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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직자 |
①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줌 | ||
2. 교육자 |
①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 ||
3. 문학자 |
①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김 | ||
4. 사상가 |
①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킴 | ||
5. 생활인 |
① 예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함 |
연 도 |
나 이 |
내 용 |
국내외 사건 |
1501 |
1세 |
연산군 7년 예안현 온계리 (현재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모친 박씨가 공자의 태몽을 꾸고 잉태했다하여 지금도 온혜동 노송정 생가에는 성임문과 태실이 보존되어 있음 |
동국여지승람 수정 |
1502 |
2세 |
생후 7개월만에 부친 찬성공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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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 |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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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 경연을 폐지함 |
1506 |
6세 |
편모 슬하에서 농사와 길쌈을 도와가면서 6세부터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비롯하여 동몽선습,명심보감,소학 등을 배움 |
사간원을 폐함(4월), 대제학 폐지(8월), 연산군 폐위, 중종반정(9월), 티무르왕조 멸망 |
1509 |
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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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간행(9월) |
1510 |
1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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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 발생(4월) |
1511 |
1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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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등용(3월), 홍문관에서 천하여지도를 올림(8월), 삼강행실도 반포(10월) |
1512 |
12세 |
숙부인 송재공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움. 이 무렵 이마가 유난히 넓다하여 광상아라는 애칭으로 불림 |
일본사신과 임신조약 체결 |
1514 |
1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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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재건을 금함(3월) |
1515 |
15세 |
게를 보고 부석 천사자유가(負石穿沙自由家) 등의 시를 지음 |
조광조가 물러남(11월) |
1516 |
1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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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도감 설치(1월), 김안국의 오륜행실과 언해여씨향약 간행(6월) |
1517 |
1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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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을 한글로 번역 간행 |
1518 |
18세 |
露草夭夭繞水涯 라는 시를 지음 |
이륜행실도 간행(11월) |
1519 |
19세 |
獨愛林萬卷書 등의 대시인을 방불케하는 철학적인 시를 지음 |
선량과 설치, 인재등용(4월), 조광조 대사헌이 됨(5월), 조광조 유배, 사약을 받음. 을묘사화 |
1520 |
20세 |
주역을 탐독, 침식을 잊어버리다시피 함. 이 때 병을 얻어 평생 동안 고생함 |
비변사 다시 설치(5월) |
1521 |
21세 |
김해 허씨와 결혼 |
마젤란 필리핀에서 살해됨 |
1523 |
23세 |
6월에 장자 준 출생. 이해에 처음으로 상경하여 태학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구함 |
소학언해 편찬(10월) |
1527 |
27세 |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2위로 합격, 10월에 차자 채 출생. 동년 허씨 부인 사망 |
최세진 훈몽자회를 지어올림(4월) |
1528 |
28세 |
진사회시에 2등 합격 |
명나라 왕수인(왕양명) 사망 |
1530 |
30세 |
권전의 질녀인 안동 권씨와 재혼 |
개성에 정몽주의 유허비 건립 |
1532 |
32세 |
문과 별시 합격 |
최세진 여훈을 한글 번역 |
1533 |
33세 |
반궁에 유학. 경상도 향시 합격 |
복성군 사약을 받아 죽음 |
1534 |
34세 |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 검열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 경연시독관 등의 요직을 겸임함.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까지 순탄한 관료 생활을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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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 |
35세 |
호송관이 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호송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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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 |
36세 |
선무랑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됨 |
자격루 완성, 최세진의 운회옥편 간행, 칼뱅의 종교개혁 |
1537 |
37세 |
모친 박씨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남 |
윤원로, 원형 형제 귀양, 김안로 사약을 받음 |
1539 |
39세 |
3년상을 마치고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수찬 지제교로 승진되고 경연검토관을 겸함 |
인도 시크교 교주 나나크 사망 |
1543 |
43세 |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함 그후 종친부 전섬, 조봉대부, 세자시강원 필선, 조산대부, 사간원 사간, 성균관 사성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향함, 11월 다시 예빈사 부정으로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움, 포르투갈인이 일본 다네가섬에서 신무기(총)을 전함 |
1544 |
44세 |
10월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하여 명나라 예부관원을 크게 감탄케 함 |
사량진왜란 |
1545 |
45세 |
7월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왜인들이 강화하고자 비는 것을 허락하자는 소를 올림 |
을사사화, 조광조 복관 |
1546 |
46세 |
교서관 교리와 승문원 교리,예빈사정 등의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여 양진암이라는 초당을 짓고 학문 연구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침. 7월에 권씨부인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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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 |
47세 |
7월 안동부사로 제수되었으나 사임, 다시 홍문관 응교로 제수되어 마지 못해 상경하여 사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정미사화, 대마도주와 정미약조 체결 |
1548 |
48세 |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취임(9개월). 많은 치적을 남기고 10월 풍기군수로 전임(1년 2개월). 단양팔경은 퇴계가 군수로 재임시인 이 때에 선정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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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 |
49세 |
