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산리(禾山里)
화산리는 본래 고성군 동마면의 지역으로서 수실(繡谷) 또는 화곡(禾谷), 화산 (禾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서화동, 동화동과 법화동, 도동의 각 일부와 화양면(華陽面)의 배둔동 일부를 병합하여 화산리(禾山里)라 하여 마암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마을로 원진(遠津)과 법진(法津), 화산(禾山)의 3개 마을이 있다.
▣ 원진(遠津)
◎ 동명의 유래(由來) 원진 마을은 마을 먼 곳에 나루터가 있다 하여 "원날"이라 불러 왔으며, 마을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원진(遠津)으로 하여 1978년에 화산리 법진(法津)에서 분동 (행정마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의 형성은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이곳의 지명들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란전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성씨는 1800년대에 김해김씨(金氏), 광산김씨 (金氏), 진양강씨(姜氏), 진양정씨(鄭氏), 인동장씨(張氏), 창원구씨(具氏), 창원황씨 (黃氏)등 여러 성씨가 입촌하여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원진 마을은 고성읍에서 국도(國道) 14호선을 따라 마산 방면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동북쪽은 회화면 배둔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동쪽은 당항만에 면하여 있다. 마을을 마암천과 구만천이 양쪽에서 감싸 흐르고 있고 뒷산에 오르면 구만, 회화, 동해, 거류면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대로, 국도변 주변에 형성되어 있어 마암천을 건너 마을 앞에 조성되어 있는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48가구에 163명(남자:82명, 여자:18명)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로 거주민의 성씨는 김해김씨(金氏), 진양강씨(姜氏), 진양정씨(鄭氏), 광산김씨(金氏), 함안이씨 (李氏), 달성배씨(裵氏), 창원정씨(丁氏), 창원황씨(黃氏), 창원구씨(具氏)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마을 주민의 생업은 농업으로, 축산(한우 호당 2∼3두 사육)과 비닐하우스의 원예작물 재배 등으로 높은 농외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대의 새마을 사업으로 전면 지붕개량을 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양옥을 건축하는 주민도 있고 주거환경도 입식부엌과 수세식 화장실 등으로 개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전기, 전화, TV 등 문화시설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교육(敎育) 초등학교는 마암면내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중학교는 고성과 회화면의 회화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는 고성, 회화, 마산 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사적(事蹟) 및 기타 ◇ 화산리 성터(城址) 마암면 화산리에 있는 주위 약 600m의 토축성(土築城)으로 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록상으로 성터가 있다고 소개되어 있고, 성터의 형태로 보아 소가야시대의 토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성터는 당항만에 위치하여 배둔의 서쪽편에 있다. 해발 약 100m의 정상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조그만한 구능으로서 남, 서, 동쪽 기슭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고 북쪽은 산과 연결되어 있으며 성터의 대부분이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성은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반월형(半月形)을 이루고 테뫼식 산성(山城)인데 외관성으로는 토성처럼 보이지만 토석 혼축성이다. 동쪽으로는 김해기(金海期)에 해당하는 패총(貝塚)도 있다. 이 성은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소가야 전기의 사람들의 생활취락지라고 느껴지는데 성 안뿐만 아니라 성 밖의 남서쪽 기슭에는 많은 주거지(住居地)가 있을 것으로 예상 되기도 한다. 특히 성터 주위의 배둔, 마암평야는 농경하기에 알맞을 뿐만 아니라 바다가 가까워서 고기잡이에도 적합한 곳이고, 또한 마암평야에 청동기(靑銅器)시대의 것으로 추정 되는 지석묘군이 분포하고 있어 이것을 보아 소가야 이전의 지역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이 성의 특징은 창원의 성산성(城)과 진해의 자마산성(城)과 상호 닮고 있으며 둘레 약 600m의 산성으로,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2m정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성현 산천조(山川條)에 「山城(산성) 在縣(재현) 三十四里(삼십 사리) 有古城基址(유고성기지)」라 기록하고 있다. ◇ 나씨정열비문각(羅氏貞烈碑門閣) 마암면 화산리 원진에 있는 이 나씨정열비문각의 정열부인은 나주나씨(羅州羅氏) 참봉 응벽(應壁)의 딸로 임란공신 군수 이응성(李應星)의 부인으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방마치(放馬峙)에 피난하여 있던중, 왜적이 뒤쫓아와 욕을 당할 지경이 되자 간직하고 있던 은장도로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을 하니, 의사(義士) 박연홍 (朴連弘)이 근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왜적을 쏘아 단번에 세놈을 죽이게 되니 왜적은 모두 도망쳐 버리고 부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무덤에 표시하기를 「열열한 나씨여 명문의 정숙한 부인이라 한줌 외로운 무덤은 만고의 곧은 혼이라」하였다. 그 후에 난리가 평정되어 군수 이응성이 돌아와 소식을 듣고 시체를 보니 얼굴이 썩지 않고 생시와 같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씨가 순절한 곳에 안장하였으며 그 후에 경상감사 이참현(李參鉉) 복계(覆啓)로 고종(高宗) 6년에 정부인(貞婦人) 직첩을 내리고 정려(旌閭)를 명하여 정여각을 세워 후손들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 군진골(軍津谷) 마을 뒷산 정상에 임진왜란때 아군의 진지가 구축되어 적을 관측할 수 있는 요새지가 있었는데 지금도 이곳을 근진골이라 부르고 있다. ◇ 신도비(神道碑)와 재실(齋室) 임란때 왜적을 격파하여 대공을 세우고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녹훈된 이응성(李應星 : 咸安人(함안인))의 신도비, 암행어사 선정비(善政碑), 군수 유씨 (兪氏)의 선정비(善政碑), 함안이씨(李氏) 문중에 성산재(城山齋)가 있다.
