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김상(金尙)은 신라종성(新羅宗姓)의 후예이며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으며 예안에 대대로 살아온 선비집안으로 후손들이 본관을 예안으로 하였다.보승낭장(保勝郎將) 김로(金輅)를 중시조(中始祖)로 계대(系代)한다.
[ 대표적 인물 ]
-김담(淡)(1416-1464):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자(字)는 거원(巨源).호(號)는 무송헌(撫松軒). 시호(號)는 문절(文節). 역학자(曆學者)이며 판서를 지냈다.
1435년(세종17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정자가 되었다. 그 후 세종의 명을 받아 이순지(李純之)와 함께 회회력(回回曆)》을 참고하여 조선 역학의 기본이 된《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만들었다. 그 후 충주목사, 안동부사,경주부윤을 지낸 뒤,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순지와 함께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 ·역법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문집에 《김문절공일고(金文節公逸稿)》이 있다.
-김륵(1540-1616):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자(字)는 희옥(希玉),호(號)는 백암(柏巖),시호(號)는 민절(敏節)이다.퇴계이황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76년(선조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승문원, 예문관,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등에서 벼슬을 지내고, 1584년(선조17년) 영월군수가 되었다. 1592년 형조참의가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집사(安集使)로서 영남에 내려가 인심을 수습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이어 대사헌이 되어 '시무 16조'를 상소하였다. 뒤어 충청도 관찰사, 안동부사를 역임한 후, 1612년(광해군4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강릉으로 유배되게 되었으나 여러 대신들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영천(榮川:영주)의 구강서원(龜江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백암문집》이 있다.
[본관지 유래]
예안(禮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고구려 시대의 매곡현(買谷縣)을 신라가 선곡(善谷)으로 고쳐서 내령(奈靈 : 순흥)군(郡)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 태조(太祖) 때 예안군(禮安郡)으로 승격되었다가 충렬왕조(忠烈王朝)에 한때 선성(宣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고종(高宗) 때 다시 군(郡) 되었으나 1913년 안동군(安東郡)에 편입되어 일부지역은 예안면(禮安面)으로 남았다가 1976년 10월 안동다목적 댐이 준공됨에 따라 수몰되었다.
[인구] 12,632명이 있다.(1985년)
2.덕수김씨(德水金氏)
[유래]
덕수김씨(德水金氏)는 해풍김씨(海豊金氏)와 동원(同源)으로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이 고려(高麗)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덕수(德水)로 하게 되었다.
해풍김씨의 시조 김숭선(金崇善)의 손자 김니(金泥)가 조선조에 현감을 지내고 덕수에 정착세거 하였으므로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덕수로 하였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김숭선의 8세손 김수연(金壽延)을 시조로 하는 계통도 있다.
참고로,고대의 정주(貞州)를 고려에 와서 해풍군이라 하였고 고려의 덕수현과 해풍군이 통합되면서 풍덕군이 되었으니 지금의 개풍군이다.
가문의 인물로는 김니(金泥)의 아들 김평(金枰)이 사직을 역임했고, 손자 김수윤(金壽胤)은 교수를 지냈다.
그리하여 후손들로 풍덕(豊德)에 세거(世居)하면서 조선조(朝鮮朝)에서 병절교위(秉節校尉)에 오른 김수연(金壽延)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고, 수연(壽延)의 아들 김세형(金世亨 : 장사랑에 오름)과 김세창(金世昌 : 어모장군에 오름)의 형제대(兄弟代)에서 가문(家門)이 크게 중흥하였다.
그 후 퇴계(退溪) 이황(李滉), 정응두(丁應斗) 등과 함께 중종(中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김희성(金希聖)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과 배천군수(白川郡守)를 지내며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춘(春 : 문과에 급제하여 전직을 역임)과 추(秋 : 직강을 역임)가 뛰어났다.
[인구] 4,385명이 있다.(1985년)
해풍김씨(海豊金氏)
[유래]
해풍 김씨(海豊金氏)는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와 병부전서(兵部典書)를 지내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해풍(海豊)으로 하게 되었다.
