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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 延安宋氏族譜의 序文 및 跋文
延 安 宋 氏 大 宗 會
목 차
1. 延安宋氏族譜 - 甲辰譜(1784년)序文 및 書原叙後
2. 延安宋氏世譜 - 丁卯譜(1807년)序文 및 跋文
3. 延安宋氏世譜 - 庚戌譜(1850년)序文 및 跋文
4. 延安宋氏族譜 - 庚戌譜(1910년)序文 및 跋文
5. 延安宋氏族譜 - 戊寅譜(1938년)序文
6. 延安宋氏派譜 - 1965년
7. 延安宋氏族譜 - 丁卯譜(1987년)序文
延安宋氏貫鄕沿革
延安은 本高句麗時에 爲冬音忽이요 音一作彡一云鼓塩城新羅時에 改海皐郡하고 高麗初에 稱塩州하고 成宗이 置防禦使하고 顯宗初에 廢防禦使하여 屬海州타가 後置監務하고 高宗이 以禦丹兵有功으로 陞永膺縣令하고 又以縣人車松祐有衛社功으로 陞知復州事하고 元宗이 又以李分禧有衛社功으로 盖碩州하고 忠烈王이 又陞溫州牧이러니 忠宣王이 汰諸牧하여 降爲府改今名하고 李朝 太宗十三年癸巳에 例爲都護府하니 東至白川郡界가 三十三里요 西至平山府界가 三十一里요 南至海岸이 二十九里요 北至平山府界가 三十三里요 東距京都가 二百八十八里라 別號는 연주오원이요 園林淸州라
연안송씨관향연혁(延安宋氏貫鄕沿革)
연안(延安)은 원래 고구려(高句麗) 시대에 동음홀(冬音忽)이라 하였으니 음(音)자를 삼(彡)자라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염성(鼓塩城)이라고도 하였다。신라(新羅)시대에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치었고, 고려(高麗)초에는 염주(塩州)라고 호칭하였고, 성종(成宗)이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였고 현종(顯宗)초에 방어사(防禦使)를 폐지하고 해주(海州)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설치하였고, 고종(高宗)이 글안병(契丹兵)방어에 공적이 있다하여 영응현령(永膺縣令)으로 승급하였고 또 고을사람 차송우(車松祐)가 사직을 호위한 공이 있다하여 지부주사(知復州事)로 승급하고, 원종(元宗)이 또 이분희(李分禧)가 사직을 호위한 공이 있다하여 석주(碩州)로 승급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이 또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급하였는데 충선왕(忠宣王)이 여러 목(牧)을 추려 가릴 때에 부(府)에서 강등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고 조선(朝鮮) 태종(太宗) 十三(십삼)년 계사(癸巳)에 전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가 되니 동으로 백천(白川)군계까지 三十三(삼십삼)리요, 서쪽으로 평산(平山)부계까지 三十一(삼십일)리요,남쪽으로 바다까지 二十九(이십구)리요, 북쪽으로 평산부(平山府)까지는 三十三(삼십삼)리요, 동쪽으로 경도(京都:개성)까지는 이백팔십팔(이백팔십팔)리라。별도의 호칭은 연주오원(延州五原)이요, 원림청주(園林淸州)라 한다。
同姓各貫(동성각관)
礪山(여산) 恩津(은진) 鎭川(진천) 新平(신평) 洪州(홍주) 瑞山(서산) 冶城(야성) 延日(연일) 安邑(안읍) 仁義(인의) 陽川(양천) 楊州(양주) 忠州(충주) 淸州(청주) 聞慶(문경) 南陽(남양) 竹山(죽산)
延 安 宋 氏 族 譜
甲辰譜
甲辰年 : 1784년
延安宋氏族譜(갑진년:1784년)
延安宋氏族譜序
海皐之宋古華閥也邑士宋奎奭持其叔綎之譜系序來請弁卷之文謹按宋系延安而在勝國時有諱卿者平紅巾功封延安君此其鼻祖矣仍世婢嫣中分爲南北派南卽湖嶺諸宋北卽畿海諸宋也雲仍後微兵燹間經系牒泯無述者宋綎甫用是慨然與其族侄奎采詳採遠近諸宗之系博考傳記可據之蹟成出一部合族完書千枝之分可會其同根萬派之別可達其同源矣苟匪深明敦宗之訓能闡萃族之誼烏能及此哉余用深嘉而爲之辭云爾
歲乙巳孟春上澣日 月浪倅 李集星 序
연안송씨 족보서
해고(海皐:신라때 연안의 지명)의 송씨(宋氏)는 옛날부터 화려한 문벌이다. 고을선비인 송규석(宋奎奭)이 그의 숙부 정(綎)이 역은 족보(族譜:系譜)를 가지고 와서 서문을 청하거늘 삼가 살펴보니 송씨는 연안으로 관향을 하고 고려(高麗:勝國)때에 휘(諱) 경(卿)이 홍건적을 토벌한 공훈으로 연안군(延安君)에 봉하니 이분이 시조가 되시고, 이에 세대를 이어 왔는데 중간에 남북파(南北派)로 나누어지니 남파는 즉 호남 영남의 모든 송씨요 북파는 경기도와 황해도의 모든 송씨이다. 자손은 미약하고 전쟁의 병화를 여러 번 겪으면서 가첩은 민몰되고 계술하지 못하였다. 송정(宋綎) 이를 개탄하며 족질(族姪) 규채(奎采)와 더불어 원근 여러 종족의 가계를 자세하게 캐어내고 전해오는 기록과 근거할 만한 행적을 고종하며 일족을 합하며 한 부의 책을 완성하니, 일천 가지로 나누어진 것이 한 뿌리에 모이고, 일만 물결의 갈대가 그 근원이 같아졌네 진실로 종족을 널리 모으는 정의가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하였으리요 내가 깊이 아름답게 여겨 글을 짓는다.
세을사정월상순 일(歲乙巳孟春上澣 日)에
월랑군수(月浪郡守) 이집성(李集星) 서(序)
書原叙後
夫譜者人家秉彛之始立綱之漸故凡得姓爲氏者各有修譜傳後實萬世明本無疆之敎也嗚呼惟我宋氏粤在勝國時必爲茂族而不肖之十五世祖諱卿事蹟昭著於恭愍朝以擊破紅賊功封爲延安府院君此時卽元順帝至正乙巳也是生諱勛官至吏儀判書是生二男長諱光彦官至大司成爲原州牧時戰亡於紅賊其後褒贈之次諱雲龍官至中郞將其後裔各在南北以府院君爲鼻祖而只傳家乘焉其餘舊系文跡累經兵燹泯無可述者盖無譜傳而然也已去壬辰年間長水宗人延禧慨恨于斯始發修譜之義而家乘外別無準信之顯跡故余使族侄奎采涉海踰嶺博採遠近諸宗之世系及可考之舊跡則或有昭穆之異同全無取信金石之蹟而但麗史列卷中始祖公及大司成公事蹟益著於傳家之系牒雖切壽傳之志年來歉荒荐臻各處窮族出物不齊中止矣往年春龍仁心賢歷訪叙宗使激屛寢之議以至鋟榟之境可以曉一源之派分亦以講百世之氏族而追先志於今日詔後昆於來世寧有骨肉無統之恨而且無塗人相視之歎是乃吾宗無譜而有譜之效耶信以傳信疑以傳疑古聖之訓而或有固守己意不樂合譜以延爲本得無愧於後世乎貫延之事跡稽古傳記只著於麗史而己且貫鄕山前派以諱興爲系首而獨立不從亦未知得宜也噫東方諸宋必也同根枝分而以余管見未達其本焉乃取礪良德恩宋氏之譜序沈潛考閱而亦未有所擧也於是忘其固陋窃取子程子明譜系收宗族之明訓及蘇老泉觀于譜者激孝悌之格說敢附己意以叙營譜本事之始將勉講族敦穆之誼也云爾
書原叙後(서원서후)
무릇 족보는 사람의 집안에 법도를 세우는 시작이요 강상을 세우는 차례이므로 대개 성씨를 얻으면 각각 족보를 만들어 후세에 전하니 실제로 만세에 근본을 밝히는 무궁한 교훈이다. 탄식하노니 우리 송씨는 옛날 고려(高麗:勝國)때에 반드시 번성한 일족이었다. 불초의 십오대조 휘(諱)경(卿)의 사적은 공민왕(恭愍王)조에 소명하게 나타난다. 홍건적을 격파한 공훈으로 연안부원군에 봉하여 지니 이때는 즉 원나라 순제(順帝)지정을 을사(乙巳:1365년)년이다. 아들 휘(諱)훈(勛)은 벼슬이 이의판서요. 이의 두 아들에 휘(諱)광언(光彦)은 벼슬이 대사성으로 원주목사시에 홍건적을 토벌하다 졸하였고 뒤에 표창과 증직이 있었으며, 둘째 휘(諱)운룡(雲龍)은 벼슬이 중랑장이다. 그 후손이 남북으로 각각 흩어졌으나 부원군(府院君)을 시조로 하며 다만 가승(家乘)만 전해왔고, 나머지는 옛날 세계를 기록한 문적은 여러 번 병화(병선:兵燹)를 겪으면서 민몰되어 기록이 없어 전해오는 족보가 없었다. 이미 지나간 임진년 사이에 장수(長水) 종인 연희(延禧)가 이에 개탄하고 한탄하며 처음으로 수보할 것을 발의하였으나 가승(家乘)외에 별도로 기준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자취가 없는 고로, 내가 족질(族姪) 규채(奎采)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고 재를 넘어서 널리 원근의 종족세계와 감히 고증할만한 자취를 채집하니 혹은 소목(昭穆)이 다르고 혹은 같으며 완전히 믿을 만한 금석의 유적도 없었다. 다만 고려사 여러 권 가운데 시조공(始祖公)과 대사성공의 사적은 집에 전해오는 가첩보다 더욱 잘 나타났다. 비록 오래 전하려는 뜻은 간절하나 해마나 흉년이 거듭 들어 각처의 일족이 출물(出物:자금)을 같이 할 수 없어 중지하였다. 지난 봄에 용인(龍仁)의 심현(心賢)이가 종족을 차례로 순방하여 병풍속에 잠자는 의논을 격려하여 인쇄할 계제에 이르러, 가히 한 근원의 분파를 깨우치고 또한 백세에 씨족을 강의하며 선조의 뜻을 오늘에 추모하고 후손을 백세에 가르치게 되니 어찌 골육(骨肉)의 계통이 없어지는 한탄이 있겠으며 또한 길거리 사람들과 같이 서로 친하는 탄식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은 우리 종족이 족보가 없어도 족보가 있는 것과 같은 효험이 있으리라. 믿음(信)은 믿음으로 전하는 의심(疑)은 의심으로 전한다는 말이 있으니 혹, 자기의 뜻을 고수하며 합보(合譜)를 꺼려 하나, 연안으로 관향을 하면 후세에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연안으로 관향을 하는 사적은 옛날 전해오는 기록을 상고하였고 고려사에도 나타난 것이거늘, 또한 산전으로 관향을 하는 파에서 휘(諱)흥(興)을 시조로 하여 따로 독립하여 따르지 아니하니 올바른 일인지 모르겠다. 탄식하노니 우리 동방에 송씨(宋氏)는 반드시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이다. 나의 작은 지식으로는 그 근본에 통달하지 못하여 이에 여량(礪良)과 덕은(德恩) 송씨(宋氏)의 족보서문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열람하여도 열거할만한 것이 없었다. 이에 고루함을 잊고 정자(程子)가 족보에 계통을 밝히고 종족을 수단한 훈계와 소로천(蘇老泉)의 족보에 효도와 공경을 격려하는 말을 취하여 감히 나의 뜻을 부처 말하노니 족보경영을 시작하고 종족간에 화목하며 정의가 있기를 힘쓸지어다.
吾宋之譜成半千年來肇擧也經營十有餘載而至於系系繩繩之世次恐有承訛襲誤之追悔多取萬姓之譜又稽百源之流沈潛翫索則系次或上或下混錯無常乃採國史之顯蹟一依家乘之昭穆合成一秩但大司成公之弟中郞將後裔中延安蘇皐派及安東晩雲派始堅修譜之約而末弛登榟之議者獨以璟字爲鼻祖然而全沒考證之事蹟只守自家之私系不從於今日之譜是未達一間也何者惟我元祖諱卿字與璟字雖有上平聲之異必混於音相似之致而携貳角立甚可惜哉其派中惟一校檢之裔舍疑取信願從同譜其有慮後之知見乎噫門衰族鮮之中僅有子孫之綿綿久寂家聲之爀爀抑又思之有屈有伸天道之常或以忠烈之先蔭其有發榮之日乎黃河萬派猶有一會之時况於人之世間豈無一譜之成哉源遙派分流作百川今此合譜便同水東流而歸海庶幾有補於不忘本收宗族之誼也歟
崇禎紀元後三乙巳上元 後孫 綎 謹跋
우리 송씨(宋氏)가 족보를 성책한 것은 오백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경영을 한지 십여 년이 되었으나 세계(世系)를 차례로 이을 때 잘못이어 후회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많은 성씨들의 족보도 취하여보고 또 많은 근원의 흐름을 상고하여 깊은 생각하고 찾아보았으나 차례에 혹 상하(上下)가 바뀌어 떳떳하지 못한 지라 이에 국사에 나타난 것을 채집하고 한결같이 가승(家乘)의 소목(昭穆)을 의거하여 한질의 족보를 성책하였으나 다만 대사성공(大司成公)의 동생 중랑장(中郞將)후예가 운데 연안의 소고(蘇皐)파와 안동의 만운(晩雲)파에서 처음에는 수보(修譜)의 약속을 견고히 하였으나 등재할 것을 늦추고 홀로 경(璟)자로 시조의 휘를 하였다. 그러나 사적을 고증한 일은 없고, 다만 자기집안의 사사로이 전하는 것을 고수하여 오늘의 족보에 따르지 아니하고 함께 아니하니 이 무슨 일인고, 오직 우리 시조의 휘(諱)경(卿)이 경(璟)자와 비록 높은 음과 낮은 음의 차이가 있으나 음성이 서로 같은 데서 혼돈하여 서로 주장하니 애석하기만 하다. 그 파 가운데 교검(校檢)의 후예 한사람이 의심스러운 것은 버리고 믿을 만한 것을 취하여 함께 족보하기를 원한다하니 후손을 생각하는 지혜가 있도다. 탄식하노니 문중이 쇠미하고 일족이 적은 가운데 겨우 자손이 면면히 이어오나 혁혁한 가문의 명성은 오랫동안 적막하였도다. 또한 생각하여 보면 굴신(屈伸)은 천도(天道) 순환하는 이치이니, 혹 충렬(忠烈)의 선조 음덕으로 영화가 올 날이 있으리라. 황하(黃河)가 만파이나 오히려 한곳에 모일 때가 있으니 하물며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 어찌 함께 하나의 족보를 성책하지 아니하겠나 근원이 먼 물줄기 갈라져 일백(一百)의 시내를 이루듯 지금 합보를 하는 것은 물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종족이 근본을 잊지 아니하고 정의를 함께 할 것이니라
숭정기원 후삼을사상원(崇禎紀元後三乙巳<1785년:정조 9년 정월 15일>上元) 후손(後孫) 정(綎) 삼가 기록함.
夫庶物本乎天惟人本乎祖祖者盖生人之始也而能尊祖敬宗以親九族者鮮焉世遠派分瞢然不相知則族譜之作烏可闕乎惟我宋氏系出延安而自元祖以至大司成公三世樹勳殉節事蹟昭載於麗史而八我 朝簪纓間出雲仍星散其麗不多亘古以來未修譜牒故或有緦功之相視如路人而袒兌之內亦有未職面者亶由後嗣蒙蒙莫知其源派而然也族父諱綎有慨于斯參考國乘與萬譜累年積功彙爲一帙噫譜一啓而昭穆井井昭晣如指諸掌咸知其所自出肅然起敬怡然思睦疏疎親薄者厚此寔吾門之大幸也然則族父之縸譜匪直倡和睦於私門實是補風化於淑世豈不韙歟
同年月 後孫 奎奭 謹跋
무릇 만물을 하늘을 근본하고 사람은 조상을 근본으로 하니 조상은 사람이 태어나는 시작이나 능히 조상을 존경하고, 종족을 공경히 대하여 구족(九族)을 친하게 하는 사람이 드물도다. 세대가 멀어지고 파가 나누어져 장님같이 서로 모르니 족보를 제작하는 일을 어찌 가히 빠뜨리리요 우리 송씨(宋氏)는 연안을 관향으로 하여 원조(元朝)로부터 대사성공(大司成公)에 이르기까지 삼대가 공훈을 세우고 순정하신 사적이 고려사(高慮史)에 소명하게 등재되었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벼슬이 간간이 이어왔으나, 자손이 별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수효가 많지 않았으며, 예부터 족보와 가첩을 딱지 아니하였는 고로 혹 시마복(緦麻服)과 소공(小功) 대공(大功)이 있어도 길거리 사람과 같이 하고 유복(有服<단태:袒兌>)내에도 또한 모르는 사람이 있으니 진실로 후사가 희미하여 그 근원을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재종숙(再從叔<족부:族父>) 휘(諱)정(綎)께서 이것을 개탄하시고, 국사(國史)와 가승(家乘)과 많은 족보를 참고하여 여러 해 공로를 쌓아 한 질의 책을 만드시었다. 탄식하노니 족보를 한번 펼쳐보면 소목(昭穆)이 정정하게 밝아서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도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소자출(所自出)을 알고 엄숙하게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즐겁게 화목할 것을 생각하니 소원한 우리 문중에 큰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재종숙부가 족보를 편찬하신 일은 우리 사사로운 문중을 화목하게 한 것뿐이 아니고 실지로 말세 풍화교육에 도움이 있으니 어찌 올바른 일이 아니리요.
같은 해 같은 달 후손 규석 삼가 발함
盖譜者昭姓合族也程子曰收宗族厚風俗使人不忘本惟是明譜系朱子曰管攝天下人心亦莫如修譜信乎氏族之不可無者譜也惟我宋氏顯於勝國而及我 聖朝官宰繼承矣降及孱孫衰微不振亦散西東不傳家譜莫知源派豈不寒心哉噫以一人而分爲兄弟以兄弟而分爲萬派乃至於塗人則敦睦之義莫若譜系修也何幸月浪宗丈綎氏深恨譜牒之不傳博究源派剞劂成譜宗氏之功豈不美哉余以嶺右賤宗不勝興感敢叙敬宗親族之萬一云爾
後孫 昌殷 謹跋
대개 족보는 성씨를 소명하게 하고 일족을 한곳에 모은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하시기를 종족을 수단하여 풍속을 두터이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하게 하는 것은 오직 족보의 세대를 밝히는 것이라 하였고 주자(朱子)가 말하시기를 천하의 인심을 지배(관섭<管攝>)하는 것은 또한 족보를 수단하는 것과 같음이 없다하니 진실로 씨족에 없어서 안될 것은 족보다. 우리 송씨(宋氏)가 고려(高麗:勝國)에 드러났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벼슬을 계승하였으나, 세대가 내려옴에 자손이 쇠미하여 명성을 떨치지 못하고 또한 동서로 흩어져서 집안에 족보를 전하여 오지 못하여 근원과 파를 알지 못하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리요. 탄식하노니 한사람이 나누어져 형제가 되고 형제가 나누어져 만파가 되어 마침내는 길거리 사람이 되니, 종족을 화목하게 하는 것은 족보를 딱는 일만한 것이 없도다. 다행하게도 월랑의 종장이신 정(綎)께서 족보와 가첩이 전하여 오는 것이 없음을 깊이 탄식하시고 근원과 파를 깊이 연구하고 인쇄(印刷<기궐:剞劂>)하여 족보를 완성하니 종씨의 공적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요. 내가 영남의 천한 종족으로 흥감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종친을 존경하는 친족의 뜻을 만분의 일이나마 기록합니다.
후손 창은 삼가 발을 지음
後孫奎采謹讚曰分流百川同源一脉粤我元祖系出勝國嵬勳勁節昭汗竹帛祖孫輸忠連代褒爵雲仍後微星散南北理有肖長何歎休慽世遠親疏無統骨肉緦功袒兌路人視若族父有慨努營譜作參考傳記窮搜舊蹟拈抄準信釐正昭穆合成一部湖嶺畿族固守已見有漏間或收宗明本起敬倡睦惟嘉昌殷始終同力若俟繼修庶有補益
후손 규채(奎采)가 삼가 칭찬하며 말합니다. 나누어 흐르는 일백의 시냇물은 같은 근원의 맥락이다. 우리 원조(元祖)께서 고려에 태어나시어 큰 공훈과 곧은 절의가 역사(歷史<죽백:竹帛>)에 소명하게 등재되었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충성을 다하여 포상과 벼슬을 대대로 이었으나, 후손이 미약하여 남북에 별처럼 흩어지니 쇠하고 흥하는(초장:肖長) 천리가 있으나 어찌 탄식하며 슬퍼하지 아니하리요. 세대는 멀어지고 친함은 성글어져서 골육(骨肉)을 통솔할 수 없어 시마복과 소공과 대공과 유복내의 사람도 길거리 사람과 같이 보니 재종숙(再從叔<족부:族父)께서 개탄하며 족보 간행에 노력을 다하여, 전해오는 기록을 참고하고 옛 자취를 찾아서 믿을만하고 기준을 할만한 것은 기록하여 한 부의 책을 이루었다. 호남과 영남의 몇몇 일족이 자기 것을 고수하여 수락된 것이 있으나 간혹 종족을 수단하고 근본을 밝히는 일을 공경하고 화목하게 하였고 오직 창은(昌殷)은 시종 함께 노력하고, 고생하며 수단을 계속하여 많은 도움이 있었으니 아름답게 생각한다.
