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65호. 건축면적 396.69㎡, 연면적 945.45㎡. 이화장(梨花莊)·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건국활동 3대 명소의 하나로 불린다. 서대문경교장이라고도 한다. 광화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이다.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브래태니커 사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 1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사적 염원을 기반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民國(민국)을 표방하면서 수립된 독립운동의 총 지도기관이다. 임시정부는 27년간 상해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지역을 옮겨다니며 1945년 일제가 패망할때까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긴 세월을 풍찬노숙하면서 국권회복과 항일전선을 이끌었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1919년에 3.1독립선언의 뜻을 모아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세웠음을 분명히 밝히고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하면서 '대한민국'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와함게 年號(년호)도 그대로 계승되는데 대한민국 관보 1호에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이라 명시한것에서 잘 알수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이름인 '대한민국'과 이를 운영하는 정부와 국회라는 조직, 민주공화정이란 정치체제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국가의 상징물인 國歌와 國旗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태극기는 1882년부터 사용되었지만, 법령으로 처음 제정한것은 1942년 임시정부였으며 1949년 10월, 일부만 고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역시 1940년 임시정부에서 승인한 이후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나라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태극기와 애국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
<임시정부 27년간 이동경로....>

임시정부와 김구 주석의 환국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되자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정부의 지원하에 귀국을 서두르면서 '임시정부가 최단기간내에 환국하여 각계대표들과 과도정권을 세우고, 그 정권에서 정식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와 김규식등 임시정부 요인은 27년만에 그리던 조국땅을 밟게 되지만 연합국으로부터 정부로서 승인받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귀국후 경교장에 입주하게 되었으며 그해 12월 3일, 환국후 최초로 임시정부의 국무회의가 경교장에서 개최되었고 이후 경교장은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서거할때까지 임시정부 활동의 중심지이자 주석 김구의 최후 거처가 된다.
竹添莊 (죽첨장)
1938년 금광업자 최창학의 저택으로 건립되었다.
경교장은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 소유의 별장으로 1938년 일본식 건물 (지하1층, 지상2층)로 지어졌으며, 완공시에는 竹添莊 (죽첨장)이라 하였다. 해방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京橋 (경교 : 경구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김구가 암살당한 이후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 및 임시의료진이 주둔하기도 하였으며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 고려병원을 신축, 개원함에 따라 삼성재단(삼성생명)에서 매입하여 병원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1970년대 들어 건물의 보존을 주장하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에는 한발 더 나아가 문화재로 지정해야한다는 시민사회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함에 따라 당초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으나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동 건물의 중요성 등이 재평가되면서 2005년 6월 13일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이후 병원측과 서울시가 건물복원에 합의하고 2010년 병원이 이전함에 따라 2013년 2월까지 복원및 내부 전시공사를 거쳐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 것이다.
복원된 京橋莊 (경교장)
<경교장 전면... 뒷쪽에 강북삼성병원 본관이 보인다.>

<모형으로 본 건축당시 전경.... 지하1층, 지상2층의 일본식 건물이다.>


복원후에는 지하층을 각종 전시실로, 1층과 2층은 예전대로 복원해놓았다.
입구에는 자원봉사자가 안내를 하고 있으며 실내화로 갈아신고 들어가게끔 되어 있다. (문화해설은 아직 없는듯 하다.)
원래 1층 중앙현관 좌우측 작은방은 좌측이 비서방, 우측이 운전기사대기실이며 현관을 들어서면 중앙홀이 있고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응접실과 화장실, 욕실, 이발실등 부속실이 있으며 홀 전면으로는 썬룸으로 되어있고, 그 오른쪽으로 귀빈식당과 선전부 활동공간으로 되어 있다.
<1층 구조.... 응접실과 귀빈식당, 선전부 공간이 주를 이룬다.>

<귀빈식당...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의 공식만찬이 개최되었고, 김구 서거후 빈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귀빈식당 밖, 2층으로 올라가는 공간에는 2개의 수납공간이 있다.
왼쪽은 지하 부엌에서 음식이 올라오는 덤웨이터(DumbWaiter), 오른쪽은 올라온 음식을 귀빈식당으로 넣는 곳이다.>

