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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7]
▣ 자료 소개
한말과 일제강점 이전 천도교 동향
편집실
1905년 12월 1일, 그동안 불리던 동학은 천도교로 이른바 대고천하하였다. 이로 인해 기존의 동학에 대한 사회인식은 천도교로 새롭게 변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늘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정적인 인식도 상당하였다. 그런 점에서 한말과 일제강점기 천도교 관련 자료를 볼 때에는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본지에서는 1908년부터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강점되기 전까지 『대한매일신보』(한글판)에 게제되었던 천도교 관련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본고는 『대한매일신보』(한글판)에서 ‘천도교’로 검색한 기사임을 밝혀둔다.(희암)
▣ 교인이 건축
천도교 중앙총무에서 청인 동순태의 집을 매삭에 2백 25환씩 작정하고 거접하였더니, 그 교중에 재정이 군색하여 두 달 세전을 주지 못하였더니, 동순태가 그 교인들을 내쫓은 고로 지금은 거접할 곳이 없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3일)
▣ 지방 정형
공주부에 설립한 천도교는 회원이 1백여 명이나 되더니, 23일에 문패를 떼어버리고 헤어졌다 하며(『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30일)
▣ 손씨의 계교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근일에 일진회가 무력한 때를 타서 권동진 씨로 참모를 삼아 각 지방에 있는 일진회원을 인도하여 천도교에 입교케 하여 재정을 거둘 차로 손씨와 권씨가 일간 평안도 등지로 향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6일)
▣ 교주 발정
천도교주 손병희 씨와 권동진 씨는 지방에 전도할 차로 재작일에 발전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9일)
▣ 회원 대로
단천군 일진회원 신대천 등이 저희들이 천거로 입회한 회원이 2,150여 명이 함께 퇴회하여 천도교로 투입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3일)
▣ 교회 합부
근일 내로 무슨 일인지 시천교와 천도교가 다시 합부한다는 말이 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5일)
▣ 천도교 입참
북도에서 온 사람의 전설을 들은즉 삼수 감산 문천 등지에 있는 일진회원들이 근일에 무슨 생각인지 천도교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는데, 만일 몇 달만 지내면 그곳 일진회원은 모두 없어지리라 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29일)
▣ 전도인 발정
천도교인 양한묵 씨가 전도 차로 일전에 의주 등지로 내려갔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3일)
▣ 남뢰 접견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현금 함경도 등지에서 유련하는데, 그곳 인민들이 손씨의 안면을 대하여 보고자 하여 오는 사람이 답지한지라. 손씨가 보기를 허락지 아니하므로 그 인민들이 엽전 두 냥씩 예납하고 손씨의 안면을 접견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7일)
▣ 천도교주 봉변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교를 전할 차로 권동진 씨와 함께 평안도 각군에 돌아다니다가 철산군에 이르러 주점에서 자더니, 천도교인이라 칭하는 사람이 와서 보고 말하되,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경비가 부족하니 돈 1천 환만 기부하라 하거늘, 손씨의 말이 “사세도 할 수 없고 청구하는 자리에 어찌 수를 정하여 달라느냐” 한즉 그 사람 말이 “네가 수십 년래에 전국 인민의 재산을 속여 먹은 것이 몇 백만 원이로되, 한 가지 사업도 한 것이 없고 주색으로만 탕비하다가 필경은 매국적 송병준과 동모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일뿐이라. 나라를 팔아 얻은 것도 적지 아니하거늘 사세가 할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고, 또 권씨를 꾸짖어 가로되 “그대는 무슨 의사로 저 놈과 동행하느냐. 바삐 다른 데로 가지 아니하면 그대도 비명횡사하리라” 하고, 주먹으로 땅을 두드리며 광경이 좋지 못하나 손권 양씨는 앉아서 동치 아니하였더니, 조금 있다가 문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며 수백 명이 주점을 에워싸고 매국적 손병희를 죽이라 하는지라. 손권 양씨가 어시호 공겁하여 뒷문을 열고 나가서 권씨는 뒷간에 숨고 손씨는 부엌에 숨었더니, 그 사람들이 부엌으로 들어가서 손씨를 찾아내어 난장으로 때려서 머리가 터지고 두 손이 상하여 피가 흐르는데, 손씨가 한 마디 애고 소리에 혼절하여 엎어지니, 그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헤어져 간지라. 그 이튿날 권씨가 손씨를 의주로 태워 가지고 가서 약을 구하여 치료하고 일전에 경의철도로 올라왔다는데, 한국에 우매한 인민이 손씨가 경천위지하고 호풍환우하는 재주가 있다 하여 남녀노소가 지성으로 재물을 모아 받치더니, 이제 몇 사람의 몽둥이를 제어치 못하였으니, 그 귀신같은 재주가 어디로 갔던고 하고 평론이 자자하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17일)
▣ 양씨 배도
