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폐허 앙코르와트를 가다
마 정 자
- 앙코르와트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숲과 풍부한 자원이 개발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 캄보디아 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서 캄보디아 국적기를 타고 약 2시간 비행 끝에 씨엠립 공항에 도착했다.
씨엠립은 앙코르왕국의 근거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곳이다. 과거 동남아시아에서 최강의 문화를 꽃피웠던 크메르족이 세운 앙코르제국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앙코르 유적의 거점이 되는 도시다.
최근에는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인해 숙박과 각종 위락 시설들이 이곳에 밀집되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고 하며 대부분 캄보디아 여행은 수도인 프놈펜보다는 앙코르와트가 가까운 씨엠립 공항을 더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고 한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군의 대표적인 사원이다. 앙코르 유적은 앙코르 왕국이 남긴 힌두교와 불교의 석조 종교건축 유적의 총칭이다. 유적지로서 워낙 유명한 곳이기에 앙코르와트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출발하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먼저 다녀온 사람들이 올린 사진도 보고 약간의 공부를 하고 떠났다.
앙코르 와트는“사원의 도시”라는 뜻으로 크메르 제국이 9세기에서 13세기에 건설한 백 여 개의 사원과 신전 중의 하나로서 12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2세가 37년여 공사기간 끝에 완성했다는 석조사원이다. 이 거대한 사원이 모두 돌로만 만들어 졌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다른 유적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앙코르 유적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이토록 대단했던 사원이 앙코르 왕조가 13세기 말부터 쇠잔해지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와트도 숱한 비밀을 간직한 채 밀림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1861년에 프랑스의 동물학자 앙리무오가 발견하여 400여 년 동안 잠들었던 곳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캄보디아는 100여 년 동안을 프랑스의 식민치하에 있다가 1954년 독립되었으나 외부인에게 폐쇄된 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이면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앙코르 와트도 전화(戰禍)와 약탈로 훼손 되어 수많은 불상들이 조각난 채 나뒹굴며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1970년대 악명 높은 크메르루지 게릴라들의 마지막 도피처가 바로 이곳이었다고 한다.
밤낮으로 계속되는 총격전으로 전체유적의 반 정도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나 건축술과 조각술이 빼어나 세계7대 불가사의로 알려져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서 지정하여 그 값짐을 더해 주고 있다.
그곳은 땅 밑에 물이 많아서 건축을 하기가 매운 어려운 곳이란다. 지반이 불안정하여 현대인들도 높은 건물을 건축하기가 어렵다는데 돌로 짜 맞춘 그 웅장한 축조물은 천년세월을 흘려보냈지만 조금도 기울어짐 없이 반듯하게 버티고 서있다. 그러나 중요한 유물 등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완전한 복구는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그 벽면의 온갖 돌판 하나하나 마다 새겨진 부조물들의 정교함과 현란함은 그 당시 크메르족의 눈부신 문화와 예술적 수준을 말해 주고 있다. 정말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다.
사원용 부조 돌을 45㎞나 떨어진 클렌산에서 모두 가져와 조각을 했다고 하는데 장비도 변변찮은 그 옛날에 그렇게 크고 많은 돌들을 어떻게 옮겨 왔는지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긴 했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石彫裝飾)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앙코르와트 사원을 37년여에 걸쳐 건축을 끝냈다고 하는데 현대의 포크레인 등의 장비로도 그 공기동안에 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현대의 조각기술로도 그렇게 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들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올려져 있다.
가기 전에 사진으로 볼 때 보다 실제로 가서 보니 그 많은 조각들이 다 다른 형태로 너무나 섬세하여 나를 훨씬 더 그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 명성만큼이나 대단하다는 말밖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당시 크메르족은 그들이 믿던 神人合一(왕과 신을 같이 여김)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인 비슈누神과 합일함을 표하기 위하여 이 사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神人合一을 위한 그들의 바람도 시대에 따라 바라문교의 신이 불교의 신으로 바뀐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앙코르와트 사원은 1, 2,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미물계, 인간계, 천상계로 나뉘어져 있다. 일층 미물계 회랑은 사각 기둥 60개가 지붕을 받치고 늘어서 있으며 벽면과 천장이 모두 조각을 한 돌 판으로 이어져 있다. 벽면의 어느 조각물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인지 하도 많이 문질러서 반들반들하게 윤이 난다.
