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서부에 있는 군. 면적 794.52㎢. 인구 3만 8000(2003). 동쪽은 의령군·합천군, 서쪽은 함양군, 남쪽은 진주시·하동군, 북쪽은 거창군에 닿아 있다. 군청소재지는 산청읍 옥산리.
<역사>
이 지방은 삼국통일 후 지품천현(知品川縣)·적촌현(赤村縣)·궐지군(闕支郡)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757년(경덕왕 16) 지품천현을 산음현(山陰縣)으로, 적촌현을 단읍현(丹邑縣)으로, 궐지군을 궐성군(闕城郡)으로 개칭하면서 산음·단읍 2현을 궐성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 궐성군이 강성현(江城縣)으로 강등되고, 단읍현이 단계현(丹溪縣)으로 개칭된 뒤 1432년(조선 세종 14) 강성현과 단계현은 단성현(丹城縣)으로 통합되었다.
1599년(선조 32) 단성현을 폐하여 그 일부를 산음현으로 편입하였다가 단성현을 복구하고 산음현은 산청현(山淸縣)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산청현과 단성현이 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14년 단성군이 산청군으로 통합되었다.
79년 산청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83년 하동군 옥종면(玉宗面) 중태리(中台里)를 시천면(矢川面)에 편입시켰다. 2003년 행정구역은 1읍 10면으로 되어있다.
<자연>
지세는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한 줄기가 군의 서부를 남북으로 달려 하동군·함양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북동부에는 황매산(黃梅山, 1108m)과 소룡산(巢龍山, 779m)·전암산(傳岩山, 696m) 등이 합천군·거창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군의 남부에는 주산(主山, 831m)·우방산(牛芳山, 570m) 등이 있고, 북부에는 갈전산(葛田山, 764m)이 있으며, 중앙부에는 웅석봉(熊石峰, 1099m)·둔철산(屯鐵山, 812m) 등이 있다.
하천은 경호강(鏡湖江)이 군의 중앙을, 양천(梁川)과 황매산에서 발원하는 단계천(丹溪川)이 군의 동부를, 덕천강이 서부를 각각 남류하면서 남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들 하천유역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관개가 편리하며 토양이 비옥하여 농경에 적합하나, 넓은 평야는 적은 편이다.
군의 동부는 경상계 낙동통(慶尙系 洛東統)의 지층이며 혈암·사암·역암 등이 분포되어 있고, 서부 지리산 일대의 지질은 화강편마암이다. 기후는 대륙성기후로 2001년 연평균기온 12.8℃, 1월평균기온 -0.8℃, 8월평균기온 24.6℃이며 연강수량은 1322.8㎜이다.
<산업.교통>
총면적의 86%가 임야이고 경지율은 14%에 불과하다. 총농가호수의 약 70% 이상이 1ha 미만의 경작지를 가진 영세농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잡곡류와 채소류도 많이 생산된다. 특용작물로 잎담배를 재배하며 누에치기도 성하다.
축산업이 발달하여 한우·젖소·비육우 등을 사육하고 한편 임야에서는 용재·죽재·연료 등의 산출이 많다.
광공업으로는 고령토가 산출되며 이를 재료로 요업이 발달하였다.
상업은 8개의 시장(상설시장 1, 재래시장 3, 현대화시장 4)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가운데 덕산시장은 지리산에서 나는 산약·약초·곶감이 많이 나와 부산·마산 등지의 상인들도 찾아온다.
비금속, 음식료품, 조립금속기계·장비 등 77개 업체가 등록, 가동 중인 산청농공단지가 있다. 도로망은 국도가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의령∼단성 및 단성∼지리산을 잇는 도로 등이 있다.
<사회.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고려 인종 때 창건되어 1752년(영조 28) 중건된 단성향교, 1440년(세종 22)에 창건된 산청향교(山淸鄕校)가 있다. 시천면(矢川面) 원리(院里)의 산천재(山天齋)는 조식(曺植)이 1561년(명종 16)에 건립한 서재인데, 76년(선조 9) 유림들이 이곳에 덕천서원을 건립하였다.
2002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9개교(분교 1개교 포함), 고등학교 9개교가 있다.
문화행사는 1969년 두류평화제로 시작하여 77년 지리산평화제로 개칭한 지역문화 예술행사가 해마다 열린다. 지리산평화제에는 지리산산신제 등의 제례행사, 민속행사, 한시백일장 등의 문화행사, 각종 체육대회 및 고장의 상징적인 <목화아가씨 선발> 등이 열린다.
<문화재>
삼장면(三壯面) 덕교리(德橋里)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고, 금서면(今西面) 화계리(花溪里)에는 사적 제214호인 가락국 전구형 왕릉이 있다.
덕천강유역에는 신라시대의 큰 절터가 남아 있어 보물 제72호인 단속사지동삼층석탑(斷俗寺址東三層石塔), 보물 제73호인 단속사지서삼층석탑, 보물 제473호인 법계사삼층석탑(法界寺三層石塔) 등이 있다. 서울 경복궁에 있는 산청범학리삼층석탑(山淸泛鶴里三層石塔, 국보 제105호)과 단성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1호)은 근래에 옮겨간 것들이다. 이 밖에 보물 제374호인 율곡사대웅전(栗谷寺大雄殿), 사적 제108호인 문익점면화시배지가 있으며, 단성향교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9호인 단성호적장적(丹城戶籍帳籍) 13권이 보존되어 있다.
