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나 깨나 다 임금님 은혜
三年銘鏤戒常存 삼년명루계상존
縱對黃花不對樽 종대황화불대준
宮醞特宣西省月 궁온특선서성월
此身醒醉摠君恩 차신성취총군은
세 해 동안 새긴 경계 가슴에 늘 간직해 왔으니
국화를 마주해도 술잔은 마주하지 않는다오
서성의 달빛 아래 어주(御酒)를 특별히 내리시니
이 몸 취하고 깨는 건 다 임금님 은혜라네
- 오도일(吳道一, 1645~1703),
『서파집(西坡集)』 권8「이 날 밤 입직하는 중에 특별히 하사하신
내온과 어선을 삼가 받고 느낌을 적다.
[是夜直中, 伏蒙特宣內醞御膳, 志感]」
해설
이 시는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문장가 오도일(吳道一)이 56세 때 지은 것으로,
그가 53세 때 겪은 사건으로 인해 3년 넘게 술을 끊은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금주(禁酒)의 장본(張本)이 된 사건은 숙종 23년(1697) 봄을 지나 4월이 접어들
도록 비가 내리지 않은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가뭄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 위해 숙종이 사직단(社稷壇)에 친히 거둥하게 되었는데 이때 오도일은
임금을 수행하여 전폐작주관(奠幣酌酒官)으로 술잔을 올리는 일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하필 그는 각질(脚疾)을 앓고 있었고 각질을 고치려고 다리에 뜸을 뜨다
생긴 상처까지 겹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술잔을 들고 계단을 간신히
오르며 잠시 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승지가 그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술잔을
엎어버렸고 술잔을 다시 올리느라 결국 제사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 일을
두고 장악원 정(掌樂院正) 유신일(兪信一)이 상소를 올려 그가 이때 술에 취해 있었
다며 제사에 불경한 죄를 물어 처벌하여야 한다고 탄핵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가 제사
때 취해 있었는지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하였는데 결국 당시 그의 주변에 있던 이들이
그가 취해 있지 않았음을 증언하면서 그를 파직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 일로 그에게 술을 경계할 것을 타이르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도일은 술을 즐기다 고질(痼疾)을 이루었는데도 너무나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애석할 만하다. 기억하건대, 옛날 술을 경계하는 시(詩)에,
聖君寵極龍頭選(성군총극용두선) 성군 은총 극진하여 문과 장원으로 뽑혔고
慈母恩深鶴髮垂(자모은심학발수) 어머니 은혜 깊은데 백발이 다 되시었네
君寵母恩俱未報(군총모은구미보) 성군 은총 어머니 은혜 모두 보답 못했는데
酒如成病悔何追(주여성병회하추) 술로 만일 병이 들면 뉘우친들 어이하랴
하였는데, 오도일이 만약 ‘성군 은총 보답 못하고 병이 들면 후회한들 어이하랴’는
구절을 두고 늘 깊이 유념한다면 어찌 매양 낭패를 초래할 리가 있겠는가?
『숙종실록(肅宗實錄) 23년 4월 28일』
숙종이 인용한 시는 송(宋)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연간에 장원
급제한 채제(蔡齊, 988~1039)라는 젊은이가 너무 이른 나이에 출세하여 주색
(酒色)에 빠져 공무를 폐하는 지경에 이르자 당시의 명사(名士)였던 가속(賈餗)이
그를 보러 갔다가 만나지 못해 경계의 뜻으로 지어 남긴 것이다. 이 시를 받고
채제는 크게 뉘우치고 술을 자제하며 종신토록 크게 취하는 일 없이 늘 경계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까지 올랐다고 한다. 오도일이 3년 넘게 술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정문일침(頂門一針)과도 같았던 숙종의 이러한 하교 때문이었으니
숙종 말고 누가 그의 금주(禁酒)를 풀어줄 수 있었겠는가. 3년 뒤 숙종이 내린 어주
(御酒)가 그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졌던 것은 바로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날 임금이 술을 하사하지 않았다면 오도일의 금주가 언제까지 이어졌을지
알 수 없다. 국화를 보면 도연명(陶淵明)이 생각나고 이어 국화꽃잎을 술잔에 띄워
근심을 잊었다는 그의 고사(故事)를 연상함과 동시에 술 생각에 입맛을 다시게 마련인데
이처럼 강한 유혹을 앞에 두고도 술잔을 대하지 않는다고 시에서 다부지게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도일은 이때 병조 판서로 금위대장(禁衛大將)과 어영청 제조(御營廳提調)를
겸대(兼帶)하고 있었는데 어영대장(御營大將)이 사정이 생겨 어영청 업무도 도맡아 하느라
내병조(內兵曹)에서 입직하고 있었다. 아마 임금은 그가 오랫동안 금주하고 있는 것과 입직
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안쓰럽게 여겼으리라. 이러한 은혜를 입고 감읍(感泣)하지 않을
신하가 어디 있겠는가.
숙종의 아들 영조가 하루는 희정당(熙政堂)에서 야대(夜對)를 열 때 신하들에게 어주를 하사한
일이 있었다. 이때 참찬관(參贊官) 윤득화(尹得和)는 술을 못 먹는다고 송구해하는데 시독관(侍讀官)
서명신(徐命臣)과 검토관(檢討官) 오수채(吳遂采)는 잘 먹지 못한다고 사양하면서도 석 잔을 마셨다.
이어 서명신이 오수채는 입번(入番)할 때마다 손에서 술잔이 떠나지 않는다고 아뢰자 영조가 오수채
에게 두 잔을 더 하사하라고 하니 오수채는 그대로 받아 먹으면서 서명신이 자신보다 더 잘 마신다고
아뢰었다. 곁에서 이 모양을 지켜보던 윤득화가 무엄하다 생각했는지 이들이 취담(醉談)을 늘어놓는
다며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나 영조는 아무런 하교도 내리지 않았다. 잠시 뒤 영조가 과음(過飮)과 관련해
전해 오는 이야기를 묻자 오수채가 자신의 부친의 문집에 실려 있는 시에 얽힌 일을 아뢰었다.
그 내용인즉슨 예전에 부친이 3년 넘게 술을 끊었었는데 자신이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대궐에 들어갔을
때 부친이 다시 취한 것을 보았는바, 부친의 문집에 있는 ‘차신성취총군은(此身醒醉摠君恩)’이라는 구절이
바로 그때 지은 시구라는 것이었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오수채는 오도일의 넷째 아들이다.
2019년 6월 19일 (수)
글쓴이 변구일
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번역팀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