延安宋氏世譜序
丁卯譜
丁卯年 : 1807년
延安宋氏世譜序(丙寅譜:1806년)
余嘗觀國之圖籍必明然後可知戶口之繁滋也綱紀不紊然後可正上下之名分也不但一國如是推之於一家亦然國之君上譬則家之祖宗也國之臣庶譬則家之子孫也是故推吾事親之孝而可以輸忠於君矣移吾幹家之業而可以著勳於國矣世譜之刊行果不有關於世敎歟今延安章甫宋喆命安東章甫宋興濂宋思近甫袖示其舊譜一秩求余庸識余盥手披覽大柢延宋之源出自礪良而以鼻祖封於延安因以貫鄕其後數三世簪纓相續矣至于五世有伯仲季三賢長曰保殷成均進士次曰嗣殷官至大司諫次曰守殷官至承旨噫上舍而以武功名於世以孝行拔乎萃有曰仁剛而爲熙川守其後三世有昌原府使黑龍之歲八守延城竟成嵬勳以至香火于顯忠祠而鰲城李文忠公贊大捷碑曰延安豪傑宋德潤云其從弟延昌君德榮時丁甲子戮力殲亂以至忠勳府之圖像歲際丁卯竭忠殉節以至忠愍祠之配享一門忠烈何若是炳烺歟其後有以學行授資又以孝行給復古人所謂求忠臣枔孝子之門者不其然歟承旨公之裔居於安東而繼有參奉著作判官都事之職則珪組蟬聯亦足可尙都事諱樀適遭家禍爲弟殺身而申誡諸子不以爲間故嶺南前賢譬之於伋壽之死鄧攸之行而播之篇章載之傳記不一而足豈非我東方二倫之第一歟固知延城鳳龍之勢有鍾於嶺海之間也夫如許孝友忠烈之裔宜有世譜之先作而何其日月壎愒迄至于今耶
斯譜之作不但爲一門之慶抑亦有補於世敎之萬一於是乎序
崇禎三丙寅八月下澣正憲大夫行兵曹判書兼
知經筵藝文舘提學曹允大撰
내가 일찍이 보니 나라의 서적(書籍)이 필명(必明)한 연후(然後)에 호구(戶口)의 번자(繁滋)함과 기강(紀綱)이 문란(紊亂)하니 아니함을 알 수 있으며 그런 연후(然後)에 가(可)히 상하(上下)의 명분(名分)이 바르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일국(一國)만이 이와 같을 뿐 아니라 일가(一家)에 미루어 보아도 역연(亦然)하니 국지군상(國之君上)이 있는 것이 비유하면 가정(家庭)에 조종(祖宗)이요 국지신서(國之臣庶)가 비유하면 가정(家庭)에 자손(子孫)과도 같으니 이른 고(故)로 나의 사친(事親)의 효성(孝誠)을 미루어서 임금님께 충성(忠誠)을 할 수 있으며 나의 간사(幹事)의 업(業)을 옮겨서 나라에 저훈(著勳)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보(世譜)의 간행(刊行)이 과연(果然) 세교(世敎)에 관계되지 않으랴. 지금 연안(延安)의 선비 송철명(宋喆命)과 안동(安東)의 선비 송흥렴(宋興濂) 송사근(宋思近) 보(甫)가 구보일질(舊譜一帙)을 소매 속에 넣고 와서 나에게 식서문(識序文)을 써달라고 하거늘 내가 손을 씻고 피람(披覽)을 하니 대저연안(大抵延安)의 송(宋)이 근원(根源)은 여량(礪良)으로부터 나왔으며 비조(鼻祖)가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封)해지므로 인(因)하여 연안(延安)을 관향(貫鄕)으로 해서 그 뒤 수삼세(數三世)에 벼슬이 서로 이어졌다. 지우오세(至于五世)하여 백중계(伯仲季) 삼현(三賢)이 있어서 장(長)은 보은(保殷)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요 차(次)는 사은(嗣殷)이니 관(官)이 대사간(大司諫)이요 차(次)는 수은(守殷)이니 관(官)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아―상사공(上舍公) 후예(後裔)는 성천(成川)에 살면서 보첩(譜牒)에 무문(無聞)하니 어찌 가석(可惜)하지 않을까? 대사간(大司諫)의 후예(後裔)는 연성(延城)에 살면서 무공(武功)으로 명어세(名於世)하고 효행(孝行)으로 여럿 중(中)에 뽑혀서 인강(仁剛)은 희천군수(凞川郡守)가 되고 그 후삼세(後三世)에 창원부사(昌原府使)를 하고 임진년(壬辰年)에 연성(延城)을 지켜 마침내 외훈(嵬勳)을 세워 현충사(顯忠祠)에 향화(香火)를 받들게 되고 오성이문충공(鰲城李文忠公)이 대첩비(大捷碑)에 찬(撰)을 하였는데 연안호걸송덕윤(延安豪傑宋德潤)이라고 했으며 그 종제(從弟) 연창군(延昌君) 덕영(德榮)이 갑자년(甲子年[이괄<李适>의 난<亂>])을 맞아 힘을 합하여 섬란(殲亂)해서 충훈부(忠勳府)에서 도상(圖像)을 하게 되고 정묘년(丁卯年[노대거입구<虜大擧入寇>:시<時>에 맹산현감<孟山縣監>])에 충성을 다해서 현직에서 순절해서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함에 이르렀으니 일문충열(一門忠烈)이 어찌 이와 같이 병랑(炳浪)하리요 기후(其後)에 학행(學行)으로 벼슬을 받고 효행(孝行)으로 급복(給復[주세부역 등 면제<調稅賦役 等 免除>])하니 고인(古人)이 소위구충신어효자지문(所謂求忠臣於孝子之門)이라더니 참으로 그렇지 아니한가. 승지공(承旨公)의 후예(後裔)는 안동(安東)에 살면서 계속(繼續)해서 참봉(參奉) 저작(著作) 판관(判官) 도사(都事)의 직(職)이 있는 즉 벼슬이 대(代)를 이어 왔으며 또한 족히 가상(可尙)함즉 하고 도사(都事) 휘(諱) 적(樀)은 가화(家禍)로 아우를 대신해서 자신(自身)을 죽이면서 제자(諸子)들에게 서로 사이가 금이 가지 아니한 고(故)로 영남전현(嶺南前賢)들이 수급(壽伋)의 죽음에 비유(比喩)하며 등급(鄧伋)의 행실(行實)과 같이 편장(篇章)에 실어 전기(傳記)가 한곳에 그치지 아니하니 어찌 동방이륜(東方二倫)에 제일(第一)이 아니리까 진실로 연안(延安)의 용봉(龍鳳)의 형세(形勢)가 영남(嶺南)과 해서(海西)의 사이에 모여졌도다. 대개 이와 같은 효우충열(孝友忠烈)의 후예(後裔)가 마땅히 세보(世譜)가 선작(先作)되어야 하는데 어찌 나달만 허송(許送)하고 지금(至今)에 이르도록 했을까. 이 족보(族譜)가 이루어지는 것이 다만 일문(一門)의 경사(慶事)가 될 뿐이 아니라 아니 또한 세속(世俗)을 교화(敎化)시키는 만분(萬分)의 일(一)의 도움이 있으리라 어시(於是)에 서(序)하노라
一姓之有一譜古也周禮小史氏尊繫世辨昭穆至隋唐建圖譜局有郞史以掌撰述故中朝士大夫雖孤門單族莫不有譜推本其所自出而詳錄其所由分凡婚姻選擧皆考按於是其有關於家國大矣夫自一人以至千萬人之多自一世以及千百世之久源遠而末益分族疎而親愈竭苟無譜牒以記載焉則高曾以上之且不記况無名之祖乎功緦屬親之如路人况袒兌之外乎故程子曰管攝天下人心收宗族厚風俗須是明譜係盖報本追遠至誠尊祖敬宗之道惇叙九族之義皆由此出其可忽哉維宋氏本出礪山當麗季有諱璟討紅巾賊有功復隆政堂文學諱根益顯而振文學之孫三人分爲三派長諱保殷居成川至今子孫甚繁次諱嗣殷世居延安若昌原府使諱德潤竭忠樹勳於壬辰享本府忠烈祠若延昌君諱德榮甲子丁卯之亂殲賊殉節圖形麟閣亦享安州忠愍祠又有死事於深河殉亂於江都者一門忠烈若是其炳炳也季諱守殷中大小科以玄風縣監贅居安東官至承旨其後世有科官文學亦著忠義而至義禁府都事諱樀則遭家難兄弟爭死有伋壽褒融之懿雖孫支單寡而不失爲士族盖此諸派各有私譜莫克統一延安士人喆命慨然與安東士人興濂思遠等謀所以合譜鋟板以圖永久一日思遠袖大司憲曹公允大所爲序以示且請於余余以無容更贅辭焉思遠曰曹公之序誠美矣然移某居安東也欲又得安東文字延人之志也噫思遠與其弟思近執親喪廬墓三年此余所愛重者乃告之曰余嘗譜吾氏之族矣派系當詳也科官當攷也宗支易紊也嫡庶易爭也非心公眼明見識淹博者未易爲玆事役也宋氏之譜果無是數者之忠己乎噫兩西嶺南各千里以間曾未成韋樹之會季園之宴而邈然如秦越矣今於一冊之上連系歷叙有若祖先在座諸孫列侍道情素而話親誼則令人孝悌慈良之心油然而生矣於是而尊祖而敬宗惇九族而睦百世使忠孝文學之士彬彬焉如前日之誠則斯役也非直一門之幸亦將有補於邦國之化矣余嘉宋氏諸君能得小史氏之遺而不失隋唐撰述之意也遂不揆架疊而爲之言
上之六年蒼龍丙寅重陽節 通訓大夫前行兵曺佐郞安東權訪序
한 성(姓)에 일보(一譜)가 있음은 예전부터이다. 주례(周禮)에 소사씨(小史氏[태사<太史>밑에 관원<官員>〕는 격세(繫世)를 안치(安置)하고 소목(昭穆)을 분변(分辨)했고 수당(隋唐)에 이르러서는 도보(圖譜)를 세워서 국(局)에 랑사(郞史)를 두어 맡아 선술(選述)했는 고로 중조(中祖)에 사대부(士大夫)는 비록 외로운 문호(門戶)이나 단순(單純)한 족중(族中)이라도 보책(譜冊)이 없는 이가 없어서 그 근본(根本)을 추리(推理)하면 그의 소자출(所自出)과 소유분(所由分)을 상세(詳細)하게 기록(記錄)되어 있어서 혼인(婚姻)과 선거(選擧)에 모두 이어서 참고(參考)하고 살필 수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와 집에 관계되는 일이 대단(大端)했다. 대게 한사람으로부터 천만인(千萬人)의 많으며 일세(一世)로부터 천백세(千百世)의 오래임에 이르도록 근원(根源)이 멀면 끝머리의 나누임도 족친(族親)에 소홀(疏忽)해지면 친분(親分)도 더욱 다하나니 진실(眞實)로 보첩(譜牒)의 기재(記載)가 없으면 고증조(高曾祖)이상이 또한 기록(記錄)이 없을 것이며 하물며 무명(無名)의 조상(祖上)일까. 공시(功緦)의 친속(親屬)을 노인(路人)같이 하리니 하물며 단면(單面)의 외(外)일까. 그런 고(故)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하인심(天下人心)을 관리(管理)하고 끼어들어 종족(宗族)을 거두어 풍속(風俗)을 순후(醇厚)하게 하는데 모름지기 보계(譜系)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했으니 대개 보본(譜本)하고 추원(追遠)하는 성의(誠意)가 존조경종(尊祖敬宗)하는 도리(道理)와 구족(九族)을 두터이 서술(敍述)하는 뜻이 모두가 이로 말미암아 나오나니 그 가(可)히 홀(忽)하게 할까.
오직 송씨(宋氏)는 본시(本是) 여산(礪山)에서 나왔으며 여계(麗季)에 휘(諱)를 경(璟)으로 함이 있나니 홍건적(紅巾賊)을 토벌(討伐)하고 공(功)이 있어 비로소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져서 자손(子孫)이 드디어 연안송씨(延安宋氏)로 했다. 이로부터 대대로 높은 벼슬이 이어져서 찬성사(贊成事) 휘복융(諱復隆)과 정당문학(政堂文學) 휘근(諱根)에 이르러서는 문학(文學)으로 자손(子孫)이 더욱 떨치게 되었으니 손자(孫子) 삼인(三人)이 삼파(三派)로 나누어져 장(長)의 휘(諱)는 보은(保殷)이니 성천(成川)에 살고 있으며 자손이 매우 번(繁)하며 차(次)는 휘(諱)는 사은(嗣殷)이니 연안(延安)에 세거(世居)하였고 창원부사(昌原府使) 휘덕윤(諱德潤)같은 이는 충성(忠誠)을 다해서 공훈(功勳)을 세웠고 임진년(壬辰年)에 본부(本府) 충열사(忠烈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연창군(延昌君) 휘덕영(諱德榮) 같은 이는 갑자(甲子)와 정묘(丁卯)의 난(亂)에 섬적순절(殲賊殉節)하여 공신각(功臣閣)에 그림을 그리게 하여 역시(亦是) 안주충민사(安州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고 또 심하(深河)에서 죽은 일과 강도(江都)에서 난리(亂理)에 순절(殉節)한 자(者) 일문충열(一門忠烈)이 이와 같이 그 병병(炳炳)하랴.
계(季)의 휘(諱)는 수은(守殷)이니 대소과(大小科)를 합격(合格)하고 현풍현감(玄風縣監)으로 안동(安東)으로 췌거(贅居)했다. 관(官)이 승지(承旨)에 이르렀으며 후세(後世)에 과관(科官)으로 문학(文學)으로 또한 충의(忠義)로 드러났으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인 휘적(諱樀)인즉 가난(家難)을 만나 형제(兄弟)가 죽음을 다투어 급수포융(伋壽褒融)의 아름다움이 있고 자손(子孫)은 많지는 아니하나 사족(士族)의 이름을 잃어버리지 아니했다. 대개 이 제파(諸派)가 각각(各各) 사보(私譜)가 있었으나 능히 통일(統一)하지 못했더니 연안사인(延安士人) 철명(喆命)이 개연(慨然)히 안동사인(安東士人) 흥렴(興濂) 사원(思遠)등이 대사헌(大司憲) 조공윤대(曺公允大)가 이은 서문(序文)을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또한 나에게 청(請)하거늘 내가 군두더기 말을 용인할 수 없다고 하니 사원(思遠)이 말하거늘 조공(曺公)의 서(序)가 진실(眞實)로 아름다우나 그러나 모(某)가 안동(安東)에 살고 있으니 안동(安東)에서 한 글을 얻는 것이 연안(延安)사람의 뜻이라고 하는지라 아―사원(思遠)이 그 아우 사근(思近)으로 더불어 어버이 상(喪)을 치르고 상주(喪主)질을 하는데 여묘삼년(廬墓三年)을 하는걸 보고 애중(愛重)하는 바이다. 이에 말하노니 내가 일찍이 우리 성씨(姓氏)의 족보(族譜)를 하는데 파계(派系)를 소상(昭詳)하게 밝히고 과관(科官)을 마땅하게 상고(詳考)해야 하고 종지(宗支)가 문란(紊亂)하기가 쉽고 적서(嫡庶)의 다툼이 쉬우니 마음이 공평(公平)하고 안목(眼目)이 밝아서 넓이 아는 식견(識見)이 아니면 이일은 쉽지 아니한 것이니 송씨(宋氏)의 족보(族譜)는 과연(果然)이 수자(數者)가 없는 것일까. 아―양서영남(兩西嶺南)이 천리간격(千里間隔)에 사는데 일찍이 위씨화수회(韋氏花樹會-중국 당나라때 위씨가 번성해서 꽃나무 밑에 모여 일가들이 즐겨 놀았음)도 없었고 춘야연도이(春夜宴桃李)의 잔치도 이루어지지 아니했으면서 막연(邈然)하기를 진(秦)나라 월(越)나라 사람과도 같을 것이나 지금 저 일책(一冊)에 몰려 계통(系統)을 이어서 역력(歷歷)히 서술(敍述)하니 조선(祖先)이 앉아 계시는데 제손(諸孫)들이 시립(侍立)해서 본시의 정(情)을 말하며 친의(親誼)를 이야기 할 수 있은 즉 사람으로 하여금 효제(孝悌)와 자량(慈良)의 마음이 유연(油然)이 생겨나니 어시(於是)에 존조(尊祖)를 하면서 경종(敬宗)을 하며 구족(九族)을 돈독(敦篤)히 하면서 백세(百世)토록 화목(和睦)해서 충효문학지사(忠孝文學之士)가 빈빈(彬彬)하게 전일(前日)같이 성(盛)하면 이 역사가 비단(非但) 일문(一門)의 다행(多幸)이 아니라 또한 장차 방국(邦國)의 감화(感化)에 도움이 있으리니 내가 송씨(宋氏) 제군(諸君)을 아름답게 여기며 능(能)히 소사씨(小史氏)의 끼친 바라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수당(隋唐)의 선술(選述)한 뜻이 될 것이다 드디어 가첩(架疊)을 불구(不拘)하고 말을 하노라
상지육년참봉병인중양절(上之六年蒼龍丙寅重陽節)에 통훈대부전행병조좌랑(通訓大夫前行兵曺佐郞) 안동(安東) 권방(權訪)은 서(序)하노라
舊譜序(구보서)
譜牒者何也以其辨昭穆明世系也曰昭穆者父子之謂也世系者父子相代之序也若不辨昭穆明世系則庸詎知宗派之分而世代之系焉亦豈知尊祖宗之重而厚親族之誼歟惟吾之宋系出延安始祖公璟則十六代祖也歷三代至諱有良公有伯仲季三子曰進士公諱保殷司諫公諱嗣殷承旨公諱守殷而延安之宗則司諫公之派也傳來遺牒有曰吾先居於本府亭村魚山南邊之地大築土城壯建家舍矣門疾忽起散避各處承旨公移居安東云自是經來幾百年矣尙今觀之城根完在遺址依然世傳宋氏之墟者綿綿不絶焉此豈非吾先祖曾居之處乎承旨公移居安東之後仍爲永住南北相隔歲月久深而不但後屬之疏遠也延安之於安東地之相距千有餘里故衰殘寒族來往無路聲息且絶永爲路上之人者不知幾許歲矣去己卯年八月安東宗人不勝追遠敦宗之義書其姓名居住於信札中而付於海營以抵延安可謂南中厚俗士夫之風也自是以後知同宗之尙存於安東而地角稍左一面難期徒增末由之歎矣越明年三月宗中挺奎氏文奎氏素是有志之人奮義抽身脫驂徒行跋涉山川超越嶺外幾一月而到安東則同宗諸君自作同里閈居矣相逢之際其楃手墜淚話舊叙族之厚誼固不可盡記云耳觀其私譜中祖宗世世相承之統則與吾宗繫世無一差失而承旨公以門疾移居安東之事亦爲歷歷相合也因論合編譜錄以爲鋟榟事十分相約而來自是以後宗中諸君經始刊譜之事遍告散處末梢之遐裔辦出工布欲爲修譜而以書報於安東宗中屢度而安東之回覆無一相示無乃道途云遠中間浮沈而然耶抑爲聞知而致力之不及而然耶千里相隔問聞莫憑可不悲哉且俟來頭回示之期以爲刊譜於義當然而剞厥氏時刻告急若此緯繣則累歲規畵墜於空虛故計出於不獲己中以爲設役八榟而安東諸宗之內外族派具不盡記其於敦宗睦族之義㘦有欠一之歉歎也哉然而自祖宗以來子姓相繼之派則歷序不失而詳記焉是亦一大之慶也後之有志之人觀今未全就之作而後能繼而述之則可不謂之賢乎噫吾先落在遐鄕雖不得爲名公巨卿忠孝之士世世間出爲臣盡節爲子克孝圖像麟閣表忠香火者不一而止與彼貪利祿淪綱常者大相縣矣其於激世勵俗之忠孝豈不炳炳然哉今觀世代寢遠子孫微孱全昧某爲某祖而傳幾世某爲某昭而傳某穆何以知敦宗宗厚風俗使人不忘本之義耶以是懼焉合編世系以爲刊出而散處疎遠之族裒集於一譜之中列侍於祖宗之下譬若一源之水散流東西絡歸大海復合一道此是天理之有所然而然矣伏惟僉宗盥手披譜則昭穆秩然序次明白可謂團會一室合襟擎跪而湛洽之樂孝悌之心油然而生矣自今以後譜中諸君沂流而探源庇根而愛枝雖服盡親竭當念尊祖敦宗之義喜而慶憂而弔樂以和禮以序益勉乎子姓之敦睦無忝乎祖宗之忠孝以爲何如余以是勉焉又望於諸公之有終也夫
崇禎紀元後三甲申黃鍾之月下澣裔孫陽運 謹序
보첩(譜牒)이란 무엇인고 그의 소목(昭穆)을 분별하고 세계(世系)를 밝히는 것이다. 소목(昭穆)이란 부자(父子)를 말함이요, 세계(世系)란 부자간(父子間)의 대(代)의 차례이다. 만약(萬若) 소목(昭穆)을 분변(分辨)하고 세계(世系)를 밝히지 못한 즉 어찌 종파(宗派)의 분간(分間)과 세대(世代)의 계열(系列)을 알 것이며 어찌 존조종(尊祖宗)을 소중(所重)히 하며 친족(親族)의 정의(情誼)를 두터이 할 것인가. 오직 우리 송씨(宋氏)는 계통(系統)이 연안(延安) 시조공(始祖公) 경(璟)에서 나왔으니 곧 십육대조(十六代祖)이다. 삼대(三代)를 지내와서 휘(諱) 유량(有良)공(公)이 있으니 백중계(伯仲季) 삼자(三子)를 두게 되어 진사공(進士公)휘보은(諱保殷)과 사간공(司諫公) 휘사은(諱嗣殷)과 승지공(承旨公) 휘수은(諱守殷)이면서 연안(延安)의 종친(宗親)인즉 사간공(司諫公)의 파(派)이다. 전래(傳來)된 책(冊)에 있기를 우리 선군(先君)이 본부 정촌 어산(本府 亭村 魚山) 남(南)쪽 가의 땅이면서 크게 토성(土城)을 장대(壯大)하게 쌓아서 가사(家舍)를 지었는데 문질(門疾)이 홀연히 일어나서 피(避)해서 각처(各處)로 흩어졌으니 승지공(承旨公)은 안동(安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이로부터 몇 백년(百年)을 겪어 오게 되었다 지금(至今)까지도 성(城)뿌리에 완연(完然)히 유지(遺址)가 있어서 의연(依然)히 세상(世上)에 전(傳)하기를 송씨(宋氏)터이라 하는 것이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아니하니 이것이 어찌 우리 선조(先祖)가 일찍이 사시든 곳인가. 승지공(承旨公)께서 안동(安東)으로 이거(移居)한 후(後)로 인(因)하여 영구(永久)히 거주(居住)하니 남북(南北)이 서로 막혀 세월(歲月)이 오래 길게 되니 다만 후손(後孫)이 소원(疏遠)해서가 아니라 연안(延安)과 저 안동(安東)은 땅의 거리(距離)가 천유여리(千有餘里)이라. 고(故)로 쇠잔(衰殘)한 한족(寒族)이 내왕(來往)의 일이 없고 성식(聲息)이 또한 끊겼으니 노상(路上)의 사람과 같아서 몇 해나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내간 기묘년(己卯年) 팔월(八月)에 안동종인(安東宗人)이 추원돈종(追遠敦宗)의 의(義)를 이기지 못하여 그의 성명(姓名) 거주지(居住地)를 써서 편지(便紙) 가운데 넣어서 해주감영(海州監營)으로 부쳐서 연안(延安)에까지 이르게 했는지라 남중(南中)의 순후(醇厚)한 풍속(風俗)과 사대부(士大夫)의 기풍(氣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로부터 이후(以後)로 동종(同宗)이 오히려 안동(安東)에 존재(存在)하나 그러나 지각(地角)이 초좌(稍左)하여 일면(一面)의 기약(期約)도 하기 어려워 한결 그대로 지내오면서 한탄(恨歎)만 할 뿐이었다. 명년(明年) 삼월(三月)에 종중(宗中)에 정규씨(挺奎氏) 문규씨(文奎氏)가 본시 지친(至親)을 찾으려는 생각 있는 사람으로서 의리(義理)에 분발(奮發)하여 여가(餘暇)를 내서 탈것을 버리고 도보(徒步)로 발섭(跋涉)하여 산천(山川)을 넘고 물을 건너고 해서 거의 일개월(一個月)이 되어 안동(安東)에 이른즉 동종제군(同宗諸君)들이 동리동한(同里同閈)을 이루고 살거늘 상봉지제(相逢之際)에 악수(握手)를 하며 눈물을 흘리며 옛 종친(宗親)의 후의(厚誼)를 말하게 되니 진실로 필화(筆話)로 다 기록(記錄)못할 것이라. 