2. 전 구형왕릉-사적제214호
고구려,백제,신라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이루기 위해 안으로 체제를 정비하면서 밖으로는 서로를 발빠르게 견제하고 있을 무렵, 낙동강 유역과 지리산을 경계로 그 사이에 자리잡은 가야 연맹은 금관가야와 그에 예속된 다섯 가야로 이루어져 있었다.
김해지역에 자리잡은 금관가야는 여섯 가야 가운데 초창기에 가장 세력이 커서 1세기 무렵에는 일본의 야마타이왕국에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할 정도였다.
한편 가야의 여러 나라는 초기부터 신라와 영토문제로 대립하여 번번이 패배하였으므로 백제와 오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를 견제하였는데, 4~5세기 초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힘을 키워 중국의 남조에 사신을 보내는 등 어느 정도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그러다가 6세기 초 고구려로부터 세력이 밀린 백제와 신라가 서로 동맹하여 가야지역을 넘보기 시작했으며, 우호관계에 있던 백제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신라의 무력과 회유에 말려들어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게다가 가야의 분국이었던 일본의 야마타이왕국이 없어지고 친백제의 야마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백제,신라의 틈바구니 속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채 김수로왕 이래 490여 년의 역사를 마감한 가야는 철기와 비옥한 농경지를 토대로 우수한 철기문화를 일궈 신라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일본지역으로 적극 진출하여 일본의 통일국가 수립에 공헌하는 등 한때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삼국과의 경쟁에서 밀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패망국인 가야와 마지막 군주의 행적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500여 년간 어둠에 묻혀버린 것은 승자의 논리에 비추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는지.
이 같은 이유로 가야 문화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변변한 유적이 거의없는 터에, 전 구형왕릉은 가야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유적이다.
구형왕(仇衡王, 521~532년 재위)은 신라의 법흥왕에게 합병되기까지 492년간 계속되었던 금관가야의 마지막 10대왕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비와 세 아들과함께 돈과보물을 가지고”신라에 항복하였다.
반면 이 지방의 전설 중에는 구형왕이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힐까. 차라리 돌로 덮어 달라”고 하여, 살아남은 군졸들이 시신을 매장하고 잡석을 하나씩 포개어 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기록상에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한 후에도 30년을 더 산 것으로 되어 있어 싸우다 죽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
불운한 구형왕의 무덤은 사료의 뒷받침이 부족해 구형왕릉이라 확정받지는 못하고 전(傳) 구형왕릉이라 불린다. 대체로 구형왕릉일 것이라 보는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왕산(王山)은 현의 서쪽 십리 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을 포개서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이 모두 층계로 되어 있는데, 왕릉이라는 전설이 있다”라는 기록이다.
또한 조선 후기 문신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이 쓴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이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王山寺記)』에 ‘방장산의 동쪽 기슭에 산과 절이 있고, 그 위쪽에 왕대(王臺)가 있으며 아래쪽에 왕릉이 있으므로 왕산이라 하며 능묘를 수호하고 있어 왕산사라 한다. 이 절은 왕의 수정궁(水晶宮)이다. 왕은 가락국의 10대 구형왕인데, 신라에게 멸망하자 이곳으로 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사지냈다’”라고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후자의 기록에서 구형왕릉임이 구체적으로 기술되기는 했지만, 이차적 자료이므로 구형왕릉이라 단정할 만한 사료로는 부족하다.
기존의 봉토무덤과는 다른 돌무덤의 형상인 전 구형왕릉은 얼핏 피라미드를 연상시키지만, 경사진 언덕 중턱에 계단식으로 축조된 점이 평지에 세워진 피라미드와 다르다. 층단은 모두 7개, 총 높이 7.15m이며, 방형이지만 앞면은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다. 모퉁이도 뚜렷하지 않으며, 꼭대기는 봉분같이 타원형 반구를 이루고 있다.
더 이채로운 것은 앞면 넷째 단의 가운데에 폭 40cm, 높이 40cm, 깊이 68cm의 작은 감실 형태의 시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내용물도 없고 용도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돌무덤을 약 1m 높이의 담장이 에워싸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 가락국은 가야, 양왕은 구형왕)’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놓여 있고, 석등과 석단 좌우에 문인석과 무인석, 돌짐승이 각각 한 쌍씩 있다. 그러나 이 석물들은 모두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돌무덤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한편, 어느 고대문명의 선사유적을 연상케 하는 이 거대한 돌무더기는 매우 이채로운 겉모습 때문에 왕릉이 아니라 석탑 또는 제사지내는 제단이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전에 왕산사에서 목궤를 발견하였는데 그 안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옷, 그리고 활과 칼같은 유물이 나왔고, 또한 명승 탄영의 “왕산사기”등이 나와서 이를 고증하여 왕릉을 찾게 되었다 한다.
<덕양전>-문화재 자료 제50호
덕양전은 정조 17년(1793) 구형왕의 후손들이 사적 보호를 위해 지었으며, 1930년 지금 위치로 옮겨와 최근 중건되었다. 구형왕과 왕비 계화왕후(桂花王后)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
3,304평의 부지에 덕양전을 위시하여 영정각, 영신문, 동.서재, 해산루, 외삼문, 왕산숙, 추모재, 신도비각, 수정궁, 안행각, 관리사등이 1989년에 중수 완공되었다.
