

 

북송의 대시인 소식(蘇軾, 1037~1101)이 남긴 〈동파(東坡)〉라는 제목의 절구다.

 

동파는 동쪽 언덕이란 뜻인데, 소동파가 거처 근처의 언덕을 그렇게 부르고 그 이름을 거의 고유명사처럼 사용했다. 당나라 때 백거이(백낙천)는 충주(忠州) 교외의 동쪽 둑, 즉 동파에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를 심고 그곳을 사랑했다. 소동파는 평소 백거이를 좋아했기에 백거이의 시어에서 연상하여 거처의 동쪽 언덕을 동파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동파는 그곳을 특히 사랑해서 스스로의 호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황량한 길, 소동파는 그 길을 사랑했다. 한낮에 이욕을 위해 분주하게 오가던 시민들의 왕래가 끊어진 길을 야인인 나만 홀로 간다고 했다. 동쪽 언덕의 길에는 돌이 들쑥날쑥 여기저기 있어서 한밤에 걷기에는 불편하다. 하지만 짜증내지는 말자. 달빛 아래 길은 호젓하고, 지팡이를 짚고 가노라니 지팡이 소리가 적막한 속에 맑은 소리를 내지 않는가.

 

나는 그 음향을 사랑한다. 달빛 아래 홀로 가는 길, 소리 없는 바람이 언덕의 길 위로 불어왔으리라. 마음의 번열이 혹 일어나더라도 바람은 그것을 식혀 줄 것이다.

 

이 시는 청(淸), 행(行), 성(聲)의 세 글자를 운자(韻字)로 사용했다. 평성 가운데서도 경(庚)운에 속하는 글자들로 압운을 하여, 맑고 탁 트인 느낌을 준다. [-ng]의 발음이 특히 그러한 느낌을 갖게 한다. 절구는 본래 짝수 구에 압운을 하지만 각 구가 일곱 자로 이루어진 칠언절구는 첫 구에도 운자를 놓을 수 있다. 당나라 후반부터는 이것이 오히려 정격처럼 되었다.

 

칠언절구는 모두 28자에 불과하다. 시인들은 한 글자 한 글자를 금같이 소중하게 여겼으므로 보통 그 28자에 같은 글자는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동파는 이 시에서 몇몇 글자를 중복해서 사용했다.

 

즉 동파(東坡)의 坡를 첫 구에서 사용하고는 세 번째 구에서도 사용했다. 마치 언덕의 이름을 가볍게 부르는 듯이 두 번이나 사용해서, 동쪽 언덕길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 듯하다. 두 번째 구에서는 人과 行이란 글자를 두 번씩 사용했다. 이 두 번째 구는 시인(市人)의 행(行)과 야인(野人)의 行을 대비시키면서 人과 行의 글자를 거듭 사용한 것이다.

 

또한 낙각(??)은 울퉁불퉁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두 글자가 똑같이 [-k]로 끝난다. 글자의 끝 부분 소리를 운(韻)이라 하는데, 둘 다 폐쇄음인 입성 각운(覺韻)에 속한다. 이렇게 끝 발음이 같은 두 글자를 나란히 이어두는 방식을 첩운(疊韻)이라고 한다. 대개 사물이나 상황을 형용하는 말에 첩운이 많다.

낙각은 울퉁불퉁한 돌들을 형용하면서 입성의 글자를 사용해서 거친 느낌이 든다. 이 어휘가 있기에 거꾸로 청(淸), 행(行), 성(聲)의 세 글자가 이루어내는 온화하고 명랑한 분위기가 더 증폭된다.

 

현대 중국어 보통화에서는 입성의 발음이 없다. 낙각(??)은 병음부호의 luo que에 4성의 성조를 얻어 발음하는데, 그런 중국어로는 도무지 입성의 맛을 살릴 수가 없다.

 

산길이 울퉁불퉁하다는 표현은 한유(韓愈)의 시 〈산석(山石)〉에서 “산 바위는 삐죽삐죽하고 오솔길 희미한데, 황혼에 절에 이르니 박쥐가 날아다닌다.”라고 했던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한유의 시는 그로테스크한 자연의 형상을 묘사하기 위해 그 표현을 사용했다. 곧, 박쥐가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황혼 녘 산사에 가까스로 이른 사실을 서술하였다. 앞부분만 보면 이러하다.

 

 

山石??行徑微  산 바위는 삐죽삐죽하고 오솔길 희미한데

黃昏到寺??飛  황혼에 절에 이르니 박쥐가 날아다닌다

昇堂坐階新雨足  당에 올라 계단에 앉았더니 갓 내린 비가 풍족하여

芭蕉葉大梔子肥  파초는 잎이 크고 접시꽃도 살졌도다.   : 梔子

僧言古壁佛?好  승려는 옛 벽의 불화가 볼만하다면서    : ?

以火來照所見稀  관솔불을 가져다 비추지만 볼 곳은 드물기만 하다.

 

 

이렇게 한유는 자연미에 도취한 심정을 묘사하지 않았으며, 자연은 인간 혹은 자기와 늘 격리되어 있음을 자각했다. 이에 비해 소동파는 자연의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인공의 길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길임을 묘사하기 위해 ‘낙각’이란 어휘를 사용한 것이다.

 

마지막 구의 자애(自愛)는 스스로 홀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고정된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주관에 따라 나 홀로 사랑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갱연(?然)의 갱(?然)은 종 같은 것을 친다는 동사인데, 동사 다음에 연(然)이란 글자가 오면 형용어로 된다. 갱연(?然)은 쇠, 돌, 옥, 나무 등이 다른 사물에 부딪혀 내는 홍량(洪亮)한 소리를 형용한다. 지팡이가 내는 소리가 짜증스럽거나 위화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홍량함을 나타냈다.

 

 

3.

 

1080년 2월, 45세의 소동파는 후베이(湖北) 성 황저우(黃州)에 이르렀다. 단련부사라는 명목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유배였다.

 

소동파는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로서 시나 문 모두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지금의 쓰촨(四川) 성에 속하는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이다. 북송의 인종 때인 1057년에 진사가 된 후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신종 때 스승 구양수(歐陽脩)가 왕안석의 변법(신법)에 반대하는 구법당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도 구법당으로 간주되어 항주의 통판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미저우(密州)와 쉬저우(徐州), 후저우(湖州)의 태수를 지내면서 정치를 풍자하는 시를 자주 지어 당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왔다.

 

당시 소동파가 지은 시에 〈획어가(?魚歌)〉가 있다. 획어는 물고기를 갈고리로 끌어 올린다는 뜻이다. 변법이 백성을 괴롭히는 사실을 은근히 풍자한 것이다. 장편인데, 일부만 보면 이러하다.