관내 백운동에 있는 서원의 기틀을 세우고자 상감께 상소하여 편액과 서적을 청했던 바 모두 윤허되어 소수서원이라 개칭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됨. 9월에 신병으로 사퇴하고 귀향함. 신병을 이유로 감사에게 세 차례나 사직원을 제출한 다음, 회답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서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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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 |
50세 |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를 가르침. 각지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듬 |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의 편액 하사됨(최초의 사액서원,2월), 명에서 양명학 들어옴 |
1553 |
53세 |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정지운의 천명도를 개정하는 등 학문에 전념함 |
경복궁이 불탐(9월), 이언적 사망 |
1554 |
54세 |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씀. 중수경복궁기를 지어 올림 |
경복궁 중창(9월), 영천에 정몽주 서원 사액(임고서원) |
1555 |
55세 |
수많은 관직을 제수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하였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하고 향리로 내려옴. 이때 상호군과 검지중추부사를 제수함 |
을묘왜변(5월) |
1556 |
56세 |
도산에서 주자서절요를 편찬 완성함. 12월 향약을 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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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 |
57세 |
도산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를 저술함 |
중국의 포르투갈인 마카오 거주 허가 |
1559 |
59세 |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는 소장을 올리고 송계원명리학통록을 저술함 |
임꺽정의 난(3월~1562) |
1560 |
60세 |
고봉 기대승에게 답하는 편지형식으로 철학적 대명제인 4단7정론을 저술함. 이해에 도산서당이 완공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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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 |
61세 |
3월에 절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산수간을 주유하면서 도산기 같은 명문을 남김 |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지음 |
1564 |
64세 |
2월에 무이구곡도의 발을 씀, 4월에 제자들과 청량산에서 노닐음. 정암 조선생의 행장을 지음 |
미켈란제로 사망 |
1566 |
66세 |
1566 공조판서와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성균관 등 여러 관직을 제수하며 왕으로부터 특별 소명이 내려져 부득이 상경하다가 중도에 병을 얻어 다시 사퇴하고 귀향하니, 왕은 실망과 한탄을 하며, 유신들과 화공들을 도산으로 내려보내 도산기 같은 도산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애용함. 심경후론을 지음. 10월에 회재선생행장을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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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 |
67세 |
임금의 교지를 받고 상경한 후 명종이 승하하자 대행왕의 행장을 지음.역동서원을 새로 건축함 |
포르투갈 선박 일본 나가사키에 입항, 일본과 교류 시작 |
1568 |
68세 |
선조 원년 의정부 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하여 양관 대제학을 겸임함. 재임 중 무진육조소를 지어 왕에게 올림. 12월 성학십도라는 제왕학을 열장의 그림으로 그려 올리자 왕은 병풍을 만들어 대내에서 애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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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 |
70세 |
제자들에게 심경과 역학계몽을 강의하고 7월 역동서원에 가서 심경을 강의하고 8월 역동서원이 낙성되어 참석함. 기명언에게 심성정도를 논하고 11월 격물치지설을 개정하다가 신병이 심상치 않음을 예지하고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중인 장자를 사직귀가케하여 장사준비를 갖추게 하여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는 명문과 자명까지 몸소 써놓고 이달 8일 한서암에서 앉아 있는대로 고요히 세상을 떠남. 임종직전 시생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분부를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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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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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예안 건지산 남쪽에 장사지냄 |
레판토 해전(지중해를 제압하고 있던 터키가 키프로스섬을 빼앗자, 서지중해 지역으로 팽창해 오는 것을 두려워한 신성동맹(神聖同盟) 함대가 터키 함대를 격파한 해전) |
1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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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하루에 위패를 이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거행함 |
이이와 성혼 사단칠정론에 관한 서신 왕래(~1578) |
1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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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사림의 공론으로 봄에 서원을 도산 남쪽에 세우기로하여 여름에 서원이 세워지고 현판이 하사됨 |
일본 무로마치 막부 멸망 |
1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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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올림.여강서원에서도 위패를 받들어 모시고 제사를 지냄.12월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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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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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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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1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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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 지석(죽은 사람의 이름, 나고 죽은 날, 행적 등을 적어서 무덤 앞에 묻는 돌)을 묻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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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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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문집이 이루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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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료와 공직자로서의 모습
퇴계는 32세 때 문과의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34세 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이 때 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는 그의 급제 소식을 듣고, "지금 인망있는 사람 중에 이 사람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으니 나라의 복이고 우리 고을의 경사이다."라 하여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후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에 올랐는데, 당시에 권력의 실세인 김안로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켜 권력자를 찾아가 만나지 않았다. 이에 김안로는 앙심을 품고 그의 승진을 가로막아 첫 출발에서 시련을 맞아야 했다.
