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앙코르 기고문
군 간부에서 대학 강사가 된 김상우(60)씨
6.25때 아버지는 강원도 원주에서 경기도 평택으로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피난을 오셔 어디 의지할 곳 없이 무척 가난하게 사셨다.
옛날의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이 대 가족이서 우리 식구도 5남 1녀이 었고 또 요즈음 부모님들처럼 당신은 못 배웠지만 자식들은 가르쳐야 한다는 그런 신념보다는 남에게 빚을 지며 까지 학교를 보낸다는 것은 아마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내 위의 형들은 모두 중학교까지만 진학하여야만 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번 내 차례에 어린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을 하였는지 고등학교를 보내달라고 졸랐고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후 당시에는 한참 태권도를 배우는 학생들이 많아 태권도 도장에 다니게 되었다.
체육관 맨 앞 태극기 아래에 걸려진 4글자, 문무겸비(文武兼備)!
태권도 도장의 관훈(館訓)이다. 그렇다. 남자로서 무술(운동)도 잘 하여야겠지만 학문(공부)에도 열중하여야 한다는 신념이 그때부터 생겼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돈을 벌려고 서울로 올라가 취직을 하였고 야간에는 계속 운동을 할 참으로 태권도 도장에 나가 운동을 하였는데 마침 어느 대학의 학군 후보생(ROTC)들과 같이 운동하며 대화를 나누다가 그들을 보고 불현듯 대학진학의 열망이 다시 생겼다.
역시 빨리 사회에 나와 취업하려고 2년제 대학인 인천의 인하공전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 군 입영시가 되었는데 74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여파인지 새로운 장교 과정이 생겨 75년에 응시를 하여 1년여 과정의 훈련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을 하였다.
군에서도 자기계발을 위하여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여 장교영어반 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고 3사관학교 근무 시에는 군 위탁(야간) 과정에 합격하여 영남대학교에 진학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학교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91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주간 위탁과정에 응시하여 38세의 늦은 나이에 젊은 학생들과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한 교수님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요즘 입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들어오는 현역보다는 재수생이 많다는데 어디 재수생 손 한번 들어보세요, 다음 3수생, 다음 4수생.., ” 하다가 내가 끝내 손을 들지 않자 내 쪽으로 오더니 “좀 되신 것 같은데요...,” 해서 “예, 18수 됩니다” 하였더니 그때서야 학생들이 내 쪽을 바라보며 “와” 웃는 학생도 있었고 또 몇 몇 학생은 놀란 듯 웅성이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학부모 자격으로 온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나이도 나이지만 오리엔테이션때 모두 자기소개를 하여 학생들끼리는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참석을 하지 않아 처음 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대학 시위가 한창이던 때였다.
당시 대학생이 시위 도중 숨졌고 각 대학 학생들이 분신하면서 매주 토요일에는 격렬한 시위가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열리는 등 학생들의 시위가 극을 향해 달리는 시점이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 누군가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여러 사람들이 엉킨 아수라장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1991년 총리임명 이후 마지막 강의를 위해 외대를 찾은 정원식씨에 대한 외대생들의 이른바 밀가루, 계란 투척 사건이 그것이었다.
또한 우리 과에서도 어느 학생이 화염병을 던지다 화상을 입게 되어 병원에 입원을 하였는데 학생들이 조를 짜서 병실을 지킨다며 나에게도 요구를 하였지만 나는 단호히 거부를 하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정신교육(?)을 하였다.
“나는 시위를 한 학생에게 동조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떠한 이념도 좋지만 우선 나라가 우선 아니냐, 월남을 봐라 그들은 나라가 망하여 어떻게 되었냐? ....,” 로 시작하여 그 들과 맞장 토론을 하였다.
70년대 당시 월남은 미국이라는 강력한 우방의 막강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유를 빙자한 방종이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연일 반전·반정부 시위에 학생들과 일반 시민이 가세하면서 극심한 사회 혼란과 법치가 땅에 떨어져 결국 패망하고 나라를 빼앗겼다.
아마 젊은 학생들은 군대가 국가의 보루(堡壘)인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요즈음도 국민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언행과 행동을 일삼는 사회의 저명인사들을 보면 오랜 군 생활을 한 나로서 한심 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뭏튼 나는 학생들을 향하여 국가의 장래를 위해 또 여러분을 위해 학생의 본분에만 전념하라고 일갈하였다.
