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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Benjamin Britten 브리튼, 벤저민
작곡가,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다. 영국의 로스토프트에서 태어났다. 금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부친은 치과 의사였다.5세 때부터 아마추어이면서 뛰어난 소프라노 가수로서 로스토프트 합창협회의 비서도 하고 있던 모친에게 피아노를 배웠고,8세 무렵부터 에셀 아스톨레 부인을 사사하였다
어릴 때부터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2세 때부터 프랑크 브리지에게 작곡을 배운 다음, 1930년부터 런던의 왕립음악학교에서 작곡을 존 아이얼랜드에게, 피아노를 아서 벤저민에게 배웠다.1937년에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초연된 [프랑크 브리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 의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이래 죽을 때까지 오페라를 중심으로 하여,관현악, 실내악, 성악 작품 등 폭넓은 장르에 걸쳐 수많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지냈는데,1947년부터는 영국의 동해안에 있는 올드버러에 정착하였고, 1948년부터 여기서 자작의 발표를 중심으로 한 올드버러 음악제를 개최하였다.
연주가로서도 브리튼은 지휘와 피아노에 제1급의 재능을 보여 주었다. 슈만 등 다른 작곡가의 작품에도 뛰어난 연주를 레코드에 남기고 있다.지휘자로서는 그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영국 실내관현악단과의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전곡,모차르트의 [교향곡 제25번, 제29번, 제38번, 제40번] 등이 그의 자질이 발휘된 대표적인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도 피터 피어즈와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비롯해 많은 가곡을 연주하였고, 첼로의 로스트로포비치와의 공연 등 모두 걸출하다(레코드는 모두 런던).
Bernard Haitink 하이팅크, 베르나르트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10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거쳐 암스테르담 음악원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한편,펠릭스 흐푸카를 사사하여 지휘법을 배웠다. 졸업과 동시에 힐베르슴의 네덜란드 방송 필하모니에 바이올린 주자로서 입단하게 되었다.
1954년과 1955년의 두 번에 걸쳐 네덜란드 방송 연합이 개최한 하기 국제 지휘법 강좌를 수강하고 페르디난트 라이트너의 가르침을 받았다.그리고 1955년에 그는 네덜란드 방송 연합의 부지휘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네덜란드 방송 필하모니에서 수석 지휘자인 파울 반 켐펜이 별세하였기 때문에 종종 하이팅크가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었다.
1956년에 처음으로 공개 콘서트에 출연하여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지휘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또 그 성공은 같은 곡목을 짜고 있었던 줄리니가 급병으로 쓰러졌을 때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연주회에 핀치히터로서 기용되었다. 하이팅크는 훌륭하게 이 대역을 해냄으로써 네덜란드에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7년에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네덜란드 필하모니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하게 되었다.
또 이해에는 콘세르트헤보우의 수석 지휘자 베이눔에게 그의 실력이 인정되자 동시에 그가 음악 감독을 맡고 있었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에 초청되어, 행운의 미국 데뷔도 장식하였다. 1960년에는 그의 캐리어도 더욱 국제적인 것이 되었고,파리, 브뤼셀, 샌프란시스코에도 객원 연주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1961년 급사한 베이눔의 후계자로서 콘세르트헤보우는 젊은 하이팅크를 지명하였다.
베테랑인 독일인 지휘자 오이겐 요훔의 보좌역으로 하여 2인제의 상임 지휘자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63년에는 에든버러 음악제에 출연하였는데 영국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64년에 하이팅크는 단독으로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예술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67년에 런던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 겸 예술 고문으로 취임하였고, 1979년 솔티에게 지휘봉을 넘겨 줄 때까지 겸임을 계속하였다. 또 1973년,처음으로 빈 필하모니에 객원 지휘를 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양자의 연계가 깊어졌고 동시에 레코딩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하키팅크는 유럽 제1급의 지휘자들과는 달리 콘서트에서 캐리어를 출발하여 후에는 오페라까지 진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종교적인 사정으로 오페라에는 별로 열의가 없는 네덜란드라는 나라의 사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1977년에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이끌고한국에 와서 이대 강당에서 지휘했다. 1988년 현재는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로 있다. 하이팅크는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의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콘세르트헤보우와의 레코드에서는 분명히 음악이 미숙하고 약간의 위험성도 엿보였는데,이는 콘세르트헤보우 당국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베테랑인 요훔과의 쌍두제를 채택한 것을 봐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급속히 그는 예술적인 성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센세이션널리 주인공은 아니며 소박하고 착실한 정공법으로 음악을 재현하는 유형의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맛은 그슬린 은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빛깔을 가진 콘세르트헤보우의 사운드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특히 독일 낭만파의 작품에서는 위력을 발휘한다. 브람스의 교향곡 시리즈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등, 아무런 꾸밈새도 없으면서 오서독스한 어프로치는, 음악이 숙성하며 그 스케일이 크기 때문에 극히 안정도가 높고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가 있다.
말러, 브루크너, 베토벤,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을 완성하였고, 슈베르트, 멘델스존,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집도 진행되고 있다.이전에 이만한 '전집마'로 불리웠던 지휘자가 있었던가. 더욱 각 작곡가에 대한 자세가 결코 원 패턴이 아니고 브람스의 중후함, 슈베르트의 소박함, 베토벤에서는 시적인 서정의 흐름이 아름다우며, 쇼스타코비치의 모던한 추진력도 명쾌하여 변화성이 풍부한 것도 그의 예술의 폭이 넓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의외라고 생각할 지 모지만 드뷔시, 라벨이라는 프랑스 근대의 레퍼토리에서도 치밀하게신경을 쓴 미묘한 표현을 들려주는 것도 부언하고 싶다.
Bernard Herrmann 허만, 버너드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뉴욕 대학,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피아노, 작곡, 지휘법을 배웠다. 20세 때부터 지휘를 하였고, CBS의 음악 감독,CBS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1940년부터 1955년까지 지냈다. 그때부터 아이브즈와 근대 영국 음악을 특히 잘 연주했다. 1940년 영화 '시민 켄'의 영화 음악을 써서 호평을 얻었다. 모두 61편의 영화 음악을 썼다. 그 중에서 특히 히치콕 감독의 요청으로 작곡한 것은 유명하게 되었다.
만년의 10년간은 허만이 사랑한 나라 영국에 눌러 살면서 지휘 활동을 하였다. [행성]등의 우수한 연주를 레코드(런던)에 남기고 있다. 순음악 작곡가로서도 활약하였고,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을 오페라화한[폭풍의 언덕]은 영국에서 전곡음반이 제작되었다. 마지막 영화 음악이된[택시 드라이버]를 녹음하기 위해 할리우드에 체류하던 중 잠들고 있는 사이에 별세했다고 한다.
Bernhard Paumgatner 파움가르터너, 베른하르트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피아니스트, 음악 비평가, 모친은 가수였다. 빈 음악원에서 브루노 발터와 그 밖의 지휘자를 사사하고,빈 대학에서 법률학 학위도 얻었다. 빈에서 지휘자로서 활약한 다음, 1917년부터 1938년까지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의 원장을 지냈다.
그동안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창립에 공헌했으며, 1922년부터 모차르테움 음악원의 모차르트 관현악단(1938년부터 모차르테움 관현악단으로 개칭)의지휘자도 겸임하였다. 1938년부터 피렌체에 있는 빈 대학의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연구소의 소장을 지냈고, 스위스의 브라운발트 음악제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모차르테움 음악원 원장과 모차르테움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다시 취임하였다.
1952년 순수한 양식에 의한 모차르트 연주를 주목적으로 하는 카메라타 아카데미카 잘츠부르크 관현악단을 창립하였다. 1959년에 모차르테움 음악원을 사임하고 이듬해 1960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총감독이 되었는데, 1971년에 별세할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레코드는 모차르테움 관현악단, 카메라타 아카데미카, 빈 교향악단을 지휘한 LP(아마데오 외)가 상당수 있다. 모차르트 연구가로서도 굴지의 존재였던 파움가르트너의 학식의 넓이와 이해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Bobdan Warcbal 바르할, 보단
바이올린 주자이기도 하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라비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브르노 음악원에서 배운 다음 야나체크 음악 아카데미에서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1957년부터 브라티슬라바의 슬로바키아 필하모니의 콘서트 마스터로 임명되었으며,한편으로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면서 슬로바키아 음악원 교수로서도 후진의 지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60년 슬로바키아 필하모니의 주요한 관현악 주자 11명과 슬로바키아 실내합주단을 조직하였고, 그 지휘와 독주를 겸하면서 이 앙상블을 육성하였다.
1년 후부터 국내외에 연주 활동을 개시하여 주목을 받았다. 1966년에는 자신을 포함하여 합주단을 오케스트라에서 독립시켜 정식으로 국립실내합주단이 되었고, 그 지휘와 솔로에 전념하였다. 바르할은 탁월한 앙상블과 현의 나라가 아니고서는 낼 수 없는 풍려한 음색의 합주단을 이끌고 있으면,현대 감각이 넘쳐 흐르는 지휘는 얄밉도록 신선하다. Fp코드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 헨델의 [합주 협주곡 작품 6] 전곡(모두 오퍼스)과 그 밖의 것이 약간 있다.
