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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잡품(雜品)
한 겹 두 겹 파초의 껍질을 벗기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듯이
사람을 육계(六界)로 분석하면
텅 빈 것이 그와 같습니다.
이 까닭으로 부처님은 바로
모든 법은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으니
단지 육계를 이름하여 법이라고 할 뿐
판단해 보면 진실로 무아(無我)입니다.
아(我)와 무아(無我) 두 뜻을
여실(如實)하게 검토하니 얻을 것이 없으며
그 때문에 여래께서는
아(我)와 무아(無我)의 두 극단을 부정하셨습니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말하는 것은
실답지 않은 허망한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둘은 서로 의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둘은 여실(如實)하게 없습니다.
여실하게 세간을 살피면
실재[實]도 초월하고 또한 허망도 초월하지만,
세간은 실재(實在)에 의지하고 있기에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에 떨어집니다.
만약 법이 두루 여여하지 않으면
어떻게 부처님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세계의 유한[有邊] 및 무한[無邊]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함[有二]과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음[無二]을.
과거의 부처님은 무량(無量)하며
현재와 미래에도 그 숫자를 초월하니
숫자를 넘어선 중생의 치우침[邊]은
삼세(三世)에 부처님을 말미암아 드러납니다.
세간은 늘어나는 원인이 없으니
이런 즈음[際]은 세간을 잡아서 드러나고
세간은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것인데
어찌 부처님께서 세계의 끝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법이 이와 같이 심오하기 때문에
범부에게 비밀스런 뜻을 말하지 않았으며
세간은 환화(幻化)와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부처님의 감로의 가르침입니다.
비유하면 허깨비 모습처럼
발생과 소멸은 오히려 볼 수 있으나
환화의 모습과 소멸의
진실한 뜻을 살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간은 환화와 같으며
발생과 소멸도 그렇게 볼 수 있으며
세간과 생멸은
진실한 뜻을 잡으면 모두 허망합니다.
허깨비의 상(像)은 좇아 온 바가 없고
가는 곳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의 마음을 미혹해서
실유(實有)를 말미암아 머물지 않네.
세간의 체(體)는 삼세를 초월하는데
만약 그러하다면 세간이 어찌 실재하며
누가 있음과 없음을 말하겠습니까.
있음과 없음은 실다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사구(四句)에 의하여
세간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있음과 없음을 말미암은 것은 모두 허망하나
이 허망함은 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부정한 모습[不淨相]이며
지혜의 경계를 거칠게 증득하기에
항상 자주 자주 보이는 것도
오히려 마음에 들어와 머물지 못합니다.
하물며 정법(正法)은 미세하고
아주 깊어 의지하는 토대[依底]가 없어서
산란한 마음으로는 증득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쉽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처님은 처음 성도(成道)하셨을 때
설법을 포기하고 열반하시려 하셨으니
이 정법(正法)이 너무나 깊어서
이해하기 어려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을 올바로 요달하지 못하면
총명하지 못한 사람을 해치게 되며
이에 집착하여 삿된 견해에 떨어지는 것은
더러운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보다 못합니다.
사람들이 법(法)의 식별이 분명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높이고 법을 경시하기 때문에
비방을 일으키고 자신을 훼손시켜
머리를 밑으로 하며 지옥에 떨어집니다.
비유하자면 진귀한 음식처럼
지나치게 복용하면 위해(危害)를 당하고
만약 이치대로 음식을 복용하면
장수와 힘과 강인함과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으니,
만약 치우치게 정법을 이해하면
괴로움을 당하는 것 역시 그와 같으며
이치대로 잘 이해하면
즐거움과 보리(菩提)에 감응(感應)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정법에 대해
비방과 삿된 견해를 버리며
바른 지혜 가운데 작용[用]을 일으키니
이 때문에 뜻대로 일을 이룹니다.
이 법을 요달하지 못함으로 해서
사람들은 길이 아견(我見)을 일으키고
이로 인하여 세 가지 업을 지으며
다음에 선과 악의 도(道)가 일어납니다.
나아가 아직 법을 증득하지 못하면
아견(我見)을 잘 없애서 멸하지 못하므로
항상 공경하며 지계ㆍ보시ㆍ인욕 등에 대해
정근(正勤)을 일으켜야 합니다.
일을 함에 있어 법을 우선으로 삼고
아울러 법을 중간으로 하고 나중으로 하면
이른바 허망하지 않은 진리는
현재와 미래에 그대는 빠지지 않습니다.