특히 해풍 김씨(海豊金氏)는 지명(地名)의 변천과 종문(宗門)간의 연락 두절로 동일 시조하(始祖下)에서도 제파(諸派)가 해풍(海豊)·덕수(德水)·정주(貞州) 등으로 칭관(稱貫)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최근에 대종회(大宗會)를 창립(創立)하고 문중(門中)의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모든 성손(姓孫)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인구] 15,025명이 있다.(1985년)
3.안로김씨(安老金氏)
[유래]
안로김씨(安老金氏)의 시조(始祖) 김지경(金之敬)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손자(孫子)인 김운발(金雲發:나주 김씨의 시조)의 후손이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신라김씨연원도(新羅金氏淵源圖)」에는 지경(之敬)이 경순왕의 둘째아들 김횡(金횡)의 15세손으로 나타나 있고,「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호장 중윤(戶長中尹)을 지낸 김득장(金得章)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장(戶長) 김득장(金得章)의 아들 김극순(金克淳)은 고려조(高麗朝)에 무관(武官)으로 대장군(大將軍 : 상장군의 다음 벼슬인 종3품 관직)을 역임했고, 후손들이 누대(累代)에 걸쳐 안로(安老)에 세거(世居)하면서 관향(貫鄕)을 안로(安老)로 하게 되었다.
[인구] 633명이 있다.(1985년)
4.칠원김씨(漆原金氏)
[유래]
시조 김영철(金永哲)은 칠원(漆原)에 토착(土着)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칠원에 살면서 본관을 칠원으로 하였다.
[인구] 209명이 있다.(1985년)
5.신 안동김씨(安東金氏)
[유래]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 경애왕때 고창(안동)의 성주로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930년(경순왕 4년)에 권행, 장정필과 함께 향병을 모으고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무렵 고려에 귀순하여 개국공신이되고 벼슬이 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도정을 지낸 김극효(金克孝)를 중시조(1세)로 하고 있다.
-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시조 권행과 김선평, 장정필을 모시기 위해 983년(고려 성종 2년)에 세운 삼태사묘는 경북 안동시 북문동 24번지에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한다.
[계 파]
지철파, 원수파, 열파 등 3파가 있다.
[ 대표적 인물 ]
- '신안동'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비유로 삼는데, 특히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으로 더 알려졌다.
- 김상용(尙容) : 김극효의 아들. 우의정을 지냈다.
- 김상헌(尙憲) : 김상용의 동생. 좌의정을 지냈다. 후손이 세도가문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 김조순(祖淳) :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김달순(達淳), 김문순(文淳), 김희순(羲淳), 김유근, 김교근(敎根) 등 일족이 정승, 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 김조근(祖根) : 헌종의 장인. 호위대장을 지냈다.
- 김병연(炳淵) : 김삿갓으로 유명하다.
- 김옥균(玉均) : 구한말의 정치가이다.
- 김좌진(佐鎭) : 독립운동가이며 장군이다.
- 김두한(斗漢) : 김좌진의 아들. 국회의원을 지냈다.
- 영의정 : 김좌근(左根), 김흥근(興根), 김병학(炳學), 김병국(炳國), 김병시(炳始) 등이있다.
- 판서 : 김수근(洙根), 김보근(輔根), 김병기(炳冀), 김병주, 김병덕(炳德), 김병지(炳地), 김병교(炳喬) 등 수십명이 있다.
[인구] 21,554명이 있다.(1985년)
6.안동권씨(安東權氏)
[유래]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본래의 성은 김씨이다.
신라말 경애왕 때 신라가 극도로 부패하고 잇단 민란으로 국운이 기울어가자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입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한다.
이에 격분한 권행은 930년(경순왕 3년) 겨울 후백제의 견훤이 대군을 몰아 이 고을에 침입하여 고려 태조와 대치했을 때 이 고을 성주 김선평(신 안동김씨 시조), 그리고 이 곳 지도급 인사 장정필(안동장씨 시조)과 의논, 함께 향병을 모으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의 8천 대병을 함몰시키고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고창은 후삼국의 전략상 중요지역이었으며, 병산에서 이들 세사람의 도움으로 승리함으로서 열세에 있던 태조 왕건이 우세해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병산전투의 승리는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항복 등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었다.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했다.(能炳機達權)"라며 권씨 성을 내리고 벼슬을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로 제수한 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 권행의 묘소는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으며 향사는 매년 한식일과 10월 중에 한다.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시조 권행과 김선평, 장정필을 모시기 위해 983년(고려 성종 2년)에 세운 삼태사묘는 경북 안동시 북문동 24번지에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한다.