이듬해 호송관으로 왜인을 동래까지 보내주었으며, 36세 때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에 올랐다. 39세부터 44세까지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이 무렵 경연에 나가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에게 식사 때 반찬가지수를 줄일 것과 죄인을 사면하는 일을 삼갈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임금의 덕을 닦도록 정성껏 간언하였다.또 왕명을 받아 어사로 나가 충청도 지역을 돌아보고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어사로 강원도 지역의 재해를 시찰하였다.
44세 때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지냈으나 이 시기에 병으로 못 나가는 일이 잦았으며, 중종이 승하하자 중국에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였는데 두 표문을 지어 중국 예부관원이 표문의 문장과 필법을 칭찬하였다 한다. 그 당시 왜구의 사량진 침입 이후 정부는 대마도와 교류를 단절하였는데, 왜인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교류를 요청하자 그는 왜인의 사신을 물리치지 말고 일본과 강화를 허가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그는 대마도주에 보내는 답서와 일본군 장군에게 보내는 답서 등을 지었으며, 외교문제를 원칙과 현실의 조화로서 해결하려는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을사사화가 일어나 권력을 잡고 있던 간신 이기의 상소로 한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죄없는 사람을 벌 줄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 곧 복직되었다.
48세, 49세 사이의 2년은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외직에 나가 있었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다스리는 일이 말고 간결하였으며 아전이나 백성들을 모두 편안하게 해주었다.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그는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이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편액과 서적을 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서원이 융성하게 되었다. 그후 감사에게 세 번 사표를 내었으나 회답이 없자 해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관직에서 파직 삭탈당하였다.
52세 때 다시 조정에 나와 홍문관 교리로 경연시독관을 겸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의를 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사학의 선생과 학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학풍이 퇴락함을 지적하고 예의를 바로잡도록 타일렀는데 무너진 학풍을 회복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당시 명종이 21세가 되자 수렴청정하고 있는 대왕대비에게 임금이 친정하도록 정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지어 올렸다. 또한 여러 제문을 지었으며 새로 중수한 경복궁의 전각과 편액을 쓰는 등 당시 국가의 중요문서와 궁중의 기록이나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55세 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여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58세 때 임금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대사성으로 나갔다. 59세 때 휴가를 받아 귀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임금의 재촉으로 67세 때 서울에 다시 올라왔다. 며칠 뒤 명종이 승하하여 명종의 행장을 지었다. 예조판서에 임명되자 거듭 사표를 올려 두 달 만에 다시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68세 여름 또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이때 임금은 퇴계를 깊이 신임하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의 중책을 겸임시켰지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였으며, 임금은 휴가를 내리고 내의원을 보내어 문병하며 음식물을 하사함으로써 세심하게 공경하였다. 이 때 새로 등극한 17세의 선조임금에게 무진육조소를 지어 올렸다. 이것은 정치의 기본원리와 당면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경연에서 임금의 도리를 진언하고, 선조를 위하여 자신의 평생 학문을 응축하여 성인이 되기위한 수양의 원리와 방법을 집약한 성학십도를 올렸으며, 선조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69세 때 판중추부사로서 재상들과 문소전의례와 법도를 고증한 일이 조정에서 활동한 마지막 사업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임금은 남길 말을 요구하였고, 이에 그는"태평한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는 옛말을 인용하여, 나라는 항상 위난에 방비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은 겸허하여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성학십도에 관한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고, 임금의 요청에 따라 이응경과 기대승을 천거하고 돌아갔다.