법으로 인하여 좋은 이름을 나타내고
죽음에 임하더라도 기꺼이 두려움이 없으며
내생(來生)에 부귀와 즐거움을 받을 것이니
그러므로 항상 법을 행해야 합니다.
오직 법만이 바른 다스림이며
법으로 인하여 천하가 사랑하게 되고
만약 군주가 백성에 감응(感應)하여 사랑한다면
현재와 미래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법이 아닌 것으로 다스리고 교화하면
주인이 신하로부터 염오(厭惡)를 받으며
세간의 증오로 인하여
현재나 미래에 환희가 없습니다.
왕의 법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바로 대난악도(大難惡道)이니,
나쁜 지혜로 삿된 명(命)을 논하는 것을
어찌 바르다고 설하겠습니까?
만약 사람이 오로지 다른 이를 속인다면
어찌 바른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 가운데
항상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만약 원망으로 근심이 생겼다면
과실을 버리고 그 덕을 취하십시오.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채우면
바로 원망과 근심과 번뇌가 있게 됩니다.
보시와 자애스러운 말,
유익한 행동[利行]과 협동에 근거해
원하옵건대 그대는 세간을 섭수하고
이로 인하여 정법을 널리 펴시오.
왕이여, 마치 한 마디 진실한 말이
백성들에게 굳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처럼 고귀한 분의 헛된 말은
다른 이에게 편안한 믿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진실한 생각을 일으켜 어긋남이 없다면
순조롭게 흐르듯 능히 남을 이롭게 하니
이를 진실한 말[實語]이라 이름하며
이와 반대되는 것을 거짓말[妄語]이라고 합니다.
재물 하나를 시여[捨]함이 만약 밝다면
왕의 과실을 잘 은폐시킬 수는 있지만
그처럼 군주가 재물에 인색하면
왕의 뭇 덕을 해칠 것입니다.
만약 왕이 여러 악에 대해 적정(寂靜)하다면
공덕이 깊어 사람들의 사랑이 두터울 것이고
이로 인하여 가르침을 밝히는 왕이 될 것이니,
그러므로 일이 마땅히 적정해야 합니다.
지혜로 인해 왕은 잘 동요하지 않고
스스로 요달하여 다른 이를 믿지 않으므로
영원히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진리와 시여와 적정과 지혜에 의하여
왕은 바로 네 가지 착함[四善]을 갖추게 되니
이 네 가지 덕의 정법(正法)은
인천(人天)이 찬탄하는 것입니다.
능히 조복해서 청정을 설하며
지혜와 자비와 무구(無垢)로 인하여
항상 지혜 있는 사람과 함께 모인다면
왕의 법과 지혜는 생장(生長)합니다.
좋은 말하는 사람을 얻기 어렵지만
제대로 듣고 말하는 사람도 얻기 어려우며
세 번째로 이 훌륭한 가르침을
신속히 행하는 사람이 가장 수승합니다.
만약 애착할 것이 아님을
이미 알았다면 빨리 수행해야 하니,
마치 약맛이 비록 쓸지라도
차도가 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장수와 무병과 왕위는
항상 무상(無常)하다고 생각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싫고 두려운 생각을 일으키며
나중에는 전심전력으로 법을 행해야 합니다.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보면
죽음은 악견의 괴로움으로부터 오니
지혜 있는 사람은 현재 즐겁다 하더라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한 생각도 두려움 없음을 보더라도
나중에 두렵게 보거나
만약 한 생각이라도 마음이 안주하면
어찌 나중에 두렵지 않겠습니까?
술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일에 손해를 입고 체력이 감소하며
또한 어리석음 때문에 잘못된 일을 행하게 되니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술을 끊어야 합니다.
도박 등의 놀이는
탐냄과 성냄과 근심과 아첨을 일으키며
속임과 거짓말과 욕의 원인이므로
항상 멀리 여의어야 합니다.
음행을 즐기는 과실(過失)은
여인의 몸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나
여인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면
실제 한 터럭의 깨끗함도 없습니다.
여인의 입은 타액의 용기이며
치아와 혀의 때는 고약한 냄새가 나고
코의 역한 냄새는 콧물에서 비롯된 것이며
눈은 눈물 따위의 의지처입니다.
배는 똥과 오줌과 창자의 그릇이며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뼈와 살의 모임입니다.
어리석은 이는 싫어해야 할 것에 미혹되기에
여인의 몸을 탐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성기[根門]는 가장 냄새가 역하며
이는 몸을 싫어하게 하는 원인이니,
여기에 만약 애착을 일으키면
어떤 연(緣)으로 여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면 똥오줌의 용기(容器)를
돼지가 좋아하여 그 속에서 놀듯이
몸의 청정치 못한 문(門)에서
많은 욕심으로 유희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이 문을 세우는 까닭은
몸의 더러움을 버리기 위해서이니,
어리석은 이는 삿된 견해에 애착하며
자신의 좋은 이로움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대는 스스로 보아야 합니다.
