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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개혁신학 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고목사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서 작성배경
1. 서 론
칼빈은 루터가 붙여놓은 종교개혁의 불씨를 전 유럽, 또는 전 세계로 퍼뜨려놓은 개혁전통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칼빈의 개혁운동과 사상의 중심에는 제네바시가 있었고, 그곳에서 그의 개혁적 교리와 교회정치가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제네바 사역 초기에 칼빈은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신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신앙에 대한 불타오르는 의지는 제네바 시 전체를 철저한 개혁적 토대위에 세워놓게 만들었다.
본 소고는 칼빈이 제네바 시에서 개혁을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시민들의 개혁 신앙을 굳건히 해줄 수 있는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서의 저술과 그 신조에 대한 실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2. 칼빈의 제네바 사역과 요리문답서의 배경
프랑스의 개혁자 칼빈이 제네바에 간 것은 본인이 가고자 했던 스트라스부르그로의 길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막혔기 때문에 제네바를 거쳐 우회하고자 했다. 당시 제네바에는 기욤 파렐이 개혁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제네바에 기독교강요의 저자 칼빈이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함께 개혁을 이끌고자 요청하게 된다. 칼빈은 당시 25세의 젊은 신학도에 불과했는데 파렐은 기독교강요를 통해 젊은 개혁자의 잠재력을 본 것이다.1)
그러나 칼빈은 자신의 무능력과 할 일들을 열거하면서 완강히 거절했다. 파렐은 칼빈이 학문을 핑계대고 있으며, 만약 이 일을 거절 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저주하실 것이라는 극단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제네바를 이끌 개혁파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은 파렐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결국 이 무서운 호령 앞에서 칼빈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역사적인 제네바 사역이 시작된다.
1536년 8월 파렐의 요청에 의해 칼빈이 제네바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 도시는 무엇 하나 정비된 것이 없었다.2) 파렐의 치열한 투쟁으로 교황의 추종자들이 쫓겨나기는 하였지만, 개혁파 도시와 교회로서 법과 질서가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며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칼빈의 말은 이 당시 제네바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내가 이 교회에 처음 당도하였을 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이 설교는 하였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우상을 찾아내어서 불태우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거기엔 다른 개혁 운동이란 없었다. 모든 것이 혼돈 상태에 놓여 있었다.”3)
그렇다고 해서 당장 모든 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웬일인지 그는 제네바에 도착하면서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마도 새로운 환경에서 개혁이라는 사명을 실제적으로 실현해야한다는 부담감과 불안감 등이 작용했으리라.
칼빈이 처음 시작한 일은 파렐의 지도아래서 제네바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4) 그리고 시급한 일은 시의회로부터 칼빈이 인정부터 받는 것이었다. 파렐은 새로운 동료 칼빈을 위해 시민권과 사역비 책정을 시의회에 제안했는데, 일년 후인 1537년 2월 13일에야 그 제안이 통과된 것으로 보아 제네바는 젊은 이방인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칼빈의 생활이 어떠했으리라 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칼빈은 이것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열심히 설교에 전념하였고, 오히려 이런 점이 사람들을 감동하게 되었고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또한 칼빈은 제네바의 당면과제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중요한 제안을 내놓는 등의 두각을 나타내었고, 1536년 11월에 목사회의 정식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칼빈은 남다른 실천력으로 제네바 사회가 철저한 개혁신앙의 틀을 유지하도록 노력을 경주하였다. 단순히 학문적이고 이론적 지식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으로 제네바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 목회자였던 것이다. 그의 이런 개혁적 추진력의 근원은 바로 신앙에 있었다. 어떤 이들은 칼빈의 제네바 개혁이 성공한데는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지만, 그의 제네바 생활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칼빈을 발견하게 된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내의 질서를 먼저 세울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제네바 시 전체가 안정을 찾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개혁의 시작과 완성은 교회와 신앙의 회복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의회를 향한 칼빈의 강력한 요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앙고백서’였다.
