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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강화읍 선교의 역사적 의미 ②
이 덕주 목사 (신학박사/ 감리교신학대학원 강사)
2. 성공회의 강화읍 선교
2.1 조선수사해방학당과 강화 성공회
트롤로프를 비롯한 성공회 선교사들이 강화 선교를 시작하면서 우려하였던 바 '다른 교파'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와의 마찰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선교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성공회가 강화 선교에 착수한 같은 해(1893년) 미국 감리교회도 강화 선교를 시작했지만 강화 유수 민응식(閔應植)이 나와 문을 열어주지 않을 뿐 아니라 "빨리 이 섬을 떠나시오" 라는 식으로 위협을 가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천으로 후퇴하였다.
(G.H. Jones,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New York, 1910, 32쪽)
그러던 중 당시 강화 북부 해안 '시루미'(증산) 마을 출신으로 인천에 나가 장사를 하던 이승환이 개종하고 '강화 출신 첫 프로테스탄트 교인'이 되었다.
그는 고향의 어머니에게 전도하여 1893년 여름, 서사면(현 양사면) 해안가에 정박 중이던 배 안에서 세례를 받도록 하였으며 존스는 인천에 있던 전도사 이명숙을 시루미에 보내 주일 예배를 인도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강화의 첫 감리교회로 오늘의 교산교회 출발이다.
그후 감리교회는 홍우, 고부, 망월을 고쳐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강화읍에 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0년이었다. (이덕주·조이제, 『강화기독교 100년사』, 강화목우회, 1994, 99-103, 130-131쪽)
이처럼 감리교의 강화 선교는 변두리 해안 마을에서 시작되어 강화읍으로 이어지는 '상향식'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반대로 성공회의 강화 선교는 강화읍에서 출발하여 변두리 지역으로 확산되는 '하향식'으로 전개되었다.
1893년 갑곶나루에 집을 사서 강화 선교를 시작한 워너 신부는 4년후인 1897년 6월 마침내 동문 안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성바우로회당'으로 축성함으로 강화읍 선교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김옥룡, 『대한성공회 강화 선교 백년사』, 대한성공회 강화선교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1993, 27쪽)
성공회는 이곳 강화읍 성당을 거점으로 온수·초지·냉정·송산·삼흥·흥왕·석포·교동 등지로 선교 확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감리교회와 성공회가 강화읍 선교를 시도하였음에도 감리회는 실패하고 성공회가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외국인 선교사였음에도 강화 유수가 미국인 존스는 거절하고 영국인 워너를 받아들인 이유는 그 무렵 강화에 설립된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학당은 오늘의 해군사관학교와 같은 성격의 수군 지휘관 양성기관으로 1893년 초에 설립되었다.
개항과 함께 한국 정부는 해군의 조직적 육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정부 안에 해연총제아문(海沿摠制衙門)을 설치한 후 그 직속으로 조선수사해방학당을 설립하기로 하고 그 위치를 강화읍에 두기로 하였으며 '해연총제사'(海沿摠制使)와 '진무사'(鎭撫使)를 겸하고 있던 강화유수 민응식이 학당장이 되었다.
그리고 교관은 영국 정부에 추천 의뢰하여 영국 정부의 추천을 받은 해군 장교 콜웰(W.H. Callwell) 대위와 포병 교관 커티스(Curtice)가 1894년 3월 정식 교관으로 부임하였고 통역으로 고용된 성공회 교인 허치슨(Hutchison)이 한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이같은 상황에서 '영국인' 신부들은 수월하게 강화읍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 신부들을 파송한 프랑스와는 병인양요 때(1866년), 감리교 선교사들을 파송한 미국과는 신미양요 때(1871년) 각각 전투를 했던 경험이 있었던 강화 주민들로서는 이 두 나라 선교사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전쟁 경험이 없는 영국에서 수군 양성을 도우러 교관을 보내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영국인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가질만 했다.
'제 3의 방법'으로 강화 선교를 결정한 성공회 선교사들도 이같은 상황 전개에 적지 않게 고무되었다.
"우리가 강화 선교를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주교님의 특명을 받은) 워너 신부가 그 곳에 가서 과연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탐색해 보기로 결정한 바로 그 무렵 우리는 강화 사람들이 영국인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그것은 나라에서 '한국 해군 사관학교'를 강화에 설립하고 그 학교를 영국이 후원하고 영국인 장교가 와서 가르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사관학교'는 설립되어 지금(1894년 초)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원 학생은 30-40명 정도인데 모두 허치슨에게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허치슨은 강화 강 어구에 있는 갑곶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지금 워너 신부와 같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사관학교 교관으로 영국 외무부 추천을 받은 영국 해군 출신 퇴역 장교가 초빙되어 올 예정인데 들리는 말로는 부인도 동행한다고 합니다." (위 글, 173-174쪽.)