◎ 상사(相思木)에 얽힌 전설과 동제 옛날 이 고을에 이진사(李進士)라는 부자(富者)가 살고 있었다. 남 부러울 게 없는 이들에게 자식이 없어 애를 태우다가 뒷산 삼신당(三神當)에 제단을 쌓고 정성껏 백일기도를 한 후에 늦으막게 딸 하나를 얻게 되었다. 진사 부부는 이 딸을 "연화"라 이름짓고 금지옥엽으로 아이를 키웠다. 그런데 진사집 행랑체에서 진사택 집일을 해주고 살아가는 머슴이 있었는데 그 머슴 내외도 거의 같은 시기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런데 이 머슴애가 어렸을 때부터 진사네 "연화"아가씨와 소꼽친구가 되어 놀기 시작하면서 차차 철이 들면서 남(南)과 여(女)의 정(情)으로 변해 갔다. 이에 어른들이 우려하여 이들 둘을 만나지 못하게 하자 머슴아들과 연화아가씨는 밤에 몰래 만나게 되었다. 달밝은 보름달밤에 뒷동산에서 은밀히 만나 애끓는 정으로 사랑을 나누다가 그만 연화아가씨가 애기를 갖게 되었다. 숨기고 숨길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이진사가 이 사실을 알고 말았다. 이진사는 앞이 캄캄하였지만 당시의 법으로는 신분이 달라 혼인할 생각도 할 수 없는 처지라 이 진사는 눈물을 머금고 연화아가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말았다. 연화아가씨가 죽은 사실을 안 머슴 아들은 더 이상 세상살기가 귀찮아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숨지고 말았다. 머슴 아들이 죽자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주인집 아가씨를 사모하다 소원을 못다 이루고 숨진 것이 못내 서러워 저승에서라도 같이 맺어지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목숨을 걸고 캄캄한 밤에 연화아가씨의 무덤 옆에다 아들 사체를 봉분없이 파 묻었는데 이듬해 봄, 연화아기씨 무덤에 새싹이 나오기 시작 하더니 그 옆에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다. 이들 나무는 눈에 띄이게 무럭무럭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엉키더니 언제부터인지 몸통까지 꽉 달라붙어 자랐다. 세월이 흐르자 사람들은 머슴집 아들과 연화아가씨의 혼백이 소나무와 느티나무로 변하여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나무로 태어나 이루었다하여 상사목 (相思木)이라 부르고 있으며,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하늘을 찌를듯한 노목(老木)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아낌을 받고 있다. 이 상사목이 있음으로 해서 마을이 태평하다고 믿는 주민들은 인기척이 없는 밤을 이용 제(祭)를 지내왔을나 근래에 와서 주민 참여가 안되고 일부 주민들만이 제(祭)를 지내고 있다.
▣ 법진(法津)
◎ 동명의 유래(由來) 법진마을의 동명은 조선조 말엽에 마을 입구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을 세워 이를 법수라 불렀으며 마을명도 "법수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해방후에 마을 주민 전체가 준법정신으로 선양하기 위하여 스스로 법을 다스리는 마을이라 하여 법수동을 법진(法津)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법진 마을의 형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창원정씨(丁氏)와 김해허씨(許氏), 성산이씨(李氏)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은 위 성씨외에 김해김씨(金氏), 칠원제씨(諸氏) 등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법진 마을은 고성읍에서 국도(國道) 14호선을 따라 배둔쪽으로 약 10km 지점에, 그리고 마암면 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로 멀리 시루봉 줄기가 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자락에 길게 형성된 지대로 마을 주변과 마을 앞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50가구에184명(남자:79명, 여자:105명)이 거주하는 마을로 거주민의 성씨는 창원정씨(丁氏), 김해김씨(金氏), 칠원제씨(諸氏), 김해허씨(許氏), 성산이씨(李氏)등 성씨가 살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미·맥 위주의 농업으로 일부 축산(한우 사육 및 낙농업)과 과수 및 비닐 하우스로 원예작물 등을 재배하여 높은 농외소득을 올리고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대에 새마을사업으로 전면 지붕개량을 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는 주민도 있고, 주거환경도 입식부엌과 수세식 화장실, 석유 난방시설 등으로 개량을 하고 있고 전기, 전화, TV 등 각종 문화 시설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교육(敎育) 초등학교는 마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중학교는 회화중학교와 고성읍 등지의 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는 고성군내 및 인근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지명일화(逸話)
◇ 군징이 고개 법수동에서 회화면 배둔리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인데 임진왜란때 아군의 진이 있었다고 한다. ◇ 성산(城山) 법수동 동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87m 정도로 성터가 있었다.