그 외 사보(私譜)를 보니 그 중(中)에 조종(祖宗)때로부터 대대로 이어진 계통(系統)인즉 우리 종중(宗中)의 격세(擊世)와 한가지도 차위(差違)가 없으면서 승지공(承旨公)이 문질(門疾)로 안동(安東)으로 이거(移居)한 일이 또한 역력(歷歷)히 상합(相合)이 되는 지라 인하여 합편보첩(合編譜牒)할것과 책판에 색일 것을 십분상의(十分相議)하고서 왔는지라 이로부터 이후(以後)로 종중제군(宗中諸君)이 족보간인(族譜刊印) 할 일을 여러 곳에 편고(遍告)를 해서 끄트머리 먼 후손(後孫)까지 알려서 공비(工費)의 판출(辦出)하게해서 수보(修譜)를 하려고 해서 편지(便紙)로 안동종중(安東宗中)에게 여러차례 통고(通告)를 했으나 안동(安東)의 회보(回報)가 한차례의 상시(相示)도 없으니 도도(道途) 멀어서 중간(中間)에 유실(流失)되어 그런가 아니면 듣고 알면서 수력(手力)이 모자라서 그런가 천리(千里)나 상격(相隔)해서 묻고 들음을 빙거할 곳 없으니 가(可)히 슬프지 아니한가 또 미래(未來)에 올 회답(回答)을 기회(幾回)보아 보책(譜冊)을 간행(刊行)함이 정의(情義)에 당연(當然)하나 그러나 목판(木板)에 새기는 사람이 시기(時期)가 급(急)하다고 하는지라 이와 같이 위획(緯劃)이 된즉 누년(累年)동안 규획(規劃)하는 일이 공허(空虛)하게 추락(墜落)되는 고(故)로 부득이(不得已)한 계획(計劃)으로 설역(設役)을 하고 입재(入梓)를 했으니 안동종인(安東宗人) 내외족파(內外族派)가 모두 다 기록(記錄)되지 아니하니 저 돈종목족(敦宗睦族)의 의(義)에 한편이 빠져서 하나가 빠져버린 한탄(恨歎)이 아닐 수 없는 지라 그러나 조종(祖宗)으로부터 이래(以來)로 자성(子姓)이 상계(相繼)한 파(派)인즉 역역(歷歷)히 상세(詳細)하게 기록(記錄) 서술(敍述)한 것은 이것이 일대경행(一大慶幸)이라 후(後)에 뜻이 있는 사람이 지금(至今) 미완전(未完全)한 보책(譜冊)을 보고 후에 능히 계속(繼續) 서술(敍述)한다면 가(可)히 착한 일이 아닐까. 아―우리 선조(先祖)가 하향(遐鄕)에 낙재(落在)하셔서 비록 고관대작(高官大爵)은 아니었으나 충효(忠孝)의 선비가 대대(代代)로 간혹(間或) 나와서 신하(臣下)의 직분(職分)과 절행(節行)을 다하였고 자제(子弟)가 되어 능(能)히 효도(孝道)했으며 인각(麟閣)에 도상(圖像)을 남겨 표충(表忠)을 했으며 향화(香火)를 받들게 한 분이 하나뿐이 아니니 저 이록(利祿)이나 탐(貪)하고 강상(剛常)을 몰락시키는 자(者)와는 크게 서로 다르도다 그저 세상(世上)을 격동(激動)하고 풍속(風俗)을 가다듬게 하듯 충효(忠孝)에 어찌 불을 보듯 밝지 않으랴. 지금(至今) 세대(世代)가 침원(寢遠)하면서 자손(子孫)이 잔미(孱微)함을 보고 누구는 모조(某祖)의 몇 세손(世孫)이며 누구든 어느 갈래 어느 집안인줄도 모르게 되면 어찌 종족(宗族)을 돈독(敦篤)히 하며 풍속(風俗)을 순(醇)하게 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근본(根本)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의리(義理)를 알 것인고 이것이 두렵노라. 세계(世系)를 합편(合編)해서 간행(刊行)을 해서 흩어져 사는 소원(疏遠)한 족인(族人)들도 일책중(一冊中)에 줄을 지어 조종(祖宗)의 아래에 모시게 되니 비유하면 한 근원(根源)이 물이 흩어져 동서(東西)로 흘러 마침내 대해(大海)로 돌아와서 다시 한길로 합(合)하는 듯이 하니 이것은 천리(天理)에 그렇게 정(定)해저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직 첨종(僉宗)은 관수(盥手)하고 피보(披譜)를 한즉 소목(昭穆)의 차례가 차례대로 명백(明白)하니 가위(可謂) 단란하게 한집안에 모여서 꿇어앉아서 받들어 올리며 담합(湛合)의 즐거움과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하게 생길 것이다 지금(至今)으로부터 이후(以後)로 보책(譜冊) 가운데 제군(諸君)들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서 근원(根源)을 탐색(探索)하며 뿌리를 북돋우어 곁가지를 아껴서 비록 복(服)을 입지 아니하는 친척(親戚)이라도 마땅히 존조(尊祖)하고 돈종(敦宗)의 의(義)를 생각해서 기쁜 경사(慶事)에 함께 기뻐하며 우고(憂故)가 있어 조상(弔喪)하고 즐겁게 화락(和樂)하고 예(禮)로써 질서(秩序)를 더욱 힘써야 하나니 자손(子孫)의 돈목(敦睦)이 조종(祖宗)의 충효(忠孝)에 누(累) 끼치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나는 이로써 힘쓸 것이니 또 제공(諸公)에게도 유종(有終)의 미(美)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승정기원후삼갑신(崇禎紀元後三甲申-서기1764년)황종지월하한(黃鍾之月下澣)예손(裔孫) 陽運(陽運-대사간공파)은 삼가 서(序)하노라
舊譜序(구보서)
延安之宋自勝國著姓世有碩德蔚文簪纓甲科蟬聯累百年之久而其中以節義著以孝友著累書不一書盖其根本厚故支葉茂信乎吾先祖流風餘韻其有所受者遠而惜乎東方之文獻多有闕漏延城君爲鼻祖而止豈非雲仍之所慨恨者乎吾洛南始祖承旨公距古未久而譜系太略延城以下未續代數中郞以下缺幾代承旨公以下始明其系籍則不惟後孫之衋傷而先代終天綿邈之懷可溯而想矣嶺南之宗世守箕裘勿替先緖而至於不肖輩門戶單孑昭穆衰替豈敢曰靑氈之不墜而先世之手澤宛然懼其世代漸降馴至於泯然日者鎭安長水茂州龍潭諸宗人移書吾嶺幷示其譜牒延城中郞上下著代明白且曰歷考麗史少無可疑不肖等始焉躍然而喜中焉黯然而非末乃惄然而疑復而曰夫子是史闕文乃於春秋書夏五又日仍舊貫吾有受之矣爲先祖子孫者何敢改先祖所定乎延城君諱璟字吾譜昭載則雖曰有明證改以卿字非我先祖之意也不肖等之知見止於斯而己雖然吾從吾先祖數郡之宗人亦各從其所傳不害於義也至於務欲同歸於一而舍家牒背先志此不肖等之所膠執不忍處也所幸者諸宗氏參考典故自爲信譜而通告四万之宗使先祖之子孫同八一譜體周禮合族之制其擧盛矣昔日之路人今後之同人則蘇明允所謂孝悌之心油然而生者此也嗚呼一身而分百億身百億身而本乎一身先祖修身之要孝悌而己矣此吾宗之所當交相勉勵者也
上之諒陰柔兆涒灘五月上澣 後孫 寅濂 謹識
연안(延安)의 송씨(宋氏)는 고려시(高麗時)부터 들어난 성(姓)이 되어 세세(世世)로 석덕(碩德)과 문장(文章)이 울연(蔚然)해서 연세장원급제(連世壯元及第)하고 벼슬이 끊어지지 아니해서 누백년(累百年)이나 오래되어 그 중(中)에 절의(節義)로 들어나고 효우(孝友)로도 들어났으나 누서(累書)에 한곳에도 쓰이지 아니했으니 대개 그 근본(根本)이 두터운 고(故)로 지엽(支葉)이 무성(茂盛)하나니 진실로 우리 선조(先祖)의 남긴 미풍(美風)과 남아있는 운치로 그 봉군(封君)함은 오래되면서 애석(愛惜)하게도 동방(東方)의 문헌(文獻)이 궐루(闕漏)함이 많도다. 연성군(延城君)이 비조(鼻祖)이면서 그치니 어찌 운잉(雲仍)의 개한(慨恨)하는 바가 아니리까.
우리 낙남시조(落南始祖) 승지공(承旨公)께서는 옛날과의 거리도 아직 멀지도 아니하면서 보계(譜系)가 태략(太略)하며 연성군(延城君) 이하(以下) 대수(代數)를 잊지 못하고 중랑공(中郞公) 이하(以下)도 몇 대(代)를 결(缺)했으며 승지공(承旨公) 以下(이하)는 비로소 계적(系籍)이 분명(分明)한즉 오직 후손(後孫)들의 혁상(衋傷)이면서 선대(先代)에 종천면막(終天綿邈)의 회(懷)를 가(可)히 소급(遡及)해서 생각하리로다. 영남종족(嶺南宗族)은 세수기구(世守箕裘[조상<祖上>의 물려준 업<業>])하여 선조(先祖)의 유서(遺緖)아니하면서 불초배(不肖輩)에 이르러서는 문호(門戶)도 단자(單子)하고 소목(昭穆)이 쇠체(衰替)해서 어찌 감(敢)히 청전(靑氈[선대<先代>의 유훈<遺訓>])을 떨어뜨리리요. 선세수택(先世手澤)이 완연(完然)하니 저 세대(世代)가 점점(漸漸) 내려가면서 민연(泯然)하게 됨에 길들어지지 않을까 두려웁나니 어느 날 진안(鎭安) 장수(長水) 무주(茂朱) 용담(用潭)에 사는 제종인(諸宗人)이 우리 영남(嶺南)으로 편지(便紙)를 보내왔는데 그 보첩(譜牒)에 연성중랑상하저대(延城中郞上下著代)가 명백(明白)히 병시(幷示)했느니라 또 말하기를 려사(麗史)를 역역(歷歷)히 참고(參考)한바 조금 의심(疑心)이 없다고 하거늘 불초(不肖) 등(等)이 처음에 뛸 듯이 기뻐하고 중간(中間)에는 암연(黯然)히 슬펐으며 말내(末乃)에는 배가 고픈 듯이 의심(疑心)하나니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도 이 사기(史記)에 궐문(闕文)이 있어서 춘추(春秋)책의 하오(夏五)와 같다는 것이 아닌가 또 말하기를 옛 관향(貫鄕)에 인(因)하여 우리가 연성(延城)을 받은바가 오래이다. 선조자손(先祖子孫)될 자와 하감(何敢)히 선조(先祖)께 정(定)한 바를 고치리요. 연성군(延城君)휘경자(諱璟字)는 우리 보첩(譜牒)에 밝게 실려져 있는 즉 비록 명증(明證)이 있다고 해도 경자(卿字)로 고치는 것은 우리 선조(先祖)가 아니라는 뜻이다. 불초(不肖) 등(等)의 아는 것이 이에서 그칠 따름이다. 비록 그러나 우리 종반(從班)과 우리 선조(先祖)의 자손(子孫)이 수군(數君)에 살고 있는데 종족(宗族)이 또한 각기(各其) 그의 얻어진 대로 조차하는 것도 의(義)에 해(害)롭지 아오니 함께 하나로 돌아가고자 함에 이르러서는 가첩(家牒)을 두고 선지(先志)를 배반(背反)하는 뜻이니 이는 불초(不肖) 등(等)의 그릇된 고집(固執)인바 차마 못하는 처사(處事)이다. 다행(多幸)인 것은 제종씨(諸宗氏)가 전고(典故)를 참고(參考)해서 스스로 믿을 수 있는 족보(族譜)를 하려고 통고(通告)를 사방종인(四方宗人)에게 해서 선조자손(先祖子孫)으로 하여금 하께 일보(一譜)에 들게 해서 주례(周禮)에서 합족(合族)의 제도(制度)를 체념(體念)을 해서 함이 그것이 성거(盛擧)이다. 옛날에 노인(路人)이 금후(今後)에는 동인(同人)이 되었는 즉 소명윤(蘇明允)이 이르는바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이 생(生)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아―일신(一身)이 나누어 백억(百億)의 몸이 되고 백억(百億)의 몸의 근본(根本)은 하나이니 선조수신(先祖修身)의 요체(要締)는 효제(孝悌)뿐이다. 이는 우리 종인(宗人)들이 마땅히 서로서로 힘쓰고 가다듬어야 할지어다
상지량음유조군탄오월상한(上之諒陰柔兆涒灘五月上澣) 後孫 寅濂(승지공파) 謹識 후손(後孫) 인렴(寅濂-승지공파) 삼가 기록(記錄)함
舊跋(구발)
嗚呼宋之先出自礪良礪良者卽礪山古號也其後有曰鎭川曰恩津曰延安者或因先代居官之士而爲貫或襲鼻祖下鄕之地而爲本政猶上洛之金源於安東上黨之韓根於淸州焉延安之裔或居廣州或居龍仁或居長水有居鎭安者有居延安者有居安東者而延安一境亦有山前山後之分派者槩以鼻祖以下世代之相左而然也况遠地聲聞不到之處烏得無系譜之錯誤哉惟其延安與安東則源派相符根榦不差故因以合譜至如畿之龍廣湖之列邑之譜則始祖之諱字或以卿字或以璟字諱音相似而字樣有殊無乃遠孫訛傳之致歟考之麗史則有以卿字爲諱考之諸譜則多以璟字爲諱今不必質言某字之爲是而旣以爲譜則勢從諸處之譜故固知不肖之僭妄因其舊而書之此尤後孫落淚之處且自始祖以下代數之遠邇昭穆之次序考之諸譜靡不有差固難使登於他眼而中間兵㸑之際孱裔失譜之端亦不足怪焉吾先考與曾考有意刊譜不憚遠程遍閱諸譜至於製序以儲之境四物力難辦竟莫遂焉今自宗中備得若干財力忝承數十年經營之役亟費一二月設施之工罔夜罔晝載呼載書可謂不日成矣考諸往牒採其舊傳載之家乘有若正譜然上可以知祖宗之有來下可以闢孱孫之茫昧亦將有補於敦睦之萬一爾宗人載權氏極力贊工斯譜之訖求余記焉歲在著雍涒灘大簇之月旣望裔
孫 天翼 喆命 幷跋
아―송씨(宋氏)의 선(先)은 여랑(礪良)으로부터이니 여랑(礪良)이란 것은 즉 여산(礪山)의 고호(古號)이다. 그 후(後)에 유왈진천완(有曰鎭川曰)은진왈(恩津曰)연안자(延安者)은 혹인인대거관지사이위관(或因先代居官之士而爲貫)하고 혹습비조하향지지이위본(或襲鼻祖下鄕之地而爲本)하니 정소위상락(政所謂上洛)의 김(金)이 근원(根源)이 안동(安東)이요 상당(上黨)의 한(韓)이 근어청주(根於淸州)인 것이다 연안송씨(延安宋氏)의 예손(裔孫)이 혹거광주(或居廣州)혹거용인(或居龍仁)혹거장수(或居長水)혹거진안(有居鎭安)하며 유거연안자(有居延安者)하고 유거안동자(有居安東者)이면서 연안일경(延安一境)이 역유산전산후(亦有山前山後)의 분파(分派)된 것은 대개가 비조이하세대(鼻祖以下世代)가 상좌(相左)해서 그런가 하물며 원지(遠地)라서 성문불도(聲聞不到)의 곳에 살고 있으며 어찌 얻어 계보(系譜)의 착오(錯誤)가 없을까. 오직 연안(延安)과 더불어 안동(安東)인즉 원파(源派)가 상부(相符)하고 근간(根幹)이 불차(不差)한 고(故)로 인이합보(因以合譜)라 지여기지(至如畿之)용인(龍仁)광주(廣州)와 호남(湖南)의 열읍(列邑)의 보(譜)인즉 시조(始祖)의 휘자(諱字)가 혹은 경자(或以卿字)라 하고 혹은 경자(或以璟字)라 하니 휘(諱)의 음(諱音)은 상사(相似)하니 그러나 자양(字樣)을 유수(有殊)하니 무내원손와전지치여(無乃遠孫訛傳之致歟)아 고지려가즉유이경자(考之麗史則有以卿字)로 위휘(爲諱)나 고지제보즉다이경자(考之諸譜則多以璟字)로 위휘(考之諸譜則多以璟字)하니 지금(至今)에 반드시 모자(某字)가 옳다할 수 없어서 이미 족보(族譜)를 했는 즉 형세(形勢)가 제처(諸處)의 보(譜)를 따랐는지 고(故)로 고지불초(固知不肖)의 참망(僭妄)됨을 알고 있으나 인기구이쇠지(因其舊而書之)하면 이것은 더욱 후손낙루(後孫落淚)의 곳이 아닐까. 또한 시조(始祖)로부터 이하대수(以下代數)의 원이(遠邇)와 소목(昭穆)의 차례를 제보(諸譜)를 참고(參考)하면 차이(差異)가 잊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타인(他人)의 눈에 뜨이게 하기 어려웠으며 중간(中間)에 병선(兵燹)을 겪을 즈음에 잔약(孱弱)한 후예(後裔)들이 실보(失譜)를 하게 됨도 부족괴언(不足怪焉)이라 우리 선고(先考)께서 증왕고(曾王考)와 더불어 간보(刊譜)할 뜻이 있어서 원정(遠程)을 꺼리지 아니하고 제보(諸譜)를 편열(遍閱)하시고 서문(序文)을 제술(製述)함에 이르렀더니 마침내 물력(物力)을 판출(辦出)하기 어려워서 수행(遂行)하지 못했다. 지금(至今) 종중(宗中)에 약간(若干)의 재력(財力)을 준비(準備)해서 수십년(數十年) 경영(經營)하든 역사(役事)가 계승(繼承)하게 되니 급히 일이개월(一二個月) 시설(施設)하는 공역(工役)이라 밤낮 없이 부르고 쓰고 해서 기일전(期日前)에 이루니 지난번 보첩(譜牒)을 참고(參考)하고 예전 전(傳)해오는 것을 채집(採集)해서 가승(家乘)에 것을 실으니 정보(正譜)와도 같으나 그러나 위로는 조종(祖宗)의 전래(傳來)를 알게되며 아래로 가이(可以) 잔손(孱孫)들의 망매(茫昧)함을 열어주어 또한 장차(將次) 돈목(敦睦)의 만분일(萬分一)이라도 보충(補充)함이 있을 것이다 종인(宗人) 재권씨(載權氏)가 극력(極力)히 공역(工役)에 도왔는지라 이 보역(譜役)을 마치고 나에게 기록(記錄)을 요(要)하는 것이다.
세재저옹군탄대족지월기망(歲在著雍涒灘大簇之月旣望)
예손(裔孫) 천익(天翼) 철명(喆命-대사간공파)은 병발(幷跋)하노라
新跋(신발)
謹按蘇氏之譜曰孝悌之心油然而生程夫子之言曰管攝天下之人心噫以吾一門之譜雖不足與議於天下之管攝而觀吾譜者上覽祖宗之昭穆下觀子孫之秩序而孝悌之心於是乎油然而生則其爲管攝一家之人心倘如何哉吾之刊譜有三樂上自鼻祖下至近代祖考精靈洋洋如在儼然於數十代之間而子子孫孫粲然可觀宛如合席於一堂之中此其一樂也南自嶺外西至海隅昔者路上之人今作一室之親或醉或飽且戱且笑張公藝之九世同居無以加焉陶淵明之親戚情話不亦悅乎此其二樂也凡吾刊譜粤自先考二世三世雖有經紀之計而日玩月愒尙稽鋟梓之役矣往在乙丑秋嶺書飛來刻期設施不踰年而告成此其三樂也三樂之外夫復何求於是乎合席而議曰吾宗散處各字違行尤極慨然從今爲始自鼻祖二十一世定置名行計以五行之數更加十世之序標以一句之詩其詩曰錫洛東榮在鎭原秀煥基推此以往永定規例以爲遠宗之信夫知僉謨果若何云耶從姪赫命可與有爲銳意輸工微斯人吾誰與成
崇禎三丙寅九月下澣 司諫公十二世孫 寅曙 謹跋
삼가 살피니 소씨족보(蘇氏族譜)에 말하기를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이 생긴다라고 정부자(程夫子)의 말에 말하기를 천하인심(天下人心)을 관리간섭(管理干攝)을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희(噫)라 아― 우리 일문(一門)의 보책(譜冊)이 비록 족(足)히 천하(天下)를 관섭(管攝)은 못하나 우리 족보(族譜)를 보는 자(者) 위로는 조종(祖宗)의 소목(昭穆)을 보고 아래로는 자손(子孫)들의 질서(秩序)를 보면서 효제(孝悌)의 마음이 이제야 유연(油然)히 생겨나니 곧 그가 일가(一家)의 인심(人心)을 관섭(管攝)함이 마땅히 어떠할까. 우리의 보책(譜冊)을 간행(刊行)함이 삼락(三樂)이 있으니 위로 비조(鼻祖)로부터 아래로 근대(近代)에 이르도록 조고(祖考)의 정령(精靈)이 양양(洋洋)히 존재(存在)하사 근엄하게 저 수십대(數十代)의 사이에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찬연(粲然)히 일당중(一堂中)에 합석(合席)하심을 완연(宛然)히 보는 것 같아서 이것은 첫째의 즐거움이요 남(南)으로 영외(嶺外)로부터 서(西)쪽으로 해우(海隅)에 이르도록 석자(昔者)에 로상인(路上人)을 지금(至今)은 일실(一室)의 지친(至親)으로 하며 혹(或) 취(醉)하거나 혹(或) 배부르며 또한 희롱도 또한 웃기도 장공예(張公藝)의 구세동(九世同)가 무이가언(無以加焉)이며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가 불역락호(不亦樂乎)아 하니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무릇 우리 보책간행(譜冊刊行)이 예전 선고(先考)계실때부터 두 대 삼대동안 비록 경기(經紀)의 설계(設計)는 있었으나 날마다 경영(經營)만하고 선 듯 시작(始作)할 수 없어서 오히려 책판을 만들어 글자를 새김이 늦어졌으며 지내간 을축년(乙丑年) 가을에 영남서신(嶺南書信)이 비래(飛來)해서 기일(期日)을 약속(約束)하고 보소(譜所)를 설치(設置)해서 해를 넘기지 아니하고 이루어지게 되니 이것이 그 셋째 즐거움이다 .삼락(三樂)의 외(外)에 다시 무엇을 구(求)하리요. 그렇기 때문에 합석(合席)해서 의논(議論)하기를 오종(吾宗)이 산처(散處)하여 이름자(者)가 항열(行列)에 어그러지니 더욱 개연(慨然)하도다. 지금(至今)을 시작(始作)으로 해서 비조(鼻祖) 이십일세(二十一世)로부터 명행(名行)을 정(定)해두고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수(數)로 다시 십세(十世)의 차례를 표(標)하고 일구(一句)의 시(詩)로 하노니 그 시(詩)에 말하기로도 석락동영재진원수환기(錫洛東榮在鎭源秀煥基)라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가면 영구(永久)토록 규례(規例)가 정(定)해져서 영원(永遠)한 종친(宗親)의 신표(信表)가 될 것이니 알지 못하거니와 첨종(僉宗)의 모획(謨劃)이 과연 어떠할까. 종질(宗姪) 혁명(赫命)은 가(可)히 더불어 할만하니 마음에 단단히 차려 힘내하며 각공(刻工)에게 정성(精誠)을 다하소.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와 더불어 이룰고.