철산군 차련관에 사는 이원옥과 김지학이가 본사에 기서하였으되, 본인 등이 을사년부터 천도교에 입참하여 다수한 전재를 낭비하고 관찰사나 군수를 얻어 할까 하여 기다리다가 경영하던 바가 귀어허다 함에 절분함을 참지 못하더니, 소위 대도주 손병희가 포덕할 차로 본군에 와서 두류하거늘, 본인 등이 가서 질문하기를 “49년 동안에 수렴하던 돈 몇 천만 환을 무엇에 썼느냐” 한즉 대답하기를 “대황제 폐하께서 13도 결호전 몇 천만 환을 춘추로 수봉하여 무엇에 쓰는 것을 그대들이 아느냐” 하니, 이같이 무엄무도한 자는 한 자리에 말도 못할 자인즉 지금부터는 천도교는 여영 배반하기로 결심하였노라 하였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4일)
▣ 교회 재판
일진회장 이용구 씨와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전일에 무슨 전재 상관이 있는지, 재작일에 평리원으로 공개재판하기를 청하였는데, 무슨 사고를 인하여 퇴정하였으니, 일진회 변호사는 이면우 씨요 천도교 변호사는 정명섭 씨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6월 3일)
▣ 손씨 낙과
재작일 평리원에서 일진회장 이용구 씨와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재정사건으로 재판하였는데, 손씨가 낙과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8월 4일)
▣ 손씨 행위
손병희 씨가 보문관 합자금 4천 원을 연조하고 교과서 5천 원어치를 인쇄한 후에 그 값을 금년 4월 안으로 갚기로 언약하였더니, 기한이 지나도록 갚지 아니하고 총대를 보내어 인쇄 값이 너무 비싸다고 하고, 지난 일요일에 주식 총회를 개하고 권동진 윤태열 양씨를 보내어 보문관 총무를 대하여 욕설이 대단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6월11일)
▣ 진정 싫어
이번 서도 ○○시에 평양군에서 천도교인 6,7천 명이 지영하는데, 순사가 일본 국기를 분급하며 들라 하는지라. 그 교인들이 말하되 “우리는 일본 기를 들기가 싫다” 한즉 순사가 위협으로 그 이유를 질문하여도 교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어찌하여 싫은지 알 수 없으나 진정으로 일본 기는 들기가 싫다” 하고 종시 들지 아니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9일)
▣ 교인 열심
안악군 문산면 이리 천도교인 김인전 조영준 제씨가 보창학교를 설립하고 청년을 교육하는데, 경비를 지불하기 곤란하므로 교원 60여 명이 단합하여 흥학보산계를 설립하고 매일 조석에 식구대로 쌀 한 숟가락씩 모아 매월 종에 팔아 경비를 쓰게 하고, 또 그 면 구학제 곗돈과 사계를 그 학교로 부속케 하였으므로 교육이 대한 흥왕하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14일)
▣ 빚진 돈 청장
천도교회에서 25만 한 빚을 지고 어려워 갚지 못함으로 곤란이 자심하더니, 그 교인들이 각각 수렵하여 그 빚을 몰수히 청장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14일)
▣ 5백석 보조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무슨 생각이 있는지 대한협회의 양옥 짖는 경비로 백미 5백 석을 보조하되, 매삭에 50석씩 보내기로 결정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14일)
▣ 교주의 지휘
근일에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무슨 긴급히 의논할 일이 있는지 각 지방에 있는 교구장을 일제하 올라오라고 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3일)
▣ 선생 주인 환영
천도교 해월 선생의 부인이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데, 교주 손병희 씨의 부인이 그곳에 가서 해월 선생의 부인을 방문하고 재작일에 입성하였는데, 해 교인 수백 명이 남문 밖 정거장에서 영접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5일)
▣ 천도교 재정 모집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그 교에 중앙총부를 새로 설시키로 각 지방 교원에게 통지하고 재정을 모집하는 중이라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8일)
▣ 두 교회 합동
시천교에서는 천도교와 다시 합할 경영으로 여러 번 운동하였는데, 상금까지 화합치 못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11일)
▣ 천도교 수렴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중앙총부를 건축하기 위하여 각 지방 교에게 통지하였다 함은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그 건축할 경비는 7만 원 가령인데, 빈한한 교인에게는 1원씩, 넉넉한 교인에게는 4원으로 50원까지 수렴하기로 결정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18일)
▣ 재차 낙과
최석창 씨와 한영호 씨가 천도교 서책 인쇄비를 당치 않게 청구하다가 공소원 재판서 낙과함은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근일에 또 대심원에 신소하였다가 또 낙과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10월 22일)
▣ 청첩 퇴송
송성건의소에서 천도교주 손병희 씨에게 찬성장 되기를 청하였더니, 손씨가 자기는 사회상 일에는 간섭함이 없음으로 못하겠다 하고 청첩을 도로 보내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 26일)
▣ 무슨 사건
천도교 총무 양한묵, 서기 최창현 오상준 제씨는 무슨 사건을 인함인지 거월 28일 경시청에 피착되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1일)
▣ 손씨 연회
