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페스트
알베르 카뮈, 『 페스트 』(민음사, 2011)
이강문
책의 표지에는 <절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드바르트 뭉크의 작품이 그려져 있다. 작품
명은 <죽음의 침대>. 뭉크는 ‘불안과 두려움을 그린 화가’ 였다.
81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인간 내면에 자리한 불안과 공포, 두려움을 주제로 인간의 어두운 감정에 집착했다. 이런 배경에는 그의
불행했던 인생사가 자리한다. 그는 평생 죽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는데, 이유는 가족 모두가 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5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14살 때 누이 소피에 역시 결핵에 걸려 죽었다. 이후 아버지와 동생 안드레아스가 죽음을 맞았고, 여동생 라우라는
정신병을 앓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자신도 일찍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환각, 피해망상, 신경과민증을 앓기도 했고, 정신분열 진단을 받고 수개월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을 화가의 인생 이력이 안쓰럽다.
<죽음의 침대>는 음울하다. 왼쪽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고인이 침대에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가족이나 친구로 여겨지는 다섯 명이 손을 모은 채 체념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런데 이들조차도 낯빛이
좋지 못하다. 방안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뭉크
자신의 경험이 이 한 장의 그림에 녹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페스트>에서 그리는 죽음과 비교할 때, <죽음의 침대>가 그리는 죽음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적어도 그림 속 고인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을 맞이했을 테니 말이다. 카뮈가 그린 <페스트>는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장례식의 특징을 ‘신속성’이라 묘사한다. 전염병의
특성 상, 일단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 가족의 자리는 없다. 또한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것 사치일 뿐이다. 모든 절차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유로 생략하고, 시신은 신속하게 치워진다. 더욱이 전염병으로 인해 도시 폐쇄의 시간이
지속될수록, 산 사람의 생존을 위해 장례식은 한 밤중에 눈에 띄지 않도록 신속하게 치러진다.
실제로 지난 사스 바이러스나 메르스가 발병했을 때, 감염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피해자가 아닌 보균자로 낙인이 찍혔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장례식 역시 ‘보건 위생 상’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신속하게 정리되었다. 전염병으로 하루에 수백 명씩 죽어 나갈 때, 우리의 감각은 무뎌 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내팽개쳐지는 극단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카뮈는 전염병의 팬데믹을 실제로 경험해보지는 않았다. 다만 카뮈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인간의 삶 속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전쟁을, 질병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문학비평가들은
평가한다. 페스트는 ‘전쟁’을
내면화한 카뮈의 상징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마치 전염병의 팬데믹을 경험한 사람처럼 페스트를
대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 모습은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으며, 마치 인간은 하나도 발전하지 않은 채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는 듯 하여 읽는 내내 뒷골이 서늘했다.
부조리한 질병 앞에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인 양 도망치려는
사람, 질병을 신의 결정으로 여기고 순응하는 사람, 어찌되었든
생명을 살려보려고 저항하는 사람, 인생의 불행 속에서 동질감을 느끼며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등, 저마다 생명의 위협 앞에 제 각각의 이유로 반응한다. 소설은
독자에게 묻는다. 인생의 부조리한 “악에 대면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426)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329). 여행객으로 도시에 들어왔다가
페스트 때문에 발이 묶인 타루의 말이다. 이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이며,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의지의 산물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다. 그러니 인생은
모두에게 피곤할 뿐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페스트를 지니고 산다. 방심하여 병독을 옮길 것인지, 아니며 ‘정직한 자’로 살아갈 것인지 그 피곤한 일 가운데 내몰린 우리 인생
역시 도시에 고립된 환자이다. 카뮈는 이 일을 부조리함에 대한 반항으로 풀고자 하고, 결국 그러한 반항으로 모아진 힘의 열매인지, 어느 날 갑자기 페스트의
확산은 멈추게 된다. 저자는 인생의 모순과 부조리함의 원인을 초월자의 뜻(페스트를 하나님의 징벌로 여긴다)이라 여기고, 이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반응은 반항이라고 말한다. 1, 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함 앞에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새로운 윤리를 찾는 시대적 요청 앞에 실존주의 문학가인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이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 안의 부조리함에 대한 저항이 올바른 방향의 저항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부조리에
대한 반응 중 하나일 수는 있겠으나, 합리적 반응인지에 대해서는 글쎄,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