<김유신 사대비)-新羅太大角干 純忠壯烈 興武王 金庾信 射臺碑
김유신 활터는 구형왕의 후손인 김유신(구형왕이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 활 쏘는 훈련을 하던 곳이라 알려져 있다. 금관가야 왕실의 후예로서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긴 하였으나, 신라의 토박이 귀족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던 김유신이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정신 극복의 계기로 삼아 호연지기를 길렀다는 이야기가 이 곳에서는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3. 남명조식(南冥曺植) 유적
<남명조식(南冥曺植.1501-1572)>
1. 남명선생 일대기(南冥先生 一代記)
선생의 휘(諱)는 식(植), 자(字)는 건중(楗仲),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남명은 선생의 호(號)이다. 선생의 증조부 안습(安習)은 생원이었는데, 이 때 비로소 서울로부터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조부 영(永)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가세가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겠다. 부친 언형(彦亨)이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게 되고, 숙부 언경(彦卿)도 문과에 급제하니 이 때부터 가세가 떨치게 되었다.
선생은 1501(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내다가, 7세 때부터 부친의 임지로 따라다녔는데, 그 시절에 정치의 득실과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눈여겨보게 되었다. 19세 때 산 속에 있는 절에서 독서를 하다가 조광조(趙光祖) 등의 죽음을 들었고, 또 숙부 언경도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어진 사람들이 간신 배에게 몰려 경륜을 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슬퍼하였다.
25세 때 과거를 위하여 절간에서 공부하다가,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이 "벼슬에 나아가서는 이룬 일이 있고, 물러나 있으면서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도 이룬 일이 없고, 물러나 있으면서도 아무런 지조가 없다면, 뜻을 둔 것과 배운 것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구절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30세 때부터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37세 때 어머니를 설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38세 때 이언적(李彦迪) 등의 천거로 헌릉(獻陵) 참봉(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5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이림(李霖), 곽순(郭珣), 성우(成遇) 등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 화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벼슬할 뜻을 버렸다.
48세 때 고향 삼가현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48세 때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 51세 때 종부시(宗簿侍) 주부, 55세 때 상서원(尙瑞院) 판관(判官), 같은 해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의 상소 중 "대비(文定王后)는 진실로 생각이 깊지만 궁궐 속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殿下)는 돌아가신 임금의 어린 고아일 따름입니다."란 구절은 조야(朝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명종(明宗)은 남명의 글이 공손치 못하다 하여 처벌하려 했으나, 산림처사가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책잡아 처벌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부당한 조처라는 조정 신하들의 변호로 무사하게 되었다. 이 때 벌써 선생의 명망은 조야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 산림처사를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임금이라 할지라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온갖 부조리가 만연하던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선생의 과감한 직언은 산림처사의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61세 때 지리산 아래 덕산(德山)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65세 되던 해 문정왕후가 죽고 곧 이어 윤원형이 관직에서 쫓겨나자, 을사사화 때 유배되었던 선비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듬해 다시 임금으로부터 부름이 있자, 선생은 조정도 조금 맑아졌고 임금의 교지(敎旨)도 거듭 내리니 한 번 가서 군신의 도리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서울로 가서 사정전(思政殿)에서 임금을 독대하였다. 명종이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선생은 "정치 제도를 혁신할 것, 인재를 등용하려는 성의를 보일 것, 정치의 근본이 되는 임금 자신의 학문에 힘쓸 것 등"을 건의하였다.
조정에는 윤원형을 둘러싼 간신배들이 축출되고 어진 사람들이 복귀하여 명종이 비로소 직접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평생토록 쌓은 학문과 경륜을 한 번 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종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무슨 일을 할 만한 임금이 아님을 간파하고는 서울에 간 지 7일만에 곧바로 돌아왔다.
67세 되던 해 어린 나이로 새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가 즉위 초에 두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8세 때 역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역대 임금들이 나라 다스림에 실패한 사례를 지적하고서, "나라 다스림의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 자신이 학문과 인격을 닦는데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어린 선조가 정치를 잘 해 낼 수 있는 바탕을 닦도록 간언 하였다.