1536년 11월 발표한 이 신앙고백서는 총 21개의 주제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칼빈은 이 신앙고백서에 모든 제네바 시민이 서명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아직 지지 기반이 미약한 상태에서 강력한 개혁의 추진은 또 다른 반대를 몰고 왔고, 결국 부결되고 말았다. 청년 목회자의 개혁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537년 1월에는 ‘교회조직과 예배를 위한 지침서’를 내놓았는데, 여기에서 제네바 교회는 매월 성찬을 거행할 것과 또한 교회의 권징이 철저히 시행되기를 원하였고, 이런 임무가 바로 교회의 책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칼빈이 얼마나 교회의 순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지침서는 시의회에서 성찬에 대해서 일 년에 네 차례만 시행하기로 하는 등의 약간의 수정 후에 통과되었다. 또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내용을 요약한 ‘요리문답서(신앙교육요강과 신앙고백서)’5)를 제안하였는데, 칼빈은 자신의 개혁 신학적 이상 아래서 철저히 제네바 교회를 권징과 교육으로 정화시키고 순결을 유지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음을 보여준다.
1537년 2월 제네바 시민들은 모두 칼빈의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에 서명하고 그 체계대로 생활해야 함이 요구되어졌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신앙교육의 의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경한 추진은 시의회의 반발을 샀고, 결국 일 년 뒤 제네바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추방 된 칼빈이 3년간의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머무르고 있는 동안 제네바는 칼빈의 필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었고, 일 년여의 구애 끝에 칼빈은 제네바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칼빈은 두 번째 제네바 사역 동안 첫 번째 기간 동안 다하지 못했던 교회 개혁을 본격적으로 감행하게 되었고, 제네바 개혁운동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다하게 된다.
교회의 순결을 항상 강조하고 중요시 여겼던 칼빈은 이런 교회의 순결은 자녀 교육에서 부터 구체적으로 시행되어야 함을 주장하여서 자녀들에게 ‘신앙개요’를 가르칠 것을 요구하였다.
1542년 어린이를 위한 요리문답서를 최초로 만들어 매주일 마다 가르치게 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돌아온 후, 나는 교리문답을 서둘러 마련하였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을 약속하지 않는 다면 이 직분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즉 교리문답과 규율의 지지가 그것이다.”6)
칼빈이 얼마나 교리교육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며, 또한 칼빈의 제네바에서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요리문답서’와 ‘신앙고백’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이제 제네바를 점점 장악해 가기 시작했다. 맥닐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것은 “세상적인 잔꾀를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기초에 뿌리박은 원칙에 타협 없이 헌신하고 또한 오랜 세월동안 그 원칙들을 낙심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옹호한 결과이다.”7)
3. 칼빈의 제네바 교회의 요리문답서
제네바 교회와 칼빈이 작성한 신조, 교리문답은 매우 중요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철저히 신조와 교리문답을 통해서 교회 개혁을 실천해 갔으며, 그것은 교회의 순결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강요의 영문 번역자인 포드 배틀즈에 따르면 기독교강요의 처음 의도는 요리문답서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칼빈이 요리문답서의 중요성을 항상 인지하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가 있다.8)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 있어서 칼빈 시대의 교회의 개혁과 순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현대 상황에 맞는 신조와 요리문답의 개발과 더불어 교리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이 사용했던 신조와 요리문답서를 살펴 봄으로 현대교회가 개혁신앙의 전통을 어떤 방식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얻기를 바란다.