30 여년 군 생활을 하던 중 강원도 학군제휴대학 초빙교수 모집을 하여 전역을 앞당기고 응시를 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졸업을 하면 육군 부사관으로 입대하는 학생들인데 내 기대와는 영 딴판이었다. 군대 교육기관에서 수업 전 모두 자리에 앉아 교관을 기다리는 분위기는 차치하고도 학생들은 지각하는 것은 일수이고 수업태도도 불량하여 몇 가지를 원칙으로 삼았다.
첫째 수업시간에 지각하지 마라, 둘째 수업에 열중한다. 셋째 아무리 추워도 더워도 온, 냉방기 작동을 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 학생은 몇 없고 늦는 학생이 다반수여서 할 수없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였다. 부득한 사정으로 늦는 경우에는 미리 전화를 하라고 하고 수업시간 정각이 되면 일부러 교실 문을 닫게 하였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뭐 이런 교수가 있나하며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앞으로 시간을 생명으로 하는 군에 학생들이 미리 적응하도록 하였다. 나중에 보니 나처럼 하는 교수님도 계셨다.
또 수업시간에 어느 학생이 턱을 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다가가보면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학교에 수업준비도 하지 않고 슬리퍼를 신고 몸만 덜렁덜렁 오는 학생 등 등 학생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않은 학생도 많았다.
특히 교실에 비해 학생 수는 많은데 잡담과 온냉방 장비소리가 어울려 수업에 지장을 줄 정도여서 장비 사용을 자제하게 하였다. (실제 봄, 가을 수업시간이기에 그렇게 춥고 덥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몇 학생은 이런 조치에 불평을 하였지만 겨울 해병대 극기 훈련을 다녀와서는 군 선배인 나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오히려 고마워하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앞으로 나처럼 30여년의 군 생활을 할 후배들에게 군복만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견디어 사전 군생활의 각오를 하도록 하였는데 미리 그런 의도를 알아차린 학생들이 대견스러웠다.
또 나는 성적이 나쁜 학생은 학점 F를 주고 그들만 따로 모아 다시 교육을 하여 일정 수준에 오른 후에 성적을 주었다. 가르친 교수 역시 일말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는데 지금도 보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08년 사회의 비정규직법에 의해 3년여 끝에 교수직을 그만두게 되고 학생들 곁을 떠나야만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이 후에 MBTI 일반강사, 사회복지사 2급, 학교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상담사, 심리상담사, 학습상담사 자격 등 16개를 획득하였고 특히 강사기법과정을 공부하는 등 나름대로 자기계발에 힘썼다.
군 생활 마지막 근무지 강원도 인제의 육군과학화훈련단 부근의 마을에 정착하여 한국軍상담학회 교수요원으로 각 부대 상담강의와 또 군의 그린캠프에 자원봉사 교육을 하면서 그들이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의 한 일원이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한 올해부터 한림성심대학 정보통신 네트워크 학과 (인제 산업체 대학) 강사로 임용되어 후학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바쁜 와중에도 야간에 틈을 내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나도 여러분과 같은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롤 모델 역할을 하며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 역시 합참(合參)근무 시 50세 나이에 아주대 정보통신대학원에서 C⁴I ( Command, Control, Communication, Computer & Intelligence ; 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정보)를 전공한 덕분이다.
이곳 강원도 시골에 살면서 도시에 비해 낙후된 마을을 주민들을 위해 그간 배운 지식과 경험한 나의 지혜를 나누고자 강원도 금빛 봉사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다.
앞으로 많은 이들에게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정진하기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필요한 곳에 가서 그들을 돕고 싶고 또 나의 소중한 경험담을 들려주며 용기를 주고 싶다.
끝으로 들려주고 싶은 말은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정신이다.
특히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요지는 어떠한 안 되는 일을 억지로 꾸며서하라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고, 하면 이루어지니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라는 긍정적 의미이다.
마치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계속 떨어져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훌륭하게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다.
또한 더 나가서는 사회를 위해 나눔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앞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며 살고자 다짐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멋진 강의...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