[가문의번영]
고려 개국과 함께 이땅에 뿌리를 내린 안동권씨는 무수한 인물들을 배출한다.
고려시대 추밀원부사을 지낸 권수평(權守平)은 고려사에 청빈한 관리의 표상으로 기록된 인물,
그의 아들 권위는 태자의 태사로 권씨가문 최초로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받은인물이며,
권수평의 증손이며 찬성사 권단의 아들인 권부(權溥)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형제와 그의 사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져서 명성을 떨쳤다.
당대 9봉군(當代九封君)은 역사상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면서 안동권씨는 3백5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찬란한 꽃을 피운다.
[계 파]
-검교공파 : 권척을 파조로 한다.
-광석공파 : 권대의를 파조로 한다.
-군기감공파 : 군기감을 지낸 권사발을 파조로 한다.
-동정공파 : 고려 호장동정을 지낸 권체달을 파조로 한다.
-별장공파 : 고려 별장을 지낸 권영정을 파조로 한다.
-복야공파 : 고려 상서좌복야 상장군을 지낸 권수홍을 파조로 한다.
-부정공파 : 고려 식록부정을 지낸 권통의를 파조로 한다.
-부호장공파 : 고려 때 부호장을 지낸 권시중을 파조로 한다.
-수중공파(종파) : 권수중을 파조로 한다.
-시중공파 : 고려 시중을 지낸 권인가를 파조로 한다.
-좌윤공파 : 고려 호장좌윤을 지낸 권지정을 파조로 한다.
-중윤공파 : 고려 호장중윤을 지낸 권숙원을 파조로 한다.
-호장추공파 : 고려 호장을 지낸 권추를 파조로 한다.
-추밀공파 : 추밀원부사 권수평을 파조로 한다.
-급사중공파 : 권형윤을 파조로 한다.
[족보발간]
-성화보 : 1476년(조선 성종 7년).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이다.
-을사보 : 1604년(조선 선조 38년)
-갑오보 : 1654년(조선 효종 5년)
-신사보 : 1701년(조선 숙종 27년)
-갑인보 : 1734년(조선 영조 10년)
-후갑인보 : 1794년(조선 정조 18년)
-정미보 : 1907년(조선 순조 1년)
-신축보 : 1961년
[본관지] 경상북도 안동
[ 연락처 ] 안동권씨중앙종친회 : 02) 735-2833, 737-0992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 때 558,574명이 있었다.
7.반남박씨(潘南朴氏)
[유래]
시조 박응주(朴應珠)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선조를 알수가 없으나 반남현(나주)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선비집안의 후손으로 호장을 지냈고 그의 6세손 박은이 조선초기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익재동덕좌명공신으로 좌의정에 이르렀고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박응주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반남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박은, 박숭질(崇質), 박세채(世采), 박종악(宗岳), 박종훈(宗薰), 박회수(晦壽) 등의 상신,
박태상(泰尙), 박규수(珪壽) 등의 대제학, 박세당(世堂), 박지원(趾源) 등의 뛰어난 학자가 있으며, 박소(紹), 박응남(應男), 박응복(應福), 박태보(泰輔) 등의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15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과 조선 후기에 판서급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박씨 중에서 벼슬이 가장 화려하다.
[인구] 118,838명이 있다.(1985년)
8.평산(평주)박씨 平山(平州)朴氏
[유래]
신라 종성(宗姓)의 후예인 평산 박씨(平山朴氏)는 고려 초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시중(侍中)에 오른 박지윤(朴智胤)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래 평주(平州) 출신으로 딸과 손녀(孫女 : 대광 수문의 딸이 월경원 부인이 됨)가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비(妃)가 되어 고려 초기에는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서의 지위(地位)를 굳혔다고 한다.