 

 

天寒水落魚在泥  날 춥고 물 말라 고기들이 진흙 속에 있는데

短鉤?水如耕犁  쟁기질하듯 짧은 갈고리로 물을 그어대니

渚蒲披折藻荇亂  물가의 부들 꺾이고 물풀도 흐트러지네

此意豈復遺鰍?  이 뜻이 어찌 잔고기인들 남겨 두랴

 

 

마침내 소동파는 1079년 7월, 조정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수도 개봉(開封)으로 압송되어, 지금의 검찰청에 해당하는 어사대에 구금되었다. 저장(浙江)성 후저우(湖州)의 지사로 부임한 지 불과 5개월 만의 일이었다. 백여 일(혹은 오백여 일) 구류되어 있으면서 20년 이전의 시까지도 풍유(諷喩)의 내용을 일일이 조사받았다. 소동파는 사형을 각오해서 아우에게 보내는 시를 짓기도 했으나, 은사를 받아 사죄는 면했다. 1079년 12월 29일에 황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1080년 정월에 개봉을 떠나 2월에 황주에 도착했다.

 

황주에 유배된 직후, 좋은 생선이나 맛 좋은 죽순이 나는 곳이라고 해서 스스로 만족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봉급이 너무 적어, 도무지 가족을 건사할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정혜원이란 곳에 살다가, 수역(水驛) 가까이 언덕 위의 정자로 옮겼다. 그곳을 남당이라고도 하고 임고정(臨皐亭)이라고도 했다.

 

이 무렵, 친구 마정경(馬正卿)이 그를 위해 고을의 관청에 호소하여, 소동파는 군영지의 빈 터를 빌려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때 〈동파〉라는 제목으로 고시 여덟 수를 계속해서 지었다. 앞서의 칠언절구는 이 고시 여덟 수보다 1, 2년 뒤에 쓴 시다. 고시 연작시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붙어 있다.

 

내가 황주에 온지 두 해인데, 날마다 주림에 고통을 겪었다. 친구 마정경(馬正卿)이 내가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을 알고 나를 위해 군(郡)에서 옛날 군영지로 쓰던 곳의 땅 수십 이랑을 청하여, 여기서 궁경(躬耕, 몸소 농사지음)할 수 있게 되었다. 땅은 이미 황폐하여 억새와 잡풀이 돋아나고 기왓장 조각이나 작은 돌 같은 것을 쌓아두는 곳이 되어 있었는데, 해도 또 크게 가물어서 땅을 개간하고 밭을 일구는 노동을 하느라 근력이 거의 다 하고 말았다. 쟁기를 놓아두고는 탄식하다가, 마침내 이 시를 짓는다.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 처지를 스스로 불쌍히 여기고, 부디 내년에 수확이 있으리란 기대로 이 수고로움을 잊고자 한다.

 

마정경은 이름이 몽득(夢得)이고, 정경은 그의 자(字)라고 한다. 기현(杞縣) 사람으로, 소식과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으되, 소동파보다 8일 빨랐다. 과거에 급제하고 태학생으로 있었으나, 하도 강직해서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오로지 소동파와 친하게 지냈다. 수염이 많았으므로 소동파는 그를 마염(馬髥)이라 부르고는 했다.

 

마정경도 몹시 가난했다. 소동파는 “부귀한 사람이라곤 없군. 그중에서도 나와 몽득은 대표적인 예라.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을 비교해 본다면, 몽득 군이 이긴다”고 했으니, 마몽득은 소동파보다도 훨씬 가난했나 보다.

 

8수 연작시 〈동파〉의 제1수에서 소동파는 스스로의 비운을 슬퍼했다. 단, 마지막 구에 약간 해학의 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廢壘無人顧   아무도 돌보지 않는 군영지

頹垣滿蓬蒿    무너진 담에 쑥만 가득하다

誰能捐筋力   누가 근력을 버리려 하리

歲晩不償勞   겨울 되어도 노동을 보상받지 못하는 걸

獨有孤旅人   외로이 객지살이하는 사람 있어

天窮無所逃   하늘이 정한 곤궁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端來拾瓦礫   마침 와서 기왓장이며 자갈을 주워 개간한다만

歲旱土不膏   한발인 데다 땅은 기름지지 않아

崎嶇草棘中   허우적허우적 풀덤불 속에 고생하며

欲刮一寸毛   한 치의 싹이라도 얻으려고 애쓰다간

?焉釋?歎   호미를 내던지곤 깊이 탄식하네

我?何時高   나의 곡물창고는 어느 때나 높아지랴

 

 

소동파는 자신의 곤궁을 하늘이 정한 곤궁이라고 했다. 소동파는 병자의 해, 계해의 날에 태어났는데, 간지로 보면 태어난 해도 태어난 날도 운수가 나쁘다고 한다. 병자년은 마갈(磨蝎)로 명(命)의 별자리를 삼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스스로 말한 적이 있다.

 

연작시의 제3수에서 소동파는, 금년은 한발인 데다가 농사일이 무척 힘들기는 하지만, 보습 댈 만한 비가 때마침 내리고, 지난해의 미나리 뿌리도 한 치만큼은 살아 있어 희망을 가져 본다고 했다.

 

 

自昔有微泉 예전부터 작은 샘 하나가

來從遠嶺背 먼 산 뒤쪽에서부터 흘러와

穿城過聚落 성벽을 뚫고 취락을 거쳐 가는데

流惡壯蓬艾 흐름도 나쁘고 쑥과 뜸이 웃자라 있다

去爲柯氏陂 그 끝은 가(柯) 씨의 연못

十畝魚鰕會 열 이랑에 고기 새우 득실했다만

歲旱泉亦竭 금년은 한발로 샘이 말라

枯萍粘破塊 마른 물풀이 갈라진 흙덩이에 붙어 있더니   : ?

昨夜南山雲 간밤 남산에 구름이 일어

雨到一犁外 비가 쟁기 날을 덮을 만큼 내리고

泫然尋故瀆 찰랑찰랑 본래의 물길을 찾아 흐르니

知我理荒? 내가 묵은 풀 제거함을 알아준 듯도 하다

泥芹有宿根 진흙 속의 미나리도 지난 해 뿌리가 있어

一寸嗟獨在 한 치 정도 아아 그것만은 남아 있다

雪芽何時動 눈 같은 싹은 어느 때나 트려나

春鳩行可膾 봄 비둘기 울 무렵엔 미나리회를 먹을 수 있겠지

 

 

49세 때인 1804년에 소동파는 안국사(安國寺)라는 정사(精舍)를 얻어, 불교에 귀의해서 마음의 괴로움을 잊고자 했다. 단, 불교에 귀의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 본래 명랑성을 지녔기에 불사에 왕래하는 것이 효과를 얻었다고 보아야 할 듯도 하다. 앞서 보았던 칠언절구 〈동파〉를 보면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안국사에서 불교에 귀의하고 쓴 글이, 명문으로 이름 높은 〈황주안국사기(黃州安國寺記)〉다.