(1) 제네바 신앙고백서(1536)9)
앞에서 지적했듯이 칼빈은 교회 내의 질서와 순결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만인이 하나의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헤셀링크에 따르면, 칼빈은 질서 있는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 가지는 ‘신앙고백’과 ‘교회헌법’과 ‘교리강요’라고 생각했다.10)
그 첫 번째를 신앙고백서로 보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신앙고백의 목적은 복음을 따르는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보다는 교황의 왕국에 속하는 것을 더 사모하는 자들을 남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제네바 교회는 아직까지 교황파와 개혁파간에 잠재해 있는 싸움이 남아있기 때문에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모든 신자가 확실한 선언을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신앙고백이 단순히 이 둘 사이를 구별 짓는 것뿐만 아니라, 신앙고백을 통해 지상에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중요한 지표가 되며, 그러므로 교회와 신자는 거룩성과 순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웬델도 같은 접근을 한다. “긍정적인 면에서 볼 때 교회의 임무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구성원들의 점진적인 성화에 기여하는 곳이며, 또한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교회의 임무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축출하는 권리를 갖는 것이다.”11)
칼빈의 제네바를 향한 이 신앙고백서는 당시 상황에선 매우 강력한 요구였다. 아직 개혁파가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고백서는 유보되고 말았다.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제네바의 모든 시민들과 거주자들과 이 지방의 모든 권속들이 반드시 지키며 준행하기로 서약해야만 한다.”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21개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다.
1) 성경대로 살 것과
2)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며,
3) 우리는 자연인으로서 철저히 무능력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하나님 의 의로우심에 순종해야 하며,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에서도 우리가 보듯이 칼빈 신학에서 중요한 강조점 중에 하나가 기도인데, 이 고백서뿐만 아니라 뒤에 다룰 모든 요리문답서, 그리고 그의 기독교강요에도 기도에 관한 조항은 빠지지 않고 들어있다. 칼빈은 말한다. “기도가 만일 가슴의 내적 감동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증한 것이요 환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기도를 분명히 이해하고 드려야만 한다.”(13)
또한 칼빈은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성지순례, 수도원제도, 음식의 차별, 결혼의 금지, 고해성사 등을 사탄의 타락한 교리로 치부하고 저주했다. 18)
칼빈이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한 권징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출교’ 조항을 만들었다. 그 이유는 “사악한 자들이 우리 주님의 선하심과 명예를 더럽히는 저주받을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자만심에 빠질지라도 그들이 회개하도록 돌아서게 할 것이다.”19) 그 이외에도 사역자들과 국가의 권세 자들에게 충성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2) 첫 번째 요리문답서
(원제 :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서, 1537)12)
불과 몇 개월 전에 만든 신앙고백서가 시의회에 의해 아쉽게 거부되어졌지만 칼빈은 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조’와 ‘요리문답’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몇 개월 되지 않은 1537년 1월에 다시 1536년판 신앙고백서를 훨씬 더 보강하여 ‘신앙 교육 요강 및 신앙고백’이라는 요리문답서를 내놓게 된다.
이 요리문답서는 1536년판 기독교 강요를 요약한 것처럼 보여 진다. 칼빈이 여기에 중점을 둔 것은 신자가 꾸준한 양육과 교육을 통할 때 신앙을 바르게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보다 훨씬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 요리문답서를 작성했다.