숭정삼병인구월하한(崇禎三丙寅九月下澣)
사간공 십이세손(司諫公 十二世孫) 인서(寅曙) 근발(謹跋)
又
吾延安宋氏譜傳世十九而舊無譜今始嶺海之宗詢謀僉同譜牒垂成兩派宗人請于曹尙書及權佐郞作弁卷之文跋成於延安宗丈而以興濂令爲之尾語辭不得己略爲下語辭爲曰嗚呼蘇老泉族譜序以爲觀譜牒昭穆之序本支之源則孝悌之心油然而生噫君子之於敦宗睦族不待譜牒而天哀藹然和洽裕育常棣之詩英木之什令人感動而至於其次則譜牒不爲無助我國中世雖大家世族僅有譜牒卽今時尙家家戶戶莫不備具我譜安得己哉以吾宗言之十代祖承旨公落南爲家兩代登苐三四世生進文士背出孝悌之政聯代冞篤方其時也雖無會族合譜而求諸遠遍雖遙遙之冑有若兄弟至親先祖至行尙矣哉至若族祖晩隱公鴒原急難無愧褒融由此觀之子肖考孫肖祖遺風餘韻有不斬者矣吾宗不盛十世以來只有七八家而己天之報施未可知己延安宗氏鸞鳳相羣圭璧相暎族姓且蘩陸機之詞賦潘岳之文彩兼之以君珍之猷豈不艶哉小子孤露未能詳知先代之事而今族侄等謹守詩禮同風鄒魯豈敢曰無替云乎曺尙書之書權佐郞之文己悉玆不敢贅刊本二卷鑄子印出於吾南訖役於醴泉東岳寺云耳
丁卯三月 日 後孫 興濂 謹跋
우리 연안송씨보(延安宋氏譜)가 십구세(十九世)를 전(傳)해 왔으면서 예전에 족보(族譜)가 없었고 지금(至今) 비로소 영남해서종인(嶺南海西宗人)이 순모(詢謀)해서 보첩(譜牒)을 이루고 양파종인(兩派宗人)이 조상서(曺尙書) 권좌랑(權佐郞)에게 서문(序文)을 청(請)해서 서문(序文)을 하고 발(跋)은 연안종장(延安宗丈)이 이루고서 흥렴(興濂)에게 말미(末尾)의 글 하라고 하거늘 사양(辭讓)을 해도 되지 않는지라 대략(大略) 아래와 같이 말을 하노니 말하기를 아―소노천(蘇老泉)이 족보서(族譜序)했는데 보책(譜冊)으로 소목(昭穆)의 차례와 본지(本支)의 근원(根源)을 보게된즉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이 생긴다라고 했으니 희(噫)라 군자(君子)가 저 돈종목족(敦宗睦族)에 보첩(譜牒)을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천연(天然)으로 애심(哀心)에서 애연(藹然)하게 흡족(洽足)하게 동화(同和)를 하고 여유(餘裕)있게 육성(育成)을 하며 상체지시(常棣之詩[시경상체편<詩經常棣篇>])와 영목지십(英木之什)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感動)이 되며 그 차(次)에 이르른 즉 보책(譜冊)이 무조(無助)함이 되지 않으리라 우리나라 중세(中世)에 비록 대가세족(大家世族)이 겨우 보첩(譜牒)이 있었으나 지금(至今)은 가가호호(家家戶戶)마다 오히려 갖추지 않는 이가 없으니 우리 보책(譜冊)도 어찌 없을 수 있으리요 저―오종(吾宗)으로 말하자면 십대조(十代祖) 승지공(承旨公)이 낙남(落南)하시어 양대(兩代)가 급제(及第)하시고 삼사세(三四世)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 문사(文士)가 배출(輩出)되어 효제(孝悌)의 정(政)이 연대(聯代)에 더욱 독실(篤實)하셨다. 바야흐로 그 시(時)에 비록 족친(族親)을 모아 합보(合譜)를 함이 없이도 멀리 두루 구(求)하여 비록 아득히 먼 촌수의 주손(冑孫)이라도 형제(兄弟)와 같음이 있으며 지친(至親)이면서도 벌써 복(服)을 입지 아니한 친척(親戚)이라 할지라도 지행(至行)은 숭상(崇尙)해야 할지어다. 족조(族祖) 만은공(晩隱公)에 이르러서는 령원급난(鴒原急難)에도 무괴포융(無愧褒融)하니 이로 말미암아 볼 것 같으면 아들이 아비보다 나으며 손자(孫子)가 조부(祖父)보다 나아서 끼쳐진 풍범(風範)과 남은 운치(韻致)가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오종(吾宗)이 불성(不盛)하여 십세이래(十世以來)로 다만 칠팔가(七八家)가 있을 뿐이니 하늘의 보답(報答)을 시여(施輿)함도 아직 알리로다. 연안종씨(延安宗氏)는 난봉(鸞鳳)이 상군(相羣)하며 규벽(圭璧)이 상영(相暎)하여 족성(族姓)이 또한 번성(繁盛)하니 육기(陸機)의 사부(詞賦)와 반악(潘岳)의 문채(文彩)로 군진(君珍)의 유(猷)를 겸하였으니 어찌 흠염(欽豔)하지 아니하리요. 소자(小子)는 고(故)로해서 미능상지선대(未能詳知先代)의 일이면서 지금(至今) 족성등(族姓等)이 삼가 시례(詩禮)를 지켜서 추(鄒)나라 노(魯)나라 풍속(風俗)과 같으니 어찌 감(敢)히 떨어뜨리지 아니하다고 이르노라. 아― 조상서(曺尙書)의 글과 권좌랑(權佐郞)의 글에 이미 다 말씀하셔서 이에 감(敢)히 췌언(贅言)을 못하고 간행(刊行)된 두 권(卷)과 글자를 주자(鑄字)로 인출(印出)은 우리 남(南)쪽 예천동악사(醴泉東岳寺)에서 보역(譜役)을 마쳤노라
정묘삼월 일(丁卯三月 日) 후손(後孫) 흥렴(興濂)은 근발(謹跋)하노라
又
延安宋氏世譜譜吾延宋之世也吾祖也我知之郯子有是言辨物類而昧世本蘇氏非之爲人後而不知其自出可乎夫生寄死歸之項爲人間一世仁世間遭遇歷履不啻千萬何可一二記載而惟其生歲卒年配氏葬山之合須錄而齗不容闕者區區以爲譜中要義無有苐一於此何也歷代甲子周環無窮通門名字犯同不一不有紀元何以知年庚之後先不有名列何以辨彼此之客主恭惟我延安府院君肅毅公生麗季事玄陵討紅賊受丹書實爲貫延之始祖不幸家史散逸無紀肅毅公以下有曰侍史曰贊成事未知其爲子爲孫而贊成之子曰政堂文學政堂之孫曰進士公曰大諫公曰承旨公分爲三派中祖而承旨公卽我落南鼻祖也自肅毅公建勳己亥至承旨公登第戊寅爲一百年承旨公子曰著作公著作公之玄孫曰守拙堂自著作公升庠戊午至守拙堂守城丁酉爲一百年自戊寅後己卯距戊午前丁巳爲三十九年丁酉之後又三十九年爲丙子而其後一百年爲先君子二十一歲丙辰先君於守拙公爲五代孫丙辰後四十年爲丙申上距始祖己亥總四百又一十又八年于時本生先君子修草譜一編作序以弁之而譜錄必以至字代子字不爲直書昭穆于侍史贊成兩世盖所以仍傳疑之舊而鄭重之也今不敢輒改舊例以存遵先志之義而此是自吾王考所嘗陳椽經理而未克完事者顧此寡陋苦無足以承當而籍鄕諸宗以不肖之粗有家庭舊聞謬爲託付實勤且摯不肖何敢讓何敢讓玆與門內稍解書字者及戚友冶城宋鴻九甫極意摹錄另加刪潤以爲印傳之地而苐遺事草略印期短促竟未能致精而盡力猶是而必求其完美不幾於掣肘而要其善書耶殊爲欠恨無己僅此粗就之後有能更爲續修而整釐其訛脫焉則其爲吾宗之幸又何可旣喩邪不任眷眷乎有望於來裔而感念今昔實不勝愧懼云爾
丙申後三十一年丁卯三月上澣 守拙堂六代孫 思近 敬書
보책(譜冊)은 우리 연안송(延安宋)의 세계(世系)이다. 우리 조상(祖上)은 내가 알고 있으나 담자(郯子)의 이른 말이 있나니 물류(物類)를 분변(分辨)하면서 세본(世本)에 혼미(昏迷)하다하니 소씨(蘇氏)는 비지(非之)하면서 남에 뒤를 이을 자(者) 자기의 출처(出處)를 알아야 한다. 저 세상(世上)에 살고 주고 돌아가는 동안 인간(人間)의 일세(一世)가 되는 것이니 인간세상(人間世上) 사이에 조우(遭遇)와 이력(履歷)이 천만(千萬)가지뿐만 아니라 어찌 가(可)히 하나 둘 기재(記載)하리요. 그러나 오직 그의 생세졸년(生世卒年) 배씨(配氏) 장산(葬山)을 합(合)하여 기록(記錄)해서 단연코 한가지도 빼서는 아니되는 것이 구구(區區)함을 보책(譜冊) 가운데 요긴(要緊)한 뜻이 제일(第一)의 뜻이 이에 있음이 없으니 어쩐 일이요. 역대(歷代)의 갑자(甲子)가 돌아오는 것이 무궁(無窮)하니 온 문중(門中)이 항렬을 따르지 아니함이요 기원(紀元)있지 아니하니 어째서 나이가 동갑(同甲)의 후선(後先)를 알며 이름에 항열(行列)이 없으면 어째서 피차간(彼此間) 객주(客主)를 분변(分辨)하리요
공손(恭遜)하게도 오직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숙의공(肅毅公)은 여계(麗季)에 나서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홍건적(紅巾賊)을 토멸(討滅)하고 단서(丹書[공신록<功臣錄>과 같음])를 받았으니 실상(實狀) 연안(延安)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시조(始祖)이다. 불행(不幸)하여 가사산일(家事史散逸)하여 기록(記錄)이 없으나 숙의공(肅毅公) 이하(以下)에 시사공(侍史公) 찬성(贊成)이 손자(孫子)인지 자제(子弟)인지 아직 알지 못하며 찬성사공(贊成事公)의 아들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요 정당(政堂)의 손(孫)에 진사공(進士公) 대간공(大諫公) 승지공(承旨公)하여 삼파(삼파)로 나누어졌다. 중조(中祖)이면서 승지공(承旨公)은 즉 나의 낙남비조(落南鼻祖)이다. 숙의공(肅毅公)이 공훈(功勳)을 세운 기해년(己亥年)에서 승지공(承旨公)이 급제(及第)하신 무인(戊寅)까지 일백년(一百年)이요 승지공(承旨公)의 자(子)는 저작(著作)이요 저작공(著作公)의 현손(玄孫)이 수졸당(守拙堂)이니 저작공(著作公)이 진사(進士)에 오르신 무오(戊午)로부터 수졸당(守拙堂)이 수성(守城)하신 정유년(丁酉年)에 이르도록 일백년(一百年)이 되니 무인(戊寅)으로부터 후(後) 기묘(己卯)는 무오전(戊午前) 정사년(丁巳年)까지 거리(距離)는 삼십구년(三十九年)이며 정유지후(丁酉之後) 삼십구년(三十九年)이 병자년(丙子年)이면서 후일백년(後一百年)에 선군자(先君子) 이십일세(二十一歲) 병진년(丙辰年)이니 선군(先君)께서 수졸공(守拙公)의 오대손(五代孫)이 되며 병진후(丙辰後) 사십년(四十年) 병신년(丙申年)이 되니 위로 시조(始祖) 기해년(己亥年)과의 거리(距離)는 총사백일십팔년(總四百一十八年)이라 그때에 본생가(本生家)의 선군자(先君子)께서 초보일편(草譜一編)을 닦아서 서문(序文)을 지어서 책(冊)머리에 하시고 보록(譜錄)에 반드시 지자(至字)에 이르러서는 대자자(代子字)로 직서소목(直書昭穆)으로 하고 시사(侍史) 찬성(贊成) 양세(兩世)를 아니한 것은 대개 예전부터 전(傳)해온 대로한 것은 정중(鄭重)하게 함이요 지금(至今)에 감(敢)히 문득 구례(舊例)를 선조(先祖)의 뜻을 보존(保存)해 따르고자 하는 뜻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나 이는 우리 할아버지로부터 일찍이 경리(經理)로 지연(陳椽)되어 완사(完事)를 능(能)히 아직까지 못한 것을 돌아보건데 들은 것이 적고 우누(愚陋)한 것이 족(足)히 승당(承當)할 수 없는 것 같아서 적향제종(籍鄕諸宗)이 불초(不肖)로써 가정(家庭)에서 예전부터 들은 것이 있다해서 잘못 부탁(付託)을 하니 실상(實狀) 부지런하면서도 진지(眞摯)함이다 불초(不肖) 어찌 감(敢)히 사양할고 어찌 감(敢)히 사양하리요 이에 문내(門內)에 글자 조금 해석하는 자(者)와 척우(戚友)인 야성(冶城)송홍구(宋鴻九)와 뜻을 다해서 모록(摹錄)해서 산(刪)과 윤(潤)을 특별(特別)히 하여 인쇄(印刷)할 경지(境地)에 이르게 해서 저 유사(遺事)의 초(草)와 대략(大略)을 인쇄(印刷)할 시기(時期)이 짧고 바빠서 마침내 능히 정밀(精密)함을 이루어 진력(盡力)하지 못하니 오히려 이는 반드시 그 완미(完美)함을 구(求)하다가 체주(掣肘[발꿈치를 잡힘])가 거의하지 않을까 그 선서(善書)가 중요(重要)한 것인가 달리 빠트린 한(恨)을 마지못하게 되어 겨우 이렇게 조율(粗率)하게 이루운 뒤에 능히 다시 속수(續修)하게 됨이 있으면서 와탈(訛脫)된 것을 정이(整釐)할 것 같은 즉 그는 오종(吾宗)의 다행(多幸)이니 또 어찌 가(可)히 이미 효유(曉喩)한 건가 잊을 수 없어 내손(來孫)에게 기대(期待)를 바라노라 금석(今昔)의 감회(感懷)를 생각(生覺)하니 고(故)로 부끄럽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노라 이르리라
병진후삼십일년정묘삼월상한(丙申後三十一年丁卯三月上澣)
수졸당육대손(守拙堂六代孫 ) 사근(思近)은 경서(敬書)하노라
延安宋氏世譜
庚戌譜
庚戌年:1850년
延安宋氏世譜(庚戌譜:1850년)
延安宋氏世譜序
辨姓之禮始於周其世系掌於太史秦漢以後此制不行士大夫於是有家譜六朝至唐矜重門第隋之經籍志唐之藝文志皆以譜牒爲史部之一門沿及宋元此風復墮然稽古之儒懷敬宗收族之思者頗時時間作盧陵眉山二譜尤爲後來取法而二家之譜一支一譜者也今之譜一族一譜者也一支一譜各詳所出卽彼此可以互明一族一譜例無別見義不得而偏略也惟我東國素重氏族家皆有譜亦一族一譜者也譜以姓異姓以貫別而以其得貫之祖爲始祖宋氏之貫于延安者以延安府院君諱卿爲始祖自其子若孫至于幾代雲仍按派而成譜有源有流派別乃明而詳其生卒古法也楊子雲家牒載以甘露二年生周氏譜載以翼六十四卒者是也詳其生記長幼也詳其卒記壽天也益以官爵記顯達也又益以塋墓圖懼湮也益以族居圖懼渙也益以聯名紀世圖懼紊也於是乎譜具矣絲牽繩貫如綱在綱亦繁而非繁複而非複也然則門戶之盛衰子孫之昌熾益可驗於是譜在昔肅毅公仕于麗討紅賊封元勳有子上卿有孫殉節積累善果嗣承遂繁分爲南北派有若退休齌勳德著世俎豆于月岡有若昌原公仗義殲賊血食顯忠以至守拙堂之義聲延昌公之殉節卓然爲一代之彦而咸華一門巍功高官文學篤行代不乏人非世濟其美能之乎今其後裔散居嶺湖畿海之間者其麗不億則乃合氏族明系派使報本追遠之心油然而自生蓋必祖宗積德者深而後其子孫蕃衍可編爲書非寒門細族所能也又必其子孫克承先德無忘敬爲宗收族之誼後可成其事非誠且勤能之乎噫宗法壞而世敎不明派系疎而民德不厚此仁人志士之所共慨惜者也余於宋氏之譜喜其有後焉惟諸宋氏八而勉宗法之行出而講系派之本俾世敎明而民俗厚則是書也不第爲辨姓而紀世也可不樂爲之序乎修譜而請弁文者之璉錫霖詩星也
崇禎紀元後二百二十三年庚戌六月日輔國崇祿大夫 行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 經筵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洪敬謨序
경술일팔오○년서문(庚戌一八五○年序文)
성(姓)을 구별(區別)하는 례(禮)는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始作)하여 그 조상(祖上)의 세계(世系)가 태사(太史)〔사기(史記)를 맡은 벼슬〕에게 맡겨저 있더니 진(秦)나라 한(漢)나라 이후에 이 제도(制度)가 없어져 사대부(士大夫) 집에서 각자(各者) 가보(家譜)를 두게 되었다 육조(六朝)〔오(吳) 동진(東晋) 송(宋) 제(齊) 양(梁) 진(陳)]로부터 당(唐)나라에 이르러 문중(門中)을 존중(尊重)히 여기었으니 수(隋)나라의 경적지(經籍志)와 당(唐)나라의 예문지(藝文志)가 다 문중(門中) 보책(譜冊)으로써 사관(史官)이 관리(管理)하더니 후일(後日) 송(宋)나라 원(元)나라에 이르러 이 제도(制度)가 다시 끊어졌다 그러나 옛 풍속(風俗)을 생각하는 선비들이 조상(祖上)을 높이고 일가(一家)를 생각하는 자(者)가 간간이 생겼으니 여능(廬陵)〔구양수(歐陽修) 출생지(出生地)〕와 미산(眉山)〔소순(蘇洵)의 출생지(出生地)〕의 두 집 족보(族譜)가 더욱 후세(後世)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저 두 집의 족보(族譜)는 한 집안의 족보(族譜)요 오늘날의 족보(族譜)는 한 씨족(氏族) 전체(全體)의 족보(族譜)가 되니 한 집안의 족보(族譜)는 그 규모(規模)가 작아서 그 계별(系別) 생졸(生卒) 등을 상세하게 기록(記錄)할 수 있고 한 씨족(氏族)의 전체(全體) 족보(族譜)는 제도(制度)는 같으나 그 규모(規模)가 조상(祖上)을 높이고 일가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문중(門中)마다 족보(族譜)가 있으니 이 또한 한 씨족(氏族)의 대보(大譜)이다
족보(族譜)라는 것은 첫째 성별(性別) 관별(貫別)이 중요(重要)하기 때문에 그 본(本)을 얻은 할아버지를 시조(始祖)로 삼기 마련이다 송씨(宋氏)가 연안(延安)으로 본(本)을 삼는 자는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휘경(諱卿)으로 시조(始祖)를 삼아 그 아들과 손자(孫子)로부터 후세(後世)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각파(各派)를 통합(統合)하여 족보(族譜)를 만드니 마치 원천(源泉)이 흘러 천파만지(千派萬支)로 흘러가듯 그 계통(系統)이 소상(昭詳)하고 생졸(生卒)이 명확(명확)하여 옛 법과 같다
양자운(楊子雲) 가첩(家牒)에는 감로(甘露)〔연호(年號)〕 이년생(二年生)이라 기록(記錄)되어 있고 주씨(周氏) 족보(族譜)에는 익(翼)의 육사(六四)에 졸(卒)이라 한 것이 모두 이런 제도(制度)이다 그 출생(出生)한 날을 명확(明確)히 기재하는 것은 어른과 아이의 구별(區別)을 정확(正確)히 함이요 죽은 날을 소상(昭詳)히 기록(記錄)하는 것은 오래 살고 일찍 죽은 것을 알고자 함이요 관직(官職)을 기재(記載)하는 것은 자손(子孫)이 잘된 것을 알림이요 또 묘소(墓所)를 기입(記入)하는 것은 조상(祖上)의 유해(遺骸)를 읽어버릴까 염려함이요 일가들의 사는 곳을 기입(記入)하는 것은 종족간(宗族間)에 흐트러질까 염려함이요 이름을 기입(記入)할 적에 부자(父子)는 상하(上下)로 형제(兄弟)는 좌우(左右)로 기재(記載)하는 것은 세대(世代)가 문란(紊亂)할까 두려워함이다
이에 위와 같이 소상(昭詳)히 족보(族譜)가 이루어지니 실〔사(絲)〕이 엉킨 것 같으나 다 연맥(連脈)이 닿고 그물〔망(網)〕같이 망라(網羅)했으나 다 벼리가 있고 또한 번잡한 것 같으나 질서(秩序)가 있고 복잡(複雜)한 것 같으나 계통(系統)이 요연하다 그런즉 문호(門戶)의 성쇠(盛衰)와 자손(子孫)의 번창(繁昌)하고 침체됨을 다 이 족보(族譜)를 보면 알 수 있다
옛날 숙의공(肅毅公)은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홍건적(紅巾賊)을 토벌(討伐)하여 높은 벼슬에 봉(封)해졌고 공(公)의 아들도 역시(亦是) 귀(貴)한 벼슬에 봉(封)해졌고 또 손자(孫子)는 순절(殉節)했으며 덕(德)을 쌓고 인(仁)을 베풀어 그 음덕(蔭德)으로 후손(後孫)들이 번창(繁昌)하여 남북양파(南北兩派)로 나누어졌으니 퇴휴제(退休齌)는 높은 벼슬과 덕행(德行)이 세상(世上)에 나타나 월강서원구산서원(月岡書院龜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창원공(昌原公)은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왜적(倭賊)을 섬멸하여 그 공(功)으로 현충사(顯忠祠)에 배향(配享)되었고 이후(以後)에는 수졸당(守拙堂)의 의성(義聲)과 연창공(延昌公)의 순절(殉節)은 탁연(卓然)히 일대(一代)의 위인(偉人)으로 계계승승(繼繼承承) 가성(家聲)을 떨쳤다고 크고 높은 벼슬과 도학문장(道學文章)과 독행(篤行)한 인물(人物)이 대대(代代)로 배출(輩出)하였으니 어찌 이런 일이 선조(先祖)의 유덕(遺德)을 계지(繼志) 술사(述事)하지 않았으면 가능(可能)했으랴 이제 그 후예(後裔)가 영호(嶺湖)〔영남(嶺南) 호남(湖南)〕 및 기해(畿海)〔경기(京畿) 황해(黃海)〕 지방(地方)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수자(數字)가 무려 수만(數萬)일진대 이에 모든 일가를 수합(收合)하여 파계(派系)를 밝히어 자손(子孫)들로 하여금 보본(報本) 추원지심(追遠之心)이 자연(自然)히 생기도록 할 것이다 대개 선조(先祖)들이 덕(德)을 쌓고 선(善)을 심어 그 음덕(蔭德)이 끼쳐져야 그 자손(子孫)들이 잘되어 족보(族譜)를 하게 마련인데 간난(艱難)한 문중(門中)이면 어찌 능(能)히 할 수 있으리오 또 그 자손(子孫)들이 조상(祖上)이 끼친 음덕(蔭德)을 저버리지 않고 조상(祖上)을 높이고 일가를 소중히 생각한 후(後)에 가능한 일이니 어찌 성의(誠意)없이 되겠느냐
