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년 (虯年) 22世 1544년(중종39) - 1592년(선조 25)
상계 15世 판사공 득청(判事公 得淸) - 16世 예(藝)-17世 영석(永錫) -18세 희(禧)
- 19세 명령(命齡) - 20세 종회(從澮) - 21세 응룡(應龍)
자(字)는 덕수(德수), 호(號)는 풍림(楓林)이며 남강파 분파조 종회의 손자이다.
14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3년을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담략이 남보다 뛰어나 임진왜란을 당해 부산으로 달려가서 첨사(僉使) 정발(鄭撥)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 대비하기도 하였으며, 의병장으로서 창의(唱義) 의병을 모집하여 영해의 권전(權詮)등과 더불어 싸움터에 나아가 종일토록 혈전하다가 전투 중 순절(殉節)하였다. 사후 300년 후인 1883년(고종20) 진용교위(進勇校尉),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추증(追贈)되고 충신(忠臣)으로 정려(旌閭)되었다.
묘(墓) 영해현 동쪽 주등동 후록 곤향(坤向)
배(配) 대흥백씨(大興白氏) 부(父) 통정(通政) 미준(眉俊)
자(子) 효행(孝行) 정서(廷瑞), 참봉(參奉) 득서(得瑞)
효자 신규년에게 정려의 은전을 시행하는 일에 대해 재결할 것을 청하는 예조의 계
○ 예조가 아뢰기를,“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의 별단을 인하여, 의정부의 복계 안에 ‘영덕(盈德)의 고 의사(義士) 신규년(申虯年)의 절개가 곧고 충성스러우며 의로운 절개는 정려(旌閭)를 시행하는 데 합당하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는데, 윤허를 내렸습니다.그 별단을 가져다 살펴보니, ‘신규년은 곧 고려조 판예빈(判禮賓) 신득청(申得淸)의 후예입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천품에 근본하였으니, 14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여 몸이 여위도록 슬퍼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으며, 장성해서는 담력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강개(慷慨)한 뜻이 있었습니다. 마침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났는데 본래 군사나 치안의 책임이 없었으나 개연히 의병을 일으켜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처음에는 부산(釜山) 전투에 달려갔으나 패하였고, 또 병영(兵營)의 포위에 달려갔으나 이기지 못하고 낭패하여 집에 돌아와서는 처자와 이별을 고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영해(寧海)로 향했습니다. 이때 관동(關東)의 적이 남쪽으로 영해를 침범하자 신규년은 축산포 만호(丑山浦萬戶) 권전(權詮)과 함께 동쪽과 서쪽에서 나누어 공격하기로 약속을 하고 스스로 기병(奇兵)이 되어 위장산(葦長山) 아래에 매복을 한 채 적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었는데, 뜻밖에 적병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형세상 대적하지 못하고 무리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의 종 은구(銀九)가 말고삐를 당기며 울면서 호소하기를 「사태가 위급합니다. 죽어도 보탬이 없으니 살기를 도모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하니, 신규년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국난에 신하가 죽는 것은 분의(分義)로 보아 당연하다.」 하고, 주먹을 쥐고 칼날을 무릅쓰면서 몇 명의 적을 잡아 죽였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빠져서 굴복하지 않고 죽으니, 향인(鄕人)들이 의롭게 여기고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었습니다.저와 같이 절개가 곧고 충성스러운 의열(義烈)은 천년토록 늠름하여 살아있는 것 같은데, 후손이 미약하여 바닷가 먼 궁벽한 곳에서 지금 3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고을에서 올린 보고와 유생들의 장계는 두루마리가 쌓여 책을 이루었으나, 아직도 충성을 표창하는 은전이 없어 울적한 의논이 아직 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몰래 가서 실상을 가려내고 고을에 들어가 현지(縣誌)를 소급해 살펴보니, 본말(本末)이 소상하게 실려 있어 공변된 의논에 의거할 만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이미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우며 실적(實績)이 현저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암행어사의 단자에 널리 채록되었고 또한 묘당의 복계에서 포상하기를 청했으니, 정려의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아마도 풍속을 세우는 정사에 합당할 듯하지만 은전에 관계된 일이어서 본조에서 감히 멋대로 할 수 없으니, 재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회계에 의거하여 시행하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