이층엔 많은 조각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그곳의 무희들인 압살라들의 부조로서 손가락과 손목의 기묘한 동작으로 춤을 추며 금방이라도 내 앞으로 다가올 것처럼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삼층 천상계로 올라가는 길은 70도 급경사로 가파르고 계단 간격이 매우 좁고 높아서 4발로 기어 올라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는 신에게 가는 여정의 험난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3층에서 42m 높이로 치솟아 있는 중앙탑의 지성소는 우주의 중심이라 했고 절대자가 살고 있는 메루산의 상징이라 하여 비슈누神을 모시고 각 내부마다 촛불을 켜놓고 신성시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악명 높은 천국의 계단인지 천상의 계단인지는 우리는 가 볼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이 이곳을 임대해 복원사업을 하면서 계단입구를 봉쇄해 놓았기 때문에 올라가지 못하고 안타까웠지만 밑에서 올려다보며 가이드의 설명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앙코르 돔
일본인들의 악착같은 기지는 이곳 캄보디아에서도 엿볼 수가 있었다. 전에는 앙코르 돔 정문을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35인승 관광버스가 문 안 까지 들어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인들이 그 곳을 몇 년 동안 임대해 관리하기로 하고 복원사업을 맡아 하면서 입구 양면에 10㎝ 정도의 목 기둥을 덧대어 문을 좁게 만들어놓고 차량 폭을 약간 좁게 만든 일본차량만이 셔틀버스로 그곳을 운행하도록 하고 있다. 덧대어 놓은 기둥을 보면서 일본인들의 지독함에 씁쓸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셔틀버스로 옮겨 타고 앙코르 돔으로 들어갔다.
앙코르 돔은 한 면이 3㎞의 정사각형이고 높이 약 8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도시다. 앙코르 돔 내에는 앙코르 와트 사원, 바이욘 사원, 바프욘 사원, 코끼리테라스 등 모두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볼거리가 아주 많아 유구한 문화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의 보고이다.
성 벽면에 새겨진 조각은 크메르군과 참파군의 전투모습과 귀가 긴 크메르군과 수염이 긴 중국군이 등장하고 투계, 출산, 취사 등의 생활상이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새겨져 있다. 당시 앙코르제국의 문명과 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주 재미있는 부조화다. 글로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조각만으로도 그 당시의 생활상을 뚜렷하리만치 알 수 있었다.
성벽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垓字,성 밖으로 둘러서 파 놓은 못)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무려 100m정도의 폭으로 인공 호수를 만든 것인데 지금은 우기에만 물이 고인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건기라서 많은 물이 차 있는 것을 볼 수가 없어 참으로 아쉬웠다. 모든 문전에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가 놓여있고 다리의 난간에는 왼쪽은 힌두교 신의 조각상, 오른쪽은 불교의 여러 불상이 길게 늘어서 있고 머리가 다섯 개인 큰 뱀의 형상도 있었다.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는 것은 속세를 벗어나 신들의 세계, 절대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의 동, 서, 남, 북으로 각 방향마다 1개씩 거대한 문이 있는데 동쪽엔 2개의 문이 있어 모두 다섯 개의 문이 있다. 동문은 패전하고 돌아오거나 일반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외에 전쟁터에 나아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개선장군들을 맞이하는승리의 문이 또 하나 있다.
앙코르 돔을 찾는 여행자들은 보통 앙코르 와트와 길이 연결된 남문으로 들어간다. 남문 지붕위에는 네 개의 얼굴 조각상이 얹혀 져 각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정면에서 바라보면 활짝 핀 연꽃모양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왕이 사방 어느 곳에서나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뜻함이라고 한다. 남문의 높이는 25m이고 남문에 새겨진 얼굴들의 표정이 해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앙코르 와트는 단순한 관광지의 차원을 넘어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조상들이 누렸던 찬란한 영화처럼 자신들도 언젠가는 잘 살 수 있다는 자긍심을 불어넣어주는 등대의 역할이 되고 있다.
현재 캄보디아 제2의 도시인 이곳 씨엠립 인근에는 5.000개가 넘는 석상과 조각, 그리고 100개가 훨씬 넘는 사원들이 포진되어 있다고 하니 우리는 아주 일부만 보고 온 셈이다. 캄보디아는 보수적인 크메르족이 오랜 역사를 이루고 있으며 국민의 95% 이상이 불교를 믿는 전형적인 소승불교의 나라다. 그런고로 어느 사원에서나 관음상을 꼭 볼 수 있었다.
-타프롬사원
오백 년 된 구렁이를 보러 간다는 가이드의 말에 무슨 구렁이 박재라도 있나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가이드의 뒤를 바짝 따랐다.
사원입구에서 가이드가 라이터로 불을 켜더니 꼿꼿하게 살아있는 아름드리 나무의 껍질에 불을 붙이니 기름을 줄줄 흘리고 검은 연기를 내 뿜으며 활활 타오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에서 불구경을 했는지 나무의 한 쪽이 까맣게 그을렸다. 이것이 이앵나무라는 것인데 그곳에서는 이 나무를 석유나무라고도 하며 가정에서는 연료로도 사용하고 불을 밝히는데도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나무들이 살 수 없을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곳에 사는 내 눈에는 즐비하게 서 있는 그 나무들이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물로 보여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까만 부분을 한 번 만져 보았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니 정렬한 이앵나무와 스펌나무들이 거대한 팔을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춤을 추고 있다. 몇 아름이 될지 모르는 나무들이 큰 뿌리를 드러내고 돌담 위에 얹혀 있어 마치 큰 구렁이가 슬슬 기어가는 것 같이 보인다.