슬프다 근세(近世)에 종법(宗法)이 무너지고 세교(世敎)가 어두워 가족간(家族間)에는 남과 같이 소원(疏遠)해지고 따라서 민심(民心)이 박하니 이는 어진 사람과 뜻있는 선비의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송씨(宋氏)들 족보(族譜)에 그 뒤가 있음을 기뻐하노니 원(願)컨대 모든 송씨(宋氏)들은 안으로 들어가면 종법(宗法)이 밝도록 힘쓰고 밖으로 나오면 종족간(宗族間)에 계통(系統)을 찾도록 하여 세교(世敎)가 밝고 민덕(民德)이 후(厚)한 면이 족보(族譜)가 비단 성(姓)을 구별(區別)하고 세교(世敎)를 기록(記錄)할 뿐만 아닐 것이니 가(可)히 어찌 서문(序文)을 짓는데 기쁘지 않으랴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하고 서문(序文)을 청(請)해온 자는 송지연(宋之璉) 석림(錫霖) 시성(詩星) 등(等) 이다
숭정(崇禎) 기원후이이삼년(記元後二二三年)〔서기일팔오○(西紀一八五○)〕경술육월일(庚戌六月日) 보국숭록대부 행판동녕부사겸이조판서 판의금부사지경연사(輔國崇祿大夫 行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 判義禁府事知經筵事)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弘文館提學 同知成均館事) 홍경모(洪敬謨) 서(序)
跋文(발문)
易曰含弘光大以時發其惟我宋氏之謂乎我宋系出延安易當麗系始祖府院君諱卿討紅賊大有功於邦家封延安諡肅毅公肅毅公孫大司成諱光彦爲延安君延安君弟諱雲龍官至中郞將也大司成之孫禮曹判書諱寶山號退休齌享于長水月岡書院其後簪纓相續子孫列居於鎭安長水焉中郞將之子諱復隆官贊成事子諱根官至政堂文學其後子孫益繁有若府使公延城之勳延昌君麟閣之畵幷以尸祝于顯忠祠忠愍祠如李白沙文忠之筆大捷碑曰延安豪傑宋德潤至今延城一邑炳烺光輝爲士林牙頰之香吾祖承旨公以忠義文學退居安東之豊山大名鄕鄰而吾六代祖都事公諱樀與其弟諱構適遭家難兄弟爭死有伋壽褒融之懿殺身成仁申戒子孫不以爲間則嶺以南芳名懿蹟有若周序之天球魯殿之靈光而嶠鄕之籍以爲重者未必不在於斯則吾宋修譜之擧不但爲一家一氏之幸抑亦爲國家獎忠敦義之一大關棙而俄所謂啣弘光大以時發者非耶第恨丁卯重刊時以始祖諱啣誤書事己有諸派往復文字而歲己酉參奉瑞駿氏多年遊洛詳考諸宗之派譜博采麗史縉紳溯源諸記則吾派之以璟字誤傳而他派之以卿字無疑矣卄世傳疑之蹟始得明的之筆子孫之爲愴感爲如何哉舊譜之誤書諱字新譜則定本諱舊譜之以至字系代者新譜則又以諱勛著錄其非吾祖宗綿遠之澤子孫昌大之福而不肖於此尤有所感焉古人云人不可以無年我如無年則其何以再見吾譜之重成於五十年之後耶况於丁卯刊時不肖亦與之同八於任名而想其時同事之人擧載鬼錄而不肖獨存復見吾宗之大事悲疚感愴爲之一涕落落嶠鄕退伏窮廬昏耄精神行將就木追念昔日丁乙之役黯黯馳神於花樹之筵矣重以吾王孝季父記跋皆八於舊譜中而以諱啣事事面有異則刪商存拔又未可必不肖雖曰不文不可無繼序之責且以年高再見亦爲稀事故不揆僭妄略叙以歸之自今以往盥手慹香敬尊宗譜於案上以世列侍于祖宗之座共講弘大之業而益勉敦睦之行則吁其幸矣
歲庚戌仲春下澣 裔孫八十歲 宜恭(十九世孫) 謹跋
역왈(易曰) 넓게 포함(包含)하고 크게 빛나면 때를 봐서 발(發)한다고 하니 그는 오직 우리 송씨(宋氏)를 이름인가? 우리 송(宋)은 계통(系統)은 연안(延安)에서 나왔으면서 고려(高麗)의 말엽(末葉)을 만나서 시조(始祖) 부원군(府院君) 휘(諱) 경(卿)이 홍건적(紅巾賊)을 토멸(討滅)하고 크게 나라에 공(功)이 있어서 봉연안(封延安)하고 시(諡)를 숙의공(肅毅公)하다. 숙의공(肅毅公)의 손자(孫子)는 대사성(大司成) 휘(諱) 광언(光彦)은 연안군(延安君)하고 연안군(延安君)의 제(弟)의 휘(諱)는 운룡(雲龍)으로 관(官)이 중랑장(中郞將)이다. 대사성(大司成)은 손자(孫子) 예조판서(禮曹判書) 휘(諱) 보산(寶山)이니 호(號)는 퇴휴제(退休齌)이며 장수월강서원(長水月岡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그 후(後)에 고관대작(高官大爵)이 서로 이어져서 자손(子孫)이 진안(鎭安) 장수(長水)에 열거(列居)하다. 중랑장(中郞將)의 자(子) 휘(諱)는 복융(復隆)이며 관(官)이 찬성사(贊成事)요 자(子) 휘(諱) 근(根)은 관(官)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이요 그 후(後) 자손(子孫)이 익번(益繁)하여 부사공(府使公)같은 이가 있어서 연성(延城)의 훈(勳)과 연창군(연창군)에 인각(麟閣)의 화(畵)가 있어서 모두 현충사(顯忠祠) 충민사(忠愍祠)에 시축(尸祝)되었으며 이백사문충(이백사문충)의 붓으로 대첩비(大捷碑)에 연안호걸송덕윤(延安豪傑宋德潤)이라고 썼으니 지금(至今) 연성일읍(延城一邑)에 불꽃처럼 빛나서 사림아협지향(士林牙頰之香)이라 하였다 우리 할아버지 승지공(承旨公)은 충의문학(忠義文學)으로 안동(安東)의 풍산(豊山)으로 이거(移居)하여 향린(鄕隣)에 크게 이름이 났으며 우리 육대조(六代祖) 도사공(都事公) 휘(諱) 적(樀)은 그 아우 휘(諱) 구(構)로 가난(家難)을 마침 만나서 형제쟁사(兄弟爭死)하여 급수포융(伋壽褒融)의 아름다움이 있어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 계자손(戒子孫)하대 이 일로 가정(家庭)에 흔극(釁隙)이 나서는 아니 된다고 함인 즉 영이남(嶺以南)에 꽃다운 이름 아름다운 자취가 주(周)나라 학교(學校)에 천구(天球)와도 같고 노전(魯殿)의 영광(靈光)과도 같아서 교남(嶠南)에서 소중(所重)함이 적적(籍籍)한 것이 아직 반드시 이에 있음만이 않은 즉 우리 송씨(宋氏) 수보(修譜)의 일이 다만 한집안 한 씨족(氏族)의 행(幸)이 아니라 아니 국가(國家)에 충성(忠誠)을 권장(勸獎)하고 의리를 두터이 하는 한번 커다란 본보기이니 저번에 소위(所謂) 넓게 포함(包含)하고 크게 빛나면 때를 봐서 발(發)한다는 것이 아니리까. 저 한(恨)스러운 것은 정묘중간시(丁卯重刊時)에 시조(始祖) 휘함(諱啣)을 잘못 쓴 것은 이미 모든 파(派)에서 왕복(往復)한 문자(文字)가 있으면서 세기유(歲己酉)에 참봉(參奉) 서준(瑞駿)씨(氏)가 다년(多年) 경성(京城)에서 있으면서 제종(諸宗)들의 파보(派譜)를 상고(詳考)하고 여사(麗史)를 넓게 채집(採集)하고 진신(縉紳)들의 근원(根源)을 소급(遡及)하는 제기(諸記)를 본즉 우리 파(派)의 경자(璟字)가 오전(誤傳)이며 타파(他派)에서 경자(卿字)로 함이 의심(疑心)이 없는지라 입세전(卄世傳) 해 오든 의심(疑心)된 자취가 비로소 명적필(明的筆)을 얻게 되니 자손(子孫)들 창연(愴然)한 감회(感懷)가 어떠한가. 아- 구보(舊譜)에 오서(誤書)된 휘자(諱字)를 신보(新譜)에 즉 본휘(本諱)를 정(定)하게 되고 구보(舊譜)에 지자(至字)를 계자(系字)로 대신(代身)한 신보(新譜)에 즉 또 휘훈자(諱勛字)를 들어내서 기록(記錄)하게 되니 그는 우리 조종(祖宗)의 면원(綿遠)한 덕택(德澤)과 자손창대(子孫昌大)의 복(福)이 아니리까. 불초(不肖)가 이에 더욱 느끼는 바가 있는지라 고인이 이르기를 인불가이무년(人不可以無年)이니 내가 만약 무년(無年)이면 곧 어찌 우리 보책(譜冊)이 오십년후(五十年後)에 거듭 이루어짐을 두 번이나 볼 수 있을까 하물며 정묘년(丁卯年) 간행시(刊行時)에 불초(不肖)가 또한 참여(參與)를 해서 함께 임명(任名)에 들었을까? 상상(想像)컨대 그때 동사(同事)한 사람이 모두 귀록(鬼錄)에 등재(登載)되었으나 불초(不肖)가 독존(獨存)하여 오종(吾宗)의 대사(大事)를 다시 보게 되니 슬프고 병들어 창연(愴然)한 감회(感懷)에 한번 눈물을 떨구게 된다. 교남(嶠南)고을의 궁여(窮廬)에 물러나서 엎드려 혼모(昏耄)한 정신(精神)이 취목(就木)에 장차(將次) 가려고 하는게 석일정을(昔日丁乙)의 역(役)을 아득히 화수(花樹)의 자리에 정신(精神)이 달리는 듯 하도다. 거듭 우리 왕고(王考)와 계부(季父)의 기(記)와 발(跋)이 모두 구보중(舊譜中)에 들어갔으니 그러나 휘함(諱啣)의 일은 사면(事面)이 다름이 있는 즉 산(刪)하고 존발(存拔)을 상량(商量)함을 또한 가(可)히 기필(期必)못하리라. 불초(不肖)가 수왈(雖曰)글을 못한다고 하나 계속(繼續)해서 서(序)를 책임(責任)지고 아니할 수 없고 또한 나이가 많아 재견(再見)이 또한 휘귀(稀貴)한 일이라. 고(故)로 참남망망(僭濫妄妄)을 무릅쓰고 대략(大略) 서술(叙述)해서 돌려보내고 지금(至今) 이후(以後)로 손을 씻고 향(香)을 피우고 종중(宗中)의 보책(譜冊)을 책상 위에 공경히 받들게 하니 조종(祖宗)의 좌석(座席)을 세열(世列)해서 모신 듯 하며 함께 넓고 큰 사업(事業)을 강(講)하고 돈목(敦睦)의 행(行動)동을 더욱 힘쓰게 되면 아- 그 다행(多幸)한 일이리라.
세경술중춘하한(歲庚戌仲春下澣)
예손팔십세(裔孫八十歲) 의공(宜恭(十九世孫)) 근발(謹跋)
合散而一殊理也而譜牒之設卽是理也溯其本則一人也姓統祖考所自出氏別子孫所自分從源見流尋枝達根則人皆知今之疏遠乃古之親屬也是故易同人之象曰類族辨物又曰同人于宗族以其類宗以同人者卽宗法之始而宗法廢於秦漢譜法始於唐宋譜法者所以明系派尊祖重宗之義也吾宗之宋系出延安始祖肅毅公諱卿麗季恭愍朝討平紅賊封府院君而畿湖舊譜直以卿字爲諱安東延安舊譜以璟字爲諱諱音相似官諡如合無乃遠孫訛傳之致歟且肅毅公下以至字系代者是誠傳疑而今觀圻湖諸譜則判書公諱勛字著錄於肅毅公下中郞之上繼代無疑故今以勛字代至字以不肖之管見質言改正誠極兢惶然以其取信無疑也判書公生二男長諱光彦官至大司成封延安君次諱雲龍官至中郞將大司成之裔居于圻湖至退休齌諱寶山享于長水月岡書院簪纓聯繼子孫繁衍中郞之曾孫諱有良生三男長諱保殷進士移居成川譜牒無聞次諱嗣殷官至大司諫世居貫鄕其後忠孝之士世世間出圖像麟閣俱享額院連以卓異之孝或有八 啓或載邑誌大司諫之季承旨公諱守殷落南于安東至都事公諱樀兄弟爭死有褒瀜之行守拙堂晩悟齌遊文獻之家淵源不絶去丙寅譜只爲嶺海派譜故方欲與圻湖合議之際鎭安宗人錫霖氏己酉春適到貫鄕完定是議爲吾宗者莫不欣然響應家貧者不辭其貧而鳩其財路遠者不憚其遠而收其單越明年齊會於江西之僦屋前日之不聞聲光者赫蹄相屬平昔之未接顔範者情話胥悅序族行之親疏識鄕里之遠近拜揖言笑之間孝悌之心油然而生矣未還之事始成於百年後諸宗之力而諸宗散處圻湖嶺海人員之或多或小財力之或饒或略固不足論而苟非一心共力咸期於成則安能收其功於數朔之間耶肅毅公一身之後自昆弟而雲仍愈遠愈疏至於路人若不以譜牒明之則千枝一本萬派一源孰知吾之於路人同爲一祖之孫也及其完也不可無記故略述惇宗之意以叙修譜之由而前之散者合之昔之殊者一之則是譜之全殆若秤之有星綱之擧目開卷瞭然比舊譜不啻倍蓰矣豈非盛且幸歟凡我同譜之人盍於斯勉旃而各推向先之誠克盡敦睦之道使疎者親遠者近雖在千里之外百世之後觀吾譜而推本於始祖所自出則是冊之成可以有補於無窮矣不嫌其拙遂爲之記
歲在上章閹茂流月下澣 後孫 瑞駿 之大 之璉 幷謹跋
합(合)하고 흩어지면서 하나로 함은 다른 이치(理致)이면서 보첩(譜牒)의 설(設)이 곧 이런 이치(理致)이다.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인(一人)이니 성(姓)과 계통(系統)은 조고(祖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니 성씨별(姓氏別)로 자손이 소자분(所自分)이라 근원(根源)을 조치 흘러감을 보고 가지를 찾으면 뿌리에 달하면 사람마다 모두가 지금(至今)에 소원(疏遠)함은 옛날에는 친속(親屬)이다. 이런 고(故)로 역경동인지상(易經同人之象)에 말하기를 류족(類族)으로 변물(辨物)이라고 하고 우왈(又曰) 동인우종족(同人于宗族)하며 이기류종(以其類宗)이라 하니 동인(同人)이란 것은 곧 종법(宗法)의 시작(始作)이면서 종법(宗法)이 진한(秦漢)때에 폐지(廢止)되었다가 보법(譜法)이 당송(唐宋)때에 시작(始作)이 된 것은 소이계파(所以系派)를 밝히고 존조중종(尊祖重宗)하는 뜻이다 우리 종중(宗中)의 송(宋)은 계통(系統)이 연안(延安)에서 나왔으며 시조(始祖) 숙의공(肅毅公) 휘(諱) 경(卿)은 여계(麗季) 공민조(恭愍朝)에 홍건적(紅巾賊)을 토평(討平)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봉(封)하였으나 그러나 기호구보(畿湖舊譜)에는 곧바로 경자(卿字)로 휘(諱)를 했으나 안동연안구보(安東延安舊譜)에는 경자(璟字)로 휘(諱)를 해서 휘(諱)의 음(音)은 상사(相似)하고 관시(官諡)는 여합(如合)하니 원대(遠代)의 후손(後孫)이 와전(訛傳)의 소치(所致)이니 어쩔 수 없도다. 또 숙의공(肅毅公) 이하(以下)에 지자(至字)로 계대(系代)한 것은 이는 전의(傳疑)이면서 지금(至今) 기호지방(畿湖地方) 제보(諸譜)엔 즉 판서공(判書公) 휘(諱) 훈자(勛字)가 드러나게 기록(記錄)되어 숙의공(肅毅公) 아래이고 중랑장(中郞將)의 위이면 계대(系代)가 의심(疑心)이 없는 고(故)로 지금(至今) 훈자(勛字)를 대지자(代至字)하니 불초(不肖)의 관견(管見)으로는 질언개정(質言改正)하니 진실로 극(極)히 황공(惶恐)한지라 연이(然以)나 그는 취신(取信)할 일이니 무의(無疑)한 일이다. 판서공(判書公)이 이남(二男)을 낳으니 장(長)의 휘(諱)는 광언(光彦)이며 관(官)이 대사성(大司成)이며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졌고 차(次)의 휘(諱)는 운룡(雲龍)이니 관(官)이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으며 대사성(大司成)의 후예(後裔)는 기호지방(畿湖地方)에 살면서 퇴휴제(退休齌) 휘(諱) 보산(寶山)은 장수월강서원(長水月岡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잠영(簪纓)이 연계(聯繼)하여 자손(子孫)이 번연(蕃衍)하고 중랑장(中郞將)의 증손(曾孫) 휘(諱) 유량(有良)은 삼남(三男)을 낳으니 장(長)의 휘(諱)는 보은(保殷)이니 진사(進士)요 성천(成川)으로 이거(移居)하여 보첩(譜牒)에 무문(無聞)하고 차(次)의 휘(諱)는 사은(嗣殷)이니 관(官)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관향(貫鄕)에 세거(世居)하여 그 후 충효지사(忠孝之士)가 세세간출(世世間出)하여 도상인각(圖像麟閣)하고 모두 사액원(賜額院)에 배향(配享)하며 연(連)해서 탁이(卓異)의 효성(孝誠)으로 혹(或)은 임금님께 입계(入啓)도 하였고 혹(或)은 읍지(邑誌)에 실려서 있으며 대사간공(大司諫公)의 계씨(季氏)인 승지공(承旨公)의 휘(諱)는 수은(守殷)은 안동(安東)으로 낙남(落南)하여 도사공(都事公) 휘(諱) 적(樀)에 이르러서는 형제쟁사(兄弟爭死)하여 포융(褒融)의 행실(行實)이 있었고 수졸당(守拙堂)과 만오제(晩悟齌)는 문헌관(文獻官)에 유학(遊學)하여 연원(淵源)이 끊어지지 아니했고 지난 병인보(丙寅譜)는 다만 영남해서파보(嶺南海西波譜)인 고(故)로 바야흐로 기호(畿湖)와 합의(合議)를 하고자 할 즈음에 진안종인(鎭安宗人) 석림(錫霖)씨가 기유년(己酉年) 봄에 마침 관향(貫鄕)에 와서 이 의논(議論)을 완정(完定)하니 우리 종인(宗人)이 된 사람은 흔연(欣然)히 향응(響應)하지 않는 이가 없는 지라 가빈자(家貧者)는 그 가난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그 재력(財力)을 구(求)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길이 멀다는 걸 꺼리지 아니하고서 그 수단(收單)을 하며 월명년(越明年)에 강서(江西)에 세 집에서 제회(齊會)를 하니 전일(前日)에 성광(聲光)도 듣지 못하는 사람도 빛나는 행차(行次)로 서로 모였고 평석(平昔)에 안범(顔範)을 접(接)하지 못한 사람과 정담(情談)을 나누며 서로 즐거워하며 족친간(族親間) 항열(行列)의 친소(親疎)를 펴며 향리(鄕里)의 원근(遠近)을 알고 절하고 읍(揖)하며 말하고 웃음의 사이에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이 생겨나니 아직 겨를을 내지 못하는 일은 비로소 백년(百年後)후에 제종(諸宗)들의 힘으로 이루어 질 것이나 제종(諸宗)이 기호영서(畿湖嶺西)에 흩어져 살고 인원(人員)이 혹(或) 많기도 혹(或) 적기도 하며 재력(財力)이 혹(或)은 넉넉하기도 소략(疎畧)하기도 함을 진실로 부족론(不足論)하면서 진실로 일심공력(一心共力)해서 다 성사(成事)를 기약(期約)하지 아니하면은 어찌 그 공력(功力)을 수삭(數朔)의 사이에 거둘 수 있으랴. 숙의공(肅毅公) 일신(一身)의 후예(後裔)가 곤제(昆弟)로부터 후손(後孫)이 유원유소(愈遠愈疏)하여 노인(路人)과 같이 됨에 이르렀으니 보첩(譜牒)으로 밝히지 아니하면 천지일본(千枝一本)이며 만파일원(萬派一源)이듯이 길가는 사람과 함께 일조(一祖)의 자손(子孫)임을 누가 알리요. 그 책이 완성(完成)됨에 기문(記文)이 없을 수 없어서 그런 고(故)로 돈종(惇宗)의 뜻을 대략(大畧) 서술(敍述)하고 수보(修譜)의 연유(緣由)를 말씀 드려서 지난날 흩어졌든 일가(一家)를 합(合)하고 예전에 달리 여기거늘 하나로 한즉 이 보책(譜冊)의 완전(完全)함이 자못 저울에 눈금과도 같아서 기강(紀綱)에 조목(條目)과도 같이 책을 펼치면 환해서 구보(舊譜)에 비교(比較)하며는 두배 다섯배 뿐이 아니라 어찌 대단(大端)히 다행(多幸)한 일이 아니리까. 무릇 우리 함께 보책(譜冊)을 한 사람이면 어찌 이에 힘쓰지 않으리요. 각각(各各) 향선(向先)하는 성심(誠心)을 미루어 돈목(敦睦)의 도리(道理)를 극진(克盡)하게 해서 소홀(疎忽)한 자(者)로 하여금 친(親)하며 멀어졌든 사람도 가까워져서 비록 천리(千里)의 밖에서나 백세(百世)의 후일(後日)에라도 우리 보책(譜冊)을 본 사람은 시조(始祖)로부터 소자출(所自出)의 근본(根本)을 미루어 본즉 이 책(冊)이 이루어진 것이 가(可)히 무궁(無窮)하게 도움이 되리라. 나의 졸얼(拙劣)함을 죄(罪)하지 아니하고 드디어 기(記)를 하노라.