◎ 화산리 삼진(三津)에 얽힌 전설(傳說) 옛날 이 고을에 한 노부부가 고기잡이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이들 부부는 나이50이 다되어도 자식이 없어 애를 태우다가 바다 용왕님께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기를 수없이 했건만 자식하나 얻지 못했다. 그런 어느날 영감이 나룻배를 저어 바다에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낚시대가 휘청 하더니 배를 끌고 가는게 아니겠는가? 영감은 힘껏 잡아 채어보니 한길이나 되는 금빛이 나는 잉어였다. 노인은 이게 웬 떡이나고 잡으려고 하니까 이상하게도 잉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이를 불쌍히 여겨 그 잉어를 바닷물에 도로 놓아주었다. 그날 밤 그 노인이 잠자리에 들어 꿈을 꾸게 되었는데 금빛 찬란한 옷을 입은 귀공자가 나타나 노인에게 절을 하며 말하기를 "저는 이 바다를 지키는 용왕의 아들입니다. 세상 구경을 하기 위해 잉어로 변하여 바다에 올라왔으나 다행히 노인의 후덕한 마음씨에 제 목숨이 구해졌습니다. 논인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소원을 들어주겠습니다." 라고하였다. 노인은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였으나 "제겐 아내가 있고 먹을 것이 많으나 더 이상 바랄게 없고 단지 환갑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는 것이 한입니다." "그럼 그 부탁을 들어드리지요. 내일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제일 먼저 떠내려오는 것을 가지시요."하고는 사라졌다. 아내에게 이 꿈 얘기를 한 노인은 다음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보니 상류로부터 작은 상자 하나가 떠 내려왔다. 그 상자를 집으로 가져와 뚜껑을 열어보니 구슬이 세 개가 각기 다른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게 아닌가? 웬 구슬이냐고 손을 대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옥동자 셋이 나란히 서서 절을 하면서 "아버님" "어머님"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노부부는 너무 기뻐 어쩔줄을 몰랐다. 이 삼형제는 자라서 영특하게 되어 성인이 되자 각각 한 고을씩 맡아 다스리게 되었 는데 그 고을 이 원진(遠津), 법진(法津), 군진(軍津)으로 삼진이라 하였고 오늘도 그 지명은 변하지 않고 있다.
▣ 화산(禾山) ◎ 동명의 유래(由來) 화산 마을은 동화(東禾), 서화(西禾), 항정(項亭)의 3개 취락으로 형성된 마을로 옛날에는 수실(繡谷), 또는 한자로 화곡(禾穀)이라 칭하였으나 마을이 아담한 화자형 (禾字型)의 산아래에 형성되어 있다 하여 화산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의 형성년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 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은 달성배씨(裵氏), 전주최씨(崔氏), 함안이씨(李氏), 여주이씨(李氏), 창원정씨(丁氏), 삭녕최씨(崔氏), 남평문씨(文氏) 등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화산 마을은 마암면 소재지로부터 약 1km 이내의 거리에 위치하여 서화(西禾), 동화(東禾), 항정(項亭)의 3개 취락으로 화산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시루봉이 뻗어 내려오면서 도통산(道統山), 돌잔산(석잔산(石棧山)), 진등(장등(長嶝)), 화산(禾山), 방아등(용등(沃嶝)), 각정산(角亭山) 등을 이루면서 동정골(銅庭谷), 잔당골(백곡 (栢谷)), 절골(사곡(寺谷)), 배나무골(이곡(梨谷)), 서재골(書齋谷), 재앙골(재량곡 (載量谷)) 등의 작은 계곡이 많아 각기 이름을 가진 샘(井)이 많고 물이 맑기로 이름이 나 있다. 