천도교주 손병희 씨는 지난 1일에 자기 사저에서 연회를 배설하고 그 근처에 있는 동포를 청하여 대접을 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5일)
▣ 교육비 모집
천도교회에서는 경성 내에 있는 천도교 소학교 교사 양성하는 교육비로 평안북도에 있는 천도교인 6천여 명에게 의연금 4백 60환을 모집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14일)
▣ 박씨를 심문
경시청에 피착한 천도교원 박보현 씨는 재작일 상오 11시에 심문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21일)
▣ 손씨 보조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일전 인평방 사립 보통학교에 돈 20환을 보조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21일)
▣ 왜 수색 했노
경시청에서 무슨 사건을 인함인지 재작일 상오 10시에 한일 순사 4명을 파송하여 천도교 본부를 수색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29일)
▣ 손씨 발정
천도교주 손병희 씨는 일전에 그 교도 4명과 함께 그 교 전도한 정황을 시찰하기 위하여 경상도로 내려갔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30일)
▣ 왜 그리 캄캄히
평안남도 성천군 천도교 회원 중에 근래 혜성이 나타남을 보고 음력 정월에는 나라가 망한다 하여 자기의 집과 전답을 파는 자가 있는 고로 그곳 경찰서에서 순사를 보내어 효유하여 안돈케 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5일)
▣ 모두 의심이로군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양산 통도사에서 한양함은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의심이 있는지 모처에서 그 절 승려들의 행동을 지금 비밀히 조사하는 중이라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8일)
▣ 손씨 소식
천도교주 손병희 씨는 지난 17일에 통도사로부터 마산포로 향하여 갔다고 모처에 통신이 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20일)
▣ 손씨 소식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항자에 남도로 내려감은 다 아는 바어니와, 근일에 손씨가 마산포에서 한국 배를 타고 청국 안동현으로 갔다가 서간도로 갔다는 말이 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27일)
▣ 시골서 살 작정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통도사로 내려간 일은 다 아는 바어니와 인하여 시골에서 살 작정이라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10일)
▣ 또 재판 한다
손병희 씨가 보문사 사건으로 최수창 씨와 재판하여 낙과하고 다시 공소원에 신소하였더니, 최씨의 대리인은 최진 씨와 최석창 씨가 금일 공소원에서 재판을 시작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10일)
▣ 천도교 기도한다
재작일에 천도교 제1세 교조 수운신사의 수명한 날인 고로 그 교 중앙총부에서 크게 기도하는 예식을 하였는데, 교인 수백 명이 모였고 교사가 연설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12일)
▣ 상경 한다고
천도교주 손병희 씨는 지금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있는데, 본월 28일간에 상경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18일)
▣ 천도교도 상경
본일은 천도교의 천일기념일인 고로 교도가 수일 전부터 많이 상경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5일)
▣ 천도교도 입성
본월 8일은 천도교주 최제우 씨의 제삿날인 고로 각 지방 천도교인들이 그 제사에 참여할 차로 많이 입성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6일)
▣ 손씨의 생일 연회
작일은 천도교주 손병희 씨의 생일인 고로 지방에 교인들이 손씨의 집에 모여서 국기를 높이 달고 축하례를 행하였으며, 혜천관 요리 50교자를 설비하여 즐겁게 놀았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9일)
▣ 부인 전도
천도교에서는 부인 전도사 40인을 선정하여 각 지방에 파송하여 부녀에게 전도하기로 결정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4일)
▣ 위로연 설행
천도교에서는 재작일 오후 2시에 양한묵 씨를 영흥관으로 청하여 위로연을 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7일)
▣ 평양에 천도교
평양 순안 양군과 그 근처 지방에 있는 천도교도가 3천 명인데, 4,5일 전 평양에서 대회를 설행하여 그 교를 크게 발전하기로 결정하고 그곳 일인의 집 하나를 2천 5백 환에 사서 교당을 설립할 터이라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3일)
▣ 천도교 연구회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일요일마다 오후 8시에 연구회를 설행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4일)
▣ 교인 모집
천도교에서는 훈동 이교홍 씨의 집에 천도교 한성교구실을 정하고 교인을 모집하는 중이라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4일)
▣ 천도교 치성
천도교에서는 본월 24일부터 14일간 도통하는 치성을 설행한다 하여 교인들을 각 지방 사찰에 파송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7일)
▣ 청원서 퇴각