세재상장엄무류월하한(歲在上章閹茂流月下澣)
후손(後孫) 서준(瑞駿) 지대(之大) 지연(之璉) 병근발(幷謹跋)
謹按程子曰收宗族惟是明譜系蘇氏曰作譜者所以辨氏族皆謂尊袒敦宗之本也恭惟我宋氏之系始於麗季鼻祖肅毅公諱卿以壁上元勳封延安府院君仍以爲貫焉肅毅公生判書公諱勛判書公生二男長諱光彦文科大司成追封延安君次諱雲龍官至中郞將延安君之裔居於圻湖中郞之後居於嶺海地相千里世遠親盡平生互有未識顔範者累世亦有不聞聲光者嗚呼溯本尋源則同是一祖不滿百世而疏遠如是者蓋以無譜而然也肆昔甲辰不肖余之伯曾祖諱綎族曾祖諱級始發修譜之議使其再從侄諱奎采涉湖踰嶺博采諸宗之系又使諱奎燦奎奭辦財較單越明春乙巳譜成一部是爲圻湖嶺之派譜也不肖慨然有志於合譜己酉夏躬作貫鄕之行則貫鄕亦有修譜之論久矣又幸丹陽宗長瑞駿氏適參一席完定合譜之約而歸告于宗中遠奇於嶺外今春初與族弟錫夏宗人舜華跋涉到洛詳采麗史萬姓之譜博考搢紳百源之記則小尹公諱興道系於延安君下署令公之上繼代昭著故以不肖之管見敢爲質錄誠極猥懼然以其取信無疑也於乎休哉八域諸宗同修一譜是誠數百年肇擧之事也而千枝之分可會其同根萬派之別亦達其同源矣今後則遠者近疏者親敦睦孝悌之心油然而生序李園之情話樂韋樹之團會是乃吾宗之盛事惟我同譜之人敬奉系牒永傳萬年上而尊祖下而敦族則誠是古人所謂明譜系辨氏族之意而豈非先蔭之黙祜後裔之篤慶乎余不可無言故忘拙敢記焉
歲在庚戌仲夏 後孫 錫霖 錫夏 謹幷跋
삼가 살펴보니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종족(宗族)을 거두어서 오직 이는 보계(譜系)를 밝힌다고 하였고 소씨(蘇氏)가 말하기를 보책(譜冊)을 만드는 것은 씨족(氏族)을 분변(分辨)함이라고 하니 모두가 존조동종(尊祖同宗)하는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공손하옵게도 오직 우리 송씨(宋氏)의 계통(系統)이 여계(麗季)에서 시작(始作)되어 비조(鼻祖) 숙의공(肅毅公) 휘(諱) 경(卿)이 벽상원훈(壁上元勳)으로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封)해짐으로 인(因)하여 관향(貫鄕)으로 한 것이다 숙의공(肅毅公)이 판서공(判書公) 휘(諱) 훈(勛)을 낳고 판서공(判書公)이 이남(二男)을 낳으니 장(長)의 휘(諱)는 광언(光彦)이니 문과(文科) 대사성(大司成)이며 연안군(延安君)으로 추봉(追封)되고 차(次)의 휘(諱)는 운룡(雲龍)이니 관(官)이 중랑장(中郞將)에 이르고 연안군(延安君)의 후예(後裔)는 기호지방(畿湖地方)에 살고 중랑장(中郞將)의 후예(後裔)는 영남(嶺南)과 해서지방(海西地方)에 살고 있어서 지방(地方)이 상거(相距)가 천리(千里)고 대수(代數)가 멀어지고 친의(親誼)가 다해서 평생(平生)에 서로 안면(顔面)을 알지 못하는 것이 누세(累世)가 되니 또한 소문(所聞)도 듣지 못하였다. 아―근본(根本)을 거슬러 근원(根源)을 찾으면 모두가 한 할아버지요 백세(百世)도 되지 아니해서 소홀(疏忽)하고 멀어지기를 이와 같은 것은 대개 보서(譜書)를 닦은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생각해보면 갑진년(甲辰年)에 불초(不肖) 나의 백증조(伯曾祖) 휘(諱) 정(綎)이 족증조(族曾祖) 휘(諱) 급(級)과 수보(修譜)할 의논(議論)을 시발(始發)해서 그 재종질(再從姪) 휘(諱) 규채(圭采)를 시켜서 호서지방(湖西地方) 영남지방(嶺南地方)을 넘나들면서 제종(諸宗)의 계통(系統)을 넓이 채집(採集)하게 하고 또 휘(諱) 규찬(圭燦) 규석(圭奭)을 시켜서 재정(財政)을 판출(辦出)하고 단자(單子)를 교명(較明)하여 월명년(越明年) 봄 을사(乙巳)에 일부(一部)의 보책(譜冊)을 이루었으니 이는 기호영(畿湖嶺)의 파보(派譜)이다. 불초(不肖)가 개연(慨然)히 합의(合議)할 뜻이 있어서 기유(己酉) 여름에 몸소 관향(貫鄕)의 행차(行次)를 한즉 관향(貫鄕)에서도 또한 수보(修譜)할 의논(議論)이 오래되었고 또 다행히 단양종장(丹陽宗丈) 서준(瑞駿)씨가 마침 한자리에 참석(參席)했는지라 합보(合譜)할 약속(約束)을 완정(完定)하고 돌아와서 종중(宗中)에 고(告)하고 멀리 영외(嶺外)에 서신(書信)으로 부처 왔거늘 금년(今年) 초봄에 족제(族弟) 석하(錫夏)과 종인(宗人) 순화(舜和)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서울에 이르러서는 여사(麗史)와 만성보(萬姓譜)를 자세하게 채집(採集)하고 벼슬자리에 있는 고관(高官)과 심월(深粤)한 문자(文字)와 난해(難解)의 고사(古史)를 기록(記錄)한 책의 기록(記錄)을 넓이 참고(參考)를 한즉 소윤공(小尹公) 휘(諱) 흥도(興道)가 계통(系統)이 연안군(延安君) 아래 서령공(署令公) 위여서 계대(系代)가 소상(昭詳)하게 드러나는 고(故)로 불초(不肖)의 관견(管見)으로는 감(敢)히 질록(質錄)하게 되니 진실로 극(極)히 외구(猥懼)하나 그러나 그의 취신(取信)을 무의(無疑)하다. 아―아름답도다. 팔역(八域)의 제종(諸宗)이 함께 한 보책(譜冊)을 닦으니 이는 진실로 수년(數年) 처음으로 거행(擧行)된 일이다. 일천(一千)가지로 뻗어 감히 한 뿌리로 모였으며 만파(萬派)로 나누어 물줄기가 하나의 근원(根源)으로 모여진 것이다 지금후(지금후)에 원자근(원자근)하며 소자친(소자친)하여 돈목효제(돈목효제)의 마음이 유연(유연)히 생(생)하여 도이원(도이원)의 정담(정담)으로 려회(려회)하여 위씨(위씨)의 단란(단란)한 즐거운 만남이 이게 이에 우리 종중(종중)의 성사(성사)가 되며 오직 우리 동보(동보)의 족인(族人)들이 계첩(系牒)을 경봉(敬奉)하면서 영구만년(永久萬年)을 전(傳)해가며 위로는 조상(祖上)을 높이고 아래로는 일가(一家)의 돈목(敦睦)을 기(期)하면 진실로 이는 고인(古人)이 말하는 보계(譜系)를 밝히며 씨족(氏族)을 분변(分辨)하는 뜻이면서 어찌 선조(先祖)의 음덕(蔭德)이 후손(後孫)에게 묵묵(黙黙)히 도와주셔서 돈독(敦篤)한 경사(慶事)가 아니리까. 내가 말이 없을 수 없는 고(故)로 졸노(拙勞)함을 잊고 감(敢)히 기(記)를 하노라.
세재경술중하(歲在庚戌仲夏)
후손(後孫) 석림(錫霖) 석하(錫夏) 근병발(謹幷跋)
延 安 宋 氏 族 譜
庚戌譜
庚戌年 : 1910년
延安宋氏族譜(庚戌譜:1910년)
延安宋氏族譜序
我東之宋爲甲乙族而籍礪恩鎭者最昌著是外又異貫者亦至十餘許而未甚蕃衍延安之族卽其一也延安本新羅海皐郡至麗季改以今名是其所肇貫而仍居于此者爲數十餘世散居畿海嶺湖之間者亦有幾派焉蓋其氏出始於麗良云而的無佐驗文獻之不足乃如此哉系譜之編輯在崇禎四甲之庚戌而代序漸遠子姓益多則繼而修成不亦宜乎其宗老洛善之永實主張之遣建植弼祖洛均遠來問序於余夫族之有譜古矣所以收宗族厚風俗立忠義而益朝廷者也斯譜之作豈徒爾哉自肅毅公以下延安君之討賊殉節退休齌之德望冠世守拙堂之績薪誓死延昌君之斥和立節昌原公之忘身奮義尤其卓偉也其餘諸公忠孝徽蹟文學懿行亦多著顯人之覽斯譜者其可以近代之不振而小之哉噫歐陽子嘗書其譜曰傳於家者以忠事君以孝事親以廉爲史以學立身凡譜於斯者苟能知此義而共勖焉則安知其後裔之奕葉發舒不及於先世盛時也然則斯譜也不但爲各知其來處而編摩也延安氏之蕃昌亦將兆於此乎請以是弁于卷
時上章閹茂乾月下澣 恩津 宋秉珣 序
연안송씨족보서(延安宋氏族譜序)
우리 동(東)의 송(宋)이 갑을족(甲乙族)이 된 것은 적(籍)을 여산(礪山) 은(恩津) 진천(鎭川)이 가장 이름이 드러났으며 창성(昌盛)하였다 이밖에 관향(貫鄕)을 달리 하는 자(者)가 또한 십여 곳이 있으면서 아직 매우 번성(繁盛)하든 못하나 연안(延安)의 일족(一族) 곧 그 하나이다. 연안(延安)은 본시 신라해고군(新羅海皐郡)이였는데 여계(麗季)에 지금(至今) 이름으로 고쳤으며 이곳을 일찍이 관향(貫鄕)해서 인하여 여기에 살게 된 것이 수십여세(數十餘世)가 되어 흩어져서 경기(京畿) 해서(海西) 영남(嶺南)의 사이에 살았는 것이 또한 몇 파(派)가 있었으니 대개 그의 성씨(姓氏)는 처음에 여랑(礪良)에서 나왔다는 것이 적실(適實)하게 증거(證據)를 할 수 있는 곳이 문헌(文獻)이 부족(不足)함이 이에 이와 같을까. 계보(系譜)의 편집(編輯)이 승정사갑(崇禎四甲)의 경술년(庚戌年)이면서 대수(代數)가 점점 멀어지고 자손(子孫)이 더욱 많아온 즉 계속해서 수성(修成)함이 불역선호(不亦宣乎)아 그 종노(宗老) 낙선(洛善) 지영(之永)이 실상주(實狀主張)하고 건식(建植) 필식(弼植) 낙균(洛均)이 멀리 와서 나에게 서문(序文)을 해달라고 하거늘 대개 족친간(族親間)에 족보(族譜)가 있음은 예로부터이다 종족(宗族)을 수습(收拾)하고 풍속(風俗)을 순후(醇厚)하게 하며 충의(忠義)를 세우는 것은 조정(朝廷)에서 더욱 할 것 즉 이 보첩(譜牒)을 만드는 것이 어찌 아무 의미 없을까. 아 숙의공이하(肅毅公以下) 연안군(延安君)이 적(賊)을 토벌(討伐)하고 순절(殉節)했으며 퇴휴제(退休齌)의 덕망(德望)이 관세(冠世)하고 수졸당(守拙堂)의 섭을 쌓아놓고 죽기로 맹서(盟誓)하고 연창군(延昌君)이 화의(和議)를 배척(排斥)하고 절의(節義)를 세우며 창원공(昌原公)이 몸을 잊고 의리(義理)로 분전(奮戰)함은 더욱이 탁월(卓越)하고 위대(偉大)했으며 그 나머지 제공(諸公)의 충효(충효)와 문학행의(文學行懿)를 징거(徵據)의 의문적(懿文蹟)이 또한 많이 들어 났으며 사람들이 이 족보(族譜)를 보고 그 가(可)히 근대(近代)에 부진(不振)했다고 없수이 보리까. 아―구양공(歐陽公)이 일찍이 그 족(族)에 써서 그 짐에 전(傳)해 온 것은 사군충(事君忠)하며 사친효(事親孝)하고 청렴(淸廉)한 벼슬아치가 되며 학문(學文)으로 입신(立身)을 해서 무릇 이에 족(族)을 하는 자(者) 진실로 이른 의리(義理)를 알도록 함께 힘을 쓴 즉 어찌 그 후예(後裔)가 빛나는 잎사귀가 퍼져서 선대(先代)의 성시(盛時)를 미치지 못함을 알리요. 그렇게 한즉 이 보책(譜冊)이 다만 각기(各其) 살아오는 곳이나 편마(編摩)할줄 할게되지 않으리요. 연안씨(延安氏) 번창(繁昌)이 또한 장차(將次) 이에서 조짐이 되라 이렇게 채의 머리에 쓰노라.
시상장엄무건월하한(時上章閹茂乾月下澣-庚戌正月) 은진(恩津) 송병순(宋秉珣)은 서(序)하노라.
延安宋氏世譜跋
族之有譜自古然也程子之書曰收宗族厚風俗蘇氏之譜曰辨氏族明世敎皆所以爲後世爲譜者之取法而尊祖敦宗之誼也惟我宋系始於麗季鼻祖肅毅公諱卿以討平紅賊封延安府院君仍以爲貫以肅毅公生判書公諱勛判書公生二男長諱光彦官至大司成追封延安君次諱雲龍官至中郞將大司成之裔居于長水簪纓聯續子孫蕃衍中郞將之曾孫諱有良官之判書生三男長諱保殷進士移居成川無聞於譜牒之中次諱嗣殷官至大司諫世居本府其後忠孝之事世世繼出爲臣盡忠爲子克孝圖像麟閣表忠香火不一而止次諱守殷官至承旨落南于安東大名鄕鄰徽蹟表著也嗚呼雲仍散處嶺海地之相距千有餘里世之相後二十有餘世而愈遠愈疎溯本尋源則萬派一源千支一本也而疎遠如是者蓋刊牒之年久而然也夫粤在庚戌諸宗同修一譜花樹之情話胥悅族行之親疎己序則其亦庶免於塗人之歸而迨玆今春更發修譜之議歲相符於先人刊牒之祀也於是乎通狀于長鎭則己成派譜云昔之合者今之未合可爲欠一之歉歎也然而安東之尊宗也貫鄕之僉宗莫不欣然雷灌遂定追擧之事各推向先之意一乃心力咸期於成油然孝悌之心溢於簡冊若是其竣事之速如影響之孚上以承祖宗之法下以講派系之分則宛然如一室之團會也曷不休哉是程蘇所謂收族辨姓之意可以有補於無窮矣
歲庚戌七月下澣 裔孫 敏祖 洛善 鵬祖 之永 之漸 謹幷跋
족친간(族親間)에 보서(譜書)가 있음은 예로부터이다. 정자(程子)의 서(序)에 말하기를 종족(宗族)을 거두어 풍속(風俗)을 후(厚)하게 한다고 했고 소씨(蘇氏)의 보(譜)에 말하기를 씨족(氏族)을 분변(分辨)해서 세교(世敎)를 밝히는 것이 모두 후세(後世)에 족보(族譜)하는 자(者)의 법(法)을 하게하고 존조(尊祖)하고 돈종(敦宗)하는 정의(情誼)인 것이다. 유아송씨(惟我宋氏)의 계(系)는 여계(麗系)에서 시작(始作)되어 우뚝한 숙의공(肅毅公) 휘경(諱卿)이 홍건적(紅巾賊)을 토평(討平)하고 봉연안부원군(封延安府院君)하여 인(因)하여 관향(貫鄕)을 하였다 숙의공(肅毅公)이 판서공(判書公) 휘훈(諱勛)을 낳고 판서공(判書公)이 이남(二男)을 낳으니 장(長)의 휘(諱)는 광언(光彦)이요 관(官)은 대사성(大司成)이며 추봉연안군(追封延安君)하고 차(次)의 휘(諱)는 운룡(雲龍)이니 관(官)은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다. 대사성(大司成)의 후예(後裔)는 장수(長水)에 거(居)하며 잠영(簪纓)이 연속(連續)해서 자손(子孫)이 번연(蕃衍)했고 중랑장(中郞將)의 증손(曾孫) 휘(諱) 유량(有良)은 관(官)이 판서(判書)이고 삼남(三男)을 낳으니 장(長)은 휘(諱) 보은(保殷)이며 잔사(進士)를 했고 성천(成川)으로 이거(移居)하여 보첩중(譜牒中)에 소문(所聞)이 없고 차(次)의 휘(諱)는 사은(嗣殷)이니 관(官)은 대사간(大司諫)이며 연성군(延城郡)에 거(居)하여 그 후 충효지사(忠孝之士)가 대대(代代)로 이어서 태어나고 신하(臣下)로서 충성(忠誠)을 다하고 자식(子息)으로서 효도(孝道)를 다하며 기린각(麒麟閣)에 도상(圖像)하고 충성(忠誠)을 표(表)하는 제사(祭祀)를 한곳에 그치지 아니하고 차(次)의휘(諱)는 수은(守殷)이며 관(官)은 승지(承旨)이고 안동(安東)으로 낙남(落南)하여 크게 향린(鄕隣)에 이름이 낳으며 아름다운 사적(事蹟)이 드러났다 .아―후손(後孫)이 영남(嶺南)과 해서지방(海西地方)에 산재(散在)해서 상거(相距)가 천유여리(千有餘里)이며 세월(歲月)이 흘러 이십유여세(二十有餘世)하니 더욱 멀어지니 더욱 소홀(疎忽)해서 근본(根本)을 거슬러 찾으면 만파(萬派)가 일원(一源)이요 천지(千枝)가 일본(一本)이면서 소원(疎遠)하기를 이와 같은 것은 대개 보첩(譜牒)의 간행(刊行)한 햇수가 오래되어 그렇게 되는 거다. 저 경술년(庚戌年)에 있어서 제종(諸宗)들이 함께 한 보첩(譜牒)을 닦게 하면 화수(花樹)의 정담(情談)을 나누며 기뻐하고 일족(一族)의 항열(行列)에 따라 친(親)과 소(疎)가 이미 차례인즉 그 또한 노인(路人)의 귀추(歸趨)로 아마도 면(免)할 것이며 자못 금춘(今春)에 다시 수보(修譜)의 의논(議論)이 되니 이해가 마침 선인(先人)들이 보첩간행(譜牒刊行)하시는 해와 상부(相符)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상(通狀)을 장수(長水) 진안(鎭安)측이 이미 파보(派譜)를 이루었다고 하는지라 석(昔)에 합(合)하였더니 지금(至今)에 미합(未合)하게 되니 일흠(一欠)의 겸탄(歉歎)이었다. 그러나 안동(安東)의 존종(尊宗)과 관향(貫鄕)의 첨종(僉宗)이 흔연(欣然)히 함께 하기를 찬동(贊同)하여 드디어 추거(追擧)할 일을 논정(論定)하고 각기(各其) 향선(向先)의 의(義)를 미루어 한결 심력(心力)을 다해서 모두 기일내(期日內)에 성사(成事)가 되어 유연(油然)한 효제(孝悌)의 마음이 간책(簡冊)에 넘쳐서 이와 같이 준사(竣事)를 속(速)히 해서 성실(誠實)한 영향(影響)이 이와 같으니 위로는 조종(祖宗)의 법통(法統)을 계승(繼承)하고 아래로는 파종(派宗)의 분문(分問)을 강(講)한즉 완연(宛然)히 한집안처럼 단란(團圝)하게 모였는 듯하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이렇게 되고 보니 정자(程子)와 소노천(蘇老泉)이 이르는바 종족(宗族)을 거두어서 동성(同姓)을 분변(分辨)하는 뜻이 가(可)히 무궁(無窮)토록 도움이 있으리라
세경술칠월하한(歲庚戌七月下澣) 예손(裔孫) 민조(敏祖) 낙선(洛善) 붕조(鵬祖) 지영(之永) 지점(之漸)은 삼가 아울러 발하노라
謹按古隋唐二國隋有經籍志唐有藝文志皆以譜牒施行于世又按昔日吳中宗族自一祖而視之則均是子孫云其惟我宋氏之謂乎伏惟我宋系出延安而當麗季始祖諱卿封延安府院君 贈諡肅毅公肅毅公生諱勛官至吏儀判書判書公生二男長諱光彦官至大司成次諱雲龍官至中郞將中郞將生諱復隆官至政堂文學文學公生諱根官至贊成贊成公生諱有良官至禮曹判書判書公生三男長諱保殷進士移居成川次諱嗣殷官至大司諫大司諫五世孫諱簡封延春君延春君生諱德榮爲國殉節 賜額忠愍祠圖像畵閣封延昌君諱德潤香于顯忠祠兩代豊功盛烈豈不壯哉豈不偉哉又有獻賀者其後裔孫諱之安生諱永祖監役子諱洛善洛九兄弟弁進士洛善子建植春植兄弟亦進士世居貫鄕而令儀令譽不見而是圖豈不讚哉伏惟我大司諫之季承旨公諱守殷落南于安東而子諱希文官至校理校理公生諱國柱進士進士公生諱遺慶官將仕郞參奉遊退溪李先生門以文學見稱於世至孫諱樀兄弟爭死有伋壽褒融之行而一鄕一道之縉紳章甫不勝嗟惜公議峻發一體呼籲於 王章之下而特蒙奉訓郞義禁府都事之贈旣有諸先輩撰序傳文及碣銘文字具載一冊爲其子孫者豈不欽歎也哉以若予之管見不可以盡錄也夫譜牒事在昔丁卯一門碩德長老分往復于貫鄕詳其生卒錄其官爵顯達又錄其墳墓在所族議門論一軆峻發始成譜牒二卷粤在庚戌鎭安宗人及海嶺尊老僉員完定是議爲吾宗者莫不心悅誠服雖曰家貧路遠不辭貧不憚遠而鳩其財收其單書其行列之次第知其鄕里之遠近花樹之情話孝悌之良心欣然而生油然而出又成譜牒四卷其非諸宗之尊祖惇宗睦族之誼豈至於斯也耶素以散在海嶺地接千里歲回一甲其間落落不識其老小之顔範無慰其誰某之存沒此無他故矣道路之悠遠也往來之稀疎也千萬于襮今春三月延安宗人之郁氏千里裹裝萬加思量光臨于鄙從侄洛九之家云譜牒積年未遑之事也詳言修譜之體禮次言各派之安音而將欲有合譜之意細論昔日祖先之營辦履歷且論中古海嶺之收單修譜而不佞環顧一門累經歉荒之歲而俾無鳩財之路難於其人而不堪譜廳之任故細細預告於書右宗兄許亦以不合之意詳悉而旋旆矣回示中辭意坐立不同無論程限之遠近勿較財力之多小云爾則不侫等不勝感動一日齊會公議則咸曰貫鄕僉宗中合譜之議如是而下示若有不合則向所謂自一祖而視之則均是子孫之說烏在耶聽其彦而樂其事遂至修譜上而尊祖先之黙祐下而敦宗族之厚誼豈不休哉不侫素以蔑識敢忘其拙遂以爲記是
歲六月上澣 裔孫 之浩 德祖 幷謹跋
삼가 살피니 옛 수당이국(隋唐二國)이 있으니 수(隋)나라에서는 경적(經籍)의 지(志)가 있고 당(唐)나라에서는 예문지(藝文志)가 있으니 모두가 보첩(譜牒)이 세상(世上)에 시행(施行)되었다 우안(又按)한 즉 석일(昔日) 오중종족(吳中宗族)이 일조(一祖)로부터 볼 것 같으면 균시자손(均是子孫)이라고 일렀으니 그는 오직 우리 송씨(宋氏)를 이름이로다. 오직 엎드려 생각하면 우리 송씨(宋氏)는 계통(系統)이 연안(延安)에서 나왔으면서 여계(麗季)를 당(當)해서 시조(始祖) 휘(諱)경(卿)이니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이며 증시(贈諡) 숙의공(肅毅公)이요 휘(諱)훈(勛)을 낳으니 관(官)이 이의판서(吏儀判書)요 판서공(判書公)이 이남(二男)을 낳으니 장(長)의 휘(諱)는 광언(光彦)이요 관(官)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차(次)의 휘(諱)는 운룡(雲龍)이니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으며 휘(諱) 복융(復隆)을 낳으니 관(官)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문학공(文學公)이 휘(諱) 근(根)을 낳으니 관(官)이 찬성(贊成)에 이르렀으며 찬성공(贊成公)이 휘(諱) 유량(有良)을 낳으니 관(官)이 예조판서(禮曹判書)요 판서공(判書公)이 삼남(三男)을 낳으니 장(長)의 휘(諱)는 보은(保殷)이니 진사(進士)며 성천(成川)으로 이거(移居)하고 차(次)의 휘(諱)는 사은(嗣殷)이니 관(官)이 대사간(大司諫)이요 대사간(大司諫)의 오세손(五世孫) 휘(휘) 간(簡)이니 연춘군(延春君)에 봉(封)해지고 휘(諱) 덕영(德榮)을 낳으니 나라를 위하여 순절(殉節)하여 충민사(忠愍祠)에 사액(賜額)하고 충신액(忠臣額)에 공로(功勞)를 세운 그림을 그려 붙였으며 연창군(延昌君)에 봉(封)해진 휘(諱) 덕윤(德潤)은 현충사(顯忠祠)에 배향(配享)되니 양대(兩代)가 풍성(豊盛)한 공로(功勞)와 성대(盛大)한 충열(忠烈)이 어찌 장대(壯大)하지 아니하며 어찌 위대(偉大)하지 아니할까. 또 하례(賀禮)를 드릴 일이 있으니 그 후예손(後裔孫)에 휘(諱) 지안(之安)이 있고 휘(諱) 영식(永植)하니 감역(監役)벼슬이요 자제(子弟) 낙선(洛善) 낙구(洛九) 형제(兄弟)가 모두 진사(進士)며 낙선(洛善)의 아들인 건식(建植) 춘식(春植) 형제(兄弟)가 또한 진사(進士)이며 관향(貫鄕)에 세거(世居)하여서 영의(令儀)와 영예(令譽)를 나타내지 아니해도 이에 그려볼 수 있으니 어찌 찬탄하지 안으리요.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우리 대사간(大司諫)의 아우 승지공(承旨公) 휘(諱) 수은(守殷)이 낙남(落南)해서 안동(安東)에 살았으며 자(子)의 휘(諱)는 희문(希文)이니 관(官)이 교리(校理)이며 교리공(校理公)이 휘(諱) 국주(國柱)를 낳으니 진사(進士)요 진사공(進士公)이 휘(諱) 유경(遺慶)을 낳으니 관(官)이 장사랑참봉(將仕郞參奉)이니 퇴계이선생문하(退溪李先生門下)에 유학(遊學)하였으며 문학(文學)으로 세상(世上)에 칭송(稱頌)을 받았고 손자(孫子)에 이르러 휘(諱) 적(樀)은 형제(兄弟)가 죽음을 서로 다투어서 급수(伋壽)와 포융(褒融)의 행실(行實)같아서 일향(一鄕)과 일도(一道)의 벼슬한 이와 선비들이 차석(嗟惜)함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공의(公議)가 준발(峻發)하여 임금님 앞에 일체(一體)로 호소(呼訴)를 해서 특별(特別)히 봉훈랑의금부도사(奉訓郞義禁府都事)의 증직(贈職)이 있었으며 제선배(諸先輩)의 찬(撰)과 서(序)와 전문(傳文) 및 갈명(碣銘) 문자(文字)가 일책(一冊)에 모두 실려 있으니 그 자손(子孫)된 자(者) 어찌 찬탄(贊嘆)하지 않으리요 나 같은 관견(管見)으로 가(可)히 기록(記錄)을 못다할 것이다. 