72세 때 선생은 산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임종시에 모시고 있던 제자 김우옹(金宇毋)이 "명정에 어떻게 쓸까요?"라고 물으니 선생은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조는 곧 예관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대사간을 추증하였다. 이어 광해군 때에는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2. 남명선생(南冥先生)의 사상(思想)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이 전래된 이후 그 이론적 탐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꽃피울 무렵에 생존하였던 실천성리학의 대가였다. 즉 고려 말기 안향(安珦, 1243-1306) 등에 의하여 전래된 성리학이 조선 시대에 들어 그 학문적 깊이가 더하여 갔던 바,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에 의하여 실천적 성향이 강하게 뿌리내리는 한편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이언적(李彦迪, 1491-1553) 등에 의하여 실천적 측면과 아울러 이론적 측면도 중시되어, 16세기 중반기에 이황(李滉, 1501-1570), 이이(李珥, 1536-1584) 등에 의하여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도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 따라 성리학의 이론에 대하여 체계적이고도 깊이 있게 탐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당대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하려는 의지는 가지지 않은 채 이론에만 몰두하는 학문의 폐해를 예견하면서, 오직 그 이론을 체득하여 몸소 실천하는 것만이 학자의 바른 태도라고 보기에 이른다. 요컨대 선생은 자칫 공허하게 될 소지가 다분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사상은 모두 이 "사회적 실천"에 귀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유학이 갖고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유학의 핵심 명제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것도 "자신의 수양을 전제로 한 현실세계의 구제"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의 이 "사회적 실천"지향의 사상은 자신의 수양에 관련되는 것과 현실 세계의 구제에 관련되는 것으로 구분해서 볼 수있는 바, 주지하고 있는 "경(敬)"과 "의(義)"가 바로 그 두 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경"과 "의"는 주역(周易)에 있는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한 것이 그 출전이다. 송대(宋代)의 성리학자들이 특히 이 가운데의 "경"을 적출 하여 심성 수양의 요체로 삼았던 것인데, 선생은 이 둘『敬義』를 다 뽑아서 "경"은 내적 수양과 관련시키고 "의"는 외적 실천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산천재의 벽과 창문 사이에 이 두 글자를 써 두고서, "우리 집에 경 과 의라는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일월이 있는 것과 같아서 영원토록 바뀌지 아니할 것이니, 성현의 온갖 말씀이 모두 결국은 경과 의라는 이 두 글자를 넘어서지 않는다"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은 마음을 수양하는 요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선생은 마음을 수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꼭 유가(儒家)의 주장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장자(莊子)』에 나오는 "南冥"을 자신의 호로 삼고 또『장자』에 나오는 "시거이룡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대단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고요히 침잠해 있다가 우뢰같은 소리를 낸다)"라는 말을 따다가 "뇌룡정(雷龍亭)"으로 강학(講學)하는 장소 이름을 삼으면서까지, 양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크면서 질적인 면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경"을 통하여 항상 마음을 깨어있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크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선생을 일컬어 "천 길 벼랑처럼 우뚝한"기상을 지녔다고 하는 것이다.
익힌 학문을 사회적 실천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내적 수양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기에 "경"을 내적 수양의 방법으로 중시하는 한편, 사회적 실천을 위한 가장 절실한 것으로서 선생이 제시한 것이 바로 "의"이다. 선생이 항상 차고 다니는 칼에다 새긴 글이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는 것에서 내적 수양을 통한 사회적 실천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다.
주역에서 말한 "直"과 "方"을 이 칼에 새긴 글에서 "明"과 "斷"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바, 이는 경전을 재해석하여 역사적 현실 속에서 자기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기록한 글에 두루 보이는 민중 세계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그 처지를 대변하고 나서는 적극성 등에서도 선생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거니와, 선비가 해야 할 것으로서 음양, 지리 의약 등은 물론 활 쏘고 말달리는 것 등의 공부도 유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한 점에서 선생의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의 철저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제자인 김우옹에게 "장부의 거동은 중후하기가 산악과 같고, 만길 절벽같이 우뚝하여야 한다. 때가 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허다한 사업을 이루어 내어야 한다. 3만 근의 무게가 나가는 쇠뇌는 한 번 발사했다하면 만 겹의 견고한 성도 무너뜨리지만 생쥐를 잡기 위해서는 쏘지 않는다."고 한 말에서 선생의 분명한 출처관은 물론, 내적인 수양과 함께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중시했던 점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3. 단성소(丹城疏)
선무랑(宣務郞)으로 새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 조아려 주상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돌아가신 임금님(중종)께서 신이 보잘것없는 줄 알지 못하시고 처음에 신을 참봉에 제수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셔서는 신을 주부에 제수한 것이 두 번이었고, 이번에 또 현감에 제수하시니 신은 떨리고 두려워 마치 큰산을 짊어진 것 같아 감히 인재등용에 정성을 쏟고 계시는 임금님 앞에 나아가 하늘의 해와 같은 그 은혜에 감사 드릴 수 없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대목이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 큰 골짜기에 버려지는 재목이 없도록 모든 좋은 재목을 다 구해다가 훌륭한 집을 이루는 것은 대목에게 달렸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일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함은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책임입니다. 전하의 인재를 등용하려는 큰 은혜를 감히 사사로운 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만. 신은 혼자서 걱정되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므로 신이 머뭇거리며 벼슬길에 나가기를 어려워하는 뜻을 전하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신은 나이가 예순에 가깝고 또 학문이 엉성하면서도 어둡습니다. 신의 문장실력은 전날에 과거의 끝자리에도 끼지 못했고, 신의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합격하려고 10년 동안 노력했지만 세 번 실패하고서 그만두었으니 애초부터 지조 있게 과거를 일삼지 않은 사람도 아닙니다.