박지윤의 차남 박수경(朴守卿)은 후백제(後百濟)가 고려에 침공해 왔을 때 장군(將軍)으로 조물군(曹物郡) 전투에서 크게 공(功)을 세워 원보(元甫)에 올라 평주군(平州君)에 봉해지고 토지(土地) 200결(結)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선조(先祖)가 누대(累代)로 세거(世居)해온 평산(平山) 땅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 1,274명이 있다. (1985년)
평주박씨(平州朴氏)
[유래]
평주박씨(平州朴氏)는 평산박씨(平山朴氏)와 동원이면서도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혈연 관계를 따지지 못해 평산·평주로 갈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까닭으로 평주박씨의 중조(中祖) 박수경(朴守卿)이 평산박씨의 중조(中祖) 박지윤(朴智胤)의 아들이고, 또 평주는 평산의 고호로서 관적지(貫籍地)가 같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평주박씨족보(平州朴氏族譜)》에 의하면 <중조 박수경은 고려 태조를 도와 원윤(元尹)이 되고,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자 태조가 그에게 이를 평정하도록 명했다. 조물성(曹物城)과 발성(勃城)의 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밭 2백 결을 하사받고 광종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다. 그러나 문헌이 실전되어 그 이상의 세계와 그 이하 박광렴(朴光廉)에 이르기까지의 세계를 상고 할 수가 없어서 그를 중조로, 박광렴을 1세조로 하였다>고 한다.
[인구] 113명이 있다.(1985년)
9.용주최씨(龍州崔氏)
[유래]
시조 최광(崔光)은 부호장(副戶長)을 지냈다.
시조 최 광(崔 光)의 선계가 대령(大寧 :海州의 옛이름) 사람으로 용주(龍州)로 옮겨가 관향을 삼았다고 한다. 용주(龍州)는 용궁현(龍宮縣)의 옛 이름이다.
[인구] 1,684명이 있다.(1985년)
10.봉화정씨(奉化鄭氏)
[유래]
시조 정공미(鄭公美)는 고려 초기에 정의대부 호부령(正議大夫戶部令)을 지내고 983년(성종 2년) 전국에 12목을 두게 되면서 봉화호장이 되었다. 그의 5 세손 정도전(鄭道傳)이 창왕을 폐하고 공민왕을 추대하여 좌명공신이 되고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태조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공이 커 다시 봉화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봉화로 하였다.
[가문의번영]
고려 때 정영걸(鄭英桀)은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정균(鄭均)은 검교군기감정(檢校軍器監正)이 되었고, 정운경(鄭云敬)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충혜왕 때 지밀성사(知密城事)을 거쳐 복주판관에 전임되고 공민왕 때 전주목사를 거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도복(鄭道復)은 한성판윤이 되었고, 정진(鄭津)은 세종 때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판한성부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423년 공조판서, 1425년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정문형(鄭文炯)은 세종 29년 여러관직을 거쳐 이조,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연산군 때 우의정에 승진했다.
정도전(鄭道傳)은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태조 3년 한양천도를 실현하고 이듬해 명나라와 실력으로 항쟁할 것을 주장하고 군비확보에 전력하였다. 또한 그는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외에도 정숙은(鄭叔垠)은 부사, 정국로(鄭國老)는 군수, 정효종(鄭孝宗)은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서 이름을 떨쳤다.
[본관지] 경상북도 봉화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0,468명이 있었다.
11.동래정씨(東萊鄭氏)
[유래]
동래정씨는 신라의 6부촌장 가운데 자산진부 촌장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시조는 신라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기록이 없는데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 때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 역시 그 이후의 혈연계보가 불확실해 정지원을 1세로 하고 그후 안일호장을 지낸 정문도(鄭文道)를 중시조로 한다.
현재의 부산 동래를 세거지로 삼은 까닭에 동래를 본관으로 쓰게 됐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 상신 17명, 대제학 2명, 호당(湖堂)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명과
문과 급제 1백98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그중에서도 14세손 정난종(鄭蘭宗)에 이르러 동래
정씨는 명문의 반석을 더욱 굳혔다. 성리학자인 그는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성종 14년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가로도
수완을 보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원각사비 글씨는 바로 그의 솜씨다. 그의 네아들 중
정광필(鄭光弼)은 중종때 영의정에 오르고 당시에 어진 정승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그의
손자 정유길은 대제학, 좌의정을 지냈으며 정유길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일제침략의 난세 속에서 5천년간 이어온 조선의 얼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그는 금세기 정씨가문에 또 하나의 산맥을 이룬다. 유학자이자 사학자인
그는 해방 이전에는 연희전문(연세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에서 국문학을 강의했고.