 

 

 

 

"원풍 2년(1079년) 12월, 나는 오흥(吳興)의 수령[즉 호주 지사]으로서 죄를 얻었다. 상께서는 차마 주살하지 못하고 황주 단련부사로 삼아, 지난 잘못을 생각하여 스스로 혁신하도록 시켰다. 그다음 해 2월에 황주에 이르렀다. 묵을 집은 얼추 정해지고, 먹고 입는 것도 조금 충족되었다.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고 혼백을 수습하여 물러나 엎드려 생각하여, 스스로 혁신할 수 있는 방도를 구했다. 돌이켜 종래의 행동거지를 보건대, 모두 도(道)에 부합하지 않았으니, 지금 죄는 까닭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하나를 새롭게 하려고 하다가 그 둘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이에 크게 탄식하면서 생각했다.

 

‘도는 기(氣)를 제어할 수가 없고 성(性)은 습관에 이길 수가 없다. 그 근본을 쟁기질하지 않고 그 끄트머리만 호미질한다면, 지금 이것을 고친다고 해도 뒤에 반드시 다시 죄가 일어날 것이다. 차라리 불승에 귀멸(歸滅)하여, 한바탕 이것을 씻을 것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성남의 정사(精舍)를 발견했다. 안국사라고 했다.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 숲, 물길을 막아 만든 연못과 물가에 임한 누정이 있다.

 

하루, 이틀 지난 뒤 곧바로 가서, 향을 피우고 묵좌했다. 깊이 스스로를 성찰하자, 물아(物我)를 둘 다 잊고 신심(身心)을 모두 공(空)으로 여겨, 죄악의 때가 발생하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념으로 청정하여, 염오(染?)가 저절로 떨어져, 안과 밖이 훌쩍 초월해서 어디 무착하는 것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이것을 즐거워해서,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기를 지금까지 5년간 그렇게 했다."

 

元?二年十二月,余自吳興守得罪,上不忍誅,以?黃州團練副使,使思過而自新焉。其明年二月,至黃。舍館粗定,衣食稍給,閉門?掃,收召魂魄,退伏思念,求所以自新之方,反觀從來?意動作,皆不中道,非獨今之所以得罪者也。欲新其一,恐失其二。觸類而求之,有不可勝悔者。於是,?然嘆曰:

「道不足以禦氣,性不足以勝習。不鋤其本,而耘其末,今雖改之,後必復作。?歸誠佛僧,求一洗之?」

得城南精舍曰安國寺,有茂林修竹,陂池亭?。

間一二日輒往,焚香默坐,深自省察,則物我相忘,身心皆空,求罪垢所從生而不可得。一念??,染?自落,表裏?然,無所附麗。私竊樂之。旦往而暮還者,五年於此矣。

 

 

황주에서 소동파는 6년을 보냈다. 이제 그는 특유의 명랑성을 되찾았다.

이 무렵 저 유명한 〈적벽부〉에서는 풍월주인을 자처했다.

 

 

"무릇 천지간 만물은 각각 주인이 있기에,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 해도 가질 수 없으나,

오직 강가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그것을 들어 소리가 되고 눈으로 그것을 보아 색을 이룬다. 그것을 취해도 금하는 이 없고, 그것을 써도 다하지 않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 없는 창고로서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기는 것이로다."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子之所共.)

* 樂 : 適

 

조물자의 무진장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다. 금하여 막는 사람도 없고 써도 다함이 없는 무진장이다. 무진장의 보물을 귀로 들어 소리를 느끼고 무진장의 보물을 눈으로 보아 색깔을 즐긴다. 무진장의 보물,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강상의 청풍이요 산간의 명월인 것이다.

 

풍광과 경색을 거느리는 주인을 풍월주(風月主)라고 한다. 신라 법흥왕 원년에 동남(童男)으로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라 부르고 착한 선비를 구해 무리를 만들어 효제충신을 장려한 일도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우리 옛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그런데 한시에서 풍월주라고 하면 역시 소동파를 우선 떠올리게 된다. 소동파를 추종했던 황정견(黃庭堅)의 〈문잠립이 지은 춘일 세 절구에 차운하다(次韻文潛立春日三絶句)〉 가운데 첫째 수에 보면 “회남의 풍월주에게 한번 물어보리다, 새해의 도리화는 누굴 위해 피었소(試問淮南風月主, 新年桃李爲誰開)?”라는 어구가 있다. 이것은 소동파가 서화첩에 적었던 “강산풍월은 본시 일정한 주인이 없으니, 한가한 사람이 곧 주인이다(江山風月本無常主, 閑者便是主人)”라는 말이 전고(典故)라고 한다.

 

 

4.

 

소동파는 자신을 야인으로 규정하고 시인(市人)과 대비시켰다. 시인 곧 저자의 상인들이란, 여기서는 이익에 몰두해서 염량세태(炎凉世態)에 견디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인간들을 상징한다.

 

《사기》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전국시대 제나라 정승 맹상군의 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맹상군은 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정승의 자리에서 파직되자 문객들이 모두 떠나갔다. 맹상군은 몹시 서운해했다. 그는 정승에 복직하자, 문객들이 이제 자신을 보러 올 면목이 없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때 유일하게 곁을 지켰던 풍환(馮驩)은 이렇게 말했다.

 

"어른께서는 시장 가는 사람들을 못 보셨습니까? 아침이면 앞다투어 어깨를 비비고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면 아침에 시장에 갔던 자들이 팔을 휘두르며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립니다. 이는 아침은 좋아하고 저녁은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기대하는 이익이 저녁 시장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시장 가는 사람들이란 이익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들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익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영고성쇠와 염량세태를 수시로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흙과 함께 사는 야인은 다르다. 아침이면 앞다투어 어깨를 비비고 저자에 간다거나 날이 저물면 팔을 휘두르며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다.

 

소동파는 시인(市人)과 야인(野人)을 구별했지만, 자신의 정신 경계가 저들의 세계와 뾰족하게 다르다고 대립시키지는 않았다. 시인의 왕래가 끝난 길을 야인이 갈 뿐이다.

이것은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 751~814)가 〈유순을 전송하면서(送柳淳)〉라는 오언고시에서 자신을 명리(名利)의 사람들과 대립시킨 것과는 다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스산한 바람 속에 홀로 서 있다. 차가운 얼굴을 드러낸 채로.

 

 

靑山臨黃河 청산은 황하에 임해 있고

下有長安道 그 아래 장안 길이 뻗어 있다.

世上名利人 세상 명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相逢不知老 서로 만나 늙음이 오는 줄도 모른다.

 

 

청산이 황하에 임해 있는 그곳은 온전한 조화의 세계다. 하지만 그 아래 장안으로 뻗은 길은 조화의 세계를 훼손시킬 기세다. 장안 길은 명성과 이익을 좇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큰길로, 그 길 위의 사람들이 뿜어내는 숨과 말은 자연의 청정함을 혼탁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명리를 좇는 사람들은 그 길에서 서로 만나 속내를 숨기고 웃음을 지으며,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남과 사귄다. 그러한 시시껄렁한 만남 때문에 늙음이 언제 오는지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늙음이 언제 오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자기의 진정한 존재를 찾으려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늙음과, 그리고 죽음이 발밑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맹교는 세상 명리인들을 보면서 슬퍼했다. 자기 스스로를 소외시켰다.