가령 과거 합격을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조그마한 절개나 지키는 선량한 사람에 불과할 뿐 크게 나라를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훌륭한가 형편없는가 하는 것은 결코 과거에 합격하기를 바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과거를 통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신을 대단하게 보실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신이 명예를 도둑질해서 담당관리의 눈을 속였고, 담당관리는 저의 거짓 이름을 잘못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꼭 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또 도가 있는 사람은 신처럼 이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승도 또한 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됨도 모르면서 그를 등용한다면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될 것이니 그 죄가 어찌 이 보잘것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신이 거짓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팔아 벼슬에 나가는 것이 진짜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보다 어찌 나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이 한 몸을 저버릴 수는 있어도 전하를 져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비유컨대, 큰 고목나무가 100년 동안 벌레에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가 닥쳐와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 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 치고 충성스런 뜻을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이 없지만, 나라의 형세가 아주 위태로워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 거리며 술과 여색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윗자리에서 빈둥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물크러져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직의 벼슬아치들은 자기들의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려 들기를, 마치 온 연못 속을 용이 독차지하고 있듯이 합니다.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 벗겨 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뛰는 것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없어지고 나면 털이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백성을 가죽에 비유한다면 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이 자주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이 탄식하고 밤이면 천장을 바라보고 답답해하며 흐느끼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떨어지니 하늘의 재앙은 이미 그 징조를 보였습니다. 백성들의 울음소리는 구슬퍼 상복을 입은 듯하니 민심이 흩어진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절에는 비록 주공(周公)같은 분의 재주를 겸하여 가진 사람이 대신의 자리에 있다 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풀잎이나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는 신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위로는 만에 하나라도 나라의 위태로운 사태를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들을 보호랄 수 없으니 전하의 신하되기는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그마한 헛된 이름을 팔아서 전하께 벼슬을 얻는다 해도 그 녹을 먹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점이 신이 벼슬하러 나가기 어려워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또 신이 요사이 보니 변경에 일이 있어(왜구의 침략으로 전라도 일대가 함락된 을묘사변을 말함) 여러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때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쁜 모양입니다만, 신은 놀라지 않습니다. 이 일이 벌써 20년 전에 일어날 일인데도 전하의 신성한 힘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발발한 것이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발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조정에서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장수 가운데 자격을 갖춘 자가 없고 성에는 수성할 군졸이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이번 사변도 대마도 왜놈들이 몰래 결탁하여 앞잡이가 되었으니 만고에 씻지 못할 큰 치욕입니다. 전하께서는 영묘함을 떨치시지 못하고서 그 머리를 재빨리 숙였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대해서 신하로 복종하던 대마도 왜놈들을 대접하는 의례가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대접하는 의례보다 더 융숭합니다. 원수인 오랑캐를 사랑하는 은혜는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한술 더 뜨십니다.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대왕 때 북쪽 오랑캐를 정벌하던 일과 비교하여 오늘날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겉으로 드러난 병에 불과하지, 가슴속이나 뱃속의 병은 아닙니다. 가슴속이나 뱃속 병은 덩어리지고 막혀서 아래위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랏일을 맡은 공경대부들이 이 문제점을 해결해보려고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백성들 가운데 수레가 있는 이들은 수레를 타고 피난 가고 수레가 없는 이들은 달려서 피난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군사를 불러모아 전하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나랏일을 정리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형벌제도 따위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을 극진히 하면 그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있는바, 그 틀은 전하에게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에 종사하시는지요?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나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 있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루라도 능히 새로운 정신으로 깨달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으신다면,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에 얻으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만드는 일 안에 모든 착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모든 교화도 거기로부터 나옵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거행한다면 나라는 고루 잘 다스려질 것이고 백성들은 화합하게 될 것이며 나라의 위기도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일을 판단함에 거울처럼 맑고 거울처럼 공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불교에서 이른바 진정(眞定: 참된 경지의 선)이라 하는 것도 단지 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함에 있어서는 유교나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만, 일에 적용할 때 불교는 그 발디딜 곳이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유가에서는 불교를 배우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고 계신데 그 불교를 좋아하시는 마음을 학문에 옮기신다면 공부하는 것이 우리 유가의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마치 어려서 집을 잃은 아이가 그 집을 다시 찾아 부모. 친척. 형제나 옛 친구 등을 만나보게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더욱이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전하 자신의 경험으로 인재를 선발해 쓰시고 도로써 몸을 닦으십시오. 전하께서 사람을 취해 쓰실 때 솔선수범 하신다면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사직을 지킬 만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을 취해 쓰실 때 눈으로 본 것만 가지고 하신다면 곁에서 모시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하를 곡이거나 져버릴 무리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면 굳게 자기 지조라도 지키는 고견 좁은 신하인들 어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정치를 잘하셔서 왕도정치의 경지에까지 이르신다면, 신은 그런 때에 가서 미천한 말단직에 종사하며 심력을 다해서 직분에 충실하면 될 것이니 어찌 임금님 섬길 날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탕을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서 인재를 취해 쓰는 근본을 삼으셔서,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 신의 상소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신은 두려워 어쩔 줄 몰라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덕천서원(德川書院)-사적제305호>
남명이 타계하고 5년 뒤인 선조9년(1576년)에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웠으며,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 다시 중건되었고 광해군 1년(1609년)에 영의정을 추증하고 사액을 받아 크게 확장 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때 없어져 1920년대에 다시 중건하였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동.서재가 마주보고 있으며 정면에 난간을 두르고 마루를 넓게 마련한 강당이 있다.
정면 5칸으로된 이 경의당(敬義堂)은 서원의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으로 이용되었다.
내삼문 뒤쪽에는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이곳에 남명과 그의 제자인 최영경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8월 10일 남명제를 지낸다.