500년 이상 된 나무들의 뿌리가 지붕위에서 바닥까지 내려덮고 금방이라도 사원전체를 집어삼킬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석축을 무너뜨리고 사원을 파괴하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무너지려는 돌무더기를 부여안고 겨우겨우 사원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폐허가 된 채 방치된 사원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이 어떻게 사원을 무너지게 했는지 그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너저분한 돌무더기 사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문이 나온다. 조그만 문으로 들어가니 부처님의 미소가 경이롭고 신비로워 아름다운 폐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조금 더 들어가니 히끄므레한 색깔을 띤 거대한 나무들이 여기저기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고 그 사이사이로 허물어진 사원의 잔해가 푸른 이끼에 뒤덮여 있다.
이곳은 앙코르 유적 군 중 가장 원시적인 인간 예술의 힘과 자연의 위력을 동시에 감상 할 수 있는 곳이다. 아니 그보다 인간의 화려한 창조물이 자연의 괴력 앞에 맥없이 무너져버렸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나무들이 지붕에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아마도 새나 무슨 곤충에 의해 지붕위에 씨앗이 떨어져 돌 틈을 비집고 자랐을 것이라고 한다. 그 나무들이 지금은 손을 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제는 나무들이 사원을 훼손한다고 하기보다 오히려 사원을 온통 끌어안고 보호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이런 모습이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수백 년 세월의 무게와 끈질긴 자연의 위력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 스펌나무들을 없애야 하나? 거대한 스펌나무를 보기위해 무너지는 사원의 개보수를 말아야하나? 유적 관리 단원들도 헷갈리는 모양이다. 하루에도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지만 복구 불능 탓인지 사원을 동서로 관통하는 길에만 안전장치를 해 놓고 그 외 지역은 출입을 못하도록 막고 있다. 거목에 짓눌린 내부가 허물어질까봐 유적 관리단이 최소한의 통로만을 미로처럼 엮어놓고 있는 것이다.
타프롬이란 브리마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에 자기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헌납한 사당 겸 사원이다. 다른 앙코르 사원과는 달리 이곳은 수도원 기능이 강화되어 있는 불교 사원이었단다. 오랜 기간 자연 상태 그대로 울창한 밀림 속에 방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폐허로 변해 버린 것이다.
원래는 동쪽 탑문을 통해 출입했으며 길고 긴 갤러리 복도를 따라 들어가 중정을 통해 내부의 중앙 성소로 통하게 되어 있단다. 그런데 전혀 복구를 하지 않고 단지 관광객을 위해 최소한의 길을 터놓고 사원을 더 이상 손상시키지 않도록 돌 틈을 비집고 나오는 싹들을 잘라내는 작업만을 하고 있었다.
이곳의 일기는 무척이나 변덕스러워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금방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가 타프롬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별안간 소나기로 변해 줄기차게 쏟아졌다. 비를 피해보려고 양산을 펴들어 보았지만 양동이로 퍼붓듯이 쏟아지는 소나기는 감당할 수가 없었는데도 나무뿌리가 어찌나 굵은지 엄청난 소나기를 그 뿌리 밑에서 잠시 피할 수가 있었으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괴이한 이 형상을 보면 누구나 카메라에 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단 한 장의 사진도 담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장의 사진이라도 가져오고 싶어서 카메라를 양산으로 가려보았지만 쏟아지는 빗속에 나가 포즈를 취할 수도 없을 뿐더러 양산 속으로 치고 들어오는 비를 막을 수가 없었다. 사진은 한 컷도 못 담은 채 서운함을 뒤로하고 흠뻑 젖은 운동화로 땅바닥을 툭툭 차며 그냥 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물이 줄줄 흐르는 바지 자락을 추켜잡고 궁시렁거리며 차에 올라타고 이동하는데 금방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강한 햇살이 차창에 내리 꽂힌다. 변덕스런 일기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짓궂은 소나기는 우리가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변덕스런 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바닥에 빗물이 도랑 지어 흐를 만큼 많이 왔다가 금방 그친모양이다. 빗물에 빤지르르해진 도면이 우리를 올려다보며 반짝 웃음을 던진다. 이곳의 흙은 모두 사암으로 되어 있어 붉은 흙이 바지에 튀었어도 마른 후에 툭툭 터니 얼룩이 지질 않는다.
수많은 여행지를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폐허는 만난 적이 없다. 관광을 다녀 온지가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 곳을 떠 올리면 환희와 경이로움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