 

그런데 소동파는 현실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깨닫고 탄식하지만 스스로 소외의 슬픈 감정을 갖지는 않는다. 미나리 뿌리를 찾아 보호하고 밭에 잡풀이 들러붙지 않도록 김을 매는 노동에 몰두한다. 소외를 한탄할 겨를이 없다. 더구나 달이 뜬 밤이면 호젓한 동쪽 언덕을 지팡이 짚고 가면서 마음속 깊이 기쁨을 느낀다.

 

소동파는 맹교의 시풍을 가도(賈島)의 그것과 아울러서 “교한도수(郊寒島瘦)”라고 평했다. 맹교는 싸늘하고 가도는 야위었다는 뜻이니, 두 사람의 시가 씁쓰레한 맛을 지니고 있다고 논평한 것이다.

확실히 맹교는 싸늘하다. 시 〈유순을 전송하면서〉에서 장안 길을 멀리서 바라보는 그의 태도를 보라. 그것은 곧 소동파가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과는 상당히 다르다.

 

소동파는 어느 날 밤, 맹교의 시집을 읽다 말고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고, 또 등유가 밤마다 날마다 줄어드는 것과 같으니,

가을벌레와 같이 징징 우는 소리, 그것에만 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잠시 이 맹교의 시집은 내려놓고, 나는 백옥같이 흰 술을 마시련다."

人生如朝露,日夜火消膏。

何苦將兩耳,聽此寒蟲號。

不如且置之,?我玉色?。

 

〈독맹교시(讀孟郊詩)〉에서 한 말이다.

 

《남송원화록(南宋院畵錄)》에 따르면 심진(沈津)이 엮은 《이은록(吏隱錄)》에 소동파의 칠언절구 〈동파〉를 화의로 삼은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소동파는 스스로를 야인이라 했지만, 후대 사람은 이은(吏隱)의 예로 본 것이다. 소동파의 관점에서는, 야인이어도 좋고 이은이어도 좋다.

이미 항주 통판으로 있던 1072년 5월 6일에 소동파는 서호의 망호루에 올라 노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짓지 않았던가.

 

 

未成小隱聊中隱 소은에는 익숙지 않기에 잠시 중은을 하나니

可得長閒勝暫閒 산림에서의 긴 여유가 공무 사이사이의 여유보다 꼭 나으랴

我本無家更安往 나는 본시 집이 없거늘 이제 다시 어디로 가랴

故鄕無此好湖山 고향에는 이런 좋은 호수도 산도 없는 것을

 

 

소은은 산림에 완전히 은둔하는 것, 중은은 관직에 있으면서 은둔하는 것이니 곧 이은이다. 소은이 중은(이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은 부득이하여 녹사(祿仕)를 하여도 의리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했다. 벼슬은 가난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지만 가난 때문에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맹자가 말했는데, 이러한 벼슬을 녹사라고 한다. 소동파의 벼슬살이는 녹사였고, 벼슬을 살면서 야인처럼 생활하는 것은 이은이요 중은이었던 것이다.

 

 

5.

 

소동파는 1084년에 창저우(常州)로 옮겨갔다. 1086년에 철종이 즉위하고 사마광이 이끄는 구당이 집권하자, 내직인 한림학사 겸 시독에 기용되었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자들이 신법을 모두 폐지하는 데 대해 불만을 느끼고, 1089년에 항저우(杭州)의 태수로 나갔고, 다시 여러 주의 태수를 거쳤다.

 

1093년에 수렴첨정이 끝나면서 철종은 직접 정사를 맡아 신법을 다시 시행하였는데, 이로써 소동파는 남방의 후이저우(惠州) 등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1101년에 휘종이 즉위하여 사면령을 내리자, 소동파는 개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거성도옥국관이라는 직위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창저우에서 세상을 떴다.

 

소동파는 정치 이념상으로는 유학 사상을 따랐다. 특히 대관료와 대지주들의 기본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잘못된 정사는 가차 없이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생활에서는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여, 초연하고 활달했다. “강산풍월은 본시 일정한 주인이 없으니, 한가한 사람이 곧 주인이다”라는 말은 이 초연하고 활달한 태도를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 주는 말이다.

 

소동파의 수필집이라고 할 《동파지림(東坡志林)》에 ‘여몽령(如夢令)’ 악보에 맞춰 지은 사(詞)가 두 곡 실려 있다. 1084년 12월에 사주(泗州) 옹희탑(雍熙塔) 아래서 지은 것이다.

 

 

水垢何曾相受  물과 때를 언제 받은 적이 있나

細看兩俱無有  자세히 보아도 둘 다 없는 걸

寄語?背人     등 밀어 주는 사람에게 말하오

盡日勞君揮?  진종일 팔을 놀리게 해서 미안하군

輕手 輕手       손을 쉬게 손을 쉬게

居士本來無垢  거사는 본래 때가 없으니

 

 

물과 때가 둘 다 없다고 했다. 어느 선승은 마음이 늘 찌끼에 더럽혀지므로 시시로 씻어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 말과 전혀 다르다. 아예 씻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고 했다.

소동파가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애당초 그가 풍월주인임을 자부하여 호방함과 명랑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시를 읽는 것은 청풍명월과 교감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풍월주인의 당당함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심경호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1955년 충북 음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으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한문산문의 미학》 《한국한시의 이해》 《김시습평전》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책, 그 무시무시한 주술》 등과 역서로 《주역철학사》 《불교와 유교》 《중국자전문학》 《일본서기의 비밀》 등이 있음. 성산학술상과 일본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 기념 제1회 동양문자문화상 수상. 한국학술진흥재단 선정 제1회 인문사회과학 분야 우수학자.

 

 

/ 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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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에 한자 입력이 안되었는지 일부 파자(破字)해서 입력한 부분도 있어 고쳐넣었으며 詩중 결자와 오자는 수정했습니다. 해석문만 있는 글에 원문을 하단에 넣었습니다

이미지는 임의로 넣었습니다.

 

아래 참고자료는 중국의 웹에서 발췌했습니다.

 

 

雨洗東坡月色新,

市人行盡野人行。

莫嫌??坡頭路,

自愛?然曳杖聲。

 

 

蘇軾〈東坡〉:「雨洗東坡月色?,市人行盡野人行。莫嫌??坡 頭路,自愛?然曳杖聲。」

這首詩一方面寫景,?一方面從景物中 透露蘇軾不屈不撓的精神。

蘇軾被貶謫到黃州,時常一個人獨行散步。

這首詩寫在冬夜雨後,東坡被月色映照著,顯得是這樣的冷?。

走在高低不平的石頭路上,蘇軾想到的是能在這樣?幽的環境下行 走,未嘗不是一種福氣。由於他凡事能從正面去思考,因此,人們 最欣賞的,就是他積極樂觀的態度。

한편으로 풍경을 묘사하고 한편으로 풍경속의 이면으로 소식이 난관에도 굽히지 않는 꿋꿋한 정신을 은근히 표현했다. 소식이 황주에서 벼슬 떨어지고 유배당하니 오로지 홀로 걷는일이 일상이였다.