<산천재(山天齋)-사적제305호>
남명은 61세인 명종16년(1562년)에 이 서재를 짓고 72세의 나이로 죽을때까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경륜을 펼쳤다. 오덕계,정한강,최수당,곽재우등 100여명의 인재가 그로부터 배출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선생의 문집책판 185매가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德山卜居(덕산에 살 곳을 잡으며)
春山底處无芳草 (봄 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마는)
只愛天王近帝居 (상제와 가까워 천왕봉만이 사랑스럽네)
白手歸來何物食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나?)
銀河十里喫猶餘 (맑은 내 십리 마시고도 남겠지)
<남명 묘소>
산천재 맞은편 약 50m 오른곳에 있다. 선생의 묘소는 선생이 생전에 직접 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여기에는 대곡 성운선생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서 있다.
4. 단속사터
지리산 줄기가 긴 팔을 길게 늘여 둥그렇게 만든 품 속에 포근히 안긴 단성군 운리. 그 아늑한 마을의 한복판에 단속사(斷俗寺)터가 있다. 절 이름에서부터 절다운 초연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단속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신충괘관(信忠掛冠)」에 나오는 두 가지 창건설이다. 하나는 어진 선비 신충이 경덕왕 22년(763) 두 벗과 지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덕왕 7년(748) 이준(또는 이순)이라는 사람이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삼고 단속사라 하였다는 이야기다.
김일손의 『속두류룩(續頭流錄, 1489년)』에 의하면 신충이 그린 경덕왕의 초상이 단속사에 있었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솔거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알 길 없다.
신충이 임금의 초상화를 금당에 모셔두었다 함은, 단속사라는 이름에서도 유추되는 바대로 단속사가 속세와의 인연을 끊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과 왕실의 안녕을 빌어주고자 창건된 절이라 보는 것이 옳지 싶다. 이는 이준의 창건설을 따르더라도 마찬가지다. 왕이 음주 가무에 취해 정사를 돌보지 않을 때 이준이 나서서 간하였고, 마음을 돌린 왕은 이준에게 요청하여 불교 교리와 정치를 강설하게 했다고 한다.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솔거가 6세기 인물이고 단속사의 창건이 8세기이니 유마상은 솔거가 직접 단속사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솔거의 그림을 창건 후에 옮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우리나라 금석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행(信行, 704~779)의 부도비 그리고 대감국사 탄연(坦然, 1070~1159)의 비 등도 이곳 단속사에 있었다.
신행은 통일신라시대에 처음으로 북종선(北宗禪)을 전래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에 선이 처음 전해진 것은 7세기 무렵 법랑(法朗)에 의해서였다. 법랑은 선덕여왕(632~646 재위) 때 당나라로 들어가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道信)으로부터 선법(달마선이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의 선법)을 전수받고 귀국하여 선을 정착시키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법랑의 법맥은 제자인 신행에게로 이어졌으며, 법랑 밑에서 3년을 수행한 신행은 법랑이 입적하자 당나라로 건너가 북종선의 태두가 된 신수(信秀)의 제자 지공(志空)으로부터 3년간 공부한 뒤 귀국하여 북종선 전파에 힘을 썼다.
비록 당시 신행의 교화 폭이 넓지는 않았지만 북종선을 처음으로 통일신라에 전파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신행과 단속사의 불교사적 궤적은 과소 평가할 일이 아니다. 이후 신행의 법맥은 점점이 이어져 후일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을 세운 도헌(道憲)에게로 이른다.
신행이 입적한 지 35년 만인 헌덕왕 5년(813) 그의 부도비가 세워졌으며, 조선 중기까지 전하였으나 분실되었고, 현재는 일부 비편만이 동국대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다행히도 종 28행, 각 행 63자씩이 새겨진 옛 탁본첩이 전해 오고 있다.
역시 『속두류록』에 따르면 탄연의 비는 편액이 걸린 문 앞에 서 있었고 신행의 비보다 두어 지쯤 더 컸다고 한다. 탄연은 고려 최고의 명필로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글과 시와 글씨에 능했으며, 13세에 이미 육경(六經)을 통달했다. 인종 10년(1132)에 최고의 지위인 대선사에 올랐으며, 인종 24년(1146)에 단속사로 들어와 의종 13년(1159) 나이 아흔에 입적하였다. 서거정이 “동국의 필법에 김생이 제일이요, 요국일․영업․탄연이 다음간다”고 할 정도로 탄연의 필법은 뛰어났으며 글씨는 왕희지의 체를 본받고 있다. 그는 춘천 청평사의 문수원 중수비, 예천 복룡사비, 삼각산 승가굴 중수비 등의 비문을 썼다. 그의 부도비는 명종 2년(1172)에 만들어졌으며, 현재 비편의 일부가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신라의 이름난 고찰로서 고승들이 속출했던 내력 깊은 단속사는 선조 즉위년(1567)에 지방의 유생들에 의해 불상․경판 등이 파괴되었으며, 정유재란 뒤 한때 재건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부러진 당간지주와 동서로 우뚝 선 동서 삼층석탑뿐이니, 폐찰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진다. 게다가 단속사터는 가람의 중심이 되는 금당터에 들어선 민가 때문에 절터의 제 모습이 크게 훼손되어 있다.
