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 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윤이상과 화가이응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천상병시인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고문을 당하였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서독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1967년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1월 26일에,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히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1960년대 후반은 북한이 사회주의적 산업화의 초기효과에 의해 경제발전 정도에서 대한민국보다 앞서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시기이며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해온 수출주도형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그 효과가 나타나기 전이다.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화획득을 위해 서독에 광부1963년 12월와 간호사1966년 10월를 파견하였고, 이들은 유학생들과 더불어 재유럽한인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국내정치상황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1971년 정권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헌법을 고쳐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을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2/3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 1967년 6.8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2/3 의석을 차지하는데 성공했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6.8 부정선거에 대해 대규모 규탄시위를 전개하자, 정부는 6.16일 기준 30개 대학과 148개 고등학교를 임시 휴업시키는 등 박정희정권의 장기집권을 둘러싼 분기점에 놓여 있었다.
- 이상은 위키페디아에서 발췌한 동백림사건의 개요이다.-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시인 천상병.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생존시 내내 고통에 시달린다.
일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선생은 최종심에서 10년으로 감형을 받고 복역중
1968년 감옥에서 자살을 결행한다. 이에 놀란 정부는 감옥안에서 작곡활동을 보장해
주는 등 유화적 태도를 보여 선생의 옥중 작품이 탄생된다.
1968-9년에 옥중에서 작곡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과 1968년작 혼성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 나비의 꿈 " 이다.
옥중에서 완성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은 먼저 집행유예로 석방된 부인 이수자여사를
통해 독일로 전달되 1969년 2월 23일 뉘렌베르그 오퍼에서 초연이 되고
그연주는 무려 31번의 커튼 콜을 받는다.
그리고 선생은 이틀뒤인 1969년 2월 25일, 세계 각국의 음악인과 예술인들이
선생의 석방을 위한 탄원서 제출에 굴복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고 독일로 추방당한다.
추방당한 선생은 1969년 독일 하노버 음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977년에서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으로 옮겨 교수로 후학들을 배출한다.
추방이후 1971년 독일국적을 선택한 선생은 죽을때까지 한국에 입국할수없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작품을 한국에서 연주를 금지 시켰다.
독일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자주 방문한다. 북한에서는 18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고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여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린다.
1994년 도쿄에서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하고 9월에는 서울,부산,광주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리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끝내 선생의 입국을 불허한다.
한국정부와 갈등에 건강이 악회된 선생은 결국 입원을 하고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첫댓글 올해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는 해이군요. 강석희씨와 백병동씨가 제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정보 알게되었습니다.
그렇내요. 세월이 참 빨리 흐름니다.
윤이상 선생 - 강석희 - 진은숙
묘한 인연 같습니다.
윤이상 선생께 배운 강석희 교수가 서울음대로 와 당시에
최 첨단의 작곡기법들을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어 우리의 젊은 작곡가들이
세계속에 흐름에 뒤처지지 않을수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