 

 

 

? 坡① ??

雨洗?坡月色?,市人行?野人行。

莫嫌??②坡?路,自??然曳杖?。

 

[注]

①此?????官?州?所作。?坡,是??在?州居住?躬耕之所。

??:山多大石。

(1)第一句在全?中有何作用???要?析。(3分)

(2)??合全??析“?然”一?的妙用。(5分)

 

 

(1)第一句是全?的??,描?出一幅雨后?坡月夜?,?造了一??明幽?的??,以映?作者心?明澈的精神境界。(3分)

(2)“?然”一??神地描?出手杖?撞在石?上?出的?亮有力的?音,?月下?坡的???幽形成?明?比;(3分)?系前文?道路坎?的交代,可使?者?味到作者?守信念、????的情?。(2分)

 

? 얼룩소 락,얼룩소 낙 1. 얼룩소 2. 밝다 3. 명백하다(明白--) 4. 뛰어나다 5. 훌륭하다 / (?) 뛰어날 락 1. [형용사][문어] 분명하다. 뚜렷하다. 두드러지다.

? 자갈땅 학,굳을 확,메마를 각 1. 자갈땅 2. 돌산 3. 석산(石山) 4. 큰 돌 많은 산 5. 척박하다(瘠薄--) 6. 적다 a. 굳다 (확) b. 단단하다 (확) c. 견고하다(堅固--) (확) d. 확고하다(確固--) (확) e. 확실하다(確實--) (확) / (確) 굳을 확 1. [형용사] 확실하다. 견고하다. 2. [형용사] 진실하다. 사실이다.

?? :낙각. 산에 큰 돌이 많은 모양.

? 금옥 소리 갱 1. 금옥(金玉) 소리 2. 거문고를 타는 소리 3. 기침하는 소리 4. (종 같은 것을)치다 / (?) 금옥 소리 갱 1. [의성어·의태어] 땅땅. 쨍강쨍강. [높고 큰 소리]

?然 갱연하다 . [형용사] ?然。??。쇠붙이나 돌 따위의 단단한 물체가 부딪치는 소리나 거문고 따위를 타는 소리가 짜랑짜랑하게 맑고 곱다.

 

 

含義[edit]

1. 形容講話斷斷續續,?順暢。

【例】李四:「?,張三,做??講????????」

2. 形容路?平坦。

3. 形容做事?順暢。

 

 

??[edit]

唐朝韓愈《山石》:「山石?確行徑微,黃昏到寺??飛。」

韓愈、孟郊《納?聯句》:「炎湖度??。熱石行??。」

韓愈等《會合聯句》:「吟巴山??。說楚波堆壟。」

?朝王韜《淞濱?話?魏月坡》:「循山石??而行,得一洞。」

南朝梁江淹《江賦》:「幽?積?,???確。」李善註解:「????(確),皆水激石?峻不平之貌。」

 

 

http://bubsa0701.blog.me/8014030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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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石

 

山石?確行徑微,黃昏到寺??飛。

升堂坐階新雨足,芭蕉葉大梔子肥。

僧言古壁佛?好,以火來照所見稀。

鋪床拂度置羹飯,疏?亦足飽我饑。

夜深靜臥百蟲?,?月出嶺光入扉。

天明獨去無道路,出入高下窮煙?。

山紅澗碧紛爛漫,時見松?皆十圍。

當流赤足踏澗石,水聲激激風生衣。

人生如此自可樂,豈必局促?人?。

嗟哉吾黨二三子,安得至老不更歸。

 

 

??

?愈(唐)的《山石》?自唐?三百首。

【注?】:??:山石不平的?子。?:???。

【?析】:《山石》?首?用素描的手法有次序地??雨后的?昏到山寺漫游至第二天早晨的情景,具象地?出了山中和寺中所?到的景物,?言朴素自然。?尾?的深深感慨??了宦途失意的痛苦

(小提示:如果?想??《山石》相??句的上一句或者下一句是什?,可以在?面右上角的“???索”中?入?要??的?句,回??可?到??句的上句或下句。注意上半句和下半句?入?不要留有空格和?点符?!)

 

http://www.haoshici.com/Hanyu1628.html

 

 

【注解】: 1、?確:險峻不平。

                2、?:同“?”,落葉喬木。

                3、局束:拘束。 4、更:再。

 

【評析】: 詩題?《山石》,但?非詠山石,而是一篇詩體的山水游記。只是用詩的開頭二 字作題罷了。

 

詩人按時間順序,記?了游山寺之所遇,所見,所聞,所思。記?時由黃昏而深 夜至天明,層次分明,環環相?,前後照應,耐人尋味。前四句寫黃昏到寺之所見, 點出初夏景物;“僧言”四句,是寫僧人的熱情接待;

“夜深” 二句,寫山寺之夜的 ?幽,留宿的?意;“天明” 六句,寫凌晨辭去,一路所見所聞的晨景;

“人生” 四 句,寫對山中自然美,人情美的向往。“人生如此自可樂,豈必局促?人?” 是全文 主旨。 

 

全詩氣勢?勁,風格壯美,數?後人所稱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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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軾詩集

 

?魚歌

蘇軾

 

 

天寒水落魚在泥, 短鉤?水如耕犁。

渚蒲披折藻荇亂, 此意豈?遺鰍?。

偶然信手皆虛擊, 本不辭勞?万一。

一魚中刃百魚?, 暇蟹奔忙誤跳擲。

漁人養魚如養雛, ?竿冠笠???。

豈知白?鬧如雨, 攪水覓魚嗟已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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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坡八首

 

廢壘無人顧,頹垣滿蓬蒿。

誰能捐筋力,歲?不償勞。

獨有孤旅人,天窮無所逃。

端來拾瓦礫,歲旱土不膏。

崎嶇草棘中,欲刮一寸毛,?焉釋?嘆,我?何時高。

 

(二)耕種謀生的艱辛:

  此類以東坡八首的組詩?主。黃州東坡是在黃州東門之外,蘇軾?白居易的忠州東坡之名而稱之,?把「東坡」作?自己的別號。

 

在此組詩之前的小序說明東坡貶官黃州二年,生活越來越窮困,老友馬正卿?他請得廢營地四十畝,使他得以耕種謀生。然而這荒廢已久的營地荊棘叢生,瓦礫遍地,此刻又遇到大旱,要開墾這片荒地,恐非容易。

可想而見東坡必定累得筋疲力盡,此中艱辛不足?外人道也。在這種情況之下,文人只好寫詩憐惜自己一番,期待將來的收成能讓自己忘記現在的辛苦。

質樸的語言中說出心中的無奈:「端來拾瓦礫,歲旱土不膏。」「廢壘無人顧,頹垣滿蓬蒿。」「?然釋來嘆,我?何由高!」沒有把握是否收成,在這惡劣環境下?須自謀生計,人生至此,?是天道寧論?!