여기에도 ‘신앙고백’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데, 칼빈의 교회개혁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지를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에 속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신앙고백을 공적으로 선언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요리문답서는 카롤리가 로잔에서 칼빈과 그의 동료들을 아리안주의자라고 혐의를 씌운 것에 대하여 공적으로 변증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13)
1537년 2월에 모든 제네바 시민들이 이 요리문답서에 서명하도록 규범이 정해졌다. 칼빈은 이런 신앙교육을 통해서 교회의 일체감과 통일성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신앙고백의 통일을 바탕으로 칼빈은 복잡한 사상들이 뒤섞여 혼미를 거듭하고 있던 제네바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개혁자 칼빈의 노력과 열정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던 일부 극보수주의자 들과 더 과격한 개혁을 원하는 진보주의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내외적으로 반발을 사게 되었다.”14)
그리해서 이것은 목회현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칼빈은 불과 1년 후인 1538년 4월 제네바를 떠나게 만드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이 첫 번째 요리문답서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너무 어려운 용어로 쓰여 졌고, 주제별로 되어 때문에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칼빈이 제네바에서 2기 사역을 시작한 이후 곧바로 더 쉽고 이해하기 쉽게 수정을 하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1542년판 어린이를 위한 요리문답서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칼빈주의 학자들에게 이 첫 번째 요리문답서의 가치가 재인식되고 있는데, 칼빈 신학, 특히 기독교강요의 위대한 요약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15) 헤셀링크는 방대한 기독교 강요를 다 읽을 만한 시간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칼빈의 사상을 소개하는 간략하고, 명확하며, 간결한 입문서라고 말한다. 폴 푸만은 이것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더 빠르고 기본적이고, 명확한 핵심을 제공하기 때문에 칼빈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16) 기독교강요의 영문판 출간을 위한 편집장을 맡았던 맥닐은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이 요리문답서는 “압축미와 단순성에 있어 걸작이며 칼빈의 사상 이해를 위한 최상의 열쇠이다.”17)
이 첫 번째 요리문답서는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루터의 요리문답서의 기본적 골격을 가지고 온 것으로, ‘율법’ 조항 다음에 ‘믿음’ 조항, 그 다음에 ‘기도’와 ‘성례’에 대한 조항이 오는 점이 비슷하다. 그러나 칼빈은 이 요리문답서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해서 국가의 질서로 끝을 맺고 있는 점은 루터와 전혀 다르다. 그 내용은 기독교 강요의 초판과 마찬가지로 율법(십계명), 신앙(사도신경), 기도, 성례, 교회와 국가의 질서 순으로 되어있다.
이 요리문답서의 신학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첫 번째 조항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들은 이 덧없고 짧은 인생이 영원불멸에 대한 명상 이외의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강조는 매우 중요하고 다른 개혁자들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이 주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선택과 예정’이 간략하게 설명되고 있음은 매우 독특한 점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이 점진적으로 개발되는 과정에 있으며 기독교강요 최종판으로 오면서 이 교리에 대한 개발이 완성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3) 두 번째 요리문답서
(원제 : 제네바교회의 요리문답, 1542)18)
칼빈은 1541년 제네바 사역자들의 간청에 못 이겨 제네바로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자마자 그가 착수했던 것은 바로 제네바 시민들이 자신이 만든 신앙고백서와 예배 모범을 받아들이고 그 내용대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에 만들어놓은 요리문답서가 너무 어렵고 실제 목회현장에서 사용하기가 어려웠음을 깨닫고, 스트라스버그에 체류하는 동안 만났던 부처가 사용하고 있던 ‘간략한 요리문답서’의 영향을 받아 1537년판과는 다른 방식의 문답식의 요리문답서를 발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요리문답서는 가장 위대한 개혁주의 신조라 일컬어지는 우시누스(Ursinus)와 올레비아누스(Olevianus)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1563)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또한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개혁주의 신조의 모범이 되었다.19)
이 요리문답서는 제네바 교회에서 매우 비중 있고 엄격한 실천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요리문답 교육에 불응할 때는 징벌이 가해질 정도였다. 어린이들은 일정기간 동안 요리문답 교육을 받고 공회 앞에서 증명을 한 후에 입교가 허락되었다. 이는 칼빈이 신앙 교육과 교회의 순수성 유지에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 요리문답서는 프랑스 내에 있는 개혁교회들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었으며, 칼빈 신학의 보급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0) “각 교회에서는 매주일 이를 교재로 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다. 1594년 몽또방에서 열린 개혁교회 총회에서는 교회 내에서 칼빈의 요리문답서 이외의 또 다른 요리문답서 작성을 금지키시는 결의안이 채택되기도 했다.”21)
그러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가 나오면서 칼빈의 것은 권위를 잃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칼빈의 요리문답서가 물론 첫 번째 것보다 쉽게 쓰여 있다 할지라도 지나치게 교의학적인 색채를 띠고 있기 때문에 목회현장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 두 번째 요리문답서는 첫 번째 요리문답서와 내용면에서는 거의 일치하고 있으나 다른 점은 중세의 전통적인 교리 교육서처럼 질문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목사 : 인생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
아이 :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요리문답서의 서술식 문장을 질문과 대답으로 바꾼 것이다. 이 요리문답서의 신학적 특징은 선택과 예정에 관한 조항이 생략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주제가 어린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교회와 국가의 질서에 관한 것도 생략되어 있다.
