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17 : 5차 침략 (1)
04.10.18
전쟁의 위험이 고조되는 가운데 앞서 몽골에 인질로 갔던 영녕공 준이 최항에게 서신을 보내왔다. 몽골에 들어간 지 10여년 만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의 내용의 최항에게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 지난해 가을 국왕이 직접 나와서 사신을 맞이하지 않았다고 황제(몽케칸)께서 진노하시어 군대를 보냈는데 나는 이를 저지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소. 황제께서는 나를 환국시켜 출륙할 수 있도록 주선하라고 말씀하셨소. 지금이라도 만일 국왕이 육지로 나와서 몽골의 군대를 맞는다면 곧 군사를 철수시키겠다고 합니다.
만일 국왕이 직접 나오지 못하게거든 태자나 그 동생인 안경곤 창을 내보내도 군사를 되돌리겠다고 합니다. 이것만 하게 되면 사직이 연장되고 만민이 안도할 것이며 영공(최항)께서도 또한 부귀영화를 오래도록 누릴 것이니 가장 좋은 상책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몽골의 군대가 철수하지 않으면 우리 가문을 멸족시켜도 좋소. <고려사절요> 17, 고종 40년 7월자
이 편지에서 중요한 사실은 영녕공 준이 몽골의 입장에 섰다는 점이다. 그는 몽케칸의 지시를 받고 고려를 항복시키려고 설득을 한 것이다. 영녕공 준은 처음엔 인질로 들어갔지만, 이 무렵 몽골 황실의 여자와 혼인까지 하는 등 우대를 받아 몽골 내에서도 정치적 위상이 대단했다.
어쩌면 영녕존 준은 진정 고려를 생각하여 그렇게 설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긴 전란 동안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그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영녕공 준의 편지를 받은 직후에, 앞서 사신으로 갔던 이현이 몽골군을 따라와서는 인편으로 최항에게 또 편지를 보내왔다.
- 내가 두 해 동안 몽골에 머물면서 이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니 듣던 것과 같이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몽골 황제의 요구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 왜 들어주지 않고 있습니까? 국가의 기업을 연장하고 싶거든 한 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게 하고, 태자나 안경공을 보내 몽골군을 맞이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사정을 자세히 말하고 빌면 군대를 돌릴 것이니 영공께서는 잘 생각하십시오.
이 편지는 앞서 영녕공 준의 글보다 한 술 더 뜬 것이다. 침략하는 몽골의 군대를 따라온 것 자체가 배반이었고 길잡이 역활까지 하면서 항복을 권유한 것이었다.
이 두 편지는 모두 공개되어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대부분의 의견은 몽골의 요구대로 최소한 태자나 안경공을 보내 몽골군을 맞이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최항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묵살했다.
"매년 조공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이전에 사신으로 갔던 자들이 3백 명이나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만약 태자나 안경공을 잡아 도성 밖에 이르러 항복을 요구하면 어찌할 것인가?"
이 말에 사람들은 최항의 의견이 옳다고 하여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여론이 최항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은 최항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사신으로 파견한 자가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 돌아온 점은 최항에게 뜻밖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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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의 5차 침략
1253년 4월, 북계병마사가 몽골군 30여 명이 침입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어서 7월 8일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북계병마사의 보고가 다시 들어왔다. 앞의 보고는 몽골군의 선발대가 들어온 것을 말하고, 뒤의 보고는 그 본대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몽골군의 5차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침공을 맡은 몽골군 사령관은 에구라는 자로, 칭기스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장남으로 몽케칸의 숙부가 되는 사이였다. 그는 4차 침략의 사령관인 아무칸과 고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망친 홍복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에구가 4차 침략의 사령관이었던 아무칸을 대동하였다는 것은, 이번 몽골의 침략이 4차 때보다 규모도 크고 보다 고위급 사령관이 담당했음을 말해준다. 침략의 강도가 더 거셀 것이라는 예상도 쉽게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도 이번 몽골의 침략은 그 개시 전부터 지금까지의 어느 침략때보다도 고려를 한층 더 긴장시키고 있었다. 몽골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정보는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기 3개월 전에 이미 접수되었다.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온 한 주민이 그 정보를 알려주었는데, 그에 의하면 몽골군은 북계와 동계 두 방향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였다.
즉, 몽케칸의 동생인 송주(몽골 원명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란 자가 1만의 병력으로 거느리고 동진국을 거쳐 동계 지방(함경도와 강원도 쪽)으로 쳐들어오고, 아무칸과 홍복원은 야굴의 지휘 아래 북계 지방(평안도 쪽)으로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북계병마사의 보고를 접한 후 최항 정권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고 5도 안찰사와 3도 순문사에게 명하여 각 지방민을 독촉해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산성입보와 해도입보라는 늘 해오던 전술이었다.
몽골군의 압록강 도강 보고를 받은 지 일주일 후에 몽골군은 벌써 대동강에 이르렀고, 곧 대동강 상류를 건너 화주(함경남도 영흥)로 향했다. 그리고 그 해 8월 초에는 몽골군과 개경 바로 북방의 금교 흥안(경기도 금천) 사이에서 최초로 접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몽골군의 선발대였다. 압록강을 넘은 지 한 달 만에 몽골군은 벌써 개경 북방까지 진격했던 것이다.
이 무렵 갑곶강(강화 해협)에서는 수전을 연습하기도 했다. 수전에 약한 몽골군이지만 강화도라고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다. 강화도의 최항 정권은 이전의 어느 침략때보다도 긴장하고 있었다.
