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련석(安鍊石)
1派19世-판관공파
文科 進士 宗簿寺直長 成均館典籍 延日縣監 刑曹佐郞 經筵官
과의교위(果毅校尉) 양산군수(梁山郡守)
贈 예조판서(禮曹判書)
北溪逸稿
안련석(安鍊石 ; 1662∼17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字는 보천(補天), 號는 북계(北溪) 보만당(保晩堂).
안경엄(安景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헌(安櫶)이고, 아버지는 안중현(安重鉉)이며 ,
어머니는 인동장씨로 경흥창주부 장영(張排)의 딸이다.
문장에 능하여 젊어서 생원·진사에 뽑히었다.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경연관(經筵官) 이 되어 임금에게 진강(進講) 중 민폐를 진언하고 이의 구제책을 주청(奏請)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김일경(金一鏡) 일파의 왕세제 연잉군(延艀君 : 뒤의 영조)의 위해(危害) 시도가 있자,
세제를 옹호하여 소론의 미움을 샀다.
그 뒤 양산군수 로 나아갔으나 사단(事端)이 생기어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의 탄핵을 받아 진주에 유배되었다.
안연석(安鍊石)
1662(현종 3, 임인) ~ 1730(영조 6, 경술)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보천(補天). 호는 북계(北溪)ㆍ보만재(保晩齋).
와룡(臥龍) 가구(佳邱)에서 살았다. 진사(進士) 중현(重鉉)의 자.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조덕린(趙德隣)ㆍ이재(李栽) 등과 교유했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7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에 임명되었다.
이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연일현감(延日縣監)이 되어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교학(敎學) 진흥에 힘썼다.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내려와 있다가
1725년 영조 즉위 후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복직되어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진강(進講) 중 임금에게 민폐를 진언하고 이의 구제책을 주청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옹호하여 소론(少論)의 미움을 샀다.
그 뒤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재직시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의 탄핵으로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1730년(영조 6) 향리 예안(禮安)으로 이배(移配)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ㆍ臥龍誌
-안동인물초색인