<선전부 활동공간... 임시정부의 홍보 및 언론관계를 담당했던 선전부가 일하던 공간이다.>

<1층 응접실, 현관 왼쪽에 있으며 1945년 12월 3일 환국이후 최초의 국무회의가 열린곳이다.>

2층은 김구 주석의 침실과 거실(업무실), 임시정부 요원들 숙소 2칸, 2층 응접실과 비서 공간이다.
1949년 6월 26일, 이곳 2층 업무실 책상에 앉아서 김구 주석은 안두희의 총탄에 서거하였으며 지금도 뒷쪽 유리창에는 2발의 총탄자국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보는이들로 하여금 숙연하게 해준다. 방문객들이 꼭 둘러보는 곳이다.
<2층 김구주석 침실 (바로 앞 작은 공간), 업무 거실 (그 다음 큰 상이 놓인 넓은 공간), 책상(창문쪽 좁은 복도에...)모습>

<저격당시 김구 주석은 창문가 좁은 복도공간에 놓인 이 책상에 앉아서 안두희에게 총을 맞았다고 한다.
의자 뒷쪽 창문에 2발의 총탄 흔적이 보인다.>

<총탄자국이 생생한 2층 유리창....>

<김구 주석의 거실겸 업무공간... 왼쪽이 침실, 오른쪽 창문쪽 좁은 복도에 저격당시 앉았던 책상이 있다.>

<임시정부 요인들 숙소 1... 김구 주석 공간과 붙어있다.>

<임시정부 요인들 숙소 2... 숙소 1에 이어진다.>

<책상이 놓여있던 좁은 복도 뒷쪽으로는 1층 현관 베란다 위로 나갈수 있는 출입구가 있다.>

<1층 현관 베란다 위... 이곳에서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거나 만세를 부르거나 했을것이다.>

<2층 응접실(서재).... 왼쪽부터 김구 주석 거실, 임정요인들 숙소 1, 2, 그리고 응접실 순으로 평면배치되어 있다.
임시정부 환국후 김구 주석과 국내정당대표들과 회담 및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2층 응접실에는 당시 벽난로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白凡 金九 (백범 김구)
인조반정 공신 구안동김씨 김자점의 후손으로, 효종때 북벌을 청나라에 밀고한 김자점의 역모사건등으로 그 일가는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는바 김구의 11대조 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경기도 개성을 거쳐 황해도 해주로 숨어들어 생존하였다.
그후 김구는 과거를 포기하고 지내다가 동학에 잠시 빠지기도 했으나 동학군이 패전하게 되자 숨어지내다가 만주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며 귀국길에 일본군 중위를 때려죽인뒤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고 탈옥하여 쌍계사, 마곡사등을 거쳐 출가함. 그후 의병활동과 계몽운동, 일제와의 투쟁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어 형을 살았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이후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던중 해방이 되어 임시정부 대표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입국이 거부되자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려하려는데 대하여 그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굳은 의지를 천명하며 남한만의 선거를 준비하는 이승만계열과도 결별하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한 시도를 추진했다.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5월5일 서울에 돌아왔다. 그후에도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며 통일조국을 주장하였으나 5월10일에는 남한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이 점차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오늘날 김구에 대한 평가는 論者에 따라 크게 엇갈리는 것이 사실이며, 특히 그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반대와 김일성과의 회담을 위하여 평양행을 택한것에 대한 비난이 대표적인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평가에 대하여 필자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며 다만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해방후 환국하여 나름대로 조국을 일하다가 암살자의 흉탄에 서거한것을 애통해하는 바이다.
<김구의 서명이 된 태극기...>

<北行을 만류하는 이들에게 민주.통일.자주의 독립된 조국건설을 주장하는 김구 (1948. 4. 19일)>

<당시 지하층은 보일러실과 창고, 식당등이었으며 김구주석은 반대자들을 피하여 보일러실 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피격후 장례준비 모습... 사람들이 오열하고 있다.>

<김구 血依(혈의)... 등록문화재 제 439호>

<김구 데드마스크....

<김구 遺墨(유묵) 愼其獨(신기독)... 서거당시 책상위에 있던 유묵 '홀로 있을대도 삼가한다'는 뜻>

<김구 遺墨(유묵) 思無邪(사무사)... 서거당시 책상위에 있던 유묵 '생각함에 그릇됨이 없다'는 뜻>

<김구 語錄....>

<文化强國論으로 불리우는 김구의 연설문......>

< 계 속 >
ㅇ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cafe.daum.net/sm-academy
ㅇ 사랑하는 내인생 : http://cafe.daum.net/people4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