당간지주는 높이 3.5m, 지름 50cm 규모이다. 서쪽 당간지주 윗부분이 떨어져나간 채 방치된 것을 1984년 5월에 떨어진 부분을 찾아 복원하였고, 동쪽 당간지주는 부러진 채로 있다. 당간지주 앞에 서면 마을 뒤쪽의 단속산을 큰 배경으로 솔숲 사이로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살짝 보이고, 동서 삼층석탑의 뒤쪽으로 600세가 넘었다는 고고한 아름드리 매화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 구도가 잘 짜여진 한 폭의 풍경화같다.
5. 문익점과 면화시배지
고려 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엔 목화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 귀족들은 명주실로 짠 옷으 입었고 백성들은 기껏 삼베나 짐승의 털가죽 정도로 몸을 감싸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명주는 만들기가 힘들었고 삼베는 겨울에 입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다행히 재배와 직조가 비교적 쉬우며 질기고 보온이 잘 되는 면직이 등장하였다. 공민왕 12년(1363) 문익점이 원나라에 가서 붓두껍 속에 숩겨온 목화씨 가운데 한 톨이 온 나라에 퍼져 누구나 무명옷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가히 의류의 혁명이라 할 만한 이 일로 문익점은 후에 남명 조식으로부터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에 견줄 만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지리산의 천왕봉을 바라보고 동구 밖에는 경호강 물줄기가 흐르는 전형적인 산골 단성면 사월리는 목화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고장이다. 처음 목화씨가 뿌려지고 싹튼 곳으로 배양(培養)마을 또는 면화시배지(始培地)라고 불린다.
마을 앞 길가에 문익점의 목화씨가 자랐던 300여 평의 밭이 있다. 1965년 이 일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면서 ‘삼우당 선생 면화시배 사적비’도 세워졌다. 1988년부터는 200여 평 규모의 전시관을 새로 짓는 등 면화시배지 정화 공사를 하고 있는데, 그 관계로 목화밭이 많이 줄어들었다.
문익점은 충숙왕 16년(1329) 단성사람 문숙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사꾼이었으나 젊었을 때 과거에 급제까지 한 초야의 선비였다. 문익점은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짓는 한편 아버지로부터 유학을 배웠다. 그가 뒷날 원나라에서 목화를 보고 그 씨를 몰래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농사짓는 집안에서 자라나 농작물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32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순탄한 승진의 길을 걷던 그는 벼슬한지 3년째 되던 해에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원나라에 보고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당시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쇠퇴해가는 원나라에 대해 과감히 배원책을 썼다. 원나라도 그러한 공민왕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공민왕 12년(1363) 홍건적의 난으로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원나라는 자기 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을 내세워 공민왕을 폐위시키고자 하였다.
덕흥군이 고려로 향한 때와 문익점 일행이 원나라로 출발한 때는 공교롭게도 같았다. 원나라에 있는 고려 관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덕흥군으로부터 새로운 벼승르 받았으며, 문익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민왕 13년(1364) 덕흥군이 원나라로부터 군사를 얻어 압록강을 건넜지만, 고려에서는 최영․이성계 등이 적극 나서서 덕흥군을 원나라로 도로 내쫓았다. 덕흥군이 패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벼슬을 받았던 모든 고려 관리는 자연히 역적이 되었다.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문익점 역시 역적임에 틀림없었다. 파직되었음은 물론, 이로부터 10년 동안 그는 벼슬길에 오를 수가 없었다.
이때 원나라에서 가져온 것이 목화씨 열 톨이었다. 목화는 일찍부터 인도를 중심으로 재배되었지만, 인접한 중국은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문익점은 중국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목화를 우리나라에 들여온 것이다.
고국에 돌아왔으나 벼슬을 빼앗긴 문익점은 목화씨 열 톨을 갖고 낙향하였다.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씨를 뿌려 이듬해 가을 한 그루의 목화를 키우는 데 성공하여 100여 개의 씨를 얻었다.
목화 재배에는 성공했지만 문익점과 장천익은 목화의 씨를 빼내고 실로 만들어 옷감을 짜는 법을 알지 못했다. 하루는 원나라의 승려 홍원이 찾아와 자기 나라에 있는 목화를 보고 매우 좋아하였다. 마침 그가 직조술을 알고 있었기에, 장인 정천익이 그에게서 기술을 배워 씨 빼는 기계와 실 잣는 기계인 물레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무명 한 필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실 잣는 기계를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만들었기에 ‘물레’, 처음 베를 짠 사람이 손자 문영이었기에 ‘무명베’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마다 씨가 불어나 3년째 되던 해에는 향리에 두루 나누어줄 정도가 되었다. 이로부터 10년도 채 못 되어 목화 재배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불과 36년 뒤인 조선 태종 때에는 백성이 두루 무명옷을 입게 될 만큼 면업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였다. 목화가 빠른 속도로 퍼져감에 따라 그 공로를 인정받은 문익점은 다시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고려가 무너지고 새 왕조가 세워지는 어지러운 판국이라 문익점은 이성계의 일파인 조준에게 탄핵을 받아 정계에서 또 다시 불러났다. 야인으로서 “나라가 떨치지 못하고, 공자의 학문이 제대로 전하지 못하며, 스스로의 도가 서지 못함을 늘 근심한다”는 뜻의 삼우당(三憂堂)이라는 호와 정자를 스스로 짓고 생활하며 왕조 교체를 맞이한 문익점은 새 왕조인 조선 태조 7년(1398)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익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 태종 1년(1401)에 그의 고향인 신안면 신안리에 지방유림들에 의해 세워졌다. 명종 9년(1554)에 ‘조천’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광해군 4년(1612) 중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어 정조 11년(1787)에 복액되었다.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노산정사(盧山精舍))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다 최근 후손에 의해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도천서원 바로 옆산 중턱에 있는 그의 묘는 방형분으로 상석과 비, 문인석, 망주석, 석등을 잘 갖추고 있다. 석등은 팔각지붕이며, 하대석에는 새․잉어․봉황․연꽃 등이 친근하게 조각되어 있다. 지리산 줄기가 아스라이 잦아들고, 산청의 젖줄인 경호강이 눈앞에서 넘실넘실 춤추는 주변 경관도 매우 수려하다. 도천서원과 문익점 묘소는 각각 경상남도 기념물 제237호와 제66호로 지정돼 있다.