69세 때 이조판서,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퇴하고 판중추부사로 옮겼다. 귀향한 이후로도 모든 벼슬을 벗고 은퇴하기를 거듭 상소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강직한 퇴계는 실제로 부임하지 않는 벼슬을 사양하였고, 퇴계를 아끼고 공경하는 임금은 그의 벼슬을 거둘 수가 없었다.
70세 겨울 그의 병이 위중하자 임금은 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게 하였지만 도착하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조정에 올라가자 임금은 애통해하며 영의정으로 증직을 명하였고,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는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을 사퇴하였다. 30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근무를 하였다. 질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벼슬보다 학문과 교육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물러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일단 직책을 얻으면 책임을 다하고 소신껏 일을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행한 일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무를 겸비한 국방책, 침범한 왜적을 용서하고 수교를 해야 한다는 외교정책인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 왕도를 깨우친 무진육조소, 파면을 당하면서도 궁중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진언, 성학십도를 올려 나라의 교학을 개혁한 일, 군수로 나가서는 수리시설을 하여 농업을 진흥시켰고, 단양에서는 팔경을 지정하여 자연을 가꾸었으며,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수를 기록하여 치산과 등산하는 법도 등을 남겼다. 충청, 경기, 강원에 어사로 나가서는 탐관오리를 잡아내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중국 사신을 맞아서는 행패를 막았고,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시켰다. 궁궐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문서 작성 등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참고도서 : 1)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서울대학교 출판부 2)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학지원
2. 학자 및 사상가로서의 모습
1) 뛰어난 재질
연보에 따르면 어릴 때 논어 등을 그에게 가르쳐준 그의 숙부 송재공 우는 그의 이해력이 뛰어남에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던 중에 퇴계는 이(理)자를 가리키며 그 뜻을 '무릇 일의 옳음'이라고 스스로 깨달아 말하였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의 숙부는 그를 가리켜 "가문을 유지할 사람은 이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자라서 향시를 비롯한 대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에 수석 아니면 차석의 성적을 올린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재질이 우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학(성균관)에서 함께 생활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 1510~1560)가 그를 가리켜 "영남의 수재"라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2) 열성적인 학구열
퇴계는 14세 때부터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할 정도"로 학문을 좋아하였고, 그것이 20세 경에는 "침식을 거의 잊어 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길 정도여서 마침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히던 몸이 야위는 일종의 소화불량증을 일으키게 되었다. 심지어 안질로 오랫동안 고생할 경우에도 독서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제자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군수직을 버리고 귀향할 때에도 그의 짐꾸러미는 오직 몇 상자의 책뿐이었다고 한다. 59세 때에도 산림에 들어가 30여년의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고봉 기대승과의 편지를 통한 토론은 죽기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보면 초년에서 말년에 이르도록 그의 학구열은 변함이 없었다. 학구열에 불타는 진지한 학자의 모습, 이것이 퇴계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모습이다.
3) 겸허한 학문 태도
퇴계의 학문 태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봉 기대승과 나누던 "사단 칠정에 관한 논변"이다. 그 당시는 장유유서의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지배하던 때였으므로 사대부들은 학문을 하는데도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일방적인 전수만을 강조하던 형편이었다. 따라서 선배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는 자유로운 토론이 어려운 풍토였다. 이러한 풍토를 깬 것이 사단 칠정 논변이다. 선배의 이론에 반기를 든 고봉도 비범하지만, 그것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인 퇴계의 태도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8년 동안의 논변이 진행되는 동안에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논변이 시작될 무렵 퇴계는 대사성까지 지낸 59세의 대가였던 데 비하여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학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장 8년 동안의 논변이 가능하였고 그것이 드디어 당시의 정체된 학문 풍토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켜 우리 나라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퇴계의 겸허한 학문태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그의 제자는 "선생은 겸허로써 덕을 삼아 털끝만큼도 교만하여 잘난 체 하는 마음이 없었다."라고 평하였다.
참고도서 : '퇴계 선집' / 윤사순 역주 / 현암사
3. 교육자로서의 모습
1) 교육관
오늘날의 국립대학총장에 비견되는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퇴계는 그의 교육관을 밝힌 적이 있다.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의 본거이다......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여지도록 하라. 서로 채찍질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웃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손제(遜悌)를 행함으로써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하라." 요컨대 올바른 선비를 길러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 퇴계가 지향했던 교육자상이었다.
