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에 일어나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음껏 호흡해 본다.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한 지리산의 준령들이 한눈 가득히 들어온다. 저 멀리 북쪽으로는 벽소령이 아스라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삼신봉이 우람하게 다가온다.
심운스님과 함께 구례읍내를 나가기로 하였다. 오늘은 마침 구례에 5일장이 서는 날이라고 한다. 시장구경을 하기 전에 스님이 가끔 들린다는 한정식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부세구이와 맛깔스런 된장찌개가 특히 입맛에 맞는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재래시장을 구경하러 나섰다. 아직 오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스님은 채소씨앗 몇 가지와 애호박묘 몇 포기를 샀다. 최근에 새로 옮긴 암자터에 심을 거라고 한다.
새로 산 씨앗과 호박묘를 지프차에 싣고 스님의 새 암자로 향했다. 암자는 구례에서 섬진강을 건너 해발 4백미터쯤의 산정상 부근에 있다고 하는데, 길이 깎아지른 낭떠러지 위로 나 있어 위험천만이다. 또 굉장히 가파르고 울퉁불퉁하여 차가 마구 요동을 친다. 그래도 스님은 익숙한 듯 잘도 올라간다.
마침내 암자의 공터에 올라서자 시야가 탁 트인다.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니 지리산에서부터 조계산, 백운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노고단, 서쪽으로는 무등산, 남서쪽으로는 조계산, 남동쪽으로는 백운산이 이곳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앞에는 섬진강이 휘돌아 나가고, 그 건너편에는 구례읍이 아담하게 내려다 보인다. 누가 보아도 명당이다.
약 만팔천 평이나 되는 암자에 딸린 산에는 밤나무, 잣나무, 두충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암자앞에는 오래 묵은 아름드리 노송 한 그루가 품위 있게 서 있다. 암자 주위로는 물앵두, 자두, 포도, 탱자, 배 등 온갖 과일나무들이 보인다. 물앵두는 이제 막 바알갛게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여기서 열녀목이라는 나무를 처음 보았다. 둥치는 가늘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씬하게 뻗어 올라간 것이 특이하다. 청와대에도 이 나무를 두 그루 기증했다고 한다. 스님이 가져다 심으라고 어린 묘목을 몇 그루 캐어 준다.
밤나무 과수원에 있는 취밭에서 연한 취를 한 바구니 뜯었다. 진한 취의 향이 코에 전해 온다. 윤 교수가 충주로 돌아가면 돼지 삼겹살을 구워서 싸 먹겠다고 한다.
암자를 내려와 정 교수와 윤 교수는 충주로 떠날 채비를 한다. 내일부터는 또 일상으로 돌아가 직장에 근무를 해야 하는 것이다.
"임 선생님, 백두대간 종주를 꼭 성공하고 돌아오기 바랍니다."
인사말을 남기고 그들은 충주를 향해 떠났다. 스님은 그들에게 직접 덖은 우전녹차 한 통씩을 선물로 주었다. 우전이란 절기상으로 곡우가 오기 전에 햇잎을 따서 만든 것으로 최고의 품질로 치는 녹차다.
정 교수와 윤 교수를 떠나 보내고 나는 심운스님과 함께 다시 구례읍내로 갔다. 재래시장 안에 있는 간이 음식점에서 점심으로 우무국수를 한 그릇씩 먹었다. 우무로 만든 국수를 콩물에 말아 주는데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별미다. 한쪽에서는 팥죽이 담긴 솥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다. 주인 아주머니는 KBS '6시 내고향'에도 나온 적이 있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그녀는 팥죽장사 19년에 딸 둘, 아들 하나 삼남매를 다 대학까지 보냈다고 하니 자랑을 할 만도 하다. 스님은 산장주인 식구들에게 줄 떡과 도너츠, 코다리 등을 산다.
스님과 차를 몰고 섬진강변을 따라 화개 '성원산장'으로 돌아오니 몹시 피곤함을 느낀다. 오후 낮잠을 자기로 한다.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나니 스님이 차를 달여 내온다. 코끝을 스치는 차향이 향기롭다.스님과 차를 마시며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저녁때 쯤 전화통화를 해서 이 근처에서 사찰건축일을 하고 있다는 후배 이창우를 만났다. 그는 서른 두살의 총각으로 충주 노은이 고향인데, 이 곳 저 곳을 떠돌아 다니면서 사찰이나 재를 짓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여자친구도 만났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그녀는 전에 충주에서도 한 두어 번 본 적이 있다. 그들이 저녁식사를 대접한다고 하여 쌍계사 앞에 있는 '팔각정'이라는 음식점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다음 그들과 함께 화개 막걸리 몇 병을 사서 산장으로 돌아왔다. 심운스님도 합석하여 밤 12시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창우는 내일 아침 일찍 창녕으로 떠날 예정이고, 그의 여자친구는 화개에 남아 녹차잎을 따러 간다고 한다. 충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 골짜기에서 이들을 만나다니 참으로 반가운 마음 헤아릴 수 없다.
스님은 잠이 들고, 나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새벽 3시가 조금 넘어 잠자리에 들다.
2001년 5월 13일[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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