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라는 이름의 두 글씨> / 서석주
아름다운 우리말이 적지 않다. 어린 시절 누나라는 두 글씨가 그러했다.
아름다움 이상의 의미로 그것은 나의 타고난 여린 감성에 불을 지폈다.
형제자매지간 형, 동생, 언니, 오빠라는 호칭이 있다. 그중 “누나”가 가장 친밀감으로 다가온다. 5형제 맏이라는 메마른 환경이 “누나”를 향한 간절함의 깊이를 더했다.
초등학교 시절 누나 가진 친구가 가장 부러웠다. 비 오는 어느 날 하교시간, 우산을 들고 온 누나가 있었다. 그날 부러움 이상의 어떤 서글픔 속에 두사람이 나란히 빗속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러움과 슬픔은 차츰 그리움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누나”는 여린 감성에 녹아져 그리움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노래를 잘해 어린이 합창단을 통해 음악책에 없는 많은 동요곡과 친해지고 가사에 “누나”가 들어있는 곡을 좋아했다.
한용희 작곡 “과꽃”, 홍난파 작곡 “낮에 나온 반달”, 윤극영 작곡 “무지개” 등등.
“과꽃” 1절 후반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2절은 더 애절하다.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지 언삼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욱 생각나요.” “낮에 나온 반달” 3절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햇님이 빗다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 찍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 곱게 빗겨 줬으면.” 무지개 1절 “알쏭달쏭 무지개, 고운 무지개, 선녀들이 건너간 오색다린가. 누나하고 나하고 둥실 떠올라 고운 다리 그다리 건너봤으면.” 앞선 두곡은 누나에의 애틋함을, 나중은 정겨움을 노래하고 있다. 요즈음도 가끔 불러보는 아련한 옛 사랑이다.
나이 들면서 누나 생각은 시를 통해 이어졌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있다. 후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초등학교 3, 4학년쯤 뜻밖에 누나가 생기게 되었다!
서울에서 장기간 하숙을 해 온 왕고모님이 저의 집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나보다 2-3살쯤 많은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청파동 하숙집 딸이었다. 나도 부모님 따라 청파동을 가곤했다. 이후 초등5학년 여름방학, 아버지의 도미유학 환송차 할머니와 함께 청진동 호텔에 며칠 머물게 됐다. 누나가 호텔에 왔고 함께 고궁방문도 했다. 내성적인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못알아 들을까봐 말도 잘 못했다. 누나는 표준말에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서울토박이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편지가 왔다. 탑골공원이 있는 사진을 동봉했는데 거기엔 자신의 상반신이 새겨져 있었다. 내년에 한성여중을 졸업하면 창덕여고로 진학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그와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왜 그때 연락처를 메모해 두지 않았을까? 누나 이름 석자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강정찬!”
몇년전 서울에 살고 있을 그분을 찾아 나섰다. 꽤 힘 있는 사람을 통해 부탁을 했는데 결국 희망을 접어야만 했다. 이젠 80세가 되지 않았을까?
초등학교 때 그리움으로 변모한 누나는 맺지 못할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과 함께 고전음악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다.
내가 특히 사랑하는 작곡가는 J.브람스이다. 그 누구보다 그리움의 정서를 짙게 드리운 그의 작품들···
2012년 (주)예솔 “브람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애정을 고백하고 있다. 한권은 비닐봉투에 넣어 빈 중앙묘지에 잠든 그에게 두고왔다.
어릴 때 누나는 그리움 이었고 쌓여간 그리움은 날개를 펴고 날아 브람스를 통해 고전음악 사랑이 되어 내곁에 있다.
서석주 : 음악컬럼니스트, 경북의대 졸업, 서석주 비뇨기과의 원장, 의학박사
「20세기를 빛낸 연주가-명곡음반1213」 「브람스에게 보내는 편지」 「아름다운 삶, 클래식 이야기」(주)예솔.
첫댓글 어린 시절의 감성과 음악적 기억이 한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누나’라는 단어가 이렇게 깊은 결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느꼈습니다.
저는 '누부야'가 있습니다.
정말 멋지고 다정한 문장입니다.
감히 선배님 앞에서 글을 평가해봅니다.
오랜만에 좋은 글 만나서 참 기뻤습니다.
앞으로도 선배님의 멋진 글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