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琠 |
環 |
珊 |
璜 |
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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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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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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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壽長 字 彭祖 백수장 자는 팽조
己丑 (1469년 ~1543 ) 74세 終
戊午武科 1498년
丁卯重試 1507 무관에게 십 년마다 한 번씩 관품을 올리던 과거
屢中官至 합격하여
嘉善大夫 종2품 문무관
訓鍊院都正 정삼품 당상관이 되었다
中宗朝 중종조 (1506년 반정 )
秉忠奮義 忠奮義 충과의로 정권을 잡으니
靖國功臣 정국공신(靖國功臣)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 데 공을 세운 훈호
貞海君 정해군이 되었다(백수장을 말함)
資憲大夫 정2품 하의 문무관
工曹判書(공조판서) 가되었다.으뜸 벼슬. 품계는 정이품
賜綠邑 사록 으로 "읍"
水原, 仁川, 溫陽, 牙山,四州公 甞戒胤 수원,인천,온양,아산 을 받았으며
中樞公 중추적으로 공을 세웠다
曰 말 하기를
汝湏惕 그대여
念效死國社無忝勿 나라를 위해 한 목숨밭치며
以肝人門下以 나의 간장을 문하에 밭히노라
墜家聲 소리쳤다
中樞公之除宰守也 중추적 공을세운것이다 그때 나이 25세다
書以 글로써 말하노니
淸白忠孝勿忘於 청백충효를 잊지마라
心貧虐奢侈莫行 가난을삼키고 사치를 멀리 하였다
乎
身十六字而 신체 16 자 작은키로
送之至於 가문 을 빛 냈다
一家親戚諄諄 일가친척을 도우고
常戒 타이르며
期近不沙懈焉 가까운사람도 멀리 있는 사람도 한결같이 대 하였다
癸卯 參月一日卒 1543년 3월1일 졸
1469년(예종 1)∼1543년(중종 38). 조선 중기 무신.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안양면(安壤面) 동촌(東村)에서 태어났다.
1498년(연산군 4)에 무과(武科)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영흥판관(永興判官)으로 임명된 후, 진도군수 훈련원도정 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을 폐위 시키고 연산군의 동생 중종 을 즉위시킨 중종반정(中宗反正) 때의 활약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정해군(貞海君)에 봉해졌다.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민란(民亂)이 이어지자, 그를 진도군수 에 제수(除授)하였는데, 이때 그는 도의 민란을 안정시키고 질서를 회복 시켰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는 관헌을 보내는 예우를 해 주었다.
후손 백진항(白鎭恒)의 『계서유고(溪西遺稿)』 권4 『가사별록(家史別錄)』에는 선조들의 교서(敎書), 시(詩), 서간(書簡), 유언(遺言), 유서(遺書), 제문(祭文) 등을 기록해 두었는데, 이곳에 그의 유사 「정해군선조(휘수장)유사(貞海君先祖(諱壽長)遺事)」가 실려 있고 그 뒤에 그가 쓴 「중종대왕제문(中宗大王祭文)」과 그에 대한 제문 「제공제문(諸公祭文)」 등의 글들이 첨부되어 있다.
유물로는 1507년(중종 1) 2월에 임금이 내려준 교서 「백수장정국공신록훈교서(白壽長靖國功臣錄勳敎書)」가 남아 있다.
장재도(壯載島)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남쪽에 있는 섬이다. 인공방조제로 육지와 연결된다. 『해동지도』(장흥)에는 장재도(壯載島)라고 표시되어 있다. 장재(장자,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장재도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종 때에 정국공신 정해군(貞海君) 백수장(白壽長)이 은퇴하여 서재를 짓고 살았다. 1957년에 둑을 쌓아 육지와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