거의 같은 시기에 선교사 워너와 수사해방학당 영어 교사 허치슨이 강화 갑곶에 자리잡고 강화 사람들을 접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교관 콜웰과 커티스가 도착하자 강화읍 동문 안, 견자산 언덕 마루에 집을 마련해 주어 '영국인'의 성 안 출입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성공회의 강화읍 선교를 간접적으로 지원한 조선수사해방학당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본격적으로 내정 간섭을 하게 되면서 학당은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결국 학당은 설립 2년만에 폐쇄되었고 영국인 교관들도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같은 상황이 성공회 선교에는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니 콜웰 대위가 살던 '동문 안' 주택을 성공회에서 구입하여 그 곳에서 '성바우로 회당'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2.2 강화읍 성당과 토착화
강화읍 선교를 성공리에 개척한 워너 신부가 건강 문제로 1896년 한국을 떠나게 되자 그 후임으로 트롤로프(M.N. Trollope)와 힐러리(F.R. Hillary) 신부, 의사인 로스(A. F. Laws), 인쇄 전문가 피어스(H. Pearson) 등이 들어와 강력한 선교진을 구성하고 다양한 분야의 선교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중에도 문학과 건축, 음악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트롤로프는 강화 선교를 추진함에 성공회 특유의 '제 3의 방법'을 선교 현장에 적용하였다.
트롤로프는 이미 '제 3의 방법'에 근거하여 『조만민광』(照萬民光)이란 문서를 출판한 바 있었다.
트롤로프 번역으로 1894년 서울 낙동에서 인쇄된 『조만민광』은 가톨릭교회와 성공회에서 미사 때 사용하는 '독서성구집'(讀書聖句集, lectionary), 혹은 '성서일과'(聖書日課, lesson) 성격을 지닌 책자로 신약 성서에서 384절을 발췌하여 28과로 편집하였다.
(이덕주, "성공회 발췌성서 『조만민광』연구",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2집, 기독교문사, 1987, 273-301쪽)
성공회에서 공식 문서로 채택하여 선교 초기에 성공회 교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읽힌 책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제 3의 성서'로 불릴만 하다.
첫째, 『조만민광』은 성서 번역에 관한 성공회의 선교 정책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서 번역은 물론, 평신도들의 성서 독서 자체를 금지하는 경직된 자세를 보이고 있고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성서 번역을 적극 추진하여 선교사 '개인역' 수준의 번역문을 그대로 인쇄하여 교인들에게 널리 읽힘으로 성서에 대한 개방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성공회는 프로테스탄트 같은 경솔함이나 가톨릭 같은 엄격함을 모두 지양하고 신중한 자세로 성서를 번역하고 읽히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코프 주교는 트롤로프를 성서 번역위원으로 보내 달라는 프로테스탄트측 선교사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트롤로프로 하여금 성서의 일부를 발췌하여 번역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조만민광』은 성서를 내용으로 하면서도 온전한 성서는 아닌, '제 3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둘째, 『조만민광』은 가톨릭교회의 '성서일과'나 '독서 성구집' 형태를 취하면서도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선호하던 '전도문서'(傳道文書, tracts)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매주일 한 과씩 읽으면 '성서일과'의 반년에 해당되지만 전체적으로 읽으면 그리스도의 생애와 초대교회 역사, 그리고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순서를 정했다.
미사를 위한 전례용 문서이면서 동시에 전도용 문서로 출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사 때는 사제가 읽고 평상시엔 평신도나 불신자에게도 읽힐 수 있는 책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도 이 책의 '제 3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조만민광』은 순한글본과 한글/한문 병용본, 두 종류가 출판되었다.
순한글본은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것이고 한글/한문본은 지식인 계층을 겨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트롤로프는 한국의 독서층이 한문을 선호하는 유식자 계층과 한문을 읽을 수 없는 상민·부녀자 계층으로 나뉘어 있음을 간파하였고 이들 모두를 겨냥한 문서로 편집한 것이다.
당시 이원화된 한국의 문화적 계층 구분 속에서 양측 모두를 아우르는 선교를 추진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양반과 상민의 양극화 현상 속에서 '제 3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같은 '제 3의 성서'로서 『조만민광』을 편찬하였던 트롤로프가 강화읍에 와서 이룩한 최대의 업적이 강화읍 성당 건축이다.