시대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국학 발굴에 힘썼다. 그는 1892년 서울토박이로 태어나
한때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을 왕래하며 상해에서 항일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해방후 초대 감찰 위원장을 지내며 저술활동에도 힘을써
<조선사연구>, <양명학연표> 등의 저술을 남겼다.
[계 파]
교서랑공보파(校書郞公輔派)
첨사공필파(詹事公弼派)
[집성촌]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소가 누워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고 있는 형세라 해서 와우망월산. 이 산의 이름을 따 우망(牛望)골이라 했던 것을 고종때에 음이 같은 글자를 따 근심을 잊고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우망골(憂忘)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 전체 170여가구 중 160가구가 모두 동래정씨로 27세손부터 34세손까지 8대 한 핏줄이 모여산다.
처음에는 경북 안동군 구담리에 살다 성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12세손 정균령(鄭龜齡)이 자손이 번창할 곳이 못된다 하여 약 2백40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또한 이 마을은 왜가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본관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14,782명이 있었다.
12.기계유씨(杞溪兪氏)
[유래]
시조 유삼재(兪三宰)는 신라 때 아손을 지냈다. 그 후 유의신(兪義臣)이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 태조에 불복하자 태조가 기계현(경주에 속한 현)에 호장으로 복촉하게 하여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본관을 기계로 하였다.
[인구] 97,382명이 있다.(1985년)
13.고흥류씨(高興柳氏)
[유래]
시조 유영(柳英)은 원래 신라의 선비로 신라말에 정치가 혼란하자 흥양(고흥)으로 이사 하여 고려 개국후 호장을 지냈다. 그리고 그의 7세손 유청신이 고려 충선왕 때 도첨의 정승을 지내고 고흥 부원군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이 본관을 고흥으로 하였다.
-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 미륵산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10월이다.
[인구] 64,465명이 있다.(1985년)
14.순창조씨(淳昌趙氏)
[유래]
시조 조자장(趙子長)은 고려시대에 호장(戶長) 을지냈다.
조자장은 趙子張으로도 기록되어 있기도 하나 대부분의 족보에 趙子長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른다.
본관을 순창으로 한것은 고려 때 대장군에 오른 조인평(趙仁平)에서 비롯된것이며, 조인평을 시조로 기록된 문헌도 있으나 조인평은 조자장의 5세손이다.
[가문의번영]
조인평(趙仁平)은 고려 명종 7년 계룡산의 토적을 토평하고 벼슬에 올라 금오위 랑장(金吾衛 郞將)에 오르고 대장군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명종 때 목사 등을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남긴 조유성(淳惟誠),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사위로 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조수익(淳壽益) 등이 있다.
[족보발간]
-임술보 : 1802년(순조 2년)
-무진보 : 1868년(고종 5년)
-계유보 : 1933년
-계묘보 : 1963년
-무진보 : 1988년
[본관지] 전라북도 순창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2,419명이 있었다.
15.양주조씨(楊州趙氏)
[유래]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때 호장,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그러나 양주조씨족보 경신보(1980년)에는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됐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병신보(1956년) 서문에는 고려시대의 양주호장 조통(趙通)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상 기록이 미흡해 대수(代數)를 밝힐 수 없으므로, 조잠(趙岑)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양주로 하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전해지지 않는다. 음력 10월 14일 향사한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 대제학을 지낸 조말생(趙末生)을 비롯하여 이조판서를 지낸 조극관(趙克寬), 관찰사를 지낸 조수양(趙遂良), 공조판서를 역임한 조언수(趙彦秀), 좌삼찬(左參贊)의 조사수(趙士秀) 등 많은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 선조 때에 조정(趙挺)이 우의정에 오르고 조존성(趙存性)이 호조판서를 지내면서부터 가문은 더욱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조창원(趙昌遠)은 진사시에 합격, 의금부도사를 거쳐 인천부사를 지낼 때 딸이 인조의 계비(繼妃)가 되자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돈녕부사(敦寧府事)가 되었다.