2) 학문의 방법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다만 부지런하고 수고스럽게 하며 독실하게 하는데 있으니, 이렇게 하여 중단됨이 없으면 입지가 날로 강해지고 학업이 날로 넓어질 것이다."라고 타일러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독서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그저 익숙하게 읽는 것 뿐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은 알았으나 만약 익숙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곧 잊어 버리게 되어 마음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은 틀림없다. 이미 읽고 난 뒤에 또 거기에 자세하고 익숙해질 공부를 더한 뒤라야 비로소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며 또 흐믓한 맛도 있을 것이다."라 하여 겉만 핥고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며, 익숙하게 하여 깊이 체득하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3) 교육의 방법
퇴계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맨 먼저 '소학'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 '심경', '논어', '맹자' 및 '주자서'를 가르친 다음 모든 경서를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처음 배움에 나아가는 제자가 읽어야할 고전으로서 특히 '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소학'은 체와 용을 함께 갖추었고, '근사록'은 의리의 정밀한 것은 비록 상세하나 학자들을 깨우치고 감동시켜 분발하게 하는 것이 부족한 듯하다. 초학자가 처음 시작하는 데는 '심경'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고 하여'소학'을 넘어서 처음 읽을 책으로 '심경'을 제시하고 '근사록'을 한 단계 더 높은 단계의 연구서로 제시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주자전서'를 통해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학문이 심화되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을 소개하였다. "'주자전서'를 읽을 수 있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이미 그 방법을 알 게 되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 떨치고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숙한 뒤에 사서를 다시 보면 성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서 비로소 자기에게 쓰이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주의 학문을 한결같이 표준으로 삼아서 지행병진함을 가르쳤다.
4) 다산 정약용이 퇴계의 교육을 평한 글
"일일이 실행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든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에 이르게 하였다.중도에 폐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
4. 문학자 및 서예가로서의 모습
1) 퇴계는 당시까지 가장 많은 저술을 한 분이다. 전문적 저서는 별도로 하더라도 일기는 손수 쓴 것 4년분 외에 이름이 전하는 것만도 9종이 된다. 시는 제목을 아는 것이 3560수(퇴계의 시는 '도산전서' 중에 실린 것이 2천여편을 넘칠만큼 풍성하여 종전의 학자 문집 중에서 보기 어려웠을 뿐아니라, 전문작가의 시집 중에서도 보기 드믄 존재였다.), 편지는 3천 수 백편이 문집에 전하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긴 글이 문집에 298편 실려 있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만 퇴계의 저술을 다 읽은 이는 없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여 읽기도 힘들지만 아직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일기와 한글 편지는 거의 행방을 알 수 없고 그의 수학에 관한 글과 '계몽전의'는 어려워서 잘 해득하지 못한다.
2) 퇴계는 早年부터 終年까지 사이에 중국문단의 명시인들의 시의 영향을 받았다. 곧 도연명·두보·한유·유종지·백락천·유우석·구양수·소동파·소옹·주희 등의 시를 읽고, 次韻·用韻·和韻했다는 것은 문집 도처에 보인다.그 중에도 陶·杜·歐·蘇·朱의 시를 가장 사랑하였다. 초년엔 陶·杜詩를 중년엔 蘇詩를 만년엔 朱·邵詩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陶杜朱詩를 즐겨 읽고 인간서정을 승화시켰다. 퇴계의 제자 문봉 정유일은 "선생이 시를 좋아하되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만년엔 주자의 시를 더욱 즐겨 읽었다"고 하였다.