6. 도전리 마애불상군
생비량면 농협 뒤쪽의 사잇길로 들어가, 솔밭과 밤나무와 모과나무가 어우러진 과수원을 지나면, 둔각을 이루는 길가의 벼랑 바위에 29구의 불상이 무리지어 새겨진 독특한 마애불상군이 있다. 경주의 단석산 신선사에 10여 구의 불상이 새겨진 마애불상군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한 바위에 많은 불상이 무리를 지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절벽에 불상이 네 층을 이르고 있는데, 1층에 14구, 2층에 9구, 3층에 3구, 4층에 3구가 배치되어 있다. 불상의 높이가 50cm가 넘는 것에서 6cm밖에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30cm 안팎이다.
불상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인 분위기는 비슷하여,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소발에 큼직한 육체가 솟았고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지만 각 부분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정하고, 통견의 옷주름이 불상의 크기에 비해 다소 많은데, 나말려초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불상 옆에 ‘○○선생’이라는 명문이 각각 새겨져 있는데,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나, 학술적으로 밝혀진 바는 전혀 없다. 이처럼 형식․크기․표정이 독특한 친근한 불상들이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7. 성철 대종사 생가-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210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바로 옆에 성철스님 생가와 겁외사가 있다. 성철 스님은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해인사의 초대 방장을 지내셨고 조계종 제6대 종정이시기도 했다.
말년에 주로 무주 덕유산의 백련사에서 지내셨으며, 1993년 11월 82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성철스님의 열반 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성철스님의 말이 사람들 사이에 많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 곳 묵곡리는 1912년 음력 2월 19일 성철대종사가 태어난 곳으로 해인사 성철스님문도회와 산청군은 1998년 성철대종사 열반 5주기를 맞이하여 단순한 생가복원 차원을 넘어서 성철스님기념관을 세워 수행의 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리고 겁외사를 건립하여 종교를 뛰어넘는 선 수행, 가르침, 포교의 공간을 조성하여 2001년 3월 30일 문을 열었다.
성철대종사는 비록 우리와 똑같은 속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났지만 영원한 진리와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부처의 길을 택하여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철저한 수행과 무소유의 삷으로 수행자는 물론 모든 이들에게 “우리시대의 부처”로서 추앙받고 있는 이 시대의 성인이다.
성철대종사의 부친인 율은 이상언옹의 호를 따 율은고택으로 명명한 생가는 크게 유물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으로 구분된다.
유물전시관에는 성철스님이 평소 지녔던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비롯하여 평소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장 도서와 메모지, 유필 자료 등이 전시되어있다. 안채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은 성철스님의 생가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일반적인 한옥의 형태로 이루어진 기념관이다.
겁외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서 늘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고 자했던 성철대종사의 수행자적 의지가 담긴 이름이라 하겠다.
겁외사는 대웅전과 선방, 누각, 요사채 등이 부속 건물로 있으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김소석 화백이 그린 성철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성철대종사 생가복원과 겁외사 창건의 의미는 성철스님 개인을 추앙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성철스님을 따라 깨달음을 향한 의지와 실천이 굳으면, 속인으로 오셨다가 부처님으로 가신 성철스님처럼 영원한 진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표본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겁외사는 추모의 공간이 아니라 발심의 공간인 것이다.
8. 황매산 영화주제공원(단적비연수 촬영지)
위치 : 경남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 산1번지내
황매산 영화주제공원은 속 은행나무침대 Ⅱ인 영화 『단적비연수』를 촬영했던 주 촬영장으로 산속에 작은 원시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산청군과 영화 『쉬리』로 유명한 (주)강제규 필름에서 공동으로 투자하여 제작한 것을 영화촬영이 끝난 후 촬영에 쓰였던 31채의 원시부족 가옥을 복원하고 10여개의 풍차와 은행나무 고목, 대장간, 칼, 활, 봉화대, 벽화는 물론 주인공의 캐릭터 등 1,000여점의 소품과 영화관련 자료들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주제공원(Theme Parks)을 만들었다.
세트장 주변은 어디를 보아도 인공미가 전혀 없기에 어떻게 산속에 이러한 지형과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국내 그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해발1,103.5m 의 황매산은 바위산의 모양이 매화가 피어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서 5월이면 수십 만평의 고원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선홍의 색깔을 연출하는 철쭉 군락지는 전국에서 최고를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