Bohumil Gregor 그레고르, 보후밀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프라하 음악원에서 알로이스 클리마를 사사하였다. 졸업 후인 1947년에 프라하의 스메타나 극장의 부지휘자로 임명되었으며, 1949년부터 브르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즈데네크 할라발라 밑에서 수업을 계속하였다. 195l년 다시 프라하에 되돌아왔으나, 병역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일시 활동은 중단되었다. 1958년에는 오스트라바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고, 1962년부터 다시 프라하로 복귀하여 프라하 국립 오페라 극장의 스태프 지휘자로임명되었다. 1964년 에든버러 음악제에서 야나체크의 「죽음의 집에서」를 상연하여 대성공을 거두고,함부르크, 빈, 샌프란시스코, 암스테르담에서 야나체크와 스메타나의 오페라 전문가로서 초청을 받았다.
그레고르의 활동 범위는세계적으로 퍼져 나갔는데, 특히 야나체크의 오페라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권위자라 할 수 있다. 레코드는 현재 야나체크의 「영리한 암여우의 이야기」(수프라폰)밖에 카탈로그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의 야나체크의 오페라는 유럽과 미국에서 정평이 있는 그대로인데, 오케스트라와 가수를 다루는솜씨는 그 특질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있어서 안정감이 있고 설득력이 강하다. 근년에는 국제적인 활동이 뜸하고, 프라하에서의 지위는상임 객원 지휘자와 같은 형태로 있다.
Boris Khaikin 하이킨, 보리스
소련의 민스크에서 태어났다. 소련 오페라계에 원로적 존재로서 레코드를 통해 알려져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상세한 것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배우고 1928년에 졸업했다. 소련 각지의 오페라 극장 등에서 지휘자로서의 연찬을 쌓았고, 1943년부터 1954년까지 레닌그라드의 키로프 극장에서 수석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그 후 모스크바음악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로제스트벤스키와 함께 볼쇼이 극장의 오페라 부문을 중심으로 하여 지휘자로서 활동하였다.
이 볼쇼이 극장에서의 첫연주에 의한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 무소르크스키의[호반시치나], 보로딘의 [이고르공] 등의 전곡 음반(멜로디아)은 러시아 오페라의 레퍼토리를 아는 데 매우 귀중한 재료가 될 뿐만 아니라하이킨이 이 범주에서 베테랑임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것으로, 그의 역량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또한 19세기적인 지휘의 전통성을 그가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현재는 모두 폐반되었으며, 1962년에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과 녹음한 글라주노프의 발레 [4계](멜로디아)만이그의 연주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Boyd Neel 닐, 보이드
영국의 켄트 주 블랙히스에서 태어났다. 왕립해군대학에서 배운 다음,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932년 뛰어난 젊은 현악 주자들이 모여'보이드 닐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그 지휘자가 되었다. 다음해 1933년 런던에서 데뷔 공연을 하였다. 18명의 전속 단원으로 구성된 현악오케스트라로서,당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바로크의 현악 작품의 리바이벌을 함과 동시에 엘가, 흘스트, 본-월리엄스, 스트라빈스키의 20세기 현악 합주곡을 소개하였다.
193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초대되고, 브리튼에게 위촉한 [프랭크브리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초연하여 격찬을 받았는데, 브리튼의 이름은 이렇게 하여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닐은 바흐나 헨델에 있어서의 적절한 템포와 맑은 질감에 대한직관력을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헨델의 [합주 협주곡집 작품 6]의 전곡 음반(모노럴, 런던) 등은 명연주로서 지금까지 그 성과가 살아 있는 것이다.
닐은 자신이 결성한 현악 오케스트라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저서 {The Story of the Orchestra}(1950년 런던)도 출판한 바가 있다.1953년 토론토의 로열 음악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영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주하여, 1971년 용퇴할 때까지 캐나다 악계의 중진으로서 활약하였다.1953년 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고 실내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였다. 보이드 닐 오케스트라는 1957년 '필로무지카 오브 런던'으로 개칭되고, 닐의 손을 떠났다. 1981년 9월 30일 토론토에서 별세하였다. Bruno Bartoletti 바르틀레티, 브루노
이탈리아의 피렌체 근교인 세스토 피오렌티노에서 태어났다. 피렌체 음악원에서 플루트를 부르스카르피에게, 피아노를 나르디에게 배웠다.졸업 후 피렌채 5월제 관현악단의 플루트 주자를 맡으면서 오페라 극장의 오페라 지휘 연구원으로서 로진스키, 미트로풀로스, 구이,세라핀 등의 어시스턴트를 역임하였다. 1953년 12월 피렌체 시립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리골레토]를 통해 데뷔하여 성공을 거두고,1957년부터 1964년까지 피렌체 5월제 관현악단의 상임을 맡았다. 이 동안에 로시니에서 달라피콜라에 이르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피렌체를 비롯하여스칼라 오페라 극장과 로마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 지휘를 하였고, 1956년에는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 초청되어 미국에서의 데뷔를 하였다.
1950년대의 후반에서 1960년대 전반에 걸쳐서 그는 로카, 말리피에로, 모르타리, 히나스테라, 에크, 크제르네크 등의 오페라를 세계 초연 또는이탈리아에서 초연하여뛰어난 수완을 널리 인정받았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코펜하겐 왕립 오페라 장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휘도 겸하였다.1964년부터 시카고 리릭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로마 오페라 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후 로마 오페라 극장의 종신 지휘자로임명되었다. 레코드는 푸치니의 작품이 많고 모두 안정된 지휘로 정평이 나있는 베테랑이다.
Bruno Maderna 마데르나, 브루노
작곡가이기도 하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공개 연주하였고, 8세 때에는 밀라노 스칼라오페라 극장의 지휘대에 선 신동이었다.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1935), 베네치아의 마르첼로 음악원(1939),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1940) 등에서공부했으며, 작곡을 말스티니와 말리피에로, 지휘를 가르니에리에게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말리피에로가 근무하고 있던마르첼로 음악원에서 교수직을 맡았고, 또 루이지 노노와 헤르만 셰르헨 등과 알게 되어 그 밑에서 현대 음악을 연구하였다.
1950에는 독일의 무지카비바 콘체르트에 초청되어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그 이후 현대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로서 광범한 연주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서독은 특히제2의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1951년부터 다름슈타트의 국제 현대 음악 강좌에 참가하고, 1954년부터는 지휘, 작곡, 분석을가르쳤다. 한편 1956년부터1960년에 걸쳐서는 밀라노의 이탈리아 방송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서 활약하였고, 그 동안 밀라노 음악원에서 12음 음악의 공개 강좌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부터 지휘 활동은 더욱 국제적이 되었다. 마데르나는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의 지휘 코스를 가르쳤고,1970년 봄에는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방송협회에서 밀라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는데, 애석하게도 1973년 11월 13일다름슈타트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현대 음악의 기수의 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작품을 연주 ·소개하였는데, 레코드의 수는 별로 많지 않다.[현대 음악의 창조자들](RCA)과 [브루노 마데르나 의 예술](텔레푼켄)의 두 장이 당시의 예술제 참가 레코드로서 화제가 될 만큼 우수했다.
Bruno Walter 발터, 브루노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며,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브루노 발터의 본명은 B. W. 슐레징거(Bruno Walter Schlesinger)이다.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에서 배우고, 에리히, 부슬러, 라데케 등을 사사하여 졸업 전부터 지휘자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쾰른,함부르크,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바), 리가, 베를린 등지에서 지휘 경험을 했다.
1901년 함부르크에서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 그 작품과 인물에동했는데, 말러도 역시 발터의 재능을 인정하여 발터를 빈 궁정 오페라 극장에 초빙, 부지휘자가 되게 했다. 그것은 1912년까지 계속되었는데,그 동안에 말러로부터 음악·예술·사상·철학과 그 밖의 많은 것을 배웠다. 1911년에 베를린의 징크아카데미를 지휘했으며,그리고 1913년부터 1922년까지 모틀의 후계자로서 뮌헨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 동안 발터는 오페라 기획에서 상연에 이르기까지의 풍부한 지식이 일반에게 인정을 받아 1909년 3월 런던의 로열 필을 지휘했으며, 그 이후 코벤트가든 왕립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했다. 1925년 베를린 샤를로텐베르크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1930년부터 1933년까지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연주회를 지휘했다.