조계원(趙啓遠)은 162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조사석(趙師錫)은 1688년 좌의정, 조태채(趙泰采)는 1717년 우의정을 지냈다.
조태구는 16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고, 조태억(趙泰億)은 170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그리고 순조 때의 조두순(趙斗淳)은 182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삼정 개혁을 단행, 1865년 영의정에 올라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켰다.
철종 때의 조병세(趙秉世)는 185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그는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의해 시무19조를 상소하였고,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못하자 자결하였다. 그에게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계 파]
시조 조잠의 증손대(조선 전기)에서 4개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정평공파와 제학공파는 1453년(단종 1년)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김종서(金宗瑞) 일파로 몰려 멸문을 당함으로써 현재 그 후손이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전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문강공파의 후손이며 조말생은 사실상 중시조가 된다고 한다.
-정평공파(靖平公派) : 파조는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조계생(趙啓生)이다.
-강화공파(江華公派) : 파조는 강화부사를 지낸 조유중(趙惟中)이다.
-문강공파(文剛公派) : 파조는 조말생(趙末生)이다.
-제학공파(提學公派) : 파조는 보문각제학을 지낸 조종생(趙從生)이다.
[집성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묵안리
-전북 김제군 청하면 관상리
[족보발간]
-신축보 : 1721년(경종 1년)
-계해보 : 1743년(영조 19년)
-을유보 : 1825년(순조 25년)
-병신보 : 1956년
-경신보 : 1980년
[본관지] 경기도 양주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3,221명이 있었다.
16.고령신씨(高靈申氏)
[유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본래 신라 공족(公族)의 후예로 고려조에서 지방 향리인 호장이 되고 고종(高宗)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에 올랐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누대로 정착 세거해 온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고,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영남 지방의 벌족으로 일컬어졌다.
신성용의 선조는 신라의 선비로 대대로 고령에 살면서 호장을 지내왔으므로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8세손 신숙주가 익재좌리공신으로 고령 부원군에 봉해졌다.
[인구] 117,333명이 있다.(1985년)
17.아주신씨(鵝洲申氏)
[유래]
시조 신영미(申英美)는 고려 말엽 거제현(巨濟縣)의 영현인 아주현의 권지 호장(權知戶長)이 되었으므로 본관을 아주로 하였다.
족보중에 시조를 신숭겸으로 하고 하고 신익휴를 중시조로 하는 족보가 있다.
*아주 신씨의 시조 신익휴(申益休)는 평산 신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랑(文下侍郞)에 오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아주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익휴(益休)를 시조로 받들고 평산 신씨에서 분적하여 아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나, 조선 순조 때 사람인 도와(陶窩) 신정주(申鼎周)가 저술한 『호서기행』에 의하면 1817년(순조 17) 공주의 김노정(金魯定)이『만성보』를 만들 때 신익휴라는 가공적 인물을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과 연계시켜 위조했다고 하며, 영조 때 편찬된『문헌비고』와 1924년에 발행된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아주 신씨의 가첩에는 고려 때 아주현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인 신영미(申英美)가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보에는 『아주신씨을해대동보』에 기준하여 장절공(壯節公) 신숭겸의 12세손으로 기록된 익휴를 일세조로 하여 계대를 상고하였다.
[인구] 26,298명이 있다.(1985년)
18.창녕성씨(昌寧成氏)
[유래]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아버지는 성숙생으로 신라 대관 성저의 후예라고 한다. 성인보는 창녕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이며 창녕에서 호장중윤(戶長中尹)을 지냈다. 후손들도 창녕에서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본관을 창녕으로 하였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시조 성인보(成仁輔)는 고려 명종(明宗) 때 사람으로 고종(高宗 : 추정) 때 창성(創姓)한 것으로 전한다.
[인구] 158,335명이 있다.(1985년)
19.칠원윤씨(漆原尹氏)
[유래]
시조 윤시영(尹始榮)은 신라 무열왕 때 태자태사로서 고명원로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윤황 이후의 기록은 없어서 알 수가 없고, 고려시대에 칠원백, 호장을 지낸 윤거부(尹鉅富)를 기1세조로 하여 중시조(中始祖)로 하고있다. 그의 17세손인 윤길보(尹吉甫)(시호는 충의)가 구성군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칠원군에 살면서 본관을 칠원으로 하였다.