3) 퇴계는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하게 하였으며,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참고도서 :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학지원
5. 생활인으로서의 모습
1) 합리성의 존중
성호 이익은 퇴계의 예는 예의 지침이며 상례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일인자라 받들고 정리해서 예설유편을 엮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 예법이 여자를 낮추어 죽은 아내를 망실(亡室)이라 한 것을 고실(故室)로 바로 잡았고, 계모를 홀대한 예법을 버리고 아들에게 적모(嫡母-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말)상을 치른 후 산소 아래서 시묘도 살게 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조카의 아내)를 말려서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했고, 상중에 병든 아들과 조카를 종권(일시적으로 상주하는 일을 중지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시켜 고기를 먹게 했다. 생일 제사를 지내면 힘에 벅차 기제사도 못 지내게 된다고 당시의 풍속을 바꾸었다. 제물을 많이 담으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쌓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모 합설 제사는 가례에 어긋난다며 단설(제삿날 그 분 제물만 차림)하게 하였다. 초상에는 문상객에게 술 대신 차를 내놓게 하였으며, 제사 음식의 음복은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제관만 먹게 하였다. 아무리 죽은 부모가 좋아한 음식이라도 살아있을 때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아들이 따르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제물만을 쓰게 하였으며, 진설도에 있더라도 철이 아니면 다 구해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철에 맞는 과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2) 뛰어난 인격자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학봉집'의 '퇴계선생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 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 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는 아랫사람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공손한 말씨를 사용하고 예의를 지켰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을 지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일상생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과 행동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하여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경(敬)을 실천한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3) 멋과 풍류를 즐기는 생활
퇴계는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연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가 살던 집에는 항상 솔·대나무·매화·국화 등을 심어 벗삼고 즐겼다.
50세 때 한서암을 짓고 뜰에다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오이를 심어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듬해는 계상서당으로 옮겨서도 방당을 만들고 연을 심고, 솔·대·매화·국화·연(송·죽·매·국·연)을 다섯 벗으로 삼아,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이루어 어울리는 흥취를 즐겼다.
61세 봄에는 도산서당 동쪽에 절우사의 단을 쌓고, 솔·대·매화·국화를 심어 즐겼다. 특히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서울에 두고 온 매화분을 손자 안도편에 부쳐 배에 싣고 왔을 때 이를 기뻐하여 시를 읊기도 하는 등 매화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매화분 하나를 마주하고 주고 받으며 화답하는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매화와 퇴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경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퇴계는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 산사를 찾아 독서하거나 산을 찾아 노닐기를 즐겨 했다. 그는 독서하는 것과 산에서 노니는 것이 서로 같은 점을 들어 독서와 산놀이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가장 즐겨 찾아 노닐었던 산은 청량산으로 도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그 이름이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그 자신 소백산을 돌아보고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의 유산록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서문이나 발문을 지어 주면서, 산수의 유람이 갖는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있다.(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소백산을 유람하고 봉우리와 대의 이름을 고쳐지었으며, 돌아와 '소백산유산록'을 지었으며, 홍응길의 '금강산유산록'에 서문을 지었고, 남명 조식의'두류산유산록'에 후식을 지었다.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단양팔경을 정했으며 죽계구곡도 정했다고 전해진다.
산놀이뿐만 아니라 물놀이도 그의 운치있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을 모시고 분천에 가서 뱃놀이를 하였고,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제자 황준량과 함께 귀담에서 뱃놀이하였다. 퇴계가 가장 즐겨 뱃놀이하던 곳은 도산서원 앞에 있는 탁영담이다. 62세 때에는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해로부터 8갑주(480년) 되는 날이기에 퇴계도 여러 제자들과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전날 큰 비가 내려 이루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했다.
47세 무렵에는 7대(臺)와 하동(霞洞)에서부터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11승경을 명명하고 시를 짓는 풍류를 즐겼다.
