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공 상서우복야 연우 전
忠肅公 尙書右僕射 延祐 傳
충숙공(忠肅公) 장연우(張延祐)의 생년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그의 부친(父親)의 이름은 유(儒)이고 신라 말에 태어나 오월(吳越)에 유학한 후 광종(光宗) 즉위 초, 즉 서기 950년 경에 귀국하였다는 사실을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충숙공(忠肅公)의 출생(出生)은 950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충숙공(忠肅公)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유(儒)로부터 학문(學問)과 시문(詩文)을 전수받고 광종(光宗) 때에 실시된 과거(科擧)에 급제한 후 경종(景宗), 성종(成宗), 목종(穆宗), 현종(顯宗)의 다섯 임금을 섬겼다.
충숙공은 나라에 봉사하는 동안 굳건한 충성심(忠誠心)과 탁월한 행정능력(行政能力)으로 이름을 떨쳤다.
충숙공(忠肅公)의 노년(老年) 때의 국왕(國王)은 현종(顯宗)인데 그는 장군(將軍)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시해(弑害)하고 옹립(擁立)한 국왕이다.
이 때문에 조정(朝廷)의 실권은 강조(康兆) 일당(一黨)이 차지하고 국왕(國王)의 지지(支持) 기반은 매우 미약(微弱)하여 정국(政局)은 불안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단지 조정(朝廷) 원로(元老)인 충숙공(忠肅公)과 황보유의(皇甫兪義) 등 몇몇 대신(大臣)들이 강조(康兆)의 세력을 견제할 정도였다.
강조 일당은 비록 군사권(軍事權)과 행정권(行政權)을 장악했다 할지라도 학식(學識)과 덕망(德望)에서 조정(朝廷)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던 공(公)을 경시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국가의 군권(軍權)을 장악할 수 있는 병부시랑(兵部侍郞)과 방위총사령부의 부사령관인 부사(副使)로 공(公)을 중용할 수 밖에 없었다.
강조(康兆)의 정변(政變)은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즉 고려를 호시탐탐 노리던 거란국(契丹國)은 1010년 11월, 전격적으로 고려에 침공(侵攻)을 개시하였다.
이때, 강조(康兆)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이현운(李玄雲)은 부사(副使)가 되어 전선(戰線)을 방어하였고, 공(公)은 병부(兵部) 시랑(侍郞) 겸 방위총사령부의 부사(副使)가 되어 수도 외곽 방어와 병참물자의 보급에 책임을 지게 되었다.
북쪽 전투(戰鬪)에서는 강조(康兆)와 이현운(李玄雲)이 초전(初戰)에 대패하고 고려(高麗) 방어진은 급격히 붕괴되었다. 기세가 오른 거란군(契丹軍)은 서경(西京)을 점령하고, 곧이어 수도(首都)인 개경(開京)을 향해 쳐들어 왔다.
대혼란이 왕궁(王宮)에도 들이닥치자 군왕(君王)을 호종(扈從)하던 대신(大臣)들은 도망하기에 급급했으며 전쟁의 혼란을 틈탄 난동자(亂動者)들은 임금의 신변을 위협하기도 했다.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위기에 보인 공(公)의 충성심(忠誠心)은 기리 남을 만하다. 조정(朝廷)의 모든 대신(大臣)들이 국왕(國王)을 버리고 도주에 급급할 때 공(公)을 비롯한 몇 명의 대신(大臣)들이 끝까지 남아 국왕(國王)을 호위(護衛)하고 남은 소수(小數)의 휘하 병력(兵力)을 수습하여 임시 행재소(幸在所)인 광주(廣州)까지 임금을 무사히 호종(扈從)하였다.
그러나 전선(戰線)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위험을 느낀 왕(王)은 광주(廣州)→안성(安城)→천안(天安)→공주(公州)를 거처 논산(論山)→삼례(參禮)→태인(泰仁)→정읍(井邑)→흥덕(興德)→고창(高敞)→영광(靈光)→함평(咸平)을 지나 나주(羅州)를 향했다. 남행(南行)의 중간 기착지(寄着地)였던 흥덕(興德)은 공(公)의 고향(故鄕)인데, 평소에 공(公)을 흠모하던 백성들은 불안(不安)과 공포(恐怖)에 사로 잡혀 있던 국왕(國王)과 조정(朝廷) 대신(大臣)들을 따뜻하게 환대(歡待)하였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국왕(國王) 일행이 나주(羅州)에 도착한 뒤 거란(契丹) 사신(使臣)과의 접견을 통해 적군(敵軍)이 퇴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국왕(國王)은 곧 환궁(還宮)을 서두르고 나주(羅州)를 출발하여 전주(全州), 공주(公州), 청주(淸州)를 거쳐 2월 23일 개경(開京)의 수창궁(壽昌宮)에 도착하였다.
환궁(還宮)한 국왕(國王)과 대신(大臣)들은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국정(國政)을 쇄신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작업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의 인사(人事)였다. 공(公)은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제수되고 이어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에 승급(昇級)되었다.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재직하던 때에 공(公)은 지방행정(地方行政) 개편(改編)을 착수하였고 이 결과 중앙의 행정력(行政力)이 비로소 군․현(郡․縣)까지 직접 미칠 수 있는 실질적(實質的)이고 제도적(制度的)인 장치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공(公)은 영업전(永業田)의 재편(再編) 작업에 착수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계속된 전란(戰亂)과 누적된 녹봉(祿俸)으로 재정(財政)에 커다란 압박을 받고 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업전(永業田) 개편을 서둘렀다.
그러나 영업전(永業田) 몰수에 불만을 품은 무장(武將) 김훈(金訓), 최질(崔質) 등이 반란을 일으켜 국왕(國王)을 위협하고, 장연우(張延祐),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을 유배(流配)보내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조정(朝廷)의 실권이 그들 무인(武人)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나 수개월 후 국왕(國王)과 이자림(李子琳)의 지략(智略)으로 그들을 진압할 수 있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공(公)은 현종(顯宗) 6년 여름,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11월 23일(1015년) 뜻하지 않게 하늘의 부름을 받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증(贈)하였고, 그의 유해(遺骸)는 고향 흥덕(興德) 태봉산(台峯山) 아래 선영(先塋)에 모셔졌다.
충숙공(忠肅公) 장연우(張延祐)께서는 만고(萬古)에 길이 빛날 충신(忠臣)의 상징이고, 후손(後孫)들에게 깊은 교훈(敎訓)과 감명(感銘)을 주고 있는 위대한 선조(先祖) 중의 한 분이다.
을해(乙亥, 1995년) 후손 한우(漢祐) 근기(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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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연우 묘소
전북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동촌 선산
시제일 : 매년 음력 3월 20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