- 묘소는 경남 함안군 칠서면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 윤수(秀) : 고려 충렬왕 때 군부판서(軍簿判書),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지냈다.
- 윤저(抵) : 윤수의 증손. 조선 태조 때 상장군이 되고 제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 3등에 책록, 찬성사가 되었다.
- 윤석보(碩輔) : 옥당(玉堂), 직제학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 윤풍형(豊亨) : 윤석보의 아들. 관찰사,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 윤탁연(卓然) : 윤석보의 증손. 명종 때 춘추관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옥당, 3도관찰사, 형조,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선조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칠계군에 봉해졌다.
- 윤지술(志述) : 숙종 때 유생으로 신임사화에서 화를 입었으며, 임창, 이의연과 함께 3포의(三布衣)로 일컬어졌다.
[인구] 44,874명이 있다.(1985년)
20.양주윤씨(楊州尹氏)
[유래]
시조 윤 숭(尹 崇) 고려조 도첨의 정승(都僉議政承)을 역임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양주(楊州)에 정착(定着)한 사족(士族)으로 전한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은 본관(本貫)을 양주(楊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며, 숭의 아들 윤덕방(尹德方)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역임했으며, 손자(孫子) 윤수(尹壽)가 조선에서 만호(萬戶)를 역임하였고, 증손 윤기(尹期)는 주부(主簿)를 지내 가문(家門)의 전통을 세웠다.
[인구] 2,315명이 있다.(1985년)
21.영천윤씨(永川尹氏)
[유래]
시조 윤절생(尹切生)은 고려시대에 호장을 지냈다. 그의 증손(曾孫) 윤승관(尹承琯)이 고려 원종(元宗)때 문과에 장원(壯元)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고울(高蔚 : 영천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영천(永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영천윤씨의 인물로는 태종 때 군수 윤순(淳), 성종 때의 이조참의 윤긍(兢), 선조 때 중추부참지사 윤빙(聘) 등이 있다.
[인구] 1,745명이 있다.(1985년)
22.무송윤씨(茂松尹氏)
[유래]
무송 윤씨는 원래 소호씨이다. 상고시대에 소호 금천씨 차비의 아들 반이 궁정이 되었는데 왕이 옹주의 윤성에 봉해서 윤씨로 하였다고 한다. 오계시대에 후손인 윤경이 병란을 피하여 무송(전북 고창)에 정착하여 살면서 본관을 무송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후의 기록은 알 수가 없다.
시조 윤양비(尹良庇)는 고려 예종 때 보승낭장(保勝郎將)으로 무장현호장(茂長縣戶長)을 지냈다.
- 시조묘소는 전북 고창군 대산면 성남리(음력 3월 15일 제향)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 윤택(澤) : 윤비의 증손. 정당문학, 첨의찬성사를 지냈다.
- 윤소종(紹宗) : 윤택의 손자. 조선시대 병조전서(兵曹典書)로 '고려사' 편찬에 참여, 회군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 윤회(淮) : 윤소종의 아들. 세종 때 병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는데 주호(酒豪)로 유명하다.
- 윤자운(子雲) : 윤회의 손자.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 윤형(泂) : 선조 때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호조판서, 중추부판사를 역임하였다.
[인구] 10,320명이 있다.(1985년)
23.남양홍씨(南陽洪氏) - 토홍계(土洪系)
[유래]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당성(남양)에 대대로 살아온 선비의 집안으로 고려때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냈으며 가문의 기틀을 잡아 가세를 크게 번창시켰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남양으로 하였다.
- 시조의 묘는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천등리(등굴)에 있었으나 없어져서 비단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제향한다.
[ 대표적 인물 ]
- 홍언필(彦弼) :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다. 부인 여산송씨는 중종 때의 영의정 송질의 딸이다.
- 홍섬(暹) : 홍언필의 아들. 명종 때 대제학을 지냈고 선조 때 영의정을 세차려나 중임했으며 청백리에도 올랐다.
- 홍담(曇) : 홍언필의 조카. 훈구파의 거두로 선조 때에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도 올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효자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 홍숙(淑) : 중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대사헌, 예조, 병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상신 2명, 문형 1명, 청백리 3명, 부마 1명, 공신 3명 등을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