4. 결 론(의의와 평가)
이상으로 우리는 칼빈이 제네바 사역을 시작하면서 도입했던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서의 작성 배경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칼빈은 제네바 시와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교육으로 말미암은 철저한 개혁정신의 함양에 있었다. 그가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동안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교육에 철저한 노력을 했던 것은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세속화의 위협과 마주 서 있는 급박한 상황이다. 교회가 교회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며 스스로도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를 철두철미하게 깨달아야 한다. 세상은 갈수록 강력한 도구로 신자들의 믿음을 흔들고 있기에 우리 또한 신앙의 토대위에서 사상 교육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것은 어린이와 성인들을 위한 교리 교육에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세계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교회적 상황에 맞는 신조를
개발하여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 한국 교회, 특히 보수적 교회들은 뒷짐을 지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교회는 순결을 잃어가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글쓴 이 / 채계관
< 참고문헌 >
1) Barth, Karl, The Theology of John Calvin, trans.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 Eerdmans, 1995.
2) Battles, Ford, “서문”,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서울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88.
3) Calvin, John, .구약성경주석 - 시편, vol. 7., 서울 : 성서교재간행사, 1980.
4) ___________ , .깔뱅의 요리문답. 한인수역, 서울 : 도서출판 경건, 1995.
5) Hesselink, John, Calvin's First Catechism : A Commentary, Louisville :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6) McNeil, John T.,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정성구, 양낙흥 공역, 서울 : 크리스챤 다이제스
트, 1990.
7) Wendel, Francois, .칼빈의 신학 서론.,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서울 : 기독교문화협
회,1992.
8)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서울 : 이레서원, 2001.
< 미주 >
1)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 시편, vol. 7.,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0) p. 162.
2) 칼빈이 제네바에 처음 도착한 것은 1536년 7월이지만, 정식으로 사역을 시작한 것은 8
월부터이다. 왜냐하면 바젤로 다시 돌아가서 자신의 일을 마무리 하고 다시 돌아왔기 때문
이다.
3) Opera IX:891-892,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서울: 이레서원, 2001) p. 210에
서 재인용.
4) 지위의 명칭은 제네바 교회의 “성경봉독자”였다. 이것은 친구들에게 보낸 서신의 첫머리
에 칼빈 자신이 사용하였다.
5) 자세한 내용은 3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6) Opera, IX:894.
7) 죤 T.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정성구, 양낙흥 공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0), p. 213.
8) 포드 배틀즈,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역자 서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88), p. 43.
9) 국문 전문(全文)은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pp. 228-236을 보라.
10)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 A Commentar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p. 39.
11) 프랑시스 웬델, .칼빈의 신학 서론.,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92), p. 60.
12) 국문 전문(全文)은 한인수역 .깔뱅의 요리문답. (서울: 도서출판 경건, 1995)을 보라.
13) Karl Barth, The Theology of John Calvin, trans. by Geoffrey W. Bromiley,(Grand Rapids: Eerdmans, 1995), p. 271.
14)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p. 249.
15) John Hesselink, Calvin's First Catechism : A Commentary, p. 41.
16) Ibid.
17) 죤 T.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p. 162.
18) 국문 전문(全文)은 한인수역 .깔뱅의 요리문답. (서울: 도서출판 경건, 1995)을 보라.
19) Karl Barth, The Theology of John Calvin, p. 271.
20) 프랑시스 웬델, .칼빈의 신학 서론., p. 92.
21) 한인수, op. cit., 서문.
첫댓글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