 

 

自昔有微泉,來從遠嶺背。

穿城過聚落,流惡壯蓬艾。

去?柯氏陂,十畝魚蝦會。

歲旱泉亦竭,枯萍?破塊。

昨夜南山雲,雨到一犁外。

泫然尋故瀆,知我理荒?。

泥芹有宿根,一寸嗟獨在。

雪芽何時動,春鳩行可膾。

 

(蜀人貴芹芽膾,雜鳩肉作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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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州安國寺記

 

作者:蘇軾 北宋

 

 

元?二年十二月,余自吳興守得罪,上不忍誅,以?黃州團練副使,使思過而自新焉。其明年二月,至黃。舍館粗定,衣食稍給,閉門?掃,收召魂魄,退伏思念,求所以自新之方,反觀從來?意動作,皆不中道,非獨今之所以得罪者也。欲新其一,恐失其二。觸類而求之,有不可勝悔者。於是,?然嘆曰:

「道不足以禦氣,性不足以勝習。不鋤其本,而耘其末,今雖改之,後必復作。?歸誠佛僧,求一洗之?」

得城南精舍曰安國寺,有茂林修竹,陂池亭?。

間一二日輒往,焚香默坐,深自省察,則物我相忘,身心皆空,求罪垢所從生而不可得。一念??,染?自落,表裏?然,無所附麗。私竊樂之。旦往而暮還者,五年於此矣。

 

寺僧曰繼連,?僧首七年,得賜衣。又七年,當賜號,欲謝去,其徒與父老相率留之。連笑曰:

「知足不辱,知止不殆。」卒謝去。余是以愧其人。

七年,余將有臨汝之行。連曰:

「寺未有記。」具石請記之。

余不得辭。寺立於?唐保大二年,始名護國,嘉祐八年,賜今名。

堂宇齋ト,連皆易新之,嚴麗深穩,悅可人意,至者忘歸。

歲正月,男女萬人會庭中,?食作樂,且祠瘟神,江淮舊俗也。四月六日,汝州團練副使眉山蘇軾記。

 

 

題解

本文係元?七年(1084),蘇軾改汝州安置?將離開黃州時,應安國寺僧首繼連之邀而作。

文章回顧了居黃期間的生活及思想變化,表明了蘇軾從一個有?的封建政治家,經過『烏台詩案』的嚴酷打擊後,佛老思想的滋長。這是?究蘇軾思想變化的重要資料。

安國寺在黃州城東南三裏,蘇軾貶黃州時常去寺中讀經思過。

 

賞析

本文是蘇東坡因烏台詩案被政敵迫害被貶到湖北黃州時所寫的一片抒情表意的文章。安國寺位於古城黃州城南長江邊上,距離江堤約一裏遠。其中『焚香默坐,深自省察,則物我相忘,身心皆空,求罪垢所從生而不可得。一念?淨,染?自落,表裏?然,無所附麗』、『知足不辱,知止不殆』?千古佳句。

文章言辭之中,對自己遭受政治上的打擊仍有不平之意,?隻含蓄淡淡寫出。蘇軾五年來其實?非一念?淨,?心『悔改』。但文章也豁達的闡明:世事的紛擾是無處不在的,心靈的淡定也隻能?自己來營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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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壁賦--蘇軾

 

前赤壁賦

 

 

壬戌之秋,七月?望,蘇子與客泛舟遊於赤壁之下。?風徐來,水波不興。?酒屬客,誦明月之詩,歌窈窕之章。少焉,月出於東山之上,徘徊於?牛之間。白露橫江,水光接天。縱一葦之所如,凌萬頃之茫然。浩浩乎如馮虛御風,而不知其所止;飄飄乎如遺世獨立,羽化而登仙。

 

於是?酒樂甚,?舷而歌之。歌曰:“桂棹兮蘭?,擊空明兮溯流光。渺渺兮於懷,望美人兮天一方。”客有吹洞蕭者,倚歌而和之,其聲嗚嗚然:如怨如慕,如泣如訴;餘音??,不?如縷;舞幽壑之潛蛟,泣孤舟之?婦。

 

蘇子?然,正襟危坐,而問客曰:“何?其然也?”

客曰:“月明星稀,烏鵲南飛,此非曹孟德之詩乎?西望夏口,東望武昌。山川相繆,鬱乎蒼蒼;此非孟德之困於周?者乎?方其破荊州,下江陵,順流而東也,??千里,旌旗蔽空,?酒臨江,橫?賦詩;固一世之雄也,而今安在哉?況吾與子,漁樵於江渚之上,侶魚蝦而友?鹿,駕一葉之扁舟,?匏樽以相屬;寄??與天地,渺滄海之一粟。哀吾生之須臾,羨長江之無窮;挾飛仙以?遊,抱明月而長終;知不可乎驟得,托遺響於悲風。”

 

蘇子曰:“客亦知夫水與月乎?逝者如斯,而未嘗往也;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蓋將自其變者而觀之,而天地曾不能一瞬;自其不變者而觀之,則物於我皆無盡也。而又何羨乎?

且夫天地之間,物各有主。苟非吾之所有,雖一毫而莫取。惟江上之?風,與山間之明月,耳得之而?聲,目遇之而成色。取之無禁,用之不竭。是造物者之無盡藏也,而吾與子之所共適。”

 

客喜而笑,洗盞更酌,肴核?盡,杯盤狼藉。相與枕藉乎舟中,不知東方之?白。

 

 

 

後赤壁賦

 

 

是歲十月之望,步自雪堂,將歸於臨?。二客從予過黃泥之□。霜露?降,木葉盡脫,人影在地,仰見明月,顧而樂之,行歌相答。已而嘆曰:“有客無酒,有酒無肴,月白風?,如此良夜何!”客曰:“今者薄暮,?網得魚,巨口細鱗, 釗縊山□□|。顧安所得酒乎?”歸而謀諸婦。

婦曰:“我有?酒,藏之久矣,以待子不時之需。”於是?酒與魚,復遊於赤壁之下。江流有聲,斷岸千尺;山高月小,水落石出。曾日月之幾何,而江山不可復識矣。予乃攝衣而上,履讒?岩,披蒙茸,踞虎豹,登?龍,攀棲?之危巢,俯馮夷之幽宮。蓋二客不能從焉。劃然長嘯,草木震動,山鳴谷應,風起水湧。予亦?然而悲,肅然而恐,凜乎其不可留也。反而登舟,放乎中流,聽其所止而休焉。時夜將半,四顧寂寥。適有孤鶴,橫江東來。翅如車輪,玄裳縞衣,?然長鳴,掠予舟而西也。

 

須臾客去,予亦就睡。夢一道士,羽衣??,過臨?之下,揖予而言曰:“赤壁之遊樂乎?”問其姓名,俯而不答。“嗚呼!噫?!我知之矣。□昔之夜,飛鳴而過我者,非子也邪?”道士顧笑,予亦驚寤。開戶視之,不見其處。