이때 1933년에 시작된 독일의 정치적 변동의 와중에서 독일을 떠나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빛나는 전통을 수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함과 동시에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및 빈 필의 연주에 대해서도 1936년부터 전력을 다했다.그러나 1938년 오스트리아도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중앙 유럽에서의 활동을 단념하고, 프랑스 국적을 얻어 프랑스, 영국,이탈리아에서 지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루체른 음악제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발터는 앞서 1923년과 1924년에 미국에 건너가뉴욕 필을 객원 지휘하여 호평을 받고, 1932년부터 1933년 시즌에도 재차 지휘했다. 유럽 정세가 점점 악화됨을 알게 된 발터는1939년 미국에 이주했다. 그리고 1940년에는 NBC 교향악단에 이어 뉴욕 필, 1941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을 지휘했다.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뉴욕 필의 지휘자와 조언자로서 활약했다. 제2차 대전 후 유럽에서 객원 지휘자로서 에든버러 음악제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주를 했다. 1956년 80세 때 은퇴를 발표했으나, 캘리포니아 비버리힐스에 있는 자택에서 발를 위해 특히 CBS가 조직한 컬럼비아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많은 녹음을 했다. 1962년 2월 17일 비버리힐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85년의 생애를 마쳤다.
발터는 시인적 지휘자였으며, 선의와 자애에 넘친 인격자였다. 심미적인 음악 표현에 뛰어나 모차르트 속에 잠재한 심미적인 성격마저 끌어냈으며,말러의 해석에서는 절묘한 감수성을 나타냈다. 발터는 내성적이며 서정적인 재능인이었다. 모차르트의 우아, 베토벤의 정서, 브람스의 중후, 말러의 도취, 요한 슈트라우스의 감미…, 발터는 음악에 따뜻한 피를 통하게 한 감정의 서정시적인 지휘자였다. 레코드는 다음의 10종류를 대표적인음반으로 추천하고 싶다. 먼저 빈 필 시대의 것으로 말러의 [대지의 노래](페리어(알토), 런던), [죽은 아들을 그리는 노래](페리어(알토),에인절)의 2종류와 컬럼비아 교향악단을 지휘한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35번][제36번][제38번][미라벨의 정원에서],슈베르트의 [교향곡 제8번(미완성)][브람스 교향곡 전집], 말러의 [교향곡 제1번]과 [대지의 노래](이상츈). < C > Carl Bamberger 밤베르거, 카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작곡과 피아노를 슐레커에게, 첼로를 부르스바움에게 배웠다. 단치히(현재 폴란드의 구다니스크)의 오페라극장의 지휘자(1924∼1927)를 시작으로 다름슈타트 오페라 극장과 러시아, 이집트 등에서 지휘 활동을 계속하였다. 1937년 미국에 이주하였고,1939년 뉴욕의 메네스 음악 칼리지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과의 주임 교수가 되었다.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맨해튼 뉴 코랄 그룹과 브루클린오라트리오 협회를 창립하였다. 컬럼비아 방송교향악단, NBC 교향악단, 뉴욕 필하모니, 디트로이트 교향악단과 그 밖의 객원 지휘도 많이 하였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서독의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와 필라델피아의 신음악학교의 학장도 겸하게 되었다.『지휘법(더 콘덕터즈 아트)』이라는 저서도 1965년 뉴욕에서 출판하였다. 레코드는 슈베르트의 [로자문데]와 그 밖에 콘서트 홀에서 나온 것이 있다. 함부르크의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알토 랩소디](논서치)가 있다.
Carl Gorvin 고르빈, 카를
루마니아의 헤르만슈타트에서 태어났다. 부쿠레슈티의 왕립음악원에서 음악을 배우는 한편,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기도 하였다.22세 때에 루마니아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는데, 1938년부터 독일 각지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전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는 괴팅겐의 헨델 합창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이어서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도 하였다. 1954년부터는 프리랜서로 베를린 필하모니 와 베를린바흐 관현악단 외에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각지에서 객원 활동을 하였다.
고르빈은 여러 음악제에도 초빙 되었으며, 지휘자로서 뿐만 아니라 하프시코드의 연주가로서도 알려졌다. 레코드는 전에 뮌헨 실내관현악단과의 슈타미츠 등의 몇몇 작품이 있었는데, 현재는 독일 바흐 졸리스텐과의 텔레만의 [3중 협주곡 E장조](베렌라이타 무지카폰)1곡만이 있다.
Carl Schuricht 슈리히트, 카를
작곡가이기도 하며, 독일 단치히(지금의 그다니스크)에서 출생했다. 저명한 오르간 제작자의 집안에서 자란 슈리히트는 1901년부터 1903년까지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훔퍼팅크 등에게서 배운 다음 라이프치히에서 막스 레거를 사사했다. 마인츠의 극장에 수습으로 들어가 음악의 실제 수업을쌓은 뒤에 버트 크로이츠나허를 비롯한 도르트문트, 고슬라르, 츠비카우 등 독일의 지방 도시 극장의 악장을 거쳐 1909년부터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오케스트라 협회의 지휘자가 되었다. 1911년에 비스바덴으로 옮겨 그 곳 극장의 제1지휘자로 취임, 마침내 비스바덴 시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고 그 자리를 1944년까지 지켰다. 그 사이 슈리히트는 현대 음악제의 정기적인 개최를 실현시켰고, 그 곳에서 새로운 음악을 지휘, 그 소개에 힘썼고 특히 독일에 드뷔시, 델리우스, 라벨,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의 작곡가들의 음악의 추진자가 되었다. 물론 비스바덴에서만 지휘 활동을 계속한 것은 아니며 빈과 베를린을 비롯한 주요 음악의 도시에서 객원 지휘도 했다. 그 중에서도 빈 필하모니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네덜란드의 스헤베닌게에서는 매년 여름 열리는 연주회를 수년 동안에 걸쳐 지휘, 그 공적으로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1938년에 훈장을 받기도 했다. 슈리히트는 1944년부터는 스위스로 옮겨가 살면서 고정된 지휘자의 자리를 갖지는 못했으나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객원 지휘자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67년 1월 7일에 스위스의 레만 호반에서 타계했다. 슈리히트는 젊은 시절에 작곡도 했는데 관현악곡과 피아노곡 등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의 슈리히트의 명성은 물론 지휘 방면에 있다고 하겠다. 지휘자 슈리히트는 일찍이 의욕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다루었을 뿐으로, 어떤 작품이든 명쾌한 조형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오케스트라에 대한 강한 억제력과 의지를 발휘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슈리히트는 19세기의 주정주의(主情主義)적인 독일의 지휘자와 20세기의 신즉물적인 지휘자와의 소위 다리 역할을 한 존재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런 까닭에 슈리히트는 단순히 솜씨 있게 완성하는 지적인 지휘자로 그치지 않고 명쾌한 조형 속에서 적절한 표현을 보여 주었다고 하겠다. 레코드는 베토벤에서 브루크너에 이르기까지 독일 작곡가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을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에인절)은 참으로 지휘자다운 단정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Carlo Felice Cillario 칠라리오, 카를로 펠리체
아르헨티나의 산 라파엘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있는 마르티니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각각 콘소리니와 마테라손에게 배웠다. 1935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파가니니 상을 수상하였다. 처음에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활약하였다. 그 후 소련의 오데사 음악원에서 체르니아틴스키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1942년에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로시니의 [세빌랴의 이발사]를 통해서였다. 이듬해 1943년에 루마니아에서 부쿠레슈티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심포니 지휘자로서도 데뷔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는 이탈리아에 돌아갔고, 1946년에 볼로냐 실내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한때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하여 활약하였다. 1957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지휘자 콩쿠르에 입상했다. 1950년대의 후반부터 다시 이탈리아를 본거지로 하고 있으며, 프리랜서의 오페라 지휘자로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레코드는 1960년경에 이탈리아의 안젤리쿰에서 녹음한 모차르트 초기의 오페라([루초 실라]외)에 의해 주목을 받았으나 그 수효는 별로 많지 않다. 현재까지의 대표 음반은 소프라노 카발레, 테너 도밍고, 메조소프라노 코소토에 의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전곡(RCA)일 것이다.
Carlo Maria Giulini 줄리니, 카를로 마리아
이탈리아의 베로나 근교에 있는 바를레타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고향의 음악 학교에서 공부한 뒤, 로마로 가서 이듬해부터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했다. 레미 프린쉬페를 사사하여 비올라를 배웠고, 알레산드로 부스티니에게서는 작곡을 배웠다. 재학중이던 1932년에는 로다 성 체칠리아 음악원 관현악단의 비올라 주자를 지냈다. 1938년, 졸업과 함께 성 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로 진학, 베르나르디노 몰리나리에게서 지휘법을 배웠다. 1944년의 로마 해방기념연주회에서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데뷔, 이때의 대성공으로 인해 그 해부터 페르난도 프레비탈리의 뒤를 이어 받아 로마의 이탈리아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 발탁되었다.