똥오줌 등의 깨끗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 부분들의 모임을 몸이라 이름하는데,
그대는 어째서 애착을 일으키는 겁니까?
혈액과 정액이 생장의 씨[生種]가 되며
흘러들어가 생장(生長)합니다.
만약 몸의 깨끗하지 않음을 안다면
무슨 의미로 괴로움에 애착을 일으킵니까?
더러움의 덩어리를 증오해야 하면
역겨운 습기가 뱃속에 들어 있으니
만약 처(處)7)에 누우면
여인의 몸을 애착해 집착할 것입니다.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늙었거나 어린 소녀거나
여인의 몸은 다 깨끗하지 않은데
그대는 어째서 처(處)에 욕망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설령 똥 덩어리가 좋은 색(色)이고
부드럽고 매끄러워 자태가 반듯하여도
애착을 일으켜서는 안 되듯이
여인의 몸에 애착을 갖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속에서 냄새가 나서 매우 깨끗하지 못하고
겉의 피부가 장기를 덮고 있으니,
이 시신의 종성(種性)을
어찌 보고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피부의 깨끗하지 않음은 옷과 같아서
잠시 풀어헤쳐서 세탁할 수 없는데
어떻게 때 투성이의 피부를
일시에 깨끗이 닦을 수 있겠습니까?
꽃병에 더러운 똥을 가득 채우고
겉을 장식하여도 그대는 싫듯이
이 몸은 더러움의 씨[種]로 가득 차 있으니
어찌 그대가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싫어한다면
어찌 여인의 몸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향과 꽃장식[華鬘]과 음식은
본래 깨끗하나 잘 오염됩니다.
그대여 자신이나 남이 똑같이
더러운 똥을 싫어하듯이
자기와 남의 깨끗하지 않은 몸을
어찌 그대가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여인의 몸이 깨끗하지 못하듯이
자신의 더러움 역시 그러하며
이 까닭으로 욕망을 여읜 사람은
안팎에서 서로 칭송받습니다.
아홉 구멍[九門]에서 깨끗하지 못한 것이 흐르니
스스로 증득하여 스스로 씻어야 하며
만약 깨끗하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하면
애욕의 논란을 짓게 될 것입니다.
아주 깨끗하지 못한 몸에 대해
드물 정도로 아주 무지(無知)하고
부끄러움이 없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면
어떤 방법으로 그대를 이롭게 하겠습니까.
뭇 중생들이 이로 인하여
그 마음이 무명(無明)에 덮여서
티끌의 욕심 때문에 원한을 짓는 것은
개가 똥을 갖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가려운 곳을 긁으면 시원하지만
가려운 곳이 없다면 가장 편안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욕망이 있어도 즐겁지만
욕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즐겁습니다.
만약 그대가 이 뜻을 생각한다면
욕망의 여읨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생각으로 인해 욕망을 경시하고자 하므로
음행을 즐기는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사냥으로 인해 단명[短壽]의 과보를 감응해서
두려움과 괴로움의 무거운 번뇌에 쫓기며
미래에 반드시 이것을 받을 것이니
그러므로 굳건히 자비를 행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그에게 극도의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비유하자면 더러운 똥이 몸을 오염시키고
독이 나쁜 뱀의 몸에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만약 피안에 이르면
중생은 안락을 얻습니다.
비유하자면 여름날 큰 구름을 보고
농부[田夫]가 비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쁜 법을 버리고
결정코 마음을 닦고 착함을 행하면
무상보리(無上菩提)의 결과를
나와 남 모두 얻을 것입니다.
이 보리의 근본은
수미산[山王]처럼 견고한 마음과
시방의 자비를 인하는 것과
둘에 의지함 없는 지혜입니다.
대왕이여, 진리를 잘 경청하시오.
이 원인을 내가 이제 말하겠습니다.
32상(相)에 감응한다면
그대의 몸을 능히 장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탑[支提]과 성스럽고 존귀한 사람을
공양하여 늘 가까이 모시면
손과 발에 보상륜(寶相輪) 있는
전륜왕(轉輪王)이 장차 될 것입니다.
손발이 부드럽고 유연하며
몸이 크고 일곱 곳에 융기[高]가 생겨나고
맛있는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풍족하게 보시함으로써
몸은 원만하고 반듯하며
손가락과 발과 발뒤꿈치가 둥글고 깁니다.