저 보첩(譜牒)의 일은 예전 정묘년(丁卯年)에 한 문중(門中)에 덕성(德性)이 대단(大端)하고 장로(長老)가 되는 분(分)이 관향(貫鄕)에 왕복(往復)하시며 그의 생졸(生卒)과 관작(官爵)의 현달(顯達)과 분묘(墳墓)의 소재(所在)를 자세하게 기록(記錄)을 했으며 족의(族議)의 문론(門論)으로 한결 준절(峻切)하게 발론(發論)을 해서 비로소 보첩(譜牒) 이권(二卷)을 이루었으며 지낸 경술년(庚戌年)에 진안종인(鎭安宗人)과 해서(海西) 영남(嶺南)의 존노첨원(尊老僉員)이 의논(議論)해서 완정(完定)을 하니 우리 종족(宗族)이 된 자(者) 마음을 즐거워하며 성심(誠心)으로 따르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으니 비록 가빈(家貧)하고 노원(路遠)하더라도 불사빈(不辭貧)하고 불탄원(不憚遠)하면서 재력(財力)을 구(求)하고 수단(收單)을 해서 그 항열(行列)의 차례를 알며 향리(鄕里)의 원근(遠近)과 화수(花樹)의 정(情)을 알게 해서 효제(孝悌)의 양심(良心)이 혼연(欣然)히 생겨 유연(油然)하게 솟아나서 또 보첩(譜牒) 사권(四卷)을 이루니 그 제종(諸宗)들의 존조돈종(尊祖敦宗)하고 목족(睦族)의 정의(情誼)가 아니었으면 어찌 이에 이르리요 본시 해서(海西)와 영남(嶺南)땅이 천리(千里)를 접(接)해 있으며 세월(歲月)이 일갑(一甲)이 지나도록 그 사이에 낙낙(落落)해서 그 노소(老少)의 안면(顔面)도 알지 못하고 그 수모(誰某)가 생존(生存)해있고 몰세(沒世)한 것을 모르니 다른 연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도로(道路)가 아득히 멀며 왕래(往來)가 드물고 소홀(疎忽)한 때문이러니 천만(千萬) 뜻밖에 올해 봄 삼월(三月)에 연안종인(延安宗人) 지욱(之郁)씨가 천리(千里)의 행장(行裝)을 싸가지고 만번(萬番)을 사려(思慮)를 해서 저의 종질(從姪) 낙구(洛九)의 집에 광림(光臨)해서 하는 말이 보첩(譜牒)은 여러 해가 되어도 겨를을 내지 못한 일이라 수보(修譜)의 체례(體禮)를 자세하게 말하고 다음으로 각파(各派)의 안부(安否)가 드러났으나 그러나 장욕합보(將欲合譜)의 뜻이거늘 세세(細細)하게 석일(昔日) 조선(祖先)께서 경영(經營)하고 경비(經費)를 판출(辦出)하는 이력(履歷)과 중고(中古)에 해서(海西) 영남(嶺南)이 수단(收單)해서 수보(修譜)할 것을 의논(議論)해서 논정(論定)을 했으나 칠칠치 못하게 일문중(一門中)을 둘러보니 여러 해 동안 흉년을 겪은 터라 해서 구재(鳩材)의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보청(譜廳)의 일을 책임(責任)질만한 사람이 없는 고(故)로 세세(細細)하게 서우(書右)에 예고(豫告)를 종형(宗兄)에게 하니 역시 합당(合當)하지 못함을 자세히 알고서 돌아갔는지라 회시(回示)가 오는 중(中)에 사의(辭意)가 앉은 이와 섰는 이가 같지 아니하고 노정(路程)의 원근(遠近)을 논(論)함이 없이 물교(勿較)하고 재력(財力)의 다소(多少)를 말한 즉 불영등(不侫等)이 감동(感動)을 이기지 못하여 일일(一日)에 모두 모여서 공의(公議)를 한즉 모두가 말하기를 관향(貫鄕)의 여러 종중(宗中)에서 합보(合譜)의 의논(議論)이 이와 같이 지시(指示)를 내렸으니 만약(萬若) 합의(合議)를 아니한즉 지난달 소위(所謂) 일조(一祖)로서 보실 것 같으면 고르게 같은 자손(子孫)이란 말씀이 어찌 있으리요 그 말씀을 듣고 즐겨 그 일을 해서 드디어 수보(修譜)하게 되오니 위로는 존조선(尊祖先)의 묵우(黙佑)를 입고 아래로는 돈종족(敦宗族)의 후의(厚誼)가 되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불영(不영)이 본시 멸식(蔑識)으로 감(敢)히 졸세(拙劣)함을 잊고 드디어 기(記)를 하노라
시세육월상한(是歲六月上澣) 예손(裔孫) 지호(之浩) 덕조(德祖)는 아울러 삼가 말을 하노라
夫姓各有譜牒皆所以尊祖宗合氏族之誼也前乎百世有鼻祖後乎百世有趾孫遠近之分親疎之別理之所固然也是故易同人之象曰類族辨物蘇氏之譜云孝悌之心油然以生尤爲後來之所取法者也竊惟我宋系出延安鼻祖肅毅公封延安府院君因以爲貫肅毅公諱卿麗季以壁上元勳官大匡匡靖大夫密直事贊成事 贈諡肅毅公孫諱光彦官大司成以原州牧使盡忠節於討紅賊著功勳於授丹書封延安君孫諱寶山香于長水月岡院其後子孫列居于長水鎭安縣大司成公之弟諱雲龍官中郞將曾孫諱有良我 朝官禮曹判書生三男長諱保殷成均進士派居成川云而尙今無聞家勝慨哉次諱嗣殷官大司諫右副承旨子孫甚蕃衍凡居本郡者皆是也季諱守殷官右承旨凡居安東者皆是也大司諫公之後有若防禦使公諱德潤當龍蛇之役樹勳於本郡李白沙文忠公恒福撰大捷碑府中豪傑宋其云也心石宋先生秉殉撰墓表忠壯公諱德榮當甲子适變告功於鞍峴之捷逮丁卯虜亂殉節于安州之戰一文再從俱香額院紀功雲臺其炳忠卓節爲一世之所矜式矣梅山洪先生直弼撰諡狀僉正公諱沆節死瀋陽載忠烈錄黙齌公諱光奎以孝行表著載延安誌心石宋先生秉殉幷撰墓表醉菴公諱之安以孝行卓異載延安誌以有墓表勉菴崔先生益鉉所撰也承旨公之曾孫諱有慶官將仕郞參奉遊退溪李先生門以文學著世都事公諱樀鴒原急難無愧褒融其懿蹟至行爲後世柯則也嗟我雲仍星散嶺海千里難成花樹之會其在尊祖敦族之道寧不惕然思有以收宗族厚風俗之謨哉往在庚戌卽先君子修譜之歲也迨玆今春再修亦有緣於庚戌也於是乎僉宗同其心殆若影響之相應孱孫齊乃力何憂財政之不贍謹因舊譜更修新牒先代之茂積復顯於來世後裔之惇誼必篤於今日推其本之所自出則同是一祖也考其支之所由來分爲百派也自今以往凡我同宗之人雖在百世之後千里之外勿以遠以爲疎各盡其惇睦之誼則其於蘇氏所謂孝悌之心油然以生者亦庶幾云爾
歲庚戌七月旣望 裔孫 殷祖 洪祖 春植 謹幷跋
대개 성(姓)마다 보첩(譜牒)이 있나니 모두가 존조종(尊祖宗)하여 합씨족(合氏族)의 정의(情誼)가 있는 것이라. 앞으로 백세(百世)에 우뚝한 조상(祖上)이 있고 뒤로 백세(百世)에 지손(子孫)이 있어서 원근(遠近)의 분간(分間)과 친소(親疎)의 분별(分別)은 이치(理致)에 본시(本是) 그런 것이다. 고(故)로 역경동인지상(易經同人之象)에 말하기를 류족(類族)으로 변물(辨物)이라 하고 소씨(蘇氏)의 보(譜)에 이르기를 효제(孝悌)의 마음이 자연적(自然的)으로 생겨나니 후래(後來)에 취법(取法)할 바가 되느니라 절적(切籍)하게 생각하면 우리 송(宋)은 계통(系統)이 연안(延安)에서 나왔으며 비조(鼻祖) 숙의공(肅毅公)이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이여서 인(因)하여 관(貫)을 하니 숙의공(肅毅公)의 휘(諱)는 경(卿)이며 여계(麗季)에 벽상원훈(壁上元勳)으로 관(官)이 대광광정대부밀직사찬성사(大匡匡靖大夫密直事贊成事)로 증시(贈諡) 숙의공(肅毅公)하고 손(孫)의 휘(諱)는 광언(光彦)이니 관(官)은 대사성원주목사(大司成原州牧使)로 충절(忠節)을 다해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討伐)하여 공훈(功勳)이 드러나 단서(丹書)를 받으셨고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했으며 손(孫)의 휘(諱)는 보산(寶山)이니 장수월강서원(長水月岡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그 후(後) 자손(子孫)이 장수(長水) 진안(鎭安)에 퍼져 살고 있으며 대사성공(大司成公)의 제(弟)의 휘(諱)는 운룡(雲龍)이니 관(官)은 중랑장(中郞將)이요 증손(曾孫)의 휘(諱)는 유량(有良)이니 우리 이조(李朝)에 관(官)이 예조판서(禮曹判書)요 삼남(三男)을 낳으니 장(長)의 휘(諱)는 보은(保殷)이니 성균진사파(成均進士派)로서 성천(成川)에 저주(居住)한다고 하나 상금(尙今)토록 무문(無聞)하니 가(可)히 개탄(慨歎)함을 이기지 못하고 차(次)의 휘(諱)는 사은(嗣殷)이니 관(官)이 대사간(大司諫) 우부승지(右副承旨)이고 자손(子孫)이 심번연(甚蕃衍)하여 무릇 본군(本郡)에 알고 있는 송(宋)이다 계(季)의 휘(諱)는 수은(守殷)이니 관(관)이 우승지(右承旨)로 무릇 안동(安東)에 살고 있는 송씨(宋氏)는 모두 자손(子孫)이 된다. 대사간공(大司諫公)의 후(後)에 방어사공(防禦使公) 휘(諱) 덕윤(德潤) 같은 이가 있어서 임진(壬辰)의 역사(歷史)를 당(當)해서 본군(本郡)에서 수훈(樹勳)을 해서 이백사문충공(李白沙文忠公)이 찬(撰)한 대첩비문(大捷碑文)에 부중호걸송모(府中豪傑宋某)라 칭(稱)했으며 심석송선생병순(心石宋先生秉珣)이 묘표(墓表)를 찬(撰)했으며 충장공(忠壯公) 덕영(德榮)이 갑자(甲子) 이괄(李适)의 변(變)을 당(當)하여 안현(鞍峴)의 싸움에 공(功)을 세웠으며 정묘노란(丁卯虜亂)에 안주(安州)의 전(戰)에는 순절(殉節)을 했으니 일문재종(一門再從)이 함께 사액(賜額)의 서원(書院)에 향사(享祀)하고 공신각(功臣閣)에 공(功)을 기념(紀念)하며 불꽃같은 높은 충절(忠節)이 한 세상(世上)의 표본(標本)을 하는 바더라. 매산홍선생직필(梅山洪先生直弼)이 시상(諡狀)을 찬(撰)했으며 첨정공(僉正公) 휘(諱) 항(沆)은 심양(瀋陽)에서 충절(忠節)로 죽어서 충열록(忠烈錄)실렸으며 묵제공(黙齌公) 휘(諱) 광규(光奎)는 효행(孝行)으로 연안지(延安誌) 드러나게 실려 있으며 심석송선생병순(心石宋先生秉珣)이 묘표(墓表)를 찬(撰)하였으며 취암공(醉菴公) 휘(諱) 지안(之安)은 효행(孝行)으로 탁이(卓異)해서 연안지(延安誌)에 실려 있으며 묘표(墓表)는 면암최선생(勉菴崔先生)의 소찬(所撰)이다. 승지공(承旨公)의 증손(曾孫) 휘(諱) 유경(遺慶)은 관(官)이 장사랑참봉(將仕郞參奉)이면서 퇴계이선생문하(退溪李先生門下)에 유학(遊學)하여 문학(文學)으로 세상(世上)에 드러났으며 도사공(都事公) 휘(諱) 적(樀)은 형제간(兄弟間)에 급(急)하고 어려울 때에 급수(伋壽)와 포융(褒融)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니 그 의적(懿蹟)과 지행(至行)이 후세(後世)에 준즉(準則)이 되다. 아―우리 후손(後孫)들이 영남(嶺南)과 해서(海西)에 흩어져 살았고 천리(千里)에 화수회(花樹會)를 이루기 어려워 그 존조돈족(尊祖敦族)의 도리(道理)에 있어서 어찌 척연(惕然)히 가족(家族)을 잘 거두어 풍속(風俗)을 순후(醇厚)하게 함 모훈(謀訓)을 생각지 않으랴 지내간 경술년(庚戌年)에 이제야 여러 종인(宗人)들이 그 마음을 함께 자못 영향이 상응(相應)하는 것 같이 하고 잔손(孱孫)이 가지런히 이에 힘을 쓰니 재정(財政)이 넉넉지 못함을 무엇 근심하리요. 삼가 구보(舊譜)를 경수신첩(更修新牒)하고 선대(先代)의 조상(祖上)들의 무성(茂盛)한 공적(功績)을 다시 내세(來世)에 나타내니 후예(後裔)의 돈의(敦誼)가 반드시 오늘 보다 돈독(敦篤)하고 그 소자출(所自出)을 미루어 보면 함께 이한 조상(祖上)이요 그 지파(支派)의 유래(由來)인 바를 참고하면 백파(百派)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앞으로 무릇 우리 동종(同宗)의 사람이라면 비록 백세(百世)의 후(後)나 천리(千里)의 원외(遠外)라도 멀리하거나 소홀히 하지말고 각기(各其) 그 돈목(敦睦)의 정의(情誼)를 다하면 곳 그저 소씨(蘇氏)의 이르는 바 효제(孝悌)의 마음이 자연히 생기리라 하는 것이 거의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세경술추칠월기망(歲庚戌七月旣望)
예손(裔孫) 은조(殷祖) 홍조(洪祖) 춘식(春植) 삼가 병발(幷跋)하노라
戊寅譜(一九三八年) 序文
有人이며 斯有族이오 有族이면 斯有譜니 有族而無譜則散而無統하여 宗支를 不可辨이요 昭穆을 不可攷라 然則是有族而與無族으로 等焉이니 合族於一譜면 宗支를 可辨이요 昭穆을 可攷而掩卷相忘에 無同譜之實則是는 有譜而與無譜로 等焉이니 所謂同譜之實者는 惟孝悌而己라 派流之散焉而發於一源이요 柯葉之分焉而生於一根이니 인하獨不然哉아 有萬其身이 始於一人이라 人之一身을 孰不自愛而分而至萬에 必至於相忘故로 先哲之修明譜系者良由乎不相忘焉耳라 苟能不至於相忘이면 萬人而一心이오 千里而一室則油然孝悌之感이 自不能無矣라 延安之宋이 肇于府院君諱卿하니 金紫鍾鼎에 名碩이 相望하고 忠義文學이 世有其人而 派流益盛하고 柯葉이 益茂에 不可以散而無統故로 嘗계累修其譜而今又續刊이라 日에 宋君準東寅煥在曄仁澤이 要余弁首하니 不文者何敢當哉而况前修序述이 己無餘薀者乎아 無己則曰凡同此譜者는 篤行孝悌하여 以承先烈에 母相忘焉己矣라 不然이면 是은 雕焉印焉者不過一部題名錄而止니 豈譜之之實也리오
著雍攝提格應鍾之下弦 安東 金甯漢 序
무인일구삼팔년서문(戊寅一九三八年序文)
인간(人間)이 있으며 곧 겨레가 있고 겨레가 있으면 곧 보첩(譜牒)이 있는 법이니 겨레가 있음에도 보첩(譜牒)이 없으면 흩어져 버리고 계통(系統)이 없어져 버려 종중(宗中)의 종파(宗派)와 지파(支派)를 구별(區別)할 수 없게 되고 소목(昭穆)〔조상(祖上)의 신주(神主)를 사당(祠堂)에 모시는 차례(次例) 즉(卽) 시조(始祖)를 가운데에 이(二), 사(四), 육세(六世)를 좌열(左列)에 삼(三), 오(五), 칠세(七世)를 우례(右例)에 모시는 순서(順序)〕을 헤아릴 줄 모른다 그러한 즉 겨레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를바 없다 겨레를 통합(統合)하여 한 보첩(譜牒)을 만들면 종파(宗派) 지파(支派)를 가릴 수 있는 법이요 소목(昭穆)을 헤아릴 수 있는 법이다 엄권(掩卷)〔책(冊)을 덮어놓음〕하여 상망(相忘)〔서로를 잊어버림〕하면 그 보(譜)의 실속이 없는 즉 보(譜)가 있어도 없는거다 다를 것이 없다 소위(所謂) 그 보첩(譜牒)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이미 효제(孝悌)를 생각한다 파(派)가 흘러 흩어져도 시발(始發)은 일원(一源)이요 가엽(柯葉)이 갈라져도 일근(一根)에서 자라나니 인간(人間)인들 누가 유독(惟獨) 그러하지 않겠는가 만인(萬人)이 있어도 그 몸의 시초(始初)는 일인(一人)이라 사람의 일신(一身)을 누구나 스스로 사랑하지 않으면 만인(萬人)으로 갈라지니 반드시 상망(相忘)하게 되는 고(故)로 선현(先賢)이 편수(編修)하신 소상(昭詳)한 계보(系譜)를 어질게 실행(實行)하면 서로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구능(苟能)하여 서로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만인(萬人)이 일심(一心)이 되며 천리(千里)를 떨어져 살아도 한집안 식구(食口)가 되어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하여 스스로 안됨이 없으리라
연안(延安) 송(宋)은 부원군(府院君) 휘경(諱卿)으로 시작하니 금자종정(金紫鍾鼎)에 명석(名碩)이 상망(相望)하여 충의문학(忠義文學)이 세상(世上)에 존재(存在)하고 그 자손(子孫)이 천만(千萬)으로 무성(茂盛)하여도 흩어지지 않고 계통(系統)이 불란(不亂)하여 일찍이 누수보(累修譜)하였으며 이제 또 독간(續刊)하고자 송군(宋君) 준동(準東) 재엽(在曄) 인환(寅煥) 인택(仁澤) 등(等)이 나에게 변수(弁首)〔서문(序文)〕를 청(請)하니 배우지 못한 사람이 어찌 감(敢)히 감당(勘當)하겠는가 하물며 전수(前修)때 서문(序文)에 이미 남김없이 실어 놓았으니 나는 새로운 것이 없는 즉 대략(大略)이 보(譜)와 같으며 독행효제(篤行孝悌)를 선열(先烈)에서 이어 받음이 없으면 어찌 이미 상망(相忘)하지 않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는 도장을 새겨 찍은데 불과(不過)하지 않겠느냐 일부(一部) 제목(題目)을 록(錄)한데 그치지 어찌 보(譜)의 속내라 하리오
무인일구삼팔년십월하순(戊寅一九三八年十月下旬) 안동(安東) 김영한(金甯漢) 서(序)
延安宋氏派譜序(1965년)
吾門修譜不知昉於何代中經幾回刊布而其終於高宗庚戌之譜則可考而證也今距庚戌己五十餘祀滄桑累變生殖日繁遊於帝鄕者紛不數計元不參譜己有孫曾者亦或林然多矣若譜事重刊之役失今不圖則深恐歲月之久罔知某爲昭某爲穆不至路人視者幾稀矣但棋布星散之南南北北者將無術一體收合如㫰昔之爲則無寧以安東尊守者爲私派片譜使之事可簡而功可專之計則衆議師錫洽然從之此今日重刊役之權輿也然延宋之全派合譜縱無遺誅之歎視世之王謝崔廬蓋冷然小族也今縮之以三之殆二焉則其零星尤何如哉然吾宋南來雖無桓圭袞冕之夸耀門楣若望西公之遊學泮中專心勵志晩悟公之學行文章稱著一世守拙公之倡義火旺晩隱公之代弟成仁慕先公之廬墓終孝鴻匠碩哲項背相望世或目焉以儒素法門而稱之爲和義福澤之坊則有之凡我同帖之人不以族小而慊之安知來日之不昌大乎勿以不振而傷之安知不遠而無陽復之理耶各自修身謹行戰兢臨履無墜乎家傳成法則父祖在天之靈豈不曰余有後乎是役也以元植之聖等與議於敦事之末責以弁卷一語玆綴顚趾如右惟僭率可罪也己
後孫 元植 之聖 等 謹書
우리 문중(門中)의 수보(修譜)는 어느 시대(時代)에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년(中年)에 기회(幾回)를 간포(刊布)했으면서 그 최종(最終)은 고종경술년보책(高宗庚戌年譜冊)은 참고(參考)되면 증빙(證憑)할 만 하도다. 지금(至今)과 경술(庚戌)의 거리가 이미 오십여년(五十餘年)이요 창상이변(滄桑異變)되고 생산번식(生産繁殖)하며 경향각지(京鄕各地)에 분유(紛遊)하는 이가 불계수(不計數)이다. 원래(元來)부터 보책(譜冊)에 참여(參與)하지 않는 자(炙)도 손자증손(孫子曾孫)이 있는 자(者) 또한 임연(林然)하게 많으니라. 그러므로 보사중간(譜事重刊)의 역사(役事)를 지금(至今)에 도모(圖謀)하지 아니하고 때를 잃어버리면 세월(歲月)이 오래됨이 두려우며 누가 소(昭)가되며 누가 목(穆)이 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니 노인(路人)보듯 하니 거의 드물도다. 다만 바둑판에 바둑 놓이듯 별처럼 온 하늘에 흩어져서 남남북북자(南南北北者)를 장차(將次) 일체수합(一體收合)할 방책(方策)이 없이 예전과 같이 하려고 한즉 차라리 안동(安東)에 존수(尊守)하는 자(者)만이 사파(私派)의 편보(片譜)가 되어도 사가간이공가전지계(事可簡而功可傳之計)라 한즉 중의(衆議)와 사석(師錫)이 흡연(洽然)히 따를 것이거늘 차금일중간지권여(次今日重刊之權輿)이다. 연(然)이나 안동송씨전파합보(安東宋氏全派合譜)처럼 비록 유주(遺誅)의 탄식(歎息)이 없으나 세상(世上)에 왕사최려(王謝崔廬)가 볼 것 같으면 대개 냉연(冷然)한 소족(小族)이다. 지금(至今)에 삼분이(三分二)나 거의 축소(縮小)했는 즉 그 영성(零星)함이 더욱 어떠함 같을까. 그러나 우리 송씨(宋氏)가 남(南)으로 와서는 비록 환규(桓圭)와 곤면(袞冕)의 자랑으로 문미(門楣)를 빛내는 일은 없으나 망서공(望西公) 같은 분은 성균관(成均館)에 유학(遊學)을 하면서 전심(專心)해서 뜻을 가다듬었으며 만오공(晩悟공)의 학행문장(學行文章)이 일세(一世)에 드러나게 지칭(指稱)을 받았고 수졸공(守拙公)이 창의(倡義)해서 화왕산전투(火旺山戰鬪)에 참여(參與)하시고 만은공(晩隱公)은 아우를 대신(代身)해서 성인(成仁)을 하셨고 모선공(慕先公) 여묘(廬墓)에서 효성(孝誠)을 다하시니 큰선비와 석학철인(碩學哲人)이 항배상망(項背相望)하여 세상(世上)이 유소(儒素)의 법문(法門)이라고 지목(指目)해서 칭찬(稱贊)을 하며 의리(義理)에 동화(同和)되는 복록(福祿)의 혜택(惠澤)을 받을 마음이라고 하지 함이 있은 즉 무릇 우리 한 책(冊)에 쓰인 사람이 겨레가 적다고서 겸의(慊疑)하지 말고 내일(來日)에 창대(昌大)하지 아니함을 어찌 알리요. 부진(不振)하다고 상심(傷心)하지 말고 불원(不遠)해서 양복(陽復)의 이치(理致)가 있음을 어찌 알리요. 각자(各自) 수신근행(修身謹行)을 해서 전긍임이(戰兢臨履)하여 가전성법(家傳成法)을 떨어뜨림이 없는 즉 부조재천(父祖在天)의 혼령(魂靈)이 어찌 나의 후손(後孫)이 있다 아니하시리요
이 역사(役事)에 원식(元植) 지성(之聖)등이 더불어 의논(議論)을 해서 일의 마무리를 짓게 되며 책(冊)의 서문(序文)의 한 말씀을 책임(責任)지우거늘 이와 같이 전말(顚末)을 모아서 오른편(便)과 같이 오직 참남(僭濫)하고 경율(輕率)한 죄(罪)가 되지나 않을까 하노라.