2년 뒤인 1946년에는 음악 총감독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1950년부터는 밀라노의 방송교향악단으로 옮겼는데 이 무렵부터 유럽 각지의 음악제를 중심으로 한 객원 활동도 활발해 졌다. 1951년에는 베르가모 음악제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통해 마리아 칼라스와 처음으로 협연도 가졌다. 또한 이 해에는 줄리니가 지휘한 하이든의 오페라 [달의 세계]를 방송으로 청취한 대지휘자 토스카니니로부터 격찬을 받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토스카니니의 문하생이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1952년에는 팔랴의 오페라를 지휘하여 밀라노의 스칼라 오페라 극장으로 진출, 1953년부터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1954년에는 빅토르 데 사바타의 뒤를 이어 스칼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나 스칼라 극장의 수석지휘자의 자리도 1956년에는 사임했고, 그 후에는 프리랜서가 되어 유럽과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객원 활동을 계속했다. 1958년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에서 비스콘티의 새로운 연출에 의한 베르디의 [돈 카를로]를 지휘, 절찬을 받았다. 또한 1959년부터는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지휘대에도 가끔 초청되어 활약했고, 1968년부터 시카고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어 상임 지휘자인 솔티를 잇는 활약을 보였다. 더욱이 1973년에는 빈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영입되어 1976년,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에게 그 자리를 물려 줄 때까지 수석 지휘자의 자리를 지켰다.
그 후에도 그 오케스트라의 간청으로 1980년까지 수석 객원 지휘자로 머물러 있었다. 1978년 10월 뉴욕 필하모닉으로 떠난 주빈 메타의 뒤를 이어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여, 세계 악단의 주목을 끌었는데, 취임하자 곧바로 맞이한 시즌에서 개막 공연을 베토벤의 [제9교향곡]으로 장식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 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에서의 평가가 점차 높아지자 레코드에 대한 평가 급속히 높아져 거장의 대열에 끼고 있다. 또한 1982년에는 오래간만에 오페라에의 컴백을 했고,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에서의 제피렐리 연출에 의한 베르디의 [팔스타프]에의 평판은 뜨거웠다.
1982년에는 로스엔젤스 필하모닉을 이끌고 한국에 와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지휘했다. 줄리니는 소위 바람을 일으키는 지휘자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타입이다. 자신의 음악을 차분히 연마하면서 완전히 자기 것으로 하기 전에는 레퍼토리로 삼지도 않을 뿐더러 상당한 포스트까지도 사양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해치우려는 오늘날의 지휘자들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이런 이유로 실력에 비해 그의 평가가 쉽게 정착되지 않았으나 근래에 와서 급속하게 성숙된 깊이와 스케일의 크기가 더해져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경향이 있으며, 인기도 매우 높아지고 있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의 지휘자라 하겠으며 이탈리아의 지휘자로서는 토스카니니 이래 최대의 존재라고 평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의 지휘는 구성력이 풍부하고 강인하며 스케일이 큰 표현으로, 정열과 지성이 교묘하게 융합된 연주 속에는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노래와 풍부한 음악이 항상 저류에 있다. 레코드는 근년에 녹음한 모두가 경청할만한 명연주라 하겠는데 말러의 [교향곡 제9번]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8번, 제9번],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제6번],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4번, 제8번, 제9번],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브리튼의 [세레나데](모두 그라모폰) 등은 어느 것이나 순음악적인 엄숙하기까지 한 연주이다.
그 중에서도 더욱 훌륭한 것은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전곡(그라모폰)이라 하겠는데 가수에서 오케스트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장악,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으로 일관된 지휘봉이 조그마한 타협도 허락하지 않고 생명력이 충만한 연주로 이끌어 압도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감동으로 유도한다. 또한 정신성이 깊고 장대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 펄먼과 협연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모두 에인절)도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명연주라 하겠다. 부자간보다도 더 다정한 말로 1984년 5월 25일, 26일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의 연주회는 뜻하지 않은 음악적인 삼매경으로 이끌어들였다. 음악의 성자라고 불리는 68살의 이탈리아계 상임 지휘자와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는 29살의 우리 나라 지휘자 정명훈이 감동을 주었지만 리허설(연습)에서는 더욱 흥미있는 일이 많이 생겼다. 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거의가 몸집이 커서 현악기, 타악기 등을 힘이 있고도 스케일이 크게 연주했기 때문에 투티에서는 너무나도 우렁차고 요란하여 얄팍한 고막이 아니라 가슴이나 심장으로 들어야 했는데 과연 미국다운 개방적이고도 화려한 연주였다. 더구나 지휘자인 줄리니는 이탈리아 사람이면서도 180cm를 넘는 훤칠한 키이기 때문에 타이탄(巨人)이 지휘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세계 음악사에 나오는 수많은 지휘자들은 거의 나폴레옹처럼 키가 작다. 토스카니니도 그랬지만 현재 활약하는 카라얀도 작은 편이며 번스타인도 작다. 물론 키가 작다고 이들이 지휘하는 음악이 작은 것은 아니지만 줄리니의 경우는 유독 키가 큰데다가 두 팔이 길어서 지휘봉을 휘두르는 공간이 넓어 매우 후련하게 느껴졌다. 그는 반쯤 눈을 감고 낯을 찡그리며 신경을 쓰는 표정으로 지휘해 나갔는데 신비스러운 세계로 이끌어갔다. 둘쨋날은 한국 출신의 정명훈이 지휘를 했는데 마침 시간 여유도 있어서 그날 오전에 리허설을 했다. 스승격인 줄리니는 텅 빈 극장의 좌석에 앉아서 자기의 후계자인 정명훈의 지휘를 보살펴주고 있었다. 정명훈이 워낙 뛰어난 솜씨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가 지휘하는 대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잘 따랐지만 줄리니는 종종 부족한 점을 이 젊은 후계자에게 지적하여 다시 부분적으로 연습을 시켰다. 이때 줄리니와 정명훈 사이에는 부자(父子)간보다 더 다정한 말이 오고갔다. 정명훈이 자기의 부족한 점을 고쳐 다시 지휘하면서 줄리니가 지켜보고 있는 뒤를 돌아보고 "괜찮습니까?"하고 물으면 줄리는 흡족하다는 듯이 "잘 됐어!"하며 미소를 짓곤 했다.
Carlo Zecchi 체키, 카를로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태어났다.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바잘디에게, 작곡을 레피체, 스타치오리, 부스티니에게 배웠다. 1920년에 먼저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는데 뛰어난 기교와 아름다운 음색으로써 일류 비르투오소에 들게 되었다. 특히 스카를라티의 소나타와 모차르트의 협주곡에는 정평이 있으며, 그 밖에 슈만, 쇼팽, 리스트, 드뷔시를 특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콘서트·피아니스트로서의 캐리어는 1939년경에는 종지부를 찍고, 첼리스트 마이나르디와의 소나타 연주만을 계속하였다. 1938년부터 지휘 공부를 시작하였다. 한스 뮌히와 안토니오 과르니에리를 사사하였다. 1947년 무렵부터는 가장 다망한 객원 지휘자로서 활약을 시작하였다. 특히 빈 실내관현악단과 연계가 가장 깊었다. 장기간에 걸쳐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의 교수를 지냈고, 또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의 하기 코스에서 지휘과의 교사로서도 활약하였다. 레코드는 체코 필하모니를 지휘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수프라폰)이 있는데, 그야말로 아카데믹한 지휘로써 분명한 해석으로 선율을 잘 살리고 있지만 재미는 부족하다.
Carlos Kleiber 클라이버, 카를로스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당시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었던 명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였다. 1935년 에리히가 푸르트벵글러의 '힌데미트 사건' 때에 푸르트벵글러를 지원하고 나치스에 항의하는 바람에 베를린을 떠나 카를로스(아들)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옮겼다.
부친은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일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특별한 음악 교육은 시키지 않았으나, 1952년에 라프라타에서 데뷔하였다. 같은 해 부친과 함께 유럽에 되돌아갔고 부친의 권유로 스위스 연방공업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지만, 1953년에 부친의 반대를 물리치고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인 겔트너 프라츠 극장의 무급 견습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1954년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의 오페레타 극장의 지휘자로 영입되고,여기서 본격적으로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는 뒤셀도르프와 뒤스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라인 도이치 오페라의 지휘자로서 수많은 오페라의 경험을 쌓아 올려 차츰 지휘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64년부터 취리히 오페라 극장, 1966년부터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베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이 슈투트가르트 시절에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독일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그 뛰어난 재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특히 부친이 세계에서 초연한 바 있는 베르크의 [보체크]를 비롯하여 R. 슈트라우스, 바그너, 베르디, 비제, 베버의 오페라로 성공을 거두고, 1968년부터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 스태프의 한 사람으로 영입되었다. 뮌헨을 본거지로 하고 나서 그는 슈투트가르트 시절부터 평판이 높았던 베버의 [마탄의 사수](그의 데뷔 레코딩으로 선정되었다)와 R.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비제의 [카르멘], 베르크의 [보체크] 등 뛰어난 연주에 의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높였다.
1973년 드레스덴에서 녹음 한 최초의 레코드인 [마탄의 사수] 전곡(구라모폰)의 명연, 같은 해의 빈 국립 오페라 극장과 1974년 바이로이트 음악제 데뷔를 장식한[트리스탄과 이졸데], 또한 같은 해에 런던의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의 데뷔 공연인 R.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등의 대성공에 의해 현대의 가장 뛰어난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서 널리 인정되었다.