사형수를 자비로써 구제하면
그대는 장차 장수의 과보를 받습니다.
대왕이여, 굳건히 법을 지켜
청정한 곳에 영원히 머무소서.
이로 인해 다리가 평화로운 곳에 안주하여
장차 보살이 될 것입니다.
보시와 자애스러운 말과
유익한 행동과 협동을 행하면
이로 말미암아 지강밀(指綱密)8)이 되며
손발이 80문(文)입니다.
발뒤꿈치[脚趺]가 높아 사랑스럽고
고수머리[族毛]의 모양이 위로 향하는 것은
오래도록 본디 받아 지닌 법을
버리거나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경과 보시와 수용과
명처(明處)와 솜씨[工巧]로 인해
사슴왕의 살점[膞]은
총명한 큰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어떤 물건을 요구하면
나는 빨리 은혜를 베풉니다.
이로 인해 손바닥이 크고
세간 교화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가깝고 사랑하는 자와 만약 이별했다면
보살은 화합해 모이게 하나니,
이에 음장상(陰藏相)9)에 감응하여
항상 부끄러움(羞)의 옷을 입습니다.
항상 건물[樓殿]과 좌구[具]를 보시할 때
섬세하고 유연하고 사랑스런 색(色)으로 하니
이 때문에 하늘[天]의 색신(色身)의
매끄럽고 빛나고 미묘함에 감응합니다.
무상(無上)의 지킴[護]을 베풀고
이치대로 존귀한 장로를 따르면
한 구멍 한 터럭[一孔一毛]에
백호(白毫)로 장엄된 얼굴의 과보를 받습니다.
항상 착하고 자애스러운 말을 하고
또한 바른 가르침에 잘 따르면
상반신은 마치 사자처럼
목이 원만하여 조가비에 비유할 만합니다.
병든 이를 돌봐주고 약을 주며
또한 다른 사람을 기르고 보호[養護]하면
이로 인해 겨드랑이 밑이 원만해지고
천 맥(脈)과 별도로 백 가지 맛을 얻습니다.
자기와 남의 법사(法事)에 대해
항상 능히 으뜸이 되면
정수리[頂骨]는 울니사(鬱尼沙)10)가
뺨[橫竪頰]은 닉구(匿瞿)가 됩니다.
오랫동안 솜씨 있게 말하고
진실하고 예쁘며 부드럽고 좋은 말을 함으로써
여덟 상호와 범천의 음성과
넓은 혀를 얻습니다.
이미 일의 실리(實利)을 알고
자주 남을 위해 말하면
사자와 같은 상호를 얻어
얼굴은 바야흐로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업신여기지 않으며
바른 이치를 수순해 행하면
비유하자면 마치 진주처럼
치아는 하얗고 가지런해집니다.
진실하여 이간질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런 말을 자주 익힘으로 말미암아
40개의 치아를 갖추게 되니
가지런하고 윤이 나며 견고하고 촘촘하여 깨끗합니다.
중생을 봄이 부드러워서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에
눈동자는 푸르고 부드러우며 또렷하고
눈꺼풀은 소왕[牛王]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간략하게 말하노니
위대한 사람의 상호 및 원인이
전륜왕과 보살의
아름다운 장식임을 그대는 알아야 합니다.
따르는 상(相)은 80개로서
자비로부터 흘러 발생하니
대왕이여, 많은 설명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비록 전륜성왕들이 다
이 상호를 갖추었지만
청정함과 지혜로움과 사랑스러움은
결코 여래에 미치지 못합니다.
보살의 착한 마음 가운데
일념(一念) 속의 일분(一分)으로부터
전륜성왕의 상호(相好)의 원인이 생기지만
도저히 그와 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만억 겁 동안
착한 근기[善根]를 닦아 생장(生長)하여도
부처님 한 터럭의 모습에는
이 원인도 감응하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과 전륜왕의
모습 가운데 일부는 비슷하나
비유하자면 반딧불과 해처럼
빛이 약간 비슷할 뿐입니다.
각주
7) 산스크리트어 a_yatana의 의역(意譯). 세계가 형성 전개되는 토대나 장소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12처(處)를 말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우리들의 몸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8) 상호(相好) 중의 하나로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 것.
9) 음장상(陰藏相)은 부처님 상호 가운데 하나이다. 마치 말의 성기처럼 부처님의 성기도 안에 숨겨져 있음을 말한다.
10) 산스크리트어 sni_sa의 음사. 육계(肉髻), 즉 부처님의 정수리가 상투 모양의 모습을 이룬 것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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