丁卯譜(一九八七年) 序文
恭惟吾―延安之宋이 自延安府院君―諡―肅毅公諱―卿이 仕于勝國하여 討紅巾敵하와 封元勳으로 爲始祖하여 生諱―勛하니 文科―吏儀判書로 銀紫光祿大夫하고 是生二子하니 長諱난 光彦이니 大司成―延安君이요 次諱난 雲龍이니 神虎衛保勝―中郞將이라 於是에 分爲二派하여 繼而派而又派하고 分而又分하여 其麗不億이 散在八域이라 而公而卿과 而忠而孝와 以文章― 以道學으로 遠近相望에 或―奉安俎豆하고 或―寓慕齌舍하니 人物之盛이 不讓於巨閥大族이라 譜書之昨이 間世相仍이나 多有一派一譜요 誠難一族一譜난 以其地遠而事巨하여 杳然左하니 實吾族之欠事而方今三人이 橫線에 尤不得生意矣러니 何幸越內諸族이 寓居京鄕이 己多라 乃者―嶺族―甲鍾君이 創意同譜하여 誚羽瑣尾하니 躬訪各處宗門하여 諭以祖先之一身이 分爲千枝之子孫하니 當―明其派―昭其穆이 如珠貫璧綴而不於大同則 ―疎者遠하여 易致途人之歸로 血誠懇篤하니 是可謂吾門曙星이라 於是에 遠近이 同聲相應하여 齎單輻輳가 捷於影響하니 老蘇氏―所謂―孝悌之心이 油然而生者也라 遂―選定鍊達任員하여 閱一二星霜而事就緖하니 固知有志者―事竟成而 祖先厚蓄遠收之理가 甚的歷矣라 但滯北諸族之未得一軆合席이 爲可恨이라 然이나 天道佑善에 爛漫而同歸라 不遠在邇라 執事諸彦이 分勞析艱하여 刪其煩―補不及하고 正其訛―葺其漏하니 昭穆이 蟬聯하고 業蹟이 明瞭하여 開卷奉讀에 如承―謦欬於 祖先하고 如對―顔範於諸族하니 多感其苦心殫誠於吾門敦事則―吾族之復興이 可指日而待而亦可謂―後日續修之模楷也라 易己訖에 永尙在官晟澤奇鍾榮國族人이 以余在耆老之列로 請一言於卷首하니 余―不可以無文人微로 辭하여 謹書此―備顚趾하노라
西紀一千九百八十七年 丁卯三月 日 後孫 升煥 謹序
정묘일구팔칠년서문(丁卯一九八七年序文)
공경(恭敬)히 생각(生覺)건대 우리 연안송씨(延安宋氏)는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시숙의공(諡肅毅公) 휘경(諱卿)이 고려공민왕조(高麗恭愍王朝)에서 사진(仕進)했는데 홍건적(紅巾賊)을 토파(討破)하여 원훈(元勳)으로 추봉(追封)되여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휘훈(諱勛)을 생(生)하니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이의판서(吏儀判書)에 이르러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추증(追贈)되고 아들 형제(兄弟)를 두었는데 장휘광언(長諱光彦)은 대사성(大司成)에 올라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졌으며 차휘운룡(次諱雲龍)은 신호위보승중랑장(神號衛保勝中郞將)을 역임(歷任)했다 이에 이파(二派)로 나눠져서 이어서 파(派)가 되고 또 분파(分派)되고 하여 그의 후예(後裔)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程度)로 번창(繁昌)하여 팔역(八域)에 산재(散在)하고 있다 공(公)과 경(卿)과 충신(忠臣)과 효자(孝子) 또는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으로써 원근(遠近)에서 서로 숭배(崇拜)하고 추앙(推仰)하여 혹은 서원(書院)에서 사림(士林)이 향사(享祀)하며 혹(或)은 제사(齌舍)에 모셔 놓고 추모(追慕)하니 우리 가문(家門) 인물(人物)의 성(盛)함이 어느 거벌(巨閥)과 대족(大族)에도 손색(遜色)됨이 없을 것이다 보사(譜事)는 항상 세세(世世)로 연결(連結)해서 작성(作成)하는 것이지만 일파일보(一派一譜)에 국한(局限)될뿐 진실로 일족일보(一族一譜)의 광범위(廣範圍)한 차원(次元)에 이르지 못한 것은 서로가 거주(居住)한 거리(距離)가 멀고 역사(役事)가 거대(巨大)하여 묘연(杳然)히 서로가 등한시(等閑視)한 소치(所致)이니 실지로 오족(吾族)의 흠결(欠缺)된 일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현재(現在) 삼인(三人)이 횡선(橫線)됨으로 인(因)하여 더욱 장연(帳然)히 실심(失心)이 컸었는데 하행(何幸) 월남제종(越南諸宗)이 경향(京鄕)에 다수(多數)히 우거(寓居)하는지라 이에 영남일가(嶺南一家) 갑종군(甲鍾君)이 과감(果敢)하게 대역(大役)의 동보(同譜)를 만들 뜻을 말아 일어서서 가진 노력(努力)과 활동(活動)을 다하여 몸소 각처(各處)의 종문(宗門)을 찾아다니면서 조선(祖先)의 일신(一身)이 곧 천지만엽(千枝萬葉)의 자손(子孫)들의 뿌리라는 것을 설득(說得) 감동(感動)시켰다 마땅히 그 파(派)를 명확(明確)히 하고 소목(昭穆)을 정연(整然)히 하여 구슬을 꿰어놓은 것 같아야 되는 것인데 만(萬)에 하나라도 대동보(大同譜)를 하지 않는다면 소산(疏散)한 문호(門戶)가 날이 갈수록 더욱 격원(隔遠)되여 마치 서로가 길가는 사람을 보듯 될까 두려워하여 진심적(眞心的)인 정성(精誠)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 가문(家門)의 서성(曙星)이라 하겠다
이에 힘을 얻어 여기저기서 함께 조응(助應)하여 신속(迅速)하고 충분(充分)히 서로 다투어 단자(單子)를 준비(準備)하여 고대(固待)하던 대역사(大役事)를 진취(進就)하게 되었으니 소노천선생(蘇老泉先生)이 이른바 「효제(孝悌)의 마음이 구름이 오르는 듯 솟아난다」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제 능숙(能熟)하고 연달(練達)한 임원(任員)을 선정(選定)해서 일이성상(一二星霜)을 거쳐 단서(端緖)를 찾아 나가게 되니 진실(眞實)로 뜻이 있는 곳에는 어떠한 일이라도 이루어지며 나아가서는 조선(祖先)들의 돈후(敦厚)한 축덕(蓄德)과 원활(遠濶)한 수록(收錄)의 정의(情意)가 밝게 났으나 북한(北韓)에 체억(滯抑)된 우리 제족(諸族)들이 그 어느 한사람도 이 자리에 참여(參與)하지 못한 사실(事實)을 어디에 하소연 할 것인가? 그러나 천도(天道)는 선(善)한 이를 도운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불변(不變)의 실리(實理)이니 만큼 모든 종족(宗族)이 함께 머리 맞대고 의논(議論)할 시기(時期)가 결(決)코 멀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이 일을 헤쳐나가는 모든 분이 인간(人間)과 고초(苦楚)를 함께 나누며 불필요(不必要)히 번잡(煩雜)한 부분(部分)은 산(刪)하고 불급(不及)한 면(面)은 삼가 보충(補充)하여 혹(或) 와전(訛傳) 누록(漏錄)된 것을 정돈(整頓)하니 바야흐로 소목(昭穆)이 막힘없이 연결(連結)되며 업적(業績) 또한 명료(明瞭)하게 밝혀져서 누구든 보책(譜冊)을 펼쳐 읽어 내림에 조선(祖先)의 평소(平素) 인기척을 바로 봉승(奉承)한 듯 하며 제족(諸族)의 얼굴을 직접대(直接對)한 듯하게 되었다 어찌 이렇듯 약심적(若心的)으로 성의(誠意)를 다한 고마움에 감화(感化)됨이 없을 것인가? 이젠 손꼽아 기다리든 우리 종족(宗族)의 복흥(復興)도 목전(目前)에 다가왔으며 또한 앞으로의 계속적(繼續的)인 수보(修譜)에도 본보기가 된다고 하겠다 이 역사(役事)를 순조(順調)로이 마침으로 인(因)하여 족인(族人) 영상(永尙) 재관(在官) 성택(晟澤) 기종(奇鍾) 영국(榮國) 등(等)이 나에게 기노(耆老)의 행열(行列)에 있다하여 권수(卷首)의 서문(序文)을 촉탁(囑託)하니 천견박식(淺見薄識)으로 부득기이(不得己而) 사양(辭讓)타가 얻지 못하여 이에 삼사 우(右)와같이 제(題)하다
서기일구팔칠년정묘삼월 일(西紀一九八七年丁卯三月 日)
후손(後孫) 승환(升煥) 근서(謹序)
丁卯大譜跋(정묘대보발)
后山陳氏曰(후산진씨왈)_自吾之族而至于忘之者(자오지족이지우망지자)난 遠也(원야)라 遠故(원고)로 譜之所由作(보지소유작)이라하니 譜之於族(보지어족)에 其重(기중)이 固如是(고여시)라 所以(소이)로 大家盛族(대가성족)이 莫不取則(막불취칙)하여 作之述之(작지술지)에 以爲一族之史書(이위일족지사서)하니 吾宋之譜(오송지보)도 亦其一而以派別成之者(역기일이이파별성지자)_多(다)하고 以大同成之者(이대동성지자)_少(소)난 以其地有遠近(이기지유원근)하고 族有親疎之致而至于今日則兩洋(족유친소지치이지우금일칙양양)이 接膝(접슬)에 六洲相通(육주상통)하여 人多如浮萍轉蓬(인다여부평전봉)에 未於東於西(미어동어서)_閃忽往來(섬홀왕래)하여 住接(주접)이 無常(무상)하니 若(약)_星霜(성상)이 屢換則世代之別(누환칙세대지별)과 宗支之分(종지지분)이 難以考據(난이고거)에 郭崇鞱之冒汾陽(곽숭도지모분양)을 焉能保其必無也(언능보기필무야)리요 此(차)_修譜之不可少緩(수보지불가소완)이요 且(차)_越南諸族(월남제족)이 多在京鄕(다재경향)하니 亦一好機會(역일호기회)라 乃者(내자)_門內老小僉座(문내노소첨좌)가 以是發議(이시발의)에 嶺南甲鍾氏最効勞(영남갑종씨최효노)하여 躬訪面諭(궁방면유)에 慕先愛族(모선애족)은 彛倫攸在(이륜유재)에 無不樂從而納單(무불락종이납단)을 惟恐或後(유공혹후)라 於是(어시)에 任事諸彦(임사제언)이 竭誠注力(竭誠注力)하여 畫焉(화언)_宵焉(소언)_孜孜矻矻(자자골골)에 簡而明(간이명)_正而確(정이확)하여 縮時月而就其緖(축시월이취기서)하니 實吾門之佚大慶幸(실오문지일대경행)이라 但線北滯在族人(단선북체재족인)이 不得同叅(불득동참)은 勢莫可何而亦不遠間(세막가하이역불원간)_必有合席之日耳(필유합석지일이)라 吾等(오등)이 若干從事於筆硯末故(약간종사어필연말고)_謹書此(근서차)하여 以爲他日續修之一助焉(이위타일속수지일조언)이라
歲丁卯七月下澣(세정묘칠월하한)
後孫(후손) 在官(재관) 鎭安(진안)
仲煥(중환) 長水(장수)
軫錫(진석) 居昌(거창)
奇鍾(기종) 陜川(합천)
元澤(원택) 蔚山(울산)
柄虹(병홍) 彦陽(언양)
榮國(영국) 서울
烈祖(열조) 安東(안동) 謹識(근식)
丙戌譜序
夫譜者는 明其根源하고 辨其昭穆하여 不忘其本하고 而慕祖敦宗하여 孝悌友睦之風을 行于家而하고 傳于世者也니 豈不重且大歟信乎아 程夫子所謂管攝人心하고 收宗厚俗은 莫如明譜系也하니 我延安之宋은 自延安府院君諡肅毅께서 諱卿仕于勝國以來로 歷世久遠에 子姓蕃衍하여 遍于國中하면서 而公卿忠孝와 道德文章이 奕世相望이 炳爍朝野하니 人物之盛은 無愧吾邦名閥矣라 這間에 修大譜有三과 修派譜有四와 其分其合은 因時勢之使然也라 顧今世道變遷하여 朝家에서 廢止戶主制하고 而同姓同本許婚之惡法을 制定公布하니 國爲蠻陌하고 人化禽獸하니 孰不慨嘆茹恨也라 忝祖汚門之事이 不遠有多니 奈何坐示悖倫之橫行乎아 吾宗이 丁卯大譜刊行이 未過二十星霜이나 過春宗會時에 叶謀發議修譜하니 而糾明同根理念을 周知一族血脉을 吾宗族은 絶對嚴禁同姓婚而欲을 承傳統家風하니 修譜之眞意는 在此也라 嗚呼니 譜成則族合하고 族合則이면 不患不相睦하니 睦族則乃尊其祖也니 尊祖之道는 莫大乎睦族도다 惟吾族은 互戒互勉하여 不墜我延安之家에 聲也否라 當今修譜諸家는 擧皆가 登載女名故로 吾家亦隨宗議記女名하니 豈爲忝門之事乎아 譜旣完에 宗議責不肖卷弁之文이거늘 余老且不文不能하여 堪當是役이나 而目睹吾門擧事에 窃不勝欣抃故라 感謝斯役之前後賢勞者而敍之如右
西曆二○○六年丙戌十一月 日
後裔 甲鍾 謹序
병술보서
무릇 족보는 근원을 밝히고 세대를 분별하여 그 근원을 잊지 아니하고 조상을 추모하여, 종족간에 정의(情誼)를 두터이 하고, 효도와 공경과 우애와 화목하는 가풍을 집안에 행하고 세상에 전하고저 하는 것이니 어찌 중대하지 아니하겠나。 정부자(程子)의 말씀에,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고 종족 간에 정의를 두터이 하는 것은 족보의 계통을 밝히는 것이라 하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우리 연안송씨(宋氏)는 연안부원군, 시호 숙의(肅毅)공께서 고려에 벼슬을 한 이후에 세대가 오래됨에 자손이 번성하여 전국에 두루 흩어져 살면서, 공경대부와 충신효자와 도덕문장이 대대로 이어와서, 조야(朝野)에 빛이 나니 풍성한 인물은 다른 명문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그간에 대동보 세 번과 파보 네 번을 수보하였는데, 파보와 대동보를 나누어하고 합하여 한 것은 그 당시의 형편에 따라 수보를 한 것이다。 지금에 돌아보면 세상에 윤리도덕이 변하여 조정에서 호주제를 폐지하고 동성동본의 혼인을 허락하는 악법을 제정하여 공포하니 나라는 오랑캐의 나라가 되고 사람이 짐승으로 변화하니 누가 개탄을 아니 하고 한탄을 머금지 아니 하리오。 조상을 요되게 하고 문중을 더럽히는 일이 멀지 아니하여 허다할 것이니 어찌 패륜만행을 좌시하리오。 우리 종족이 정묘년 대동보를 간행한 것이 二十(이십)년이 되지 않았으나 지난봄에 종친회의 시에 새로 수보할 것을 합의하니 같은 뿌리의 이념을 규명하고 일족의 혈맥을 주지시켜 우리 일족은 절대로 종성혼인을 금하고 전통가풍을 계승하고자 하니 수보의 진실한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라。 탄식하노니 족보를 하면 종족이 합하여지고 종족이 합하면 서로 간에 불목할 근심이 없어지고 종족이 화목하면 그 조상을 높이 추모함이니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일가 간에 화목하는 일보다 막중함이 없도다。 우리 일족은 서로 경계하고 서로 힘써서 우리 연안송씨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지어다。 지금 세상에 수보를 하는 모든 집들이 거의가 여자의 이름을 등재하는 고로 우리 문중도 종의에 따라 여자의 이름을 등재하니 어찌 문중의 욕되는 일이겠나。 족보가 거의 완성됨에 종친의 의론이 불초한 저에게 서문을 책임지우거늘 내가 늙고 또한 글을 잘 못하여 이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눈으로 보고 우리 문중의 큰 역사에 손뼉을 치며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고라。 족보간행에 앞뒤로 수고하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오른쪽과 같이 기록합니다。
서기 二○○六년 병술 十一월 일
후예 갑종 근서
跋(발)
此編(차편)은 延安宋氏(연안송씨)의 大同譜(대동보)임。 우리 宋氏(송씨)는 始祖(시조)이신 肅毅公(숙의공) 諱(휘) 卿(경)으로부터 六百三十餘年(육백삼십여년)의 星霜(성상)을 經過(경과)하면서 名賢達官(명현달관)과 文章鉅公(문장거공)이 代代(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며 雲仍(운잉)이 甚(심)히 蕃盛(번성)하여 八域(팔역)에 散居(산거)하고 世代(세대)가 久遠(구원)하여 그 數爻(수효)를 仔細(자세)하게 把握(파악)할 수 없었고, 더욱이 吾宋(오송)의 貫鄕(관향)이 北域(북역)에 있고 南北(남북)이 相隔(상격)하여 往來(왕래)가 杜絶(두절)하여 痛恨(통한)이 莫及(막급)이요 近來(근래)에 와서 西湖(서호)가 氾濫(범람)하여 先祖(선조)를 忘却(망각)하고 一族(일족)을 等閑視(등한시)하는 弊習(폐습)이 澎湃(팽배)하니 누가 慨歎(개탄)을 아니 하리오。 然(연)이나 다행하게도 우리 宋氏(송씨)는 各派(각파)에서 派譜(파보)를 累次(누차) 刊行(간행)하였으며, 丙戌年(병술년)에 宗議(종의)가 合一(합일)하여 大同譜(대동보)를 發刊(발간)한 後(후)로 三次(삼차)에 大同譜(대동보)를 鑯間(첨간)하여 先祖(선조)의 懿蹟(의적)을 闡揚(천양)하여 忠孝(충효)의 家風(가풍)을 振作(진작)하고 敦宗睦族(돈종목족)하며 家門(가문)의 緖業(서업)을 繼承(계승)하여 왔다。 這間(저간)에 吾門(오문)의 前任(전임) 宗親會長(종친회장)이신 甲鍾(갑종) 族人(족인)이 丁卯大同譜刊行時(정묘대동보간행시)에 率先垂範(솔선수범)하여 全國(전국) 各(각) 地域(지역) 親族(친족)을 尋訪(심방), 大同譜刊行(대동보간행)에 合議(합의)를 導出(도출)하게 되었으며 이어 始祖公以下(시조공이하) 五世祖(오세조)<判書公(판서공)舍人公(사인공)賢監公(현감공) 外(외)>까지 祭壇(제단)을 造成(조성)하고 親族간(친족간) 敦睦(돈목)울 爲(위)하여 大宗會(대종회)와 靑年會(청년회)도 結成(결성)하는데 獻誠(헌성)을 하였으며 今番(금번) (대동보간행)에 獻身的(헌신적)으로 많은 誠力(성력)을 傾注(경주)하여 功績(공적)이 至大(지대)하고 우리 門中(문중)의 龜鑑(귀감)이 되므로 宗中(종중)의 뜻으로 感謝(감사)를 表(표)하고 앞으로 언젠가 南北(남북)이 統合(통합)되면 北域(북역)의 諸族(제족)과 或(혹) 此譜(차보)에 漏落(누락)된 宗人(종인)은 다음 譜(보)에 仔詳(자상)하게 登載(등재)할 것을 約束(약속)드리며 簡略(간략)하게 敍(서)합니다。
西曆(서력) 二○○七年(2007년) 丁亥(정해) 月(월) 日(일)
後孫(후손) 榮元(영원) 서울
相完(상완) 鎭安(진안)
鍾益(종익) 서울
在永(재영) 長水(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