그 후에도 1976년의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오프닝을 장식한 베르디의 [오텔로],스칼라 오페라 극장 개설 200주년 기념 공연의 [트리스탄과 이졸데](1978),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오프닝 연주를 한 [카르멘]과 시카고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미국 데뷔를 장식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뮌헨과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라 보엠] 등,카를로스 클라이버는 가는 곳마다 그리고 취급하는 작품의 모두가 청중을 매료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아직 특정한 오페라 극장이나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 또는 상임 지휘에 취임한 일이 없다. 그의 역량과 명성을 생각하면이상한 생각마저 드는데, 장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현시점에서의 그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이 수반되거나 활동이 다망한 지위로부터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또 연주회나 레코딩 등도 때로는 취소하는 일이 있다고 전해지는데,것도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의 단순한 변덕이 아니며, 그의 연주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철저한 완전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 아닐 것이다.
하여간 그가 이제까지 녹음한 레코드의 양은 그의 명성에 비하면 아직도 적은 편이어서,오페라에서는 [마탄의 사수], J.슈트라우스의 [박쥐],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전곡(이상 그라모폰)이 있다. 리히테르와 협연한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에인절),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교향곡 제7번],슈베르트의 [교향곡 제3번, 제8번],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이상 그라모폰)이 모두인데, 어
느 것이나 극히 신선한 매력에 가득 찬 멋진 명연이다. 이러한 것들은 클라이버의 끝없는 저력으로서의 재능과 역량이 얼마나 무한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오페라와 교향곡에서도 클라이버는 작품의 본질 및 그 근원적인 매력을 극히 강한 설득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드문 재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빈 필하모니와의 일련의 녹음에 있어서의 그의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표현은 이제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한 것이며, 이러한 것은 역시 [박쥐]와 [라 트라비아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모두 클라이버의 추측할 수 없는 재능이 단적으로 나타난 명연이었다. 더욱 그는 최근 오스트리아의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Carlos Paita 파이타, 카를로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연주회와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을 견학하고 지휘 테크닉을 독학으로 공부했으며,그 후 로진스키에게 정식으로 지휘를 배웠다. 또 푸르트벵글러를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베를린에서 사사하였다.
1953년에 아르헨티나의 오랜 역사를 가진 오페라 극장 테아트로 콜론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데뷔한 이후로 아르헨티나에서 지휘자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1966년 유럽에 데뷔하였고, 벨기에 방송에서의 콘서트를 통해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 벨기에를 본거지로 삼고 유럽 각지에서 객원 지휘를 하였다. 레코드는 스코티시 내셔널 관현악단을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로열 필하모니를 지휘한 베르디의 [레퀴엠], 말러의 [교향곡 제1번](이상 런던)이 발매되고 있다.
그는 1981년에 독립된 레코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지휘자와 음악 디렉터를 겸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녹음의 LP의 제작을 시작했다. 스코티시 내셔널 관현악단 연주의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6번] 등이 로디아라는 새로운 레이블로 발매된 그 레코드이다. 종전의 영국 데카(런던)에서의 녹음은 영국에서는 이미 폐반되었고, 음향적인 재처리를 한 다음에 로디아 레이블로 발매되었다.
Carmen Dragon 드래건, 카멘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모두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콘트라바스와 트롬본을 잘 다루었고, 연주까지 하게 되었다. 산타페 칼리지에서 음악을 배웠으며, 14세 때 댄스 밴드를 조직하여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여러 악기를 마스터하였고 동시에 작곡이나 편곡에도 숙달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 후 이름 높은 편곡자 메레디스 월슨의 조수가 되었는데, 곧 그의 재능이 인정되었다.
한편 뉴욕의 그래프트 뮤직 홀에서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게 되었으며, 곧 할리우드 보울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이렇게 하여 드래건은 펠릭스슬래트킨과 함께 널리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드래건이 지휘한 오케스트라곡이 언제 들어도 생생한 색채를 발휘하는 이유는 그의 편곡자로서의 뛰어난 솜씨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다. 또 클래식의 파퓰러 명곡이 효과적인 꾸밈을 주어 그 색채성은 언제나 듣는 이로 하여금 풍부한 자극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의 수많은 녹음은 캐피털의 홈뮤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나와 있는 것으로는 [꿈의 스타라이트 콘서트][세계의 여행 I, II] 등이 실로 탁월한 기교의 편곡으로써, 대표적인 음반으로 꼽을 수가 있다.
Charles Dutoit 뒤투아, 샤를
스위스의 로잔에서 태어났다. 로잔 음악원에서 바이올린, 음악 이론, 지휘법을 배운 다음 주네브 음악원에서 비올라와 악기법을 공부하였다.지휘는 갈리에라의 지도를 받은 다음 1959년 탱글우드에서 뮌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59년 로잔 대학 합창단, 1963년 로잔 바흐 합창단의 지휘자를역임하였다. 1964년 베른 교향악단의 제2지휘자가 되었고, 1967년 클레츠키의 후임으로서 수석지휘자로 승진하였다.
그 후 부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유럽 및 남아메리카연주 여행을 하고 있다가 1974년 3월 일본에 갔을 때 이 부부는 파국을 맞이하여 부인이 무단으로 일본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곧 이들은 이혼했다고 한다. 뒤투아는 1978년에 몬트리올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는데,몬트리올시는 캐나다의 프랑스어권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뒤투아에게는 적재적소라고 할 수 있다.
'몬트리올의 음악 사절'이라고까지 불려졌으며 매우 인기가 높았다. 1981년 폴리그람과 녹음 계약을 체결하고 런던에서 뒤투아가 지휘한 몬트리올 교향악단의 레코드가 정기적으로 발매되기 시작하였다. 뒤투아도 본격적인 수병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몬트리올 교향악단을 이끌고 뜻을 펼 수 있는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우리 나라에는 1974년 정경화와 내한, 서울시향을 지휘했으며, 1989년 11월 몬트리올 교향
악단과 두번째 방문으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전곡을 국내 초연하였다. 그때까지의 레코드는 바샤리가 피아노 파트를 맡고 있는 [페트루슈카](그라모폰) 등,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서 뛰어난 지휘 테크닉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몬트리올 교향악단과의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전곡(미국 런던)은 이 곡의 첫번째 디지털 녹음으로서 호평을 받고 있다.
Charles Groves 그로브즈, 찰스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이 되었고, 후에 런던 왕립음악원(RCM)에서 공부했다. BBC의 합창 지휘자(1938년∼1942년)를 시작으로 지휘 활동을 시작하여, BBC시어터 관현악단의 준지휘자(1942년∼1944년), BBC 노던 교향악단(맨체스터)의 수석 지휘자(1944년∼1951년)로활동하였다.
1951년부터 1961년까지 본머스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웨일스 내셔널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재임했다. 또한 1963년 로열 리버풀 필하모니(RLPO)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여 1977년까지 재임하였다. 1977년에는 런던의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ENO)의 음악 감독이 되어 다시 오페라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중병에 걸려, 1979년 부지휘자인 마크 엘더(1947∼ )에게 이임하고 사임하였다.
그 후 건강이 회복되어 런던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였다. 그로브즈가 가장 활동적이었던 것은 RLPO 시절인데, 합창 작품을 자주 연주하는그는 딜리어스의 거의 모든 합창 작품을 녹음했다. 그 밖에도 딜리어스의 오페「코앙가」(EMI)의 초연 녹음을 하였고, 비첨 이래 최고의 딜리어스 지휘자로서 찬양 받았다. 그로브즈가 치휘한 딜리어스의 「인생이 미사」와 「해류」(모두 에인절)는 스테레오 최초의 녹음이다.비첨만큼의 마술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무로하여 작품을 살리는 성실한 연주에서 오늘날에는 얻기 어려운 그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병 때문에 그 후의 녹음이 끊어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애석 한 일이다.