[문과 ] 숙종(肅宗) 31년 (1705) 을유(乙酉)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3위 [생원진사시 ] 숙종(肅宗) 9년 (1683) 계해(癸亥)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二等) 11위 [생원진사시 ] 숙종(肅宗) 9년 (1683) 계해(癸亥)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二等) 16위 전력품계 : 과의교위(果毅校尉)
관직 : 군수(郡守)
[부] 성명 : 안중현(安重鉉)
[조부] 성명 : 안헌(安櫶)
[증조부] 성명 : 안경엄(安景淹)
[외조부] 성명 : 장벽(張銢)
[처부] 성명 : 최체건(崔體乾)
[처부2] 성명 : 이도제(李道濟)
[형] 안구석(安龜石)
[제] 안노석(安老石)
[제] 안지석(安砥石)
[자] 안복준(安復駿)
佐郞安公 墓碣
余少聞嶺人於沙溪金文元先生從享之請也。有爲通文詆斥先生。目之以鄕黨間好父老搢紳家佳子弟者。時安進士鍊石方主嶺中論議。世疑以出於其手。被儒罰十數年。至乙酉始解而赴擧。余在史館。欲更罰之而不果。遂擢其年文科。其後往往因人聞其居官處事。少譽而多毁。余以素不悅之心。輒信其說。蓋認爲難與言者矣。今辱從其諸子遊。又因其請而作公樹墓之辭。嗚呼。天下事誠有不可知者矣。按其狀。公字補天。順興人。文成公裕之後 。貞愍公瑭己卯名相。其兄璁出爲人後。辛巳禍後流落嶺表。子孫仍世居安東。其後兩世皆文科都事。曾祖景淹 祖櫶皆 不仕。考重鉉 貞陵參奉。公孝於事親。篤於奉先。於族黨務婣睦。於朋友重意氣。且善爲文。下筆數千言。少擧生員進士。其及第則甲科第二。例補直長。而成均館典籍,直講,刑曹佐郞。延日,結城縣監。梁山郡守。其內外踐歷也。乙巳公以兼春秋入講筵。因文義請悉陳民隱。上許之。公曰在昔新羅時。十萬之兵不時徵發於都城之內。今日國家。民數非不多。而徒擁虛簿。閒丁隱匿於各處。至有白骨隣族之弊。此由於守令不得其人。因奏袪弊救民之策凡數百言。上嘉納之。特問爾家何在。居數日復召對。筵臣有語及趙德隣疏事者。公曰嶺南之有德隣。固爲不幸。然豈可以一德隣之故。謂皆黨於姦凶。而不純於大義耶。承旨以出位請推考。上不許曰。以嶺人而欲爲分疏。可見本情。蓋異數也。公嘗家食十數年。不求仕進。名其堂曰保晩。仍自誦曰所貴乎晩者。講天下之義理熟。閱天下之事變多。始之不悟。而卒悟於晩。能得其性情之正者。乃所以保晩 。噫。公之平生志尙。此其大致也。是以當壬寅一鏡,尙儉輩危逼東宮也。慨然有保護之論。已而儉誅而東宮安。疏果不上。然羣小甚疾之。後以梁山事。爲御史朴文秀所構陷。編配晉州。旋量移禮安。以庚戌十一月二十九日。疾卒于謫舍。享年六十九。公文章才略。雖不見用於世。而世人蓋莫不知之。然在公爲餘事。晩年樹立甚偉。類非常人所可企及。藉令公眞有誣詆先正之事。不害爲朱子所謂先病後瘳者。况其無是也哉。蓋公母夫人張氏嘗戒公曰。吾祖旅軒先生嘗與金沙溪爲道義交。汝愼勿與浮薄輩侵辱先賢。以得罪吾祖也。以此觀之。向所謂通文。可知其非出公手。而其餘浮謗俱不足信也。竊謂公之所樹立。卽天理民彝之根於心。而關係世道大矣。有不可不泝源而極論之者。嗚呼。吾東素以禮義之邦。有小中華之稱。而八路之中。嶺南文獻爲最。文廟從祀之賢。居其四焉。其亦盛矣。不幸論議分潰。士趨乖盭。先輩有云自嶺人誣辱栗,牛兩先正之後。南土絶不産人才。此有識之言也。夫此論之於嶺人。有同世業。父傳子受。殆百有餘年。擩染膠滯。牢不可破。然而章疏書牘之交相論辨者。今無餘蘊。苟有豪傑者作。取以觀之。以究其是非。則年代累嬗。恩怨俱冷。一段公心。自然流出。或有犂然而會於心。怳然而覺其非者矣。况庚申柟,堅之不軌。己巳間希載,杭之謀廢國母。甲戌後弘,渤之陰呪東宮。皆惡逆之大者。而此俱非乃祖先之所及知者。使其生而見此。則又安知不羞與同歸而圖所以自靖乎。然則似此義理大頭腦處。不可以向來斯文是非。諉以世守。而自陷於黨逆之科者明矣。至如壬寅士禍。戊申逆變。實源於庚申己巳甲戌之事。一邊則以爲柟,堅,載,渤之徒。必可嚴討而不可赦。一邊則以爲不必窮治而故欲緩之。此朝論之所由分而忠逆判焉。栗,牛,沙,尤。固士類之始共尊仰者也。而自有老少以來。歧而爲二。彼嶺人之曾所誣辱諸先正者。勢不得不與少而合。且其所以緩於討柟,堅,載,渤之論者。意欲示德徼惠於一番人。則勢不得不與南而合。此南少所以同構壬寅之禍。而同犯戊申之逆者也。蓋自己巳甲戌以後。排布狙伏。謀爲士禍。而旣不得售其計。則建儲一事。遂爲其機栝矣。夫建儲之日。慈聖下敎。