 

【注:“讒”應?“山”旁。】

 

http://www.epochtimes.com/b5/0/11/1/c2546.htm

 

 

 

 

前赤壁賦原文

 

壬戌之秋,七月?望,蘇子與客泛舟游於赤壁之下。?風徐來,水波不興。擧酒屬客, 誦明月之詩,歌窈窕之章。少焉,月出於東山之上,徘徊於?牛之間。白露?江,水光接天。縱一葦之所如,凌萬頃之茫然。浩浩乎如馮虛禦風,而不知其所止;飄飄乎如遺世獨立,羽化而登仙。

 

於是?酒樂甚,?舷而歌之。歌曰:“桂棹兮蘭?,擊空明兮溯流光。渺渺兮於懷,望美人兮天一方。”客有吹洞蕭者,倚歌而和之,其聲嗚嗚然:如怨如慕,如泣如訴;餘音??,不?如縷;舞幽壑之潛蛟,泣孤舟之?婦。

 

蘇子?然,正襟危坐,而問客曰:“何爲其然也?”客曰:“月明星稀,烏鵲南飛,此非曹孟德之詩乎?西望夏口,東望武昌。山川相繆,鬱乎蒼蒼;此非孟德之困於周?者乎? 方其破?州,下江陵,?流而東也,??千里,旌旗蔽空,?酒臨江,??賦詩;固一世之雄也,而今安在哉?況吾與子,漁樵於江渚之上,侶魚蝦而友?鹿,駕一葉之扁舟,擧匏樽以相屬;寄??與天地,渺滄海之一粟。哀吾生之須臾,羨長江之無窮;挾飛仙以?游,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托遺響於悲風。”

 

蘇子曰:“客亦知夫水與月乎?逝者如斯, 而未?往也;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蓋將自其變者而觀之,而天地曾不能一瞬;自其不變者而觀之,則物於我皆無盡也。而又何羨乎? 且夫天地之間,物各有主。苟非吾之所有,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風,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目遇之而成色。取之無禁,用之不竭。是造物者之無盡藏也,而吾與子之所共適。”

 

客喜而笑,洗盞更酌,?核?盡,杯盤狼藉。相與枕藉乎舟中,不知東方之?白。

 

 

 

後赤壁賦原文

 

是歲十月之望,步自雪堂,將歸於臨?。二客從予過?泥之坂。霜露?降,木葉盡?,人影在地,仰見明月,顧而樂之,行歌相答。已而歎曰:“有客無酒,有酒無?,月白風?,如此良夜何!”客曰:“今者薄暮,擧網得魚,巨口細鱗,狀如松江之?。顧安所得酒乎?”歸而謀諸婦。

 

婦曰:“我有?酒,藏之久矣,以待子不時之需。”於是?酒與魚,複游於赤壁之下。江流有聲,斷岸千尺;山高月小,水落石出。曾日月之幾何,而江山不可複識矣。予乃攝衣而上,履?岩,披蒙茸,踞虎豹,登?龍,攀棲?之危巢,俯馮夷之幽宮。蓋二客不能從焉。劃然長嘯,草木震動,山鳴穀應,風起水湧。予亦?然而悲,肅然而恐,?乎其不可留也。反而登舟,放乎中流,聽其所止而休焉。時夜將半,四顧寂寥。適有孤鶴,?江東來。翅如車輪,玄裳縞衣,?然長鳴,掠予舟而西也。

 

須臾客去,予亦就睡。夢一道士,羽衣??,過臨?之下,揖予而言曰:“赤壁之游樂乎?”問其姓名,俯而不答。“嗚呼!噫?!我知之矣。疇昔之夜,飛鳴而過我者,非子也邪?”道士顧笑,予亦驚寤。開戶視之,不見其處。

 

 

http://www.zwbk.org/zh-tw/Lemma_Show/94810.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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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379_19 《送柳淳》孟郊

 

 

?山臨黃河,下有長安道。

世上名利人,相逢不知老。

 

 

http://osmstar.com.ne.kr/dangsi/dl/ds37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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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孟郊詩二首

 

 

夜讀孟郊詩,細字如牛毛。

寒燈照昏花,佳處時一遭。

孤芳擢荒穢,苦語余詩騷。

水?石鑿鑿,湍激不受?。

初如食小魚,所得不償勞,

又似煮彭?越,竟日嚼空?。 <原文作 左? 右越>

要當?僧?,未足當韓豪。

人生如朝露,日夜火消膏。

何苦將兩耳,聽此寒蟲號。

不如且置之,?我玉色?。

 

 

我憎孟郊詩,復作孟郊語。

饑腸自鳴喚,空壁轉饑鼠。

詩從肺腑出,出輒愁肺腑。

有如黃河魚,出膏以自煮。

?愛銅?歌,鄙俚頗近古。

桃弓射鴨罷,獨速短蓑舞。

不憂踏船?,踏浪不踏土。

吳姬霜雪白,赤?浣白?。

嫁與踏浪兒,不識離別苦。

歌君江湖曲,感我長羈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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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

 

作者:蘇軾

 

 

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五?其一

 

黑雲?墨未遮山,白雨跳珠亂入船。

卷地風來忽吹散,望湖樓下水如天。

 

 

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五?其二

 

放生魚鱉逐人來,無主荷花到處開。

水枕能令山俯仰,風船解與月徘徊。

 

 

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五?其三

 

烏菱白?不論錢,亂系???綠盤。

忽憶嘗新會靈觀,滯留江海得加餐。

 

 

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五?其四

 

獻花遊女木蘭橈,細雨斜風濕翠翹。

無限芳洲生杜若,吳兒不識楚辭招。

 

 

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五?其五

 

未成小隱聊中隱,可得長閑勝暫閑。

我本無家更安往,故?無此好湖山。

 

 

 

 

水光??晴方好,山色空蒙雨亦奇

 

 

 

..........

 

 

如夢令

 

水垢何曾相受。

細看兩俱無有。

寄語?背人,盡日勞君揮?。

輕手。

輕手。

居士本來無垢。

 

 

蘇軾 如夢令

水垢

 

水垢何曾相受 細看兩俱無有

寄語?背人 盡日勞君揮?

輕手 輕手

居士本來無垢 自淨方能淨彼

我自汗流?氣

寄語?浴人 且共肉身遊?