퇴계 이황의 생애
퇴계이황의 생애
1501년(1세) |
11월 25일 예안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
1506년(6세) |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다. |
1512년(12세) |
숙부 이우(호는 송재)에게 『논어』를 수학. 사서삼경을 순차적으로 익히다. |
1514년(14세) |
도연명의 시를 애독하고 그 사람됨을 사모하다. |
1517년(17세) |
모재 김안국을 뵙다. → 당시 관찰사 였던 모재는 순행 중에 온혜를 들렀다가 이해·이황 형제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학자금을 주고서 격려하였다. ○ 학업에 열중하다가 병을 얻었다. |
1518년(18세) |
「野塘」시를 짓다. ○ 안동 향교에서 학업을 닦았다. 농암 이현보가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고을의 선비를 모아 교육하였다. |
1519년(19세) |
『성리대전』을 읽다. → 뒷날 "이 책의 「태극도설」은 내가 계발된 출발점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
1520년(20세) |
『주역』을 읽다. →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 열중하여 평생의 지병을 얻었다. |
1523년(23세) |
성균관에 입학하다. ○ 『심경』을 처음으로 읽다. → "내가 심경을 보고나서야 심학의 연원과 심법의 정미함을 알게 되었다. 초학자가 공부할 것으로 이 책보다 긴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
1527년(27세) |
생원시에 합격하다. |
1528년(28세) |
진사시에 합격하다. |
1533년(33세) |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 가을, 고향 가는 길에 여주를 지나면서 모재 김안국을 방문하다. 만년에 "모재를 뵙고 비로서 정인군자(正人君子)의 말씀을 들었다"라고 회고하였다. ○ 봉계를 지나면서 야은 길재의 옛터를 찾았다. 「길선생의 사당을 지나며(過吉先生閭)」를 지었다. |
1534년(34세) |
3월, 과거에 급제하다. ○ 4월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 10월, 문신들의 정시(廷試)에서 수석하여, 승문원 저작에 올랐고, 12월에는 박사로 승진하였다. |
1535년(35세) |
6월, 여주목사 이순과 「황극경내편」과「참동계」의 수련법을 토론하다. |
1541년(41세) |
3월,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다. → 독서당은 호당(湖堂)이라고도 부르는데,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곳이다. 문신관료를 엄선하여 글을 읽혔다. 선발된 사람은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
1542년(42세) |
2월,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 옥당에 숙직하면서 지은 매화시가 있는데,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매화를 좋아하여 평생 200수가 넘는 매화시를 지었다. ○ 경주로 돌아가는 회재 이언적을 전송하였다. ○ 8월, 예안으로 귀향하는 농암 이현보를 전송하였다. |
1543년(43세) |
『주자전서』를 읽다. → 이 책을 교정할 것을 계청하고, 교감을 담당하였다. |
1545년(45세) |
4월, 하서 김인후가 내방하였다. ○ 10월, 홍문관 전한으로 있던 중 권신 이기의 요청으로 삭탈 당하였다가 12월에 직첩을 도로 받았다. |
1546년(46세) |
2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 왔다. ○ 11월 양진암을 퇴계 동쪽 바위 위에 지었다. ○ 시내의 이름은 본래 토계였으나, 퇴계로 고치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
1547년(47세) |
4월, 월란암에 머물면서 『심경』을 읽다. |
1548년(48세) |
정월, 외직을 요청하여 단양군수로 임명되었다. ○ 10월,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
1549년(49세) |
정월, 백운동서원에서 선비들과 강학하였다. ○ 농암 이현보의 「어부사」에 발문을 썼다. ○ 12월,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하다. → 나라에서 서적과 노비를 내려 주고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보내주었다.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
1552년(52세) |
4월,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어 조정에 나갔다. 7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
1553년(53세) |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개정하다. → 정지운의 호는 추만, 김안국 김정국 형제의 제자이다. |
1554년(54세) |
3월, 「역범제도병」의 발문을 지었다. ○ 포은 정몽주의 제문을 지었다. ○ 『연평문답』의 발문을 썼다. →『연평문답』은 주자가 그 스승 이동(호는 연평)에게 배운 것을 정리한 책이다. ○ 「계몽도서절요」의 발문을 썼다. |
1556년(56세) |
6월,『주자서절요』를 완성하다. → 주자의 방대한 글에서 학문에 관계된 것, 실용에 절실한 것을 골랐다. |
1557년(57세) |
7월,『계몽전의』를 완성하다. → 주자의 『역학계몽』에서 난해처와 의문처를 풀이한 것이다. |
1558년(58세) |
5월, 『자성록』을 완성하다. → 벗들과 주고 받은 편지 중에 골라 모아 반성의 자료로 삼은 것이다. ○ 6월, 제자들에게 인심도심설과 선기옥형을 강의하였다. |
1559년(59세) |