Charles Munch 뮌슈, 샤를
프랑스 알사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다. 알사스는 당시 독일령이었는데, 그의 집안도 독일계였으며 알베르트 슈바이처와는 친척 관계이다.스트라스부르 음악원의 교수로서 오르간의 명수였던 그의 부친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고 스트라스부르 음악원에서 작곡가인 피츠너의 지도를 받았다.그러나 그 다음에 의사가 될 것을 꿈꾸고 파리에 갔지만, 역시 음악을 버릴 수 없어서 1912년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뤼시앙 카페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음악원 재학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독일 병사로서 출정하였는데, 부상으로 제대했다. 종전 후에는 고향에서 스트라스부르관현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편, 모교인 스트라스부르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1920년경부터 베를린에서 프레슈에게바이올린 연주에 관하여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1926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로 취임했는데, 이 시절에는 푸르트벵글러와브루노 발터에게 인정을 받아 지휘법을 배웠으며, 지휘자로서의 준비를 시작하였다. 1931년 이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마스터의 자리를 사임한 뒤,
1932년 자비로 홀을 빌려 스트라람 관현악단을 지휘함으로써 염원의 데뷔를 하였다. 이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어 파리의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를 할 수있게 되었고, 더욱 국외로부터 객원 지휘의 의뢰가 있기 시작했다. 1935년에 소시에테 필하모니라는 오케스트라를 파리에서 조직하여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1938년에는 필리프 고베르의 후임으로서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여 1946년까지 8년간, 전통에 빛나는 프랑스 최고(最高)의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명실 공히 프랑스 최고의 지휘자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 평화가 회복된
1946년, 심기일전하기 위해 프리랜서가 되어 유럽과 미국 각지의 일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였다. 1948년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을 이끌고 미국에가서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1949년에는 별세한 쿠세비츠키의 후임으로 보스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고, 1962년에 은퇴할 때까지 13년간에 미국 제일의 명문 오케스트라의 제2의 황금 시대를 구축하였다. 이후에는 여유를 가지고 세계 각국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 하고 있었는데, 1967년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이 조직·개편될 때, 파리 관현악단으로 새로 발족함에 따라 초대 음악 감독으로 선임되어 훌륭히 그 중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고령의 뮌슈에게 이 직무는 과하였는지 1968년 가을 파리 관현악단을 이끌고 미국에서의 연주 여행중 11월 6일에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심장 발작으로 급서하였다. 그의 지휘는 만년이 되어도 움직임이 격렬하고 다이내믹하였으며, 선은 굵고 표정은 신선하였다. 그러면서도 프랑스풍으로세련되어 있었다. 레퍼토리는 고전에서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극히 넓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베를리오즈, 생상스, 라벨 등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 연주에 우수한 것이 많았다.
또한 베토벤, 브람스, 슈만 등의 독일 음악 연주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혈통에서볼 때 당연한 일이다. 레코드는 먼저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들 수 있는데, 생전에 베를리오즈 협회의 회장을 한 일이 있는 만큼 최고의 작품 해석으로 잘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는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한 것(RCA)과 파리 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에인절)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굴지의 명연주였고 또한 [레퀴엠], 극적 이야기 [파우스트의 겁벌](이상 RCA) 등은 각각 초일급의 연주였다.
이 밖에 프랑스계에서는생상스의 [교향곡 제3번],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 댕디의[프랑스의 산사람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 라벨의 [틀프니스와 클로에](이상RCA) 등이 뛰어난 연주로서, 모두 리듬이 뚜렷하게 부조된 명쾌한 표현이다. 또 독일계에서는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상 RCA) 등은 기복을 크게 한 씩씩한 표현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꼼짝 못하게 하는 마력적인 매력을 가 지고 있다
Christoph Eschenbach 에셴바흐, 크리스토프
독일의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다.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령 브로츨라프)에서 태어났다. 출생 시에 모친을, 4세 때 음악가였던 부친도 잃게되어 1946년 에센바흐 집안의 양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피아니스트였던 양모에게 음악의 초보를 배웠는데, 10세 때에 지휘자 인 요훔에게 재능을인정받아 그의 권유로. 함부르크에서 명교사 엘리자 한젠 여사를 사사하였다. 일찍이 13세로 스타인웨이 콩쿠르에 입상하였다.
그리고 16세 때아헨에 옳기고, 쾰른 음악원에서 H.슈미트 - 노이하우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졸업하던 해 1959년에 독일음악학교연맹 주최의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그 후 다시 함 부르크에서 한젠 여사를 사사하였고 동시에 바이올린과 지휘법을 배우고 21세 때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1962년에는 뮌헨 국제 콩쿠르에서 제1위 없는 제2위로 입상하고, 유럽 각지에 연주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1965년의 제2회 클라라 하스킬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더욱 이목을 집중시켰다.1967년에는 미국에도 데뷔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래 전후의 독일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하였고, 1973년 지휘자로서도 데뷔하여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초청되었다. 1980년부터는 취리히 톤할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고 있다.
에셴바흐는 반드시 기교파의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항상 작품에 대해 성실하고 예민하게 파고 들어가는 그 연주에서 청신한 감각이 상쾌하며, 로맨틱한 정감이 넘쳐 흐르고 있다. 데뷔 레코드인 슈만의 [어린이 정경](그라모폰) 외에 1960년대 후반에 녹음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그라모폰)은, 그러한 그의 작품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젊디젊은 서정이 표현된 아름다운 연주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의 에셴바흐는 그 성실한 음악성에다 깊이 작품의 내면에 파고드는 예민함으로 적극적인 표현을 가미하여, 더욱 정신적인 엄격함과 깊이를 더하고 있다. 그러한 이 시기의 그의 변화를 가장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베토벤의[하머클라비어](그라모폰)이었다.
여기서 그는 놀랄 만한 집중력으로써 이 대작을 일순의 이완도 없이 연주하고 있으며 더욱이 내성적인아름다운 정열과 노래가 넘치고 있다. 또 쇼팽의 [전주곡집](그라모폰)도 깊은 내면적인 노래와 서정을 음영도 아름답게 노래한 독특한 표현이 매우인상적인 것이었다.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카라얀과 협연한 베토벤의 [제1번], 헨체와 협연한 베토벤 [제3번], 오자와와 협연한 베토벤 [제5번(황제)(이상 그라모폰)의 3가지에서 각각 그의 개성이 훌륭히 발휘되어 있다.
최근 지휘와 솔로를 겸하고 녹음을 시작한 모차르트(에인절)에서는 이제까지 이상으로 섬세하게 닦여진 표현을 들려주고 있다. 그 밖에 실내악이나 리트 반주에도 뛰어난 연주가 많고,피셔-디스카우와 협연한 [슈만 가곡 전집] 전 3권(그라모폰)에서 로맨틱한 정열을 간직한 예민하고 유연한 표현으로 그의 자질이 훌륭하게 발휘되고 있다.
Christoph von Dohn nyi 도흐나니, 크리스토프 폰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는 헝가리의 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처음에는 뮌헨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는데,1948년부터 음악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1951년 뮌헨 시의 지휘자 검정 시험에 R.슈트라우스 상을 받고 합격하였다. 더욱이 미국에서 지내고있던 조부 밑에서 음악을 더욱 연마하였으며, 번스타인을 사사하였다. 1952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의 코레페티토르(후에 지휘자)가 되었고,1957년 약관 28세의 나이에 독일 최연소 음악 감독(GMD)으로서 뤼베크 오페라 극장에 영입되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카셀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
또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쾰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도 겸무하게 되었다. 1968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여 크게 실적을 올렸다. 1977년에 호르스트슈타인의 후임으로서 서독의 삼대 오페라 극장의 하나로 손꼽히는 함부르크 국립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65년 베를린에서 헨체의 오페라 [데어 융게로드(젊은 귀족)]와 1966년 잘츠부르크에서 [바쿠스의 무녀]를 초연하였다. 도흐나니는 1988년 현재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레코드는 빈 필하모니 를 지휘한 멘델스존의 [교향곡] 전5곡, 칸타타 [최초의 발푸르기스의 밤]이있다. 그 밖에 R.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발췌, 스트라빈스키의 [불새][페트루슈카], 베르크의 [룰루] 모음곡 등(이상 런던)이 근년의 녹음이다.
Claudio Abbado 아바도, 클라우디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에서 지휘, 피아노, 작곡을 배웠다. 이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 빈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를 배웠다. 1958년에 미국의 탱글우드에서 쿠세비츠키 상(賞)을 받았다. 1960년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린 갤러콘서트에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다. 1963년에 뉴욕에서 열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65년 8월 14일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데뷔했다. 그 때의 작품은 말러의 [교향곡 제2번]이었다. 1967년에 처음으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시즌 최초의 공연을 지휘했다. 작품은 벨레니의 오페라 [카풀레티와 몬테키]였고, 1968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를 지휘했다. 더욱 이해에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0년에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를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다. 이 작품은 그 뒤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하였다.
1971년에 빈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로 지명되었다. 이해 뮌헨 음악제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하였다.1972년에 베를린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첫날을 지휘하였다. 이해에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올림픽 기간 동안 뮌헨에서 스칼라 극장의 오케스트라와 코러스를 지휘하여 베르디의 [레퀴엠]과 오페라 [아이다]를 연주한 것도 1972년의 일이다.
1973년에 빈의 모차르트 협회에서 모차르트 메달을 그에게 주었다. 이해에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및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함께 미국을 연주 여행하였고, 빈 필하모니와 함께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도 연주 여행하였다. 이때가 아바도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더욱이 이 해에는 런던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4년에는 아바도로서는 최초의 모차르트의 오페라인 [피가로의 결혼]을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바도는 착착 그 활동의 무대를 넓혀 온 셈인데 그 활동 무대 확대 방식은 용의주도하였다.
이것은 레퍼토리의 선택 방식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까지(1981년 봄) 아바도는 이탈리아의 지휘자이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메카로 이름난 스칼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푸치니에 의해 대표되는 베르디 이후의, 일반적으로 베리스모 오페라라고 불리는 오페라를조심성 있게 피해 왔다. 한편으로 프로코피예프나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표시하고, 더욱 루이지 노노의 신작 초연을종종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아바도의, 굳이 말한다면 지성파(知性派)라고 할 수도 있는 지휘자로서의 본연의 자세가 떠오를 것이 틀림없다.