몽골군 사령관 에구는 토산(평남 상원)에서 잠시 남진을 멈추고 몽케칸의 조서를 강화도에 전햇다. 조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짐은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을 안락하게 하고자 한다. 너희들이 짐의 명령을 거역하므로 황숙 에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조서의 명을 받들면 군대를 철수하겠지만 만약 거역하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
여기서 이번 침략이 몽케칸의 각별한 관심 속에 이루어졌으며, 침략이 간단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덧붙여 몽케칸은 다음과 같은 6사의 내용을 이행할 것을 고려 조정에 요구했다.
1. 인질을 보내라.
2. 국왕이 입조하라.
3. 호구를 조사하여 보고하라.
4. 역참을 설치하라.
5. 군대와 군량을 지원하라.
6. 다루가치를 설치하라.
1. 이미 종실인 영녕공 준을 보냈지만, 몽골에서는 국왕이나 태자의 입조를 요구하고 있어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있었다.
2. 국왕의 친조 문제는 최씨 정권의 안위와 관련되어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3. 호구조사는 몽골의 공물징수 근거를 마련하려는 속셈이었다.
4. 역참 설치는 유라시아에 걸친 광대한 정복 지역을 원할하게 통제하기 위한 교통과 통신의 수단이었다. 역참은 몽골이 정복한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5. 군대와 군량미 지원은 피정복지역을 다시 정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몽골의 상투적인 전략의 일환이었다.
6. 다루가치는 몽골의 1차 침략 이후 강화를 맺으면서 고려 북방에 일시적으로 주둔했지만 고려의 저항과 계속된 전쟁으로 사라지고 아직 주재하지 않고 있었다.
이상 여섯 가지 사항을 고려가 이행하게 되면, 그것은 몽골에 대한 완벽한 복속을 뜻했다. 허나, 이는 최씨 정권이 존속하는 한 도저히 관철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에구의 통첩을 받은 지 바로 다음날, 고려에서는 낭장 최동식에게 답장을 주어 에구의 주둔지인 토산(평안남도 상원)에 파견했다. 절박한 만큼 신속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답신은 특별한 내용이 없는 구태의연한 것이었다. 즉, 고려는 변함없이 상국의 신하로 복종을 다해왔으니 정성을 받아들이고 불쌍히 여겨주라는 막연한 호소에 불과했다.
에구는 답신을 들고 온 최동식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대칸께서는 고려 국왕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친조를 회피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내가 직접 알아 보려고 하니, 6일 이내로 국왕을 이곳으로 모셔 오라."
앞서 1252년 8월 이현에게 보냈던 고려 측 답서를 의심하여 문제삼은 것이다. 그 답서에서 국왕의 연로함을 들어 친조를 회피했었다.
최동식이 "양국의 군사가 교전중에 있는데 우리 임금께서 어떻게 오실 수 있겠소?" 란 말로 고종의 입조가 어려움을 표하자 에구는 "그럼 그대는 이곳에 어떻게 왔는가?"라고 되물었다. 최동식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열흘 후인 1253년 8월, 강화도로 되돌아간 최동식으로부터 에구의 말을 전해들은 고려 조정에서는 비상 재추(재상)회의가 긴급히 소집되었다.
에구가 강력히 요구한 고종의 출륙은 도저히 실행할 수 없었다. 실권자인 최항이 허락하지 않았고 고종 스스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재상들은 그 대안으로 태자나 그 동생인 안경공 창을 보내는 것을 논의했으나 다시 회피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1253년 9월 초, 대장군 고열이 최동식과 함께 에구의 군영으로 가 답서를 전했다.
- 소방(작은 나라)에서는 황제의 뜻을 어기지 못하여 승천부 백마산 아래에 성곽과 궁궐을 짓고 육지로 나오려 했으나 대국의 군대가 두려워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군이 국경을 넘어오니 백성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군사를 돌이켜 안심하게 하면 내년에는 국왕이 몸소 신하를 거느리고 나가서 천자의 명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국왕의 늙고 쇠약함은 한 두 명의 사신만 보내어 살펴도 충분히 알 것입니다. -
고려 측 답변의 핵심은 항상 그렇듯이 몽골군이 먼저 철수해야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것이었고, 반면 몽골 측에서는 자신들의 요구를 실행해야 군사를 철수하겠다고 하였다. 양측의 주장 모두 논리적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서 외교적인 문제에서는 쉽게 해결이 나지 않았다.
이 무렵, 1253년 8월 중순경에 몽골군 3천 명이 고주와 화주(함경남도 영흥)일대에 주둔했고, 그 선발대 3백 명은 벌써 광주(경기도)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에구는 고종의 출륙과 항복을 요구하면서 남진을 계속했다.
8월 말, 전주(전북)의 반석역에서 이주가 지휘하는 별초군이 3백 명의 몽골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9월 초에는 충주에서 그 지역 향리였던 최수가 협곡에 매복하고 있다가 몽골군을 격파하여 포로로 잡혀 있던 남녀 2백 명을 되찾아 왔다.
이러한 유격전의 승리는 선발대로 내려오는 몽골군을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그 지역 지방민에 의한 자발적인 항전의 결과였다. 반면, 중앙에서 파견한 지휘관들은 패전을 거듭하고 항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속 이어짐)
[고려]몽골의 침입-18 : 5차 침략 (2) 춘주성 비극과 충주성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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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골의 침입-15 : 고려의 후계자 다툼
[고려]몽골의 침입-14 : 4차 침략으로 전쟁 재개
[고려]몽골의 침입-13 : 1239-1247의 휴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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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골의 침입-9 : 몽골군의 3차 침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