1897년 동문 안에 거처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던 트롤로프는 2년후 그 곳에서 3백 미터 서쪽으로 떨어져 위치한 견자산 언덕 마루에 7백여 평 부지를 마련하고 1년 공사 끝에 1900년 11월 15일 '성바우로 성베드로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건축 공사를 주도했던 트롤로프는 이 건물에 흡족하였다.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웠던 행사는 코프 주교가 1900년 11월 15일 강화읍에 성바우로 성베드로 성당을 축성한 것이었다.
그 곳 교인들은 임시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며 수 차례 건물을 확장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 해외복음전도협회를 통해 매리엇 비퀘스트 기금 5백 파운드를 받게 되어 그것으로 이 굉장한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건물은 이곳 옛스런 도시에 가장 우뚝 솟아 있으면서도 그 주변 환경과 썩 잘 어울리는데 한국식 건물도 그리스도의 교회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시도한 결과 아주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다."
(M.N. Trollope, The Church in Corea, 62쪽)
트롤로프가 "한국식 건물도 그리스도의 교회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시도한 결과 아주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a fairly successful endeavour having been made to adopt the old Corean style of architecture to the purposes of a Christian Church)고 표현할 정도로 만족해 한 건물은 외부로는 전통 한옥 건축 양식을 취하면서 내부는 서구 바실리카 양식을 취한 동 서양 절충식 건물이다.(김유리, 『성공회 강화성당 건축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1989)
우선 집터와 건물 배치를 배(舟) 모양으로 처리하여 배와 어부들이 많은 "주변 환경과 썩 잘 어울리게"(harmonizes well with its surroundings) 처리하였으며 건물도 전통 사찰의 삼문(三門) 형식을 따 성당 출입문을 내삼문, 외삼문으로 꾸몄다.
건물 앞쪽에 있는 쌍동이 보리수(菩提樹)도 불교 사찰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성당 본체는 정면 4간, 측면 10간, 모두 40간되는 장방형 건물로 외부에서 보면 2층 건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 보면 단층 통간 형태를 취하고 있는 불당(佛堂) 형식 건물이다.
단아한 팔작 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단청(丹靑)으로 처리된 서까래와 공포 장식이 불당이나 궁궐 건물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붕 내림 마루에 부착된 용(龍) 머리 모양의 '치수두'(置獸頭)와 내림 마루 끝에 물고기 머리 모양의 막새 기와도 전통 양식에 충실하다.
그리고 들보와 종보 끝 부분에는 연꽃 무늬, 겹처마 서까래 끝 부분에는 십자가와 삼태극 무늬가 그려져 있어 역시 복음과 동양 전통 종교 문화의 조화를 보여 준다.
건물 정면 다섯 개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 위쪽에는 연꽃 무늬가 선명해 사찰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데 다섯 폭에 쓰인 쉰 다섯 글자는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을 담고 있다.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宣仁宣義聿照拯濟大權衡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神化主流 庶物同胞之樂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과 나중이 없으신 참 주재께서 소리와 모습을 먼저 지으셨도다.
어질고 옳음을 널리 펴시어 무리를 비추시고 구하시니 큰 저울이시라.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니 세상만물의 참된 근원이시라.
하느님의 감화가 흘러나와 만물을 기르시니 온 동포의 기쁨이라.
복음을 널리 펴서 백성을 깨우치니 영생하는 길이로다."
그러나 건물 내부는 서구의 중세 초기 전형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바실리카(Basilica) 양식을 취하고 있다.
기둥들로 구분되는 '신랑'(身廊, nave)과 측랑(側廊, aisle), 후진(後陳, apse)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으며 외부에서 보면 2층, 내부에서 보면 단층 건물의 특징을 살려 2층 벽면 부분에 바실리카 양식의 또다른 특징인 고창층(高窓層, clerestory)도 장식했다.
3단으로 꾸며진 제단은 성소(聖所)와 지성소(至聖所)로 구분되고 있으며 성소는 12개 기둥과 기둥들을 연결하는 상 하 인방(引枋)들로 구분되는데 인방과 기둥이 만나는 모서리마다 연꽃 무늬가 음각으로 새겨진 조각판들이 부착되어 있어 궁궐이나 사찰 분위기를 내고 있다.
여기에 불교의 대표적 상징인 만(卍)자 무늬가 새겨진 '교회기'(敎會旗)가 걸려 있어 토착 종교, 특히 불교 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선교하려는 성공회 선교사들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소위 '토착화'(土着化)로 표현되는 성공회 특유의 선교 정책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 역시 '제 3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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