사실 아바도의 연주는 열기에 가득 찼다든가 또는 정열적이라든가 하는 형용이 걸맞지 않으며, 오히려 지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하겠다.그의 연주는 언제나 명쾌하고, 조금의 애매모호함도 없으며, 그 작품의 양식적인 아름다움을 뚜렷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휘자로서는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는 아바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마 그 정교하고 치밀함을 잃지 않으면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풍부한 표현일 것이다. 이제까지의 아바도는 문자 그대로의 수재 코스를 걸어 왔고 충분한 성과를 올렸다. 1989년 정식 상임 지휘자가 없는 빈 필하모니의 준상임 지휘자로 있었으며, 1989년 카라얀의 사망으로 그의 휘하였던 베를린 필의 제5대 음악 감독으로 취임해 세계적인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Claudio Simone 시모네, 클라우디오
이 탈리아의 파도바에서 태어났다. 파도바 음악원에서 카를로 체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프랑코 페라라에게 배웠다.1952년부터 1957년까지 {라 가제타 델 베네토} 신문의 음악 칼럼을 담당했으며, 1959년에 파도바에서 '이 솔리스티 베네티'를 창설, 지휘자에 취임했다.
이탈리아 북동부의 베네치아, 파도바 등 베네토 지방의 젊고 훌륭한 연주가들을 모아 만든 이 솔리스티 베네티는 로마에서 데뷔하여 성공을 거두었다.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무지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실내 오케스트라로서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휘자가 없는 이 무지치와는 대조적이며, 이 솔리스티 베네티의 개성은 지휘자인 시모네의 개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18세기 이탈리아 바로크의 기악용 작품, 특히 베네치아에서 활약한 비발디, 알비노니의 작품 발굴과 소개를 목적으로 결성했으나 현대 음악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부소티, 말리피에로 등이 이 단체를 위해 작품을 쓰고 있다.그러나 이 악단의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비발디이다. 타르티니의 연구로도 널리 알려진 훌륭한 학자이기도 한 시모네가 이탈리아 각지의 도서관이나 교회 등에 묻혀있는 악보의 발굴과 소개에 주력했고, 그 뿐만 아니라 원전의 연구 등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거나 기존의 작품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비교적 대담한 템포와 리듬, 프레징 등을 들려주고 있다.
시모네와 이 솔리스티 베네티는 비발디 탄생 3백 주년 기념이 되는 1978년까지 중요한 기악 작품의 거의 대부분에 대해 손을 댔다.수많은 최초의 녹음을 포함한 방대한 작품을 녹음했는데(에라토), 오페라 [오를란도 푸리오소]를 포함한 이들 작품은 어느 것이나현대에 있어 비발디의 대표적 연주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시모네는 이 솔리스티 베네티와의 활동과는 별도로, 1961년부터 1967년까지 베네치아,그 후에는 베로나 음악원에서 실내악 교수로 근무했으며, 1974년부터 파도바 음악원의 원장이 되어 후진들의 지도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더욱이 1968년부터는 파도바 음악원의 실내관현악단의 종신 지휘자와 예술 감독도 겸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단신으로 여러 곳에서 객원 지휘를 했고 레코딩도 했다. 이 솔리스티 베네티를 떠나 다른 악단의 지휘자로서의 활동도 계속했는데, 근래에 와서는 점차 그 횟수가 증가되고 있다. 도니체티에서 푸치니에 이르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음악에서도 호평을 얻고 있으며, 최근에는 클레멘티의 [교향곡 전집]이나로시니의 오페라 [알제의 이탈리아 여인]전곡(에라토) 등을 녹음, 호평을 받고 있다. 그는 1988년 현재 리스본 굴벤키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있다.
Clemens Krauss 크라우스, 클레멘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요한 살바토르 대공, 모친은 여배우 클레멘틴 크라우스이며, 외교관인 조부 밑에서 자랐다. 10세 때 빈 소년합창단에 입단했으며, 후에 빈 음악원에서 그레데니, 라인호르트, 호이베르거에게 배웠다.1912년 졸업과 동시에 브륀 국립 오페라 극장의 합창 지휘자가 되었고, 1913년부터 1914년까지 리가의 독일 극장의 지휘자를 맡았다.
그 다음에 뉘른베르크, 슈테텐, 그라츠 등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프란츠 샬크에게 발탁되어1922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지휘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빈 음악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24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과 귀르체니히 콘서트의 지휘자로영입되었는데, 1929년 다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 돌아가 1934년까지 그곳을 으로 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한 1929년에는 뉴욕 필하모닉과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미국에 데뷔 한 다음, 남아메리카에서도 널리 활동가게 되었다.1934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이 되고, 1937년에는 뮌헨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또 1939년부터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의 원장으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있다. 1945년 이후는 세번째 빈 필립 오페라 극장에 복귀하여 음악감독과 빈 필하모니의 지휘자를 겸하였고, 국제적으로도 널리 활동 무대를 확대시켰다.1954년 5월 크라우스는 연주 여행 도중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친교가 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권위자였으며,[아라벨라], [평화의 날],[카프리치오], [다나에의 사랑] 등의 오페라를 초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카프리치오]의 대본은 크라우느에 의해 쓰여졌다.
또 부인인 비오리카 울즈레아크도 슈트라우스의 연주에 정평있는 소프라노였다. 그는 또 그라츠의 오페라 극장 시절부터 콘서트 지휘자로서도 풍부한경력을 쌓았으며, 1942년에 빈 필하모니의 '뉴 이어 콘서트'를 시작한 일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크라우스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넓으며 오페라에서는 베르디와 푸치니를 잘 소화시켰고, 또 베르크의 [보체크] 등에도 뛰어난 해석을 보였다. 레코드는 R트라우스의 [살로메](런던),장미의 기사](독일 벨라폰) 등의 오페라와 빈 필하모니 와 공연한 일련의 교향시 [돈 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틸 오일렌슈피겔의유쾌한 장란] [영웅의 생애] [가정 교향곡] 등이 모두 귀중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모두 런던). 한편, 요한 슈트라우스 및 그 일족의 음악에서도뛰어난 연주가 많고, 앞에서 말한 뉴 이어 콘서트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소품(런던)의 연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빈 필하모니와공연한 희가극인 [박쥐]와 [집시 남작](런던)도 호연으로서 정평이 있다.
Colin Davis 데이비스, 콜린
영국의 서리 주의 웨이브리지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왕립음악원(RCM)에서 클라리넷을 배우면 근위 기병대의 밴드맨을 맡고 있었다.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했기 때문에 RCM의 지휘과로의 편입은 하지 못했으나, RCM의 학생에 의해 결성된 칼머 관현악단을 지휘하였다.
이어서 첼시 오페라 그룹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하였는데, 이것이 식자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했기 때문에오페라 극장의 연습 교사가 되는 것을 거절당한 데이비스는 케임브리지에서 학생의 오케스트라와 부근의 합창단을 지휘했다.
1957년 BBC 스코티시 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 초청받게 되어 본격적인 지휘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다음해인 1958년 새들러즈 웰즈 오페라(현재 잉글리시내셔널 오페라)에 데뷔하여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도피]를 지휘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다. 1959년 새들러즈 웰즈 오페라의 전속 지휘자로 초청되었고, 10월에는 로열 페스티발 홀에서 [돈 조반니]의 연주회 형식 상연을 지휘하기로 되어있었던 거장 클렘페러가 급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그 대신으로 제일 유력한 후보로 지명된 데이비스는, 겨우 이틀 전에 통고를 받았지만 지휘를 참으로 훌륭하게 해냈을뿐만 아니라 이례적인 흥분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비첨 이래의 최대의 재능'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1960년 데이비스는 병상에 누워 있던 비첨의 요청으로 글라인드본 오페라에서 [마적]을 지휘하였는데, 이 또한 호평을 받게 되었다. 다음해인 1961년에는새들러즈 웰즈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승진하였고, 1965년까지 그 직위에 재임했다. 그는 오페라뿐만 아닉라 콘서트 지휘자로서도 활약하였다. 1967년 1월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데뷔하였는데, 브리튼의 [피터그라임즈]를 지휘하여 절찬을 받았다. 이 해 9월 BBC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1971년까지 역임하였다. 한편 1960년 로열 발레를 지휘하였으며([라발스]와 [요정의 입마춤]), 코벤트가든에도 데뷔하였다.
1965년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하여 오페라 데뷔도 하였다. 코벤트가든에서는 베를리오즈의 매머드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 전곡(1965)을 비롯하여,티펫의 [한여름의 결혼](1970)의 재연과 [더 놋 가든(놋풍의 정원)]의 세계 초연을 지휘하여 주목을 받았다. 1971년 가을, 데이비스는 솔티의 후임으로서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72년에는 보스턴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고, 콘서트 지휘자로서도 활약을 계속하고 있는데, 1988년 현재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으로 수석 지휘자로 있다.