2월, 「이산서원기」를 짓다. → 이 서원은 영주의 선비들이 세웠는데, 그가 서원의 기문과 원규를 지어 보냈다. 「이산서원원규」는 뒷날 영남지역 서원의 강령이 되었다. ○ 9월, 『고경중마방』을 완성하다. → 선현의 글 가운데 마음 수양에 긴요한 글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 12월, 『송계원명이학통록』을 편찬하다. → 주자서와 어류, 실기, 일통지 등을 참고로 하여 송말, 원, 명 시대 유학자들의 전기를 정리한 책이다. |
1560년(60세) |
○ 11월, 고봉 기대승의 편지에 회답하여 사단칠정을 변론하다. → 이에 앞서 고봉 기대승이 「천명도설」을 보고서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나눈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1559년 기대승의 편지로부터 시작하여 8년 간에 걸쳐 사단칠정에 대하여 집중적인 토론을 벌여, 우리나라의 유학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았다. |
1561년(61세) |
가을, 도산서당이 완공되다. → 이로부터 도옹이라는 호를 썼다. 이곳에서 독서하고 사색하며, 찾아오는 문인들과 강학하였다. |
1562년(62세) |
3월, 『이락연원록』의 발문을 짓다. |
1564년(64세) |
2월 「무이구곡도」의 발문을 짓다. ○ 9월, 정암 조광조의 행장을 짓다. ○ 「심무체용변」을 짓다. → 이 글은 연방 이구의 '마음에는 체용이 없다'는 글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다. |
1565년(65세) |
2월, 「서원십영」시를 짓다. ○ 3월, 「도산십이곡」의 발문을 쓰다. → 12곡의 전6곡은 언지(言志)이고 후6곡은 언학(言學)이다. ○ 「인심도심도」를 개정하였다. |
1566년(66세) |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가지 않았다. → 현인를 초빙하고자 하는 명종 임금의 뜻이 간절하였으나, 그가 사양하고 나가지 않자, 도산서당을 그림 으로 그리고, 여성군 송인을 시켜 이황이 지은「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적어 병풍을 만들어 가까이 두 고 보았다고 한다. → 손님을 사절하고, 문인들에게 『심경』과 『참동계』 또는 주자서를 강의하였다. ○ 「심경후론」을 짓다. → 『심경』은 남송의 유학자 진덕수의 저작이다. 이황은 이 책을 존중하여 사자서, 『근사록』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 「전습록논변」을 짓다. → 왕수인의 학설이 식자들 간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양명설의 잘못을 반박하였다. ○ 10월, 회재 이언적의 행장을 짓다. |
1568년(68세) |
○ 3월, 「역동서원기」를 짓다. → 서원의 이름을 정하고 편액 글씨를 썼다. ○ 「무진육조소」를 지어 올리다. → 새 임금 선조에게 치자의 도리와 당면 시무를 건의한 것이다. ○ 9월 이후,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이천의 「사물잠」과『논어』『주역』, 장횡거의 「서명」과 『소학』을 강의하였다. ○ 11월, 임금에게 「성학십도」를 지어 올리다. → "나의 보국은 이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이것을 병풍으로 만들어 두라고 하였다. |
1569년(69세) |
정월, 이조판서에 임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 3월, 판중추부사를 제수받고서 물러가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임금에게 『대학』의 8강령과 「심통성정도」의 요지를 설명하였다. ○ 도산으로 돌아와 지냈다. 도산 매화와 주고받은 시가 있다. |
1570년(70세) |
5월, 제자들과 역동서원에 모여 강론하였다. ○ 도산서당에서 제자들과 『역학계몽』을 강론하였다. ○ 7월, 역동서원에서 문인들과 『심경』을 강론하였다. ○ 8월, 역동서원이 낙성되었다. 위패의 칭호와 제의, 서원규약 등을 정하였다. ○ 10월, 기대승에게 글을 보내, 「심통성정」을 논하였다. ○ 11월, 기대승의 편지에 회답하여 격물치지설을 고쳤다. ○ 12월 8일, 세상을 떠나다. → 12월 17일, 대궐에 부고가 올라가자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상장례에 대신의 예를 쓰도록 하였다. →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보내에 조문을 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
1572년 |
11월, 영주의 선비들이 위패를 이산서원(영주, 이산면 소재)에 모셨다. |
1573년 |
3월, 임금이 예조에 전교하기를, "이황의 저서와 문자는 후세에 전할 만 하다"라 하고 교서관에서 인출하라고 명하였다. ○ 여름 도산서원이 낙성되다. → 나라에서 편액을 내려 보냈다. |
1574년 |
2월,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였다. → 여강서원(안동 월곡면 소재)에서도 위패를 봉안하였다. ○ 12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문의 뜻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이고 순의 뜻은 '중정순수(中正純粹)'이다. |
1600년 |
5월, 퇴계선생문집 초간본 31책이 간행되었다. |
1610년 |
4월, 종묘의 선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 9월,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하다. |
1792년 |
3월 24일, 정조가 각신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치제하였다. → 이 때, 서원에서 과거를 보았는데, 이 때 응시자가 만여명이 되고, 뒤에 시사단을 세워 이 사실을 기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