光明惻怛。八方傳誦。爲我國臣子者。豈敢有異議於其間。而惟一種懟先朝而仇善類者。不顧宗社。思快私忿。以至虎龍急書。誣逼春宮而極矣。噫。嶺以南山川雄渾。風土深厚。人生性稟。亦與之同。有所執守。確然不回。以此習俗一歸於善則比屋之美。其或庶幾。而惜乎。擇術之失於矢函也。噫。百餘年前嶺之仕於朝者。多爲大官。今則得第後大都浮沉下僚。而一作罷散。終身不復。朝廷言議事實。何由知之。不過得之道路傳聞耳。彼凶徒之失志者。多往來南土。煽動浮言。欲爲熒惑人心。張大其氣勢。則驟而聽之。安得不爲詿誤也哉。余嘗聞朴學士春普之言。當壬寅獄時過公第。則羅承旨學川亦在座。公以一紙抄獄事之出朝紙者示之曰。此分明是誣獄。其意不但在魚肉老論而止。南少自此將盡爲逆矣。嗚呼。能的見於七八年之前。不啻若燭照龜卜。苟非識微之明。何以及此。且公本以多智聞於世。使不早自拔於窠臼。則熊輔希亮之徒。安知不接跡於其門乎。當是時也。嶺中人心。土崩波頹。不有公扶仗大義。則幾昧於逆順之辨矣。然則安東一邦之人。亦可謂與蒙其惠。彼不自知其爲幸。而反詬詆之者何哉。蓋公平時每奮然謂己巳之事。罪關名義。弘,渤之謀。惡盈天地。士大夫豈可以黨目而庇護之乎。嘗與己巳人之落南者論此事曰。使我爲臺諫而當半日庭請之時。則雖親厚如公者。安得免袖中之彈乎。其人憮然而去。平日知舊之與弘渤親者皆絶之。蓋自布衣時已然矣。於義理原頭。旣見得分明。則畢竟樹立之如彼也宜哉。余屛退多年。迹遠朝端。不得與公一見。蓋聞公眉睫間勃勃有氣。盱衡抵掌。言論風生。苟其自反而縮。則擧一世非之而不少沮。其力量固已過人。而視世之齷齪卑下者。直欲唾其面。其不肯苟合於世。可知也。若公梁山時事。余欲得其實。從容問於其時按使兪相公拓基。則以爲公之便道赴梁也。過營言此邑弊蠱旣甚。不亟釐正。無可爲者。願公勿拘以文法。使得以展其肢體也。蓋梁之土俗虣悍。爭鄕任者夜戕功曹於官廨。又二歲五易守。非此人無以剪去頑梗也。遂許之以便宜從事。之官月餘。公牒少虛日。而田兵諸政。無不刷刮而剔抉之。信心擊斷。不少畏憚。大則流配。小亦嚴訊。幾數十餘人。然謗亦從而溢耳。蓋以貪虐爲言。徐而察之則未見有科外橫斂。而但不爲呴沫之小惠。任怨奉公。鋤強束猾。無少饒貸。此其所以受謗之甚者也。余惜其屈於小邑。欲進以試諸劇地而未及也。兪公非苟譽人者。其言可信。彼羣小之因謗附會。必欲甘心於公者。至此而益明矣。余旣爲公表見其大節。又白其寃枉。則細者可略。系之以銘曰。 志不合汙。明能燭微。如公自拔。在古亦稀。惟義是視。宜無悔怨。落拓困厄。爲善何勸。蓋其扶樹。君臣大倫。勿妄詆公。爲賊邊人。
도암집(陶菴集) 陶菴先生集卷三十四 - 이재(李縡)
삼기재집 (三棄齋集)(18C)-정 선 (鄭鍹) 鍹
答安補天 (5)-安鍊石에게 보낸 답장. 정사를 행하고 민심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與安補天 (5)-安鍊石에게 보낸 편지. 喪禍가 있고 몸은 병들었음을 적고 있다.
본문(조선왕조실록)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 3)12월 9일(임신)
겸 춘추 안연석 이 신포의 폐단을 말하니 칭찬하다
소대(召對)를 행하고 《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였다. 겸춘추(兼春秋) 안연석 (安鍊石 )이 민간(民間)의 질고(疾苦)로 자리에 나가 앙진(仰陳)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안연석 이 각 고을에서 한정(閑丁)을 숨겨주고서 신포(身布)를 사용(私用)하는 폐단을 대략 말하니, 임금이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 마수(馬燧) 의 일로서 말한다면, ‘한 마디 말에 성(城) 위의 군사들이 모두 감동했다.’고 하였으니, 내가 만약 정성으로 미루어 나간다면 수령(守令)이 된 자가 어찌 감히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이는 마땅히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하였다.