천도교에서는 기관 신문을 발간할 차로 인허를 청원하였더니, 작일에 청원서를 도로 퇴각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26일)
▣ 천도교의 큰 기도
경향 각처에 있는 천도교인 1백여 명은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본월 14일부터 6월 4일까지 49일 동안을 어육과 술과 담배를 모두 먹지 아니하고 큰 기도를 행한다는데, 이것은 교인들이 갑오 이후로 세상 일이 분주하여 성품 닦은 일을 행지 못한 고로, 이번에 이 기도를 설행하여 마음과 기운을 안전케 할 주의라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27일)
▣ 가산 집행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보문사 사건으로 최석창 씨와 재판하여 낙과함은 다 아는 바어니와, 작일 경시청에서 관리를 파송하여 손씨의 가산을 집행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27일)
▣ 집행 정지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보문사 사건으로 가산을 집행 당할 때에 돈 6천 5백여 환을 즉시 주선하여 갚는 고로 집행을 정지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28일)
▣ 천도교당 신건축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성화회당과 사무실로 쓰기 위하여 대안동에 있는 신소장의 집을 3천 환에 사서 장차 쓸 데 없는 것은 헐어버리고 사무실은 양제로 건축할 터인데, 예산은 1만 환 이상으로 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29일)
▣ 대표인 축출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보문사 사건으로 재판하여 낙과함은 다 아는 바어니와, 손씨의 대표인 2명이 재작 야에 보문사 주인 민건식 씨의 집에 와서 이번에 낙과한 것이 법외라 하며, 설왕설래 간에 무슨 행동이 있던지 순사가 곧 들어와서 그 대표인 2명을 쫓아내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6월 1일)
▣ 손씨 기소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보문사 재정의 관계로 문부를 청장키 위하여 해사 주인 민건식 씨를 지방재판소에 기소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6월 3일)
▣ 제국보를 사려고
제국신문을 천도교주 손병희 씨가 넘겨다가 발간할 차로 지금 교섭 중이라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6월 3일)
▣ 교단 건축
천도교에서 북부 안동 김진혁의 집을 샀다 함은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교당을 건축할 차로 재작일부터 역사를 시작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6월 9일)
▣ 손씨 청국 간다
천도교주 손병희 씨는 영적도라고 하는 그림을 가지고 청국 지방에 전도하기 위하여 불원간 떠나서 청국을 간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6월 18일)
▣ 양씨 발정
천도교 현기사장 양한묵 씨는 남도지방에 전도하기 위하여 일간에 능주군으로 내려간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6월 24일)
▣ 천도교인 수효
천도교에서 전국 내에 있는 천도교인을 조사하였다는데, 그 수효가 88만 5천 5백여 명에 달한지라. 금년 내로는 1백만 명 이상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교를 열심 전포하는 중이리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7일)
▣ 처소 분별
천도교에서 전도하기에 열심한다 함은 별항과 같거니와, 중부 사동에 있는 천도교 중앙총부는 강습소로 정하고 전동에 있는 현기사장 양한묵 씨의 집에는 천도교 구역 집으로 정하고 안동에 새로 건축하는 집은 중앙총부로 정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7일)
▣ 천도교월보 발간
천도교에서 월보를 발간할 차로 청원하여 재작일에 승인하였으므로 매월 15일마다 한 번씩 발간하기로 작정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0일)
▣ 기관보로 발행
대한일일신문을 정간함은 다 아는 바어니와, 전 대동일보 사장 이소종 씨가 계속하여 발간할 차로 지금 준비 중인데, 그 이허인즉 천도교 기관 신문으로 발행한다는 말이 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6일)
▣ 일일보 사원 조직
대한일일신문이 천도교 기관 신문으로 된다 함은 기보하였더니와, 그 신문사가 전 시사신문사 있던 처소로 본일에 옮겨간다는데, 금명간 발행하기 위하여 여러 임원들을 다시 조직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7일)
▣ 수전위원 파송
천도교에서는 북부 안동 등지에 교당을 건축하는데 재정이 부족하므로 각 지방 교인들에게 수전하기 위하여 위원 김정진 송운식 김영모 씨 등을 일신 파송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20일)
▣ 손씨 피서
천도교주 손병희 씨는 근일 동대문 밖 화계사에서 피서하고 한양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8월 2일)
▣ 천도교인 피착
천도교인 박모 등 3인은 무슨 사건을 인함인지 재작일에 경무총감부로 피착되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8월 3일)
▣ 지일기념
작일은 천도교의 지일기념일인 고로 각 지방에 있는 교인들이 기념식을 참여키 위하여 많이 상경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년 8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