但洗 但洗

俯?人間一切

 

 

一、人間有味是?歡

 

公元一○八五年年底,東坡居士來到了泗州(當時屬於淮南東路,州治臨淮,在今安徽);二十四日,?友人劉?叔同遊南山(據東坡《泗州南山監倉蕭淵東軒》詩自注:

「南山名都梁山,山出都梁香故也。」

案:山在?貽東南六十里,因有都梁香草而得名。又據《本草?蘭草》條引《荊州記》:

「都梁縣有山,山下有水,?淺,其中生蘭草,因名?都梁。」

山上有隋煬帝所建都梁宮)這一年已經只剩幾天了,六天前,自己已經來到泗州,特地到「雍熙塔」下沐浴;想起過去將近五年時間在黃州?寂的謫居生活,心中難免?然,還好皇帝總算是有心人:

「人才實難,不忍終棄!」

自己才得以調遷到汝州(河南臨汝)去,?是「皇恩浩蕩」。四月間離開了黃州,先暢遊廬山,再到江西筠州(高安)探望了弟弟子由一家人,手足重聚,極感安慰。然後,又特地到金陵去見已經罷相閒居八年的王安石,彼此唱酬?懷,也是一大樂事。

不想自己最喜歡的小兒子遯兒?在七月二十八日病死金陵,讓人「老淚如瀉水」;這孩子滿月時自己還寫了一首詩,對他有所期許:

 

「人皆養子望聰明,我被聰明誤一生;惟願孩兒愚且魯,無災無難到公卿。」

 

沒想到這孩子這?命薄,還不到一周歲就病死了!造化弄人,夫復何言!(東坡居士更萬萬不會想到自己十六年後也是在這個日期往生的。)

想著想著,想到自己本來直道而行,?硬是被羅織入罪,?起滔天詩禍,連累了許多朋友,自己更是垢穢滿身:「我身上?有?垢??」

看著替自己?背的人認?使勁的在?拭,突然覺得好笑;東坡居士又忍不住吟著:

 

「水垢何曾相受?細看兩俱無有,寄語?背人,盡日勞君揮?。輕手,輕手,居士本來無垢。」(如夢令)

 

?!雖然無垢,想到明天(十二月十九日)就是五十歲的生日了,就讓?背人替我把過去的晦氣全部?掉?!

 

生日過了,心情更是平靜,接受劉?叔的邀約來登這都梁山。這天早晨,天氣其實滿冷的,又是風又是雨的,但到了正午時分,放晴了!稀疏的楊柳枝條在雨後的雲煙中搖曳,顯得格外?媚;淮河的水看起來渾然汪洋,?的上游不就是?碧潔淨的洛水??主人笑意?然的端出還冒著熱氣浮著乳白色泡沫的香茶,加上一盤蓼芽蒿莖(案:《風土記》:「元旦以蔥、蒜、?、蓼、蒿、芥雜而食之,名五辛盤。取迎新之義。」)笑請?試,讓人眼中鼻中都滿溢著新春的新鮮與芬芳;雖然天氣寒冷,四周景物顯得稀疏?淡,但主人的?純,朋友的誠懇,?是多?令人感動?!世間還有什?事物比這些更能讓人細細品味的??東坡居士神?氣朗,五年來似乎沒有這?歡欣過,於是信手寫下了此刻的心境:

 

細雨斜風作曉寒,淡煙疏柳媚晴灘。入淮?洛漸漫漫。

雪沫乳花浮午盞,蓼茸蒿筍試春盤。人間有味是?歡。(浣溪沙)

 

 

...

 

 

 

如夢令 蘇?

 

爲向東坡傳語,人玉堂深處。

別後有誰來?

雪壓小橋無路。

歸去,歸去,江上一犁春雨。

 

 

蘇?詞作鑒賞

  這首《如夢令》,毛氏汲古閣本題作《有寄》,傅?本調下注雲:“寄黃州楊使君二首,公時翰苑。”當是元祐元年(1086)九月以後,元四年三月以前,蘇?京城官翰林學士期間所作。詞中抒寫懷念黃州之情,表現歸耕東城之意,是作者當時特定生活和心理狀態的?實反映及流露。

  首二句“爲向東坡傳語,人玉堂深處”,以明快的語言,交待他“玉堂(翰林院)深處”,向黃州東坡表達思念之情,引起下文。這兩句的語氣,十分親切。蘇?心目中,黃州東坡,?然是他的第二故?,所以思念之意才如此殷切。

  次二句“別後有誰來?雪壓小橋無路”,是“傳語”的內容,是蘇?對別後黃州東坡的冷?荒?景象的?想。先設一問以避免平直。有此一問,便曳生姿,?能引出下文。

“雪壓小橋無路”,仍承上句帶有問意,似乎是說:別後有沒有人來?是雪壓住了小橋,路不通??以景語曲折表達之,?富于形象性,委婉深曲。是與否之間,都表現了對別後黃州東坡的無限關心。

  末三句“歸去,歸去,江上一犁春雨”,緊承上意,亦是“傳語”的內容,表達歸耕東坡的意願。“歸去,歸去”,直抒胸臆,是願望,是決定,是決心。

“江上一犁春雨”,是說春雨喜降,?犁地春耕,補充要急于“歸去”的理由,說明“歸去”的打算。“一犁春雨”四字,使人自然地想起他所作《江城子》詞“昨夜東坡春雨足,烏鵲喜,報新晴”的意境。“一犁春雨”四個字更是“皆曲盡形容之妙”,妙就妙捕捉住了雨後春耕的特殊景象,情感輕快。

  作爲豪放派代表詞人,蘇?頗多氣勢磅?之作;但他一生中也有?多淡雅?秀的詞作,顯示了東坡創作風格的多樣性。這首《如夢令》便代表了蘇?創作?淡的一面,詞中不設奇險之語,?新淡雅而自然。

 

 

宋 - 蘇? - 如夢令

 

城上層樓疊?。

城下?淮古?。

?手揖吳雲,人與暮天俱遠。

魂斷。

魂斷。

後夜松江月滿。

 

 

宋 - 蘇? - 如夢令

 

手種堂前桃李。

無限綠陰?子。

簾外百舌兒,驚起五更春睡。

居士。

居士。

莫望小橋流水。

 

 

宋 - 蘇? - 如夢令

 

水垢何曾相受。

細看兩俱無有。

寄語?背人,盡日勞君揮?。

輕手。

輕手。

居士本來無垢。

 

 

宋 - 蘇? - 如夢令

 

爲向東坡傳語。

人在玉堂深處。

別後有誰來,雪壓小橋無路。

歸去。

歸去。

江上一犁春雨。

 

 

宋 - 蘇? - 如夢令

 

自淨方能淨彼。

我自汗流?氣。

寄語?浴人,且共肉身遊?。

但洗。

但洗。

俯爲人間一切。

 

 

如夢令

  唐莊宗制,名憶仙姿,嫌其名不雅,故改爲如夢令。蓋莊宗作此詞,卒章雲:“如夢如夢,和淚出門相送。”因取以爲名雲

 

水垢何曾相受。細看兩俱無有。寄語?背人,盡日勞君揮?。輕手,輕手,居士本來無垢。

  如夢令(同前)

 

自淨方能淨彼。我自汗流?氣。寄語?浴人,且共肉身遊?。但洗。但洗。俯爲人間一切。

  如夢令(有寄)

 

爲向東坡傳語。人在玉堂深處。別後有誰來,雪壓小橋無路。歸去。歸去。江上一犁春雨。

  如夢令(春思)

 

手種堂前桃李。無限綠陰?子。簾外百舌兒,驚起五更春睡。居士。居士。莫忘小橋流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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