본문(조선왕조실록) -영조 14년 무오(1738, 건륭 3)5월 18일(기사)
박문수가 안연석의 아들 안택준 이 사사로이 김상헌의 서원을 영건하려 하니 금지하라 청하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안동(安東)은 곧 우리 나라의 추로(鄒魯유교(儒敎)) 의 고장입니다.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일찍이 이 곳에서 지내며 유학(遊學)하였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서원(書院)을 세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본고장 선비들의 의논이 한결같지 아니하여 창건하지 못했었습니다. 이번에 듣건대, 안연석 (安鍊石 )의 아들 안택준(安宅俊) 이란 사람이 앞장서서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저 문정공의 충정(忠情)한 큰 절의를 어느 누가 서원에 향사(享祀)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안택준 스스로 사사로이 영건(營建)하는 것은 그 의도가 향권(鄕權)을 쥐고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물리쳐 억제하려는 데 있으므로, 온 고을이 모두 불울(怫鬱)하여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조현명(趙顯命)과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마는, 조현명 또한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했었습니다. 만약 하교가 없다면 금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기를, “서원의 창설이 도리어 민폐가 되고 있으니, 을사년 이후에 창설한 것은 제도(諸道)로 하여금 조사해서 계문(啓聞)하여 철폐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안연석 은 내가 일찍이 임용(任用)할 만하다고 여겼었다.” 하자, 박문수가 아뢰기를, “일찍이 양산 군수(梁山郡守)가 되었을 적에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였고, 그의 아들 안택준 은 도리에 어긋나서 송사를 좋아하여 무상(無狀)한 소행이 많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안연석을 임용할 만하다고 여겼는데, 영상이 준열하게 방색했었으니, 반드시 경의 말을 듣고 그랬을 것이다.” 하였다.
옥천집(玉川集) -玉川先生文集卷之一詩
和安補天 鍊石 保晩堂韻 幷序
安友補天以詞藻策上第。期年。乞養爲延日縣監。一朝投劾歸起第宅。
名其堂曰保晩。作詩求和。余謂有始有終者。 惟全德之君子能之。
而先病後瘳。亦愈於先瘳後病。則我友其知之矣。然非知之難能。
踐之爲難。故余贈詩不以頌而以規。 保晩名堂保豈難。名之必踐踐斯完。
指揮志帥驅閒氣。嚴事心君統庶官。富亦不滛貧亦樂。存吾順事沒 吾安。
勞君勖我詩相贈。 題在山齋坐卧看。
和安補天七懷詩韻。却寄。
靑靑山下竹。早聞主人名。醞藉儒林表。虛恢氣宇明。丞哉吾不負。命也爾能平。士固有竆阨。安知非玉成。
右金士行 侃
白首竆經士。靑雲望八翁。易難身進退。湖海氣豪䧺。直道誠如許。家聲不落空。玄天自幽默。皎日照窓櫳。
右權天章
錦水有羇士。戴盆心黯然。修身痛懲窒。劬學自精專。 誰使回光照。何由徹廈氈。過庭詩禮業。努力繼眞傳。
右李幼材 栽
我思滄浦老。才辨冠羣倫。肆志疑忘物。任眞若遺身。行年今白首。活計舊靑春。四邑休官日。晩炊爲乞鄰。
右羅師道 學川
吾輩推材用。傑然見爾賢。韓公保晩日。伯玉知非年。不借恢游地。能全孝友天。靑霞奇意在。牢落付塵編。
右安補天
東厓自奇士。才具長非偏。淸白承遺德。飢寒任彼天。門無抵掌客。賦就遂初篇。千里仍飄泊。山南倘有緣。
右李悅卿 浹
深峽羇棲日。中宵撫枕時。得官非適用。失學不根師。聖訓愚猶勉。樂行憂則違。誓心存炯戒。瞽誦當新詩。
右自叙
安 進士鍊石 重修其五代祖東皐公永慕樓。要余次權晦谷題扁韻
年前暫管映湖樓。簿領羞尋好水丘。亭榭未同歐氏醉。賓朋多負李膺丹。
東皐翠記三槐協。永慕名聞五葉留。堂構重修眞孝繼。幾時登眺會稽秋。
游齋先生集卷之七 聞韶錄 壬申在春川府任所時所錄 이현석(李玄錫)
안련석(安鍊石)
안경엄(安景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헌(安櫶)이고,
아버지는 안중현(安重鉉)
[형] 안구석(安龜石)
[제] 안노석(安老石)
[제] 안지석(安砥石)
[자] 안국준(安國駿) [자] 안택준(安宅駿) [자] 안복준(安復駿) 女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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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공파(判官公派)安愼
안련석 안연석(安鍊石)1派19世판관공파-과의교위(果毅校尉)양산군수(梁山郡守)贈예조판서(禮曹判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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