그리고 마을의 계곡과 마을 앞에 조성된 들판은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92가구에 277명(남자:134명, 여자:14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달성배씨(裵氏), 전주최씨(崔氏), 함안이씨(李氏), 여주이씨(李氏), 남평문씨 (文氏), 진양정씨(鄭氏)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미·맥(米麥) 위주의 농업에 축산(한우 및 낙농)과 과수를 하는 농가도 있고 근래에 와서 비닐하우스로 원예작물을 재배하여 높은 농외소득을 올리고 있는 농가도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주택은 1970년대의 새마을 사업으로 전면 지붕개량을 하였으며 지금은 주택을 현대식으로 증·개축하고 주택구조도 생활에 편리하도록 입식부엌과 석유난방 시설 등으로 개량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각종 문화시설인 전기, 전화, TV 등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교육(敎育) 초등학교는 마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중·고등학교는 고성, 회화면의 중·고등 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사적(事蹟) 및 기타 ◇ 수림서원(繡林書院) 마암면 화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1856년(철종 7년)에 창건하였으며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裵玄慶), 밀직(密直) 배연지(裵延芝), 고부군(古阜君) 배인경(裵仁敬)을 제향하였고 후에 악포(樂圃) 배맹관(裵孟寬), 성제(省齊) 배상곤(裵尙崑) 배경을 봉안하여 사림(士林)이 제향하였으나 지금은 후손이 제향하고 있다.(도지정문화재 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 루정(樓亭)과 재실(齋室) 마을에는 산해정(山海亭), 양정재(養正齋), 화양재(禾陽齋), 대명재(戴明齋)등의 정자와 각 문중의 재실이 있다. ◇ 비(碑)·갈(碣) ▷ 경암 배정학 사적비(敬菴 裵正學 事蹟碑) ▷ 매담 배도홍 사적비(梅潭 裵道弘 事蹟碑) ▷ 각정 배공 유허비(覺亭 裵公 遺墟碑) ▷ 여주 이씨 선생 제단비(麗州 李氏 先生 祭壇碑) ▷ 국회의원 최석림 기적비(國會議員 崔奭林 紀蹟碑)가 각각 있다.
◎ 중국 낙양(洛陽)과 유사한 화산마을 중국 지리전에 낙양은 천하의 중앙지라 하였고 또한 천하의 문화(文化)가 모두 낙양에서 나왔다.(천하문물개출어낙양(天下文物皆出於洛陽)) 하였으며, 마암면 또한 지리적으로 고성군의 14개 읍면의 중간에 위치하여 마을이 생긴 이래로 유고를 숭상하여 왔다. 그런 까닭으로 화산은 마암면의 낙양이라 일컬어 왔으며 본 마을에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여 왔는데 그 대표적인 유학자는 용강 최동태(沃岡 崔東泰), 화강 김현운(禾岡 金鉉運), 매담 배도홍(梅潭 裵道弘), 삼소당 이병두(三素堂 李秉斗), 춘호 최정모(春湖 崔禎模), 실암 배상흘(悉菴 裵相吃), 수당 이찬규(修堂 李讚奎), 화봉 이태규(禾峯 李泰奎)와 같은 인물(人物)이 배출되었고 이러한 유학자들이 많다보니 크고 작은 서당을 지어서 수백년 동안 향토의 자제들을 모아서 도덕, 윤리, 예학을 가르쳐 왔으며 이로서 마암의 낙양이라 하여 마을 앞에 낙양대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 전설(傳說) ◇ 화산리 개장골 지금부터 약 400여년전 서화(西禾) 입구 좌측 산쪽에 개장골이라 부르는 산이 있었다. 여기에 큰 부자(富者)가 살고 있었는데 3년을 계속하여 마을에 흉년이 들어 대문밖에는 걸인들이 줄을 이어 동냥을 하러 왔다. 이 부자는 걸인들이 하도 많이 오기에 꾀를 하나 내어 대문칸에 큰 통을 만들어 주먹 하나만 들락날락하게 해 놓고 통속에 곡식을 채우 고는 걸인들이 한줌씩 곡식을 가져가게 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달, 소문을 듣고 각지의 걸인들이 모여드니 부자집 마님은 큰 골치꺼리가 되었다. 하루는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하러 왔다. 주인 마님은 스님을 불러 어떻게 하면 걸인들이 오지 않겠느냐 하였더니 사람들이 많이 오면 좋지 않습니까 하였다. 마님은 이제 진절머리가 나니 제발 처방을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스님은 꼭 그러시다면 집뒤에 있는 5대조 묘의 좌향을 조금만 바꾸어 놓으면 걸인들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는 스님은 떠나갔다. 주인 마님은 곧 인부들을 시켜서 5대조 묘의 좌향을 바꾸어 놓으니 그만 수천석을 하던 부자는 한 달이 채 못되어 망해 버렸다. 그러나 이런 소식도 모르는 각지의 걸인들이 찾아와 대문 앞에서 굶어 죽으니 수천명의 걸인 시체가 쌓였다. 이에 인근 마을 사람들이 걸인 시체를 개묶듯이 묶어 장사를 지냈는데 이 골을 지금도 개장골이라 부리고 있다.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