1979년 가을, 로열 오페라단을 이끌고 한국에 와서 모차르트의 [마적]푸치니의 [토스카] 브리튼의 [피터 그라임즈]를 지휘하였다. 1980년 영국 악계에 대한 공로로 KBE(경)에 서위되었다. 영국인에 따르면 데이비스는 '지휘대 위의 글래머 보이'가 아니다. 그의 지휘에서는 간결하고 소박한 꾸밈이 없는 음악이 분출되고 있다. 그 자신도 지휘자의 나르시시즘을 싫어하여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것을 극구 회피한다. 조용하고 논리적이지만 "뱃속에 열정을 품고 있는 그 수가 적은 지휘자의 한 사람"(메트로폴리탄 데뷔 때의 {타임}지 총평)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뉴 그로브}(제6판)에서는 안드루 포터가 다음과 같은 데이비스 평을 말하고 있다. "데이비스는 모든 면에서 만능인 뛰어난 지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강력한 열중도를 가진 지휘자이고, 여기서 그의 강점과 약점의 양자가 생겨난다. 모차르트, 베를리오즈,스트라빈스키 및 티펫은 그로하여금 가장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작곡가이며, 이들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에 있어서는 직관력과 기교성의 묘기가 항상 유합되어 있다." 데이비스는 베를리오즈의 스페셜리스트로서 자타가 모두 인정하는 현역 최고의 베를리오즈 지휘자로서 알려져 있다.
베를리오즈의 오페라나 성악이 들어 있는 교향적 작품의 거의 전부를 녹음하고 있다. 특히 [벤베누토 첼리니] 전곡 음반(4매조)과 [트로이 사람들]전곡집(5매조)은 레코드사에 남는 획기적인 명반이다. 모차르트 오페라도 거의 전부 녹음하고 있는데, [황제 티투스의 자비]나 [코시 판 투테] 등이 우수 음반이라 하겠다. 데이비스가 초연한 티펫의 [더 놋 가든] 전곡 음반은 명반으로서 정평이 있으며, 콘서트 지휘로서는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이상 모두 필립스)에서 데이비스의 웅장한 저력을 들을수가 있다. 카발레의 잘못을 점잖게 타이르다 영국의 로열 오페라단은 합창단, 오케스트라, 무대 장치 그리고 소도구까지 일체 갖고왔기 때문에 우리나 서는 가장 완전한 공연을 가진 최초의 오페라단이다.
[토스카]를 지휘할 때 콜린 데이비스는 흰 와이셔츠 바람으로 지휘봉을 든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모차르트를 닮았는지200여년 전의 이 천재 작곡가가 지금 막 되살아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키가 훤칠하며 윗도리가 운동가처럼 발달한 지휘자 데이비스가 지휘봉을 힘있게 휘두르는 모습은 흡사 하늘하늘한 흰 펜싱 옷차림으로 칼을 부리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는 틀림없이 펜싱도 잘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마침 [토스카]로 분장한 소프라노 몬세라트 카발레가 노래를 하고 있을 때, 지휘자 콜린 데이비스는 지휘봉으로 보면대를 두드리며 노래와 오케스트라를 멎게 하는가 하면 소프라노에게 다시 불러달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그런데 그 말소리는 싸움터에서의 지휘관인 장군의 호령처럼 소리는 크지만 부드러운 음악적인 말소리로 들렸다.
영국의 신사도가 몸과 말에 배어 있었다. 사나운 토느카니니나 라이너와 같은 지휘자라면 신경질을 부리고 욕설이라도 퍼부었을 텐데 데이비tm는 점잖게 타일렀다. 소프라노 카발레는 목청을 가다듬어 다시 노래를 했다. 역량 있는 유명한 이 성악가는 지휘자가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었던지,노래가 끝났을 때 데이비스는 훌륭했다고 하며 박수를 쳐 주기까지 했다. 얼마나 멋이 있으며 휴머니티가 풍기는 지휘자인가! 자기의 지휘를 잘 따랐다는 것보다는 정신을 가다듬으면 더 훌륭한 예술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찬양하는 데이비스의 슬기가 놀라왔다.
이런 정경도 모두 아름답지만 한 막이 끝나자, 무대에서 데이비스의 지휘에 경건하게 따르던 카발레가 쏜살같이 내려와서 지휘대로 다가와 데이비스에게 여성적인 애교라고도 할 수 있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데이비스는 다시 고쳐했더니 더 뛰어난 솜씨를 나타내지 않았느냐고 하며맞장구를 쳤다.
Constant Lambert 램버트, 콘스턴트
작곡가이기도 하며,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왕립음악대학에서 모리스와 본 - 월리엄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학생 시절부터 그 재능을 러시아발레단의 주재자 디아길레프에게 인징받게 되었으며, 발레 [로미오와 줄리에트]를 작곡했는데, 1926년 5월 4일 니진스키의 안무로 몬테카를로에서초연되었다.
그리고 이 발레단과의 연계가 그를 발레 작곡가, 지휘자로서의 생애를 결정하게 되었다.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영국의 카마르고 협회,1931년부터 1947년까지 새들러즈 웰즈(현재 로열 발레단)의 음악 감독을 맡았고 드 발루아 여사와 아슈톤을 도와 동 발레단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사이[포모나](1930), [리오그란데](1932), [호로스코프](1938), [티레지아](1951)를 작곡하였다. 편곡한 것은 퍼셀의 작품에 의한 [오베론의 결혼],마이어베어의 작품에 의한[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샤브리에의 작품에 의한 [바라빌레], 오베르에 의한[레 랑데부] 등이 있는데, 오늘날에도 자주연주되는 명작을 편곡하여 스스로도그 지휘를 하였다.
그의 음악 특징은 교묘한 대위법의 취급과 재즈의 어법을 채용한 점에 있고, 그 근대성은 지휘해석에도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레코드는 적어 리스트(야코브 편곡)의 [단테 소나타]와 자작의 [호로스코프][리오그란데]가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음반으로 나왔을 정도다. 그는 비평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음악서도 저술했는데, 특히 1933년에 출판된 『Music Ho!』는 대표작이다.
Constantin Silvestri 실베스트리, 콘스탄틴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부카레스트)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부쿠레슈티 음악원에 재학중이던 11세 때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은 193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16세 때 음악원을 졸업하면서 지휘자로서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지휘자로 전향한 뒤에는 부쿠레슈티의 국럽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 수업을 쌓았고, 1945년에 부쿠레슈티 국립 오페라 극장과 부쿠레슈티 필하모니의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1955년부터 부쿠레슈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이 되었는데, 1957년 영국과 프랑스로 연주 여행을 하면서처음으로 실베스트리의 명성이 서유럽으로까지 알려졌다.
1958년에는 에네스쿠의 오페라 [에디프스]를 25년만에 부쿠레슈티의 에네스쿠 음악제에서 부활 연주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실베스트리의 명성이 서유럽으로 더욱 번져 나갔고, 1961년에는 영국의 본머스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초빙되었는데, 이 오케스트라를 맡으면서 급속하게 제1급으로 끌어올려 주목을 끌었다.
그의 음악은 그때그때 느낀 그대로의즉흥성을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그만큼 개성이 강한 연주를 들려 주었다고 하겠다. 레코드는 실베스트리의 이름을 널리 알린 드보르자크의[신세계 교향곡]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 등이 있는데, 대체로 슬라브 계통의 작품이 좋은 연주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Crist bal Halfft 할프테르, 크리스토발
에스파냐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1951년 마드리드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 알렉상드루 탕스망을 사사하였다. 1952년부터는 에스파냐 방송의 일을 보는 한편,팔랴 관현악단의 지휘자를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하였고, 마드리드 음악원의 작곡과 강사를 1962년부터 1966년까지 하기도 했다. 에스파냐 음악의 전통 속에서 현대 음악의 수법을 도입한 전위적 작풍을 가진 작곡가로서, 지휘자로서보다는 작곡가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레코드는 마누엘 데팔랴 관현악단을 지휘한 사인스 데 라 마사의 독주에 의한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협주곡] [어떤 귀한 신사를 위한 환상곡](RCA) 등이 다.
이 레코드는 로드리고가 작품을 헌정하고 사인스 데 라 마사가 만년에 겨우 녹음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스파냐에는 할프테르라는 이름의 저명한 지휘자가 둘 있다. 그 하나는 작곡가로 1938대에 멕시코로 이주한 루돌프 할프테르(1900∼)와, 그의 동생 에르네스트 할프테르(1905∼)인데 이는 팔랴 문하생으로서 유능한 인재였다. 모노럴 시대에 약간의 레코드가 소개된 외에 작곡가로서는 더욱 폭 넓은 활동을 하여 예페스에게 헌정한 [기타 협주곡](그라모폰)이 레코드화되었다. 크리스토발 할프테르는 바로 이 두 형제의 조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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